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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에 심심풀이 땅콩...
문학동아리에서 금호강에 대한 책을 낸다기에 나의 소임 와룡산을 써보았습니다.
잘못이 있으면 제현의 질정을 바랍니다.
와룡산 세 굽이
최현득
산 넘어 강태공
어린 시절 나의 땅 끝은 와룡산이었다.
달구벌 옛터전인 대구, 그 서쪽 변두리 비산동(飛山洞)이 태어난 고향이다. 산이 내려와 앉았다는 전설을 따라 날뫼, 날미라 불렀다. 그 서쪽 끝을 무슨 장벽처럼 막아선 와룡산…. 불타는 노을이 저녁하늘을 수놓을 즈음이면 무슨 수호신처럼 경이로웠다 할까.
나는 그 너머를 알지 못했다.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동네를 품고 있는 당산만 해도 덩치가 컸고, 동쪽 성내로 통하는 달성공원쯤 갈 때면 꽤나 흥분하곤 했다. 그 무대만도 소년에게는 엄청 넓었던 것이다. 서북방향으로 들판을 가로지르면 금호강이고, 팔달교 다리 밑에서 멱이라도 감으면 원정길인 셈이었다.
<사진1>와룡산 원경
당산 넘어 달서천 금호강 와룡산으로 둘러쳐진 넓은 들판을 ‘개’라 했다. “개 갔다 온다.” 아버지는 괭이 한 자루 어깨에 메고 매일 새벽, 아니 하루에도 몇 차례나 다섯 마지기 논에 다녔다. 나도 아버지의 흰 고무신을 부지런히 따라다녀야 했다. 물론 공부보다는 일이 우선이었다.
잠시 숨을 돌릴 때나 피곤에 지쳤을 때 와룡산에 눈길을 준다. 우선 보이니까. 놀란 가슴을 쓸어내릴 때면 황급히 와룡산을 본다. 무슨 약속이나 한 것처럼.
경부선이 그 개를 가로질러 달렸다. 그 철까치 위에서 두 동강이 난 시체를 보았을 때도 그랬다. 큰물이 지면 달서천 다리 비원교 밑에는 시체 하나쯤 널브러져 있는 것은 보통이었고, 달서천 둑이 터져 물난리가 날 때는 일대가 바다가 되었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릴 때, 언제나 있어준 것은 바로 와룡산이었다. 말 없는 산이었다. 그러나 나를 늘 지켜주었고, 많은 말을 해주는 것 같았다.
내가 그 와룡산을 넘게 된 것은 낚시 때문이었다. 물론 그 너머에 대구에서와 전혀 다른 비경이 있으리라곤 생각도 못해 보았다. 70년대 초엽 그러니까 내 나이 스물 대여섯 정도였을 것이다. 허랑방탕의 편력 끝에 심신이 지쳐 있었고 남은 것은 실업자란 딱지뿐이었다. 낙담과 실의의 시절이었다. 고맙게도 이럴 때 낚시를 찾는 처방을 삼천 년 전에 강태공이 가르쳐주지 않았던가.
그러나 그때는 대도시 대구가 개발의 몸살을 한창 앓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가까운 못이나 저수지는 거의 메워져 버렸고 어쩌다 남은 것도 이미 낚시터는 아니었다. 악취와 쓰레기로 가득 찬 웅덩이랄까. 지금의 감삼지하철역 부근에 감삼못이 있었다. ‘감새미, 감새미’ 하면 비산동에서는 제법 먼 곳 나들이로 쳤다. 그 감삼못에 새빨간 태아가 그냥 버려져 있던 시절이었다. 머나먼 와룡산 너머까지 진출해야만 했다. 지천철교 바로 밑 금호강에 붕어 씨가 좋고 주변 경치도 그만이라는 소문이 귀에 쏙 들어왔던 것이다.
처음에는 가르뱅이를 돌아서 경부선 철까치를 따라 난 도로를 걸었다. 물론 포장도 안 된 어설픈 길, 어쩌다 공사판 트럭이라도 한 대 지나갈라치면 사정없이 먼지세례를 받아야 한다. 차 꽁무니에 대고 욕 한 마디 해야만 직성이 풀렸고. 몇 달 지나 간이 좀 커진 나는 아예 와룡산을 넘어 다니기로 했다. 분지의 한가운데 농로와 산의 동북 능선을 넘어 지금의 서대구IC 근방으로 빠지는 긴 코스가 아니었는가 싶다. 경제적 시간적 문제는 따질 필요조차 없으니…. 무엇보다 얼마나 낭만적인가. 방천리 아이들은 매일 산을 넘어 성서쪽 학교를 다닌다고 했다.
나는 철치기를 했다. 줄낚시 방울낚시라고 할 수 있다. 당시에도 꾼들은 값나가는 들낚시를 들고 다녔지만 눈치만 보는 백수건달에겐 그림의 떡이다. 장비라야 낚싯줄과 방울 정도, 몇 백 원이면 해결되었다. 커다란 봉돌 뭉치를 머리 위에서 빙빙 돌리다가 강심(江心)으로 휙 던져 넣는다. 10m 20m, 힘이 좋을 때는 더 나갔을 것이다.
‘딸랑 딸랑’ 방울소리는 미끼를 물었다는 신호, 번개같이 줄을 낚아챈다. 물론 속도가 관건이다. 낚싯줄에 손가락을 대보면 고기의 움직임이 그대로 전달된다. 어찌 보면 절정의 도락이 아닐까. 매우 원시적이고 단순하다. 그러나 지금 누가 돈을 대주고 낚시를 하라고 해도 이 방식을 바꾸고 싶지 않다. 시쳇말로 쿨하고 심플한 것이 나는 그저 좋다.
와룡산을 넘나든 금호강의 낚시는 한동안 젊음의 상처를 다스려 주었다. 얼마간의 재미와 낭만이 덤으로 얹어진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후에도 와룡산과의 인연은 심심찮게 이어진다. 뙤약볕이 내리쬐는 보병 제50사단의 연병장에서 나는 신병훈련을 받았다. 혹독한 신체적 단련도 와룡산과 함께한 것이다. 여기에서 또 몇 년을 보낸다? 멀리 벗어나고 싶은 것은 젊음의 충동인가. 동해안 최북단 금강산 자락에서 삼 년을 보낸 것은 말하자면 의도적인 탈출이었다.
제대하고서도 갈 일이 생겼다. 용산동에 한 벗이 있었고, 그는 성주 도씨였다. 병영 옆길의 가느다란 촌길을 한참이나 따라 올라간 그 곳은 지금은 구마고속도로 옆 아파트의 숲이 무성하지만 한적하고 외진 농촌이었다. 나는 일도 없이 자주 들락거렸다. 고향을 잃은 사람이 고향 비슷한 곳을 즐겨 찾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예사 농가와는 다른, 격조가 느껴지는 공간이었다. 대문에 걸린 ‘충렬의 집’ 자그마한 나무표지는 6‧25에 아버지를 바친 사연을 전하고 있었다. 학문과 역사의 냄새가 풍기는 집이랄까. 말 수가 적고 눈빛이 날카롭던 그 할아버지도 손자 친구에게는 유난히 부드러웠던 기억이 새롭다.
제갈량과 이여송
와룡산의 대표적 전설을 보자.
아주 태곳적 산 아래에 옥연(玉淵)이 있어 용이 노닐다가 그 못에서 나와 승천을 하려는데 지나가던 아녀자가 이를 보고 “산이 움직인다.”고 놀라 소리치자 이 소리를 들은 용이 승천을 못하고 떨어져 누운 산이라는 데서 와룡산이라 불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내 고향 비산동의 전설도 비슷하다. 냇가에서 빨래하던 아녀자가 산이 둥둥 떠가는 것을 보고 “산이 날아온다.”고 놀라 소리치는 순간 산이 그대로 내려앉아 날뫼, 곧 비산동이 되었다는 얘기와 신기하게도 빼닮았다.
진사 도석규(都錫珪)가 금호강 하류의 빼어난 풍광을 ‘서호 10곡’으로 간추린 것은 19세기 초엽이다. 강정 박곡 서재의 명승을 배로 거슬러 올라 일곱째 굽이로 점찍은 곳이 와룡산.
칠지곡출와룡산(七之曲出臥龍山)
재가삼운고차문(宰駕三云顧此問)
중도붕년신량루(中道崩年臣亮淚)
한가천조불중환(漢家天祚不重還)
일곱 굽이, 와룡산을 돌아나오니
황제의 수레가 세 번이나 찾아왔구나.
중도에 돌아가시니 제갈량은 통곡했고
한나라 천운은 거듭되지 않았네.
얼핏 보면 10곡이라 꼽을 정도의 경승(景勝)인데도 ‘와룡’ 한 단어에만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대구에 사는 후인으로서는 일면 섭섭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용두봉 용미봉에 올라 그 기막힌 조망을 읊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와룡산에 대한 토속 전설은 그때 더 풍부하지 않았을까, 적어도 자연과 문화의 조화를 잃은 것은 아닐까 싶은 것이다.
아마도 물굽이를 여러 개째 돌다보니 경관 묘사에는 식상해진 모양이다. 아니면 특이한 지형에 끌렸을 수도 있다. 가운데가 옴폭 파인 방천리 분지는 크기의 차이일 뿐 삼국지의 무대인 사천(四川)분지와 꽤 닮았다. 와룡과 사천, 두 가지 임팩트가 이 시에 작용한 것이라고 나름의 부질없는 변호를 하고 싶다.
내친 김에 생각을 진전시켜본다. ‘와룡’ 하면 제갈량의 충의를 떠올려야 하는 문화, 중국은 남의 땅 남의 문화가 아닌 것이다. 조선조 선비의 정향을 느끼게 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멀지 않은 과거인데도 당대의 주류 담론이 어떠했는지 무엇이 우리네의 정신과 생활을 지배해 온 것인지를 새삼스럽게 일깨워본다.
<사진2>사천성 성도의 무후사
2009년 여름 제갈량의 땅 파촉(巴蜀)을 다녀왔다. 동쪽의 장강삼협과 북쪽의 검문촉도, 유비의 백제성, 장비의 장비묘, 관우의 형주고성을 아우르는 삼국지 테마기행이라 할까. 영웅들의 한 서린 자취들을 돌면서 중국이 아닌 우리의 문화감각을 느껴보았다.
그러나 그 중 백미는 제갈량을 모시는 성도(成都)의 무후사(武侯祠)일 수밖에 없다. 경내에 대련(對聯) 편액이 많은데 가장 유명하다는 청대(淸代) 조번(趙藩)의 구절을 옮겨본다. 본 고장에서 충의나 정통보다는 지략가 경세가의 면모에 초점을 두고 있다는 점이 서호 10곡과는 다른 느낌을 준다.
능공심즉반측자소(能攻心則反側自消)
종고지병비호전(從古知兵非好戰)
불심세즉관엄개오(不審勢則寬嚴皆誤)
후래치촉요심사(後來治蜀要深思)
마음을 공략하면 의심이 절로 소멸하니
예부터 병법을 아는 자는 싸움을 좋아하지 않고
세력을 살피지 않으면 관대와 엄격이 모두 잘못이니
훗날 촉을 다스리려면 이를 깊이 헤아려야 하리라
와룡산과 이여송(李如松). 능선 곳곳의 안내판에 그 인연이 기록되어 있으니 많은 사람이 보게 되어있다. 임란 때 원군으로 우리나라에 온 이여송이 이 산의 정기가 매우 뛰어나 많은 인재가 날 것을 우려한 나머지 산의 맥을 자르니 그 곳에서 검붉은 피가 솟구쳤다는 것이다. 불과 4백 년 전의 일이 전설이란 이름으로 등반객의 눈길을 끌고 있다.
국난 최초의 원병사령관인 만큼 특별한 대접을 받을 만한 것일까. 원군이라는 명분하에 거들먹거리면서 정작 왜군과 싸울 생각은 하지 않았다는 것은 우리가 아는 상식이다. 조선군과 합세하여 평양성을 탈환하고, 한양으로 향하던 도중 벽제관 전투에서 왜장 고바야가와(小早川)에게 패한 이후 후퇴한 것이 역사 기록의 전부다.
그런데 얼씬도 하지 않은 남한 땅 도처에 그에 관한 인물설화가 만발하고 있는 것은 기이한 일이다. 특히 산천의 혈맥을 끊은 이야기가 상당수 전승되고 있는데, 와룡산 설화도 그 중 하나인 셈이다. 이여송과 명군에게 손상당한 민족적 자존심을 설화를 통하여 보상받으려는 의지를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이 산이 대구 지역의 정기가 뛰어난 명산으로 인식되어온 사실만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와룡산에 난데없이 등장한 중국인 제갈량과 이여송. 속 좁은 생각인지 모르나, 나는 엉뚱하게도 우리의 이순신을 떠올려 본다.
60년대에「제갈량과 이순신」이란 책이 나왔을 때 나는 피식 웃은 기억이 난다. 비교하지 못할 정도의 함량 차이, 아니면 촌스런 민족주의다, 쑥스럽다 하는 생각을 하면서….
최근 ‘중국과 일본이 보는 이순신’이란 인터넷 토막글을 읽은 적이 있다. 재미있는 역사적 가설을 내세운다. 만약 이순신이 일본장수였다면, 만약 이순신이 훗날 청나라 장수가 되었다면 등등이다. 한마디로 역사가 달라졌을 것이며 이순신과 비교할 만한 인물이 없다는 결론이다. 제갈량의 지략과 충의는 세계화되어있고 시원찮은 이여송조차 설화속의 인물로 떠받드는 판에, 우리의 구국 성웅은 과연 제대로 대접을 받는 것일까, 와룡산에서 느껴보는 심정이 좀은 착잡하다.
아, 아롱산
팔공산과 비슬산 등 주위의 산은 그 지세가 대구분지를 향해 뻗어있다. 오직 와룡산만은 대구를 등지고 돌아누워 있는 형상을 보이는 역산(逆山)이라 한다. 용두봉(263m)과 용미봉(255m)에서 내려다보는 서쪽과 북쪽의 물 좋은 금호강과 질펀한 들판, 그리고 끊어질 듯 이어져 달리는 연봉들은 정녕 산수화의 압권이라 할 수 있다.
<사진3>용두봉에서 내려다 본 전경
와룡산이라면 삼천포의 와룡산이 더 높고 유명하다. 대구의 와룡산이 전국적으로 알려진 계기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충격적인 사건 때문이다. 대한민국 3대 미제사건이라는 개구리소년 실종사건―. 1991년 3월 26일 발생한 이 사건은 ‘아이들’이란 실화영화로 제작되어 딱 20년 후인 신묘년에 새롭게 태어났다.
첫 해에 동원된 30만 명의 수색인력, 지식인의 용기가 허망하게 무너지는 모습, 범인으로 오해받는 부모들, 확대 재생산되는 비극, 얽히고설킨 복잡한 범인방정식…. 영화 같은 실화, 실화가 다시 영화가 되면서 제작자는 말한다. 이 비극적 사건으로 상처 받은 모든 분들에게 이 영화를 바친다고. ‘토압산’으로 이름을 바꿔준 배려에 감사해야 할지 망설여진다. 그 무대인 와룡산은 오늘도 말이 없는데.
가끔 고향을 간다. 대구광역시 서구 비산동, 사람도 산천도 바뀌었다. 와룡산 가던 길목의 떡덕굴 원고개 들말못, 점차 기억마저 희미해질 것이다. 오랫동안 버티던 당산마루도 없어지고, 달서천도 콘크리트 밑으로 숨어버렸다. 당연한 일이다.
나의 수호신 와룡산도 당연히 변하고 있다. 아니 이미 많이 변했다. 대구 쪽 넓은 치맛자락은 서구와 달서구 수십만 시민의 보금자리가 된지 오래고 접근성이 좋다고 능선부근까지 근린공원 수준으로 개발된 곳도 있다.
아늑한 방천리에 쓰레기매립장이 들어선 것은 입지의 필연인지 운명의 장난인지 누가 알겠는가. 하여튼 대구시민 전체의 배설물을 넉넉한 품 안에 끌어안은 지도 20년이 넘었고 앞으로도 대안이 없다 한다. ‘위생매립장’을 거쳐 ‘환경자원사업소’로 세월 따라 간판을 고쳐 달았다. 나는 머리를 조아린다. 수호신 당신의 자정능력이 수백만 백성의 삶을 지탱하게 되었소이다.
‘저탄소 녹색철도’ 글씨도 선명하다. 용미봉 끝머리가 헤집어진 곳에 터널공사가 한창이다. 경부고속전철 도심구간이 와룡산을 꿰뚫게 되어있다. ‘환경’이나 ‘녹색’이란 수식어가 반드시 필요한 시대가 되었는가 보다. 최소한 조물주에게 면피를 하려는 심산인가.
지난 연말 와룡대교라는 명물도 생겼다. 대구 최초의 사장교에 야간 조명으로 볼거리가 생겼다고 소문도 많이 났다. 달성군 서재에서 금호강을 건너 북구 사수동으로 가는 힘줄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그러나 어쩔 것인가. 품 안에 고름을 껴안고 오장육부를 뚫리다가 이젠 잠까지 설쳐야 할 판이다.
<사진4>와룡대교 야경
눈을 감고 멀리 서쪽 하늘을 본다. 불타는 저녁노을을 거느린 웅장한 모습은 변함이 없다. 그 품에 대구를 다 안았다. 꼭 같다, 아니 더 커 보인다. 자꾸 커진다. 안달하는 소년을 달래려는 것 같기도 하고 더 여유가 있다는 몸짓 같기도 하다.
어릴 적 우리 비산동쪽 아이들은 뜻도 모르고 그냥 불렀다. ‘아롱산’이라고. 와룡선생 제갈량도 대명총병 이여송도 몰랐고 서호 10곡은 더더욱 몰랐다. 250만 인구의 쓰레기매립장을 품에 안는다거나 영화 같은 끔찍한 비극의 현장이 되리라곤 상상조차 못했다.
멀고 먼 곳에서 아롱거리는 신비한 산, 대충 그 정도로 감을 잡았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때가 좋고 그 아롱산이 눈물겹게 그립다. 시원한 강바람을 타고 ‘딸랑 딸랑’ 방울소리가 경쾌하게 들리는 듯하다. 아롱산을 넘는 강태공의 모습도 괜찮은 그림으로 떠오른다.
아— 와룡산, 와룡산…, 아—롱—산—.
첫댓글 좋은 글이란 어떻게 써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수작이네. 꽃이 핀다 싶더니만 지고 있어 짧은 봄날이 아쉽기만 한데, 이 봄을 몇 번이나 다시 맞을까. 나이가 들 수록 어린 날 기억이 더 생생해 지는 것는 무슨 조화인지....건안하시게.
후산의 필력이야 정말 회자되는 바이지. 꽃이 말캉 지기 전에 동백섬쯤에서 한잔하세그려...
최공 오래간만에 정말 잘 읽었읍니다
총장님도 앞으로 종종 등장하시오. 시 같은 것도 올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