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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에서 ‘박원순’ 이라는 금기 깨기>
2015년, 더불어민주당은 대한민국 정당사상 최초로 정책엑스포를 개최했다. 나는 민주당 인턴으로 엑스포 홍보영상을 만들기위해 서울시청을 찾아뵈며 그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그때 시장실에는 책상위 서류가 가득 쌓여있었고, 시장님은 쌓인 서류더미 사이에서 내게 인사를 건냈다. 이것이 박시장님과 나의 첫 만남이었다.
당시 나는 민주당에서 단기인턴으로 일하던 당원이었다. 시장님의 명함을 받긴했지만, 21살이었던 어린 내게 그는 그저 멀고 높은 사람이었다. 그렇게 나는 첫만남 이후 시장님과 다시 모르는 사이로 돌아갔다.
그리고 2018년 지방선거에서 박원순 캠프의 유세단원으로 합류했다. 당시에는 당에 청년들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서울에서 활동을 하는 청년들을 중심으로 유세단을 꾸리는 과정에, 나도 다른 청년의 제안을 받아 합류하게 되었다.
유세단과 연습실에서 안무를 배우고 연습했다. 그리고 서울의 모든 지역구를 돌며, 시장님의 거리 유세에 함께했다. 물론 나는 존재감이 크지 않던, 대학생 유세단원이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시장님의 선거유세 일정에 동행하며, 그를 가까이에서 지켜봤고 시장님의 메세지와 태도를 읽을 수 있었다.
당선 이후, 시장님께서는 유세단원들을 서촌의 어느 식당으로 부르셨다. 함께 식사를 하며 이야기를 나눴다. 그 때 나는 그에게 편지를 전달했다. 내가 정치인에게 쓴 최초의 편지였다. 그리고 시장님은 우리 유세단원들과 대화를 나누며 우리의 꿈은 무엇인지, 관심사는 무엇인지 질문했다.
나의 꿈은 언론인이 되고싶고, 북한문제와 위안부문제에 관심이 있다고 대답했다. 대답과 동시에 시장님은 핸드폰 연락처 메모장에 ‘북한문제, 일본군 위안부 문제’라는 메모를 남기셨다. 일개 유세단원이었던 나의 관심사와 꿈을 기억하고자 했던 그의 노력이었다.
그 순간, 나는 그의 삶이 궁금해졌다. 서울시장 박원순 말고, 사람 박원순은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다. 그때부터 시장님의 삶을 살피기 시작했다. 시민운동가 그리고 변호사로 살아온 그의 삶을 살피며, 나는 인상깊은 지점을 발견했다.
그는 1993넌 서울대 우조교 성희롱 사건을 6년의 공방끝에 승소해 대한민국에서 ‘성희롱은 명백한 불법행위’라는 인식을 처음 만든 사건의 변호인이었다.
그리고, 박원순 변호사는 2000년 일본에서 열린 '국제전범 법정'에서 남북공동검사단 남측 대표 검사로 참여했었다. 시민단체가 조직한 여성국제전범 법정에 참여해 일본군 ‘위안부’ 강제동원의 만행을 알렸고, 불법행위로 인한 배상을 촉구했다.
나는 한 명의 여성으로서, 정치인 이전의 사람 박원순의 삶을 존경하게 되었다. 지방선거 이후, 박원순 시장님과 연락을 이어나가거나 만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냥 내 마음속에 그에 대한 존경심과 내적 친밀함이 피어났다.
이후, 나는 개인적으로 어려운 일을 겪었다. 아직까지도 고통스럽고 아픈 기억이다. 그러나 시장님을 이야기하려면, 나의 이야기를 안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나는 지방선거가 끝나고, 성동구에 있는 1층 자취집에서 불법촬영 피해를 마주했다. 그당시 나는 에어컨도 없고, 세면대도 없는 열악한 환경의 집에 살았다. 그래서 여름에 더위를 피하기 위해 창문을 열어뒀고, 모르는 누군가가 나의 벗은 모습을 촬영해 웹하드에 올렸다.
그렇게 나는 불법촬영의 피해자가 되었다. 이후, 나의 삶이 변화했다. 웹하드에서 나의 영상은 몇십만의 조회수를 기록했고, 나는 언론인이 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나중에 언론인이 되었을 때 영상이 유포될까 무서웠다. 그미래를 직면하기 무서웠다. 그렇게 나는 언론인이라는 직업을 포기하게 되었다.
이후, 촬영자와 웹하드 운영자를 잡는 일에 집중했다. 결국 웹하드 운영자를 잡았고, 그 웹하드에는 미성년자와 여성들의 모습을 담은 6만개의 영상이 존재했다. 그러나 내 영상의 촬영자는 잡을 수 없었다. 내가 살고 있던 집 주변은 성동구의 어느 낙후된 동네라, CCTV는 커녕 가로등도 제대로 설치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 때, 이 동네에 cctv가 설치되어 있다면 촬영자를 잡았었을텐데, 그리고 어쩌면 내가 피해자가 되지 않았을텐데 라는 생각을 했다. 나는 그때부터 여성에게 안전한 주거환경이 필요하다는 것을 실감했다. 청년여성으로서, 청년에게는 안녕이, 여성에게는 안전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이후, 나는 불법촬영을 근절하는 일, 그리고 안전한 주거환경을 만드는 일에 관심이 생겼다. 그래서 내가 살고있는 서울시의 여러 정책들을 살폈다.
당시, 박원순 시장님은 내게 여전히 낯선 존재였다. 서울시장이라는 권한보다, 나이가 39년의 차이가 난다는 것이 더 어렵고 어색했다. 그러나 그에게 연락했다. 변호사로서 여성인권을 위해 보여준 역사가 나로 하여금, 용기를 낼 수 있도록 만들었다.
나는 박원순 시장님께, 불법촬영의 피해자임을 밝혔다. 사회에 나와 밝힌 나의 첫 ‘미투’ 였다. 이를 밝힌 이유는 내가 실감한 불법촬영의 피해를 알리고, 관련 정책을 마련해달라는 부탁을 드리기 위해서였다.
집값이 비싼 서울에서, 안전한 주거환경에서 사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그리고 열악한 주거환경이 여성에게 어떤 피해와 두려움을 줄 수 있는지 나의 삶을 통해 밝혔다. 그리고 지하철 역사와 같은 서울시 공용화장실에서 느끼는 불법촬영 가능성에 대한 두려움을 말씀드렸다.
시장님은, 당시 꽤 덤덤하게 반응하셨다. 유난스럽지도, 건조하지도 않은 원래 그상태의 모습이셨다. 그러나 이후, 시장님은 8천여 명의 점검 인원을 투입해 약 2만개의 서울시 공공화장실의 불법촬영 카메라를 살폈다. 그리고2019년 여름, 서울시가 ‘불법촬영 걱정없는 안심서울’을 선포했다.
이런 정책들을 나때문에 만들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미 계획되어온 사업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적어도, 불법촬영의 피해자였던 나에게 시장님은 큰 위로와 용기를 준 사람이었다. 이것이 내가 그를 개인적 존경했던 이유다.
이후 나는 그처럼, 불법촬영 피해자들에게 정책적인 도움을 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실제로 불법촬영을 근절하기 위해 활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연구원, 정당, 학교 등 여러방면에서 실무를 배우며 익혔다.
그리고 2020년 3월, 나는 더불어민주당 여성비례대표 후보로 출마했고 공천되었다. 그당시 유능하고 경륜있는 후보자들이 계셨음에도 내가 후보자로 공천이 된 이유는, 민주당에서 성범죄 피해자당사자의 목소리를 정책과 공약으로 반영하려는 의지의 실현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선거기간 나는 29번의 후보였음에도 여러 인터뷰와 방송에 노출될 계기가 많았는데, 민주당이 나를 통해 성범죄피해자에게 용기와 연대의 메세지를 내고 싶었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25살 내가 ‘여성부분’ 비례대표 후보자가 된 이유였다. 나는 민주당의 가치를 잘 실현하기 위한 수단이자 시람이었고 선거기간 최선을 다했다 자부한다.
선거기간은 텔레그램 N번방에 대한 여론이 들끓던 시기였다. 그래서 민주당은 국회에서 ‘텔레그램 엔번방 처벌 강화 간담회’ 를 개최했고, 디지털 성범죄 공약들을 준비했다. 나 또한 ‘디지털성범죄 근절 대책본부’를 만들어 디지털성범죄 관련 법안의 사각지대를 메꿀 공약을 만들었다.
그 과정에서 박원순 시장님의 불법촬영 근절 정책등을 많이 착안할 수 있었다. 예를들면 민주당의 공약을 발표하는 과정에 있어서, 서울시의 ‘아동· 청소년 전담 지지동반자’ 등과 같은 사업에서 많은 아이디어를 얻었다.
그리고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 지원대책 마련을 위한 간담회’ 를 개최하기 위해, 박원순 시장님과 연락을 나눠 아이디어를 주고받았다. 여성권익 신장에 기여한 변호사이자 행정가 답게 나의 스승이자 동지 역할을 해주셨다. 이게 나와 그의 관계였다.
아쉽게도, 여러 사정으로 간담회가 무산되며 시장님을 초대하진 못했지만, 민주당에서 텔레그램 N번방이라 대표되는 디지털 성범죄 관련 정책을 마련하는 일에 많은 도움을 주셨던 것이 사실이다.
이후, 나는 총선에서 낙선이 되었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시장님은 내게 연락을 주어 서울시의 여성안전과 디지털성범죄 근절 정책 관련 말씀을 나눴다. 내가 총선에서 내걸었던 공약을 서울시 차원에서 어떻게 추진할 수 있을 지 함께 고민했고, 방향을 모색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시장님의 실종과 서거 소식을 듣게 되었다. 큰 충격이었고, 내 인생의 가장 큰 시련이었다. 왜 돌아가셨는지 그 답을 찾을 수 없었다. 이후 시장님과 나눈 채팅창을 확인했다. 온통 일과 관련된 이야기였다. 밥은 드셨는지, 뭘하고 계시는지 한번 묻지 않고, 온통 정책 이야기, 여성안전의제만 언급되어 있었다.
내가 정말 좋아하던 스승이고 선배였는데, 나는 생전에 작은 농담하나 건내지 않았구나. 일상적인 안부조차 묻지 않았구나 실감했다. 인간관계는 이런게 아닌데하며, 내 부족함과 미숙함을 반성했다.
그렇게 한달 이상 그를 잃어 슬퍼했다. 그에게 제기된 성희롱 의혹에 대해 나는 더 가슴이 아팠다. 무슨 말도 보탤 수 없었다. 그렇게 나는 극심한 스트레스로 남은 청력마저 잃어 청각장애인 진단을 받았다. 그에게 제기된 의혹과, 죽음에 대해 스스로 어떤 결론도 내리지 못한 상태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2020년 7월, 사실 나에게는 ‘피해호소인’ 이라는 2차가해 단어가 아니었다. 나는 이미 성범죄 근절 전문가로 국회의원에 출마했던만큼, 성범죄에 대한 나의 생각은 확실했다.
‘무죄추정의 원칙에 의해, 의혹만으로 사건을 단정할 수 없다. 그러나 진상규명하는 과정에서 피해자의 목소리도 피고인의 방어권과 같은 비중으로 다뤄져야 할것이며, 증거주의의 원칙도 보장되어야 한다. 그러나 증거를 가리는 과정에서 피해자의 구술증거 또한 증거능력으로 인정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두어야 한다.’
이것이 학부에 법학과 여성학을 공부했던 나에게 정립된 생각이고 신념이었다. 따라서 진상을 규명하는 과정에서 ‘피해호소인’ , ‘고소인’ 이라는 단어의 사용은 내게 2차 가해가 아니었다. 무죄추정의 원칙, 법치주의를 지키는 단어였다. 적어도 내겐 그랬다.
그러나 연일 김재련 변호사는 ‘피해호소인이라는 단어가 2차가해다’ 주장하며, ‘피해호소인이라는 단어에 침묵하는 사람또한 2차가해자’ 라는 발언을 했다. 국민의힘은 ‘피해호소인이라는 단어에 침묵했던 이는 2차가해자, 그리고 그가 정치활동을 하는 것은 3차가해’ 라 비판했다. 결국 민주당에서도 ‘피해호소인’ 이라는 단어를 사과했다. 여성계 의원들께서도 잘못을 시인했다.
그 때 나는, 내가 정립해온 페미니즘의 가치와 성범죄에 대한 관점이 뒤틀리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나는 갓 대학을 졸업한 25살 학사였으니 여성학 박사, 여성계 국회의원 선배들의 결정이 맞고, 내가 틀린거겠지 생각했다.
그러나 계속 의문이 들었다. 성범죄에 대한 의혹이 제기되면 사법부의 판결이 나오기까지 무죄추정의 원칙이 지켜져야 하는데, 박원순 시장님 사건은 이게 잘 지켜진 사건이었나? 스스로 자문했다.
시장님은 사망하셨기에 ‘공소권없음’ 으로 수사가 종결되었기에 ‘피해호소인’ 이라는 단어가 맞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리고 이 사건이 인권위에서 다뤄질 때, 김재련 변호사가 피해자의 진실규명과 보호를 우선하고자 했으면 최대한 인권위의 중립성과 독립성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 일에 소홀했다. 이상했다.
시장님 주변인들의 진술과 방어권 또한 보장되어 인권위가 양쪽의 입장을 듣고 판단해 결론을 내려야 결국 고발인에게 도움이된다고 생각했다. 내가 변호사라면, 대외적으로 인권위원회의 중립성을 보장하는 일을 우선하되, 진술증거도 증거로 채택될 수 있음을 주장했을 것이다. 정치인을 고발한 사건인 만큼, 인권위 결정이 ‘정치적’ 이었다는 오해를 차단하기 위해 노력했을 것이다.
그러나 김재련 변호사는 시장실 직원들이나 주변인들의 방어권을 2차 가해라고 비판했다. 그리고 그들의 방어권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이때 민주당은 서울시청 근무자들의 진술이 2차가해가 아니라 공정성을 담보하기 위한 최소한의 방어권이라 주장했어야 했다. 그러나 민주당은 2차가해를 인정하며 사과했다.
이게 페미니즘이면, 나는 내가 페미니스트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길을 잃었고 답을 찾고자 정치를 벗어나, 한국도 벗어나 지내면서도 답을 내리지 못했다. 그렇게 대선때까지 침묵했다. 내게 남은건 충격으로 인한 청각장애 뿐이었다.
그러나 최근 3월경 내 생각이 꽤 선명해졌다. 2020년 7월에 시작된 고민을 끝냈고, 2주기가 지나서여 시장님을 언급한다. 나는 지난 2020년 7월, 김재련변호사의 고발만으로 박원순 시장님을 판결했던 정치권과 여성계를 비판한다.
정치권의 어느 누구도 이 사건을 판결할 권한이 없었다. 판사를 자처했어도 안되었다. 박원순 주변인물들의 방어권을 2차가해라 비난했어도 안됐다. 주변인들의 진술은 공정성을 담보하기 위한 최선의 수단이었으며, 박원순의 방어권이었다. 그러나 김재련변호사와 여성계는 이를 2차가해라 낙인찍었다.
민주당도 휩쓸렸다. 주변인의 진술을 2차가해라고 사과할게 아니라 최소한의 방어권임을 주장했어야 한다. 박원순을 위한 방어권을 지켜냈어야 한다. 그리고 인권위원회에서 공정하게 결과를 발표하도록 목소리를 냈어야했다. 그 기간동안 국민들에게 어느 추측도 하지말아달라 주장했어야 했다. 그러나 민주당은 아무도 역할을 하지 못했다. 특히 전문가인 여성계 의원님들이 그 역할을 하지 못했다.
지금 나는 박원순 시장이 ‘무죄’ 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당사자도, 판사가 아니기에 어떤 사건을 자의적으로 판결할 권리도, 의무도 없다. 그러나 인권위가 ‘성희롱인정’ 결정을 했던 일에 많은 이들이 취소를 촉구할 수 밖에 없었던 절차적 이유를 설명하고 싶은 것이다. 박원순 측의 방어권이 보장되지 않았기에 인권위의 결정마저 정치적 중립성이 훼손되었다 본 것이다.
그간 그를 대신해 항변하진 못했지만, 동지이자 후배로서 마음으로 애도했다. 그게 그당시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도리였다. 나는 2주기 추모식에 다녀왔다. 창녕에서 조용히 박원순 시장님을 애도했다. 그러나 사진이 우연히 전해지고 2차가해, 3차가해가 언급되며, 나는 어제 ‘따라 죽어라’ 라는 악플을 몇백개를 받았다. 그리고 그의 죽음이 ‘원순했다’ 라며 조롱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더이상, 나는 그를 애도하는 감정에 부채감을 느끼고 싶지 않다. 그의 뜻을 계승하겠다 말하는 일이 ‘2차 가해’가 아니라 말하고 싶다. 사람의 죽음이 조롱당하는걸 그냥 지켜보고 싶지 않다. 어느 누구도 남의 목숨을 쉽게 여기거나 조롱할 권리는 없다. 누군가의 죽음에 슬퍼하지 말라 강요할 권리 또한 없다. 이해할 수 없다.
박시장님 추모 2주기, 민주당에게 박원순 사건에 대한 사과를 요청하는 박지현님의 글을 읽었다. ‘피해호소인’ 이라는 단어를 사용해 2차가해를 했으니 사과하라는 그의 글을 시장님 묘 앞에서 읽고 몸이 부르부르 떨리고 눈물이 나왔다.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다.
그러나 나는 이 감정을 2년전 류호정 의원에게도 똑같이 느꼈다. 당시, 개인의 결정에 따라 애도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류호정 의원은 박원순 시장의 죽음 직후, ‘박원순 조문 안간다’고 발표했다. 유가족에게 죽음을 애도할 시간을 주며 그동안 류호정의원이 개별적으로 고소인을 찾아뵈었으면 되는 문제였다.
혹은 자신도 공개적으로 발표한만큼, 박원순시장 가족과 동지들의 슬픔 또한 표현할 자유를 보장했어야한다. 그러나 2차가해라며 금기시했다.
이틀 전 박지현의 발언도 비슷한 맥락이다. 사람의 죽음앞에 그를 다시한번 재단했다. 뿐만아니라 그의 죽음으로부터 ‘강성팬덤을 비판하기 위한 명분’을 찾아냈다. 정치적인 의도가 다분했다.
나는 박지현님을 보며, 같은 정당내에서 이렇게 생각이 다를 수 있구나 느낀다. 검찰개혁, 페미니즘에 대한 견해가 정 반대에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박지현과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박지현의 메세지가 틀렸다고 생각한다. 나는 의혹만으로 판사역할을 자행하며 결정기구의 독립성과 중립성을 훼손한, 진실규명과정이나 상대의 방어권을 2차가해로 규정하며 박탈해버린 박지현의 페미니즘이 틀렸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페미니즘’ 이라는 명분아래, 죽음마저 조롱받아온 박원순을 더이상 외면할 수 없다. 페미니즘을 바로잡고 싶다. 바로잡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 민주당에서 ‘박원순’ 이라는 금기를 깨고 있다. 이것이 내가 ‘동지’ 박원순에게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의리이자 페미니스트로서의 나의 양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