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치동 사람들 ...
미국에서도 귀국하면 대치동으로 가라고 한다,
■사례1 “언론에서 은마아파트 집값 떠들면 소화가 다 안 돼요”■ 2001년 3월 은마아파트에 전세로 오면서 대치동 사람이 됐다는 주부 N씨는 몇 달을 주기로 소화불량 현상을 겪는다.
언론에서 은마아파트 집값이 또 뛰었다 는 내용이 보도될 때마다 쓰린 가슴을 쓸어내리느라 생긴 현상이다.
일산에 살던 N씨는 2000년 초 회사에서 미국 연수 기회를 잡은 남편을 따라 1 년 동안 미국에서 살다 왔다.
“그 곳에서 만난 지인들 대다수가 한국에 돌아가면 무조건 강남, 그 중에서도 대치동으로 가라 하더라고요. 사실 처음엔 그냥 흘려 들었는데, 일산 고등학교 가 평준화됐다는 소식에 부랴부랴 대치동에 가기로 결정했지요.” 창동에 55평짜리 아파트를 보유하고 있는 N씨는 일산에서도 전세로 살았었다.
일단 은마아파트에 전세로 오면서, 창동 아파트를 팔아 은마를 아예 사버릴까 고민도 많이 했었다고. 그러나 양도소득세가 8000만원에 달했다.
일시에 8000 만원을 세금으로 내야 한다는 것이 부담스러워 그냥 전세로 살기로 결론지었는 데, 당시의 결정이 지금 그렇게 후회스러울 수가 없다는 얘기다.
그나마 N씨는 자신은 비록 강북이지만 집 한 채라도 있으니 다행스러운 편이라 고 했다.우선 전세로 들어온 후 좋은 조건의 집을 골라 살려고 이전 집을 팔 았는데, 채 사기도 전에 집값이 크게 올라 졸지에 무주택자가 된 경우도 가끔 봤기 때문이라는 얘기다.
회사원인 남편이 벌어오는 매달 400만~500만원이 수입의 전부인 N씨는 정말 ‘ 1원 한푼도 저금 못하고 산다’고 했다.
개인과외를 안 시키기 때문에 그나마 적자는 면한다는 얘기. 사정이 이렇다 보니 노후준비는 꿈도 못 꾼다.
미국에 이민 가느라 10년간 무주택 상태를 유지해온 동생 명의 청약통장 하나에 미래 를 걸어봐야겠다 하는 게 유일한 희망이다.
“그나마 애들이 공부를 잘해줘서 그것 하나 믿고 삽니다.
비록 돈은 없지만, 애들 잘 키운 나를 대치동 엄마들이 절대 무시하지 못하거든요.” ■사례2 “우린 대치동 거지에요”■ 대기업 부장인 남편, 딸 둘과 함께 은마아파트에 살고 있는 주부 P씨가 은마아 파트에 이사온 건 지난 94년의 일이다.
1억4000만원에 31평형을 사서 들어왔다 . 친정이 대치동이고, 시댁이 개포동이어서 양가 가까이 산다는 의미로 그냥 선택했을 뿐이라고. 그리고 10여년. 이제 그 집 가격이 8억원을 호가한다. 남 보기에는 ‘성공한 인생’으로 여겨지지만, P씨에게는 그렇지 않다. 우스갯소 리로 자신을 ‘대치동 거지’라 부를 정도다.
P씨는 남편으로부터 매달 450만원 가량을 생활비로 받는다. 이 돈으로 교육비 를 충당하면서 살려면 늘 빠듯하다.
올해 큰 딸이 고등학생이 되면서는 사정이 더 힘들어졌다. 국영수는 기본에 사회, 과학, 논술까지 학원에 보내려니 교육 비가 만만치 않다.
학기 중엔 그래도 나은 편이다. 방학 때는 2배, 3배씩 든다 . 예전엔 공연도 보는 등 가끔이나마 문화생활을 즐겼지만, 올해부터는 딱 끊 었다.
남편도 골프 대신 테니스채를 들었다. 아직 초등학생인 둘째 딸은 영어 과외를 그만뒀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생활에 좀 여유가 있는 시댁에서 도와주지 않는 게 야속하 다고 했다.
현재 대치동 동부센트레빌에 거주하는 시부모가 남편 명의로 오피 스텔을 하나 마련해주기는 했다. 그러나 명의만 남편 것일 뿐, 월세는 시댁으 로 들어가는 구조라 당장 P씨네 생활에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다.
“샐러리맨 월급으로 대치동에서 버티기란 정말 쉬운 일이 아니에요. 그래서 시댁이나 친정에서 생활비를 보조받는 집이 많아요. 애가 고등학교 들어가니 시댁에서 3년동안 학원비를 대주겠다고 했다더라, 갈 때마다 1000만원씩 턱 주 시면서 학원비에 보태라고 했다더라, 뭐 이런 얘길 들을 때마다 아주 미칠 지 경이에요. 번듯한 집에, 물려받을 오피스텔에, 그만하면 괜찮은 것 아니냐고 하시는 분들도 있지만 여기서 저처럼 살아보세요. 절대 그런 생각 못하죠.” 생활비가 모자란다며 더 달랄 때마다 남편은 ‘나중에 어떡하려 그러느냐’며 역정이지만, P씨에게 미래는 고려 대상이 아니다.
‘4~5년 뒤 임원이 되지 못 하면 직장을 그만둬야 할지도 모른다. 사는 게 얼마나 전쟁인 줄 아느냐. 분수 에 맞게 살자’고 하는 남편을 이해할 수 없다.
“정말 너무 스트레스를 받아서 하루에도 열두번씩 그냥 대치동을 떠버릴까 하 는 생각을 하곤 해요. 정말 진지하게 고민해보기도 했지만 대안이 없더라고요. 애들을 위해 눌러 살자, 뭐 이렇게 결론 내리고 그냥 사는 거지요.” ■사례3 “애들이 불쌍하지만 그래도 여기서 살아야죠”■ 외국계증권사 임원인 K씨는 91년 송파구 삼전동에서 31평짜리 은마아파트로 이 사왔다.
당시 시세는 1억4000만원선. 이후 99년 은마를 2억1000만원에 팔고 지 금 살고 있는 미도아파트 46평형 로열층을 5억4000만원에 사서 이사했다.
은마 아파트 사람들의 꿈이라는 미도 입성을 성공적으로 이뤄낸 셈. 그 아파트가 지 금 15억원을 왔다갔다하니 집을 통한 재테크에도 크게 성공했다 할 수 있겠다.
고1, 초등학교 6학년 두 자녀를 둔 K씨는 오랫동안 외국계증권사에 근무하면서 돈을 꽤 벌었다.
그 돈으로 행주에 땅도 좀 사뒀고, 모 벤처기업 지분을 사들 여 현재 1대주주이기도 하다. 이 정도 부를 일궈 놓은 K씨지만 대치동에서 품 위유지를 제대로 하고 살기가 쉽지만은 않다고 했다.
“아이들이 방학만 되면 누구누구는 어디 갔다더라, 나도 보내달라 합니다. 둘 보내면 1000만원은 후딱 들어갑니다.
이뿐인가요. 누구네 차는 뭔데 우리는 안 바꾸냐 하니 몇 년마다 차도 바꿔줘야지요, 외식도 그럴듯한 곳에서 해야지요, 애 엄마는 다른 엄마들이 다 함께 뭐 하자는데 혼자만 빠지기 어렵다며 돈 달 라고 하지요, 어쨌든 교육비 외에 생활비가 쏠쏠치 않게 들어갑니다.
아무리 많이 번다 해도 혼자 버는 처지로서 썩 달가운 일만은 아니지요.” 그래도 이사를 생각해본 적은 없다. 워낙 오래 살아온 탓에 아이들 생활터전으 로서 확고하게 굳어져버린 때문이다.
K씨는 그러나 아이들도 그다지 행복해 보 이지는 않는다고 푸념했다. 공부를 잘하는 큰 애는 큰 애대로 심한 경쟁 분위 기에 심하게 스트레스를 받고, 아직 노는 걸 더 좋아하는 작은 애는 전반적으 로 다 잘하는 분위기에서 혼자 못한다는 사실에 많이 힘들어 한다는 것. “그 래도 대치동에 있어야 하나라도 더 얻을 수 있지 않겠느냔 생각에 계속 살 것 ”이라는 K씨 얘기가 울림이 컸다.
■사례4 “아이들 교육비로만 1년에 억대가 들어가요”■ 99년에 구리에서 대치동 은마아파트로 이사왔다는 Y씨네는 그야말로 자수성가 해서 대치동에 입성한, 흔치 않은 경우다.
음식점을 오랫동안 운영해왔다는 Y 씨는 현재 서초동에서 70평짜리 일식집을 운영하고 있다. 현재 고등학교 2학년인 Y씨 큰아이는 캐나다에 유학 가 있다.
중학교 2학년 때 보냈으니 벌써 4년째. 큰딸에게 들어가는 돈만 매년 억대가 넘는다. 원어민 영 어과외에, 전공 과외에, 각종 액티비티 과외까지 합해 매달 교육비만도 300만~ 400만원이 들어간다.
한국에 있을 때 못지 않은 교육비가 들어가는 셈이다. Y씨는 “대치동에서 유학보내 어느 정도 뒷바라지 한다 싶은 집은 다 그 정도 쓴다.
어떨 땐 돈이 너무 들어가 숫자를 계산할 엄두가 나지 않을 때도 있다” 고 전했다.
초등학생인 둘째 교육비도 못지 않다. 첼로를 포함해 한달 100만원 가량이 꼬 박 학원비로 나간다.
구리에 건물 하나를 보유하고 있고, 은마아파트 31평형과 일식집까지 가지고 있는 Y씨지만 대치동에서 돈이 아주 많은 축에 끼지는 못한다.
Y씨 부인 K씨는 “언젠가 엄마들 모임에서 부동산 얘기가 나와 보유한 건물 얘기를 얼핏 했다 가 창피만 당했다”고 토로했다. “알고 보니 다들 수십억원대는 물론 수백억 원대 건물을 물려받거나, 직접 갖고 있는 사람들이더라”는 것이다.
대치동에 들어온 이후 K씨 일과는 매우 바빠졌다. 큰 아이가 유학간 이후 어느 정도 여유가 생기긴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하루 24시간이 모자란다.
틈 날 때 마다 둘째 아이 학원 진도에 맞춰 공부를 해야 하는 것도 고역이다. 아이가 학 원에 갔다 오면 그 내용을 아이와 함께 복습해야 하기 때문에 공부를 하지 않 을 수 없다.
기자와 만난 날도 12시가 되자마자 “아이 학교가 끝나 데리러 가야 한다”며 총총 자리를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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