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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콩박사 조지 워싱턴 카버(George Washington Carver) (1)
땅콩박사로 알려진 조지 워싱턴 카버(George Washington Carver: c. 1864-1943)는 미국의 농화학자이자 식물학자이자 농업경제학자이다. 그는 미술, 음악을 포함하는 다양한 분야에서도 천재적인 재능을 나타냈다. 그는 1860년대 중기에 미국 미주리주 다이아몬드시(Diamond, Missouri)에서 노예 가정인 아버지 자일즈(Giles)와 어머니 메리(Mary)의 2남 1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형은 제임스(짐) 누나는 멜리사이다.
그의 전기에 따르면 그가 태어난 1864년은 남북전쟁으로 폭력이 가득하던 시대였다. 미주리주는 자유주인 캔자스주와 노예주인 아칸소주 사이에 있어서 아칸소주의 노예상인들이 약탈과 살생을 벌이고 있었다. 그들은 가축을 훔치고 노예들을 잡아갔다. 노예 가정의 주인은 광대한 농장을 갖고 있던 독일계 이민자인 모지스 카버(Moses Carver)와 수잔 카버(Susan Carver)였다.
한 사람의 친척도 없이
그의 주인이던 모지스 카버는 교회에 다니지는 않았지만 기독교인으로서의 양심으로 노예제에 반대했다. 그럼에도 노예를 집안에 들인 이유는 모지스가 농사를 짓는 동안 집안일을 같이 할 여성 노예를 아내가 원했기 때문이었다. 700달러를 주고 13세의 착하고 영리한 메리를 사 왔다고 한다. 아내가 원해서 들이기는 했지만 노예를 부린다는 사실에 모지스는 양심의 가책을 받았다. 아기 조지가 태어난 지 일주일 쯤 되었을 성탄절 일주일 전에 노예상인들이 들이닥쳐 메리와 멜리사와 조지를 잡아 켄터키 주로 끌고 갔다. 메리는 멜리사 때문에 빨리 움직이지 못했다. 모지스 카버는 존 벤틀리(John Bentley)라는 사람에게 ‘메리를 찾아오면 밭을 주겠다’고 약속하여 메리를 찾아오려고 했으나 조지 밖에 찾아오지 못했다.
모지스 카버는 조지를 찾아온 다음 자신의 성(姓)을 주어 조지 카버로 부르며 그를 친자식처럼 키웠고 공부도 시켰다. 조지는 몸이 약하여 수잔 카버는 지극정성으로 아이를 돌보았다. 수잔과 모지스 부부는 자녀가 없었기 때문에 노예들이 해방된 뒤에도 조지와 조지의 형 짐을 돌보았다. 짐은 몸이 건강해서 모지스를 도왔고 조지는 수잔과 같이 집안일을 하면서 성실과 검소를 배웠다. 84년 겨울 짐은 병으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
조지의 식물학자로서의 적성은 타고난 것이었다. 이웃집의 장미를 돌보고 5센트를 상으로 받았는데 입소문이 나면서 동네 사람들은 화초가 병이 나면 조지에게 맡겼다. 조지는 병충해에도 관심이 많았다. 모지스의 사과나무에 나방애벌레가 기생하여 나무에 병이 나자 이 문제를 해결하기도 하였다. 조지는 수잔이 준 읽기 책을 공부하여 글을 터득할 정도로 영리한 아이였지만 인종차별로 학교에 가지 못했다. 그 후 조지는 살던 집을 떠나 떠돌아다니면서 학교를 다녔으며 열심히 공부를 하였다.
조지가 집을 떠나 미주리주 네오쇼(Neosho)에서 처음 만난 사람은 마리아 와킨슨(Mariah Watkins), 앤드루 와킨슨(Andrew Watkins) 부부였다. 마리아 아주머니는 산파와 빨래 일을 했고 앤드루 아저씨는 육체노동자였다. 조지는 흑인학교인 링컨학교에 찾아갔는데 토요일이라 학교를 열지 않았다. 배고픔을 달래려고 해바라기 씨를 까먹고 있던 꼬마를 보고 불쌍히 여긴 마리아가 데려와 먹을 것을 주고 거처를 만들어주었다. 앤드루도 조지를 친자식처럼 여겼는데 둘 사이에는 아이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집안일을 거들면서 학교에 다닌 조지는 신실한 아프리카계 감리교회 신자인 마리아와 앤드루로부터 하나님의 선하심과 청결, 근면, 손님 대접을 배웠다. 마리아는 ‘네가 우리 집에 온 것은 하나님의 뜻이야. 하나님은 너를 위해 일하고 계신 것이야. 그리고 앤드루와 내가 너를 돕게 된 것도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야’라고 말했다.
조지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온전히 의지하면서 살았다. 마리아의 친절이 고마운 조지는 어느 해 크리스마스에 직접 수를 놓아 만든 수예품을 선물했고 마리아는 성경을 선물했다. 조지는 이 성경을 평생 간직하며 가까이 두고 읽었다. 마리아는 이런 말을 하였다. “너는 할 수 있을 만큼 공부를 해야해. 그리고 세상으로 나가서 너의 배움을 사람들에게 돌려주어야해.” 마리아는 조지에게 왜 공부해야 하는 지를 깨쳐준 것이다. 그 말을 듣고 조지는 농학을 공부하여 흑인들의 삶이 나아지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당시 흑인에게는 고등학교 진학이 쉬운 일이 아니었으나 조지는 캔자스주에 있는 미니애폴리스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1885년에 그는 캔자스주의 하일랜드에 있는 한 작은 장로교계통의 대학으로부터 흑인이라는 이유로 입학을 거절당하였다.
조지는 우연히 자기처럼 그림을 좋아하는 밀홀랜드 부인과 친해져서 일주일에 두세 번 그 집을 찾아갔다. 그녀의 남편 존은 의사였다. 조지의 학문능력을 아까워 한 밀홀랜드 부부의 권유로 조지는 1890년 심프슨 대학(Simpson College)에서 미술과 피아노를 공부했다. 그는 세탁소를 꾸리며 공부를 했고 미술을 가르친 에타 버드(Etta Budd) 교수의 권유로 에임즈(Ames, Iowa)의 아이오와 농과대학(현재, 아이오와 주립대학교) 식물학과에 이듬해 편입학하였다. 대학 재학 시절 교내 식당에서 입장을 금지당하는 차별을 받자 버드 교수의 친구가 학교당국에 강력히 항의하여 차별이 개선되었다. 조지는 이 학교 최초의 흑인 학생이자 과학 분야의 첫 번 째 학사가 되었다. 1894년 학사학위 취득 후에 조지는 아이오와 실험농장에서 연구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특히 콩의 곰팡이병에 대한 연구로 주목을 받았고 식물 병리학과 식물 구균학에서 뛰어난 연구 실적을 내놓아 농학계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는 1896년에 농학석사학위를 받았다.
흑인운동가인 부커 T. 워싱턴(Booker T. Washington)의 요청으로 조지는 1896년부터 터스키기 학원(Tuskegee Institute, Alabama)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그곳에서 47년을 봉직히였다. 그는 터스키기 학교에 마음이 끌렸는데 그 이유는 이 학교의 산업교육 형태가 인종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교육을 통해 흑인의 최대 이익을 이루고자 노력했다. 1910년 터스키기 학원 이사회는 ‘농업연구원’을 창설하고 그를 책임자로 선정했다. 부커는 그에게 행정업무를 면제해 주었으며 카버는 대부분의 시간을 연구에 쏟을 수 있게 되었다.
카버는 연구실에만 앉아있지 않고 여러 곳을 다니며 농민들을 도왔다. 실제로 농민들에게 큰 혜택을 준 것 중의 하나는 농작물의 순환재배 방법이었다. 당시 미국 남부 여러 주에서는 목화가 가장 널리 재배되는 작물이었는데 같은 땅에 목화를 거듭 재배하다 보니 땅의 양분이 고갈되어 수확이 심각하게 줄어들고 있었다. 카버는 다른 작물을 돌아가며 재배하는 방법을 고안해 냈다. 우선 질소를 만들어 주는 땅콩을 재배하고 그 다음에 고구마 그 다음에 다시 목화를 재배하는 식이다. 그 결과 목화 수확이 엄청나게 늘어나 농민들에게 막대한 도움을 주었다.
또한 땅콩이 대풍년이 들자 땅콩을 소비할 방법으로 땅콩 음식물과 땅콩 껍질로 만든 다양한 요리법과 실용품을 개발해 미국 남부 경제를 살리는데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 카버는 ‘피넛맨’(Peanut Man)이라는 별명으로 불릴 만큼 땅콩에서 식용은 물론이고 공업용, 산업용 제품까지 무려 300가지가 넘는 제품을 개발했다. 여기에는 치즈, 우유, 커피, 밀가루, 잉크, 염료, 종이, 화장품, 비누, 플라스틱류, 목재용 도료, 요리 기름, 약용 기름이 포함되어 있으며 땅콩으로 만든 의약품도 개발 했다.
1921년 카버는 땅콩 재배 농가의 면세법안 통과를 위해 연방 하원청문회에 출두했다. 그가 등장하자 의원들은 처음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카버가 자신이 개발한 많은 제품을 설명하자 의원들은 너무나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고 일제히 일어나 박수를 보냈다. 노예 출신 흑인 학자에게 기립 박수를 보낸 의원들은 땅콩을 일반 식품으로 인정하여 면세 조치를 내렸음은 물론이다. 카버는 고구마에서도 분말제품, 식초, 염료, 잉크 등을 발명했다. 가난한 농민들에게는 비싼 사료를 사다 쓰는 대신 도토리를 먹이는 아이디어도 가르쳤고 옥수수 대를 건축 자재로 만드는 방법도 개발했다.
그는 사회운동가이기도 했다. 그는 남부를 여행하면서 인종 간 화합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인도를 방문해서 간디를 만나 개발도상국의 영양 문제를 논의하기도 했다. 카버는 기독교 신앙심이 깊은 사람이었는데 평생 성경을 가까이했으며 신앙이 사회의 분열을 치유할 수 있다고 믿었고 주일이면 주일학교에서 성경을 가르쳤다. 1928년 카버는 심슨 대학(Simpson College)으로부터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다. 카버는 평생 결혼하지 않았고 자신의 전 재산과 소장품을 카버 박물관과 조지 워싱턴 카버 기금에 기증했다.
카버는 1943년 1월 5일 터스키기에서 세상을 떠났다. 당시 그의 나이는 80세 전후였다. 그는 한 사람의 친척도 없이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양복 깃에 활짝 핀 동백꽃이 꽂힌 채로 누워 있는 학교 예배실에는 이루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줄을 지어 그의 옆을 지나가며 경의를 표하였다.(1) 사흘째 되던 날 카버 박사는 부커 T. 워싱턴이 누워있는 묘지의 옆에 안장되었다. 그의 묘비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씌어 있었다.
“그는 그의 명성에다 재물을 더할 수 있었으나 아무 것도 취하지 않고 오직 세상 사람들을 위하여 봉사함으로써 행복한 생을 누리며 세상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40년도 더 넘은 양복을 입고
조지 워싱턴 카버(George Washington Carver: c. 1864-1943)가 터스키기(Tuskegee)에 도착하던 날이었다. 그는 1896년 10월 8일 이른 아침에 터스키기에서 약 3마일 떨어진 체하(Cheaha)라는 임시 정거장에 도착하였다.
정거장 안뿐만 아니라 그 근방에도 사람의 그림자조차 없는 곳에 내린 카버는 햇빛이 내려 쪼이는 철길 위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다 찌그러진 모자, 자루처럼 축 늘어진 회색 양복, 허리가 구부정한 조지, 아무리 보아도 그는 대학의 교수처럼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길을 걸어오며 채집한 앨라바마 지방의 특유한 식물을 한 아름이나 안고 있었다. 그때에 한 소년이 덜거덕거리는 마차를 몰고 정거장 가까이 왔다. 그 소년은 입을 열었다. “철길 위에 서 계시는 분, 혹시 신사 한 분이 학원으로 가려고 마차를 기다리는 것을 보지 못하셨나요? 그분의 이름은 카버라는 분인데요.” “내가 바로 카버라는 사람인데....”하고 카버가 말하니까 소년은 눈을 크게 뜨고는 “앗차, 선생님이셨구나”하고 중얼거리며 마차에서 내려 카버에게로 달려와서 가방을 뺏다시피 하며 “늦어서 미안합니다. 많이 기다리셨죠? 저 말이 그만...”하며 말을 잇지 못했다. “아냐, 별로 기다리지 않았어. 나는 지금 여기서 자라는 풀을 살펴보고 있는 중이야”하고 카버는 그가 채집한 풀 한 가지를 들고 “이 식물 이름이 무엇이지?”하고 물었다. 소년은 자기가 늦게 온 미안함을 풀기라도 하려는 듯이 상냥한 얼굴로 “그것은 잡초 중의 하나입니다”하였다. 조지는 웃으면서 “아, 그렇게 말한다면 모든 풀이 다 잡초지. 그러나 잡초도 다 이름이 있고, 또 잡초들은 제각기 일정한 목적이 있어서 자라는 것야”라고 말하였다. 그는 이렇게 꾸밈이 없는 수수한 사람이었고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카버는 터스커기 학교의 교장으로 있으면서도 모든 일에서 솔선수범하였다. 그는 학과를 가르치며 주일저녁에는 성경반을 지도했다. 그리고 벽돌 만드는 일, 땅을 개간하는 일, 담장을 수리하는 일, 기숙사나 주방 따위를 검사하는 일, 혹은 가정에서 온 좋지 않은 소식을 듣고 근심하는 학생이나 학교에 처음 들어와 잘 적응하지 못하는 학생들을 찾아서 지도하는 일 등, 그야말로 잠시도 쉴 시간이 없었다. 초기의 카버의 마차부였던 톰 캠벨은 이렇게 말했다.
“워싱턴 교장에게는 1초의 시간도 새로웠다. 그래서 시간에 조금만 늦어도 화를 냈다. 어떤 때는 여행을 갔다가 돌아와서 내가 맞으려고 마차 있는 곳으로 내려가면 그는 벌써 와서 다른 볼 일을 보러 가려고 마차에 올라앉아 손수 말을 몰고 떠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럴 때면 나는 사실 말이 불쌍하게 여겨졌다.”
그는 한정된 세상에서 할 일을 다 해야 되겠다는 생각에 몰리고 있는 사람처럼 바쁜 나날을 보냈던 것이다.
그의 인간관계를 잘 보여주는 것이 헨리 포드(Henry Ford: 1863-1947)와의 사귐이었다. 그들은 1937년에 처음 만난 이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아주 가까운 친구로 지냈다. 한번은 이 두 사람이 기자회견을 하는데 헨리 포드가 말했다. “카버 박사께서 여러분의 모든 질문을 답변해 주실 것입니다. 박사님의 생각이 나의 생각이요 나의 생각이 박사님의 생각입니다.” 그들은 해마다 한 번은 만났다. 처음에는 포드의 집이나 조지아의 농장에서 만났다. 그러나 후에 카버의 건강이 좋지 못해서 여행을 하지 못하게 되자 포드가 터스키기로 찾아왔다. 포드의 특별열차가 도착하게 되면 터스키기의 온 시가는 여러 가지 행사로 웅성거렸다. 터스키기시의 유지들은 포드를 데리고 이곳저곳을 안내하였다. 그러나 그가 무엇보다도 만나기 원하는 사람은 카버 박사였다. 그가 마지못해서 이리저리 끌려 다니다가 “자, 이제는 나를 카버 박사에게 가게 해 주세요”라고 했다.
포드는 억만장자이고 카버는 1주일에 29달러밖에 받지 못하는 교수였다. 그런데 그처럼 친밀히 지내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의아하게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 둘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도 없었다. 그들은 다 함께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능력과 재능을 온전히 활용하고 있는 신실한 사람들이었다. 소유의 차이가 그들을 갈라놓을 아무 이유도 못되었다.
포드의 터스키기 방문은 터스키기에 큰 영향을 끼쳤다. 백인들의 흑인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하였으며 여러 유력 인사들이 터스키기 학원의 설립목적과 방침을 이해하고 많은 협조를 하게 되었다. 또한 포드는 터스키기 학원 출신들을 많이 채용하여 많은 흑인들이 포드의 회사에서 일하게 되었다. 포드는 카버와의 우정의 표시로 조지 워싱턴 카버라는 이름의 어린이를 위한 학교도 세웠다.
카버는 위대한 사업가 포드의 협조로 그의 이상을 실현할 수 있었다. 그의 연구를 뒷받침하기 위해 수천 에이커의 땅에 여러 가지 콩을 심게 하였고, 포드 회사의 전문가들이 농산물로 강철, 유리 또는 그 밖의 것을 대용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결국은 5파운드의 콩으로 25파운드의 갖가지 철물을 대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일에 카버 박사가 직접 관계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카버 박사가 포드 회사와 협력하여 일한 것 중에 가장 중요한 일은 인조고무를 만든 것이다. 조지아에는 질경이가 많이 있었다. 카버 박사는 이 식물에 대해서 연구하여 거기서 나오는 흰 액체를 다른 물질과 혼합하여 고무와 똑같은 물질을 만들어냈다. 이것은 실용화 단계까지 나가지는 못했으나 합성고무제조의 가능성을 보여주어 그 후 오랫동안 연구한 결과 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가 터스키기에 온 40주년을 기념하는 동상 제막식이 1937년 6월 2일 있었다. 카버는 그가 에임스의 아이오와 농과대학을 다닐 때 그의 동창생들이 억지로 사서 입혀 주었던 양복을 입고 있었으며 그의 옷깃에는 생생한 흰 꽃 한 송이가 달려 있었다. 40년이 훨씬 넘은 양복이었다. 1894년 그가 대학을 졸업할 때 동창생으로부터 꽃다발을 받았는데 그는 꽃 한 송이를 빼서 그의 양복 깃에 꽂았다. 그런데 이것이 그의 평생의 습관이 되었다.
부커 T. 워싱턴의 장례식을 마치고 공허감에 침통하게 앉아 있을 때 루즈벨트(F. Roosevelt) 대통령이 그를 한곳으로 데리고 가서 “지금 당신이 하고 있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는 큰 위로와 격려를 받았다. 그가 죽은 후 많은 조문들이 날아왔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카버 박사와 친분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내가 누린 가장 큰 특권 중의 하나였다.”
미국 의회는 다이아몬드 그로우브(Diamond Grove, 현재 다이아몬드)에 있는 모지스 카버(조지 카버의 양 아버지)의 농장에 조지 워싱턴 카버를 기념하는 기념관을 설립하기로 하고 카버 박사의 모든 유물을 보관하게 하였다. 카버 기념관이 완공되어 헌당식이 거행될 때 뉴욕 헤럴드 트리뷴(New York Herald Tribune)은 다음과 같은 기사를 실었다.
“카버 박사는 모든 사람이 다 잘 알다시피 한 흑인이었다. 그러나 그는 모든 어려운 장애물들을 정복하고 승리의 생을 거두었다. 아마 20세기 동안에는 아무도 그와 같은 생활로 본을 보여 인종들 사이에 보다 깊은 이해를 증진시킬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의 위대성은 영원불변할 것이다. 그는 땅콩과 고구마에 숨겨져 있는 많은 유용한 특성을 발견하였을 뿐 아니라, 미국의 국민정신을 새롭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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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894년 그가 대학을 졸업할 때 동창생들이 그에게 보낸 꽃다발에서 하나를 빼서 그의 양복 깃에 꽂았는데 이것이 그의 평생의 습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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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분들을 계속해서 만나게 하시네요.
하나님의 선하심을 온전히 의지하며 살고~♡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들~♡
참으로 존경할만 합니다..
멋지고 훌륭한 삶을 살다간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