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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탐승지(金剛探勝誌)
1924년 4월 7일 ~ 5월12일
이호발 (李鎬發)(1897-1930)
이 금강탐승지는 34세에 돌아가신 내 할아버지가 28세 되던 해인 1924년 금강산 등을 도보로 탐방한 35일간의 일기형식의 노정기다
4월7일 영해 오촌을 출발하여 울진. 삼척.강릉 등 동해의 관동팔경 및 금강산의 제경을 두루 관람하고 5월2일부터는 강원도를 떠나 서울을 관람한 후 대전을 거쳐 예천. 안동의 사부촌을 심방하고 나서 귀가하고 있다. 당시 마을의 풍속,인심,지방의 변모되는 광경을 자세히 소개하여 일제강점기의 동해안지방의 변모되어 가는 과정과 금강산의 당시 모습을 간접적으로나마 알려주고 있다.
하루 평균 6.7십리를 도보로 관유하면서 하루도 빠짐없이 필연으로 소상히 기술하고 있다.
당시 강원도 지방은 거의 태산준령으로서 개발이 이루어지지 않아 그 험준한 지역을 보행으로 가야했으며, 여행에 상당한 기간을 필요로 하였다. 또 당시는 경제력이 극히 빈곤하여 노자를 마련하기가 어려워 금강산 탐방이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유복자로 태어난 내 아버지가 한을 담아 내 할아버지의 유고를 모아 얼마 전 펴낸 유고집 중 일부로 본래 한문으로 되어있으나 국역하여 출판하여 각 대학 도서관 등에 기증함.
내 아버지 생전 못본 아버지에 대한 한과 효성으로 은퇴후 매달려 번역하고 주 달고, 각사람 찾아 번역교정받고, 해제와 추천서 받고 한자원문 사진 다른 유고 등 붙여 심혈을 기울여 출간. 1000권 만들어 각지의 도서관 등에 기증하고도 많이 남아 할아버지 널리 알릴 마음에 줄 사람께 나눠주라는데 그냥 간단히 내가 처음 워드치던 거 있어 올림.
출판된 책의 내용은 많이 교정되고 주 등이 많이 붙어 이와 상당히 다르나 그건 내가 워드치지 않아 없어, 컴퓨터에 올리기 힘들어 초기의 워드만 여기 올림.
금강탐승지(金剛探勝誌)
천하(天下)에는 이름난 명승지(名勝地)가 많으나 해동(海東)의 금강산(金剛山)은 산수(山水)의 경치가 절특(絶特)하게 아름다워서 가히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으니 옛날부터 중국인(中國人)도 일생에 한 번 고려국(高麗國) 금강산(金剛山)을 구경하기를 간절(懇切)히 원한다는 시(詩)가 있는데 하물며 이 나라에 태어난 몸으로 어찌 한 번 완상(玩賞)치 않을 수 있으랴.
이에 수우(壽寓)(영해 원구)의 목여(穆汝 : 본관은 무안 박씨(務安 朴氏)이고 자(字)는 목여(穆汝), 호(號)는 수촌(水村)인데 향리(鄕里)에서 큰 선비로 알려진 박종문 공의 자)와 더불어 울적(鬱積)한 심회(心懷)를 깨끗이 터진(攄盡)할 것을 약속하고 어른의 허락(許諾)을 얻은 다음 가벼운 옷차림과 지팡이와 마혜(麻鞋 : 대마(大麻) 노끈으로 삼아서 만든 미투리 신발) 차림으로 길을 나서니 때는 갑자(甲子)년 (1924) 모춘(暮春) 사월(四月) 초칠일(初七日)이었다.
바야흐로 화창한 봄이라 바람이 가볍게 살살 불고 마침 비가 개여 날씨가 아주 청명(淸明)하니 유람객(遊覽客)으로서 길 떠나기에 아주 좋은 가절(佳節)이었다. 수곡(水谷)에 이르러 목여(穆汝)형 집에서 오요(午饒)를 한 다음 가벼운 걸음으로 유어동(遊魚洞) 어귀에 들어서니 수곡(水谷)에 우거(寓居)하는 백명언(白明彦)형이 뒤 쫓아 오는 지라 함께 동행(同行)을 하게 되었다.
조금(操琴,온정면에 있는 마을 이름) 술집에서 잠시 휴식한 다음 소태리(蘇台里)의 재종질부(再從侄婦) 친정(親庭) 집을 찾아 어른께 인사(人事)를 드리고 내례(內禮 : 인사는 남자 분에게 만 하는 것이 통례인데 경우에 따라 여자에게도 찾아 인사하는 경우가 있다. 이것을 내례라 한다)까지 한 뒤에 황성지(黃聖智)씨와 같이 온정(溫井)에서 목욕(沐浴)을 하였다.
진세(塵世 : 티끌세상 곧 이 세상)의 때를 말끔히 씻고 나니 비로소 신선(神仙)이 사는 선구(仙區)를 찾기 위한 자격을 얻은 것 같았다.
이 날 밤은 주가(主家 : 재종질부 집)에서는 연로하신 어른이 계시므로 불편할 것 같아서 성지(聖智)씨 집으로 자리를 옮겨 자게 되었는데 마을의 여러 장익(長益)들이 와서 우리들의 먼 길 여정(旅程)을 위로해 주는 등 밤이 깊도록 담소(談笑)하다가 헤어졌다.
온정(溫井)이란 제하에 시 한수를 읊었다.
<온정>
선경을 찾으러 관동을 향하는데
좋은 벗 맞이하니 이 즐거움 같네
좋은 청춘에 수레 막 떠나려 하는데
초여름 꽃 지는 것 싫어하네
목욕하니 먼지 깨끗이 사라지고
조금(操琴) 주막에서 취하니 무지개처럼 기 오르네
길 오르는 것 지속 필요치 않으랴
강변 버들이 바람 따라 하늘거리는 것 보게나.
4月 8日 경인(庚寅) 맑음
아침 식사를 마친 후 여러 장로(長老)와 내례(內禮)할 곳을 차례로 찾아 인사(人事)를 하였다.
집집마다 술과 안주를 갖추어 대접해 주었으며 마을을 출발할 때에는 성지(聖智)씨를 비롯하여 극경(極卿)씨, 형만(亨萬)씨, 중서(重瑞)씨 모모(某某)씨 등이 동구(洞口)까지 나와 전송(錢送)해 주었으며 중서(重瑞)형은 삼십 전(三十錢 : 당시 화폐로 전(錢)이 있었는데 백전(百錢)이 1원(圓)이었음)이나 노자(路資)를 주며 먼 길 여정(旅情)을 위로해 주니 그 고마운 인정은 헤아릴 수가 없었다.
수곡(水谷)에 이르러 김형로(金炯魯)씨를 찾으니 마침 그 날은 형로(炯魯)씨의 대인(大人 : 아버지) 종상(終祥)을 지낸 다음 날 이어서 빈객(賓客)이 만당(滿堂)하였다.
잠시 수인사(修人事)를 나누고 또 술상(酒肴床)도 세 차례나 나왔는데 오요(午饒)는 떡으로 대신(代身)하였다.
점심식사를 떡으로 대신하는 것은 아마 여러 사람을 대접하다 보니 대접이 어려워 그런 가 생각되었다.
이어 발섭(跋涉 : 산을 넘고 물을 건너서 여러 곳을 돌아다니는 것을 말하나 여기서는 신발을 벗고 물을 건너는 것을 이름)까지 하며 평해읍(平海邑)에 이르니 읍(邑)을 감싸고 있는 산세(山勢)가 태령(泰嶺 : 큰 산 줄기) 아래에 있어 그런지 실로 기묘(奇妙)한 모양들을 하고 있어 이상하게만 보였다.
조금 쉰 다음 월송정(月松亭)에 이르렀는데 이 월송정(月松亭)은 우리나라에서 일컫는 관동팔경(關東八景) 중의 하나이다.
탁 트인 망망대해(茫茫大海) 밖으로 한 없이 눈길을 보내며 바라보는 광경과 빽빽하게 우거진 울창(鬱蒼)한 소나무 숲(松林)은 갑갑한 흉금(胸襟)을 시원하게 씻어(掃濾)주어 안력(眼力)이 다 미치지를 못했다.
심신(心身)이 어찌나 상쾌(爽快)하였던 지 몇 번이나 돌아다니며 방황(彷徨)하다가 석양(夕陽)이 되어서야 정명리(正明里)에 이르러 대해(大海) 황선생(黃先生) 종택(宗宅)에서 유숙(留宿)을 하였다.
4月 9日 신묘(辛卯) 흐리다가 맑음
주인 자경(子卿)씨가 진중(珍重)한 세의(世誼) 등을 이야기하면서 며칠 더 유(留)하여 떠나기를 권하면서 만류하니 그 정의(情誼)는 실로 감사하여 한 없이 기쁘게 해 주었다.
오후에 재우(載宇)군과 척산(尺山) 처고모(妻姑母) 가를 찾았다. 내례(內禮)를 마친 다음 마을 여러 장로(長老)를 찾아서 인사를 드린 후에 극중(極中)씨 댁에 들렀더니 극중(極中)씨는 이미 작년(昨年)에 풍악(楓嶽 : 금강산의 별칭)에 유람(遊覽) 갔다가 온 일이 있어 명승(名勝)의 장관(壯觀)과 들렀던 사관(舍舘) 등을 소상하게 이야기하면서 겸하여 읊은 시축(時軸)을 보여주는데 장장마다 가득차도록 표현한 경거(瓊琚)는 나의 눈을 어리둥절케 하였다.
석후에 희원(羲源) 규원(奎源) 창열(昌烈)씨 등이 우리를 찾아 용익(鎔翼)형의 집으로 왔으므로 함께 바둑도 두고 여러 이야기도 나누었는데 안(安)씨 가문(家門)의 자작일방(自作一邦)이 베풀어주는 넉넉하고 권권(眷眷)한 인심은 고맙다 못해 실로 부럽기까지 하였다.
4月 10日 임진(壬辰) 맑음
곤(困)하게 잠이 들어 아침 해가 높이 뜬 줄도 몰랐다. 또 바닷가이므로 해를 가리는 것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조반(朝飯)후에 여러 형들이 다시 와서 늦도록 정담을 나누다가 동구(洞口) 밖에 까지 나온 그분들과 작별 하였는데 용두(鎔斗), 용익(鎔翼) 양 형은 정명(正明)장터 까지 함께 와서 주효(酒肴)를 대접해 주니 그 후하고 권권(眷眷)한 정은 진실로 감사하였다.
정명 상촌(正明上村)에 들러 장(張)씨 댁을 찾았는데 이 댁은 우리 집과는 세의(世誼)가 아주 지밀(至密)한 집이라 노인(老人)을 찾아뵙고 인사를 드린 다음 문후(問候)를 드렸는데 신관(身觀)은 그렇게 쇠폐(衰弊)하지 아니 하였다.
우리 집 일을 물으면서 가군(家君)의 안후를 묻는 지라 개감(槪感)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오요(午饒)를 자경(子卿)씨 댁에서 한 후에 드디어 작별을 하였는데 전문(錢文)으로 먼 길 행자(行資)까지 주는지라 고맙기에 앞서 오히려 마음을 불편하게 까지 하였다.
이 곳에서부터 지나는 곳마다 도로를 개선(改善)하고 있었는데 인민(人民)들의 고역(苦役)이 여간 어려워 보이지 않았다. 한편 이것은 세상이 새롭게 문명의 기초가 새로 닦겨지려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방금 발수(發穗)하는 보리들을 마구잡이로 베어 내는 것은 땅에서 나는 것을 먹고 사는 식토인(食土人)인 우리로서는 차마 보기에 딱한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사동(沙銅)에 이르렀다. 해월헌(海月軒)주인 병일보(炳日甫)는 승중상(承重喪)으로 집상(執喪) 중이어서 문상(問喪)을 마친 다음 마을의 여러 장노(長老)와 지구(智舊) 들을 하나 하나 찾아 수인사(修人事)도 드리고 또 주효(酒肴) 대접도 받았다.
석후(夕後)에는 여러 장소(壯少)가 모여 혹은 금강산(金剛山)에 대한 사정을 들려주기도 하며 혹은 노정(路程)을 초(抄)하여 여행에 도움이 되도록 기록해 주는 등 함께 즐기다가 밤이 오래 되어 헤어졌다.
4月 11日 계사(癸巳)
비가 오고 흐려 종일토록 개이지 않아 매우 민망하였다.
석후(夕後)에 송천(松川)에 거주하는 권중경(權重卿) 형이 와서 위로해 주었다. 이 분은 황시응(黃試應)씨의 매부(妹夫)로서 함께 밤이 새도록 혹은 바둑도 두고 혹은 서책(書冊)도 보면서 즐거운 시간을 가졌는데 회포(懷抱)도 다 풀지 못하고 모두가 곤(困)하였던 지 함께 기댄 채 잠이 들었다.
4月 12日 갑오(甲午) 맑음
병성(炳星)씨의 합부인(閤夫人)을 찾았는데 지밀(至密)한 족의(族誼)로서 오랫동안 서로 보지 못하였던 적조(積阻)한 정과 회포를 다 나누지 못하고 아쉽게 헤어졌다.
황중관(黃仲寬)어른을 배별(拜別)을 한 다음 동구(洞口)에서 여러분과 작별하였는데 동제간(同儕間)의 중중(重重)한 정의(情誼)가 너무나 깊어 작별을 하려니 진정으로 아쉬웠다.
여기서부터는 경치가 아름다워 지나는 곳마다 절승(絶勝)의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망양정(望洋亭) 정자에 이르렀는데 정자는 퇴락(頹落)해 있었으나 뒤로는 절승(絶勝)의 경치를 한 큰 산을 업고 있고 앞으로는 망망대해(望望大海)를 향하여 우뚝 선 그 기상(氣像)은 실로 만천(萬千) 가운데서도 드물게 보는 정자였다.
유람객(遊覽客)들은 잠시 동안 경치에 흠뻑 도취(陶醉)되어 그만 돌아 설 줄조차 잊고 말았다.
울진군 원남면 매화리(蔚珍郡 遠南面 梅花里)는 사동(沙銅)으로 부터 삼십 리를 떨어져 있는 마을이었다. 이 마을에서 윤응규(尹應奎) 형을 찾아 그 분 춘장(椿丈)께 인사를 드렸는데 곧 우리 집을 비롯하여 향내의 여러 지정(至情)과 지구(知舊) 분들의 안신을 소상하게 물으시니 가히 울진에서는 명망(名望)이 있는 가문(家門)임을 이내 짐작케 하였다.
이에 후한 점심 대접 까지 받은 다음 곧 길을 떠나려 하는데 이렇게 어렵게 찾은 정의(情誼)를 잊을 수 없다 하고 간곡히 만류하므로 하는 수 없이 하루를 더 유숙케 되었다.
두규(斗奎) 형규(亨奎) 호규(鎬奎)씨 등이 저녁에 찾아 왔으므로 밤이 오래도록 함께 놀았다.
4月 13日 을미(乙未) 맑으며 더움
조반(朝飯)은 형규(亨奎)형 께서 초청해 주었다.
형규(亨奎)형은 인량(仁良) 남형옥(南亨玉)군의 표종(表從) 되는 분이다. 응규(應奎)형을 작별하려 하였을 때에는 더 유하도록 너무 고만(固挽)을 하므로 회로(回路)에 들 것을 약속하고 헤어졌다.
노음리(老音里)에서 조금 쉰 다음 울진읍(蔚珍邑)에 당도하였다. 울진(蔚珍)읍은 우리 13대 조 현령공(縣令公)께서 현령(縣令)으로 계시며 시정(施政)하셨던 곳이어서 읍내(邑內)를 네 번이나 둘러보았는데 비범(非凡)한 곳이 아니었다. 남다른 감회(感懷)와 함께 마음속으로 부터 우러나오는 기쁨을 느낄 수 있었다.
읍에서 마주 바라보이는 곳에 연호정(蓮湖亭)이 있는데 가 보았더니 경관(景觀)이 무척 빼어나 정자(亭子)에 올라 본 사람은 모두가 그 일대 장관(一大壯觀)에 흠뻑 취 하였을 것 만 같다.
구마리(九麻里)를 끼고 십 리 쯤 들어가서 성(城) 아래에 있는 주회룡(朱繪龍)씨 댁을 방문하였다. 이 집은 우리 향내에서 누대(累代)에 걸쳐 연연(連連)히 지내온 지밀(至密)한 세의(世誼)가 있는 집이므로 옛부터 누대(累代)로 깊이 관계를 맺어온 내력을 주고받으면서 반갑게 오요(午饒)까지 대접을 받은 후 갈 길이 바쁘므로 서둘러 작별하고 길을 떠났다.
석양(夕陽)이 되어 흥부시장(興富市場)에서 쉬게 되었는데 세 사람이 한 집에 들어가 유숙(留宿) 한다는 것은 좀 곤난할 것 같으므로 명언(明彦)씨와 목여(穆汝)형은 나곡(羅谷) 최(崔)씨 댁으로 가기로 하여 보낸 다음 나는 석(石 )동 박문교(朴文敎)씨 집으로 들어갔는데 마침 아우(兒憂, 어린이가 아픔)가 있어 애를 쓰고 있었으므로 그의 아우인 재교(在敎)의 집으로 갔더니 매우 관후(寬厚)한 대접을 해 주었다.
석후(夕後)에 본면(本面) 장상각(張相珏)씨가 찾아 와서 밤이 깊도록 여러 이야기를 하며 놀다가 헤어졌다.
이날의 행보(行步) 이수는 육십 리 였다.
4月 14日 병신(丙申) 맑음
나곡점(羅谷店)에 이르니 목여(穆汝)형은 이미 먼저 와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 행곡(杏谷) 남덕문(南德文) 장(丈)을 만나 서로 인사를 나눈 다음 네 사람이 동행하게 되었다.
산(山)과 내(川)를 지나고는 있으나 어느 산 어느 내인지 또 마을(村)을 지나면서도 어느 마을인지 가르쳐 주는 이가 없으니 알 수가 없었다. 길을 가르쳐 주는 이가 있었으면 싶은 생각이 절로 났다.
갈령(葛嶺)을 넘어 주점(酒店)에서 잠시 쉰 다음 어느 낯 모르는 집 방을 빌려서 떡으로 오요(午饒)를 대신하고 소공대(召公臺)에 올랐다. 이 산은 얼마나 천험(天險) 하였던지 대(臺)위에 세워져 있는 비석은 흘연(屹然)히 우뚝 하였고 우리 들 일행을 의구(依舊)하게 기다려 주는 것 만 같았다.
오르락 내리락하며 걷다 보니 다리가 몹시 피곤하고 또 발도 몹시 부풀어 그만 주저(躊躇)앉고 말았는데 ‘등산에는 도(道)가 있는 법이므로 서서히 가야 피곤치 않다(登山有道 徐行不困)’ 고 일러준 옛 사람의 시구(時句)가 절실하게 느껴져서 다시금 감탄하였다.
재(嶺)아래 주점에 이르니 평해 온정리(平海 溫井里) 사는 황정곤(黃定坤)형이 삼척(三陟)으로 부터 왔다 하면서 있으므로 실로 의외의 만남 인지라 서로 놀라면서 반가히 악수(握手)를 하였다. 이 황정곤(黃定坤)형은 나와 보통 평범한 사이가 아닌 각별한 친구인데 또 집을 떠난 이 타향에서 우연히 만나고 보니 반갑기 이루 헤아릴 수가 없었다. 한 순배(巡盃)씩 술잔을 주고 받은 다음 갈 길이 서로 다르므로 곧 헤어지게 되었는데 황정곤(黃定坤)형은 십오 전(十五錢)의 돈을 건네주면서 원로(遠路)에 피로(疲勞)할 때 술 한 잔 마시라고 일러 주기 까지 하였다.
용화동(龍化洞)에 이르렀을 때 다리가 몹시 아파서 자동차를 탔으면 싶어 사람에게 물었더니 조금 만 더 가면 자동차를 탈 수 있다 하므로 하는 수 없이 다리를 끌 듯 하면서 대흥동(大興洞) 마을에 들어가 박영상(朴永祥) 노인의 집에서 유숙하였다.
이날의 행보 이수는 팔십 리였다.
4月 15日 정유(丁酉) 맑고 따뜻함
조반(朝飯)을 한 후 곧 출발하여 작은 고개를 하나 넘어 교가역(交柯驛)에서 집으로 편지 한 장을 써 부쳤다.
주점에서 잠시 쉬는데 마침 안동 예안(安東 禮安)에 사는 권상중(權相重)형을 만났다. 그는 춘부장(椿府丈)께서 집을 나간 후 20여 일이 지나도록 생사조차 알 수 없어서 이렇게 사방을 다니며 찾고 있는 중이나 지금까지 소식을 전연 알 수 없다고 한다.
그 정상을 듣고 있노라니 너무나 딱하므로 술 몇 잔을 권하며 위로해 주었다.
행곡(杏谷) 마을에서 남덕문(南德文)씨와 권상중(權相重)형을 이 곳에서 작별케 되었는데 며칠 동안 함께 동행하면서 나눈 정의(情誼)가 너무 깊어 헤어져 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니 섭섭한 회포가 간절하여 그들과 조금 전에 마신 술마저 내려가지 않는 듯 했다.
삼십리 쯤 더 갔더니 맹방리(孟方里) 마을에 이르렀다. 주점에서 오요(午饒)를 하고 옛 길(舊路)을 따라 험한 산을 하나 넘었는데 울진(蔚珍)에서 부터는 지나는 곳이 모두 천험(天險)한 산(山)이 아니면 바다였다.
앞을 바라보니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가 서 있다. 이 비(碑)는 미수 허선생(眉叟 許先生)께서 세운 비(碑)인데 비석(碑石) 주위를 배회(徘徊)하며 첨앙(瞻仰)해 보았더니 너무나 의젓하여 당일의 일 들이 보는 듯이 연상(聯想)되어 실로 감개무량(感慨無量)함을 이길 수가 없었다.
삼척읍(三陟邑)으로 향하여 가는데 산천(山川)은 낮으막하고 또 순(順)할 뿐 아니라 들도 넓어 일군(一郡)의 도회지(都會地)에 넉넉하다. 잠시 쉰 다음 죽서루(竹西樓)에 올랐다.
층연(層戀 : 여러 충으로 이루어진 묏부리)은 사방으로 병풍처럼 둘러 쳐 있고 누각(樓閣) 앞은 강(江)이 누(樓) 기둥을 안고 급한 물결을 이루며 흐르고 있으니 그 경치는 그야말로 만상천태(萬像千態)라 그 모두가 이 죽서루(竹西樓)를 돋보이게 해 주는 조경(助景)이었다.
중국 악양루(岳陽樓)는 가서 보지 못하였으니 알 수 없으나 악양루(岳陽樓)인들 이 이상 다시 무엇을 구하겠는가? 사방을 두런 두런 돌아보았는데 진세(塵世)에서는 실로 보기 드문 절경(絶景)이었다.
여기서 숙종대왕 어제시에 복차하여 시 한수를 읊었다
<죽서루 어제시에 운을 붙여>
천년의 죽서루 예부터 명루여라
백 척 아스라한 난간아래 바위 따라 물줄기 흐르네
간신히 올라 지난 일 생각는데
맑은 모래 위엔 수 없는 갈매기만 날으네.
이런 저런 감상에 젖다 보니 죽서루(竹西樓)에서 해는 벌써 석양(夕陽)이 되었다.
곧 길을 재촉하여 북삼면 단봉리(北三面 丹鳳里) 김진철(金振澈)씨 집에 이르니 주인께서는 우리 종가(宗家 : 存齋宗家) 숙주(叔主)의 안신(安信)을 묻는다. 종숙주(宗叔主 : 호(號)는 우헌(于軒)이고 수악(壽岳)으로 문집이 있고 의병(義兵)을 일으켜 의병장으로서 일제(日帝)의 침략에 대항하여 독립운동을 하였으며 1994. 8. 15 건국훈장 애족장(愛族章)을 추서 받음)께서 금강산 관유(觀遊)를 하셨을 때 이 집을 찾아 방문한 일이 계셨기 때문에 주인은 종숙주(宗叔主)를 잘 알고 있었다.
석 후에 피곤이 심하여 이내 곤잠으로 빠지고 말았다.
이곳에서 전일 유숙한 대흥동(大興洞) 까지는 칠십 리이다.
4月 16日 무술(戊戌) 맑다가 나중에 구름이 낌
후평 송정리(後坪 松亭里)에 이르렀다. 막막(漠漠)한 넓은 들판에는 보리가 잘 자라 있었다. 마을규모가 매우 번화(繁華)하여 영남(嶺南)으로 부터 처음 보는 참으로 삼척(三陟) 대지(大地) 다웠다.
곧 한 고개를 넘어 서니 강릉(江陵)의 첫 경계(境界)였는데 망상면 발한리(望祥面 發翰里)에 이르니 고려(高麗) 때의 예의판서(禮儀判書)를 역임한 심신재(沈信齋)선생의 신도비(神道碑)가 우뚝하게 서 있었다.
옥계면 도진리(玉溪面 道眞里) 김성렬(金盛烈)씨의 점(店)에서 오요(午饒)를 한 다음 율현(栗峴)재를 넘어 한 주막(酒幕)에서 조금 쉬었다.
해가 서쪽으로 기울었을 무렵에 일행 중 누군가가 여기서 유숙을 하고 가자하고 제의를 하나 내 생각은 일보(一步)라도 더 가는 것이 원유(遠遊)를 하는 사람의 도속(圖速) 도리(道理)라 고집을 하여 몇 리(數里)를 더 가면서 둘러보아도 가히 찾아들만한 집도 없을 뿐 아니라 또 쉴 주막(酒幕)도 없어서 일이 매우 낭패(狼狽) 지경에 이르렀다. 사정이 그렇다고 달리 어찌 할 방도가 없으므로 다시 기운(氣運)을 내어 길을 재촉하여 가는데 마침내 하늘에 닿을 듯한 큰 재(大嶺)가 또 앞을 가로 막는다. 이 재(嶺)는 강릉(江陵)에서 제일 높고 험준(險峻)하다고 하는 화비령(花飛嶺)이었다. 뒤 돌아 볼 겨를도 없이 총총히 걸음을 재촉하여 겨우 재 밑에 있는 한 주점(酒店)까지 오기는 하였으나 밤은 이미 초경(初更)을 지나고 있었다.
이 주점(酒店)에 투숙(投宿)하였는데 여기서 지난밤에 유숙한 단봉(丹鳳)까지의 이수(里數)는 팔십 리이다
4月 17日 기해(己亥)
강릉에 들어서면서 가랑비가 내렸다.
곧 길을 떠나 검광(劍光)에 이르렀다. 넓은 광야(廣野)가 끝없이 펼쳐져 호호망망(浩浩茫茫)하다. 관동 제일(關東第一)의 대지일 뿐 아니라 진실로 조선(朝鮮)에서 손꼽는 유명한 곳으로 눈에 보이는 곳은 모두 명승장관(名勝壯觀)이 아닌 곳이 없어 가히 한 걸음에 열 번도 더 돌아보게 한다.
또 울진(蔚珍)으로 부터 지나온 경로(經路)는 효자(孝子)와 열녀(烈女)의 정려(旌閭)가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비일비재(非一非再)하니 이는 어진 선비 군자가 이 지방에 그 만큼 많이 태어났다는 큰 도(大道)임을 말해 주고 있다.
읍(江陵邑)에 들어서니 가옥(家屋) 들이 꽉 들어 차 있고 사람들도 번성(繁盛)하게 살고 있어서 참으로 집에 있을 때 듣던 대로 영동 제일(嶺東第一)의 대읍(大邑) 그대로였다.
이날은 마침 장날(市日)이었는데 물건을 사고 파는 교역자(交易者)가 몇 천도 넘을 것 만 같이 북적 거리고 있었다.
장터를 사방 돌아 면서 두루 구경을 하고 난 다음 대정정(大正町) 61번지 전택관(田澤寬)씨의 집을 방문하였더니 이 집에는 장인환(張仁煥)씨가 이미 유숙하고 있었다. 이 장인환(張仁煥)형은 평해 정명(正明) 사람으로 반갑게 서로 인사하며 악수 하였는데 처음 인사 하였으나 가위(可謂) 일면여구(一面如舊)하였다.
또 같은 정명(正明) 사람 안용한(安鎔漢)도 만나 인사를 나누었는데 이 사람은 인천학교(仁川學校) 선생으로 있는 분으로 오늘 뜻 밖에 이 두 분을 만나 정담을 나눌 수가 있어 실로 반갑고 기쁘기 이루 형언할 수 없었다.
인환(仁煥)형과 더불어 주막(酒幕)으로 가서 점심까지 대접 받았는데 객지에서 받은 대접이라 감사함을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정동면(丁洞面)에 이르러 율곡(栗谷) 이선생(李先生)께서 태어난 태지(胎地)를 구경하였다. 주위 산천은 무척 가려(佳麗)하고 사잇 길을 따라 펼쳐진 일변호수(一邊湖水)는 평평탕탕(平平湯湯)하여 바라보니 끝이 없는데 누각(樓閣)이 우뚝 봉우리에 임(臨)하여 서 있으니 이것이 곧 관동 제일경(關東第一景) 경포대(鏡浦臺)였다.
걸음을 재촉하여 경포대(鏡浦臺) 누각에 올랐더니 안계(眼界)는 끝이 없고 주위 아름다운 경치는 이루 다 매거(枚擧)할 수가 없다. 마침 이 때에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불어오더니 가랑비가 흩날리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속루의 인물이 선연이 없어서 그런 것 인가하고 여기서 시 한수를 읊었다.
<경포대>
천리 대지팡이 길손 누대에 오르니
맑은 호수 끝없이 거울 모습으로 열렸네
한 조각 붉은 노을 저 하늘가에서 움직이고
부드럽게 노 젓는 소리 달 속에서 들려 오네
사람이야 좋건 싫건 아침 저녁 물결치고
신선이야 있건 없건 예나 이제나 술잔 기울이네
해오라기는 쉬고 물고기는 놀아 흔연히 뜻을 얻으니
세월이여 이 사이에선 재촉하지 말아다오.
<경포대 현판위의 운에 붙임>
대아래 맑은 호수 호수위엔 누대
영동의 형승이 이 안에 열렸네
물가엔 난초 언덕엔 지초 푸르러
들새와 흰 갈매기 멋대로 오가네
배 뛰울 땐 바람 앞에 돛대 두렵지 않고
시 읊는 곳엔 달 아래 술잔 없음이 한스럽네
대에 올라 여흥이 아직 다 하지 않았는데
지는 해는 무슨 마음으로 나그네 길 재촉하나
먼지 낀 속계(俗界)의 사람은 이 같이 아름다운 선계(仙界)와는 인연이 없기 때문이 아닌 가 싶기도 하였다. 서둘러 내려 와 이근우(李根宇)씨의 집을 찾아 들었는데 주인 부자(父子)는 모두 없고 소위 청(廳)을 지키는 이(李)가 성을 한 자가 완패무례(頑悖無禮)하여 주인이 없다고 만 거듭 핑계를 하면서 머물기를 한사코 거절하니 마음에 괘씸하기 그지없었으나 치솟아 오르는 분을 억지로 참으면서 거리로 나왔는데 해는 이미 저물고 다리는 극도로 피로하여 더 걸을 수가 없었다.
심관성(沈侊燮)형에게 물어서 함께 해운정(海雲亭)으로 갔는데 정자 주인은 심좌섭(沈左燮)씨라 한다. 정자(亭子)가 퍽 아름답고 정자에 딸린 가사(家舍)도 퍽 정결(淨潔)하였다.
심좌섭(沈左燮)주인께서 자기 선조(先祖)에 대한 어촌유집(漁村遺集)을 내 보이는데 어촌(漁村)은 즉 이조(李朝) 중묘조(中廟朝) 때 이조판서(吏曺判書)인 시호(諡號) 문공공(文恭公) 심언광(沈彦光 : 본관(本貫)이 삼척(三陟)이고 자(字)는 사형(士泂)으로 우참찬(右參贊)을 역임하였으며 조선 조(朝鮮朝) 때 문장가(文章家)로 알려져 있음)의 호(號)로서 일찌기 이 곳에 터를 잡아 정자(亭子)를 지으셨다 한다.
밤이 이슥토록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 수작(酬酌)하는 바가 매우 온아(溫雅)하였으며 혹은 노론(老論)과 소론(小論)에 대한 당파(黨派) 이야기와 혹은 변천(變遷)된 시류(時流) 등을 서로 주고 받으며 논(論) 하다가 밤이 오랜 후에 파좌(罷座)를 하였다.
이날은 모두 사십 리를 걸었다.
4月 18日 경자(庚子) 아침에는 비오다가 늦게 갬
조반(朝飯)후에 해운정(海雲亭) 정자에 올라 옛 사람 들께서 읊은 시(詩)와 유묵(遺墨)을 둘러 보았는데 오늘까지 옛 그대로 신중(愼重)히 잘 보존하며 전수(傳受)해 오는 강릉의 명벌(明閥) 들에게 진실로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다시 길을 떠나 사천(沙川)에 이르렀다. 이 사천(沙川) 역시 넓은 광야(廣野)가 펼쳐져 있고 마을은 들 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어서 풍요(豊饒)로운 촌락(村落) 인상을 한 눈으로 갖기에 넉넉하였다.
주문진(注文津)에 도착하여 축항(築港)하는 광경을 구경하였는데 바다의 중간까지 돌로 메워져 있어서 걸어서 축항 끝 까지 들어가 보았다. 사람의 힘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넉넉히 추상(追想)할 수가 있었다.
주점에서 오요(午饒)를 한 후 십여 리(十餘里) 쯤을 갔을 때 마침 양양(襄陽)으로 가는 자동차가 승객이 타지 않은 채로 오므로 손을 들어 자동차를 탔는데 속력이 마치 번개처럼 빨라서 지나는 곳을 하나 하나 알 수가 없었고 순식간(瞬息間)에 양양(襄陽)읍까지 오고 말았다.
산과 내(川)사이로 뜸뜸이 펼쳐져 있는 광활(廣闊)한 들판은 가히 일군(一郡)의 도회지(都會地) 다웠다.
군청 앞에 있는 취산루(醉山樓)에 올랐더니 양양읍이 한 눈에 다 보일 뿐 아니라 빼어난 승경(勝景)은 유자(遊子)인 나의 눈을 그냥 지나치게 하지 않는다.
취산루(醉山樓)에서 십여 리 쯤 갔을 때 노상(路上)에서 남국진(南國鎭)군을 만났는데 그는 서계(西溪) 인근(隣近)에 사는 사람이었다. 손을 잡고 반기기는 하였어도 무슨 사연(事緣)으로 이곳에 까지 오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었으며 객지에서 우연히 만났음에도 그가 베풀어 주는 친근(親近)한 정회는 한 마디로 표현키 어려울 정도로 다정하였다.
같이 손을 잡고 양양면 조산리(造山里)에 있는 이성현(李聖鉉)씨 집에 가서 투숙케 되었는데 남국진(南國鎭)형은 손수 저녁 밥상을 들고 와서 나의 원유(遠遊)를 위로해 주는 지라 그분의 정의(精誼)는 실로 고맙다 못해 미안하기 까지 하였다.
이 날은 자동차로 칠십 리 도보(徒步)로 육십 리 그리하여 일백 삼십 리 여정이었다.
첫댓글 登山有道 徐行不困 사늘 타는 데 법도가 있는데 처음에 기운있다고 빨리가는것 보다는 천천히 가면 힘들지 않다는 가나조부 말씀 지금도 名言이로다
"사동의 해월당 종손 황병일씨는 그 부인이 안동 천전 김대락공의 손녀로 1910년 나라가 망할때 만삭임부였는데 신생아가 식민지백성으로 태어날 것을 거부하고 그 내외가 서간도 망명에 올랐던 바로 장본인이다. 바쁜길인데도 이틀이나 여기 머물며 술 바둑 서책을 보며 밤을 지샜다 기록하고 있는데 일기에는 언급을 회피하고 있으나 필경 어떤 곡절이 있었던 모양이나 알길이 없다. "--조동걸 국민대교수(<만주독립운동사> 저자)의 해제에서
매화리에 이틀이나 묵은 것도 주진수공(신민회간부로서 영해 안동인사의 서간도 망명을 주선한 인물)의 고장이란 점과 무관하지 않으리라. 당시는 보은공의 재종질 이겸호공도 서간도를 오내리며 독립운동에 헌신하던 때였다"- 조동걸 교수의 해제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