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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판승추부사 박공의 시호를 청하는 시장(判承樞府事朴公請諡行狀) - 민정중(閔鼎重)
공의 휘(諱)는 순(淳)이고 성은 박씨(朴氏)이다. 우리 태조(太祖)가 북도(北都, 함흥(咸興))로 가 계실 때에 공이 스스로 조정에 청하여 사명(使命)을 받들고 갔다가 돌아올 적에 도중에서 형벌을 받아 죽었는데, 지극한 정성으로 신하의 절개를 다하여 세상에 없는 공을 세우고 끝없는 아름다움을 협찬하였으니, 천지(天地)에 견줄 만하고 일월(日月)과 빛을 다툴 만하였다.
그런데 초당(草堂) 강경서(姜景敍) 공이 기록한 글이 이미 병화(兵火)에 소실되어 버린데다가 세대가 멀어질수록 인멸되어 상고할 수 없어서 자세히 말한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다행히도 근래에 우재(尤齋) 송시열(宋時烈) 선생이 족보 등 여러 설에 섞여 나온 것들을 모아 공의 부인 임씨(任氏)의 묘표(墓表)를 저술하였으니, 거의 이에서 고증할 수 있게 되었다.
삼가 살펴보니, 박씨(朴氏)의 선조(先祖)는 신라왕(新羅王) 혁거세(赫居世)로부터 비롯되었다. 석씨(昔氏)가 박씨를 대신해 신라의 왕이 되어 박씨의 여덟 왕자(王子)를 바깥 고을에 나누어 봉하여 내보냈는데, 죽산군(竹山君)으로 불린 이가 그 중의 하나이다.
그리고 죽산군의 후손 중에 음성(陰城)에 살면서 그곳을 관향으로 삼은 이가 있었는데, 여기에서 공의 파(派)가 비롯되었다. 휘(諱) 재(榟)란 분이 고려(高麗)에서 벼슬하여 공부 상서(工部尙書), 합문 지후(閤門祗候)가 되었고 그의 아들 박현주(朴玄柱)와 그의 손자 박문길(朴文吉)도 모두 높은 벼슬을 하였는데, 공은 박문길의 큰아들이었다.
공이 이를 갈 때부터 기국이 뛰어나고 지조가 매우 확고하였으므로 사람마다 절의(節義)의 선비가 될 줄로 알았고, 공 역시 항상 스스로 자부하기를, “임금을 섬길 적에 신하의 절개를 다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처음에 고려왕(高麗王)이 우리 태조(太祖)를 우군 도통사(右軍都統使)로 삼아 요동(遼東)을 공략할 때 공은 도평의 지인(都評議知印)으로 종군(從軍)하였다.
이미 압록강(鴨綠江)을 건넜을 때 강물이 크게 불어나 섬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군사들의 불만이 고조되어 장차 변란이 생기게 되었다. 태조가 평소 공을 중히 여겼으므로 공을 돌려보내어 고려왕에게 이 사실을 보고함과 아울러 역리(逆理)와 순리(順理)에 대해 개진하면서 속히 회군(回軍)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태조가 만년에 들어 정사에 지친데다가 옛날 고향이 생각이 나 함흥(咸興)으로 가 살았는데, 어가(御駕)를 수행한 신하들이 모두 불만을 품고 조정을 원망하였으므로 전후 문안하러 온 사신이 도착하면 법을 적용할 것을 요청한 바람에 살아서 돌아간 사람이 없었다.
그 뒤 사신을 보낼 때가 되어 태종(太宗)이 조회에 나와 ‘신하들 중에 누구를 보낼 것인가?’라고 물으니,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때 공이 앞으로 나와 스스로 가겠다고 요청하니, 태종이 그 사람됨을 아까워하여 처음에 매우 어렵게 여기었다. 공이 다시 말하기를, “신하가 임금을 위해 죽는 것은 바로 직분입니다.
임금이 주는 옷을 입고 임금이 주는 음식을 먹으면서 어려움에 임해 구차하게 모면하려고 하는 것은 신이 부끄러워하는 바입니다. 신이 가서 다행히 죽지 않는다면 전하(殿下)에게 보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공이 물러나와 집안사람에게 말하기를, “내가 평생 동안 나라를 위해 죽으려고 하였는데, 지금 죽을 곳을 얻었다.”고 하였다.
친지들이 찾아와 물어보면 반드시 정색(正色)을 하고 대답하기를, “신하는 당연히 죽음으로 나라에 보답해야 하는 것이니, 위로할 것이 뭐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전후 사명을 회피한 조정의 신하들이 그 말을 듣고 매우 부끄러워하였다.
공이 하직 인사를 드리자 태종이 묻기를, “경이 하고 싶은 말이 있는가?”라고 하니, 대답하기를, “신이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사명을 받들고 가서 효과가 없을까 두려워하고 있습니다.”라고 하자, 태종이 말하기를, “경의 처자(妻子)들이 항상 기한(飢寒)에 시달리고 있는 줄을 알고 있으니, 내가 마땅히 생각하겠다.”고 하였는데, 이는 공이 평소 청렴 결백하여 가산(家産)의 경영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곧바로 저택 한 구획을 하사하고 기타 하사한 것도 매우 많았다. 공이 떠날 때 사신의 수레를 타지 않고 새끼 딸린 말을 타고 함흥(咸興)으로 들어가 행재소(行在所)가 보인 곳에서 일부러 새끼 말을 나무에다 매 놓고 어미 말을 타고 들어갔는데, 어미와 새끼가 서로 돌아보고 발버둥을 치면서 우느라 한식경 동안 배회하며 전진(前進)하지 못하였다.
태조가 바라보고 이상하게 여기었는데, 이윽고 알현(謁見)을 청하였다. 공과 태조는 벼슬하기 전 선비[布衣] 신분으로 있을 때 친한 사이였으므로 태조가 곧바로 접견을 명하여 흔연(欣然)히 옛날의 정을 나누고 나서 주식(酒食)을 대접하면서 말하기를, “그대는 무슨 일로 멀리 나를 찾아왔는가?”라고 하니, 공이 대답하기를, “스스로 견마(犬馬)의 심정을 금치 못하여 한번 용안(龍顔)을 우러러보고 나서 죽고 싶었기 때문에 온 것입니다.” 하고 눈물을 흘리며 오열하였다.
태조도 눈물을 흘리며 묻기를, “방금 전에 새끼 말을 길가의 나무에 매 놓은 자가 그대였는가?”라고 하니, 대답하기를, “그렇습니다. 행로(行路)에 방해가 되었기 때문에 나무에다 매 놓았습니다. 그런데 어미와 자식이 차마 떨어지지 못하였으니, 비록 미물(微物)이지만 또한 지극한 정이 있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이는 이것으로 넌지시 간하여 태조의 마음을 감동하려고 한 것이었다. 태조가 슬픈 안색을 짓다가 공을 붙잡고 보내지 않았다. 어느날 태조가 공과 같이 국희(局戱, 바둑ㆍ장기 따위)를 두고 있었다. 그때 마침 새끼를 문 쥐가 옥상(屋上)에서 떨어져 죽을 때까지 서로 놓지 않자, 공이 다시 장기판을 밀쳐 놓고 땅에 엎드려 눈물을 흘리며 더욱더 간절하게 비유하여 간하니, 태조가 다시 슬픈 안색을 띠며 말하기를, “그대는 그만 말하라. 나도 생각해보겠다.” 하고 한양(漢陽)으로 돌아가겠다는 뜻을 공에게 내비치었다.
공이 윤허를 받고 곧바로 하직 인사를 드리니, 태조가 말하기를, “그대는 빨리 떠나도록 하라.”고 하였다. 그런데 행재소에 있는 신하들이 과연 다시 그를 죽이라고 극력 요청하니, 태조가 허락하지 않고 있다가 공이 이미 용흥강(龍興江)을 건넜을 것으로 예상되자 비로소 허락하고 사자(使者)에게 칼을 주며 말하기를, “만약 그가 이미 강을 건너갔으면 추격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런데 공이 갑자기 병환이 나 길에서 지체하다가 겨우 강가에 이르러 배에 올라 미처 건너가지 못하였으므로 허리를 잘리고 말았는데, 당시 사람들이 시(詩)를 지어 애도한 것에 이르기를, “반 토막은 강속에 있고 반 토막은 배에 있었다고 지금까지 시골 마을에서 이야기로 전한다네. [半在江中半在船 至今閭里巷誦之]”라고 하였다.
사자가 임무를 보고하니, 태조가 매우 깜짝 놀라 후회하다가 묻기를, “박순이 죽을 때 무슨 말을 하던가?”라고 하자, 사자가 대답하기를, “박순이 행재소를 향하여 꿇어앉아 큰소리로 말하기를, ‘신은 죽습니다만 앞서 허락하신 말씀을 바꾸지 마소서.’라고 하였습니다.”라고 하니, 태조의 두 눈에 눈물이 번갈아 흘러내렸다.
그 뒤 며칠이 되어 여러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박순은 나의 소시적 좋은 벗이었다. 내가 끝내 엊그제 한 말을 번복하지 않겠다.” 하고 남쪽으로 돌아가기로 뜻을 굳히었다. 태종이 그 소식을 듣고 매우 애통해 하며 말하기를, “틀림없이 죽는다는 것을 알고도 가겠다고 요청하였으니, 그의 충성과 용맹이 옛날에도 비할 사람이 없다.” 하고 곧바로 명하여 공로를 기록함과 아울러 벼슬을 추증(追贈)하고 토지와 노비를 넉넉히 하사하였다.
그리고 또 화공(畫工)을 명하여 공의 반신(半身)만 그리게 하여 그 사실을 드러내도록 하였다. 태조가 한양으로 돌아오자 태종이 공을 더욱더 추념하여 또다시 그의 자손을 대대로 끊임없이 채용하도록 명하였다. 부인 임씨(任氏)는 고려(高麗) 대사헌(大司憲) 임헌(任獻)의 딸이다.
공이 북쪽으로 떠난 뒤로부터 주야로 하늘에 기도하다가 공이 죽었다는 소식이 이르자,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으니, 두 분이 아울러 아름답다고 하겠다. 이보다 앞서 공이 죽었을 때는 태조가 명하여 공의 시신을 수습하여 강가에다 묻었었는데 부인의 상(喪)을 당하자 태종이 특별히 묘지(墓地)를 하사하여 예장(禮葬)을 치르도록 하고 아울러 충신문(忠臣門)과 열녀문(烈女門)을 그 마을에 세워 포상하라고 명하였다.
지금 공이 죽은 지 3백 년이 되어 간다. 그의 안팎 자손들이 번성하게 퍼졌는데, 모두 훈계를 이어받아 행실을 가다듬어 절개와 효도로 알려진 사람이 많다. 족보에 기록된 사람들을 들어 말하자면 감찰(監察) 박흔(朴昕), 승지(承旨) 박소(朴昭)는 공의 아들이고, 대사헌(大司憲) 박숙진(朴叔蓁), 목사(牧使) 박숙무(朴叔楙), 집의(執義) 박숙달(朴叔達), 평사(評事) 박숙창(朴叔暢)은 공의 손자이며, 사도시 정(司寺正) 박조(朴稠), 감역(監役) 박수원(朴秀元), 현감(縣監) 박연(朴淵)은 공의 증손과 현손 이하이다.
6대손 박전(朴悛)에 이르러 임진년(壬辰年, 1592년 선조 25년)에 왜적(倭賊)의 칼날에 죽어 적통이 끊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공의 충절(忠節)이 이미 이와 같고 또 청백리(淸白吏)로 이조(吏曹)에 기록되어 있으므로 후손들이 음덕을 입어 관직에 보임되고 녹을 받아 지금까지 끊어지지 않고 있다.
지금 주상(숙종) 2년(1676)에 그의 후손들이 입을 모아 종손(宗孫)을 세워줄 것을 요청하여 주상의 윤허가 떨어지자 예관(禮官)이 공의 8대손 박호원(朴浩遠)을 간택하여 종가의 제사를 주관하도록 하였다. 주상이 누차 글을 하달하여 추가로 포상하고 이어 공적(公籍)에 몰수된 제전(祭田)을 모두 되돌려 줄 것을 명하였는가 하면 옛날 선왕조(先王朝) 때처럼 한결같이 공의 제사를 받드는 자손에게 벼슬을 주라고 명하였다.
비록 이 일들이 담당자의 저지로 인해 실행되지는 않았으나 소급해 보답하려는 우리 성상(聖上)의 은전(恩典)이 극진했다고 하겠다. 죽은이가 이를 안다면 구천(九泉)의 아래에서 여한이 없을 것이다. 공의 품계와 충절로 보아 마땅히 시호의 은전을 받아야 할 터인데, 지금까지 받지 못하였으니, 그때 겨를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닌가 싶다.
지금 박호원이 공의 시호를 조정에 요청하기 앞서 내가 공의 외손(外孫)이라면서 시장(諡狀)의 기술을 부탁하였는데, 의리상 감히 사양할 수 없기에 여러 설을 모아 조금 정리하여 봉상시(奉常寺)의 고증에 대비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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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박순朴淳 諡狀[閔鼎重]
公諱淳, 姓朴氏。 當我太祖移御北都之日, 自請於朝, 奉使以行, 比還, 被刑道死。 其至誠盡節, 建不世之功, 贊無疆之休者, 可以軒天地、爭日月。 而草堂姜公景敍所記, 旣失於兵燹, 世益遠, 沈沒無可考, 莫有能詳言之者。 猶幸近者尤齋宋先生時烈, 裒輯其雜出於譜錄諸說者, 撰定其夫人任氏墓表, 庶幾於是乎有徵矣。
謹按: 朴之先, 始自羅祖。 及昔氏代羅, 分封八王子於外邑以出之, 號爲竹山君者其一也。 竹山有後孫居於陰城而因以爲籍者, 此公世派之所自出也。 有諱榟, 仕高麗爲工部尙書、閤門祗候。 其子玄柱, 其孫文吉, 亦皆爲顯官, 公實文吉之長子也。
自髫齕, 氣度不凡, 志操甚礭, 人皆知其爲節義士。 公亦常自許曰: “事君, 當盡臣節。” 始麗主以我太祖爲右軍都統使, 使犯遼東, 公以都評議知印, 亦在軍中。 旣渡鴨江, 雨水大漲, 留屯於洲中, 軍情大拂, 將有變。 太祖素倚公爲重, 乃遣公歸報麗主, 且陳逆順, 請速班師, 不見聽。
太祖末年, 旣倦于勤, 且思豐沛之舊, 移御于咸興。 扈駕諸臣皆懷不平, 歸怨朝廷, 前後問安使至, 輒請用法, 無得還者。 後當遣使, 太宗臨朝, 問: “群臣誰可遣?” 莫有應者, 公挺身而請自往。 太宗惜其人, 初甚難之, 公復曰: “臣爲君死, 乃其職爾。 衣君、食君, 臨亂苟免, 臣所恥也。 臣行幸無死, 庶可以報殿下矣。” 旣退, 謂家人曰: “吾平生欲死於國, 今乃得其所矣。” 親知有來問者, 必正色答之曰: “人臣當以死報國, 何用相唁?” 朝臣之前後避使行者聞之, 皆大慙。 陛辭, 太宗問: “卿有所欲言者乎?” 對曰: “臣何言? 所懼奉命不效。” 太宗曰: “知卿妻子常飢寒。 予當念之。” 以公素有氷蘗操, 不事生産故也。 卽命賜宅一區, 其他賚予甚蕃。 公旣行, 不用使者車輿, 自持子母馬。 入咸興, 望見行在所, 故以其子繫于樹, 騎其母以進, 子母跼顧相呼鳴, 徊徨不前。 移晷, 太祖臨眺而怪之。 已而上謁, 公旣有潛邸布衣之懽, 上卽命晉接, 欣然敍舊。 賜以酒食曰: “爾何遠來見我耶?” 公對曰: “竊不勝犬馬情, 欲一瞻天顔而死, 故臣來。” 因涕泣嗚咽, 上亦爲之泣。 且問: “向者繫子馬于路樹者, 豈爾耶?” 對曰: “然。 妨於行路, 故繫之, 則母子不忍相離。 雖微物, 亦有至情也。” 蓋欲以此諷諭, 感動上心也。 上戚然有不豫之色, 仍留公不遣。 一日上與公局戲, 適有鼠抱其子, 墮自屋角, 至死不相捨。 公復推局伏地而泣, 開譬益切, 上復戚然曰: “爾其休矣。 吾且思之。” 乃以回蹕之意諭公。 公得命卽辭, 上曰: “爾其亟去。” 行在諸臣果復請殺益力, 上不許, 度其行已渡龍興江然後始許之, 而授使者釰曰: “若已渡江, 勿追也。” 公適以暴疾滯道, 堇至江上登船, 未及渡, 遂斷其腰。 時人以詩哀之曰: “半在江中半在船。” 至今閭巷傳誦之。 使者復命, 上大驚悔, 因問: “淳死何言?” 使者曰: “淳跪向行朝大呼曰: ‘臣死矣, 但願毋改前旨也。’” 上涕泣交流。 後數日, 謂諸臣曰: “朴淳予少時良友也, 予終不食疇昔之言。” 遂決意南還。 太宗聞其死, 大慟曰: “知其必死而請行, 其忠勇在古無比。” 卽命錄功、贈職, 優賜田土、臧獲。 又命畫工只畫其半身, 以著其實焉。 及太祖回蹕, 太宗追念公愈篤, 又命錄用子孫, 世世不廢。
夫人任氏, 高麗大司憲獻之女。 自公北行, 日夜禱天, 及凶音至, 自經而死, 可謂匹美竝休矣。 始公之死, 太祖命收瘞于江上, 夫人喪, 太宗特賜墓地, 葬之以禮, 且命竝立忠臣烈女門于其里以旌之。
今去公之世且將三百年矣。 其內外子孫蕃衍, 皆能襲訓飭行, 多以節孝聞。 姑以其載於譜錄者言之, 監察昕、承旨昭, 公之子也; 大司憲叔蓁、牧使叔楙、執義叔達、評事叔暢, 公之孫也; 司䆃正稠、監役秀元、縣監淵, 曾玄以下也。 至六世孫悛, 陷於壬辰賊鋒, 宗嫡遂絶焉。 然公忠節旣如彼, 淸白又錄在天官, 後裔諸支蒙其庥蔭, 補官受廩, 至今不替。 今上三年, 其後孫合辭上請立宗, 上許之。 禮官擇取其八代孫浩遠, 俾主其祀。 天書屢加追褒, 仍命盡還其祭田之混入於公籍者, 且官其奉祀之孫, 一如祖宗之舊。 雖爲有司格而不行, 我聖上追報之恩, 至矣盡矣。 死者有知, 庶幾無憾於九泉之下矣。 公之職秩、忠節, 當受易名之典, 而至今不擧, 豈其時有所未遑耶? 今浩遠將請於朝, 謂鼎重亦公之彌甥, 託之以記述之役。 義不敢辭, 謹就諸說, 粗加整齊, 以備太常之考證云。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