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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기
오 상 원
한쪽으로 기울어져 내려앉은 대문, 벌레가 숭숭 사이 없이 좀먹어 들어간 퇴색한 기둥은 이미 주춧돌 위에서 제자리를 잃고 한 귀로 비긋이 물러나 앉은 지도 오랜 성싶다. 들어서면 코밑에 껍질만 남은 빈대처럼 안채가 엎드려 있다. 계절이 바뀌어도 햇볕이라고는 구경도 할 수 없을 조그만 방들, 그러나 그것도 탄둘뿐이다. 한쪽 방에 삼십 촉 등이 희미하게 켜져 있다. 그 희미한 불빛 속에서 마치 석고상처럼 창백한 얼굴을 한 여인이 조용히 앉아 있다. 마치 죽은 듯이 조용히 앉아 있다. 손만이 움직인다. 그 손은 보기에도 지루하리만치 느릿느릿 움직 이고 있다. 바느질을 하고 있는 모양이다.
하늘에는 짓눌리는 가슴처럼 무겁게 구름이 깔려 있다. 조금 있으면 둘째 아들인 영식 이가 돌아올 것이다― 축 지쳐 늘어져서 어쩌면 손때가 묻고 찢어져서 팔다 남은 신문장을 하나 꾸겨 쥐고 돌아올지도 모른다. 그가 돌아와서 그 조그만 두껍지¹에서 꾸겨진 십 환짜리들을 꺼내어 차곡차곡 개키며 헤고 있으려면 아버지가 술에 얼근해서 저벅저벅 돌아온다. 그 육중한 체구에 비하여 땅을 짚는 아버지의 발자국 소리가 왜 그렇게 늘 잘못 허공을 짚는 것같이 허청거리는지 그 발자국 소리를 들을 때마다 영식은 불안스러워지는 것이었다. 그래서 영식은 아버지가 좀 그 육중한 몸집처럼 의젓하게 땅바닥을 콱콱 밟고 다녀주었으면 하고 늘 불안스럽기도 하였다. 어쩌면 이 집 맏아들은 오늘 밤도 안 돌아올지 모른다. 그에게는 집보다도 더 중대한 것이 있었다. 그 때문에 영
식은 형이 싫었다. 형을 볼 때마다 영식은 무엇이 왈칵 형을 향하여 쏟아져 나올 것만 같은 충동을 느끼곤 하였다. 그럴 때면 형은 늘 동생더러 아무것도 모르는 탓이라 하였다. 그는 제법 으스덕거리기도 하였지만 동생은 하나같이 믿기지가 않았다. 그러므로 영식은 아버지가 때때로 몹시 원망스럽고 미웠다가도 형을 볼 때면 아버지가 더없이 가여워지고 좋아지는 것이었다. 이 집 딸은 통행금지 시간이 지나서야 돌아오기 마련이다. 가냘픈 꽃잎처럼 해사한 여자였다. 영식은 이 누나가 왜 그런지 모르게 그저 좋았다. 누나― 너무 쌀쌀하다. 그리고 어머니처럼 말이 없어 어딘지 좀 야속스러우면서도 그래도 그저 좋았다. 누나가 왜 이토록 늘 통행금지가 지나서 돌아오는지를 영식은 모른다. 누구 하나 가르쳐주지도 않거니와 그 또한 묻지도 않았다.
희미한 촉광 밑에서 아직도 여인은 죽은 듯이 앉아서 느릿느릿 바느질손을 놀리고 있다. 아직 이들 가족 중에 누구 하나 돌아온 사람이라곤 없었다. 마치 이들 가족은 영 햇볕을 등지고 폭삭 내려 앉을 듯 기울어진 그네들의 집처럼 그 속에서 살고 있었다.
거뭇거뭇 버섯이 돋고 잔주름이 겹쳐 굵게 패어 들어간 얼굴처럼 이미 영락할 대로 영락하여버렸다고는 하지만 아버지에게는 그래도 그 한때의 의젓하던 체구만은 남아 있었다. 그 어느 날도 하는 것 없이 꾸역꾸역 역겹도록 썩혀 보내야 하는 나날이었지만 그래도 아버지는 마치 그 어느 날도 꼭같이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것처럼 날이 밝기가 무섭게 부성대며 일어나 앉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어나 앉기는 하였으나 다음에 할 바를 몰라 그는 멍하니 허수아˙비처럼 천장이나 담벽만을 마주 보고 언제까지나 앉아 있는 것이다. 영식은 눈을 뜰 때마다 자리맡에 아버지가 그리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아버지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멍하니 벽만을 쳐다보고 앉아 있는 것이다. 결코 자기의 과거를 생각하고 몰락해버린 현재의 자기를 발견하고 한숨짓는다든가 하는 그러한 일이란 전연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맏아들에게 경멸을 받고 있었다. 맏아들은 아버지 얼굴을 보기만 하여도 구역질이 난다고 하였다. 그리고 울컥 밸이 뒤틀려 마구 아버지에게 해대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가 무어라건 꿍 소리 한마디 없이 그대로다.
사변 전, 아버지는 큰 공장을 경영하고 있었다. 폭격으로 공장 시설은 홀랑 형체도 없이 올라가버렸지만 그 대지, 바로 아들이 아버지를 해대게 되는 것이 이 대지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아버지, 그래 그 땅이 아깝지 않단 말이오? 뻐젓하게 자기 건데도 왜 머저리처럼 남에게 빼앗기나 말이오? 지금 그쪽 땅값이 얼마나 오른지 모르슈? 기실 아들은 그 좋은 대지를 뺏기면서도 멍청하게 벽만 쳐다보고 앉아 있는 아버지의 그 허수아비 같은 몰골을 볼 때마다 분통이 터지는 것이었다. 정치적 배경으로 인하여 이미 빼앗겨버린 땅, 사회적으로 한낱 길바닥에 뒹구는 휴지 조각에도 비할 나위 없이 무기력하여진 지금의 아버지로서는 아무런 도리도 없었다. 그 땅을 찾으려면 나에게도 배경이 필요하다. 피난살이에서 돌아와 보니 이미 그 대지는 남의 손에 쥐어져가고 있었다. 불순한 몇 공장 직공 녀석들이 빨갱이 치하에서 그 공장터를 어떻게 농락질하였는지는 모른다. 하여튼 그것은 별문제다. 그 땅을 다시 찾으려면 그것을 찾을 수 있을 만치 강한 배경이 필요하다. 그 배경에 줄을 대려면…… 이러한 길이 있다. 또 이러이러한 길도 있다. 아니, 그와는 방도를 달리할 수도 있을 게다. 그러나 상대 쪽이 타고 있는 줄이 그 어느 쪽으로 어느 만치의 넓은 세력 분포를 갖고 있는 것일까. 그러고 보면…… 들 것이 많다. 이렇게 이렇게 다리를 거쳐야 한다. 그뿐이랴ㅡ 그럴 바에는…… 아니 포기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그러나 아들은 아버지의 그러한 약수²가 더욱 마음에 거슬렸다. 그건 약수가 아니라 비겁이지요. 비겁입니다. 빈주먹이면 어떻습니까. 끝까지 그런 자와는 싸워야 합니다.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위대하다고 생각지 않으십니까. 아버지는 바보입니다. 드디어는 이렇게 아들 입에서 터지고야 마는 것이었다. 그러면 아버지는 벽만 멍청히 쳐다보고 있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자기는 ‘바보’라고 중얼거리며 그 육중한 몸집에 어울리지 않게 허풍처럼 맥없이 어깨를 들먹이며 후후후 웃음을 터뜨리는 것이다. 그때의 그 웃음! 그것은 마치 찢어진 북 소리처럼 덧없이 허무한 것이었다. 영식은 옆에서 그러한 아버지의 웃음소리를 들을 때마다 울음이 울컥 목구멍에서 솟아오르는 것을 금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가 불쌍하였다. 아버지를 확 밀어 팽개치고 밖으로 뛰어나가고 싶을 만치 아버지가 뭔지 모르게 역겹도록 불쌍하였다.
기실 아버지가 그러하기 때문에 형이 지금의 그러한 길로 뛰어들었을지도 몰랐다. 웬만하면 자기가 이 무너져가는 집을 다시 바로잡기 위하여 직업을 갖고 온갖 고초를 한 몸에 지니고 나가야 할 입장이었다. 그러나 그와는 정반대였다. 새벽녘이 되어 집에 돌아오는가 하면 그냥 이불을 뒤집어쓰고 곯아떨어졌다가는 눈이 뜨기 바쁘게 얼굴을 마른 수건에 비비대고 힁 나가버리는 것이다. 어떤 때는 삐라 같은 것을 한 아름 끼고 와서는 동네마다 밤이 늦도록 뿌리고 돌아가는 것이다. 때로는 동생더러 시키는 수도 있었다. 영식은 그게 싫었다. 신문을 저녁 늦게까지 팔고 다니다가 피로에 지친 때문에서라기보다는 뭣 때문에 아무런 소득도 없이 그러한 짓을 해야 하는지 어처구니가 없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도 이따금 푼돈을 벌어 오신다. 누나도 돈벌이에 나섰다. 심지어는 나까지도 신문팔이로 길거리에 나선 것이 아니냐. 그런데 형은 한 푼 벌기는커녕 우리한테 얹혀 먹고 있다.
“형?”
“뭐 말이냐?”
어느 날 영식은 삐라를 들고 나가려는 형에게 왈칵 터져 나오려는 감정을 억제하면서 말을 걸었다.
“그런 것 밤낮 갖고 돌아가면 누가 돈을 준대……?”
“돈?”
하고 형은 의외라는 듯이 동생을 잠깐 지켜보다가 쓴웃음을 입가에 흘렸다.
“돈 때문에 이러는 줄 아니?”
“그럼 뭐야.”
“이 자식아, 아무것도 모르면 가만있어. 넌 아버지가 부러우냐?”
“흥, 나는 그런 얘기가 아냐. 우리는 누구 하나 놀지 않고 돈을 벌고 있어, 그런데 형은 뭐 하는 거야.”
형은 돌연한 동생의 항의에 적이 마음이 동요되는 듯 씩 그냥 웃었다.
“형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은 그런 값싼 돈에 비할 게 아니란 말야. 알겠어?”
“흥, 난 아무것도 몰라. 하지만 우리 집에는 지금 단 한 푼이라도 돈을 버는 사람이 필요해.”
동생의 이 원망스러운 말투에 형은 약간 불쾌해진 모양이었다.
“이 자식, 아무것도 모르면 가만있어.”
그러고 나서 형은 그냥 힁 나가버리는 것이었다. 그때만 해도 그리 형에 대한 감정이 나쁜 것은 아니었다. 영식이가 참으로 형을 밉게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어느 날 형이 녹초가 되도록 두들겨 맞고 질질 끌려서 집으로 들어오던 그때부터였다.
영식이가 신문을 팔고 늦게 돌아오자 어머니는 거의 시커멓게 죽은 얼굴을 하고 형님 머리맡에 앉아 있었다. 벽을 마주 보고 멍하니 앉아 있는 아버지의 얼굴도 어둡게 흐려 있었다. 영식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형의 얼굴은 이루 말이 아니었다. 그것뿐이랴. 온몸이 성한 데가 없었다. 영식은 그러한 형의 꼴을 보자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가슴이 콱 메는 것 같았다. 신음 소리마저 간신히 내고 있는 형편이었다. 누가 그리하였을까. 영식은 분노에 전신이 후들후들 떨렸다. 그러나 다음 순간 이러한 분노는 곧 형에 대한 저주로 바뀌어가고 말았다. 삐라를 붙이다가 낯모를 청년들과 시비가 벌어진 끝에 두들겨 맞았다는 것이다. 영식은 도리어 그러한 형을 간호하고 있는 어머니가 불쌍하였다. 그리고 밤을 꼬빡 새우다시피 하며 입에 물을 떠 넣어주고 이마에 수건을 갈아주는 어머니를 볼 때마다 형에 대한 불쾌한 감정이 더 치솟았다. 더욱이 이 주일쯤 후 형이 일어나 앉아서 제 딴에 잘한 듯이 중얼거리고 있을 때는 더욱더 그러한 감정이 무겁게 연덩어리처럼 가슴을 짓누르는 것이었다. 필경 자기를 이유 없이 집단폭행한 그 괴한들은 반대 정당의 그늘 밑에서 서식하고 있는 폭력배에 틀림없다는 것이다. 두고 보라지. 폭력배를 끼고 노는 그런 놈의 정당이 그래 세도를 부리면 며칠이나 갈 테야. 흥! 내가 고만 폭력에 치를 떨고 끽소리도 없이 물러설 줄 알아. 천만에, 내 모가지가 열두 번 부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해볼 참이다. 그러고 나서 그는 채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면서 또 나간다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면서 말렸다.
“물론 정치를 잘하게 하기 위해서 네가 나가 일하는 것도 좋지만 집도 좀 생각해보고 이 늙은 에미나 애비도 좀 생각해보려무나. 그러다 이 무서운 세상에 귀신 모르게 맞아 죽을까 두렵구나, 응, 이놈아.”
그러나 아들의 고집은 말이 아니었다. 이미 정치에 미쳐버린 그에게는 아버지도 어머니도 안중에 없었다.
“차라리 싸우다 죽는 편이 나은 겁니다. 어머니, 어머니는 나도 아버지처럼 멍청하니 벽이나 쳐다보고 앉아 있어야 만족하단 말입니까. 만약 이 세상 사람들이 다 저 아버지처럼 된다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못 삽니다, 못 살아.”
“그렇다고 아버지가 돌아가셨단 말이냐? 사람이란 그러지 않고라도 다 그저 살아가게 되는 거란다.”
“아닙니다. 어머니, 그러니까 이렇게 우리가 고생하게 되는 거야요.”
“그럼 네가 밤낮 그 쫓아다니는 정당인지 뭔지가 득세를 하면 누가 공으로 다 멕여 살린다더냐. 어느 때든 다 제 할 일 해서 제 밥 먹고 사는 거지.”
형은 어쨌든 어머니의 이야기엔 귀도 기울이지 않았다. 몸이 어느 정도 완쾌되자 형은 또 여전하였다. 동생은 점점 형이 아니꼽고 미웠다. 그리고 형을 볼 때마다 자기도 모르게 왈칵 무엇이 형을 향하여 가슴속에서 터져 나오는 것만 같았다.
영식이가 저녁을 먹고 노곤히 피로에 떨어져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고 누워 있을 때 아버지가 술이 얼근해서 저벅거리며 돌아왔다. 늘 이렇게 술이 얼근해서 돌아올 때면 아버지의 기분은 의외로 좋았다. 술을 안 먹었을 때는 허수아비같이 벽만 쳐다보고. 말이 없는 아버지였지만 술을 먹으면 공연히 어깨를 으쓱으쓱 들먹이고 한 눈을 지그시 감아 보이며 싱긋이 웃어도 보는 것이다. 아버지는 늘 점심때까지 집에 있다가 밖에 나가곤 하였다. 나갔다가는 으레 어둡게야 술이 얼근해서 돌아오는 것이다. 집에서 나간 이후 다시 돌아올 때까지의 아버지의 행적을 자신 이외에 아는 사람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그는 통 자기에 관해서 말을 하지 않았다(아는 사람도 없었지만). 그는 이따금 들어오는 길에 기천³ 환의 돈을 호주머니에서 꺼내어 지그시 입가에 웃음을 죽여가면서 어머니 앞에 내어놓기도 하였다. 어디서 어떻게 그러한 돈이 생겼는지 물론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오늘 더욱이 기분이 좋았다. 소고기 한 근을 사들고 너털거리며 들어온 것이었다. 그는 지금 꿇여서 당신도 좀 먹고 애들도 나누어 먹이라고 하였다. 그는 의젓이 앉아서 필터가 달린 양담배를 꺼내어 피워 물고 발목을 슬슬 쓰다듬으면서 방 안을 휘휘 둘러보았다. 그야말로 가장으로서의 위풍이 의젓하게 서 보였다.
영식은 늘 그러하였지만 이럴 때면 무언지 모르게 가슴이 흐뭇해져서 아버지를 물끄러미 쳐다보게 되는 것이었다. 영식은 집에서만이 아니라 이처럼 의젓한 아버지의 위풍을 골목을 둘 건너 언덕 밑에 있는 선술집에서도 본 적이 있었다. 그 선술집 주인은 옛날에 아버지가 경영하던 공장 직공이었었다. 사변 통에 어쩌다 술장수를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그 선술집 주인은 늘 아버지가 그쪽으로 지나가는 것을 보았을 때는 꼭 쫓아 나와서 공손히 인사를 하고는 부득부득 아버지를 모시고 들어가 술을 대접하는 것이었다. 선술집 주인은 아버지를 반드시 ‘사장 영감’ 이라고 불렀다. 사장 영감같이 착하신 어르신이 이게 웬 말입니까. 다 세상을 못 만난 탓이지요. 좋지 못한 술이지만 마음 놓고 들어주세요. 그러면 웬 당치 않은 말이란 듯이 고개를 저으며 술잔을 받아 들고
자, 그러면 먹겠노란 듯이 잔을 조금 들어 보였다가 죽 들이켤 때 아버지의 모습은 비록 하꼬방 선술집에서일망정 그 의젓한 체구처럼 한 점도 나무랄 데가 없었다. 더욱이 술이 거나해서 상대방의 말에 대하여 응, 그러냐는 듯이 고개를 끄덕일 때의 그 품이라든가 또는 무슨 말끝에 껄껄거리고 웃음을 터뜨릴 때의 그 허탈한 웃음소리는 자다가 생각하여도 너무도 흐뭇하여서 ‘아버지ㅡ’
하고 불러보고 싶은 그러한 것이었다. 결코 그것은 덧없이 터뜨려보는 어딘지 한쪽이 텅 빈 듯한 공허한 웃음은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영식은 이따금 아버지의 그러한 허탈한 웃음소리가 듣고 싶어 그 선술집 창가에 숨어서 안을 들여다보곤 하였던 것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무리 술이 얼근히 취하여 들어와서도 집에서 그러한 웃음을 웃어보는 적은 없었다. 다만 기분이 좋아서 의젓이 발목이나 무릎을 쓰다듬으며 앉아 있을 따름이었다.
오늘도 영식은 그러한 아버지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다. 이따금 아버지도 영식의 얼굴을 내려다보는 주름진 눈가에 은근히 웃음을 지어 보이곤 하였다.
그러나 이것도 그리 오래 지속될 수는 없었다. 통행금지 시간이 지나고 딸의 발자국 소리가 문간에서 들려오면 아버지의 얼굴빛은 갑자기 얼음장처럼 식어지고 굳어버리는 것이었다. 누나는 집에 돌아와도 전연 누구와도 말을 하지 않았다. 누나는 아버지를 정면으로 본 적이 없었다. 아버지도 딸을 결코 마주 보지 않았다. 술이 얼근해서 기분이 좋았다가도 딸이 돌아오면 벽만 멍하니 마주 보기 시작하는 것이다. 조금 전 가장으로서의 그 의젓하던 위풍도 다 스러지고 마치 허수아비처럼 멍청히 앉아 있는 것이다. 누나는 자기 방으로 그대로 들어가버린다. 무거운 침묵과 싸늘함만이 그 뒤에 남는 것이다. 옷 갈아입는 소리가 들리고 요 펴는 소리가 나면 잠시 후에 불이 깜박 꺼진다. 그 뒤에 다시 뒤덮이는 침묵의 그늘, 아버지는 여전히 벽만 쳐다보고 앉아 있다. 영식은 이 시각이 제일 싫었다. 이 시각처럼 집이 싫어질 때가 없었다. 형은 오늘도 돌아오지 않았다. 형이 돌아와도 이 마지막 시각은 마찬가지다. 이 집의 마지막 하루는 이처럼 끝나는 것이었다.
어제 저녁부터 가슴이 짓눌리게 구름이 깔려 있던 하늘은 다음날 제만 때⁴가 되어서야 비를 퍼붓기 시작하였다. 영식은 신문을 채 반도 팔지를 못하고 억수를 만났다. 신문을 옷자락 속에 집어넣고 다방을 이리저리 돌아다녔으나 그만 몇 집 못 가서 옷이 홈빡 젖어버리고 말았다. 그치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하는 수없이 영식은 오색 등불이 반짝이는 어느 문간에서 비를 피하였다. 비는 마구 문간에까지 퍼부어 어느덧 영식의 바짓가랑이에서 빗물이 철철 흘러내리고 있었다. 영식은 문 안으로 들어섰다. 안에서는 율동적인 음악이 흘러나오고 간드러지게 웃어 대는 여자의 웃음소리와 함께 남자들의 음성이 섞여 나오고 있었다.
아스팔트 위에 세차게 내리치는 빗발은 삽시간에 홍수를 이루고 하수도구로 쾅쾅 흘러내리기 시작하였다. 영식은 몸을 후르르 떨었다. 오한이 나는 듯 오싹 전신에 소름이 끼치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태로는 도저히 비가 언제 그칠지 알 수도 없었다. 영식은 우두머니 몸을 쪼그리고 문간에 서서 비 내리는 거리를 바라보고 있다가 등 뒤에 인기척을 느끼고 길을 비키며 돌아보았다. 어떤 젊은 신사 뒤에 양장을 한 여자가 따라 나오며 그 신사의 옷소매를 부여잡고 있었다. 그들은 뭐라고 잠깐 속삭이다가 같이 웃었다. 그러고 나서 신사가 입을 쫑긋해 보였다. 그는 여자와 함께 다시 돌아 들어갔다. 영식은 그 바람에 안을 슬금시⁵ 들여다보았다. 안에는 색색가지 등불이 희미하게 켜진 가운데 남녀가 어울려 앉아서 술을 먹고 있었다. 조선 옷을 입은 여자, 양장을 한 여자, 모두 짙은 화장에 잠시도 그들은 입가에서 웃음을 잃어버릴 새가 없다. 무엇이 저들은 저토록 즐거울까. 어떤 여자는 사내에게 꼭 껴안겨서 무엇인가를 속삭이고 있다. 영식은 이러한 것들을 무심히 바라보고 있다가 깜짝 놀라 자신의 눈을 한번 의심하여보았다. 아니다. 그럴 리가 없다. 영식은 다시 한 번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어쩌면…… 영식은 전신이 불더미 속에 휩싸여 들어가는 것처럼 확 타오르는 것 같았다. 그리고 동시에 가슴이 확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영식은 옷이 홈빡 젖고 옷 속에 감춘 신문까지 전부 젖는 것도 모르고 마구 비를 맞으며 집으로 달렸다. 어쩌면 그럴 수 있는 것일까. 어쩌면…… 그는 속에서 다자꾸 이렇게 부르짖고 있었다.
비는 사정 없이 퍼부어 소년의 머리에서 이마에서 물줄기를 이루고 흘러내리고 다시 그것은 목덜미를 거쳐 가슴팍으로 겨드랑으로 사정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는 집에 들어서자마자 확 울음이 터져 나오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아이구머니나 ―”
어머니는 비에 홈빡 젖은 아들을 보자 뛰어나와 아들을 끌어안았다.
“어머니.”
“오냐, 어서 옷을 벗어라.”
소년은 흑흑 느껴 울었다. 빗물과 눈물은 서로 어울려 그의 뺨을 스치고 흘러내렸다.
“어머니.”
“응?”
“……”
“자, 어서 옷을 벗으래두.”
영식은 옷을 벗을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다.
“어머니.”
“응?”
“아버진 어디 계셔요―?”
“왜 그러니?”
영식은 다음 순간 어머니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그대로 다시 어둠 속으로 뛰어나가며 흐느꼈다. 어머니는 깜짝 놀라 아들을 부르며 뒤쫓아 나갔으나 이미 영식은 비를 그대로 맞으며 어두운 골목길을 뛰쳐나가고 있었다.
선술집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 영식은 자기도 모르게 울음을 머금으며 걸음을 멈추었다. 분명히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비를 축축 맞으며 그 선술집을 슬며시 들여다보며 지나갔다가는 또 잠시 저쪽 집 처마 밑에 서 있다가 그 선술집 앞을 또 지나오는 것이었다. 몇 번씩이나 이렇게 되풀이하고 있었다. 더욱이 허리를 꾸부정하고 비를 축축 맞아가며 허청거리고 걸어오다 선술집 안을 힐끔 들여다보는 모양이란 참으로 가련한 장면이었다. 아버지는 또 이쪽 나무집 처마 밑에 와서 비에 쫓기는 개처럼 멍청히 쭈그리고 서 있다가 다시 또 선술집 앞을 천천히 어깨를 푹 늘어뜨리고 지나갔다. 영식은 어느덧 울음마저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는 아버지의 그러한 거동이 무엇 때문인지를 알 수가 없었다. 영식은 자기도 모르게 아버지에 대한 역겨움이 가슴을 쿡 찌르고 마음을
어지럽히는 것이었다.
영식은 자리에 누웠다. 오한에 턱이 다자꾸 덜덜 떨렸다. 아무리 눈을 붙이려 하여도 잠들 수가 없었다. 그처럼 냉정하고 말이 없는 누나가 어쩌면 그렇게…… 누나가 집을 나갈 때는 화장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어디서 그렇게 화장을 한 것일까. 하지만 집에 돌아올 때는 또 말끔한 얼굴을 늘 하고 있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일까. 알고 있으면서도 모르는 척
하고 있는 것일까. 비를 축축 맞으며 선술집 앞을 저벅거리며 왔다 갔다 하던 아버지의 꼴이 확 뿌리쳐보고 싶도록 밉기 한이 없다. 그처럼 그저 좋고 가엾어 뵈던 누나도 짓밟아버리고 싶은 버러지처럼 밉기만 하다. 영식은 이렇게 집 이 싫어지기가 처음이었다. 아버지가 술에 취하여 저벅거리며 돌아오는 것을 알고도 영식은 돌아보지 않았다.
열한 시가 훨씬 넘어도 누나는 돌아오지 않았다. 비가 멎은 지도 이미 오랬고 밖에는 낙숫물 떨어지는 소리만이 침묵을 깨뜨리고 들려올 뿐이었다.
열두 시를 치는 이웃집 괘종 소리가 조용히 울려왔다. 그래도 누나는 돌아오지 않았다. 아버지는 자리에 누울 생각도 없이 허수아비처럼 멍청히 벽을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밤은 낙숫물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더욱 깊어만 갔다. 이윽고 어머니가 흑흑 느껴 우는 소리가 들렸다. 숨죽이며 속으로 흐느끼는 울음소리였다. 아버지는 여전히 실신한 사람처럼 앉아 있었다. 그러나 영식은 누나가 기다려지지도 않았다.
다음 날 아침 영식이가 눈을 떴을 때에도 아버지는 그냥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어머니의 눈시울은 퉁퉁 부어 있었다. 그대로 꼬박 밤을 새운 것이었다.
이날 아침 맏아들이 횡 하고 나타났을 때에도 그들은 아무 말 없이 그대로 앉아 있었다. 맏아들은 여동생이 어젯밤 안 들어온 것을 알자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 멍청히 앉아 있는 아버지를 저주스러운 듯이 노려보다가 그대로 휙 또 어디론지 나가버렸다. 어머니는 또 숨죽여 울기 시작하였다.
해낮이 되어도 누나는 돌아오지 않았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밥 먹는 것마저 잊어버리고 있었다. 벽을 마주 보고 있는 아버지의 눈은 그슬린 유리알처럼 희미한 게 힘이 없었다. 모든 것이 다 무너져버린 뒤의 공허 그것이었다.
누나는 저녁 늦게야 집으로 돌아왔다. 누나가 돌아와서도 아버지는 멍하니 그대로 담벽만 쳐다보고 앉아 있었다. 어머니도 고개를 떨군 채 가만히 있었다. 누구 하나 입을 여는 사람이란 없었다. 누나는 더욱 창백하게 얼굴이 질려 있었다. 누나가 이처럼 밖에서 자고 들어오는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누나도 고개를 들고 어머니나 아버지를 보려고 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냥 묵묵히 흐트러진 걸음걸이로 들어와서 자기 방으로 들어가버렸다. 그리고 옷을 갈아입고 그냥 자리에 누워버리는 모양이었다.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흐른 후였다. 방 안에서 조용히 숨을 죽이고 흐느끼는 누나의 울음소리가 들릴락 말락하게 새어 나왔다. 그것은 분명 이불을 뒤집어쓰고 소리를 죽여가며 흐느끼는 울음소리였다. 그러자 어머니가 또 흑 하고 느껴 울기 시작하였다.
아버지는 묵묵히 일어섰다. 그리고 허청거리며 밖으로 걸어 나갔다. 저벅거리며 걸어 나가는 발자국 소리¸ 마치 그것은 예전보다도 더 맥없이 공중에서 허우적거리는 것 같았다. 허수아비 같은 아버지의 그림자가 어두운 문간 쪽에서 사라지자 어머니는 더욱 흑흑 느껴 울기 시작하였다.
영식은 갑자기 수없이 어두운 반점 (斑點)들이 어지럽게 눈알을 스치고 지나가는 것 같았다. 영식은 자기도 모르는 중에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리고 어두운 골목길을 달음질쳐 나가며 아버지를 찾았다. 선술집 쪽으로 달려가보았으나 아버지의 그 허수아비 같은 그림자는 눈에 띄지 않았다. 이 골목 저 골목 찾아보았으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영식은 곧 언덕길로 빠지는 큰길 쪽으로 가보았다. 인적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예전 여기는 호화로운 양옥 주택들이 늘어서 있던 곳이었으나 사변 때 폭격으로 홀랑 모두 그 잔형도 없이 무너져버리고 지금은 높이 올려 쌓았던 축대들만이 엉성히 남아 있는 폐허였다.
영식은 걸음을 멈추었다. 그 무너져버린 폐허 위에 어두운 그림자를 발견하였기 때문이었다. 분명 아버지에 틀림이 없었다. 그는 한 걸음 한 걸음 그 어두운 그림자 쪽으로 갔다. 무너진 축대와 다 허물어져 없어진 벽돌담, 지금은 그 벽돌담이 있었던 것마저 알 길 없이 희미해져버린 그 담 위에 아버지는 멍청히 서 있는 것이었다. 마치 이 폐허화한 땅 위에 어쩌다 남아버린 담벽의 한
귀퉁이처럼 서 있었다. 그는 폐허화해버린 이 주택가처럼 폐허화한 자신을 지금 들여다보고 있는지도 몰랐다.
영식은 아버지 가까이로 다가갔다. 영식은 아버지가 돌아서주기를 잠시 기다렸다. 한동안이 지나갔다. 그러나 아버지는 한자리에 무너져버린 채 영 굳어버린 돌담처림 움직일 줄을 몰랐다. 흐트러진 머리카락, 굵게 수없이 패어 들어간 주름살들, 마치 그것은 이 폐허처럼 황량한 것이었다; 영식은 아버지의 손을 잡았다. 매듭마다 딱딱하게 굳어버리고 피부가 거칠어버린 손가락이었다.
“아버 지 ―”
영식은 불러보았다. 그러나 입속에서 불러본 것이 아니라 마음 속에서 이렇게 불러본 것이었다. 영식은 아버지 얼굴을 올려 쳐다보았다. 그 눈빛, 황량하게 무너져버린 이 폐허 위에 겹겹이 내리는 어둠을 묵묵히 지키고 있는 그 눈빛 속에도 어두운 그늘이 무겁게 젖어 있었다.
아버지 ― 영식은 아버지의 손을 끌었다. 그리고 조용히 아버지를 그곳에서부터 물러서게 하였다.
잠시 후 아버지는 아들에게 손을 잡힌 채 어두운 언덕길을 내려오고 있었다. 저벅거리는 아버지의 발자국 소리, 그것은 산 사람이 옮기는 발자국 소리가 아니라 마치 속이 텅 빈 고무다리를 옮겨놓고 있는 듯한 그러한 것이었다. 아버지 ― 영식은 이처럼 아버지의 발자국 소리를 가까이에 들어본 적이 없었다. 영식은 아버지 얼굴을 돌아보았다. 흐트러진 머리카락― 아버지, 저처럼 땅을 좀 콱콱 밟아보세요, 네, 아버지, 부탁이에요, 땅이 울리도록 한 번만이라도 좀 콱 하고 밟아보세요, 아버지를 지키고 있는 영식의 눈빛은 진정 이렇게 아버지에게 애타는 마음으로 속삭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아버지의 걸음걸이는 이러한 영식의 마음은 알 길도 없다는 듯이 그대로였다. 영식은 다시 아버지를
돌아보았다. 아버지의 손을 다시 한 번 꾹 움켜쥐어보는 영식의 눈에는 눈물이 콱 젖어가고 있었다.
집 문 앞에 이르자 이미 그곳에는 한 그림자가 경멸적인 태도로 그들을 기다리고 서 있었다. 형이었다. 아버지는 그냥 묵묵히 그 앞을 지나쳤다. 흥! 하고 역겹다는 듯한 아들의 비웃음도 못 들었는지 아버지의 표정에는 아무런 동요의 빛도 없었다.
아버지는 마루에 걸터앉아 멍하니 허공에 눈 주었다. 부엌 속에서 흑 또 느끼는 어머니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형은 아버지 앞에 떡 버티고 섰다. 그리고 크게 한숨을 내쉬면서 아버지를 노렸다.
“훌륭한 아버지렷다. 딸도 잘 뒀군요.”
짓눌렸던 침묵이 이렇게 탁 깨어지는 순간 아버지 얼굴에는 험악한 물결이 스치고 지나갔다. 아버지의 턱이 경련적으로 꿈틀하고 움직이는 것 같았다. 그 순간 아버지와 아들의 저주스러운 시선이 어두운 공간 한가운데서 마주쳤다 곧 다시 비켜섰다.
“딸이란 건 제 애비 나이가 다 된 늙은이와 붙어먹고 애비란 건 공술 잔을 얻어먹으려고 기신거리며⁶ 돌아가고…… 끝판이 잘 어울리는군요. 나는 인제 구역질이 나는 이 집의 끝판을 봐야겠습니다.”
형의 두 시선은 경멸에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이렇게 말이 떨어지는 순간 아버지는 눈을 꾹 지르감았다가 곧 기운 없이 눈을 뜨고 마주 보았다. 그리고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부인 못 하시겠지요. 나는 여러 번 저 골목길 선술집 앞에서 아버지를 보았습니다. 아버지는 그 선술집 주인 녀석이, 아버지, 그놈이 옛날에 뭐 하던 놈인지 아십니까. 아버지 공장에서 직공 노릇 하던 자예요, 직공 노릇 하던…… 그 녀석이 지나가는 것을 알아채고 공술 잔이나 멕여줄까 하고 그 집 앞을 슬금슬금 왔다 갔다 하는 그 꼴을, 아, 나는 그러한 아버지의 꼴을 먼 길가에서 목격 할 때마다 동정은커녕 저주스러웠습니다. 아시겠지요, 왜 내가 아버지를 저주하게 되었나를. 또 그것뿐인가요. 아버지가 기천 환씩, 이따금 갖고 들오는 그 돈을 어떻게 구걸하여 갖고 오는지도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표정은 차마 볼 수 없이 무거운 것이었다.
“그래 너는?”
비로소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아버지의 음성은 그 표정처럼 무거웠다.
“흥!”
비웃음이 아들의 입가에 곧 감돌았다.
“아버지는 내가 노동을 해서라도 이 집을 짊어지고 모두 벌어 멕여주었으면 싶었겠지만 이 저주스러운 식구들 때문에 내 나이를 썩히기는 아까웠습니다. 나는 나로서 할 일이 있으니까요.”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아버지는 혼잣말처럼 무엇을 중얼거리며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는 이런 집안 꼴 보기도 싫습니다. 낯짝을 들기조차 부끄러워요.”
말이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아들은 휙 그냥 어둠 속으로 꺼져버리듯이 집을 뛰쳐나가버리고 말았다. 이렇게 저주를 퍼붓고 아들이 뛰쳐나가버린 다음 다시금 무거운 침묵이 되돌아오자 아버지는 마치 미친 사람처럼 갑자기 후후후 웃음을 터뜨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마치 이 웃음은 주인 없이 터뜨려버린 웃음처럼 기괴하게 언제까지나 어둠 속에서 감돌고 있었다. 어딘지 공허한, 그러나 오늘따라 이 웃음은 뼈저리면서도 싸늘한 바람처럼 영식의 가슴을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었다.
다음 날 새벽 어머니는 가슴에 칼을 꽂은 채 부엌 구석지에 쓰러져 있었고 누나 방에서는 쥐 죽은 듯이 차가운 침묵만 계속되고 있었다.
두 사람의 재를 한강 기슭에 뿌리고 돌아오던 날도 형은 나타나지 않았다. 영식은 눈이 퉁퉁 부어서 부석부석한 아버지의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왔다. 문 앞에 이르렀을 때 아버지는 영식의 어깨 위에 손을 얹고 힘없이 쓰다듬으며 이렇게 혼자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죽기는 왜 죽어. 다 스러져가는 집이라도 사람이 들어 있는 동안에는 무너지지 않는 법인데.”
-끝-
2016년 6월 22일 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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