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한국 천태종을 개창한 인물은 누구일까?
그 동안 학계에서는 한국 천태종의 개창조를 대각국사 의천 스님으로 보는 것에 별다른 이견이 없었다. 이는 의천 스님이 입적한 후 세워진 ‘선봉사비’에 스님이 고려 천태종의 시조임을 밝히는 ‘해동천태시조대각국사(海東天台始祖大覺國師)’라 명기돼 있기 때문이다.
또 이 비의 뒷면에 새겨진 음기(陰記)에 의하면 “의천 스님은 숙종 6년인 1101년 봉은사에서 최초의 천태종 스님을 뽑기 위한 시험인 대선을 실시했다”며 “이로써 고려 초부터 있던 조계종, 화엄종, 유가종의 3대 종파에 천태종이 더해짐으로써 4대 종파가 되었다”고 기록돼 있기 때문이었다.
이로 인해 그 동안 학계에서는 대선이 최초로 치러진 1101년을 천태종의 공식적인 개창 시점으로 보았으며 이는 통설로 굳어지는 듯 했다. 특히 서울대 최병헌 교수는 일련의 연구를 통해 “교관병수(敎觀竝修)를 실현하려는 의천 스님의 이상이 천태종의 개창으로 이어졌다”고 주장했다. 그는 창종 목표에 대해서도 “화엄종과 라이벌 관계에 있던 법상종과의 대립에서 제 3의 선종을 포섭함으로써 오히려 화엄종의 위치를 강화하려는 정치적 의도가 강하게 반영된 것”이라며 “제 3종단인 선종을 억압, 포섭함으로써 천태종을 개창하고, 자신은 화엄종에 의연히 머물면서 천태종을 아울러 영도하려는 의도를 가졌던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1986년 허흥식 교수는 「천태종의 형성과정과 소속사원」이라는 논문을 통해 “의천 스님은 직접 천태종 개창을 시도하지 않았으며 천태종 형성은 의천을 추종했던 선승(禪僧)들이 살아남기 위한 일종의 자구책일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허 교수는 논문에서 “‘선봉사비’가 어째서 의천의 발자취가 뚜렷하지 않은 선봉사에 세워졌는가는 의문이 든다”며 “이는 의천 문하로 직접 들어온 문인들과 법안종의 영향을 받은 오산문도(五山門徒)와의 주도권을 둘러싼 분쟁이 있었고 선봉사를 중심으로 존립하던 의천 스님 문하 문인들이 오산문도와의 주도권 분쟁에서 밀려 의천 스님의 발자취가 거의 없는 선봉사에 이 비를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고 주장했다.
허 교수는 또 “△선봉사비에 의하면 의천 스님이 천태종의 최초 승과 시험인 대선을 봉은사에서 치렀다고 기록돼 있지만 의천 스님의 문집이나 다른 비문에는 이 같은 내용을 찾을 수 없다는 점, △천태종의 승과를 천태종의 중심사원인 국청사가 아니라 조계종 사찰인 봉은사에서 실시했다는 점, △통불교적인 입장에 모든 종파간의 대립을 화합으로 이끌려고 노력했던 의천 스님이 또 하나의 종파를 개창했다는 점은 의문”이라고 강조했다. 따라서 허 교수는 이 같은 점을 유추할 때 의천 스님이 천태종을 개창 했다고 보기는 어려우며 의천 스님을 추종했던 선승들에 의해 천태종은 창종 됐을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또 97년 장휘옥 박사도 「천태종 개창에 대한 의문」이라는 논문을 발표하며 허 교수의 이같은 주장에 힘을 실었다.
이에 대해 김상현, 이영자 교수 등은 “의천 스님의 천태 관련 행적을 보면 이미 송나라로 유학하기 이전부터 천태교학의 필요성을 느꼈으며, 송에서도 천태종의 거장인 자변 종간을 찾아가 천태교관을 전수 받고, 또 천태지자 대사의 탑 앞에서 천태교학이 끊어지지 않게 할 것을 서원한 점, 또 귀국해서 천태종 본산인 국청사 주지가 되어 천태교학의 선양에 진력했던 점을 미뤄볼 때 고려 천태종의 개창조는 의천 스님으로 보는 것이 타탕하다”고 반박했다. 여기에 의천 스님의 천태종 개창에 의문을 가졌던 장휘옥 박사도 99년 「의천의 천태종 개창 재고」라는 논문을 통해 기존의 주장을 번복했다.
현재까지 학계에서는 고려 천태종의 개창조는 의천 스님일 것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그러나 화엄종으로 출가해 입적할 때까지 화엄학을 중시했고, 또 종파간의 대립을 화합으로 이끌려는 통불교적 입장을 고수했던 의천 스님이 왜 천태종을 개창했는지, 그 창종 의도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밝혀지지 못했다. 따라서 학계에서는 이 부분에 대한 논쟁이 계속될 전망이다.
권오영/법보신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