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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N 미술 강의로 본 인문학 열풍의 그늘
인문학의 열풍이다. 갑작스런 열풍이 분다는 것은 그동안 우리 사회에 인문학이 부재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그 동안 우리 사회는 유신시대의 독재를 앞세운 무분별한 경제 개발 정책의 후유증으로 올바른 삶을 영위하는 가치관의 교육에서 소외되어온 것이 사실이다.
‘새마을 운동’이란 이름의 허울 좋은 정책은 전통 문화를 말살하는 부작용을 낳았고, 자연과학 중심의 교육은 가치관을 정립하는 인문학의 위기를 가져오게 하였다. 이렇게 만들어진 물질 만능의 사회는 아름다운 전통과 질서를 파괴하고, 정신적 품위가 강조되는 질 높은 삶을 사는 것을 방해하게 하였다.
사실 우리 사회에 ‘인문학’이라는 개념조차 분명하게 정착되어 있는지도 의문이다. 어려운 철학책을 읽고, 진지한 소설책을 읽고, 우리 역사와 예술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만이 인문학은 아닐 것이다. 본래 인문학이란 인간의 가치탐구와 표현활동을 대상으로 한다고 한다. 우리가 이러한 학문을 공부해야 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결국 ‘격조 있는 삶의 추구’일 것이다. 인간다운 삶, 질 높은 삶, 창의적인 삶, 절대적인 행복과 자유 그리고 삶과 죽음의 초월 등의 진리를 추구하는 삶까지를 인문학이 추구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물질이 극단적으로 발달한 현대에서 인문학 분야 중에서 다시금 조명을 받는 것이 예술 분야이다. 과학의 발달과 물질의 팽창으로 삶의 편리함은 늘어났지만 정서적인 안정감은 상대적으로 빈약해졌다. 이러한 정서적 퇴보를 채워줄 수 있는 인문학이 예술이다. 특히 음악과 미술은 과학의 발전으로 잃어버린 감성의 부재를 회복해 줄 수 있는 오아시스와 같은 것이다.
근래에 열풍처럼 불어 닥친 인문학의 부상과 함께 미술에 대한 관심 또한 부쩍 높아졌다. 특히 미술품 경매회사들이 여럿 생겨 자리를 잡으면서 경제적으로 성공한 많은 사람들이 미술품을 수집하게 되었다. 점차 미술품의 소유는 현대인의 정신적 풍요의 상징처럼 되었다. 근대미술품에서 시작한 미술에 대한 관심은 점차 현대 미술에까지 확산되어, 요즈음은 ‘단색화(모노크롬 회화)’가 장안의 화제가 되고 있다. 한 때는 특별한 사람들의 전유물이었던 미술품이 이제나 누구나 한 번 쯤은 관심을 갖는 ‘교양 과목’이 되었다.
모든 사회 현상이 그렇지만 세상을 주도하는 새로운 사조가 생기면, 항상 그에 따르는 부작용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사회현상이다. 근래에 일어나고 있는 인문학의 열풍, 미술품 수집의 과열 또한 그에 따른 부작용이 생겨 ‘인문학의 열풍’이 아니라 ‘인문학의 해이’로 이어지는 것은 매우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된 연유는 우리나라 미술 애호가들의 지적인 저변이 너무 얕은 데서 오는 결과인 것 같다. 빠른 부의 축적과 넘쳐나는 정보의 홍수는 ‘새로운 미술문화’를 형성할 수는 있었지만, 그동안 도외시 되었던 미술에 대한 감성 교육은 보완 방법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최근에 일어난 유명인 조영남의 그림대작(代作) 사건은 우리나라 미술계의 정신적 해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으로 보인다. 본업이 가수인 조영남은 도박 놀이기구인 ‘화투’의 키치(Kitsch, 속된)적 요소를 부각시킨 그림을 그려 ‘팝아트’를 추구하는 화가임을 자처하고 나섰다. 그는 가수로서의 명성을 등에 업고 화가로서 출세의 지름길을 달렸다. 스스로 ‘화수(畵手)’라 자칭하며 생각보다 어렵지 않게 유명화가의 반열에 들어섰다.
그는 자신의 능력을 지속적으로 확대하여 보이기 위해 여러 명의 조수를 고용하여 자신의 작품을 그리게 한다. 개념미술이나 팝아트 작가들이 작업장을 만들어 조수들에게 작품 제작을 맡기던 것에 자신의 입장을 빗댄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사실을 비밀리에 했다는 사실이다. 조수들이 대작했음이 밝혀지자 그는 앤디 워홀이나 백남준도 조수를 고용했음을 예로 들어 자신의 행위가 결백함을 주장하였다.
그런데 생각보다 점점 문제가 커져가고 있는 느낌이다. 대중들은 그의 행위의 정당성을 인정하지도 않고, 그를 용서하려고 하지도 않는 것 같다. 지금까지 살아 온 그의 예술가로서의 삶은 하루아침에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다. 왜 이렇게 된 것일까? 그토록 당당하던 그가 하루아침에 파렴치한 사기꾼처럼 대접받게 된 상황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조영남의 잘못된 의식은 성공한 지식인은 다른 분야에서도 쉽게 우월할 수 있다는 잘못된 ‘우월 의식’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예술적 기질이 강하고 어려서부터 미술적인 소양이 있었던 그는 자신이 그림을 그리면 짧은 시간에 자신이 음악에서 얻었던 것처럼 쉽게 명성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라 생각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예술 분야는 그렇게 쉽게 얻어 지는 것이 아니다. 인생의 모든 것을 걸고 끊임없이 완전한 경지를 추구하여 나갈 때 진정한 예술가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는 예술이란 시간 날 때 틈틈이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일찍이 깨달았어야 했다. 그가 방송에서 걸핏하면 말하던 백남준 선생의 “원래 예술은 고등사기다”라는 말 속에 ‘고등’이란 접두사가 있음을 그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전위 예술은 한마디로 신화를 파는 예술이지요. 자유를 위한 자유의 추구이며, 무목적한 실험이기도 합니다. 규칙이 없는 게임이기 때문에 객관적 평가란 힘들지요. 어느 시대건 예술가는 자동차로 달린다면 대중은 버스로 가는 속도입니다. 원래 예술이란 반이 사기입니다. 속이고 속는 거지요. 사기 중에서도 고등 사기입니다. 대중을 얼떨떨하게 만드는 것이 예술입니다.”
백남준의 말 속에 등장하는 신화, 자유, 실험, 예술가의 자동차, 얼떨떨한 대중 등의 말 속에 내재되어 있는 언어의 본질을 분명히 이해해야 할 것이다. 예술가는 대중을 눈속임으로 사기 치는 것이 아니라 신화를 만들 수 있는 각고의 노력과 자유로운 사고, 끊임없는 실험, 대중을 앞서가는 혜안으로 대중의 미적 감수성을 자극시켜 감동시키는 일이라는 것을 알았어야 했다. 예술은 일반적인 사기가 아니라, 지독히 수행하기 어려운 ‘고등 사기’라는 말이다.
그의 잘못도 있지만 동시대를 살아가는 미술계의 지식인들에게는 반성할 일은 없는가에 대해 한 번 쯤은 한 번 생각해 볼일이다. 그의 작품들이 팝아트의 범주에 드느냐 아니냐? 대작이 관행이냐 아니냐? 이러한 무질서한 비난과 옹호는 미술의 본질에서 벗어난 가치 없는 후일담들이다.
먼저 그의 작품의 본질에 대한 평가와 미술가로서의 행동에 대해서 개입했어야만 했다. 그의 작품이 조형적으로 훌륭한지, 팝아트로서 타당하고 올바른지 솔직하게 말해 주었어야 했다. 유명인이라고 가까이 하기에 바쁘거나, 연예인이라고 무시하여 방조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의 잘못은 본인의 부족한 능력을 외부의 능력에 기대어 살려고 한데서 온 것이다. 균형 감각이 없는 그의 문화적 소양과 미숙한 미술 소양이 만들어낸 ‘문화지체’의 대표적인 현상으로 보인다. 그의 작금의 상황을 보면 한 평생 히트곡 없이 남의 노래에 기대어 살아온 가수의 길과 남의 손을 빌어 그림을 그린 화가의 길이 너무도 유사하여 측은한 마음마저 들게 한다.
‘인문학의 열풍’이란 흐름에 편승하여 가장 활동적인 행위가 이루어지고 있는 곳 중의 하나가 방송사이다. 요즈음 인기 있는 케이블 방송 중 하나인 tvN에서는 성인들을 대상으로 인문학의 대중화를 표방하는 프로그램 하나를 방영하고 있다.
<어쩌다 어른>이라는 제목의 프로그램이다. 이 방송은 사회학을 전공한 최진기라는 강사와 역사를 공부한 설민석이라는 인물이 하는 방송 강의이다. 두 사람은 한 분야를 오래 동안 연구한 학자는 아니지만 화려한 액션과 듣기 좋은 입담으로 많은 시청자들의 인기를 얻고 있다.
이 중 최진기라는 이는 본래 대학과 대학원에서 사회학을 전공한 이로 여러 방계 학문을 섭렵한 후 현재는 수능 사회탐구영역(사회/윤리)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그는 학원 강의 외에도 TV 방송이나 인터넷 방송 등에 출연해 학습법, 경제 등에 대한 방송을 진행하기도 한다. 그의 강의는 고등학교 학생의 수준에 맞춘 매우 흥미로운 강의로 대단한 인기가 있다고 한다.
고등학교 입시 강사의 특징은 ‘전지전능’하다는데 있다. 그들은 가르치는 과목과 관련된 모든 것을 알아내 문제를 풀어낼 수 있는 ‘신(神)’이 되어야만 하는 존재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학원가에서 인기를 얻은 그를 방송에서 발탁했다.
그는 자신의 전공 영역인 사회탐구영역을 일반인 대상으로 대중화한 후 ‘인문학’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여 강의를 시작하였다. 그의 쇼맨십은 많은 흥미를 끌었고, 그는 전능하다는 듯 무불통지의 지식을 자랑하였다. 그런데 문제가 생긴 것은 그의 인문학이 지나치게 널뛰어 능력이 닿지 않는 미술 분야에까지 손을 뻗쳤다는 것이다.
그는 범위를 넓혀 <어른들의 인문학, 조선 미술을 만나다>라는 제목의 강의를 준비해 방송했다. 그의 전지전능은 짧은 시간에 한국 미술에 대한 모든 것을 알려주려는 듯 조선시대의 미술을 단 몇 마디로 명쾌하게 재단하는 듯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그의 지식이 미술이라는 인문학의 깊이 있는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단지 자신이 보고, 듣고, 알고 있는 것만으로 진정 한국미술을 이해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단원 김홍도나 조선시대 초상화에 대해 논하고, 친일 미술가들의 그림을 말하고, 한중일 삼국 미술의 차별성에 대해 거침없이 말했다. 많은 이들이 오래 동안 연구를 하여도 쉽지 않은 한국 미술의 특징이 그의 입에서는 쉽게도 설명됐다.
듣기 편치 않은 설명들임에도 패널들의 환호성 속에서 날라 다니더니, 급기야 조선 왕조 마지막을 장식한 천재화가 오원 장승업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한국 미술에 대해 돌이킬 수 없는 지경을 만들고야 말았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놀라운 일이었다. 그동안 수도 없이 많은 한국미술 강의가 있었지만 이런 참사는 보지 못했다. 필자는 이른 아침 우연히 튼 TV 화면을 보면서 낯 뜨겁고 부끄러워 어쩔 수가 없었다.
다음 날, 필자는 이 뜬금없는 강의가 크게 문제되었을 것이라 생각하여 인터넷을 접속해 보았다. 그러나 이 강의는 조선시대의 미술을 알기 쉽게 강의한 ‘명강의’로 여러 포털 사이트에 소개되며, 전국의 미술에 관심 있는 많은 이들에게 환호를 받고 있었다.
놀라운 일이었다. 그렇게 인기가 있다면 많은 사람들이 보았을 텐데, 잘못을 지적하는 이는 한 명도 없고, 어떻게 이렇게 찬사만이 있는 것인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의 강의의 문제점은 대강 이러했다. 그의 강의 대부분이 미술에 관한 인문학이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기초 공부가 되지 않은 내용이었다.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장승업과 관련된 부분이다.
그는 조선조 500여 년 미술을 가볍게 넘나들더니 일제강점기 대표적인 화가 김은호와 김기창의 친일 이력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이들과 달리 장승업과 같은 조선의 천재미술가는 조선 미술만이 가지는 뛰어난 능력을 보이며 이들의 그림과 다른 차별성을 보인다고 강조했다.
대표적인 예로 김기창의 말 그림과 장승업의 말 그림이라는 것을 비교하면서 예시했다. 장승업의 그림이라는 것은 10여 마리의 말이 뛰고 있는 것이었다. 오랜 세월 그림 공부를 한 필자는 순간 당황하였다. “장승업이 이런 말 그림도 그렸나? 저것이 장승업의 그림이야?" 순간 얼얼했다.
그가 예로 든 말 그림은 장승업의 그림이 아니다. 현대동양화가 중 한 명의 말 그림이었다. 서울 어느 대학을 퇴직해 아직도 생존해있는 이모 교수(올해 72세이신 前 同德女大 회화과 李良元 교수)의 그림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는 것인가? 그것도 제법 인기 있는 방송사에서 하는 강의에서 이런 사고가 일어날 수 있는가? 어안이 벙벙하였다.
강사는 더 나아가 “이 그림의 필력이 얼마나 뛰어난지 이 그림을 자세히 보고 있으면 이중섭의 소가 연상될 정도”이며, “이것이 진짜 조선화”라고 흥분하며 극찬하였다. 많은 패널들이 감동하여 입을 벌리고 있었다.
더욱이 조선시대의 그림은 ‘동양화’라 하면 안 되고 ‘조선화’라고 해야 한다며, “이것이 진짜 조선화다”라고 하는 대목은 섬뜩하기까지 하였다. 학문에서 유사한 종류의 덩어리를 이름 짓고 고유명사를 만들 때에는 매우 학문적이고 신중해야 한다.
학문에서 연구 대상의 갈래를 나누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고, 그래서 이를 연구하는 ‘갈래론’은 매우 어려운 학문이기도 하다. 함부로 이름 지을 것이 아니다.
또 ‘조선화’라는 명칭은 북한 회화의 한 장르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북한에서 말하는 조선화는 동양화의 맥을 이었으나 채색과 서양화적 기법이 더해진 독특한 양식의 그림을 가리킨다. 조선화는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수법을 추구해 추상성이 적고 주로 사실적 묘사와 채색으로 이루어진다. 강사 최진기는 이러한 사실을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단지 조선시대에 그린 그림이므로 ‘조선화’라 불러야 한다니, 이 또한 무슨 무책임한 이야기란 말인가?
다음 화면은 강사의 한국 미술에 대한 무지의 한계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자신의 말대로 ‘파격적 국면’이다. 장승업은 역동적인 말 그림뿐만 아니라 한 발 더 나아가 어느 작가도 따라오기 힘들만한 천재적인 능력을 보인다며 파초 그림을 예로 들고 있다.
그는 정조 임금의 <파초>, 현재 심사정의 <파초와 잠자리> 두 작품을 비교 대상으로 장승업의 <파초> 그림에 나타난 천재성을 이야기한다. 그는 “천재는 빨리 그림을 그린다”며, 장승업의 파초 그림이라는 특이한 작품 하나를 소개하였다. 필자는 또 한 번 절망하였다. “어디서 장승업의 이런 그림을 구해 왔지? 나는 잘 모르는 작품인데…” 아무리 봐도 장승업의 필치는 아니었다.
그는 정조 임금의 파초 그림을 동네 어린애 그림 던지듯 무시해 버리고, 심사정의 그림도 나쁜 그림은 아니라 하면서 장승업 솜씨만은 못하다는 말을 쉽게 던졌다. 정조나 심사정은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있는 화가들이 아니다.
특히 심사정은 장승업 못지않은 천재성을 지닌 화가이다. 특히 이 파초 그림은 심사정의 그림 중에서도 특별하게 좋은 수작 중의 하나이다. 오른 쪽 파초의 잎과 잠자리의 선이 둥그렇게 연결되며 작품에 리듬감을 주는 탁월한 묘사력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조선시대의 명품을 두고 ‘이것도 제법 그린 작품’이라는 표현을 한다는 것은 무지에서 오는 매우 불경스러운 태도이다.
더구나 그가 장승업의 작품이라고 소개한 파초 그림은 도대체 어디서 찾아온 것인지 보는 이를 아연실색하게 한다. 그는 현대에 그린 수묵화의 일종으로 보이는 정체불명의 한 작품을 세워 놓고 “전체를 안 그리고 부분만 잘라 표현한 파격적인 구도로, 잎과 줄기의 구분이 없고, 농담을 이용하여 과감한 빠른 붓질을 이용하여 빨리 그린 천재화가 장승업의 작품”이라며 소개하고 있다.
필자는 이 작품이 도대체 누구의 작품인지 너무도 궁금했다. 그러나 자료를 찾아보아도 쉽게 찾을 수 없었다. 추측으로는 현대 동양화가의 빠른 필력으로 그린 수묵화 같은데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우연히 인터넷을 통하여 이 작품이 임권택 감독의 영화 ‘취화선’과 관계있는 작품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장승업을 소재로 한 영화의 소품으로 쓰였거나 영화에 대필화가로 참여한 화가의 작품이라면 대충 상황이 이해가 될 만 하였다.
영화에 쓰기 위해 그린 작품을 장승업의 작품으로 오인하여 소개하고 있었던 것이다. 참으로 놀랄만한 일이다. 이를 어찌한단 말인가? 많은 대중들이 이러한 사실의 강의를 보며 감동하였고, 그의 강의를 듣고 한국 미술을 제대로 이해하게 되었다는 사람들이 많으니…
그의 잘못된 설명은 이것 뿐 아니다. 여백을 설명하기 위한 대상으로 쓰인 어몽룡의 <월매도>는 서울대박물관 소장품이나 어몽룡의 작품으로 인정되지 못해 ‘전(傳) 어몽룡 작’으로 소개하는 작품이다. ‘진작(眞作)’과 ‘전칭 작(傳稱 作)’의 구분도 하고 있지 못한다는 이야기다.
스쳐 지나가는 석파 이하응의 작품도 가품이며, 단원 김홍도의 도판 중의 한 점도 가품이 등장한다. 자세히 살피면 더 있을 것이다. 사용한 도판들의 진위를 전문가에게 전혀 자문을 받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방송을 보고 조선 시대의 미술을 이해하게 되었다는 사람들의 ‘새로운 지식’은 이제 어찌해야 하나? 감동이 강하면 고쳐지기 힘들 텐데 큰일이다. 이제라도 방송사는 프로그램을 점검하고 잘못된 점이 확인되면 오류가 있었음을 공고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시청자들에게 사과해야 한다. 우리의 자랑스러운 화가 장승업을 웃음거리로 만든 잘못을 시인하고, 방송사의 공익성을 훼손한 것에 대해 반성해야 한다.
파급력이 강한 방송사에서 건전한 삶의 양식이 되는 지식을 전달하는 강의를 만들기 위해서는 검증된 지식인을 내세워야 한다. 그 사람이 꼭 좋은 대학을 나오고 유명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가 가진 지식은 정확하고 고급스러워야 한다.
더욱이 ‘인문학’이라는 말을 쓰기 위해서는 극히 조심스러워야 한다. 잡담을 하듯 재미있게 말하는 것과 많은 이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공적인 강의는 구분해야 한다.(*)
인문학 강의는 홈쇼핑에서 상품을 소개하는 것하고는 다르다. 멋진 말로 듣기 좋게 말한다고 해서 좋은 강의가 될 수는 없다. 상품은 잘못되면 돌려주거나 바꿔주면 되지만, 예술에 관한 인문학 강의는 수강생의 머리에 전달이 되면 인생의 가치관 회로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반품하기 어렵다.
그래서 인문학 강의는 오랜 연구를 거듭하여 학문이 곰삭은 전문 연구가를 필요로 한다. 그의 말이 비록 어눌하고 사탕발림 같은 말장난을 잘하지 못하더라도 깊은 학문의 축적에서 나오는 향기가 있어야 한다. ‘학문의 즐거움, 학문의 아름다움’이란 그런 것이다. 이러한 향기가 우리의 삶에 뿌려질 때, 우리의 삶이 더욱 풍요로워 질 수 있을 것이다.
(황정수 | 한국미술사)
스마트 K [미술계이야기] 황정수 관리자 업데이트 2016.07.06 07:27
[참고작품들]
장승업의 군마도(群馬圖)
<조선고적도보>(1934)에 대표작으로 소개된 오원 장승업(1843∼1897)의 <群馬圖> 색채와 음영 없이 백묘법(白描法)으로 7마리의 말과 인물을 그린 이색적인 작품으로 필치에서 장승업의 개성을 엿볼 수 있다.
팔준도
조선시대(19세기 말) 장승업의 작품 <여덟 마리의 말>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배치된 다섯 마리의 말을 말의 자태 중 가장 아름다운 모습만을 골라서 보여주고 있다. 말의 앞모습과 옆모습, 그리고 고개를 뒤로 돌리고 선 모습까지 여러 측면에서 말을 감상할 수 있게 배치한 것이다. 고개를 숙인 말, 서있는 말, 투레질을 하는 말, 발굽을 구르는 말 등 말이 취할 수 있는 다양한 자세가 한 화면 속에서 한꺼번에 보여지고 있다. 현재 호암미술관에 소장 중이다.
이양원 교수의 군마도
파초와 잠자리
沈師正, 종이에 담채, 32.7×42.4cm, 풍서헌 소장
* 현재 심사정의 화조화 중에서 가장 玄齋다운 그림은 ‘파초와 잠자리’이다. 돌과 파초와 풀과 잠자리, 그 이상 화면에 그려진 것은 없지만 잔잔한 분위기가 아름답게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파초잎의 흐드러진 표현, 내려앉는 잠자리의 표현, 아무렇게나 그은 풀포기에서 우리는 묘하게도 해맑은 정서와 애잔한 분위기를 동시에 느끼게 된다. 고독이나 우수의 감정이 거기에 표현되어 있지 않은 것 같지만 이 그림을 보면서 일으키게 되는 정서는 분명 애수로 그것은 현재 심사정 그림의 큰 특징이기도 한다.
* 조선시대 그림에는 파초가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데, 당시 선비들이 집에 완상용으로 심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겸재 정선의 그림에도 파초가 보이고, 정조대왕도 조그만 바위 옆에 있는 파초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런데 심사정은 그답게 파초를 그리면서 잠자리 한 마리를 따로 그려 넣었습니다.
이 그림 속의 잠자리는 어떻습니까? 먹으로 그냥 쓱쓱 그린 것 같은 데 이렇듯 자연스럽게 잠자리를 그릴 수 있다는 사실이 그저 신기할 따름입니다. 머리, 날개, 몸통, 꼬리, 다리, 어느 하나 어색한 부분이 없습니다. 이처럼 화폭에는 파초와 잠자리밖에 그린 것이 없지만 해맑은 시정이 배어 있는 애잔한 분위기가 살아 있습니다.
심사정은 어렸을 때 겸재 정선에게서 그림을 배웠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러나 겸재처럼 여기저기 돌아다닐 여유도 없거니와, ‘역적의 후손’이 밖으로 나다니는 것도 부담스러워서인지, 겸재처럼 진경산수화는 거의 남기지 않았습니다. 그가 주로 그린 산수화는 중국 남종화를 바탕으로 한 산수화로 우리 자연과는 사뭇 다른 모습의 산수화입니다. 그런 이유로 심사정의 산수화를 독창성이 없다고 낮게 평가하는 경향도 있지만, 그가 이런 산수화를 그린 것도 어쩌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 싫은 마음 때문은 아닐까 하는 추측도 해봅니다.
이병연 ‘오우(午雨)’ - 심사정 <파초와 잠자리>
파초잎 두드리는 소리 그치지 않는데
먹과 붓을 기본으로 하는 옛 그림은 그 테크닉이 먹과 붓을 사용하는 데서 시작돼 끝이 난다고 해도 과장은 아니다. 이른바 용묵법과 용필법이다. 그런데 문인화가들이 그림 제작의 전면에 나서면서 그림은 먹의 솜씨에 치중하는 용묵보다 붓의 사용을 중시하는 용필 우위로 기운 듯한 느낌도 없지 않다.
19세기 중반에 제작된 세한도의 사례를 보면 단연 용필 우위이다. 세한도에는 물기가 적은 먹을 붓에 찍어 굵은 둥치를 비롯해 옆으로 뻗어간 가지 그리고 그 아래 아무도 보이지 않는 빈 집이 선의 형태로서만 묘사되어 있다. 끊길 듯 이어진 필획 안에는 가끔씩 구멍이 보일 정도로 거칠다. 그 필획 속에는 누구나 하늘을 찌를 듯한 자긍심이 처절한 유배 생활로 산산이 무너지고 있는 절절한 화가의 심정을 느껴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사례는 전체로 보면 일부에 불과하다. 더욱이 시의도가 소개되어 유행하기 시작하던 18세기 초중반의 화단은 문인화가와 화원화가가 거의 백중세였다. 이들 사이에서는 용필이나 용묵은 그다지 구별 없이 사용되었다. 단 관심이 모아지고 있었던 것은 붓과 먹을 가지고 어느 지점까지 회화적 표현을 실현해낼 수 있는가 하는 문제였다.
이 시대 먹 사용을 극단까지 밀고 나가 성공을 보인 화가는 다름 아닌 겸재 정선이다. 그가 그린 인왕제색도를 보면 짙은 먹을 잔뜩 묻힌 붓을 과감하게 휘둘러 비가 그친 인왕산의 모습을 진짜처럼 생생하게 그려낸 성공작이라 할 수 있다.
어린 시절 그의 가르침을 받은 현재(玄齋) 심사정(沈師正, 1707~1769) 역시 먹의 사용에 일가견이 있었다. 그에게도 앞서의 신로처럼 소낙비 내린 뒤의 정원 한 장면을 그린 그림이 있다. 거기에서 그는 수증기 사이로 내리 꽂히는 어색한 햇살은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보다는 비온 뒤 물기를 머금은 공기 속을 굴절해 명징한 색감을 보여주는 정원 속 작은 사물들을 먹을 위주로 생생하게 묘사했다.
심사정 <파초와 잠자리>(부분) 지본담채 32.5×42.5cm 개인
그가 그린 <파초와 잠자리>란 제목의 작은 그림이다. 그림에는 커다란 태호석(太湖石)을 배경으로 무성한 잎을 달고 있는 파초 두 그루를 그리고 그 옆으로 큼지막하게 잠자리 한 마리를 보여주고 있다.
태호석은 구멍이 숭숭 뚫린 돌을 가리킨다. 현재는 먹선 하나 사용하지 않은 채 울퉁불퉁한 윤곽의 돌 형체를 재현해낸다. 또 우뚝한 파초 역시 먹물의 농담을 적절히 구사해 비를 맞아 한층 싱싱하게 하늘을 향해 펼쳐진 모습으로 그렸다. 이 돌을 향해 잠시 쉬어가려는 듯 날아드는 잠자리도 선이 아닌 먹으로 그려 놓았다.
그림 속의 선은 파초 줄기의 윤곽과 잎맥에 그려 넣은 몇 개가 전부이다. 상당한 수준 급의 먹 사용(用墨)을 보여주는 작품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 그림 한 쪽에 ‘芭蕉喧未已 寒雀坐無聊 玄齋(파초훤미이 한작좌무료 현재)’라고 썼다. 도장(印文은 ‘禪墨’으로 심사정의 호)이 잠자리 꼬리에 딱 달라 붙어있어 조금 불만이지만 글씨는 매우 활달하다. ‘훤(喧)’자는 지껄일 훤자로 시끄럽다는 뜻이다. 그래서 내용은 ‘파초 시끄러운 게 그치지 않고 여전한데, 한데서 추위에 떠는 참새 무료히 앉아 있네’이다.
글자대로라면 파초가 혼자 시끄럽게 지껄인다는 게 된다. 이래서는 어색하다. 아닌 게 아니라 이는 원문을 잘못 적어 넣은 것이다. 원시 ‘오우(午雨)’는 이렇다.
破蕉喧未已 파초훤미이 파초잎 두드리는 소리 그치지 않는데
寒雀坐無聊 한작좌무료 참새는 떨면서 무료히 지켜보네
一陣蕭蕭雨 일진소소우 한 줄기 우수수 내리는 비
西窓度寂廖 서창도적료 쓸쓸히 서쪽 창을 지나는 것을
파초 잎을 우두둑 두드리면서 소나기가 쏟아지자 잎 사이로 참새 한 마리가 숨어들어 오돌오돌 떨며 비 지나기기를 기다리는 순간을 읊은 시이다. 파자는 현재가 쓴 파초(芭蕉)의 파가 아니라 소낙비가 파초를 우두둑 하고 두드린다는 파(破)자이다. 유심히 지켜보지 않으면 놓쳐버릴 자연계의 한 장면을 스냅사진 찍듯 이렇게 묘사한 장본인은 조선후기 최고의 시인이라 일컫는 이병연(李秉淵, 호는 槎川, 1671~1751)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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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MART K 2013.10.3 윤철규
정조대왕필파초도(正祖大王筆芭蕉圖)
종 목 보물 제743호
분 류 유물/ 일반회화/ 영모화조화/ 화조화
수 량 1폭(幅)
지정일 1982.12.07
소재지 서울 중구 필동3가 26 동국대학교도서관
시 대 조선시대
소유자 동국대학교
관리자 동국대학교
조선시대 정조(재위 1776∼1800)가 그린 그림으로, 바위 옆에 서 있는 한 그루의 파초를 그렸다. 정조는 시와 글에 능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림에도 뛰어났다고 한다.
이 그림은 가로 51.3㎝, 세로 84.2㎝ 크기로 단순하면서도 균형적인 배치를 보여준다. 먹색의 짙고 옅은 정도 및 흑백의 대조는 바위의 질감과 파초잎의 변화를 잘 표현하였다. 그림 왼쪽 윗부분에 정조의 호인 ‘홍재’가 찍혀 있다.
형식에 치우치지 않은 독창적인 묘사가 돋보이는 이 그림은 글씨와 그림 및 학문을 사랑한 정조의 모습과 남종화의 세계를 보여주는 것으로, 국화도(보물 제744호)와 함께 조선 회화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전문설명]
정조(正祖)의 이름은 이성, 자(字)는 형운(亨運), 호(號)는 홍재(弘齋)이며, 따로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이라는 별호(別號)를 썼다. 학문이 깊고 시문(詩文)에 능하며 서화(書畵)에도 일가(一家)를 이루었다. 그러나 그의 그림은 전하는 것이 매우 적은데, 이 그림은 국화도(菊花圖)(보물 제744호)와 함께 조선회화사료로 중요한 자료가 된다. 본래 일본에 거주하는 교포 고 장석(故 張錫)씨의 소유이던 것을 동국대학교가 기증 받은 것이다. 이 그림은 아무런 배경이 없이 한 그루의 파초와 괴석을 그린 간단한 구성이다. L자형의 굽은 괴석 끝에 파초줄기와 넓은 잎을 적절히 배치하여 청초한 구성을 이루었다. 파초잎과 바위를 그린 먹빛의 농담(濃淡)은 고아(高雅)한 문인의 자연스러운 정취를 풍기어 제왕의 부귀상(富貴相)보다는 고담(枯淡)하고 활발한 기운을 느낄 수 있다. 화면 왼쪽 윗부분에 홍재(弘齋)의 주문인(朱文印)과 또 하나의 백문방인(白文方印)이 찍혀 있다.
(문화재청)
정조 ‘파초’
보물 제744호인 ‘정조대왕필국화도’와 재질이나 크기가 같아서 처음부터 쌍폭으로 그린 것으로 보인다.
바위 옆에 서 있는 한 그루의 파초를 묘사한 그림으로 왼편 위쪽에 정조의 호인 '弘齋'(홍제)의 백문방인(白文方印)이 찍혀 있어 정조의 작품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비교적 단순한 주제를 다루었지만 균형 잡힌 포치(布置), 은은히 풍기는 문자향, 농담을 달리한 세련된 묵법 등이 돋보여 남종문인화의 높은 경지를 드러낸다.
기법적인 측면에서도 대단히 세련된 면모를 보여준다. 먹의 농담과 흑백의 대조에 의하여 바위의 괴량감과 질감 및 파초잎의 변화감을 잘 표현하였다. 또한 농담을 달리하여 파초잎을 대강 나타낸 뒤 잎 가장자리에 꼬불꼬불한 선들을 덧대듯이 구사하여 마무리지은 기법도 몰골법(沒骨法)의 동체(胴體)와 함께 주목된다.
틀에 매이지 않은 방법으로 표현된 이 파초도는 서화와 학문을 사랑한 정조의 면모와 남종화의 세계를 잘 드러낸다. 조선시대 왕의 작품으로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다.
영화 <취화선>에 소품으로 등장하는 어느 대필 화가의 <파초도>
* 나도 최진기 강사가 지은 <인문의 바다에 빠져라2 서양미술사>를 17000원 주고 사서 읽으면서 전공도 안했는데 깔끔하게 잘 정리했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