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12. 7 (대림2주일)/ 이사40:1-11, 2베드3:8-15, 마르1:1-8
생명과 평화를 위해 일하는 공동체가 되게하소서
예루살렘에 가면 예수님이 태어난 마구간 자리에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하기위하여 세운 교회가 있는데 교회 이름이 “성탄 교회”라고 합니다. 그런데 참으로 아이러니 합니다. 생명과 평화의 상징인 이 성탄 교회로 인해 전쟁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한 때 로마 카톨릭 교인들이 이곳에 은으로 만든 별을 몇 년 동안 그 곳에 달아 놓았다고 합니다. 동방교회의 그리스도인들도 그 별 대신에 자기들이 만든 별을 달아놓고 싶어했습니다. 그러나 카톨릭 교인들은 이러한 요구를 거절해 버렸습니다.
그 당시 동방정교회는 러시아의 지원을 받고 있었고 카톨릭은 프랑스의 지원을 받고 있었습니다. 터어키는 이 분쟁에서 프랑스 편을 들었습니다. 그러자 러시아는 터어키에 대해 전쟁을 선포했고, 그에 대항하여 영국과 프랑스, 이탈리아는 터어키와 연합하여 전쟁을 하게 되었는데 이 전쟁이 그 유명한 크림전쟁(1853-1856)이라고 합니다.
예수를 통해 올 “생명과 평화”를 선언했던 바로 그 장소에서 아기 탄생을 기념하는 별을 서로 달려고 전쟁을 하였다니 참 웃기는 이야기입니다. 좀 달게 하면 어떻습니까? 이런 것 때문에 그것도 예수를 믿는 나라끼리 이렇게 서로 죽어라 하고 싸울 필요가 있는 것입니까? 그런데 이 이야기는 남의 이야기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의 시작”이라고 말하면서 마르코 복음이 시작됩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이란 무엇일까요? 한마디로 말하면 생명과 평화입니다.
그런데 이 평화와 생명은 저절로 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평화는 준비하고 만들어 가야합니다. 때로는 주어진 생명과 평화를 지켜내야 합니다.
광야에서 요한은 이사야의 예언을 들어 외쳤습니다. 평화와 생명, 그 길은 닦고 갈고 고르게 할 때 온다합니다. 그렇습니다. 생명과 평화는 저절로 오는 것이 아니라 준비하는 사람에게 옵니다.
이사야의 예언대로 사막에 길을 내야하고, 골짜기는 메우고 산과 언덕을 깎아 내려 평지를 만들고 비탈진 산골길을 넓혀야 합니다. (이사40:3-5) 이렇게 한다면 야훼의 영광이 나타나 모든 사람이 그 영화, 다시 말하면 생명과 평화를 누리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첫째, 사막에 길을 내라고 합니다.
사막은 메말라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입니다. 이처럼 우리를 메마르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무엇이 우리를 메마르게 할까요? 무엇이 우리를 사람이 살수 없는 땅으로 만들까요?
사랑입니다. 우리 삶 속에서 사랑을 잃어버리면 우리의 삶은 메마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관계도 메마르게 되어있습니다.
저는 요즘 남북관계를 보면서 사막으로 변해가고 있는 남북의 모습을 봅니다. 왜 그럴까요? 사랑의 부재입니다. 생명의 보고인 정글과 늪과 갯벌이 사라집니다. 왜 그럴까요? 사랑의 부재입니다. 모든 것을 힘과 이익의 논리로 보면 그렇게 됩니다.
얼마 전 한 재벌의 딸이 자살을 했습니다. 아마 모르기는 몰라도 모든 것을 가문의 명예, 부와 권력으로만 판단하려는 가족들에게 숨이 막혔던 것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때문에 그 많은 재산과 명예를 누리면서도 그녀의 마음은 늘 메말라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저는 이 사건을 보면서 물질만능, 출세 지상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경고하는 아주 상징적인 사건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랑이 회복되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가슴이 따뜻해야합니다.
한 유행가 가사가 생각납니다. “젖은 손이 애처로워 살며시 잡아본 순간 거칠어진 손마디가 너무나도 안타까웠소.”
어떻습니까? 멋지지 않습니까? 짠하지 않습니까? 사실 이런 마음이 필요합니다. 이게 사랑입니다.
내 남편이 애처러워 보일 때가 있습니까? “다른 사람은 돈도 많이 벌고, 과장도 되는데 당신은 뭐야!” 하고 따지던 아내가 어느 날 남편의 모습이 애처로워 보이면 그건 메말라 있던 마음에 사랑의 길이 생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파괴되는 자연이 애처로워 보이고, 북한이 애처로워 보이고, 아프리카의 난민이 애처로워 보입니다. 내 아들이 애처로워 보이고, 내 엄마아빠가 애처로워 보입니다. 이렇게 되면 막혔던 길이 생깁니다. 이게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사랑입니다. 그래서 기꺼이 내 자신을 줄 수 있는 마음입니다.
그런데 이런 마음은 그냥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중심이 되었을 때는 도저히 생길 수 없는 마음입니다. 내 입장이 아니라 상대방의 입장에서 볼 수 있는 마음이 생길 때, 비로소 이런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마음으로 생명과 평화를 만들어가라고 하십니다. 우리 서로가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질 수만 있다면 사막처럼 메말라 있는 우리들 사이에 길이 나고, 살맛나는 세상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이런 마음을 받아야 합니다.
다음으로, 벌판에 큰길을 훤히 닦으라고 합니다.
정신을 바로 세우라는 말이요 가치관을 바로 세우라는 말로 들립니다. 우리 인간은 가야할 길이 있습니다. 교육에도 길이 있고, 정치에도 길이 있고, 종교에도 길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길이 바로 서지 못하고 온갖 잡초로 뒤덮여 있다면 세상은 혼돈에 빠지게 마련입니다.
상명대학교 김경일 교수는 한국 교회를 이렇게 말합니다. “교회 안의 깊은 샘물을 사회로 퍼내는 게 교회의 할 임에도 불구하고 교회 밖의 구정물을 퍼다 밥을 지어 식탁을 차리고 있다”고 한국 교회를 지적하였습니다. 그것은 사회의 그릇된 가치관이 교회의 가치관이 되어 혼재되어 있음을 지적한 것입니다.
때문에 “한국 기독교 교육의 새로운 지향은 ‘벌거벗음’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다윗이 계약의 궤 앞에서 춘 ‘벌거벗은 춤’(역대상15:29)에서 새로운 발걸음이 시작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동감하는 말입니다.
교회는 시대의 정신을 바로 세워야할 곳입니다. 교회가 시대의 정신을 바로 세우지 못하면 세상은 죽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구하기 위해 의인 열 명을 찾으셨습니다. 이처럼 이 세상에 평화와 생명이 넘치게 하기 위해 하느님은 교회를 찾습니다.
세상은 모든 것을 이익의 잣대로 봅니다. 과학도 외교도 다 자국의 이익 되냐? 안 되냐?로 판단합니다. 이런 생각으로 살아간다면 이 세상은 희망이 없습니다. 토인비의 예언대로 조만간 종말을 맞이하고 말 것입니다. 하느님이 심판하지 않으셔도 인간끼리 종말을 만들고 말 것입니다.
세상은 절대로 잃은 양 1마리를 찾지 않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잃은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해 99마리를 포기할 수 있는 마음을 가르칩니다. 99을 포기하더라도 지금 길을 잃은 1마리를 찾는 마음 사랑입니다. 우리는 이 사랑을 예수에게서 봅니다. 교회가 교회다울 수 있는 것은 예수에게서 우리가 살아가는 길을 보기 때문입니다.
예수에게서 보는 생명과 평화는 복잡하지 않습니다. 아주 단순합니다. 나누면 되고, 섬기면 됩니다. 프란시스는 예수에게서 교회의 희망을 보았습니다. 세상을 구원할 수 있는 빛을 보았습니다. 성탄절 성당에 장식해 놓은 말구유를 보면서 하늘의 권좌를 버리시고 죄 많은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미천한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하느님의 사랑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자신도 그렇게 살고자 했습니다. 예수님처럼 가난하게, 겸손하게, 자신의 모든 것을 나누는 사랑의 삶을 살아가기로 한 것입니다. 바로 이 마음이 중세의 암흑을 빛으로 비추었습니다. 아주 단순합니다. 분명합니다.
그렇습니다. 나눔과 섬김, 이게 생명의 원리입니다. 축복의 원리요, 평화의 원리입니다. 바로 이 사랑이 우주를 있게 합니다. 나를 존재하게 하고, 나무를 존재하게 하고, 우리가 마시는 공기를 존재하게 합니다. 그래서 시인은 피는 꽃보다 지는 꽃이 더 아름답다고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꽃은 자기를 과시하기 위해 피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주기 위해 피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머리는 기술을 만들어 내지만, 마음은 그것은 올바르게 쓰게 하여 평화와 생명을 만듭니다. 머리만 키우려는 벌판에 사랑의 큰길을 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모든 골짜기를 메우라고 합니다. 화해하라는 말로 들립니다.
두 봉우리가 서로 높게 서있어 그늘진 곳이 골짜기입니다. 그래서 골짜기는 어두운 곳입니다. 그늘지게 만드는 곳입니다. 골이 깊으면 빛은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골이 깊어 그늘진 곳에 빛이 들어 갈 수 있도록 메우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나 골이 깊은 곳이 많습니다. 남북의 골이 있고, 지역 간에도 골이 있습니다. 사용자와 근로자, 있는 자와 없는 자의 골이 너무 깊습니다. 가정에도 깊은 골이 있습니다. 아내와 남편,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골이 있습니다. 교회에도 골이 있습니다. 우리 강동교회는 골이 없나요? 있다면 메워야 합니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만나서 일을 하다보면 골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이런 골은 대부분 이기심에서부터 나옵니다. 남에 대한 배려가 없고 자기만을 높이려고 할 때 골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런 골들은 인간을 불행하게 합니다. 서로 상처를 주고 미움을 품게 합니다. 뿐만 아닙니다. 판단을 흐리게 할 뿐만 아니라 문제의 본질을 바로 보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복된 소식을 맞이하기 위해 이런 골을 메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깊은 골을 메울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그것은 자신을 죽이는 일이요, 자신을 나누는 일입니다.
그리고, 높은 산과 작은 언덕을 깎아 내리라고 했습니다.
서로 나누고 겸손하라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사람은 누구나 타고난 재능을 갖고 살아갑니다. 사람은 그 재능에 따라서 높은 사람이 되기도 하고 낮은 사람이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높은 산이 되었던 낮은 언덕이 되었던 눕혀져야 합니다.
높은 산과 언덕에서는 양식이 만들어 질 수 없는 것처럼 자기를 세우려는 재능은 평화를 만들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골짜기를 메우고 산과 언덕을 깎아 내리라고 한 것은 겸손 하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재능을 이웃을 위해 그리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기꺼이 나누라는 말입니다.
세례자 요한을 보십시오. 당대 최고의 예언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겸손했습니다. 남부럽지 않게 살만도 한데 그는 낙타털옷을 입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고 살 정도로 가난하고 경건한 생활을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찾아온 젊은 청년에게 자신은 감히 신발을 끝을 풀어드릴 만한 자격도 없다고 고백합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고백할 수 있습니까? 누군가 바른 충고를 했을 때 내 자존심, 명예를 다 내려놓고 그 충고를 경청할 수 있을까요? 바로 이것이 겸손입니다. 이런 겸손이야말로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가장 아름다운 삶이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세례자 요한은 “회개하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이제 곧 말씀으로 오실 그분, 물이 아니라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그분을 향해 돌아서야 한다고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서호승 신부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오늘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예수의 성탄을 보고 우리의 성탄이 되게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성탄을 보면 보입니다. 길이보이고, 진리가 보이고, 생명이 보입니다. 예수님이 아니고는 우리의 삶을 고르게 할 수도, 곧게 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결론은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히브12:2)
그러므로 이제 남은 것은 예수의 성탄이 아니라 나의 성탄이 되게 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이 구유에 놓이신 것처럼, 내 자신이 구유에 놓여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양식이 되어 우리를 먹이신 것처럼, 우리도 주님의 양식이 되어 세상을 먹이는 성탄이 되게 해야합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준비해야할 성탄이요, 우리의 누려야할 성탄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