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약살포는 5분도 걸리지 않아 끊났다.
나는 방재 기구를 분리해서 차 트렁크에 실었다.
그리고 주머니에 찔러 넣었던 핸드폰을 꺼내 전원을 켰다.
당근지 웹을 열고 정보지에서 백학 중고 경운기 판매자 연락처를 찾아 전화를 걸었다.
"주소지 네비 치니까 4시 10분 도착으로 나오네요. 근처 가서 전화 드리면 되죠?"
차에 오른 우리는 천천히 차를 몰아 마을 언덕길을 내려갔다.
마을은 조용하였고 오가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아름답고 생동력 넘치는 젊은이들은 도시로 도시로 떠나버린 텅빈 마을.
상수리나무 그늘과 비석 놀이터, 골목들과 강으로 이어진 도랑, 곡식이 익어가는 너른 들판들이
마치 전시된 모형 정원처럼 느껴졌다.
고향은 도시화와 공업화가 중심이 되면서 농촌을 떠나 도시로 향하는 이촌향도(離村向都)의 정점에 있었다.
농촌은 고된 노동에 비해 소득의 한계는 너무나 초라했다.
2025년 벼농사 10a(300평)을 산출한 순수 수익액은 고작 42만원 이다.
물론 총수입에서 종자,비료,농약, 기계 임차료 등 직 간접 생산비를 제외한 금액이다.
300a(10,000평)을 경작해야 1,260만원의 수익을 얻게 되는 것이다.
만일 실제 남의 토지를 빌려서 농사를 짓고 도정 비용까지 직접 부담해야 하는 임차농이라면 손에 쥐는 돈은
거의 없거나 적자가 날 수도 있다.
나는 늙고 지친 고향 마을의 무기력한 심장 소리가 귀에 들리는 것 같아 마음이 괴로웠다.
마틴 루터는 일자리에 귀천은 없으며 길을 청소하는 사람을 베토밴이 작곡을 하듯, 미켈란젤로가 그림을 그리듯 바라보라고 했는데 농촌에 빗대기는 가당치도 않았다.
오희려 "겉보기에는 화려하고 연봉도 높지만 세상에 이무런 기여도 하지 못하고 스스로도 무의미하다고 느끼는 일자리"가 진짜 하잖은 일자리라고 한 데이비드 그레이버 "불슜 잡" 의 한 대목이 더 위로가 될 것이다.
그러나 마을을 버리고 도시로 간 젊은이들을 고향 갈데아 우르를 떠나 하란으로 간 아브라함의 행보와는 여전히 비교할 수는 없었다.
아브라함은 땅에 번성하라는 신의 계시를 듣고 지식과 문명과 풍요가 가득한 고향 우르를 떠나 오히려 역경의 땅으로 간 것이다.
아무리 변명을 늘어 놓아도 우리는 시대의 궁핍에 분노하고, 보이지 않는 앞날에 절망해서 고향을 버린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는 금방 마을을 빠져나와 포병훈련장을 지나 협곡을 이은 다리를 건넜다.
삼거리를 지나 무슨 모양인지 알수 없는 좁고 가파른 진입로를 올라가자 쭉 벋은 대로가 나왔다.
파주 포천간 자동차 전용 도로였다,
길은 시원스럽게 산과 협곡을 관통해 뻗어 있었고 조금 더 가자 누렇게 곡식이 익어가는 은대리 가을 들판을 가로질렀다.
두 개의 웅장한 협곡을 흐르는 물이 합쳐지는 합수지에 이르렀다.
물살이 쎈 여울목에 떨어지는 가을 햇살이 은빛으로 번쩍이며 물위에 부서지고 있었다,
합수지가 보이는 길 옆에 사과를 파는 가판대가 보였다.
가판대 앞 길 가장 자리에 승용차들이 늘어서 있었다.
과수원과 이어진 논두렁길로 외발 손수레를 몰고 농부가 내려왔다.
손수레에는 밭에서 딴 사과가 가득 실려 있었다.
손수레가 도착하자 가판대에서 머리에 수건을 쓴 여자가 나와 사과를 선별하더니 종이 박스에 담아 손님들에게 팔았다.
여자가 고리에서 비닐 봉지를 뜯어 옆에 빼놓았던 사과를 몇 개 담아주자 손님은 여자를 향해 웃으며 뭐라뭐라 말하더니 기분이 좋아서 떠났다.
여유롭고 생동감이 넘치며 또 따사로움이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도시민에게 치유를 제공하는 공간으로 농촌이 진화한다는 이야기는 익히 들어본 바 있엇다.
그들은 이미 고부가가치를 창조 했으며 소멸의 대안을 스스로 완성한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본 고향 마을의 모습은 새살이 돋으면 없어질 곪은 상처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생각이 들자 고향 마을에서 시작된 울적한 기분이 다소 가시는 느낌이었다,
곧 우리는 황포돗배 나루가 있는 장남면에 이르렀다,
임진강과 한탄강이 합쳐져 이루어진 큰 강 다리를 건넜다.
백학을 차로 10분 거리에 남겨둔 지점 이었다.
이때 종인의 핸드폰 벨이 울렸다.
종인이 핸드폰을 받았다.
"뭐? 그래? 119는 뭐래? 어디로 간데? 응. 알았어."
안색이 심각하게 변한 종인은 수화기 너머로 말을 주고 받더니 전화를 끊었다,
나는 무슨 일이냐고 묻지않았다.
나는 말없이 차를 몰았다.
곧 다시 종인이 핸드폰 벨이 울렸다.
종인이 받았다.
"을지대학병원? 베드로는 왜 안된데? 뭐? 오늘 응급실 운영이 없다구? 알았어. 도착하면 전화줘"
종인이 와이프의 전화였다.
누군가가 아파서 119가 왔고, 119 대원이 갈 병원을 찾고 있는데 응급실이 없으며, 마침내 을지대학병원으로 연결이 됐다는 내용이다.
내가 마침내 물었다.
"누가 아파?"
"세린엄마"
"뭐? 왜?"
"급성 요페야."
"그게 뭔데?"
"소변을 못보는거야. 응급상황으로 분류되지."
방광에 소변이 계속 차오르면 방광이 늘어나게 되고 심한 하복부 통증이 생긴다.
방치하게 되면 신장(콩팥)이 손상이 되거나 방광이 파열되서 심각한 합병증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런 증상이 일어나면 빨리 병원에 가서 요도에 관을 삽입해 가득 찬 소변을 빼내야 한다.
요페증은 약물 부작용으로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
이를테면 항히스타민제나 교감신경 흥분제 혹은 항콜린제 같은 성분이 들은 약을 먹으면 방광 근육의 수축력에 마비가 올 수 있다는 것이다.
여자의 경우에는 큰 자궁근종이 있거나, 혹은 자궁 또는 방광이 아래로 내려앉아 요도와 방광 입구가 막히는 경우에도 발생할 수 있다고 한다
또 남자들은 일시적으로 과음을 했을 때 방광이 과도하게 늘어나 배뇨근이 힘을 쓰지 못하면 요도가 막히기도 한다는 것이다.
나는 유턴 차선으로 들어가서 차를 돌렸다.
" 왜 돌려?"
"빨리 병원 가야지"
"별거아냐. 응급처치만 받으면 되는데 뭐. 다온거 같은데 경운기는 보고 가야지."
"이 사람아. 경운기는 다음에 보면되지."
나는 백학 중고경운기 판매자에게 전화를 걸어 급한 사정이 생겨 다음에 방문하겠다고 말했다.
판매자는 알겠다고 말했다.
별거아닌 일은 오늘 포천 밭에서 점심을 먹으며 전화로 약속했던 전곡 선배와의 다음주 차마시기 같은 것이다.
여유가 되 만나면 좋고 또 시간이 않되 못가면 그것으로 그만인 것이다.
따지고 보면 백학 중고경운기 판매자와의 시간 약속도 그와 비슷했다.
구매를 합의한 것도 아니다.
기계의 상태를 눈으로 확인하고 구매할 지 말지를 결정하기 위함이 아니던가?
갑자기 급한 사정이 생겨서 오늘 못가니 다음에 다시 가겠다고 하면 얼마든지 미룰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랑하는 아내.
내 평생 반려의 일은 어떤가?
지금 아내는 구급차에 실려 응급실을 가고 있는데 하찮은 친구의 약속 때문에 안가면 그걸 제정신이라 볼 수 있을까?
"어이~친구. 자네 남은 인생은 오늘 응급실에서 결정나는 거야!"
나는 황포돗대 길을 되돌아 질주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