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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교양강의]
제7강 이로움과 해로움
이해관계에 직면했을 때는 무엇을 고려해야 할까? 유가는 우리에게 '이로움을 보면 정의를 생각하라' (見利思義)고 가르친다. 이로움을 보면 이득을 취할지를 생각해야 할까? 아니면 법률을 준수하고 예의에 맞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게 옳을까? 자신이 노력해서 얻은 정당한 결과라고 생각하는 게 좋을까? 타인은 손해를 보고 자신만 이득을 얻는다고 의심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장자는 인의(仁義)에 대해 의심하는 태도를 취한다. 인의의 판단 기준이 반드시 보편적으로 효과가 있다고는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장자는 '이로움을 보면 해로움을 생각하라'고 주장한다. 어떤 이익에 직면했을 때는 그 후의 결과를 생각해야 한다. 이익을 위해 우리가 치러야 할 대가가 너무 큰 것은 아닐까, 그 이익을 취한 후에 후회하지는 않을까 등을 고려하라는 것이다.
너무 이기적인 생각일까? 장자가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 천천히 살펴보자.
사마귀가 매미를 잡다
장자는 어릴 적에 송나라의 칠원리(漆園吏, 옻나무 밭을 관리하는 관리)를 지내다가 나중에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풀을 엮어 신발을 만드는 일로 생업을 이어갔습니다.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부근의 산에 올라가 새를 잡거나 강가에 가서 물고기를 낚기도 했습니다. 그는 가난했지만 마음만큼은 유유자적했습니다. <산목(山木)> 편에 나오는 이런 이야기는 장자가 직접 경험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장자는 조릉(雕陵)의 밤나무 울타리 곁을 거닐다가 이상한 까치 한마리가 남쪽에서 날아오는 것을 보았다. 날개의 너비가 7척이고눈의 지름이 한 치나 되었다. 그 까치는 장자의 이마를 스쳐 지난후 밤나무 숲에서 멈추었다. 장자가 말했다.
“저것은 어떤 새일까? 날개는 큰데 빨리 날지는 못하고 눈은 큰데 사물을 볼 줄 모르는구나.”
그러고는 아래옷을 살짝 걷어 올린 후 재빨리 다가가 손으로 활을 쥐고 옆에서 기다렸다. 그때 매미 한 마리가 시원한 나무 그늘을 찾아 제 몸도 잊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그 곁에 사마귀가 나뭇잎으로 몸을 가리고 그 매미를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사마귀도 매미를 잡으려고 제 몸을 잊고 있었다. 그렇다면 까치는? 사마귀를 주시하면서 잡아먹으려는 자신의 탐욕에 빠져 자신이 큰 새인지조차 잊고 있었다. 장자는 놀라면서 말했다.
"아! 만물은 이렇게 서로 연결되어 있다. 서로가 이해관계로 서로 얽히고설켜 있구나."
그가 활을 내려놓고 몸을 돌려 돌아가려는데 밤나무 밭을 지키던 주인에게 도둑으로 몰렸다. 주인은 장자를 쫓아가면서 욕하였다.
이상이 이야기의 전반부입니다. 이상한 까치의 날개가 이마를 스쳤을 때 장자는 놀랐겠지만 내심 기뻤을 겁니다. 왜냐하면 가지고 있던 활을 때마침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지요. 장자는 오랜만에 주안상에 맛있는 안주를 올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겠지요.
그러나 철학자는 호기심으로 가득합니다. 장자도 예외는 아니지요. 그는 저 이상한 새가 왜 자신과 같은 아마추어 사냥꾼의 존재와 위협을 무시하는지를 분명하게 알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몰래 다가가 살펴보고는 먹이사슬의 현실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자연계의 생물 사이에는 먹이사슬 관계가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하지만 분명한 사실입니다. 장자는 그 순간 그 이치를 보았던 것이지요. 그런데 매미가 사마귀에게 잡아먹히는 것을 피할 길이 없었다면 왜 하필 다른 매미가 아니라 그 매미여야 했을까요. 이렇게 유추해보면 사마귀나 이상한 까치도 마찬가지입니다.
매미는 이로움(편안한 나무그늘)을 보고 기쁜 듯이 맴맴 크게 울면서 자신의 몸도 잊고 있었습니다. 저렇게 자신의 천적인 사마귀가 독수를 뻗칠 줄은 생각하지도 못했던 겁니다. 사마귀도 이로움(울어대는 매미)을 보고 자신의 몸조차 잊고 있었습니다. 등을 바짝 세우고 두 팔을 활짝 벌리면서요. 이런 동작은 이상한 까치가 하늘에서 낚아채기 가장 좋은 자세입니다. 그럼 이상한 까치는 어떨까요. 뜻밖에도 자신이 큰 새라는 사실을 잊고 날개로 장자의 이마를 건드려 장자의 심기를 거슬렸다는 사실도 몰랐지요. 또 장자가 자신을 노린다는 사실조차 몰랐을 것입니다. 그럼 먹이사슬의 맨끝은 장자였을까요? 보통 사람이었다면 아마도 남의 밤나무 밭에 들어가서 밤을 훔치는 도둑으로 오해받을 수 있다는 위험 역시 잊었을 것입니다. 장자는 그때 그 사실을 깨달았지요. 그러나 너무 늦었던 겁니다.
장자는 떠나려 할 때 왜 활을 땅에 놓았을까요? 손에 아무것도 없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려 했던 것입니다. 설령 주인에게 잡히더라도 밤을 훔치는 현행범으로 몰리는 오해는 피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겠지요. 이렇게 자신의 상황을 안전하게 만든 후 도망갔던 겁니다. 장자는 무사히 집에 돌아갔습니다. 바로 이 이야기의 뒷부분이 이어집니다.
장자는 집에 돌아와서 사흘 동안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제자인 인저(藺且)가 물었다.
“스승님, 근래 왜 그렇게 불쾌한 표정이십니까?"
장자가 말했다.
"나는 바깥 사물의 형체에 사로잡혀 자신의 처지를 잊었다. 탁한 물을 많이 보아서 맑은 물에 미혹되어버렸다. 내가 일찍이 스승으로부터 '어느 지방에 가면 그 지방의 속을 따라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런데 지금 내가 자신의 몸조차 잊고 조릉을 거닐다가 이상한 까치가 나의 이마를 스치고 지나게 하였고, 밤나무 숲 속에서 노닐며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잊어서 밤나무 밭을 지키던 사람이나를 한심한 좀도둑으로 여기게 했으니 나는 이 때문에 불쾌한 것이다."
이 문단에서는 장자도 제자가 있었고, 평소에 서로 자주 왕래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인저는 『장자』에서 유일하게 이름이 나온 제자입니다. 장자도 감정을 가진 사람이라 저런 일 때문에며칠 동안 불쾌한 표정을 짓고 있다는 점도 알 수 있지요. 왜 불쾌했을까요? 다른 사람에게 좀도둑이라는 오해를 받았고 ‘이로움을 보면 해로움을 생각하라'는 자신의 원칙도 제대로 지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금수는 이익을 보고 해로움을 잊기 때문에 생명을 일찍 끝마치게 된다는 것이 장자의 시각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떨까요. 세상 사람들 역시 항상 이로움을 보고 해로움을 잊기 때문에시간, 건강, 정신, 심지어 생명까지도 잃게 되는 것은 아닐까요?
『장자』에서 '잊는다'로 옮긴 ‘망(忘)’이라는 글자는 대체로 좋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물고기는 물속에 있는 것을 잊는다" 라는 말처럼요. 이는 장자가 사람들이 지향하기를 바랐던 경지입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 속의 '망'은 생명을 상하게 하는 부정적인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외부의 이익으로부터 유혹을 받아 자신의 처지를 잊어버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망'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이로움을보면 해로움을 잊고 미혹과 위험에 빠진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이 상태를 피해야 하겠지요. 둘째는 집착을 없앤다는 뜻입니다. 자신과 만물이 서로 통하여 함께 어우러질 수 있다는 의미이지요.
이로움과 해로움의 사이
인간의 이해관계에 대한 장자의 통찰은 주도면밀하면서도 시야가 넓습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 설명해보겠습니다.
먼저, 눈앞의 작은 이익에 미혹될 필요가 없습니다. 「열어구」편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도 장자가 직접 경험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어떤 사람이 장자에게 관직을 맡기기 위해 초빙하려 하자 장자는이렇게 대답했다.
“당신은 제사의 희생물로 쓰이는 소를 본 적이 있습니까? 아름다운 문양을 수놓은 비단을 입고 좋은 콩과 풀을 먹지만 태묘에 끌려가 제물이 되려 할 때에는 아무리 작은 송아지가 되고 싶어도 그것이 가능하겠습니까?"
이것은 소를 통해 인간의 상황을 비유한 것입니다. 눈앞의 이로움과 단견에 빠진 결과 아주 참혹한 대가를 치르게 되지요.「추수」편에도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초나라 왕이 대부 두 사람을 장자에게 보내어 관직을 맡기려 했다. 그때 장자는 복수에서 낚시를 하고 있었다. 장자가 그 사람들의 말을 듣고 고개도 돌리지 않고 말했다.
"초나라에 신령스러운 거북이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죽은 지가 3천 년이나 되었다더군요. 초나라 왕께서는 그것을 헝겊으로 싸서 대나무 상자에 넣고 묘당에 잘 보관하고 계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거북이가 죽어서 뼈를 남겨 귀중하게 쓰이는 것을 원했겠습니까, 아니면 살아서 진흙탕에서 꼬리를 끌고 다니는 것을 원했겠습니까.”
다음으로, 이로움과 해로움은 서로 의존하고 있습니다. 이로움이 있다면 예측할 수 없는 위험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혹은 이로움이 있으면 부끄러운 행위를 하기 쉽습니다. 「열어구」 편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송나라 왕을 만나 수레를 10대나 받았다. 그는 10대의 수레를 이끌고 장자에게 가서 자랑을 했다. 장자가 그에게 말했다. "강가에 가난하게 사는 사람이 있는데 갈대를 짜서 생활했습니다. 어느 날 아들이 깊은 연못 속으로 들어가서 천금이나 되는 구슬을 가져왔지요. 아버지가 그에게 '그 돌을 갖다가 부숴버려라. 천금이나 되는 구슬이라면 분명히 깊은 연못에 있는 용의 턱에 있어야 할 것인데 네가 그 구슬을 가져올 수 있었다면 분명히 용이 잠들어 있을 때 가져왔을 것이다. 용이 잠에서 깨어나면 네가 어찌 생명을 보존할 수 있겠느냐'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지금 송나라 형세가 깊은 연못보다 더 위험합니다. 송나라 왕의 사나움은 용의 사나움보다 더 합니다. 그런데도 당신이 수레를 얻을 수 있었다면 분명히 왕이 잠들어 있을 때라 가능했을 것입니다. 만약 송나라 왕이 잠에서 깨어난다면 당신의 몸은 부서져서 가루가 될 것입니다."
여기서 장자는 진심으로 이 사람에게 충고했던 것입니다. 처음으로 얻은 이로움은 요행인데 계속 원하는 대로 될 거라고 생각한다면 큰 재앙이 멀지 않았다는 것이겠지요.
장자는 우리에게 눈앞의 이익을 위해서 치러야 할 대가가 너무 크지 않느냐고 일깨우는 것이 아닐까요? 「양왕(讓王)」 편에서 그는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 세속의 군자들은 대부분 바깥 사물을 추구하기 위해서 자신의 몸을 위태롭게 하고 생명을 내버리고 있으니 어찌않겠는가. 성인이 행동할 때에는 반드시 설정한 목적과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정확하게 안 뒤에 시작한다. 지금 여기 어떤 사람이 있는데 수나라 제후의 구슬로 날아가는 참새를 쏘았다고 한다면 사람들은 모두 비웃을 것이다. 왜 그러한가. 그가 참새를 잡으려고사용하는 것은 귀중한 구슬인데 얻으려는 것은 하찮기 때문이다.우리의 생명이 수나라 제후의 구슬보다 더 귀하지 않다고 할 수 있는가?"
생명은 수나라 제후의 구슬보다 더 귀합니다. 이뿐이겠습니까. 생명은 천하보다도 더 귀합니다. 「양왕」편에는 이런 이야기도있습니다.
자화자(子華子)가 소희후(昭僖侯)에게 말했다.
"지금 천하 사람들에게 당신 앞에서 서약서를 쓰게 했다고 합시다. 서약서에는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왼손으로 이 서약서를 잡으면 오른손을 없앤다. 오른손으로 서약서를 잡으면 왼손을 없앤다. 그러나 서약서를 잡은 사람은 반드시 천하를 얻는다. 당신이라면 뜻대로 이 서약서를 잡겠습니까?"
소희후가 말했다.
“나는 잡지 않겠습니다."
이것이 “양팔이 천하보다 무겁다" (兩臂重于天下)라는 잘 알려진 속담입니다. 어떻게 몸이나 생명을 천하와 맞바꾸겠습니까. 저 혼란했던 세상에서의 지혜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이로움을 보았을 때 먼저 고려해야 할 것은 이런 것입니다. 그것을 얻기 위해 우리가 지불해야 할 대가는 무엇일까요? 이 대가를 내가 지불해야만 하는 걸까요? 내가 그 손실을 메울 수 있을까요?
복과 재앙은 서로 의지해 있다
영국 작가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 1854-1900)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람에게는 단지 두 종류의 비극이 있다. 하나는 마음속으로 생각한 일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다. 다른 하나는 마음속으로 생각한 일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 말을 들으면 매우 재미있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무슨 뜻일까요? 마음속으로 생각했는데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에는 여러분도 모두 동의하실 겁니다.
예를 들어 시험을 잘못 보아 원하는 대학이나 직장에 들어가지 못하거나 사업에 실패하여 앞길이 막막한 경우가 그러합니다. 그 밖에도 부모와의 관계, 친구나 애인과의 관계에서 좌절과 다툼을 겪으면 절망에 빠지게 됩니다.
그런데 왜 와일드는 '마음속으로 생각한 일이 이루어진 경우도 비극이라고 했을까요? 이것은 좀 복잡합니다. 예를 들어 마음속으로 생각한 일이 이루어진 후 자신이 성취한 것과 원래 기대했던 것 사이에 큰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 학생은 원하는 대학에 진학했는데 대학이란 곳이 내가 그렇게 가고 싶어 했던 천당은 아니었음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반평생 뼈 빠지게 노력해서 돈을 벌고 난 뒤 돈이 많다고 해서 꼭 행복한 것은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다시 말해 생각했던 일을 성취한 후, 생각했던 목표가 자신이 온 힘을 기울여 얻어야 할 가치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음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흘러간 시간은 다시 오지 않고 성취한 일은 한 줌의 모래처럼 의미 없이 흘러내리지요. 수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자신이 만든 십자가를 등에 지고 방황하는 것은 아닐까요?
또한 자신이 생각했던 일이 성취될 때, 주위의 실패한 사람들은 고통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요? 그 실패한 사람들은 자신의 성공과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관계가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하는 것이지요. 공자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라에 도가 있을 때 봉록을 받으면 정당하다. 그러나 나라에 도가 없는데 봉록을 받는 것은 치욕이다." (邦有道, 穀, 邦無道, 穀, 恥也.)
왜 그럴까요? 도가 없을 때 이룬 성공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얻었거나 타인의 고통을 바탕으로 이룬 것일 가능성이 많기 때문입니다. 혼란한 시대에 출세하고 영달을 누리면 존경받지 못하고 모범이 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유가와 도가의 관점은 유사하지만 그 이유를 생각하는 취지가 좀 다릅니다.
『주역(周易)』 에는 ‘이괘’가 있습니다. 괘의 모양은 토입니다. 괘의 형태가 마치 입을 벌리고 음식을 먹을 수 있고 말도 할 수 있는 모양입니다. 이는 양육을 의미합니다. 모든 사람은 살아가기 위해서 음식이 필요합니다. 여기서 이해관계가 개입하게 됩니다. 이괘의 6효 가운데 3번째 효는 흉합니다. 이것은 64괘 가운데 매우 보기 드문 경우입니다. 필요한 음식을 찾을 때 음식은 적은데 바라는 사람은 많은 경우가 항상 나타납니다. 그럴 때 원하는 만큼 생각대로 가지고 싶다면 다른 사람과 경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설사 그렇게 아귀다툼으로 성공했더라도 오래도록 유지할 수 있으리라는 보장은 결코 없습니다. 말을 하는 경우도 유사한 이치입니다. 한마디 말로 세상 사람들의 마음을 흉흉하게 어지럽힐 수도 있습니다. 장자와 동시대에 활동했던 종횡가(縱橫家)들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이해관계를 비교하는 작은 지혜에 기대어 각국의 제후에게 야심만만하게 유세를 하고 돌아다녔습니다. 성공하면 재상이 되어 출세하지만 실패하면 죽어서 묻힐 땅도 없게 되었지요.
그래서 '이괘'의 「대상전」大象傳은 이렇게 말합니다.
“군자는 언어를 조심하고 음식을 절제한다.”(君子以愼言語, 節飮食.)언어를 조심하고 음식을 절제할 줄 알아야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상황에서 자신을 보존할 수가 있습니다.
장자는 노자의 사상을 깊게 체득하고 이어받아 더욱 발전시켰습니다. 노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재앙에는 복이 기대어 있고 복에는 재앙이 숨어 있다.”(禍兮, 福之所倚, 福兮, 禍之所伏.)
어릴 적부터 고통을 많이 겪으면 그의 감정지수와 역경지수는 시련 속에서 끊임없이 성장하게 된다고 합니다. 결국에는 어떻게 될까요. 그가 외적인 성공을 이루건 이루지 못하건 적어도 그는 마음속으로 사소한 일들에도 만족하면서 즐거움과 감사를 쉽게 느끼게 된다고 합니다. 어떻습니까. 이것도 하나의 행복이 아닐까요?
반대로 어떤 사람은 부자 집안에서 태어나서 고통이 뭔지 아픔이 뭔지 노동의 괴로움이 뭔지를 모르고 자랍니다. 불운하다고까지 할 수는 없지만 작은 일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분노와 원한을 가지기가 십상입니다. 어떨까요. 이것도 일종의 불행이 아닐까요?
행과 불행이 서로 의지하는 관계라는 점을 충분히 볼 줄 아는 사람은 자신의 처지에 대해 아무런 근심걱정이 없습니다. 또한 성공했다고 해서 교만하지도 않지요. 앞에서 장자가 묘사한, 수레를 10대나 받은 송나라 사람처럼 자화자찬하면서 앞으로 닥칠 위험이 어떤 것인지 모르지도 않습니다. 실패했다고 해서 절망하지도 않습니다. 장자로 말하자면 그는 분명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실패자였습니다. 그러나 누가 장자를, 실패하여 낙담에 빠진 사람이라고 생각하겠습니까? 『장자』에서는 '소요'(遊), '변화'(化)와 더불어 끊임없이 '즐거움' (樂)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가 말하는 즐거움이란 지혜를 통하여 얻은 깨달음일 뿐입니다. 만물이 바로 도에서 나와 다시 도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깨닫기 위해서는 이해관계에 대한 계산을 떨치고, 분별하고 집착하는 마음을 없애야 합니다. 그런 후에는 오직 하나의 전체로서의 도만이 있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어느 곳에선들 인생이 즐겁지 않겠습니까?
인생에서 맞부딪힌 비극을 희극으로 바꾸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이해와 득실을 비교하며 계산하지 않고, 전체의 관점에서 자신과 사람, 자신과 사물의 사이에서 일어나는 상호 작용을 감상하는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