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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2;1-12. 마칠 매듭과 풀어야 할 매듭. 송년주일. 2024. 12. 29.
오늘은 2024년 송년주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립니다. 왜 송년주일로 예배를 드립니까? 그냥 한 해를 지나치기 보다는 지나온 한 해를 마무리 하면서 아름다운 매듭을 위하여 감사로 송년주일을 드립니다. 나 자신과 공동체의 지난 시간들을 돌아보면서 결산을 하고, 후회도 하지만 다시는 아픔과 후회를 하지 않기 위하여 다짐하는 시간입니다. 아름다운 매듭을 원하면서 다시 열리는 2025년을 위해서 새로운 다짐을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2024년의 결산과 함께 새로운 다짐의 매듭을 짓고 매듭을 푸는 예배입니다. 그러면 시작과 함께 지나온 2024년의 과정은 어떤 자세와 어떤 태도로 살아 왔는가? 매듭을 짓고 새로운 기회를 위하여 매듭을 풀어야 하는 사항들은 어떤 것들이 있는가? 그러니까? 무엇보다도 먼저 이 시간을 기준하여 현재의 결과에 연연하지 말고 매듭을 지어야 할 것은 매듭을 하자는 말씀입니다. 왜요? 계22;6,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하나님은 우리가 행한 대로 갚아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손 안에 누구인가에게 주실 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매듭을 잘 지어야 합니다. 시작과 함께 여러 어려움에 대한 것을 예상은 했지만 그 사항들이 생각을 뛰어 넘는 상황이 도래할 줄은 몰랐습니다. 그렇지만 여기까지 왔습니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을까요? 마라나타의 신앙으로 왔습니다. 주님만을 생각하면서 버티고 견디었습니다. 손에 잡힌 것과 손으로 쥔 것이 없어도, 열매가 시원치 않아도, 눈물과 한숨으로 여기까지 왔지만 예배를 드리면서 주님 앞에 여러분과 저의 신앙고백은 마라나타입니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입니다. 이 마라나타의 신앙 안에서 매듭을 지어야 합니다. 주님이 오셔서 매듭을 짓게 하시고, 주님이 오셔서 결산을 하셔야 합니다. 왜요? 그래야 아쉬움이 떠나고 후회가 사라지고 새로운 2025년을 시작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소망으로 시작을 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또한 풀어야 할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관계와 생각과 다짐을 했던 것들이 그렇습니다. 닫힌 마음과 관계를 풀어야 합니다. 풀지 못한 마음과 생각으로 2025년을 맞이하면 새로움과 기대와 기다림이 흩어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2024년을 우연으로 살지 않았습니다. 관계로 살았고 삶으로 받아드렸습니다. 하나님의 예비하심과 작정과 섭리 속에서 관계를 맺었습니다. 그런데 세상은 이것을 무엇이라 합니까? 인연이라고 합니다. 인연의 한자에서 緣이라는 글이 바로 묶음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매듭은 그 묶음의 가장 아름다운 형태입니다. 하지만 예비하심과 작정과 섭리라는 표현 안에 있는 매듭이 마냥 아름답기만 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우리의 가슴을 아프게 했고 눈물을 흘리기도 했습니다. 항상 수고의 열매와 결실이 있을 줄만 알았는데 낙심하며 원망이 되기도 했습니다. 언제나 반갑고 그립기만 할 줄 알았던 사람이 언제 부터인가 미워지고, 두려움과 증오가 되어버리는 관계도 있었지만 여러분, 한해가 저물어 갑니다. 저물어 가는 것은 언제나 아쉽고 서럽고 서운합니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매듭을 지을 수 있다는 것이 은혜입니다. 그래서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사람에게 있을 것이라는 주님의 축복이 더욱 다가옵니다. 자신을 돌아보면서 나와 관계되어진 어떤 분에게 내 실수와 잘못으로 가슴에 상처를 주고 받은 일은 없는지? 해가 저물기 전에 진심으로 고개 숙여 매듭을 풀어야 합니다. 지나가기 전에 십자가의 사랑과 은혜로 풀어야 합니다. 왜요? 새로 시작하는 2025년에 한(恨)을 이어가서는 아니 되기 때문입니다. 설렘으로 가슴이 뛰는 주님의 사랑이 마음과 심령에 가득하기를 소원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마음에 맺힌 것이 있습니까? 맺힌 것은 새로운 시작에서 발목을 잡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끊어 자유롭게 풀어 줘야 합니다. 매듭을 짓고 매듭을 풀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세상은 2024년 한 해를 어떻게 보냈다고 고백을 할까요? 먼저는 세상이 보는 2024년입니다.
1. 매듭을 짓고 매듭을 푸는 일을 무엇으로 합니까? 올해의 한자, 올해의 사자성어, 올해의 인물로 표현을 합니다. 여러분, 한해를 정리하는 방법이 여러 가지가 있지만 언론과 여러 기관에서 가장 많이 하는 일은 그 해의 가장 상징적인 단어와 인물로 말합니다.
1-1. 일본이 보는 세상입니다. 일본의 올해의 한자는 무엇입니까? 일본 한자능력검정협회는 2024년을 대표하는 한자에 대한 의견을 공모한 결과 올해 일본 사회를 상징하는 한자로, 2024년의 '올해의 한자'는 '금(金, 금속・돈)'으로 결정되었습니다. '금'이 선정된 주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파리 올림픽 및 패럴림픽에서 일본 선수들의 활약으로 많은 금메달이 획득되었고, 오타니 쇼헤이 선수가 메이저리그에서 50홈런과 50도루를 달성하고, 3번째 MVP를 수상하는 등 눈부신 활약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도가산(佐渡金山)이 일본에서 26번째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었으며, 20년 만에 새 지폐가 발행된 것도 화제가 되었습니다.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정치적 비자금 문제와 불법 아르바이트를 통한 강도 사건이 다발하여 많은 국민들에게 불안을 초래했고, 멈추지 않는 물가 상승으로 가계가 압박을 받고, 경제적 불안이 확산되었기 때문입니다. 좋은 이유와 개혁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1-2. 한국은 어떻습니까? 해마다 연말이면 대학 교수들이 한 해를 돌아보며 가장 어울리는 사자성어를 선정하는데 2024년 올해의 사자성어로 선정된 단어는 바로 도량발호(跳梁跋扈)입니다. 도량발호는 과연 어떤 의미를 담았을까요? 도량발호는 합성어입니다. 도량(跳梁)은 거리낌 없이 함부로 날뛰어 다니는 행위이고 발호(跋扈)는 권세나 세력을 제멋대로 사용하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제멋대로 권력을 휘두르며 거리낌 없이 날뛴다는 부정적인 의미입니다. 이 사회가 빛을 잃고 심각한 위기에 놓인 사회를 걱정하는 시선입니다. 하지만 이런 사자성어나 한자와 인물이 우리가 살아내야 하는 다가오는 시대정신을 담아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고후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여러분, 이제는 지나갑니다. 보라 새 것이 된 2025년이 옵니다. 새로운 시대정신이 필요합니다. 사55;7,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 버리고 돌아오는 것이 매듭을 짓고 매듭을 푸는 것입니다. 왜 이런 평가들이 나올까요? 교회와 성도들이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해야 하는데, 빛과 소금대신 사회로부터 지탄받는 일들을 한 증거입니다.
2. 우리 비전교회는 어떻습니까? 2024년 송구영신 예배에서 서원했던 소망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2023년과 같은 6가지의 결단과 믿음의 말씀입니다. 무엇이었습니까?
1) 민14:28.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나의 삶으로 맹세하리라. 여호와 하나님의 삶을 두고 우리에게 맹세까지 하셨던 내용인데, 내, 자신이 말하고 말한 내용을 들으신 대로 이루어 주시는 약속이었습니다.
2) 욥22:28. 네가 무엇을 결정하면 이루어 질 것이요. 너의 길에 빛이 비치리라. 내가 결정을 하면 결정을 한대로 이루어진다는 내용입니다.
3) 시91:14. 하나님이 이르시되 그가 나를 사랑한 즉 내가 그를 건지리라. 그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그를 높이리라. 내가 하나님을 어떠한 상황 가운데서도 사랑하면 건지시고 이름을 알면 높이신다는 내용입니다.
4) 엡3:20.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구하고 생각한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주시는 하나님!!! 내가 구하고 찾고 두드리고 생각한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주신다는 내용입니다.
5) 창28:15.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니라. 나에게 약속하시고 주시기로 허락한 모든 것을 다 이루기까지 떠나지 아니합니다. 그런데 이런 5가지의 역사가 나의 삶에 실제로 적용이 되었는지를 확인하는 것이 복이라고 결론을 맺었습니다. 그래서
6) 마13:16.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는데 그렇게 되셨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알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구하고 찾고 두드리고 말하고 결정하며 행하신대로 이루어진 기적과 경이로움과 축복의 모든 것을 보셨습니까? 들으셨습니까? 아직 입니까? 아니면 허탈하십니까? 열매가 없고 결실이 없고 소출이 없습니까? 그래서 삶과 인생이 후회스러운가요?
여러분, 청춘이 무엇입니까? 청춘은 인생의 한 기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장미 빛 뺨과 붉은 입술과 하늘거리는 자태가 아니라, 마라나타의 신앙으로 다짐한 강인한 의지와 풍부한 상상력과 불타는 열정이 청춘입니다. 청춘은 믿음의 깊은 샘에서 솟아나오는 신선함이고, 유약함을 물리치는 용기와 안일함을 뿌리치는 도전과 모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때로는 스무 살 청년보다 칠십이 된 사람에게 청춘이 있기도 합니다. 여러분, 나이를 먹는다고 노인이 아니라, 이상과 소망을 잃어버리면 노인입니다. 세월은 우리의 주름살을 늘게 할 수는 있지만 열정을 가진 마음을 시들게 하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고후4;16절은 겉 사람은 후패하나 속사람은 날로 새롭도다. 여러분, 칠십이나 열여섯 살이나 사람들의 가슴 속에는 놀라움에 끌리는 마음이 있고, 미지에 대한 끝없는 탐구심과 기쁨과 소망을 이루고자 하는 열망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것들을 간직하고 있는 한 언제까지나 청춘은 살아 있습니다. 그런데 눈 속에 파묻히고, 얼음에 갇히게 되면, 비록 스무 살이라 할지라도 이미 노인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러나 소망의 물결을 붙잡고 주님이 나와 함께 있는 한 여든 살이라도 늘 푸른 청춘이 됩니다. 수14;10-12. 오늘 내가 팔십오 세로되 모세가 나를 보내던 날과 같이 오늘도 내가 여전히 강건하니 내 힘이 그 때나 지금이나 같아서 싸움에나 출입에 감당할 수 있으니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옵소서. 당신도 그 날에 들으셨거니와 그 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 내리이다. 세월의 흐름, 45년 이전이나 45년이 지난 지금 85세에도 갈렙은 소망의 물결을 붙잡고 하나님의 동행을 의지하고 헤브론 산지를 획득했던 85세의 청춘이었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무엇으로 2024년을 정리해야 할까요? 마라나타의 삶으로 매듭을 지어야 합니다. 계22:13.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입니다. 여러분, 알파와 오메가는 헬라어 알파벳 첫 글자와 마지막 글자입니다. 모든 역사의 시작과 끝, 처음과 마지막을 결정하시고 섭리하시는 분이 주님입니다. 처음과 나중, 2024년 년 초와 년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믿고 신앙하는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시고, 역사를 섭리하시며 인생의 시작과 끝을 결정하시는데 알파와 오메가 되신 주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살아 냈는가? 삶과 죽음의 모든 문제까지 주님께 맡기고 순종하며 살아 왔는가? 일부분은 맡기고 스스로 주장하지 않았는가? 여러분, 매듭을 짓고 매듭을 풀어야 하는데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아는 것이 왜 필요합니까? 예수님을 바로 알아야 정리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매듭을 짓고 매듭을 풀 수가 있고 그리고 다시 시작을 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알파와 오메가요, 광명한 새벽별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여러분, 매듭을 짓고 매듭을 풀어야 합니다. 정리를 해야 합니다. 무엇으로요? 신앙으로 매듭을 짓고 믿음으로 매듭을 풀어야 합니다.
3. 오늘 본문에서의 주님의 시각과 관점입니다. 오늘 주님은 믿음을 말씀하실 때 어떤 시각과 관점에서 말씀하십니까? 이들은 예수님께서 병을 고쳐주실 분임을 믿고 왔습니다. 그런데2절에서 그들의 확신을 예수님이 보셨습니다. 그들이 누구입니까? 중풍병자나 이 병자를 데리고 온 사람들입니다. 5사람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무슨 믿음을 보셨습니까? 예수님께 가면 병을 고침 받을 것이라는 확신과 믿음입니다. 여러분, 사람들은 이성적이기 보다는 감성적입니다. 그래서 앞뒤 따져보지도 않고 믿는다고 합니다.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할 일이 없습니다. 그러면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하시는 이 믿음이 과연 누구의 믿음입니까? 엡2:8 너희가 그 은혜에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믿음은 사람의 조건이 아니라 은혜로 인하여 얻어지는 믿음입니다. 믿음은 선물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칭찬하신 오늘 본문의 중풍병자와 그를 메고 온 사람들의 믿음이 무엇입니까? 친구의 삶을 변화 시켜주기 위한 수고와 땀과 불가능의 도전과 확신입니다. 중풍병자는 지금까지 살아온 데로 앞으로도 그렇게 살면 됩니다. 예수님에게 치유의 능력이 있다고 하나 이 사람은 예수님과 관계가 없어도 별로 사는데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살아 왔습니다. 그런데 습관과 생각과 전통이 이 사람에게 멍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런 틀에서 벗어납니다. 어떻게 벗어납니까? 친구들이 동원이 되어서 예수님에게로 데리고 갑니다. 현장은 생각한데로 사람들이 용신 할 수가 없도록 깍 막혔습니다. 방법이 없고 요원합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 다시 도전을 합니다. 이 도전은 지붕으로 올라가서 지붕을 뜯고 레카에 이 친구를 달아 내리는 일입니다. 아우성치는 소리가 있어도, 질서와 예의를 지키라는 목소리가 있어도 반드시 되어져야 하는 그 일에만 몰두를 했습니다. 이들의 확신과 믿음은 이런 행동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도전과 행동을 예수님은 믿음으로 보셨습니다. 여러분, 이런 믿음이 있습니까? 이런 것을 믿음으로 보십니까? 주님은 이런 상황을 믿음으로 보셨습니다. 이런 관점과 시각이 영적인 혜안이고 이런 관점과 시각이 믿음의 창의성입니다. 여러분, 주님에 대한 절대 믿음만 있으면 병도 고침을 받고 죄 사함을 받고, 이런 믿음의 시각과 관점이 믿음을 확장시킵니다. 믿음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보실 때에 믿음이 있다고 하면 믿음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원래 믿음은 주님이 주셔야 합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를 때에 믿음이 생깁니다. 행3:16절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던 날 때부터 앉은뱅이였던 사람을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게 합니다. 구걸하던 사람은 돈을 얻고자 베드로와 요한을 바라보았습니다. 이때 베드로가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는 선포에 이 사람이 곧 일어나 걷고 뛰었습니다. 사람들이 놀라서 베드로와 사도들을 주목하자 왜 우리 개인의 경건과 권능으로 이 사람을 일으킨 것처럼 우리를 주목하느냐? 이 사람이 완전히 낫게 된 것은 그 이름을 믿음으로 그 이름이 이 사람을 완전하게 하였다고 합니다. 누구로부터 온 믿음입니까? 예수님으로부터 주어졌습니다.
눅17:11~19,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한 촌에 들어가시니 문둥병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거늘 보시고 가라사대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저희가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열 명의 나병환자가 예수님께 고쳐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너희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제사장에게 가는 중에 몸이 깨끗해 졌습니다. 그 중에 한 명이 예수님께서 와서 감사를 합니다. 예수님께서 감사하는 사람을 보고, 그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여러분, 아홉은 무엇에 관심이 있습니까? 자기 몸이 회복 된 것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 감사한 사람은 사마리아인입니다. 여러분, 문둥병이 들었을 때는 차별이 없었습니다. 문둥병이 낫자 유대인들은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고, 율법의 세계 안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인은 예수님께 감사를 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아본 사마이라 인은 구원을 받았고, 병 고침과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내가 누구이고 나에게 베푸신 은혜를 잊지 않는 것과 아는 것이 믿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배 가운데 우리를 치료하실 예수님을 절대 신뢰하시고 원하는 바를 이루실 뿐만 아니라, 구원 받은 백성이 되어서 온전히 주님께 영광을 돌리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3-1. 표현에 대한 창의성입니다. 그러니까? 표현에 있어서 어느 것이 쉬운가? 에 대한 주님의 시각과 관점입니다. 3-5, 어떤 서기관들이 속으로 이르기를 이 사람이 신성을 모독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들이 속으로 생각한 것을 아시고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 네 죄 사함을 받았다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는 말 중에 어느 것이 쉽겠느냐? 여러분, 예수님께서 그 중풍병자에게 네 병이 고침을 받았다고 말씀하시지 않고 네 죄 사함을 받았다고 하신 이유는 이 서기관들에게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리신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죄로 인하여 질병이 온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날 때부터 소경 된 자는 누구의 죄냐고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조상의 죄냐 자기 죄냐고 물을 정도로 질병을 죄로 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부모의 죄도 그 사람의 죄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위하여 소경이 되었다고 합니다. 특히 율법을 가르치는 서기관들은 죄의 용서는 하나님만이 하시는 것으로 인식을 했습니다. 신성모독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면 이들의 악한 생각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죄를 사하여 주시는 권세를 가지신 분임을 믿지 않는 것이 악한 생각입니다. 서기관들은 율법적인 해석의 잣대로 예수님을 평가합니다. 이것이 바로 악한 생각입니다. 율법의 선생인 서기관들조차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 중풍으로 꼼짝도 못하여 침상에 들려온 자를 어떻게 말 한마디로 일어나 걸어가게 할 수가 있습니까? 네 죄 사함을 받았다고 하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모든 일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입니다. 6절,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능이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한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음을 알게 하시기 위하여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는데,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하시니 그가 일어나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이것을 보고 사람들이 놀라서 이런 권능을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여러분, 삶에는 언제나 상황이 있습니다. 표현할 때, 상대가 받아들이고, 기쁘게 여기는 영적인 표현을 해야 합니다. 그 표현이 사람이 감당할 수 없는 표현일지라도 신앙과 믿음 안에서 한 표현이면 그 결과는 주님이 책임지십니다.
3-2. 협력과 동료 사랑함의 시각과 관점입니다. 주목해야 될 사람은 환자와 함께 네 사람의 친구입니다. 그들은 중풍병자를 들것에 메고 온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중풍병자 한 사람의 믿음만이 아니라 저희 믿음을 보시고. 복수입니다. 중풍병자와 4사람의 행위를 칭찬하셨습니다. 그들의 믿음은 병자를 데리고 온 것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을 헤치고 지붕 위에 올라가서 기왓장을 뜯어내고 구멍을 뚫어 결국은 동료를 주님 앞으로 내렸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늘 생각해야 할 것은 나의 믿음이 내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믿음의 들것을 들고 다녀야 할 사람이 저와 여러분입니다. 타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영혼의 문제가 있는 이웃을 주님 앞으로 인도해야 합니다. 기왓장을 뜯어내고 지붕을 뚫는 수고를 아끼지 않는 이런 행위를 주님은 선한행실, 옳은 행실이라고 했습니다. 계19:8,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요한1서 3;18,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로 하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협력과 동행과 사랑함으로 더욱 부요하고 풍성한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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