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을 부수라!
왕따의 문제가 사회적인 문제가 된 지도 오래되었습니다. 한 인격의 약점이나, 신체적 혹은 기능적인 연약함을 괴롭히는 사람들이 존재합니다. 우리 사회에서 가장 먼저 사라져야 할 문제입니다. 복음서를 통해서 보는 예수님은 그런 의미에서 왕따들의 친구였습니다. 이 시대의 교회와 성도들이 본받고 실천해야할 삶의 방향입니다.
사마리아 작은 동네 수가에 사람들이 모두 미워하는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행실이 단정하지 못해 남자들이 자주 바뀌는 여자였습니다. 사람들의 눈에 그녀는 미풍양속을 해치는 나쁜 여자였습니다. 그녀의 집 주변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폴리스 라인이 쳐져 있습니다. 아이들도, 여인들도, 남자들도 남자들도 괜한 오해 살까봐 가까이 하지 않습니다. 어느새 그 여인의 집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담이 쌓였습니다. 고독사란 단어가 일상적인 단어가 되어가는 시대입니다. 홀로 외로이 살다가 죽는 것이 고독사입니다. 많은 비극적인 죽음이 존재하지만 고독사만큼 비참한 죽음도 없습니다.
그 여인도 동네 사람들을 만나는 것을 피했습니다. 다른 여인들이 물을 뜨는 시간을 피해서 물을 뜨고, 얼굴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서 노력했습니다. 여인네들이 모여 도란 도란 이야기꽃을 피우는 우리네 우물 문화처럼 유대인들도 샘 곁에 보여 수다를 떠는 정겨운 모습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여인은 거기에 끼지 못했습니다.
담이 생기는 이유는 구별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그 구별이 차별이 되면, 구별은 담이 되고, 담은 소통을 막아 결국 넘을 수 없는 장벽이 됩니다.
사마리아 땅 수가라는 작은 마을에는 한 여인을 두고 사람들이 쉽게 넘을 수 없는 담이 아닌 장벽이 만들어졌습니다. 사람들은 그 여자의 아픔을 이해하기보다는 자기 잣대로 그녀의 삶을 판단하고 정죄했습니다. 우리 사회의 왕따가 그런 모습입니다.
왕따로 살아가는 그 여인에게 다가가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말 한마디 다정하게 건네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왜 그렇게 살아야 하느냐고? 물어보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녀의 아픔과 고통에 무관심한 사람들, 오늘 이 시대 우리의 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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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의도를 갖고 행동합니다. 굳이 유대인들(제자들)이 꺼려하는 사마리아땅으로 길을 잡으셨을 때는 수가성에서 일어난 이 모든 일은 우리에게 주시는 선명한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너도 담을 쌓고 살지 않느냐? 생각이 다르다고, 상종하지 못할 사람이라고 정죄한 사람들이 있지 않으냐? 나는 그런 사람을 만나러 간다. 네가 만든 담을 그와 말하기 위해서 찾아간다. 그러니 너도 그렇게 해라.”
학벌,외모,자역,혈통,정치적 입장등 모든 담들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예수님은 희생의 제물이 되었습니다. 그 담을 다시 쌓는 어리석은 그리스도인이 되지 맙시다.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 가수 코리아나가 불렀던 “손에 손잡고”라는 노래입니다. “하늘 높이 솟는 불, 우리의 가슴 고동치게 하네. 이제 모두 다 일어나 영원히 함께 살아가야 할 길 나서자. 손에 손 잡고 벽을 넘어서 우리 사는 세상 더욱 살기 좋도록, 손에 손 잡고 벽을 넘어서 서로서로 사랑하는 한마음 되자. 손 잡고”
대한민국의 현 상황속에서 많이 불러야하는 노래가 아닐까요? 남이 쌓은 벽은 내가 어찌할 수 없지만, 내가 만든 벽은 부술 수 있습니다. 오늘도 사마리아 수가성을 향해 걸어가시는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 벽을 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당부합니다.
그것이 전도의 첫걸음입니다. 내 마음의 장벽을 부수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소통
오늘 대한민국은 지구상에서 가장 앞선 인터넷 공화국입니다. 사건이 터질 때마다 SNS로 모든 사람이 다 자기 의견을 쏟아 냅니다. 온통 나라가 벌집을 쑤셔 놓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서로 손가락질을 하면서 "불통공화국”이라고 화를 냅니다.
소통은 말을 많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소통의 가장 중요한 원칙은 서로의 이야기를 듣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그 듣고자 하는 것이 진심이어야 합니다. 불통의 대한민국 안에서 누가 먼저 소통을 위해 귀를 열어야 할까요? 교회와 성도들입니다.
몇 년 전 우리나라 가수들이 평양을 방문해 공연한 적이 있습니다. 한 가수는 아버지가 함경도 출신이라고 소개하면서 함경도 사투리가 들어간 노래를 불렀습니다. ‘아바이 밥 잡쉈소. 아바이 밥 잡쉈소’라는 가사가 나올 때였습니다. 굳은 표정으로 노래를 감상하던 북한 관객의 입가에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습니다. 고개를 끄덕이고, 박자에 맞춰 손뼉을 치기도 했습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노래로 서로 공감하고 소통했던 것입니다. 성경은 세상을 가리켜 혼돈하고 흑암이 가득하다고 표현합니다.
서로의 언어가 달라서 소통하지 몫하고 흩어졌던 바벨과 같은 상태입니다. 그런데 이것에 하나님의 아들이 오셨습니다. 신의 영역에서 인간의 영역으로 우리와 함께 살면서 먹고 마시고 웃고 울며 하늘의 노래를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의 기쁨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마스크를 쓰고 핸드폰에 얼굴을 파묻고 살아가는 젊은 세대를 봅니다. 소통보다 개인의 이익이 우선시 되며 소통이 사라져가는 이때 적어도 그리스도인만큼은 세상이 하늘 아버지와 소통할 수 있도록 소통의 도구로서의 역할을 장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물을 달라.”고 하셔서 그 여인이 “왜 유대인 남자가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하느냐?”는 빈정거림을 들으셨습니다. 그리고는 생수 장사처럼 말씀했습니다. “물 달라는 사람이 누구인지 네가 알았더라면 나에게 생수를 달라”고 했을 것이다.
그러자 여인이 묻습니다. “이 우물은 깊고 그릇도 없는데 어떻게 당신이 생수를 줄 수 있겠습니까?” 대화가 안되는 겁니다. 한쪽은 영적인 이야기를 하고 한 사람은 진짜 우물물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물 얘기를 하는데 전혀 다른 물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인이 결정타 한방을 날립니다. “당신이 야곱보다 큽니까?”여인의 말에는 날이 서 있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말씀하십니다. “이 물을 마시는 자는 다시 목마르겠지만,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다시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그러자 여인이 빈정댑니다. “나에게 그런 물을 줘서 다시는 물 길러 오지 않게 해달라.”예수님은 이 여인과 대화를 이어갑니다.
우리 아이들하고 이야기할 때 이런 느낌 오지 않습니까? 엄마가 이야기하는 물과 애들이 말하는 물은 노는 물이 다르죠? 세상과의 소통이 이렇습니다. 잘 안됩니다.
그렇다고 소통을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소통의 목적은 스스로 자신을 돌아보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예수님 같은 하늘의 통찰력이 없습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의 삶에서 영적인 필요가 있는 부분이 반드시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해야 합니다. 어떻게 어떤 말로 다가가야 할지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이번에는 예수님이 정곡을 찌릅니다. “남편을 불러오라”그 여인에게 가장 아픈 손가락은 남편입니다. 남편 때문에 마을 사람들애게 손가락질을 받고, 외면당한 채 살고 있습니다. 그녀의 삶의 가장 괴로운 고통의 뿌리입니다. 그래서 당연히 부인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상처를 드러내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없다고 하거나 아니라고 합니다. 이 여인도 마찬가지였습니다.“나는 남편이 없나이다.”사실 남편이 뭐 그렇게 중요한가요? 미국의 어떤 여자는 개를 파는데 남편도 끼워서 판다는 광고를 내서 화제가 되었답니다. 당근 마켓에 남편 팝니다. 뭐 이렇게 올라올 날도 머지 않았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네가 어떤 사람인지 생각해봐라하고 하신 말씀입니다. “너에게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맞구나” 여인은 즉답을 피해갑니다. “내가 보니 선지자시군요.”
그녀는 예수님이 자기를 비난하지 않는 것에 마음을 열었습니다. 소통하면서 비난하는 것은 담을 쌓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그녀의 마음 깊은 곳에서 그녀의 문제를 해결하고 싶다는 갈망을 보았습니다. 그녀의 영적인 소원을 고백하게 만들었습니다.
“나도 하나님을 예배하고 싶습니다.”소통은 감춰진 가장 깊은 곳을 들여다보는 통로입니다. 바로 그곳이 예수님의 은혜가 필요한 부분입니다. 늘 말씀드리지만 부자고, 성공한 직장인이고, 안정된 가정이 있었지만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나야만 했습니다. 구원이 그 가정에 선포되어야 했습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나고 자기 재산의 반을 포기할 수 있는 힘이 생겼습니다. 예배에 관한 긴 이야기의 끝에 그 여인은 예배의 장소가 사마리아가 맞는지, 예루살렘에 맞는지 메시아가 오시면 알 수 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언젠가가 아니라 바로 오늘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며 내가 바로 네가 기다리던 그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교회와 성도들은 세상을 위한 하나님의 소통의 도구입니다. 세상의 아픔과 어둠을 치료하고, 회복시킬 수 있는 유일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고 증거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문제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순간 해결된다고 믿음으로 선포하는 사람들입니다. 불통의 시대 소통의 도구로 쓰임받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간절히 당부드립니다.
물동이를 버려두고
이 여인은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깨닫기 시작합니다. 뭣이 중헌디? 알게 됩니다. 자기에게 필요한 것은 재력있는 남편이 아니었습니다. 남편을 바꾼다고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녀는 마을로 달려갑니다. 그런데 그 우물에 왔던 목적, 물을 담아가야 하는 물동이를 버립니다. 사람이 세상의 필요를 버린다는 것은 대단한 결심이 아니면 불가능합니다. 그녀의 결단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남편도 버리고, 당장에 마실 물도 버리고 그에 관해서 부끄러움을 무릎쓰고 마을 사람들에게 달려가 전해야할 그리스도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왜 우리가 온전히 그리스도를 닮은 삶으로 바뀌지 않는가? 말씀대로 순종하는 삶이 불가능한가? 내 삶의 주인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에 대해서 진심으로 동의하지 못하는가? 버림의 결단이 안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살면서 가장 어려운 것이 자신이 좋아하고 사랑하고 아끼는 것을 버리는 것이 가장 힘든 일이기 때문입니다.
중생의 비밀은 버림의 결단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서 계속 그 요구를 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고향과 아비집을 떠나라는 결단,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결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430년이나 정들고 살아온 이집트를 떠나라는 결단, 다니엘과 세 친구에게 타는 풀무불로, 사자굴로 뛰어들라는 결단, 에스더에게 죽으면 죽을 것이라는 결단, 갈릴리의 어부들에게 배와 그물을 심지어 아버지를 두고 따르라는 결단. 재물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는 결단, 그 결단앞에서 주저하고 망설이지 않을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내 미래가 걸렸고, 내 자식이 결렸고, 내 부모가 걸렸는데, 그러나 버리는 결단을 해야 예수를 얻습니다. 영생을 얻습니다. 천국을 얻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영광을 얻습니다.
세계최대 기업이라고 할 수 있는 마이크로소프트는 도스(Dos)를 통해 성공한 회사입니다. 회사 초창기 빌게이츠는 MS-DOS를 통해 큰돈을 벌고 세계최고기업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떼돈을 벌게 했던 그 MS-DOS를 생산하지 않습니다.
MS-DOS를 생산하지 못하게 한 사람은 누구였을까요? 빌게이츠 자신이었습니다. 최사에 엄청난 이익을 가져다주었지만 그는 더 이상 MS-DOS를 의지하지 않고 버렸습니다. 버리는 결단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대신할 새로운 제품을 개발했습니다. 그것이 윈도우(Window)입니다. 빌게이츠는 말합니다.“내가 MS-DOS를 죽이지 않았다면, 다른 누군가가 MS-DOS를 죽였을 것입니다.”그렇습니다.
현재의 성공에 도취되면 결국은 실패하게 됩니다. 우리의 개인적인 삶도,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코로나19는 버리라는 결단을 하나님이 교회와 성도들에게 요구하신 사건입니다. 교회의 구습과 잘못된 관행을 버리고, 성도들의 삶에서 간절함이 사라진 신앙을 회복하라는 강력한 사인입니다. 교인의 30%가 교회안에서 사라졌습니다.
지난 월요일에 건강검진을 하면서 집사람이 용종을 떼어 냈습니다. 의사는 사전에 동의를 구하고 망설이지 않고 떼었습니다. 갖고 있어야 몸에 좋지 않기 때문입니다.
의사들은 망설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땅과 하늘 사이에서 망설입니다. 야곱처럼 어떻게 하면 세상의 것을 지킬수 있을까? 궁리를 합니다. 결국 다 포기해야 합니다. 다 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삽니다. 교회도 결단해야 합니다. 모세를 나일강에 던져야 엄마 품으로 돌아옵니다. 버림이 얻는 것입니다. 버림이 사는 것입니다.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그들이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마을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그녀의 진실한 고백이었습니다. 그녀의 부끄러움과 수치가 마을 사람들을 예수님에게로 이끌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전도하라! 내 마음의 담을 부수십시오. 진심으로 경청하는 소통을 하십시오. 자신을 진실하게 드러내십시오. 나머지는 주님이 하십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