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벌어진 수원과 서울의 쏘나타 K-리그 2010 19라운드 경기는 환상적이었다. 관중의 열기나 경기장 분위기도 물론이지만 나는 이 경기가 아시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이라는 점이 무척 가슴에 와 닿았다. 한국의 여러 대표 선수는 물론 중국과 일본, 우즈베키스탄 전현직 국가대표가 총망라된 경기였기 때문이다. 이보다 더 수준 높은 아시아 축구 경기가 있을까. 있으면 말해 보라. 내가 소주 한 잔 사겠다.
K-리그는 예나 지금이나 아시아 최고 수준을 자랑한다. 과거에는 성적으로 이를 증명했다면 최근에는 성적은 물론 아시아 쿼터제로 인한 선수 영입으로도 이 같은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지난 주말 수원월드컵경기장에 내걸린 일장기와 오성홍기, 우즈베키스탄 국기 등은 K-리그가 아시아 최고 리그라는 자부심을 갖기에 충분했다. 꽉 찬 관중석과 수준급 경기력, 다채로운 선수들의 이력 등 매력 넘치는 요소가 무척 많은 이 경기는 아시아에서 축구 좀 보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관람했어야 했다.
이 같은 사실은 K-리그를 아시아 최고의 흥행 리그로 발전시키자는 이야기로 접어들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아시아에서 가장 뜨거운 열기를 자랑하는 동남아 시장을 두드려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아시아의 축구팬들이 K-리그에 열광하는 모습을 상상하니 밤새 FM을 하다가 새벽 5시가 넘어서 칼럼을 쓰기 시작해 졸린 내 눈이 번쩍 떠진다. 우리가 맨유와 바르셀로나의 방한 경기에 열광하는 것처럼 동남아시아에서 서울과 수원의 방문 경기에 열광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도 가서 호사 좀 누려보자.
지난 주말 수원월드컵경기장에서 열렸던 수원과 서울의 대결은 분위기로 보나 관중수로 보나 경기력으로 보나 아시아 최고 수준이었다. ⓒ수원블루윙즈
불가능에 가까운 동남아 선수 영입
많은 이들은 동남아시아로 K-리그 열기를 전파하기 위해서는 동남아시아 선수를 영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도네시아 선수들을 보기 위해 동남아시아 사람들이 K-리그 경기장에 가득차고 유니폼 판매 수익도 놀랄 만큼 증가하는 일은 상상만 해도 즐겁다. 하지만 이는 냉정히 따져 봤을 때 현실성이 ‘0’에 가까운 이야기다. 나는 초등학교 때 “내 생일파티에 반 아이들 전체를 초대하지 못해 미안해. 친한 친구들만 10명 추려서 부르겠어”라고 했지만 결국 내 생일 파티에 온 친구들은 세 명에 불과했다. 현실을 파악하자는 말이다.
외국인 선수는 스트레스가 엄청나다. 국내 선수가 몇 경기 부진하다고 해서 받는 스트레스와는 차원이 다르다. 외국인 선수는 당장 몇 경기에서만 부진해도 바로 퇴출이다. 커피 전문점에서 도장을 9개나 받아 놓고도 눈물을 머금은 채 당장 내일 한국을 떠날 수도 있다. 구단마다 그만큼 외국인 선수에게 거는 기대는 크다. 흔히들 축구계에서는 “외국인 선수는 국내 선수 두 명의 몫을 해줘야 한다”고 말한다. 이렇게 못하면 그건 외국인 선수가 아니다. 그냥 외국인 관광객이다.
그런데 과연 동남아시아 선수 중에서 국내 선수 두 명 몫을 해줄 이가 있을까. 인도네시아의 밤방 파뭉카스? 아니면 태국의 수리 수카? 미안하지만 이들은 동남아시아에선 슈퍼스타일지 몰라도 국내 선수 두 명 몫은커녕 한 명 몫도 해줄까 말까다. 아직은 엄연한 실력차가 존재한다. 피아퐁이 K-리그를 주름잡던 시절과는 다르다. K-리그가 성장하는 동안 동남아 축구는 오히려 퇴보했고 신체적 조건에서도 월등한 차이가 난다.
밤방은 인도네시아의 ‘슈퍼스타’지만 유럽은 물론 아시아의 비주류 리그에서도 실패를 맛봤다. ⓒ연합뉴스
그들의 축구 수준은 아직…
밤방부터 예를 들어보자. 밤방은 172cm의 단신임에도 헤딩력이 뛰어나고 골 냄새를 맡을 줄 아는 공격수다. 인도네시아에서 그의 인기는 하늘을 찌른다. 우리로 치면 김현회까진 아니더라도 샤다라빠쯤 되겠다. 하지만 그는 선수 생활의 대부분을 고국에서 보냈다. 페르시아 자카르타에서 뛰면서 216경기에 출장해 무려 153골이나 넣었다. 거의 나의 병장 시절 득점의 5배에 이른다. 무시무시하다.
하지만 그게 전부다. 2000년 야심차게 유럽 무대 진출을 노린 밤방은 FC쾰른과 뮌헨 글라드바흐의 문을 두드렸지만 결국 실패했고 네덜란드 3부리그 EHC 노라드로 이적했다. 하지만 여기에서도 단 두 경기 뛰고 짐을 쌌다. 지난 7월에는 뉴질랜드의 ‘약체’ 웰링턴 피닉스의 입단 테스트에서도 고배를 들었다. 탁신 총리가 맨체스터 시티를 인수한 후 맨체스터 시티의 부름을 받았던 태국의 ‘축구 영웅’ 수리 수카는 취업 비자조차 받지 못해 스위스 그라스호퍼에 입단했지만 여기에서도 단 한 경기도 뛰지 못한 채 고국 팀인 촌부리로 돌아갔다.
현실이 이 정도다. 전문적으로 축구를 배우지 않았음에도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와 같은 재능을 가진 어떤 이가 지금 동남아시아 어디에서 농사를 짓고 있을지는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가 아는, 동남아시아 사람들이 영웅으로 추앙하는 축구 선수들은 아직도 현격한 실력차를 실감하고 있다. 밤방의 몸값이 약 1억 5천만 원 정도인데 이 선수를 데려와서 모험을 걸 K-리그 구단은 없다. 동남아시아 선수를 영입해서 현지의 K-리그 인기를 높인다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1억 5천만 원어치 이상의 유니폼 수익이 나면 또 모르겠지만 말이다.
내셔널리그에서 이들을 영입하는 것도 현실적인 한계가 있다. 외국인 선수가 입단하면 주택을 따로 제공해야 하고 선수 가족의 생활까지 책임져야 한다. 통역사가 따로 붙는 건 기본이다. 그런데 열악한 환경의 내셔널리그에서 실력이 미지수인 선수를 영입하기 위해 경기력 외적인 곳에 이렇게 많은 돈을 투자하는 건 쉽지 않다. 차라리 브라질 선수를 영입하고 팀 마다 한 명씩은 있는 브라질 유학파 출신 선수에게 통역을 맡기는 게 더 현실적이다.
동남아시아는 유럽 축구에 열광한다. 이건 K-리그의 동남아시아 시장 진출의 걸림돌이 될 수도 있지만 장점이 될 수도 있다. 그들은 축구라면 국경을 안 가린다. ⓒ연합뉴스
현실적인 시장 개척 방법은 없나?
그래서 동남아시아 시장을 포기해야 할까. 그건 절대 아니다. 동남아시아는 해외 유명 클럽팀 친선 경기 표 못 구한다고 목숨을 끓을 정도로 아주 축구에 미친 사람들이 많다. 이 시장은 아직 유럽 축구가 독점하고 있지만 K-리그도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 왕년의 K-리그 스타인 태국인 피아퐁은 “한국이라고 하면 태국에서는 드라마, 가수, 음식까지 ‘한류’라는 이름으로 큰 인기를 끌고 있다”면서 “K-리그 구단들이 마케팅 전략을 잘 짜서 접근한다면 승산이 있을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다소 다른 이야기지만 드라마 '겨울연가'에는 일본 사람 안 나온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겨울연가'가 아주 선풍적인 인기다. 꼭 동남아시아 선수들이 K-리그에 없어도 상품 가치만 있으면 충분히 ‘한류’를 일으킬 수 있다는 의미다. 축구를 좋아하는 동남아시아 사람들과 ‘한류’가 결합한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 ‘박지성 안 나오는’ 바르셀로나와 레알 마드리드 경기에 왜 우리가 열광하는지 보면 잘 알 수 있다. 비록 K-리그가 그 정도 수준은 아니지만 일단 K-리그는 아시아 최고 리그라는 점에서 동남아시아인들에게 충분히 어필할 수 있다.
제도적으로는 한국에서 K-리그 구단이 키워낸 아시아 선수들은 아예 외국인 쿼터로 치지 않고 출전을 허용하는 게 한 가지 방법이다. 열악한 환경에서 자란 기성세대 동남아시아 선수들은 분명히 K-리그에서 뛰기에는 한계가 있다. 하지만 어릴 적부터 K-리그가 유소년 시스템으로 육성한 동남아시아 선수들이라면 한국 선수들과 대등한 실력을 갖출 수 있다. 그렇게 자란 이들이 K-리그 무대에서 활약한다면 태국의 리버풀펍은 아마 서울펍이나 수원펍이 될지도 모른다. K-리그 구단이 현지의 유소년 축구 학교를 지원하고 연맹으로부터 K-리그내 소유권을 인정받는 것도 한 방법이다.
지난 시즌 K-리그는 아시아를 실력으로 제패했다. 이제는 홍보와 마케팅으로도 아시아를 제패해야 한다. ⓒ연합뉴스
K-리그, ‘한류’의 중심이 되어라
또한 K-리그 중계권을 동남아시아에 팔 수 있는 방법과 어떻게 하면 그들이 K-리그 중계에 관심을 가질까 하는 것도 생각해 봐야 한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겠지만 나는 그들에게 K-리그를 어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들을 위한 K-리그 하이라이트 프로그램이 제작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국인들을 위해 제작된 프로그램에 자막만 덮어씌우는 게 아니라 아예 그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만들면 좋겠다.
한국에 파견된 특파원이 스튜디오에서 고국에 있는 축구팬들에게 K-리그 소식과 하이라이트를 전하고 때론 현장에 나가 선수들의 인터뷰도 직접 담는 것이다. 연맹이 중계권을 동남아시아에 팔고 프로그램 제작에만 협조한다면 못할 것도 없다. 자신들을 위해 직접 제작된 K-리그 하이라이트 프로그램이 있다면 축구와 ‘한류’에 관심이 있는 이들은 눈을 크게 뜰 것이다. 중계권 금액은 나중 문제다. 원래 마약 파는 사람들도 처음에는 마약을 서비스로 준단다. 동남아시아인들이 K-리그라는 마약에 빠졌을 때 중계권 금액을 올려도 늦지 않다.
동남아시아는 아직 선진 아시아 축구가 개척하지 못한 ‘블루오션’이다. 동남아시아인들은 열광적으로 축구를 즐기는 데 익숙하고 우리의 K-리그는 충분히 이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매력을 지녔다. 아직 국내 축구팬에게도 마음을 100% 사로잡지 못한 K-리그지만 이제는 서서히 그 눈을 밖으로 돌릴 때가 됐다. 바르셀로나 불러서 축구 후진국 인증하지 말고 우리도 K-리그 구단 동남아시아 투어 한 번 해보자. 이제는 아시아의 축구 선진국으로 가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