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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허난설헌의 묘는 경기도 광주시 초월면 지월리 산 언덕 안동김씨 묘역에 있다. 1986년 5월 7일 경기도 기념물 제 90호로 지정되었다.
주요 작품
작품 세계
《앙간비금도(仰看飛禽圖)》와 친필
동생의 재능을 알아본 오빠의 배려로 글을 배웠다. 어른이 되었을 때 가난한 집 아씨는 열심히 옷을 만들어도 그 옷의 주인이 되지 못한다면서 사회의 불공평을 비평하는 사회비평, 도교적인 가치관등 다양한 가치관을 표현, 시인으로서의 재능을 보였다. 그래서 역사학자 이덕일은 허난설헌의 시를 임금노동자는 그가 생산하는 소유물을 갖지 못한다는 마르크스의 《소외론》과 비교할 정도로 허난설헌의 재능을 극찬하였다.
하지만 아버지가 병에 걸려 서울로 올라오다 상주 객관에서 죽었으며, 오빠 허봉이 정치적인 이유로 귀양 갔다가 유배가 풀린 뒤에도 서울에 돌아오지 못하고 방랑하다 금강산 근방에서 죽고, 어머니가 전라도 진산에서 여행하다가 소화불량으로 객사했으며, 아들과 딸을 일찍 잃고, 죽기 얼마 전에는 뱃속의 아기까지 잃는 등 불행한 일도 많이 겪었다. 많은 작품을 생전에 태워버렸으나, 세상을 떠난 후 동생 허균이 이전에 베껴 놓은 것과 기억에 남은 것을 모아 그녀의 시를 《난설헌집》로 펴내 지금까지 전한다.
가족 관계
부모
아버지 허엽(許曄,1517~1580)은 호가 초당(草堂)이며, 서경덕의 문인이며 경상도관찰사를 지냈고, 동인의 영수가 된다.[5] 첫째 부인 한씨와의 사이에 두 딸과 큰 아들 성(筬)을 두고, 둘째 부인 김씨와의 사이에서, 봉과 난설헌, 균의 2남 1녀를 두었다.
어머니는 후취인 강릉김씨(江陵金氏)로서 예조판서 광철(光轍)의 딸이다.
형제 자매
큰오빠 허성(許筬, 1548~1612)은 자는 공언(功彦)이며, 호는 악록(岳麓) 또는 산전(山前)으로 불리었다. 1583년 별시문과에서 병과로 급제를 하였다.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을 통일한 1590년에는 왜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 조선통신사가 결성되었는데, 이때 허성도 종사관으로 일본에 다녀왔다. 같이 통신사로 갔던 김성일 등의 동인은 전쟁에 대비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을 펼쳤지만 허성은 동인임에도 불구하고 서인이었던 황윤길의 주장에 찬성을 하게 된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난 후 1594년 이조참의로 승진되었으며, 이어 이조참판과 전라도안찰사를 거쳐, 예조판서, 병조판서,이조판서에 까지 요직을 두루 거쳤고, 1607년 선조의 유교를 받게 되어서 세인들이 고명칠신이라 칭했다. 저서로는 《악록집(岳麓集)》이 있다.
둘째 오빠 허봉(許篈, 1551~1588)은 호가 하곡(荷谷)이며, 자는 미숙(美叔)이다. 유희춘의 문인으로 허난설헌의 재능에 가장 관심을 가졌던 인물이다. 1572년 친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574년 성절사의 서장관으로 자청하여 명나라에 가서 기행문 '하곡조천기(荷谷朝天記)'를 썼다. 1575년 이조좌랑이 되었고, 1583년 창원부사를 역임하였다. 그는 김효원과 함께 동인의 선봉이 되어 서인들과 대립하였다. 1584년 십만양병설을 주장하였던 병조판서 율곡 이이의 직무상 과실을 들어 탄핵을 하였다가 종성에 유배되었고, 1585년 유배에서 풀려났지만, 방랑생활을 하다가 38세의 나이로 금강산에서 객사하였다. 저서로는 《하곡집》등이 있다.
동생 허균(許筠, 1569~1618)은 호가 교산(蛟山)이며, 동복 형제이다.
참고자료 :
1. DAUM 백과사전
2. (사)허균·허난설헌 선양사업회 http://www.hongkildong.or.kr
3. 한국학중앙연구회 http://people.aks.ac.kr
자료출처-양천허씨대종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