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절에는요 여자들이 시렁 위에 얹힌 작지만 앙칼진 칼 하나씩 손에 들고 나오는데요 여자들이 칼을 들고 설쳐도 암말 못하는 건 지천에 내걸린 풋것들을 오살지게 베어다 서방과 새끼들을 거두기 때문인데요 이 시절에는요 세상 모든 여자들은 코밑이 거뭇해지고 팔뚝 속에 알이 차올라서는 지천에 돋는 풋것들이 아까워라, 아까워라 저도 모르게 들판과 한판 엉겨붙게 되는데요 난생처음 억세디억센 수컷이 되는데요 가끔씩 그 독한 칼날에 논배미가 잘리고 칡뿌리가 잘리고 수맥이 잘리기도 하는데요 이 시절 여자들은요 푸줏간 안주인이 내걸린 고기들을 슥슥 잘라가듯 이 나무 이 바람 이 구름을 훌훌 베어 망태기에 담아서는 종다리처럼 지저귀며 언덕을 넘어가는데요 하늘도 암말 못한다는데요
* 문성해시집[입술을 건너간 이름]-창비
* 미역국 끓는 소리
방에 누워 부엌에서 미역국 끓는 소리를 듣는다
비릿한 미역줄기들이 커튼처럼 우리 집 창틀에 매달리는 걸 본다 그 속에 미역줄기 같은 머리를 감고 죽은 앵두집 아이도 보인다 그 아이의 심하게 접힌 다리가 이상하게도 펴져 있었다 저수지에 빠져 죽은 그 아이 그곳에선 앉은뱅이 다리가 쉽게 풀리더라고 부러진 의자들도 수초처럼 물결에 흔들리며 서 있다고 그곳에선 모든 것이 펄펄 끓는 춤이더라고
방안에서 듣는 미역국 끓는 소리는 다급하게 누군가 우리 집 지붕을 열려고 들썩거리는 소리 같다 장롱 속 이불들이 들썩거리고 옷장 속 개어진 옷들이 천천히 일어서고 저수지 아래 가라앉은 내 노래가 서서히 비등점을 향해 끓어오를 때 *
* 문성해시집[자라]-창비
* 국화차를 달이며
국화 우러난 물을 마시고 나는 비로소 사람이 된다 나는 앞으로도 도저히 이런 맛과 향기의 꽃처럼은 아니 될 것 같고 또 동구 밖 젖어드는 어둠 향해 저리 컴컴히 짖는 개도 아니 될 것 같고
나는 그저 꽃잎이 물에 불어서 우러난 해를 마시고 새를 마시고 나비를 모시는 사람이니
긴 장마 속에 국화가 흘리는 빗물을 다 받아 모시는 땅처럼 저녁 기도를 위해 가는 향을 피우는 사제처럼 텅텅 울리는 긴 복도처럼 고요하고도 깊은 가슴이니
* 강물 위의 독서 비가 오면 강물은 제 하고 싶은 말을 점자로 밀어 올린다
오늘은 물속이 흐리다고 물고기들 눈빛도 커튼을 친 양 흔들리고 있다고
오늘은 땅과 물의 경계가 없어졌으니 강물에서 죽은 이들이 발도 없이 걸어나갔다고 뉘 집에선지 전 부치는 냄새가 발을 달고 건너온다고 출출하다고
* 자라
한번도 만날 수 없었던
하얀 손의 그 임자//
취한(醉漢)의 발길질에도
고개 한번 내밀지 않던,//
한 평의 컨테이너를
등껍질처럼 둘러쓴,//
깨어나보면
저 혼자 조금
호수 쪽으로 걸어나간 것 같은//
지하철 역 앞
토큰 판매소//
오늘 불이 나고
보았다//
어서 고개를 내밀라 내밀라고,
사방에서 뿜어대는
소방차의 물줄기 속에서//
눈부신 듯
조심스레 기어나오는
꼽추 여자를,//
잔뜩 늘어진 티셔츠 위로
자라다 만 목덜미가
서럽도록 희게 빛나는 것을 *
* 문성해시집[자라]-창비
* 자작나무
너의 상처를 보여다오
아무도 내 앞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허연 붕대를 휘날리며 서 있는 자작나무들
오래전
죽은 자의 수의를 걸쳐 입은 듯
온몸이 붕대로 친친 감긴
나무들의 미라여
지하 어딘가에 꼭꼭 숨겨진 그를
지상으로 발굴한 자는 누구인가
보름달 빛이 고대의 자태로 내려오는 밤이면
붕대자락이 조금씩 풀린다 하고
그 속에서 텅텅 우는 소리 들린다 하고
나는 태초에 걸어다니는 족속이었으니
이것을 푸는 날은 당당히 걸어가리라
그때마다 잘 가꾸어진 공원의 연둣빛 나무들
조상 대대로 내려오던
원형의 전설을 들은 듯
한곳에 내린 뿌리가 조금씩 들뜬다 하고 *
* 문성해시집[자라]-창비
* 국수집에서
행주산성 밑자락 허름한 국수집에서
종업원이 합석을 시킨 자리가 하필
베트남인 부녀와 한국인 사위가 앉은 자리다
점심때도 한참 지난 오후 세 시경
얼굴에 개기름이 잘잘 흐르는 그 베트남 부녀나
장인하고도 별반 나이 차가 없어 보이는 한국인 사위나
짝 잃은 노새처럼 산성이나 찾아 든 나나
한결같이 기다리는 것은 뜨신 국수 한 그릇
모든 입맛은 시장기에서 만나지는가
하늘에서 두레박이 내려오듯 허연 김을 올린 국수가 왕림하니
바다처럼 출렁거리는 그 국숫물을
들판의 풀처럼 엎드린 그 면발을
몸속에 풀어놓느라
일제히 후루룩거리는 소리
문득 나는 이 쪼그만 베트남 부녀를 따라
베트남의 어느 작은 골목을 서성거리고
거기서 아오자이를 입은 소녀들의
후두둑 웃음 듣는 소리를 들은 듯도 해
모든 언어는 의성어에서 만나진다는 말이 하고 싶어지는 순간
베트남 부녀가 방귀 터지는 말로 사뿐 웃는다
아아, 저 말
쪼그라든 한국인 사위까지 일순 활짝 펼치는
저 말은 무슨 뜻이었을까
따라 웃을 수도 없어
외따로이 홀로 고개 숙인 나는
후루룩, 소리만 일관성 있게 흘리고 있을 뿐 *
* 흔들린다 풀들은 아침을 먹고나서도 흔들리고 낮잠를 자면서도 흔들린다 늙은 개가 뭉뚝한 코를 들이대며 쉰내를 풍겨도 흔들리고 8차선 도로를 가득 메운 매연과 소음에도 흔들리고 천변(川邊)에서 올라오는 악취가 코를 찔러도 흔들린다
내가 어슬렁거리며 적막한 하나를 그곳에 더 보태며 걷고 있었을 때나 주먹 속에 손톱을 박고 고사목 하나로 서 있었을 때 나를 에워싸고 흔들리던 그 무수한 술렁임들 신에게 받은 소통의 수단이 그것 하나밖에 없어 너희들은 외줄기 혼으로 흔들리고 또 흔들린다
* 각시투구꽃을 생각함 시 한 줄 쓰려고 저녁을 일찍 먹고 설거지를 하고 설치는 아이들을 닦달하여 잠자리로 보내고 시 한 줄 쓰려고 아파트 베란다에 붙어 우는 늦여름 매미와 찌르레기 소리를 멀리 쫓아내 버리고 시 한 줄 쓰려고 먼 남녘의 고향집 전화도 대충 끊고 그 곳 일가붙이의 참담한 소식도 떨궈 내고 시 한 줄 쓰려고 바닥을 치는 통장 잔고와 세금독촉장들도 머리에서 짐짓 물리치고 시 한 줄 쓰려고 오늘 아침 문득 생각난 각시투구꽃의 모양이 새초롬하고 정갈한 각시 같다는 것과 맹독성인 이 꽃을 진통제로 사용했다는 보고서를 떠올리고 시 한 줄 쓰려고 난데없이 우리 집 창으로 뛰쳐 들어온 섬서구메뚜기 한 마리가 어쩌면 시가 될 순 없을까 구차한 생각을 하다가 그 틈을 타고 쳐들어온 윗집의 뽕짝 노래를 저주하다가 또 뛰쳐 올라간 나를 그 집 노부부가 있는 대로 저주할 것이란 생각을 하다가 어느 먼 산 중턱에서 홀로 흔들리고 있을 각시투구꽃의 밤을 생각한다 그 수많은 곡절과 무서움과 고요함을 차곡차곡 재우고 또 재워 기어코 한 방울의 맹독을 완성하고 있을
* 문성해시인
-경북 문경 출생 -200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시[귀로 듣는 눈] 당선 -시집 [자라][아주친근한 소용돌이][입술을 건너간 이름].....
이 시절에는요 여자들이 시렁 위에 얹힌 작지만 앙칼진 칼 하나씩 손에 들고 나오는데요 여자들이 칼을 들고 설쳐도 암말 못하는 건 지천에 내걸린 풋것들을 오살지게 베어다 서방과 새끼들을 거두기 때문인데요 이 시절에는요 세상 모든 여자들은 코밑이 거뭇해지고 팔뚝 속에 알이 차올라서는 지천에 돋는 풋것들이 아까워라, 아까워라 저도 모르게 들판과 한판 엉겨붙게 되는데요 난생처음 억세디억센 수컷이 되는데요 가끔씩 그 독한 칼날에 논배미가 잘리고 칡뿌리가 잘리고 수맥이 잘리기도 하는데요 이 시절 여자들은요 푸줏간 안주인이 내걸린 고기들을 슥슥 잘라가듯 이 나무 이 바람 이 구름을 훌훌 베어 망태기에 담아서는 종다리처럼 지저귀며 언덕을 넘어가는데요 하늘도 암말 못한다는데요
* 문성해시집[입술을 건너간 이름]-창비
* 미역국 끓는 소리
방에 누워 부엌에서 미역국 끓는 소리를 듣는다
비릿한 미역줄기들이 커튼처럼 우리 집 창틀에 매달리는 걸 본다 그 속에 미역줄기 같은 머리를 감고 죽은 앵두집 아이도 보인다 그 아이의 심하게 접힌 다리가 이상하게도 펴져 있었다 저수지에 빠져 죽은 그 아이 그곳에선 앉은뱅이 다리가 쉽게 풀리더라고 부러진 의자들도 수초처럼 물결에 흔들리며 서 있다고 그곳에선 모든 것이 펄펄 끓는 춤이더라고
방안에서 듣는 미역국 끓는 소리는 다급하게 누군가 우리 집 지붕을 열려고 들썩거리는 소리 같다 장롱 속 이불들이 들썩거리고 옷장 속 개어진 옷들이 천천히 일어서고 저수지 아래 가라앉은 내 노래가 서서히 비등점을 향해 끓어오를 때 *
* 문성해시집[자라]-창비
* 국화차를 달이며
국화 우러난 물을 마시고 나는 비로소 사람이 된다 나는 앞으로도 도저히 이런 맛과 향기의 꽃처럼은 아니 될 것 같고 또 동구 밖 젖어드는 어둠 향해 저리 컴컴히 짖는 개도 아니 될 것 같고
나는 그저 꽃잎이 물에 불어서 우러난 해를 마시고 새를 마시고 나비를 모시는 사람이니
긴 장마 속에 국화가 흘리는 빗물을 다 받아 모시는 땅처럼 저녁 기도를 위해 가는 향을 피우는 사제처럼 텅텅 울리는 긴 복도처럼 고요하고도 깊은 가슴이니
* 강물 위의 독서 비가 오면 강물은 제 하고 싶은 말을 점자로 밀어 올린다
오늘은 물속이 흐리다고 물고기들 눈빛도 커튼을 친 양 흔들리고 있다고
오늘은 땅과 물의 경계가 없어졌으니 강물에서 죽은 이들이 발도 없이 걸어나갔다고 뉘 집에선지 전 부치는 냄새가 발을 달고 건너온다고 출출하다고
* 자라
한번도 만날 수 없었던
하얀 손의 그 임자//
취한(醉漢)의 발길질에도
고개 한번 내밀지 않던,//
한 평의 컨테이너를
등껍질처럼 둘러쓴,//
깨어나보면
저 혼자 조금
호수 쪽으로 걸어나간 것 같은//
지하철 역 앞
토큰 판매소//
오늘 불이 나고
보았다//
어서 고개를 내밀라 내밀라고,
사방에서 뿜어대는
소방차의 물줄기 속에서//
눈부신 듯
조심스레 기어나오는
꼽추 여자를,//
잔뜩 늘어진 티셔츠 위로
자라다 만 목덜미가
서럽도록 희게 빛나는 것을 *
* 문성해시집[자라]-창비
* 자작나무
너의 상처를 보여다오
아무도 내 앞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허연 붕대를 휘날리며 서 있는 자작나무들
오래전
죽은 자의 수의를 걸쳐 입은 듯
온몸이 붕대로 친친 감긴
나무들의 미라여
지하 어딘가에 꼭꼭 숨겨진 그를
지상으로 발굴한 자는 누구인가
보름달 빛이 고대의 자태로 내려오는 밤이면
붕대자락이 조금씩 풀린다 하고
그 속에서 텅텅 우는 소리 들린다 하고
나는 태초에 걸어다니는 족속이었으니
이것을 푸는 날은 당당히 걸어가리라
그때마다 잘 가꾸어진 공원의 연둣빛 나무들
조상 대대로 내려오던
원형의 전설을 들은 듯
한곳에 내린 뿌리가 조금씩 들뜬다 하고 *
* 문성해시집[자라]-창비
* 국수집에서
행주산성 밑자락 허름한 국수집에서
종업원이 합석을 시킨 자리가 하필
베트남인 부녀와 한국인 사위가 앉은 자리다
점심때도 한참 지난 오후 세 시경
얼굴에 개기름이 잘잘 흐르는 그 베트남 부녀나
장인하고도 별반 나이 차가 없어 보이는 한국인 사위나
짝 잃은 노새처럼 산성이나 찾아 든 나나
한결같이 기다리는 것은 뜨신 국수 한 그릇
모든 입맛은 시장기에서 만나지는가
하늘에서 두레박이 내려오듯 허연 김을 올린 국수가 왕림하니
바다처럼 출렁거리는 그 국숫물을
들판의 풀처럼 엎드린 그 면발을
몸속에 풀어놓느라
일제히 후루룩거리는 소리
문득 나는 이 쪼그만 베트남 부녀를 따라
베트남의 어느 작은 골목을 서성거리고
거기서 아오자이를 입은 소녀들의
후두둑 웃음 듣는 소리를 들은 듯도 해
모든 언어는 의성어에서 만나진다는 말이 하고 싶어지는 순간
베트남 부녀가 방귀 터지는 말로 사뿐 웃는다
아아, 저 말
쪼그라든 한국인 사위까지 일순 활짝 펼치는
저 말은 무슨 뜻이었을까
따라 웃을 수도 없어
외따로이 홀로 고개 숙인 나는
후루룩, 소리만 일관성 있게 흘리고 있을 뿐 *
* 흔들린다 풀들은 아침을 먹고나서도 흔들리고 낮잠를 자면서도 흔들린다 늙은 개가 뭉뚝한 코를 들이대며 쉰내를 풍겨도 흔들리고 8차선 도로를 가득 메운 매연과 소음에도 흔들리고 천변(川邊)에서 올라오는 악취가 코를 찔러도 흔들린다
내가 어슬렁거리며 적막한 하나를 그곳에 더 보태며 걷고 있었을 때나 주먹 속에 손톱을 박고 고사목 하나로 서 있었을 때 나를 에워싸고 흔들리던 그 무수한 술렁임들 신에게 받은 소통의 수단이 그것 하나밖에 없어 너희들은 외줄기 혼으로 흔들리고 또 흔들린다
* 각시투구꽃을 생각함 시 한 줄 쓰려고 저녁을 일찍 먹고 설거지를 하고 설치는 아이들을 닦달하여 잠자리로 보내고 시 한 줄 쓰려고 아파트 베란다에 붙어 우는 늦여름 매미와 찌르레기 소리를 멀리 쫓아내 버리고 시 한 줄 쓰려고 먼 남녘의 고향집 전화도 대충 끊고 그 곳 일가붙이의 참담한 소식도 떨궈 내고 시 한 줄 쓰려고 바닥을 치는 통장 잔고와 세금독촉장들도 머리에서 짐짓 물리치고 시 한 줄 쓰려고 오늘 아침 문득 생각난 각시투구꽃의 모양이 새초롬하고 정갈한 각시 같다는 것과 맹독성인 이 꽃을 진통제로 사용했다는 보고서를 떠올리고 시 한 줄 쓰려고 난데없이 우리 집 창으로 뛰쳐 들어온 섬서구메뚜기 한 마리가 어쩌면 시가 될 순 없을까 구차한 생각을 하다가 그 틈을 타고 쳐들어온 윗집의 뽕짝 노래를 저주하다가 또 뛰쳐 올라간 나를 그 집 노부부가 있는 대로 저주할 것이란 생각을 하다가 어느 먼 산 중턱에서 홀로 흔들리고 있을 각시투구꽃의 밤을 생각한다 그 수많은 곡절과 무서움과 고요함을 차곡차곡 재우고 또 재워 기어코 한 방울의 맹독을 완성하고 있을
* 문성해시인
-경북 문경 출생 -200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시[귀로 듣는 눈] 당선 -시집 [자라][아주친근한 소용돌이][입술을 건너간 이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