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송미술관.
전형필[全鎣弼] : 본관은 정선(廷善). 자는 천뢰(天賚),
호는 간송(澗松)·지산(芝山)·취설재(翠雪齋). 보성중학교 校主로 교장을 역임했다. 고증학자 오세창의 지도로 문화재를 수집하였다. 학력은 어의동공립보통학교(현 효제초등학교), 휘문고, 와세다대학법학과를 나왔다.
경력 : 1938년 간송미술관의 전신인 보화각 설립
- 1954년 문화재 보존위원
- 수상 : 1996년 문화관광부선정 11월의문화인물
1964년 문화훈장국민장
간송미술관은 간송 전형필(全鎣弼 1906 ~1962) 선생이 33세 때 세운 것이다. 1966년 전형필의 수집품을 바탕으로 수장품을 정리·연구하기 위하여 한국민족미술연구소의 부속기관으로 발족되었다. 2층 콘크리트 건물로, 서울 성북구 성북동에 있다. 서화를 비롯해 자기·불상·불구(佛具)·전적(典籍)·와당·전(벽돌) 등 많은 유물들이 있다.
대개의 박물관이 전시를 주된 사업으로 하고 있는 데 비해 전시보다는 미술사 연구의 산실(産室)로서의 역할을 주로 한다. 연구소에서는 매년 2회에 걸쳐 논문집 《간송문화(澗松文華)》 발행과 함께 전시회를 열고 있는데, 《간송문화》는 1971년 창간되었고 발행된 책자로 《추사명품집(秋史名品集)》 《겸재명품집(謙齋名品集)》 등이 있다. 《훈민정음》(70호), 《동국정운》 권1,6(71호), 금동계미명삼존불(72호), 금동삼존불감(73호), 청자압형수적(74호), 청자기린유개향로(65호), 청자상감포류수금문정병(66호), 동래선생교정북사상절(149호)등 14점의 국보와 12점의 보물등 고서화를 가장 많이 소장하고 있는 박물관이다.
우리나라 근대 3대 부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간송 전형필(澗松 全鎣弼 1906 ~ 1962)은 휘문고보와 와세다대 법학부를 졸업한 후 일본으로 빠져나가던 전통문화재를 사들임으로써 문화주권을 지킨 노블레스 오블리제의 실천가로 기억되는 사람이다.
그는 수집품들을 북단장(北壇莊)에 보관하기 시작하다, 1938년에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미술관인 보화각(葆華閣)을 열어 체계적인 전시 및 보전 활동을 펼쳐왔으며, 1962년 그가 세상을 뜬 뒤 4년 후, 그의 분신 보화각은 전형필을 기념하는 이름 간송미술관으로 개칭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가 수집한 민족예술품들로는 김정희, 정선, 신윤복, 심사정, 김홍도, 장승업 등이 그린 보물급 미술, 서예 작품과 자기, 불상, 석불, 서적 등으로 한국미술사 연구에 소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그의 집안은 당시 종로4가 일대(베오개)의 상권을 장악했었고, 서울, 황해도, 충청도 등 전국에 엄청난 전답을 갖고 있던 땅 부자이기도 했다.
근대 한국화가 영화 ‘취화선’의 주인공 오원 장승업(吾園 張承業·1843∼1897)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할 때, 그 흐름은 오원의 제자들인 소림 조석진(小琳 趙錫晋·1853∼1920), 심전 안중식(心田 安中植·1861∼1919) 등을 거쳐 이당 김은호(以堂 金殷鎬·1892∼1979), 청전 이상범(靑田 李象範·1897∼1972), 심산 노수현(心汕 盧壽絃·1899∼1978)으로 이어진다. 그 중 안중식은 그의 애제자 이상범과 노수현에게 그의 호인 心田을 한 자씩 떼어 나누어 준 것으로 유명하다.
간송미술관은 미술사 연구를 중심으로 운영되는 진정한 의미의 학예 시설이다. 전시는 봄과 가을에 정기전 형식으로 두 차례만 열린다. 762-0442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에 있는 사립 미술관으로 1966년 전형필(全鎣弼)의 수집품을 바탕으로 하여 한국민족미술연구소(韓國民族美術硏究所) 부설 미술관으로 발족하였다. 전형필은 1929년부터 우리 나라의 전적 및 고미술품을 수집하기 시작하여 서화·도자기·불상 등의 미술품과 국학 자료를 확보한 뒤 1936년 지금의 미술관 건물인 보화각(寶華閣)을 지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및 8·15 광복, 6·25전쟁 등을 겪으며 일반 공개를 위한 미술관은 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업은 아들인 성우(晟雨)·영우(暎雨)에게 이어져 1965년 가을부터 한국 고미술품 및 전적의 정리 작업을 시작, ≪고간송전형필수집서화목록 故澗松全鎣弼蒐集書畵目錄≫ 상·하권을 간행하였고, 1967년에는 수만 권의 도서 중 2천여 질의 한적(漢籍)을 정리하여 ≪간송문고한적목록 澗松文庫漢籍目錄≫을 간행하였다. 이 정리 작업을 진행시키며 한국민족미술연구소 및 간송미술관이 1966년에 발족하였다. 미술관은 연구소의 부설 기관 형식으로 되어 있어 미술관은 미술품의 보전·전시 업무를, 연구소는 이를 바탕으로 한 연구 사업을 맡고 있다.
미술관의 규모는 1층과 2층의 전시실을 가지고 있으며 소장품은 전적·고려청자·조선백자·불상·그림·글씨·부도·석탑 등에 걸쳐 다양하다. 전시 활동으로는 1971년의 개관 전시회 ‘겸재전(謙齋展)’을 시작으로 해마다 봄·가을에 한 번씩 수장품전을 여는 동시에 전시회와 함께 논문집 ≪간송문화 澗松文華≫를 발간하고 있는데, 2000년 현재 57호가 발간되었다.
전시회는 회화·서예·도예·서화로 분류, 개최하며 일반 공개는 봄·가을의 정기 전시회 이외의 상설 전시는 하지 않는다. 이제까지 30여 회의 전시회를 통하여 약 1천점의 수장품이 일반에게 공개되었는데, 최근(2000년 10월)에는 ‘단원·혜원특별전’을 개최하였다. 또한 수장품들을 모아 ≪혜원전신첩 蕙園傳神帖≫·≪추사명품첩 秋史名品帖≫·≪겸재명품첩 謙齋名品帖≫ 등을 편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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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 재산을 털어 문화재를 수집, 해외 유출을 막은 간송 전형필. 조선일보 DB |
훈민정음 해례본은 오랫동안 그 실체가 확인되지 않았다. 조선 세종(재위 1418~1450) 때 만든 해례본이 500년 만에 세상에 존재를 드러낸 것은 한 스승과 제자의 대화에서 비롯됐다. 스승은 천태산인(天台山人)이라는 필명으로 한 시대를 풍미한 국문학자이자 사상가 김태준(1905~1949)이고, 제자는 김태준이 가장 총애했던 서예가 이용준(李容準·1916~?)이다.
김태준은 경성제국대학에서 중국문학과 국문학을 전공했고, 졸업 후에는 경학원(지금의 성균관대학교)과 경성제국대학에서 조선문학을 강의했다. 1931년에는 이희승·조윤제 등과 조선어문학회를 결성했다. 같은 해에 ‘조선 한문학사’를 발간, 한문학과 국문학을 접목시킴으로써 한국문학사를 정립했다. 김태준은 천재라고 불릴 정도로 총명했고 발표하는 글의 수준이 높아 따르는 제자가 많았다. 김태준은 여러 제자 중에서도 이용준을 가장 총애했다. 이용준은 경북 안동군 와룡면 주하리에 사는 진성 이씨 한걸의 셋째 아들로, 글씨도 잘 쓰고 한학에도 밝았다. 그가 어느날 스승에게 놀라운 이야기를 했다.
“가문의 선조가 여진 정벌에 큰 공을 세웠다고 합니다. 그래서 상으로 세종대왕으로부터 ‘훈민정음’을 하사받아 세전가보(世傳家寶)로 내려오고 있습니다.”
김태준은 훈민정음이라는 소리에 귀가 번쩍했다.
“집에 내려가서 ‘훈민정음’을 볼 수 있겠나?”
“제가 언제든지 모시고 가겠습니다.”
훈민정음을 찾아라
김태준은 며칠 후 이용준과 함께 그의 시골집으로 갔다. 이용준이 내어준 ‘훈민정음’을 살펴보니, 자신이 경성제대 도서관 깊숙한 곳에서 본 ‘세종실록’의 훈민정음 관련 기록과 상당 부분 일치했다. 훈민정음을 어떻게 사용하는지에 대한 설명은 더 자세했다. ‘실록’에 언급된 ‘해례본’이 틀림없었다. 이용준은 김태준에게 “‘훈민정음’은 이렇게 집에 놔둘 책이 아닌 것 같다. 꼭 필요로 하고 잘 간수할 사람에게 넘기고 싶다”고 했다.
김태준은 자신을 만날 때마다 ‘훈민정음’ 타령을 하던 간송 전형필(1906~1962)을 바로 떠올렸다.
간송은 1929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많은 유산을 물려받아 조선 40대 부자로 꼽혔다. 이때 그의 나이 겨우 스물세 살, 대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재벌이 된 청년은 사업하거나 유유자적 편안하게 사는 길을 택하지 않았다. 당시 일본으로 유출되던 옛 그림과 고려청자, 조선백자, 삼국시대 불상, 고서적 등 민족의 얼과 혼이 담긴 문화재를 지키는 일이 민족의 자존심과 존엄을 지키고 되찾는 ‘문화 독립운동’이라고 생각하고 수집가의 길로 들어섰다.
그는 우리나라에 꼭 남아야 할 문화재라고 판단되면 값을 따지지 않고 구입했고, 이미 일본으로 건너간 문화재 중에서도 되찾아 와야 할 가치가 있다는 판단이 서면 다시 우리나라로 돌아오게 했다.
간송은 문화재 수집을 위해 골동품과 옛 책이 많이 거래되던 인사동에 있는 한남서림을 인수해 수집의 ‘전진기지’로 삼았다. 그는 다른 수집과는 달리 그림이나 도자기뿐 아니라 귀한 활자로 만든 고서도 중요한 문화재라고 판단했고, 한남서림으로 들어오는 책 중 진서(珍書)나 희본(稀本), 호본(好本)이 보이면 원로나 학자들과 함께 살폈다. 그래서 그 가치가 확인되면 1938년에 완공한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미술관인 보화각(지금의 서울 성북구 성북동 간송미술관)에 설치한 ‘간송문고’로 옮겼다.
당시 한남서림에는 고서화나 골동 거간들뿐 아니라 학자도 많이 드나들었다. 일부 학자와 고서 전문가들은 간송에게 “세종실록에 ‘훈민정음(訓民正音)’의 사용을 설명한 책이 완성되었다는 기록이 있다”고 하면서 “한글을 어떻게 발음해야 할지 설명한 책인 것 같다”고 했다. 그리고 아직 훈민정음과 관련된 책은 세상에 나타나지 않았으니, 전형필에게 그 책을 꼭 찾으라는 말들을 했다. 어문학 연구에 조예가 깊었던 김태준도 그중 한 명이었다.
“기와 열 채 값도 부족하오”
훈민정음 해례본의 존재를 확인한 김태준은 한남서림으로 달려가 간송을 만났다. “안동에서 ‘훈민정음’이 나타났다는 소문이 있어 직접 확인해봤더니 진품이 틀림없었다”며 “간송이 구입하면 좋을 것 같은데 값이 좀 비싸다”고 말했다. 간송은 걱정하지 말고 이야기해 보라고 했다. 김태준은 조심스럽게 기와집 한 채 값인 천원을 달란다고 했다. 당시 지방 양반집에서 올라오는 책값은 그리 비싸지 않았다. 옛 책의 가치가 서화나 도자기와 비교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거간들이 지방에서 책을 구입할 때 아무리 귀한 책도 쌀 한 말 이상을 쳐주지 않던 시대였다.
그러나 간송은 달랐다. “그런 귀한 보물의 가치는 집 한 채가 아니라 열 채라도 부족하오”라고 말하더니 “잠시 기다리라”고 하고는 은행으로 달려갔다. 간송은 두 개의 보자기에 나눠 담은 돈보따리를 들고와 그중 작은 것을 김태준에게 밀었다.
“이건 훈민정음 값이 아니라 천태산인께 드리는 사례요. 제가 성의로 천원을 준비했소.”
김태준이 놀란 눈빛으로 전형필을 바라봤다. 사례비가 너무 많다고 말하려는데, 간송이 또 다른 보자기를 내놓으며 말을 이었다.
“훈민정음 값으로는 만원을 쳤습니다. 훈민정음 같은 보물은 적어도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합니다.”
기와집 열 채 값이었으니 지금 서울의 아파트 값으로 환산하면 최소 30억원이다. 세로 23.3㎝, 가로 16.8㎝의 훈민정음 해례본은 이렇게 간송의 손에 들어왔다. 책이 만들어진 지 500년 만에 세상으로 나온 보물 중의 보물이었고, 간송이 문화재 수집을 시작한 지 13년 만에 성취한 대발굴이었다.
간송은 광복이 될 때까지 훈민정음 해례본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지 않았다. 일제가 한글 말살에 혈안이 되어 조선어학회 학자들까지 잡아들이는 상황에서 훈민정음의 존재가 알려지면 가만 놔두지 않을 게 뻔했기 때문이다.
간송은 훈민정음을 자신의 수장품 중 최고의 보물로 여겼다. 한국전쟁 당시 피란 갈 때도 품속에 품었고, 잘 때는 베개 속에 넣고 지켰다.
훈민정음 해례본은 이런 간송의 노력으로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의 와중에도 무사히 지켜졌다. 1956년 통문관에서 학계의 연구를 위해 영인본으로 출판하고 싶다고 하자, 간송은 흔쾌히 허락했다. 그리고 손수 한 장 한 장 해체해서 사진을 찍게 했다. 이렇게 출판된 훈민정음 영인본을 통해 많은 학자가 체계적으로 한글 연구를 할 수 있었다. 훈민정음 해례본은 광복 후 국보 70호로 지정되었고, 1997년 10월 유네스코(UNESCO)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훈민정음 해례본 간송본의 출처 원소장자는 이용준이 아닌 처가 광산 김씨 광복 후 60년 동안 훈민정음 해례본은 이용준 집안의 세전가보로 알려졌었다. 그러나 2005년 해례본의 출처가 이용준 본가가 아니라 처갓집인 광산 김씨 종택 긍구당(肯構堂)에 소장되어 있던 책으로 밝혀졌다. 이용준이 장인이자 당시 광산 김씨 종손이던 김응수 옹에게 해례본을 처분한 전후 사정을 설명하는 편지가 발견되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이용준은 김태준이나 간송 전형필에게 그런 세세한 집안 사정을 이야기하지 않았고, 한국전쟁 때 월북했다. 간송 또한 이용준의 본가에 가서 확인까지 하고 온 김태준의 말을 듣고, 1962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출처를 안동 이용준 본가로 알았다. 현재 광산 김씨 종손인 김대중씨는 “출처가 우리 집인 것은 맞지만 고모부(이용준)께서 하신 일”이라며 유출과 매매에 대해서는 밖에서 왈가왈부할 일이 아니라고 선을 긋고 있다. 그는 “간송 선생이 그걸 밝혀주기 전에는 그렇게 소중한 책인지도 몰랐다. 우리 집에 계속 있었을 경우, 어떻게 되었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훈민정음 해례본을 세상에 알리고 잘 보관해준 것은 정말 고마운 일이다”라고 말했다. |
종로4가의 99간의 대부호의 아들로 태어났다. 10만석의 재산을 상속받은 간송은 대학졸업 직후인 25세 때부터 고증학자인 오세창과 교유하며 민족문화재 수집보호에 심혈을 기울여 전재산을 쏟아부어 문화재의 일본유출을 막았다. 1921년 휘문고보에 들어가서는 학업이외에 예체능에도 관심을 보여 4학년 때에는 야구부주장을 맡아 일본원정경기에서 오사카고교를 대파하기도 했다. 1926년 휘문고등보통학교를 나와 1929년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법학과를 졸업한 이후 일제강점기였던 당시 일본에 의해 문화재가 반출되는 것을 방지하고자 오세창·고희동·김돈희·안종원·김용진·이도영·이상범·노수현 등과 함께 미술품과 문화재의 수집·보존을 위해 평생을 바쳤다.
특히 오세창의 고서화에 대한 감식안에 힘입어 1932년경 한남서림(翰南書林)을 인수하여 고서화와 골동품을 수집했다. 1934년 성북동에 북단장(北壇莊)을 개설하여 본격적으로 서화작품과 조선자기·고려청자 등 골동품과 문화재를 수집하는 한편, 1938년 한국 최초의 사립박물관인 보화각(葆華閣)을 북단장 내에 개설하여 서화뿐만 아니라 석탑·석불·불도 등의 문화재를 수집·보존하는 데 힘썼다. 그의 수장품은 대부분 국보 및 보물급의 문화재로 김정희·정선·신윤복·심사정·김홍도·장승업 등의 회화작품과 서예 및 자기류·불상·석불·서적에 이르기까지 한국미술사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전형필 선생은 휘문고등보통학교를 거쳐 일본 와세다대학 법학과를 졸업했다. 일제강점기 때 문화재가 일본으로 반출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고서화와 골동품 등을 수집했다. 1934년 성북동에 북단장(北壇莊)을 개설하여 본격적으로 골동품과 문화재를 수집하는 한편, 1938년 한국 최초의 사립박물관인 보화각(葆華閣)을 북단장 내에 개설하여 서화뿐만 아니라 석탑·석불·불도 등의 문화재를 수집·보존하는 데 힘썼다. 그의 소장품은 대부분 국보 및 보물급의 문화재로 김정희·신윤복·김홍도·장승업 등의 회화 작품과 서예 및 자기류·불상·석불·서적에 이르기까지 한국미술사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1942년 훈민정음 원본을 찾아내고, 간송미술관을 세운 것으로 유명하다. 1940년대에는 보성고등보통학교를 인수하여 육영사업에 힘썼고, 1945년에는 1년간 보성중학교 교장을 맡기도했다. 1945년 8·15해방 후 문화재보존위원으로 고적 보존에 주력했으며 1960년 김상기·김원룡·최순우·진홍섭·황수영 등과 함께 고고미술동인회를 결성하고 동인지 〈고고미술 考古美術〉 발간에 참여했다. 1962년 1월 26일 향년 57세에 신장병으로 타계하셨다. 1962년 대한민국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1966년 보화각은 간송미술관으로 개칭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