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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영도구 흰여울문화마을 골목길에 펄럭이는 빨래. 아득히 펼쳐진 남항 외항의 묘박지를 배경으로 흔드는 '노스탤지어의 손수건'을 연상케 한다. |
[산복도로]는 부산의 근·현대사 역정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일상의 삶터다.
이곳에 펼쳐지는 산복도로 르네상스는 도시재생사업의 대표적 모델이 되고 있다.
부산시가 올해 중점 사업구역으로 잡은 영도구 영선2동, 동구 수정동, 서구 아미동, 사상구 주례동 등에
숨어 있는 보석같은 이야기를 발굴, 소개하는 시리즈를 6회에 걸쳐 연재한다.
할머니와 [이송도 바닷가]에서 놀고 있었다.
먼 길을 돌아온 흰 파도들이 할머니 발목에서 거품꽃으로 피어났다.
할머닌 파래도 뜯고 이것저것 먹을 것들을 찾고 있었다.
그러다 제법 큰 돌을 헤집어 군수를 한 마리 잡았다.
"야야, 이것 봐라, 경숙아. 운수대통했네."
기뻐하는 모습이 어린 손녀의 눈에도 해맑았다.
아닌 게 아니라 자꾸 젊어져 할머닌 이내 하이힐을 신고 흰여울길을 오르고 있었다.
"할머니", 불렀지만 손짓하던 할머닌 점점 어려져 흰고무신 신은 계집아이가 되어 팔짝팔짝 봉래산을 올랐다.
그예 할머닌 씨앗처럼 작아졌다.
부랴부랴 따르는데 그 자리에 돌복숭나무 한 그루가 꽃을 잔뜩 달고 서있었다.
환한 꽃빛에 다가서는데 바람이 불면서 꽃잎이 확 날렸다.
그러다 깼다.
관속에 푸릇한 얼굴로 누워계시던 게 마지막으로 뵌 모습이다.
돌아가신지 삼십 년도 더 지났는데, 까맣게 잊고 있던 할머니가 왜 환한 돌복숭꽃으로 피어난 걸까.
살아 생전 남루한 쉐터 하나로 구 남매를 키우고도 늘 묵묵하던 할머니였다.
어제 영선동에 들어오면서 돌복숭나무를 보았기 때문일까?
어제 벼랑 끝자락에 꽃을 잔뜩 단 복숭꽃을 보았다.
가을머리에 핀 복숭꽃이라니...
9월인데도 얼마 전 큰 태풍이 지나갔음을 깨달았다.
온몸으로 비바람을 껴안고 버틴 절체절명 뿌리의 시간이 꽃송이 송이마다 고스란했다.
그 사투가 절실하게 다가와 경숙은 한참 꽃잎을 지켜보았다.
생명을 끌어안는다는 것, 그 절망이 얼마나 큰 씨앗을 품게 할 것인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영애의 집을 찾아들었다.
오랜만에 바다 비린내가 편해 잠도 잘 잤다.
그런데 왜 할머니꿈을 꾼 것일까?
정말 그 복숭꽃이 할머니였단 말인가...
흰여울마을 골목길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고무 대야 속의 텃밭. 농토가 없는 이곳에서는 이 정도가 대야(大野), 곧 큰 들판인 셈이다. |
봉창으로 연보라빛 여명이 스몄다.
문득 유년시절 푸른 대문 한 모퉁이에서
해마다 환하던 복숭꽃이 떠올랐다.
산복도로 높은 자락에 있던 대문을 찾아보곤 했지만
그 꽃나무 기억은 이제사 처음이다.
맞아, 공동변소 옆에도 복숭꽃이 피어 있었지.
하꼬방 몇 개를 지나야 있던 공동변소였다.
밤엔 겁이 나 남동생이 슬리퍼를 끌며 꼭 동행해야만 했다.
그때마다 하얗게 달빛을 입고 있던 돌복숭나무.
이십여 년의 타향살이를 끝내고 부산에 정착한 후로 가끔 들르는 흰여울길.
[영선동]은 경숙의 고향이다.
늦게서야 그림을 시작한 초등학교 동창 영애는 흰여울에 작은 작업실을 얻고 틈틈이 물감 속에 잠기곤 했다.
경숙이 뜬금없이 요청을 해도 며칠씩이고 머물 수 있도록 배려를 해주었다.
독촉받던 은행이자를 겨우 해결하고 나자, 탈이 났다.
천식과 허릿병이 함께 도진 것이다.
남편이 떠나면서 남겨놓은 빚은 경숙에게 평생 쇠고랑이 되었다.
우울증까지 덮친 듯해 어제 퇴원하는 길로 영애에게 전화를 하고 흰여울로 들어왔다.
골목골목 벽화들이 새롭긴 했지만 산골목에서 바라보는 하늘은 오십 년 전 하늘과 한 치 다를 바 없다.
그 망망한 수평선과 정박한 기선들은 그제나 저제나 한결같이 세계 저쪽 먼 하늘을 꿈꾸게 했다.
저녁에 기선들에 불이 들어오면 그 금실은실 물결이 만들어내는 세계는 정말 동화 속 같았다.
가난한 쪽창으로 바라보던 찬란한 바다는 힘겨울 때마다 떠오르는 풍경이었다.
뜨개질이 벌이였던 엄마의 반짇고리에는 항상 은실금실이 풀려 있었는데, 그 실꾸리를 만지고 놀았던 경숙에게 영도 앞바다는 마치 하느님의 바느질함 같았다.
아직도 배들은 불빛을 달고 있었고 바다는 청록빛으로 밝아지는 중이었다.
절영해안산책로에서 올려다본 흰여울마을의 강력한 축대. 박창희 선임기자 |
화안했다.
소박하고 밝은 빛이 마치 위장 속으로 스민 듯 위에 따뜻한 느낌이 왔다. 할머니꿈 때문인지 마치 나무가 부른 느낌에 경숙은 나무 곁을 맴돌았다. 대여섯 살 무렵이었을까.
복숭꽃 그늘에서 소꿉장난하고 놀던 게 다시 떠올랐다.
아, 할머니. 복숭꽃을 짓이겨 꽃밥을 지으면 할머니 맛있게 먹곤 했다.
아이고, 맛있어라, 우리 경숙이 꽃밥...
얌얌 시늉을 내면서 꼭 덧붙이곤 했다.
복숭꽃은 귀신을 내어쫓고 얼굴빛을 곱게 한단다.
무릉도원이 따로 있을까.
정말 영도에 신선설화가 많은 걸 보면 예전에 무릉도원이었는지 모른다.
돌복숭나무는 언제부터인가 영도에서 자생해왔다.
주인이라고 한 번도 우긴 적 없지만, 묵묵히 수 천 년 피고지며 영도를 오래 지켜보지 않았을까.
그러고 보면 영도에는 신선사상과 관계가 있는 동리이름이 많다.
신선동, 봉래동, 청학동 등이다.
영선동(瀛仙洞)도 그렇다.
삼신산의 하나인 동해 전설의 섬 영주의 첫 글자와, 또 신선이 사는 산기슭이란 의미에서 따왔다고 한다.
돌복숭에 대한 설화나 전설도 참 많다.
돌복숭 가지는 온갖 잡귀를 내쫓는 선목(仙木)이라고 한다.
야생 돌복숭이 갖가지 질병 고쳐준다는 말도 들은 적 있다.
옛적부터 선비나 수도자들은 꽃도 좋지만 약용을 위해 주변에 돌복숭나무를 많이 심었다던가.
경숙의 천식 때문이었다.
복숭씨의 딱딱한 껍질 깨뜨리면 속씨가 나오는데, 복숭아 속씨는 폐를 튼튼하게 한다고 할머닌 굳게 믿었다.
잘 말린 복숭씨를 볶아 가루내어 한 숟갈씩 경숙에게 먹이곤 했다.
잘 나았는지 어땠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건네주는 숟가락을 받아먹을 때마다 할머니의 목이 늘어진 스웨터를 보고 '우리 할머닌 참 가난하구나.' 하고 생각하던 장면은 가끔 떠오른다.
할머닌 그때도 꼭 덧붙이곤 했다.
이건 뱃속에 있는 딱딱한 덩어리를 삭이는 거야.
한번은 계단에 넘어져 타박상으로 퉁퉁 부었을 때 할머니는 찬장 서랍 속에서 작은 봉지를 꺼냈다.
약봉지처럼 접은 흰 종이 안에 든 누리끼리한 가루는 돌복숭씨를 짓이긴 것이었다.
할머닌 이 가루를 참기름으로 이겨 아픈 데에 발라주었다.
할머니가 꿈에 나타난 이유를 어째 알 것도 같았다.
어쩌면 할머니가 불렀는지 모른다.
가을머리 핀 복숭꽃은 너를 위해 피었으니, 오려므나 아가야.
복숭꽃은 악한 귀신을 내쫓고 얼굴빛을 곱게 한단다.
얼굴을 펴려므나.
뱃속에 있는 딱딱한 덩어리를 삭게 해야지...
할머니의 목소리가 잔잔히 번져오는 것 같았다.
바다는 태평양을 향해 무한대로 펼쳐져 있었다.
흰여울 아랫길은 어렸을 때 할머니와 놀던 이송도 바닷가다.
경숙이 풋사과를 들고 천방지축 뛰어다니는 동안, 할머니는 무거운 돌덩이를 하나하나 들어 밑을 살피곤 했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올 땐 작은 동이에 늘 먹을 게 찰랑였다.
그때 할머니가 곰곰 들추던 돌멩이들도 아직 그 자리에 있는 것일까.
바다는 하나도 변한 것이 없다.
떠난 지 오십 년인데 어쩜 이렇게 한 치 변화도 없을까.
대한민국이 개발 천지로 뒤집혔는데 이곳은 예전 그대로였다.
코울타르 지붕이나 녹슨 대문이 몇 사라지거나 시멘트로 바뀐 것 빼고 고스란히 옛 풍경을 간직하고 있었다.
어쩌면 정말 신선이 사는 동네여서일까.
늘 남루했던 할머니의 지독한 가난은 아홉 자손들에게도 고스란히 이어졌다.
큰 아버지와 아버지는 원양어선을 탔다.
셋째, 넷째 삼촌은 대평동 포구의 작은 조선소에서 녹을 벗겼고,
다른 삼촌들도 철공소에 다녀서 작업복에선 늘 쇳냄새가 났다.
큰 고모와 작은 고모는 그물공장에 다녔고, 경숙과 한 살밖에 차이 안 나던 막내 고모는 작은 선구점 경리였는데, 뾰족구두를 신고 오르는 골목길이 너무 높다고 늘 불평이었다.
그렇게 고단한 몸을 끌고 다니는 자손들이 애틋할 때마다 할머닌 잠잠히 바다를 바라보곤 했다.
할아버지는 작은댁을 만나 그쪽에 살면서 본가를 돌보지 않았다.
방 두 칸, 그리고 골방과 쪽마루에 열셋 식구가 풀대죽처럼 엉기어 살았다.
너무 가난하다 보니, 신선처럼 살아라는 말일까.
신선이 되라는 말일까.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든 생각이 지천명을 한참 넘은 나이에도 같은 물음으로 다가왔다.
무수한 고무대야를 놓고 텃밭을 삼았다.
얼기설기 얽힌 골목은 조그만 틈만 있어도 대야가 놓였다.
예전엔 있었다던 다랭이밭이 태풍이 쓸려 벼랑이 되고만 후부터
틈바구니마다 고무대야가 텃밭으로 놓였다고 한다.
거기서 자라는 것들, 파, 상추 등의 풋것들은 그들의 소박한 기도를 그대로 피워냈다.
오십 년 세월이 무색할만치 스티로폼 박스나 고무대야에 심긴 풋것들도 같은 열정으로
같은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그 플라스틱 대야와 스치로폼 박스가 텃밭이고 정원이고 숲이고 들판인 셈이다.
그 붉은 고무대야, 그곳이 무한한 바다가 펼쳐지는 여울이었다.
그야말로 그것은 마음의 대야(大野)였다.
끊어질 듯 이어진, 막힌 듯한 막다른 길도 가면 틈으로 열려 있는 모든 여울은
바다와 마주하는 거대한 삶의 들판이었던 것이다.
경숙은 돌복숭나무 옆을 떠나 골목을 돌아돌아 바닷가로 내려갔다.
이 길은 엄마가 새벽마다 세숫대야에 북어와 초를 담고 내려가던 길이다.
엄마는 용왕을 섬기러 다녔다.
엄마가 부스럭부스럭 어둠을 커텐처럼 걷는 걸 잠결에 헤아리곤 했다.
용왕을 향한 엄마의 간절함은 효험이 있었는지 아버지는 매번 항해에서 무사히 돌아왔다.
그뿐 아니었다.
엄마는 보름달이 뜰 때마다 맏딸인 경숙을 깨웠다.
겨우 눈을 부비는 딸에게 엄마는 나직히 말했다.
달님에게 절해라.
부시럭부시럭 억지로 나가보면 골목 그득 보름달이 기다리고 있었다.
땅에 닿은 듯한 큰 달에 압도되어 두 손을 모았다.
아버지가 무사히 돌아오게 해주세요. 공부 잘 하게 해주세요. 착하게 해주세요.
기도의 내용은 대충 그러했다.
언제나 한결 같았다.
한결같이 소박하고 간절했다.
할머니도 엄마도 그렇게 가난했던 삼촌들, 고모들도 신선처럼 살아서인지, 모두 신선을 닮아갔음은 분명했다.
어릴 때부터 그랬다.
큰 바다를 바라보면 이상하게 가난도 설움도 티끌처럼 날아가버렸다.
마음은 기선에 담겨 멀리 떠나곤 했다.
그렇게 사랑을 배우고 삶을 꿈꾸었던 것이다.
아침빛이 번져가는 물결 때문일까.
마음이 꼭 그 무렵의 그때 같아졌다.
가난도 설움도 발목에 쇠사슬 같은 빚도 병도 티끌처럼 흩어졌다.
마음은 영도 앞바다에 정박한 큰 배들에 담겨 먼 세계로 나가는 듯했다. 신기했다.
할머닌 그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아님, 정말 손녀에게 복숭씨 가루를 한 숟갈 먹이고 싶었던 걸까.
세상살이에 지친 손녀에게 우리가 곧 신선일 수 있음을
가르치고 싶었던 것일까.
아니 처음부터 신선이었던 걸까. 흰여울은 꿈의 여울이었다.
가난한 신선들은 결코 가난하지 않았다.
우리는 모두 정말 드넓은 꿈의 세계를 가진 존재 그 자체였다.
영애는 얼마든지 머물라고 당부했지만, 이제라도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경숙은 이미 심장 속에 태풍을 이겨낸 돌복숭나무가 한 그루 있음을 깨달았다.
할머니가 심은 것인지, 어쩌면 자생했는지도 모르는, 그녀가 잊고 있었던 나무였다.
존재는 고통스러울수록 꽃을 환하게 피워내는 위대한 힘 그 자체이다.
흰여울길의 대야들, 그 마음의 대야(大野)들이 바다를 더 푸르게 하고 있었다.
아침이 그녀를 마중하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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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기획: (사)부산스토리텔링협의회, 부산광역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