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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225 살림교회 주일공동예배(사순절 제2주일)
약속, 이끄심, 온전함
창17:1~7; 롬4:13~25; 막8:31~38
제가 오늘 테오리아에 은유적인 글 한 문장을 올렸습니다. “어떤 동물들은 척추가 없기 때문에 갑골을 가지고 있다.” 이 글 윌리엄 세논 교수가 <깨달음의 기도>라는 책 서문에서 다른 사람의 말을 인용하면서 가톨릭 교인들을 향해 일침을 놓은 말입니다. 그러나 이 말은 우리 개신교 신자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영어로 spineless하면 “척추가 없는”이라는 뜻인데, 여기서는 “스스로 바로 설 수 없는”이라는 의미로 쓰입니다. 가톨릭 교인에게 spineless Catholic(스스로 바로 설 수 없는 가톨릭 신자)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spineless Protestant, 혹은 spineless Christian이라는 말도 그대로 맞아 떨어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어떤 동물들은 척추가 없기 때문에 갑골을 가지고 있다.” 몸을 바로 세우는 등뼈가 없어서 몸을 딱딱한 갑골로 무장한 모습, 그 딱딱한 갑골로 인해, 한번 뒤집어지면 스스로는 일어날 수도 없는 거북이의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윌리엄 세논은 이것을 16세기에 만들어진 트렌트 공의회 교리를 갑옷처럼 두르고 있는, 진정 하나님과 자신 내면의 영적인 교감은 전혀 갖지 못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의 교조주의적인 신자들에게 주는 비유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어찌 그들만의 문제겠습니까? 우리도 두꺼운 갑옷을 입고 있는데, 그것은 자신의 내면의 등뼈가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 스스로 바로 일어 설 수 없어서, 자신의 외부를 철갑으로 감싸고, 밖에 있는 어떤 지지대로 간신히 일어서 있는 모습입니다. 관습, 교리, 신념, 심지어는 과학적 사실로 포장을 해서 말입니다. 이런 경직성으로는 진정 생명력 있고 활기 찬 영적 생활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과의 진정한 교제는 살아있다는 것을 충분히 의식하고 있는 생명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14세기 독일의 신비가 요하네스 타울러는 이런 모습에 대해 말한 적이 있습니다. 자기 자신의 진정한 심연을 들여다보기를 회피하는 사람들을 향해 타울러는 이렇게 설교합니다. “그 원인은 이것입니다. 곧 황소머리처럼 두껍고 단단한 겉가죽이 표면에 씌여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두꺼운 가죽이 하느님도 자기 자신도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그의 내면을 뒤덮고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삼십 겹 혹은 사십 겹이나 되는 겉가죽, 곰가죽처럼 두껍고 거친 시커먼 가죽을 뒤집어쓰고 있다는 것을 아십시오.”
여러분, 여기에 대처하는 우리의 길은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메타노이아, 즉 “회개”입니다. 지난 주일에 우리가 본 것처럼, 예수님께서도 당신의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첫 일성이 “회개하여라” 였습니다. 회개는 본디 “생각을 바꾼다, 마음을 바꾼다”는 뜻입니다. 죄라는 말의 헬라어가 <하타아>인데, 본디, 화살이 과녁을 맞추기 못하고 빗나간 것을 의미합니다. 말하자면, 본래 가야할 자리로 가지 못하고 길 잃은 상태를 말합니다. 이것을 성경에서 “죄”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회개란 빗나간 상태, 길 잃은 상태에서 본디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토마스 키팅은 “행복을 찾는 방향을 바꾸어라”라고 풀어줍니다. 행복을 찾는 우리의 방향이 빗나가 있다는 것이지요.
자신을 지키기 위해 딱딱한 갑골, 두껍고 거친 가죽을 뒤집어쓰는 대신에 거기서 돌아서서 자신의 내면의 척추를 곧추 세우는 것, 이것이 바로 회개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회개는 잠자는 상태에서 깨어나는 “깨어남”과도 같은 의미입니다. 깨어남은 우리의 참 정체성을 확인하는 일이고, 우리의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오는 일입니다.
오늘 우리는 창세기와 로마서에서 아브라함에 대한 이야기를 듣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언약)입니다. 아브라함의 이야기 속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이야기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은 아브라함에게 처음부터 분명하게 주어졌고, 아브라함은 처음부터 그 약속을 분명하게 알고, 물론 어렵고 힘든 일들이 많이 있었겠지만, 그 약속이 이루어질 것을 굳게 믿고 지켜낸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불러내는 12장에서부터 하나님께서는 “네가 살고 있는 땅, 네가 난 곳과 너의 아버지의 땅에서 떠나 내가 보여주는 땅으로 가라.” 그러면 “네가 너에게 복을 주어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네 이름을 크게 떨치게 해 주겠다”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약속이 진정 그렇게 분명한 하나님의 명령으로 주어졌던 것일까 하는 것은 다음에 계속해서 나오는 이야기를 통해서 다시 유추해 보아야 합니다.
이 약속은 이후 아브라함 이야기 속에서 계속해서 반복됩니다. 먼저 창세기 15장에서 다시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약속을 주시지요. 창세기 15장은 아브람이 자신의 후손을 상속할 자식이 없어 자신의 종 가운데서 다마스쿠스의 엘리에셀을 상속자로 세워야겠다 속으로 생각하던 참이었습니다. 이 당시 자신의 대를 이을 자식이 없다는 것은 “커다란 결함”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환상 중에 나타나서 “하늘에 별처럼” 많은 자손을 약속해 주십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읽은 17장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이 주어집니다. 2절에 “나와 너 사이에 내가 몸소 언약을 세워서, 너를 번성하게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언약의 표로 아브함은 아브라함으로, 사래는 사라로 이름이 바뀌고, 또한 아브라함과 모든 자손들이 할례를 받는 것이 이 언약의 증표로 나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 이야기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이야기인 22장에서 하나님께서는 “네가 이렇게 너의 아들까지, 너의 외아들까지 아끼지 않았으니, 내가 반드시 너에게 큰 복을 주며, 너의 자손이 크게 불어나서,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 많아지게 하겠다”는 약속을 다시 확인해 주십니다. 그러니까, 이런 이야기들은 아브라함의 생애 속에서 “하나님의 약속”은 그렇게 분명하지 않았고 늘 시험을 받았으며 계속해서 흔들렸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여러분, 아브라함 이야기 속에 나오는, 계속된 약속의 확인이 왜 필요했을까요? 아브라함의 험난한 삶 가운데 그 약속이 흐려지고 멀어지는 상황 속에서 아브라함은 다시 약속을 붙잡아야 하는 시간들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가 오늘 성경에서 보듯이, 그렇게 분명하게 보이지 않았다는 말이 됩니다. 험난한 삶 속에서, 하나님의 약속은 모호하기 그지없었을 것입니다. 꼭 우리네 삶처럼 말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이미 완결된 이야기가 아니라, 어느 누구에게나 계속되는 삶의 드라마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다시 되살려서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았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아브라함보다 천여 년이나 뒤에 살았던,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자처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자신들의 조상, 아브라함의 이야기 속에서 하나님의 약속이 과연 무엇인지를 묻고 또 물으면서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숙고하는 일을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자신들의 고난에 찬 삶의 자리 속에서 자신들의 조상 아브라함과 하나님의 약속을 자신들의 삶에서 재현하면서,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서서 초점을 다시 맞추는 일을 계속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가 바로 우리가 보는 아브라함의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도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완결된 이야기, 성경이라는 책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불변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 하면, 어디 저기 어딘가에 그 약속이 있어서 우리가 붙잡아야 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아브라함의 약속을 복과 연결시키지요. 그래서 자신에게도 아브라함처럼 어떤 복이라는 약속이 주어지고, 자신의 삶 속에서 그것을 찾아내어 기어코 붙잡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심지어는 어떤 예언하는 사람이나 점쟁이가 그 약속이 어떤 것인지 말해주는 경우도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약속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어디 저기 어딘가에 있는, “복 받을 것이라는 약속” 일까요? 그 복은 어떤 모습일까요? 그것이 우리 현재의 삶과 얼마나 잘 어울릴까요? 우리는 그 약속을 위해 어떤 일을 하고 있을 까요? 그것이 어떤 것이든, 내 삶 가운데서 하나님의 이끄심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이야기의 핵심이 그것입니다. 그가 자신의 삶 가운데서, 실수와 실패에서 조차, 하나님의 이끄심을 알아차리고 그 이끄심으로 돌아섰다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회개한 것입니다. 살다보면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갑골을 두르고 두꺼운 소가죽을 뒤집어쓰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다시 주님의 이끄심으로 돌아선다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가는 길입니다.
대개의 경우, 우리의 삶이 애매한 것처럼 우리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약속도 애매합니다. 그것은 당연합니다. 우리의 삶이 바로 하나님의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의 결정이 되지 않은 것처럼 하나님의 약속도 결정이 되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삶 가운데서 하나님의 이끄심을 알아차려야 하고 그 이끄심을 통해 우리 삶이 형성되어 가고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져 간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내 삶 가운데 하나님의 이끄심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오늘 창세기 본문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전능한 하나님”이라고 소개합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 나에게 순종하며, 흠없이 살아라. 나와 너 사이에 내가 몸소 언약을 세워서,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겠다.”
이 “전능한 하나님”은 히브리어로는 <엘 샤다이>라고 하는데, <엘>은 하나님이라는 말이고, <샤다이>는 사실 정확한 의미를 잘 모릅니다. 이 <엘 샤다이>라는 하나님의 이름은 거의 아브라함, 이삭, 야곱 등 족장들과 관련해서만 나옵니다.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 신앙의 아주 초기에 등장하는 하나님 이름입니다. 지금 우리는 <엘 샤다이>를 “전능한 하나님”이라고 번역하고 있지만, 어떤 이는 “산의 하나님”, 또 어떤 이는 “비를 내리시는 하나님” 등으로 번역할 수도 있다고 제안 합니다. 그런데 어떤 신학자는 이 엘 샤다이를 “젖가슴을 가지신 하나님”이라는 의미로 번역합니다. <샤다이>라는 말이 <샤다임>(젖가슴)이라는 말에서 왔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이 <엘 샤다이>라는 하나님 이름 다음에는 “생육하고 번성하라”와 같은 말이 따라 나오는 것을 주목합니다. 우리 본문에는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겠다”는 말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그 약속을 따라가는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의 품 안에서 양육 받는, 그 분의 젖가슴에서 나오는 생명의 젖을 먹고 사는 어린아기 같은 사람들입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 나에게 순종하며, 흠없이 살아라.”라는 말은, 직역하면 “내 품 안에서 걸으며(히트할렉; 일정한 공간을 산책한다는 뜻) 순전하게, 온전하게/순전하게 있어라”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어머니 품 안에 있는 어린아기처럼 그분 안에서 머물고, 그분 안에서 쉬고, 그분에게서 생명의 젖을 먹으며, 그분 안에서 양육받고 축복받는 어린 아기 같은 태도가 필요합니다. 아브라함이나 족장들도 그런 하나님과 만날 필요가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사도바울이 말한 대로, 하나님의 약속이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믿음의 의로 말미암을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율법으로 말미암았다는 것은, 늘 말씀드리지만, 내가 나의 행위로, 나의 의로 나를 증명하는 일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약속을 받는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나의 행위로, 나의 의로 나의 존재를 증명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갑골로, 소가죽으로 자신을 두르고 그것으로 자신을 증명하는 일입니다.
이 땅에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에게 열어놓으신 길은 스스로 자신을 증명하는 길이 아니라, 믿음으로 하나님의 약속에 다가가는 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어린아기처럼 그분의 젖가슴에서 나오는 생명의 젖을 먹고, 그분 품 안에서 걸으며, 온전하게 존재하는 삶을 연습해야 합니다.
한번 연습해 보십시오. 조용한 장소에서, 깊은 숨을 쉬면서 바닥에 몸을 완전히 맡기고 모든 기운을 다 내려놓고, 나를 완전히 받아주고 나를 무조건 품어주는 완전한 은총에 나를 맡긴 듯, 편안히 쉬면서 찬찬히 내 세포 하나하나에 하나님의 빛이 비춰지고 하나님의 생명이 들어차고 있음을 상상하며 느껴 보십시오. 그분께 모든 것을 맡긴다는 의미를 몸으로 느껴 보십시오. 그러는 중에 나의 진정한 정체성은 새롭게 드러날 것이고, 하나님의 약속을 어렴풋이라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나를 따라 오려고 하는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너라”라고 하신 말씀의 의미입니다.
기도
사랑의 주 하나님, 침묵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사는 저희들,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의 젖을 먹고 그 품 안에 머물며 양육받고 축복받는 삶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