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임신을 했던 비극의 블러디 메리
메리는 절대 울지 않는 아이였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와 앤 볼린의 불륜에서 비롯된 엄마의 불행을 지켜보며 마음이 굳어져서 였을까요. 엄마 아빠의 결혼이 무효가 되면서 사생아가 되고, 엄마를 보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 서러움도 모자라 치욕스럽게도 앤 볼린의 딸 엘리자베스의 시녀가 되었던 메리는 믿고 의지하던 보모도 가톨릭교인이라는 이유로 처형당하면서 불규칙한 생리, 우울증 등을 겪으며 자주 아프기 시작했습니다. 왕실의 의사들도 메리가 자주 ‘아픈(ill)’ 이유는 ‘ill treatment’ 때문이라고 했고, 엄마가 죽었을 때 슬픔에 잠긴 메리를 위로할 길이 없었다니, 이런 메리에게 후에 블러디 메리(Bloody Mary)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이 붙여진 것은 헨리 탓이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메리가 여왕이 되기전에 남동생 에드워드부터 먼저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런데 에드워드는 아버지로부터 병을 물려받았는지 몸이 약해 어디 오래 살겠나 싶었습니다.
메리가 여왕이 되기까지…
9살의 나이에 죽은 아버지의 뒤를 이은 에드워드 6세(1547~1553) 는 나이에 걸맞지 않게 신앙심이 깊고 목사같이 엄숙한 아이었고, 성모 마리아의 동상과 성자들의 그림을 금지하는 등 토머스 크랜머와 함께 좀 더 확실하게 신교 사상을 영국에 심으려고 했습니다.
어린 왕의 섭정을 맡고 있었던 노섬벌랜드 공작 존 더들리(John Dudley, Duke of Northumberland)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 비실비실해서 얼마가지 않을 것 같은 에드워드가 죽으면 가톨릭교를 믿는 메리가 뒤를 이을 것이고, 그러면 신교도인 자기는 끝장나게 생겼습니다. 이에 공작은 에드워드를 설득했습니다.
"폐하가 여태까지 이룬 신교의 업적이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것을 허락하시겠습니까"
메리와 엘리자베스를 왕위계승권에서 제외시키고, 본인의 아들 길포드 더들리(Guildford Dudley)를 헨리 8세의 여동생의 손녀인 제인 그레이(Jane Grey)와 결혼시킨 후에, 에드워드가 죽자 제인을 여왕으로 내세웠습니다.
하지만 평생을 서럽게 살은 메리가 가만히 있을 리 없었습니다. 런던의 지지를 얻은 메리는 제인 그레이가 여왕으로 선포된지 9일 만에 노섬벌랜드 공작, 길포드 더들리, 제인 그레이 모두를 런던 타워로 보내고(이래서 제인 그레이를 ‘9일의 여왕’이라고 합니다), 영국역사 최초의 여왕(Queen Regnant)이 되었습니다(참고로 여왕을 의미하는 Queen Regnant의 regnant는 군림한다는 뜻이고, 왕비를 의미하는 Queen Consort의 consort는 동반자라는 뜻입니다).
옆에 동생 엘리자베스를 동반하고 800명의 귀족과 젠틀맨들을 거느리며 승승장구 런던으로 입성하는 메리를 런던시민들은 뜨겁게 환영했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인기를 누리는 이유가 무엇인지 파악하지 못하는 데서 메리의 비극은 시작되었습니다.
‘여왕님, 외국인과의 결혼은 안됩니다’ - 와이어트의 반란
‘나도 사랑이라는 것을 해보고 싶다!’ – 스페인의 펠리페에게 반한 메리
벌써 서른 살이 된 메리가 생각합니다.
‘상속자 없이 죽으면 왕위는 신교를 믿는 엘리자베스에게 넘어갈 것이고, 종교도 문제지만 창녀 앤 볼린의 딸에게 왕위를 물려줄 수는 없지. 그리고 내 서러운 인생, 나도 사랑이라는 것을 해보고 싶다!’
이때부터 남편감 구하기에 주력했던 메리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카를 5세의 아들이었던 11살 연하 스페인의 펠리페(Felipe of Spain)의 전신 초상화를 보았을 때 첫눈에 반했습니다.
‘여왕님, 여왕님의 애국심은 어디에 있습니까? 영국 남자와 결혼하십시오’ 라며 온 국민이 격렬히 반대하는데도, 메리가 ‘내 인생이다’ 라며 펠리페와의 결혼을 포기 못하겠다고 했으니, 아니나 다를까 또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토머스 와이어트(Thomas Wyatt)라는 사람의 주동으로 켄트 지역에서 시작된 반란에는 여왕은 국제결혼하지 말고 데본 백작 에드워드 코트니(Edward Courtenay, Earl of Devon) 같은 영국인과 결혼해 달라는 요구 뒤에 가톨릭 메리 정부를 타도하고 신교 엘리자베스를 여왕으로 삼으려는 종교적인 의도가 내포되어 있었습니다.
우선 펠리페가 영국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바다를 막고 런던에서 집결한 다음 메리를 쫓아내고 엘리자베스와 데본 백작을 결혼시키려는 야무진 꿈을 가졌던 반란은 신성로마제국의 대사에 의해 폭로되어 시간에 쫓겨 성급히 진행되면서 방향을 잃고 휘청거리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와이어트의 뜻에 동조하는 사람들의 수가 이미 4,000여 명에 이르렀으니, 메리는 그들을 만나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때 오만해진 와이어트가 앞으로 여왕은 이제 자신의 명령에 따르고 런던 타워도 자신이 통치하겠다는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와이어트 편이었던 런던의 심기를 건드렸고, 메리의 길드홀에서의 심금을 울리는 감명적인 연설은 민심을 다시 그녀에게로 돌려, 반란은 실패로 돌아가고 메리는 결국 사랑하는 펠리페와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배다른 동생, 엘리자베스에게 베푼 자비
와이어트의 반란 때 이름이 언급된 것만으로도 반란에 연루되었다고 의심받았던 엘리자베스는 런던 타워의 독방에서 심문받았습니다. 스페인 대사를 비롯한 왕실의 가톨릭교인들은 엘리자베스가 살아있는 한 메리의 자리는 안전하지 않다며 이번 기회에 없애야 한다고 강력하게 나왔습니다. 하지만 증거가 부족했고, 와이어트도 엘리자베스는 결백하다고 진술해 엘리자베스는 결국 풀려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는 사실 여왕인 메리의 결정에 달린 일이었습니다. 이때 어렸을 때 엘리자베스의 시녀가 되는 치욕을 경험했던 메리가 신하들의 많은 압력에도 불구하고, 엘리자베스의 사형집행서에 서명하지 않은 것은 블러디 메리라 불렸던 그녀지만 본성은 잔인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높이 살만한 일입니다.
스페인에서도 환영받지 못했던 결혼
여자의 소유물과 직위가 남편 것이 되었던 당시 법에 의해 메리와 결혼하는 남자는 실질적으로 영국의 왕이 되는 것과 다름없었기에, 가톨릭국가 스페인의 꼭두각시가 되어 독립성을 잃을 것을 우려했던 영국 의회는 다음과 같은 서약서를 탐탁치 않아하는 펠리페에게 사인하게 했습니다.
펠리페는 명목상으로 영국의 왕이 되기는 하지만, 법전을 비롯한 모든 공식 문서는 여왕과 남편 둘 모두의 승인을 필요로 할 것이고, 여왕 없이 의회를 열 수 없으며, 동전에도 여왕과 왕 둘 다의 얼굴이 새겨질 것이다. 영국은 어떤 전쟁에서라도 스페인을 도울 의무가 없고, 여왕의 동의 없이는 외국인을 관직에 임명할 수 없다.
사실 이 결혼은 영국에서만큼 스페인에서도 환영받지 못했습니다. 미개한 이단자들이 사는 추운 나라에 가고 싶지 않은 펠리페의 신하들은 이 결혼이 왕자님의 명예훼손이라고 생각했고, 펠리페 본인도 동의했다고 합니다.
‘블러디 메리’ 라는 별명, 사실 좀 억울하다고요
아버지와 남동생 앞에서는 가톨릭교를 부인했지만, 몰래 개인 미사를 드릴 정도로 헌신적인 가톨릭 신자였던 메리는 여왕이 되자마자 우선 옥에 갇혀 있던 가톨릭 신자들부터 해방시키고 가톨릭교를 영국의 국교로 선포했습니다.
당시 가톨릭교인과 신교도들은 단순히 서로의 사상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정도가 아니고, 상대방이 사악한 존재이며 그들을 멈추게 하는 것이 자신들의 의무라고 믿었습니다. 연옥의 개념을 기억해보면, 죄는 불에 타야만 씻어지기에 가톨릭교인들은 신교도들이 불속에 집어넣어져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메리 재위 때 토머스 크랜머를 비롯해 휴 라티머와 니콜라스 리들리 같은 저명한 주교부터 서민까지 300여 명이 말뚝에 묶여 화형(burning at the stake)을 당했습니다. 크랜머는 목숨을 건져보려고 막판에 가톨릭교로 전환했지만, 가톨릭교든 아니든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혼을 성사시킨 크랜머를 메리가 살려둘 리 없었습니다. 크랜머는 말뚝에 묶여 불에 타기 바로 직전에 다시 신교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과연 그는 천국에 갔을까요?!
사람이 산 채로 불태워질 때는, 다리까지만 타오른 상태에서 질식사하는 경우도 있지만 보통 종아리부터 허벅지, 손, 몸통, 팔, 가슴, 목, 얼굴의 순서로 타올라 죽음에 이르기까지 2시간이 넘게 걸립니다. 목에 감긴 밧줄에 의해 불에 타는 동시에 목이 졸리거나 이미 교수대에서 30분간 목이 졸린 다음 불태워지기도 했으며 원유나 송진 등을 발라 더 잘 타게 하기도 했는데, 산 사람이 탈 때는 아직도 철분이 가득한 피, 내장과 피부 타는 냄새가 참 불쾌하다고 합니다.
한두 명도 아니고 한꺼번에 많은 사람들을 태웠으니, 그 냄새가 멀리까지 퍼져 공포에 빠진 국민들이 메리를 증오하게 되어 이때 메리에게 ‘블러디 메리’라는 불명예스러운 칭호가 붙여진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것은 좀 불공평한 것이, 이 정도 규모의 학살은 유럽 대륙에서 일어난 일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 때는 게으름핀다고 공공장소에서 소녀들을 매질하고, 여왕에 대해 무시하는 말투를 썼다고 귀를 벽에다 못으로 박고, 단두대에서 잘린 머리를 창에 꽂아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게 전시했던 16세기였습니다. 또 엘리자베스 때 처형된 가톨릭교인들의 수가 메리 때 처형된 신교도들의 수보다 적지 않지만, 엘리자베스는 ‘블러디 엘리자베스’라고 불리지 않습니다.
메리는 다른 업적이 없고, 국민들이 반대하는 결혼을 했기에 이 일이 과장되어 그렇게 생각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완고하고 약간 괴팍스러운 면이 있기는 했지만, 메리는 아버지 헨리 8세의 훌륭한 자질들을 많이 물려받았고, 좀 더 건강하고 사랑받았더라면, 그리고 펠리페와 결혼하지 않았으면 이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역사학자들은 말합니다.
하지만 특히 가난한 서민들을 한꺼번에 불태우는 일은 많은 원한을 샀고, 이런 잔인한 처사는 비효율적이며 반감을 일으킬 것이라고 신하들이 경고했지만, 메리는 죽을 때까지 신교도들의 처형을 계속해 국민들의 안티-메리, 안티-가톨릭교, 안티-스페인 감정을 악화시켰습니다.
메리와 펠리페 아래 영국은 다시 로마교황의 사법권 안으로 들어갔고, 메리와 메리가 임명한 추기경 레지널드 폴(Reginald Pole, 메리가 어렸을 때 가톨릭 신자라는 이유로 처형당했던 보모의 아들)이 더 오래 살았으면 영국은 다시 가톨릭교로 전환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하지만 수도원 해산 때 사영화된 토지들을 교회 소유로 되돌리지는 못했는데, 이유는 그때 토지와 재산을 늘린 사람들의 영향력이 너무 커져서 여왕도 건드릴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무정한 남편의 아이를 상상 속에서 임신한 메리
어린 소녀의 열정으로 사랑에 빠졌던 메리와는 달리 메리에게 조금의 관심도 없었던 펠리페는 결혼 후 곧 영국을 떠났고 그 후 대부분의 시간을 외국에서 보내, 혼자 남은 메리는 우울증에 빠져 암울한 나날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펠리페가 잠시 다녀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메리가 입덧을 하더니 몸무게가 늘고 배가 불러왔습니다. 메리는 물론 궁중 의사들도 다 임신이라며 여왕님 축하드린다고 했는데, 이상하게도 예정일이 지났는데도 아이가 나오지 않더니 부른 배가 스스로 꺼졌습니다. 메리의 아이를 가지고 싶어 하는 간절한 소망에서 비롯된 상상임신(phantom pregnancy)이었습니다. 불명예와 사람들의 비웃음에 메리는 더욱더 절망과 슬픔의 구덩이로 빠져 들었고, 신교도들의 처형은 계속되었습니다.
펠리페가 힘을 합해 같이 프랑스를 치자고 메리를 설득하기 위해 잠시 다시 영국에 다시 들어왔을 때, 무슨 이유에서 왔든 펠리페가 돌아온 것이 너무 좋아 그의 설득에 넘어갔던 메리는 이 전쟁에서 프랑스에 남아 있던 영국의 마지막 영토, 별 수익은 없었지만 상징적인 의미가 있었던 칼레(Calais)마저 잃어 국민들을 또 한 번 실망시켰습니다. 1066년 이후 처음으로 유럽 대륙에 영국 땅이 하나도 남지 않은 것을 안타까워했던 국민들은 끝까지 메리를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메리가 여왕이 되었을 때 환호를 받았던 이유는 메리가 국민들이 좋아했던 아라곤의 캐서린의 딸로서 합법적인 상속자였고 그때까지만 해도 영국에 가톨릭 신자들이 많이 남아있었기 때문이지 다른 것이 아니였습니다. ‘죽으면 내 심장에 펠리페와 칼레 두 글자가 박힐 것이다’ 라며 애통해 했던 메리. 그녀의 비극은 이러한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신교 영국으로서의 정체성이 커져나가고 있었던 시대의 흐름에 어긋나게 외국인과 결혼하며, 잔인한 방법으로 신교도들을 학살한 데 있었습니다.
펠리페의 방문 이후 또 배가 불러온 메리는 만약 자신이 죽고 태어날 아이가 어린 나이에 왕이 되면 펠리페가 섭정이 되게 해달라는 유언까지 썼지만, 이 또한 메리의 정신세계가 만들어낸 임신이였음이 드러났습니다.
1558년 메리는 42세의 나이로 세인트 제임스 궁전(St James’s Palace)의 아무도 돌보지 않는 침대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메리의 사망 소식을 들은 펠리페는 ‘메리의 죽음에 대해 적정한 정도의 슬픔을 느낀다(I felt a reasonable regret for her death)’ 라는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펠리페는 사실 메리가 아파 누웠을 때부터 엘리자베스에게 청혼해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