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일은 러시아 최대 국경일인 전승기념일이다. 올해는 군사 퍼레이드를 하지 않기로 했다. 한국외대 국제지역대학원 러시아·CIS 학과가 발간하는 월간 '러시아CIS 토크' (Russia-CIS Talk)가 5월호에서 전승절 행사가 갖는 의미를 다양한 측면에서 살폈다. 장지호(석사 과정, 러시아·CIS 사회문화 전공)씨가 쓴 '전승기념일: 러시아가 민족을 '상상'하는 방법'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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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칼럼은 저자 개인의 의견이며, 학과와 바이러시아(www.buyrussia21.com)의 공식 견해와는 무관함을 알려드립니다.
매년 5월 9일 러시아 모스크바의 붉은 광장에서는 크렘린 스파스카야 타워(Спасская башня)의 종소리를 시작으로 병사들이 전승기를 앞세워 ‘신성한 전쟁’ (Священная война) (군가·軍歌)에 맞춰 행진한다. 장대한 러시아 전승기념일 행사는 이렇게 막이 오른다.
전승기념일은 수많은 국가 기념일 중에서도 러시아 민족의 자부심을 고취하는 가장 핵심적인 국가 행사다. 광활한 대륙인 러시아의 동쪽 끝부터 서쪽 끝까지 모두를 하나의 러시아인으로 묶어주는 구심점이자, ‘우리는 하나’라는 소속감이 대중의 머릿속에 다시금 각인되는 날이기 때문이다. 그저 관념적인 ‘상상’에 불과했던 ‘민족’이라는 단어가 ‘모스크바 붉은 광장’이라는 현실의 무대 위에서 발현되도록 거대한 힘을 발휘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무명용사의 묘: 죽음의 국가화
이날 왜 이름 모를 전사들에게 헌화하는가?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러시아 전승기념일의 의미를 이해해야 한다. 한마디로 개인의 희생을 넘어, 민족의 이름으로 승화된 ‘조국을 위한 희생’을 되새기는 정신적 의례다. 이름도 신원도 알 수 없는 텅 빈 무덤이지만, 사람들은 그 빈 공간을 ‘민족을 위한 숭고한 희생’의 의미로 채운다.
전승기념일마다 푸틴 대통령을 비롯한 각국 지도부가 무명용사의 묘에 헌화하는 행위는 단순한 추모가 아니다. 과거의 죽음을 현재 러시아의 애국심과 정권의 구심점으로 부활시키는 강력한 국가 의례다.
◇불멸의 연대:개인 기억의 집단화
2012년 5월 9일 톰스크(Томск) 지역의 기자를 중심으로 시작된 (일반인들의 거리 행진인) ‘불멸의 연대’(Бессмертный полк)는 러시아 전승기념일의 주요 행사로 자리매김했다. 이는 대조국 전쟁(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참여 기억을 되새기기 위한 전(全) 러시아의 거리 행진이다.
'불멸의 연대' 참가자들은 제각각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조상의 사진을 들고 거리를 누빈다. 참가자 개개인이 든 것은 조상의 사진 한 장이지만, 이들이 함께 모여 이루는 것은 옛소련의 전쟁 승리와 조국을 위해 희생한 선조에 대한 집단 기억이다. 궁극적으로는 러시아 민족 중심의 국가 정체성 형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전승절 대통령 연설:언어로 이어진 동지애
푸틴 대통령의 전승 기념일 연설은 국내외 국민에게 인민의 희생과 강대국 지위를 강조하며, 역사적 기억을 정치화한다. 대외적으로는 서방을 향해 경고 메시지를 전하고 러시아의 국제적 영향력 및 위상을 과시한다.
특히, 푸틴 대통령은 연설에서 ‘우리’(Мы)라는 대명사를 의도적으로 반복하는데, 이는 러시아 정체성을 공유하는 ‘우리’를 하나로 묶는 지도자 언어의 힘을 보여준다. 또 ‘우리가 함께’임을 강조하며 러시아내 수많은 (소수) 민족들을 ‘형제’로 만들어가는 ‘수평적 동지애’가 형성된다. 조국을 위해 목숨 바친 것, 역시 '형제애' 덕분에 가능했음을 지적하며, 민족 정체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성 게오르기 리본:상징물의 연대감
제2차 세계대전 승리를 기념하는 성 게오르기 리본(Георгиевская ленточка)은 참전용사의 영웅적 행적으로 기리는 중요한 상징물이다. 제정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2세 시절부터 군사적 업적을 남긴 '영웅'에게 수여되었던 이 리본은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폐지되었으나, 제2차 세계대전 중 다시 부활해 존재감을 드러냈다.
제정러시아 시절의 상징이 제2차 세계대전의 승리를 거쳐 현대에 부활한 성 게오르기 리본의 역사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념과 체제의 변화를 뛰어넘어 시대를 관통하는 ‘러시아 민족’ 고유의 상징임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전승기념일을 앞두고 러시아 전역에서는 자원봉사자들이 성 게오르기 리본을 주민들에게 나누어 준다. 지하철역, 공원, 박물관 등에서 주민들은 무료로 리본을 받을 수 있다. 러시아는 이 상징물의 상업화를 아예 금지했다. 무료 배포를 통해 누구나 차별 없이 리본을 가슴에 달게 함으로써, 과거의 희생에 대한 경의를 러시아 민족이 함께한다는 동지애로 끌어낸다.
◇ 1분간 묵념: 동시성의 경험
2015년 전승기념일 연설 도중 푸틴 대통령은 ‘1분간 묵념’(Миниута Молчания)을 처음 제안했다. 원래 이 묵념은 1965년 대조국 전쟁(제2차 세계대전) 승전 20주년을 맞아 TV와 라디오를 통해 전국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그 당시에는 전쟁에서 살아 돌아오지 못한 가족을 향한 사적 추모와 그리움을 표현하는 성격이 강했다.
'1분간 묵념'은 2015년을 계기로 국가적 차원의 연대를 확인하는 기본 의례로 자리를 잡았다. 이 순간 붉은 광장에 울려 퍼지는 '메트로놈' 소리는 러시아 전역에 있는 국민에게 하나가 된 민족임을 느끼게 한다.
러시아 전승기념일은 ‘상상된 공동체’가 어떻게 거대한 현실의 힘으로 발현되는지 보여주는 가장 완벽한 무대다. 베네딕트 앤더슨(Benedict Anderson)은 저서 『상상된 공동체: 민족주의의 기원과 보급에 대한 고찰』에서 민족을 구체적인 형상이 없는, 단지 ‘상상된’ 공동체라고 정의했다. 여기서 ‘상상’이란 허구가 아니라, 물리적 거리를 뛰어넘어 서로를 하나의 운명 공동체로 이어주는 실질적인 힘이다.
매년 5월 9일, 서로 얼굴조차 모르는 수천만 명의 러시아인들은 전승기념일이라는 거대한 행사를 거치며 타인을 향한 끈끈한 믿음과 단결을 확인한다. ‘기억’과 ‘상징’을 매개로 견고하게 이어진 ‘우리’는 오늘날 대내외적 위기 속에서 러시아라는 거대한 체제를 지탱하는 강력한 구심점으로 작동하고 있다.
◇회고에서 동원으로: 2022년 이후의 전승기념일
2022년 2월 특수군사작전(우크라이나 전쟁) 개시 이후, 러시아의 전승기념일은 이전과 다른 성격을 띠게 되었다. 러시아 지도부는 네오나치(Neo-Nazi)의 등장과 서구의 도덕적 타락을 연일 강조하며, 돈바스 지역에서의 군사작전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에 맞섰던 성전(聖戰)의 연장선 위로 올려놓았다.
이로써 전승기념일은 단순히 과거의 승리를 기념하는 행사의 차원을 넘어섰다. 현재 러시아가 실질적인 위협을 받고 있다는 위기감을 대중의 내면에 심어주는 장치로도 기능한다. 결과적으로 전승기념일은 과거의 기억을 무기로 삼아 현재의 대(對)우크라이나 군사 행동을 정당화하고, 공동체 내부의 결속을 다지는 전시 동원의 도구가 된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전승기념일 열병식 행사에 참석하는 외국 정상들의 면면에서도 드러난다. 러시아가 구축하고자 하는 초국가적 연대의 흐름이 읽히기 때문이다. 전승 60주년이었던 2005년 열병식 행사에서만 해도 미국과 독일 등 냉전 시절의 적대국 정상들이 대거 참석하여 화해의 분위기를 연출했다. 그러나 70주년인 2015년을 지나 80주년을 맞았던 2025년 전승기념일의 풍경은 완전히 달라졌다. 서방 지도자들이 떠난 빈자리는 중국과 인도 등 신흥국과 독립국가연합(CIS) 등 탈(脫)소비에트 지역의 정상들이 채웠다. 이는 러시아가 외교적 고립을 탈피해 자신들을 중심으로 한 대안적인 연대를 과시하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과거 소비에트 시절, 함께 피를 흘린 ‘형제’라는 역사적 기억을 공유함으로써, 러시아는 ‘루스키 미르’(Русский мир, 러시아 세계라는 뜻)라는 거대한 공동체를 향해 끊임없이 확장해 가고 있다.
◇전승기념일이 마주한 분열된 여론과 민족 통합의 과제
견고해 보이는 민족 공동체의 내부에서는 미묘하지만, 분명한 균열이 감지된다. 러시아 여론조사 기관 레바다 센터의 2025년 9월 조사 결과는 전쟁 장기화에 따른 복잡한 인식 차이를 보여준다. 조사에 참여한 1,610명의 응답자 중 우크라이나 사태(전쟁 상황)를 주의 깊게 살피는 비율은 약 절반 정도로, 같은 해 5월과 비교해 5%P 하락했다.
특히, 정보를 얻는 경로에 따라 관심도가 극명하게 갈렸다. TV에 의존하는 고연령층과 저소득층은 여전히 높은 관심을 보였지만, 소셜 네트워크(SNS)에 익숙한 25세 미만 청년층의 관심도는 23%에 그쳤다.
분쟁 해결 방안에서도 세대 간 격차는 크다. 전체적으로는 평화 협상을 지지하는 의견이 62%로 우세하지만, 청년층 사이에서는 그 비율이 82%에 달하며 전쟁 종식에 대한 강한 열망을 드러냈다. 이러한 수치들은 대중이 느끼는 전쟁 피로도와 함께 러시아 사회의 이중성을 시사한다. 평화 협상을 지지하는 여론이 압도적임에도 불구하고, 점령 영토를 반환하는 조건의 종전에는 단 33%만이 동의했다는 점이 대표적이다.
이러한 이중적 태도는 국가 주도하에 형성된 ‘상상된 공동체’의 영향력이 여전히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일반 국민은 장기전으로 인한 현실적인 고통 때문에 종전을 원하면서도, 이미 '민족 정체성'의 일부로 각인된 영토 포기에는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느끼는 것이다.
전승기념일과 같은 지속적인 국가 의례를 통해 제2차 세계대전 당시(1945년)의 희생자와 우크라이나 전선에서 싸우는 군인들은 ‘조국 수호’라는 하나의 서사로 묶인다. 그렇기에 대중은 군사 행동에 대한 명시적인 지지 철회를 주저하고, 군에 대한 높은 지지도 여전하다.
올해 5월 9일의 전승절 행사는 대중의 누적된 전쟁 피로도 속에서 푸틴 대통령 정권이 체제 결속을 어떻게 관리해 나가는지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자리가 될 것이다. 사회 내부에서 균열이 시작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푸틴 대통령 체제는 붉은 광장에서 전승기념일을 통해 위대한 '민족 서사'를 반복적으로 주입할 것이다. 이를 통해 대중의 심리적 이탈을 막고 체제의 구심점을 유지하고자 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