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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13. 묵상글 들 ( 연중 제32주간 토요일. - 지체 없으신 하느님.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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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13. 연중 제32주간 토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지체 없으신 하느님
"하느님께서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지 않으신 채 그들을 두고 미적거리시겠느냐?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하느님께서는 지체 없으신 하느님이라고 오늘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런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이 세상에서 과연
찾아볼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아무리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어도
주님께서 지체 없으신 하느님이라는 것을 우리가
믿는 것이 쉽지 않은데 그것은 그간의 우리 경험 때문입니다.
기도하자마자 그 기도를 들어주신 적이 한 번이라도 있습니까?
그런 경험이 제게는 한 번도 없는데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사실 그렇기에 주님께서도 끈질기에 기도하라고 하신 것 아닙니까?
매번 지체 없이 들어주셨다면 낙담하지 말라고 하실 필요가,
끈질기에 기도하라고 하실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지체 없이 들어주신다는 말씀은 다른 뜻이고
우리가 청하는 즉시 들어주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때의 주인은 주님이신 하느님입니다.
언제 들어주실지는 하느님께서 결정하신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빨리 들어주십사고 청하고 요구한다고 빨리 주실 분이 아니고
당신께서 생각하실 때 가장 좋을 때라고 생각하실 그때 들어주십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때의 주인이시라는 것을 믿는 것이 우리의 믿음이고,
하느님은 우리에게 가장 좋을 때가 언제인지 너무도 잘 아시고
우리보다 잘 아시기에 우리가 원하는 때가 아니라 당신 생각대로
들어주신다는 것을 믿는 것이 진실한 신앙인의 믿음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참으로 좋은 것이 무엇인지도 잘 알고 계시고,
우리보다 더 잘 아신다고 믿는 것도 참 신앙인의 믿음입니다.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고
오늘 주님께서 물으신 뜻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너 나 할 것 없이 내가 원하는 것을 즉시 들어주시기를 바라고,
그럴 때 하느님은 좋은 분이시고 나를 사랑하신다고 믿으며,
즉시 들어주실 때 지체 없이 들어주시는 분이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때의 주인이시고 참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은
더 좋은 것과 더 좋은 때를 우리보다 더 잘 아시기에 그러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지체 없이 들어주시지 않았다면
우리가 청하는 것이 좋은 것이 아니거나 때가 아직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당신 때문이 아니라 우리 때문에 아직 안 들어주시는 것이고,
우리가 즉시 들어주실만한 때가 되면 지체 없이 들어주십니다.
아이들이 엄마에게 떼를 쓰는 것을 보면
우리가 하느님께 하는 것이 그대로 보입니다.
얼마 전 한 아이가 밥 먹어야 할 때 밥은 먹지 않고 게임하겠다고
떼를 쓰고 엄마는 먹으면 들어주겠다고 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는데
이럴 때 현명한 엄마라면 아이가 아무리 떼를 써도 들어주지 않고
오히려 아기가 마음 바꾸기를 바라다가 바꾸면 즉시 들어줍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하는 것도 이와 같은데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지체 없이 들어주신다는 것은
우리가 옳고 좋은 것을 바라게 되면 즉시 들어주신다는 뜻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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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13. 연중 제32주간 토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막바지 길에서 “기도”에 대한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곧 “과부의 청을 들어주는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와 “바리사이와 세리의 비유”입니다. 그중 오늘 <복음>은 전자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는 <루카복음>에만 나오는 것으로, “밤늦게 찾아온 친구의 청을 들어주는 사람의 비유”(루카 11,5-8)와 쌍을 이루고 있습니다.
루카는 이 비유를 들려주기 전에, 먼저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루카 18,1)는 뜻으로 말씀하셨다고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이는 흔히 ‘기도의 황금률이라 불리는 “언제나”, “늘”, “항상” 기도하라”는 ‘중단 없는 기도’, ‘끊임없는 기도’, ‘지속적인 기도’, ‘항구한 기도’(Laus perennis)를 말합니다. 그리고 사도 바오로는 이처럼, “늘 기도하는 것”(1데살 5,17)이 “하느님의 뜻”이라고 밝혀줍니다.
그런데 이 ‘항구한 기도’의 요청 앞에는 “낙심하지 말고”라는 말씀이 붙어 있습니다. 이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용기를 잃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이요, 동시에 기도를 포기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곧 희망으로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는 자기 자신에 대한 희망이 아니라, 우리 안에 기도를 불러일으키시는 분께 대한 희망입니다. 그러기에 이 ‘항구한 기도’는 곧 믿음이 동반된 기도를 의미합니다.
그러니 이 비유는 비록 재판관이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해도 끈기 있게 간구하는 과부처럼, ‘밤낮으로 부르짖는’ 기도에 대한 요청입니다.
이 비유를 마치신 뒤에, 주님께서는 이르십니다.
“하느님께서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 른 판결을 내려주지 않으신 채,
그들을 두고 미적거리겠느냐?”(루카 8, 7)
이처럼, 기도는 먼저 아버지 하느님을 향한 믿음을 요청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지체 없이 올바른 판단을 내려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루카 18,8)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지체 없이 올바른 판단을 내려주실 것입니다.” 그러니 진정 필요한 것은 그분을 향한 우리의 진정한 믿음입니다. 절망하지 않고, 끝까지 희망하면서 기도하는 실천적인 믿음입니다.
사실, 진정 하느님을 믿는 자만이 하느님께 희망을 둘 수 있고, 자신을 철저히 주님께 의탁하며, 더욱더 간절함으로 항구하게 기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기도할 수 있음을 바로 그 분께서 우리의 기도를 동행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 안에서 기도하시는 그분에게서 흘러나오는 기도가 곧 ‘끊임없는 기도’라 할 수 있습니다.
결국, ‘끊임없는 기도’는 끊임없이 그분과 관계 맺는 일이며, 그분과의 사랑과 믿음과 희망이 충만해지는 일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사람의 아들이 올 때” 그분을 맞아들일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루가 18,1)
주님!
기도의 응답을 받지 못해도 기도하기를 포기하지 말게 하소서.
의혹과 조바심에도 더 간절한 마음으로 항구하게 하소서.
어둔 밤마저도 몰아가는 당신을 믿게 하소서.
희망에 대한 믿음으로 항구히 기도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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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13. 연중 제32주간 토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기도는 지속성이 있어야 한다
“기도는 지속성이 있어야 합니다. 비록 잘못에 떨어졌다 할지라도 기도하기를 그쳐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그 잘못에서 벗어나 수 있게 하는 유일한 힘은 꾸준히 계속되는 기도를 통해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예수의 성녀 데레사). 자신의 기도가 들어지지 않을 때나 지치고 싫증이 나서 그만두고 싶을 때도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그때야말로 기도가 필요한 때 입니다. 그러므로 끈기 있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응답해 주십니다. 다만 우리가 원하는 때, 원하는 방법으로 주시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인내가 필요합니다. 기도는 하면 할수록 더 잘하게 됩니다. 기도를 자주 함으로써 기도를 배우게 됩니다.
우물쭈물, 어영부영, 할까? 말까? 망설이지 말고 기도하십시오!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그러면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필리4,6-7). 프란치스코 교황은 묻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빛을 낼 수 있도록 해 주는 건전지 역할을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간단합니다. 기도입니다." 그리고 기도는 진정한 것이어야 합니다.
사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누구도 기도의 참맛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알베리오네). 그리고 “우리는 주님께서 기도하신 바와 같이 기도하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방법대로 기도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오늘 복음은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거들떠보지 않는 사람이지만 과부의 끈질긴 간청을 거절하지 못하고 올바른 판결을 내려준다는 이야기 입니다(루카18-4-5). 끈질긴 기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동시에 마음을 다해 청하면 반드시 들어주신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그러므로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청을 들어주신다는 것을 확인해야 하겠습니다. 야고보사도는 말합니다. “여러분이 가지지 못하는 것은 여러분이 청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청하여도 얻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욕정을 채우는 데에 쓰려고 청하기 때문입니다”(야고4,2). 그렇다면 떼를 써야 하지만 억지를 부려서는 안 되겠습니다. 기도는 내 뜻을 관철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며 순응하는 것입니다. 절실함에서 우러나오는 끈기로 기도하는 한 주간되시기 바랍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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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13. 연중 제32주간 토요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 주님이 이루신 기적을 기억하여라
오늘 독서인 지혜서에서 창조 이래 아브라함으로부터 모세 이전까지 에덴 동산과 가나안과 이집트에서 진행되었던 역사를 서사적으로 묘사하는 대목이 이렇습니다: “부드러운 정적이 만물을 뒤덮고, 시간은 흘러 한밤중이 되었을 때, 당신의 전능한 말씀이 하늘의 왕좌에서, 사나운 전사처럼 멸망의 땅 한가운데로 뛰어내렸습니다”(지혜 18,14). 그리고 모세를 통해 당신의 백성을 모으시고자 이집트를 상대로 전격적으로 일어났던 해방의 역사에 대해서는 말씀을 의인화하여 이렇게 묘사됩니다: “그는 당신의 단호한 명령을 날카로운 칼처럼 차고 우뚝 서서, 만물을 죽음으로 가득 채웠습니다. … 당신의 명령에 따라, 온 피조물의 본성이 저마다 새롭게 형성되어, 당신의 자녀들이 해를 입지 않고 보호를 받았던 것입니다. 진영 위는 구름이 덮어 주고, 물이 있던 곳에서는 마른 땅이 나타나는 것이 보였으며, 홍해는 장애물이 없는 길로, 거친 파도는 풀 많은 벌판으로 바뀌었습니다. 당신 손길의 보호를 받는 이들은 그 놀라운 기적으로 보고, 온 민족이 그곳을 건너갔습니다”(지혜 18,16; 19,6-8).
이집트에서 억압을 받으며 모래알처럼 흩어져 살던 히브리 노예들이 ‘이스라엘’이라고 불리는 하느님의 백성이 되기까지 하느님께서 이루신 역동적인 기적이 이러했습니다. 그 천 년이 넘게 흐른 뒤에 예수님께서는 지리멸렬해 진 이 백성을 새로이 열두 제자 체제로 재편성하셨고, 서로 사랑하라는 복음으로 불러 모으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복음을 상기시킨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부들은 교회를 ‘공동체’로 인식하고 인류도 인간 공동체라는 이름으로 불러 모으자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형제애는 공동체라는 생활양식을 지향하기 때문입니다. 향후 교회의 선교활동 역시 “서로 사랑하라”는 단호한 명령으로 말씀의 지혜가 이끄시는 역동적인 기적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공의회가 열리기 2백여 년 전부터 교우촌이라고 불렀던 신앙 공동체를 세워 백 년의 박해를 이겨낸 우리 한국 교회가 가난한 이들과 한민족의 복음화를 위한 파스카의 길을 가고자 할 때에도 역시 그러할 것입니다. 말씀과 성찬 안에 현존하시는 그리스도께서 믿는 이들을 불러 모으시는 자리도 결국은 공동체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불의한 재판관과 과부의 비유를 통해 반어법적으로 예수님께서 요청하시는 것도 결국, 공동체를 통해 역동적인 기적을 이루시는 주님께 대한 믿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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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13. 연중 제32주간 토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여름의 막바지에 휴가를 떠났었습니다. 특별히 부친상을 치르면서 휴식의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우연히 충북 단양에 걷기 좋은 길들이 있다는 글을 보았습니다. 푹 쉬고 맛있는 것을 먹으면서 동시에 많이 걸으면서 몸도 마음도 회복할 것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성지에서 출발해서 막히는 서울 올림픽대로를 타고 쭉 가다가 드디어 고속도로에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교통 체증이 심했기에 첫 번째 휴게소에 들어가 쉬면서 늦은 점심을 먹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한 가지가 없었습니다. 지갑이 없는 것입니다. 급하게 떠나느라 지갑을 챙기지 못했습니다. 돈 한 푼 없고, 신용카드도 없어서 밥 한 끼 사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2시간 갔던 거리를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충북 단양까지는 8시간이나 걸렸습니다. 이 경험을 통해서 한 가지를 깨닫습니다. 무조건 가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꼭 필요한 것은 챙겨야만 합니다.
하느님 나라 가는 것도 입으로만 하느님 나라에 가겠다고 말하면 그만일까요? 꼭 필요한 준비물을 챙겨야 합니다. 바로 하느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어떤 난관에서도 하느님께 매달릴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은 오만한 재판관이 끈질기게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한 가난한 과부의 소원을 들어준다는 이야기이지요. 이 과부는 돈도, 그리고 권력도 없었기 때문에, 그 어디에도 의지할 때가 없었습니다. 즉, 이 여인은 어떤 공정한 판결을 받을 가능성이 없었던 것이지요. 따라서 이 여인이 할 수 있는 것은 끈질기게, 그리고 성가시게 재판관을 조르는 것밖에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이런 끈질긴 노력을 통해서 이 여인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느님께서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지 않으신 채, 그들을 두고 미적거리시겠느냐?”라고 말씀하시지요.
지금 나는 과연 어떤가요? 나의 삶에 대해서 얼마나 끊임없는 노력을 하고 있습니까? 혹시 ‘나는 안돼’라는 포기의 마음으로 폐인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아무것도 가진 것 없었던 가난한 과부의 소원이 이루어집니다. 그 이유는 바로 끊임없는 노력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역시 주님 앞에서 아무것도 내세울 것 없는 사람입니다. 무엇을 내세울 수 있겠습니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복음에 등장하는 과부처럼 끊임없는 노력으로 주님 앞에 나가 청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반드시 챙겨야 할 한 가지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좌절하지 않고 힘차게 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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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절할 때에 건네는 좋은 말은 ‘가장 긍정적이고, 삶을 지지해 주고, 오래도록 지속되는’ 선물이 될 수 있다(할 어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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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바라봐야 할까요?
혼자 휴가 가는 것은 참 좋습니다. 사제로 살기에 많은 말을 할 수밖에 없는데, 오랜만에 혼자의 시간을 가지며 침묵 속에서 많은 생각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장점만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결정적으로 식당에 들어갈 때 깨닫게 됩니다. 휴가 중이라 맛있는 것을 먹고 싶은데, 대부분 2인 이상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혼자서는 먹을 수가 없습니다.
혼자만의 장점도 있지만 분명 단점도 있습니다. 어쩌면 모든 일이 그렇지 않을까요? 장점과 단점의 조화 속에서 사는 우리입니다. 그런데 어떤 이는 장점만을 보면서 기쁘게 살고, 또 다른 이는 단점만 보면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번 휴가 중에 유명한 맛집을 찾아갔습니다. 아침부터 계속 걷다가 오전 11시 20분쯤 그 식당에 갔더니 벌써 많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다행히 딱 한 자리가 남아 앉았는데, 그 뒤 더 많은 사람이 밖에서 대기하는 것입니다.
직원이 없고 가족이 함께하는 식당이었습니다. 그런데 손님이 많아져서 바빠지니 싫은 표정이 얼굴에 가득했습니다. 화도 자주 내서, 이곳에서 빨리 나가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했습니다.
손님들이 그 가게를 운영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인데 왜 그렇게 싫은 표정을 지을까요? 힘들다는 단점만 보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나와 내 주위를 행복하게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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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13. 연중 제32주간 토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장례미사를 준비하면서 고인의 관을 닫으려 했습니다. 고인을 위한 미사에 집중하기기 위해서 그렇게 해 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유족 중에 한명이 반대했습니다. 마지막 미사이고, 곧 땅에 묻히니 관을 닫지 말아달라고 하였습니다. 가족들의 바람을 듣고, 관을 열고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고인이 되신 분도 미사에 참례하는 것 같았습니다. 물론 미사에 집중하려는 원칙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유족이 원하면 미사에 집중이 되지 않더라도 그 뜻을 존중해 주는 것도 필요한 것 같습니다. 미사를 마치면서 다른 종교의 장례 예절을 잠시 해도 좋은지 물었습니다. 물론 자주 있는 일은 아니지만, 이 또한 유족이 원한다면 반대할 것도 없다 싶었습니다. 하느님께서 고인과 유족들의 청을 무시하시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이제 세상의 모든 아픔과 슬픔을 모두 털어버리고, 천상에서 영원한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했습니다.
순교자들의 영성을 강의하는 김길수 교수님의 글을 읽으면서 함께 나누고 싶었습니다. 글의 제목은 ‘성삼문의 죽음과 김대건의 죽음’입니다. 성삼문은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사육신 중에 한 명입니다. 성삼문이 자신의 죽음을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모르지만 형장에서 그가 지었다는 절명시를 통해서 어느 정도 알 수 있습니다. 절명시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擊鼓催人命(격고최인명) 回首日欲斜(회수일욕사) 黃天無一店(황천무일점) 今夜宿誰家(금야숙수가) 둥둥둥 북소리 울려 내 목숨을 재촉한다. 머리 돌려 바라보니 해가 지려 하누나. 저승길에는 주막집 하나 없다는데 오늘밤은 내 어느 집에서 묵어갈까.” 신념을 위해 목숨을 바친 성삼문에게 인생의 끝은 ‘허무’였습니다. 그의 죽음이 충절을 드러내는 죽음이었지만,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김대건 신부님은 죽음에 앞서 이렇게 이야기 하였습니다. “그대들은 들으라. 이 환란과 고난도 주의 허락 없이는 있지 않으니 환란의 의미를 생각해서라도 삼가는 마음으로 주의 계명을 지켜라.” 주교님께는 이렇게 부탁합니다. “주교님, 우리 어머니를 부탁드립니다. 일찍이 어린 자식을 이국만리에 보내고, 믿음 때문에 지아비를 잃고, 의지할 곳 없어 거리를 헤매는 거지가 되었다고 하나이다. 어머니를 주교님께 부탁드리고 저는 편안히 갑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교우들에게 “나는 간다. 이제 환란도 고통도 박해도 없는 하느님의 기쁜 나라에서 다시 만나자.” 성삼문과 김대건은 생명의 마지막 순간에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는 ‘허무’고 하나는 ‘새 출발’입니다. 하나는 자기 소신을 위해서 죽지만 그 소신이 준 것은 결국 인간의 한계인 허무입니다. 김대건의 죽음은 인간의 지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초월적 새 생명 속으로 들어가는 출발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지 않으신 채, 그들을 두고 미적거리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이 세상은 하느님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착각하는 것입니다. 내 남편, 내 자녀, 내 집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러기에 그것들을 상실하면 화가 나고 상처를 받습니다. 우리는 잠시 소유한 모든 것들을 내려놓고 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기에 잠시 나에게 맡겨 주신 것들에 대해서 하느님께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나와 함께 하는 가족, 이웃, 물건들에 대해서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면, 우리가 함께 나눈다면, 우리가 말씀을 가슴 속에 담고 산다면 세상의 마지막 날 이 온다고 해도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이끄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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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13. 연중 제32주간 토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항구하고 간절한 기도
- 기도가 답이다 -
“땅의 행복은/밤마다 누워
하늘 바라보며/별들
가득/담아 두었다가
꽃들로 피어내는 것이다”-2001.8.20.
만 20년전 “땅의 행복” 이란 시詩가, 정원 잔디에 잠시 누워 있는 동안 떠올랐습니다. 날씨가 초겨울에 접어든 듯 쌀쌀하지만 하늘은 맑고 별들은 총총한 밤입니다. 바로 기도의 은총을 상징하는 시입니다. 참으로 끊임없이 기도할 때 마음 가득 담아지는 하늘 은총에 끊임없이 사랑의 꽃들로 피어나는 행복한 인생입니다.
선택하지 못할 타고난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요즘 “늙었다”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만 결코 유쾌할리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너무 자명한 객관적 팩트(사실)입니다. 누구도 선택할 수 없는 세월의 흐름이자 늙어감이요 죽음입니다. 이런 선택할 수 없는 것들은 내 영역이 아니라 하느님 영역입니다.
하느님은 내 선택할 수 없는 주어진 것들, 타고난 것들에 대해서는 결코 책임을 묻거나 심판하시지 않습니다. 이런 것들은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겸손이자 지혜요 믿음입니다.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하느님이나 부모를, 환경을 탓하고 원망하고 좌절하는 것만큼 백해무익百害無益한 어리석은 일도 없을 것입니다.
반면 선택할 수 있는 것도 무궁무진無窮無盡입니다. 참으로 날마다 좋은 선택으로 습관화할 때 습관은 성격이 되고 성격은 복된 운명이 됩니다. 어제는 “하느님이 답이다.” 였는데 이런 하느님을 선택하는 것보다 큰 행복도 없습니다. 하느님이 선택이듯 행복도 선택입니다.
오늘 강론 제목은 “항구하고 간절한 기도-기도가 답이다-”입니다. 하느님처럼 항구하고 간절한 기도 역시 우리의 선택입니다. 기도든 삶이든 최종 승자는 항구하고 간절히 노력하는 자에게 돌아갑니다. 기도의 복음이 루가 복음입니다. 기도하는 예수님 모습이 참 많이 소개되며, 예수님의 기도에 대한 가르침도 많은 루카복음입니다.
오늘 복음의 과부의 청을 들어주는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가 가르치는 바,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기도하는 것은 우리가 선택해야 할 가장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바오로 서간 역시 끊임없는 기도의 선택을 강조합니다. 제가 가장 많이 써드리는 고백성사시 보속으로 써드리는 처방전 말씀입니다.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1테살5,16-18)
가훈家訓이나 내 삶의 좌우명座右銘으로 삼아도 참 좋은 성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살 때 하느님께서도 감동하시고 축복하십니다. 끊임없는 기도에 자연스럽게 뒤따라오는 기쁨이자 감사입니다. 새삼 기도처럼 기쁨도 감사도 선택이자 은총임을 깨닫습니다. ‘그래서’가 아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와 기쁨, 감사를 선택하여 영적 승리의 삶을 사는 자가 지혜로운 이상주의적 현실주의자입니다.
항구히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해야 삽니다. 내 아쉬워서 기도하는 것이지 하느님은 전혀 아쉬울 것이 없습니다. 기도할수록 하느님께 가까이 가게 됨으로 하느님의 뜻을 잘 깨닫게 되어 무엇이 본질적으로 필요한 것인지 알게 됩니다. 마침내 하느님 뜻과 내 뜻이 일치되어 하느님 뜻대로 기도하게 되어 기도하는 대로 이루어집니다.
그러니 기도가 답입니다. 하느님과의 사랑과 생명의 소통인 끊임없는 기도가 답입니다. 참으로 끊임없이 기도할 때, 하느님 뜻에 따른 탄력 좋은 믿음과 삶도 선물로 받습니다. 넘어지면 곧장 일어나 다시 시작하는 참으로 탄력 좋은 믿음의 삶입니다. 넘어지는 것이 죄가 아니라 자포자기 절망으로 즉각 일어나지 않는 것이 죄입니다. 내 하느님을 선택하기에 앞서 이미 하느님은 우리를 선택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지 않으신 채, 그들을 두고 미적거리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 말씀입니다. 내 자신의 기도와 믿음 생활을 뒤돌아 보게 합니다. 참으로 밤낮 부르짖으며 기도하다 보면 마침내 하느님의 뜻에 따라 기도하게 되고 하느님은 당신 최고, 최상의 방식으로 때에 맞게 응답해 주십니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기도와 믿음의 자세로 사는 것이 우리가 할 유일한 선택입니다.
반대의 묵상도 참 깊고 흥미롭습니다. 끈질긴 과부를 하느님으로, 불의한 재판관을 우리 사람으로 바꿔 묵상해 보는 것입니다. 끈질긴 과부처럼 하느님은 우리가 회개의 사랑으로 응답할 때 까지 결코 물러나지 않는 다는 사실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떠났지 복음의 항구하고 간절하고 끈질긴 과부처럼 하느님은 당신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불의한 사람인 우리를 결코 끝까지 떠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 사람들이 회개로 응답할 때까지 결코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기다리는 하느님을 결코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음 지혜서는 기도 은총을 통한 우리 삶의 내외적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진영 위는 구름이 덮어 주고, 물이 있던 곳에서는 마른땅이 나타나는 것이 보였으며, 홍해는 장애물이 없는 길로, 거친 파도는 풀많은 벌판으로 바뀌었습니다. 당신 손길의 보호를 받는 이들은 그 놀라운 기적을 보고, 온 민족이 그곳을 건너갔습니다. 주님, 그들은 자기들을 구해 내신 당신을 찬양하였습니다.”
그대로 기도하는 지상 순례 여정중인 우리 교회 공동체에 내려 주시는 주님 은총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당신 뜻에 따라 성공적 순례 여정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이끄시네.”(시편23,1-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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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13. 연중 제32주간 토요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기도의 자세와 내용에 대해 이야기하십니다.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루카 18,1)
예수님께서 포기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하라고 이르십니다. 기도에 요구되는 자세입니다. 많은 경우 기도한 내용에 대해 즉각적으로 응답을 받지 못하면 실망해서 기도를 중단하거나 분노하며 다른 신(?)을 찾아가는 안타까운 일이 벌어지지요. 하지만 기도는 '비가 올 때까지 기우제를 지낸다'는 어느 부족의 기도 성공 비결처럼, 이루어질 때까지 지치지 않고 줄곧 드려야 하는 겁니다.
"저와 저의 적대자 사이에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십시오."(루카 18,3)
비유 속 과부가 오만하고 무심한 재판관을 줄곧 찾아가 졸라댑니다. 누군가와 분쟁에 휘말린 듯한 그녀가 간절히 바라는 것은 "올바른 판결"입니다.
대개 재판이 벌어지면 사람들은 자기 쪽에 유리한 판결이 내려지길 바라지만 그녀는 다릅니다. 올바른 판결의 수혜자가 자신이 될 것이라는 자신감이 있어서일지 모르지만 재판이란 모름지기 끝까지 가슴 졸이며 기다리게 되기 마련이지요.
"올바른 판결"이 우리가 바치는 기도의 내용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어떤 내용으로 기도를 드려도 하느님은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시는 분이시니까요. 우리의 바람이 신앙과 사랑, 공동선에 합치되고 또 하느님께서 부여하신 우리 각자의 소명과도 일치한다면 그 기도에는 반드시 올바른 응답이 주어집니다.
"하느님께서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시지 않으신 채, 그들을 두고 미적거리시겠느냐?"(루카 18,7)
하물며 사람도 인내와 끈기로 청하면 귀찮아서라도 마음이 움직이는데 하느님은 어떠시겠느냐고 예수님께서 반문하십니다. 아버지는 절박한 처지에서 부르짖는 이들에게 귀를 기울이시며 마음을 다해 도와주는 분이심을 강조하시는 겁니다.
제1독서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적 구심점인 파스카의 밤이 언급됩니다.
"당신의 전능한 말씀이 하늘의 왕좌에서, 사나운 전사처럼 멸망의 땅 한가운데로 뛰어내렸습니다."(지혜 18,15)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오랜 침묵을 깨시고 역사에 개입하신 장면이 펼쳐집니다. 일찌기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 그와 맺으신 계약에 따라 이스라엘은 야훼 하느님의 백성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고역에 짓눌려 탄식하며 부르짖었다. 그러다 고역에 짓눌려 도움을 청하는 그들의 소리가 하느님께 올라갔다. 하느님께서 그들의 신음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맺으신 당신의 계약을 기억하셨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살펴보시고 그 처지를 알게 되셨다."(탈출 2,23-25)
이 내용이 바로 오늘 지혜서 대목이 있게 된 배경이고, 아울러 복음에서 말씀하신 기도의 응답에 관한 확실한 증거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은 자기네 신앙 역사의 원천이고 정점인 파스카가 그들의 간절한 기도의 응답이라는 사실에 무한한 자긍심을 가지며 이 믿음을 통해 정체성을 다집니다.
"그들은 ... 주님, 자기들을 구해 내신 당신을 찬양하였습니다."(지혜 18,9)
이스라엘 백성이 기도의 응답으로 얻은 하느님의 올바른 판결에 기뻐 뛰며 그분을 찬양합니다. 파스카를 겪으면서 진심으로 주님께 기도할 수 있는 이는 가장 절박하고 처절했던 순간에 자신이 주님께 올려드렸던 울부짖음의 내용을 기억하는 사람이지요. 자기가 기도하는 내용을 제대로 알면서 지치지 않고 기도하는 사람만이 자기 기도가 응답을 받았음을 인식하고 감사와 찬미를 드립니다.
사랑하는 벗님! 우리가 기도하는 바가 무엇이며, 기다리는 응답은 또 무엇인지 살피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당장은 하느님게서 우리를 잊으신 듯 더딘 응답에 갈망만 깊어가고 있다면, 우리의 신앙의 원체험이 된 각자의 파스카 순간을 기억하며 희망을 가지고 끊임없이 기도하면 좋겠지요. 인내와 끈기로 주님만을 향하고 살아가는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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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13. 연중 제32주간 토요일. 이병우 루카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는 뜻으로 제자들에게 비유를 말씀하셨다."(루카18,1)
'끊임없이 기도하는 믿음!'
오늘 복음은,
'과부의 청을 들어주는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입니다.
힘도 없고 빽도 없고 돈도 없었을 과부 한 사람이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불의한 재판관에게 "저와 저의 적대자 사이에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십시오." 하고 계속 졸라댑니다.
불의한 재판관은 한동안 들어주려고 하지 않다가 마침내 속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만, 저 과부가 나를 이토록 귀찮게 하니 그에게는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어야겠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끝까지 찾아와서 나를 괴롭힐 것이다."(루카17,4-5)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이 불의한 재판관이 하는 말을 새겨들어라. 하느님께서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주지 않으신 채, 그들을 두고 미적거리시겠느냐?"(루카18,7)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선택하신 이들의 부르짖음을 물리치지 않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끊임없이 간청(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루카18,8)
이 말씀은 끊임없는 간청(기도)은 '믿음의 행위'이고,
'믿음 안에서 나온다'는 의미의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나의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필요할 때만 적당히 간청하고 마는 믿음,
고통이 찾아왔을 때 배교하는 믿음은 아닌지요?
'들어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우리는 '청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들어주시는 분을 굳게 믿으면서 단지 '청할 뿐'입니다.
그것도 '끊임없이!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이 시간 함께 하는 모든 이들에게 강복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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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13. 연중 제32주간 토요일. 최종훈 토마스 신부님.
오늘의 묵상
혼자서 모든 일을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에게 그런 능력은 없습니다.
서로 논의해서 역할을 나누고 같은 목표를 보며 함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팀(team)이며 공동체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공동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아마도 ‘서로에 대한 신뢰’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공동체 전체가 각자의 목표보다는 전체의 목표를 지향하고 있다는 신뢰,
그 목표를 향하여 각자 역할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신뢰가 중요합니다.
서로에 대한 신뢰가 없으면 자신을 이용해서 다른 이의 목표와
욕심을 채우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게 마련이며,
그 순간 공동체는 무너지고 맙니다. 부모가 자식을 믿지 못하고
자식이 부모를 믿지 않습니다. 아내와 남편이,
스승과 제자가 서로 믿지 못하여 가까이 다가가지도 않습니다.
어른은 잔소리나 하는 꼰대이며
아이들은 세상 물정을 모르는 철부지일 뿐입니다.
국민은 정치인을 믿지 못합니다.
모두에게 평등하다는 법은 나에게만 불평등합니다.
서로 의심하는 사회, 모두가 자신의 욕심만을
채우려는 공동체, 상대를 누르지 못하면 패배하고
낙오된다는 시대의 진리(?)를 몸으로 실천하는 우리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믿음과 신뢰, 신앙은 어디 있을까요?
믿는 사람, 신앙인이라고 하는 우리는 하느님을 믿습니까?
하느님을 얼마나 신뢰합니까? 하느님의 법을,
예수님의 가르침을, 그리고 교회의 가르침을 얼마나 신뢰합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삶의 방식으로 행복해질 수 있음을 믿습니까?
하느님과 공동체를 이루며 어떤 기도를 하고 어떤 청을 드립니까?
하느님의 가치는 신뢰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욕심만을 채우기 위한 기도를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 기도가 누군가를 이기기 위한 기도이고 누군가의 것을
빼앗는 기도이며 누군가를 아프게 하는 기도는 아닙니까?
우리는 믿는 사람들입니다. 믿음을 실천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의 가치로 하느님의 공동체를 만들어 가는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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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13. 연중 제32주간 토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소원대로 판결해 주어야지
예수님께서는 복된 삶을 얻기 위해 기도하라고 하신다. 거기에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1절) 하신다. 그러면서 불의한 재판관에게 계속 졸라 대어 결국 자신의 말을 듣게 만든 과부의 예를 드셨다. 그 여자가 재판관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정이나 동정심에 호소해서가 아니라, 지치지 않고 졸라댔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도 우리가 항구하게 기도하면 자비롭고 의로우신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들어주신다는 것이다.
재판관과 과부, 둘 다 고집스러운 사람들이다. 그러나 과부의 끈질긴 기도가 좀 더 고집스러웠다.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는 불의와 인간을 업신여기는 사악함을 과부의 끈질긴 청원이 이겼다. 과부의 끈질김이 재판관의 불의와 사악함이란 두 나뭇가지를 변화시켜 그 성격과는 맞지 않는 달콤한 열매를 맺게 했다. 불의한 재판관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여자의 억울함을 풀어 주었다. 우리도 낙심하지 않고 끊임없이 기도한다면 하느님의 은총과 정의가 우리의 본성에 맞는 열매를 얼마나 많이 맺게 하겠는가? 하느님께서는 당신께 간구하는 사람들의 청을 얼마나 잘 들어주실지 깨닫기를 바라신다. 정의가 우리를 변호하고 은총이 우리에게 생기를 불어넣게 하면 억눌린 자들은 정당한 보상으로 정의의 열매를 받고, 환난 속에 있는 이들에게는 은총의 열매가 생기를 줄 것이다.
가난한 과부가 끈질기게 졸라대니 사악하고 불의한 재판관조차도 결국 그의 청을 들어주었다. 그러니 하느님께서 우리를 모른 척하지 않으신다는 것은 너무나 확실하다. 우리가 원하는 때가 아니라, 당신께서 원하시고 더 좋은 때에 들어주실 것이다. 나에게 필요한 것을 나보다 더 잘 아시는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부서진 마음과 꺾인 영을 안고 기도해야 한다. 당신이 원하시는 때에 더 좋은 방법으로 들어주실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이 올 때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8절) 하신다. 그분은 모든 것을 알고 계셨다.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갈 것이라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신다. 마지막 때에 옳고 흠 없는 믿음에서 떨어져 나가는 사람이 생길 것이다. 사람을 속이는 영들을 따라가 양심이 마비된 거짓말쟁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말아야 한다(1티모 4,1-2). 그러나 반대로, 우리는 하느님의 충실한 종으로서, 그분의 영광을 거스르는 자들의 사악함과 유혹에 흔들리지 않게 해 주시기를 기도하며 그분께 가까이 다가가야 한다.
항상 기도하는 자세를 갖도록 하고 그 기도가 하느님의 뜻에 합당하고 또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기도가 되도록 해야 하겠다. 언제나 기도하는 마음은 내가 원하는 대로보다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방법으로 나에게 풍성히 이루어주시도록 맡겨드리는 자세를 가지고 기도하여야 한다. 참된 기도는 나 중심의 기도가 아니다. 항상 하느님 중심으로 찬미와 감사가 선행되는 기도를 바치도록 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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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13. 연중 제32주간 토요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루카 18, 1)
삶이 있기에
기도가 있다.
기도가 있기에
삶은 더더욱
풍요롭다.
어떻게
살 것인가의
해답을
주는 것이
우리의
기도이다.
참된 기도는
절실하기에
거짓이 없다.
거짓이 없는
기도는
우리의
삶 자체를
비추어준다.
그래서
기도는 생활이며
생활은 기도와
내적으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기도로 만나는
사랑의
하느님이시다.
기도로 만나는
사랑의 일상이다.
기도가 없으면
내적 기쁨도 없다.
모든 것의 출발은
언제나
우리자신의
기도이다.
끊임없는 기도로
우리자신이
바뀌게된다.
사람과 삶을
바라보는 시선에
평화를 체험하게
한다.
이와같이
기도로 우리는
하느님을
닮아간다.
신앙생활의
근본은
사랑이며
기도이다.
기도는 우리
마음자세를
낙심에서
희망으로
바꾸어놓는다.
우리가
의지해야
할 분은
하느님이시다.
간절한 기도가
하느님과의
내적교감에
이르게한다.
우리의 생활을
바꾸어놓는
기도이다.
기도로 하루를
새롭게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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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13. 연중 제32주간 토요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희망 속에 바치는 끈질긴 기도 ♣
“하느님께서는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부르짖으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루카 18,7-8)
읍아수유(泣兒授乳)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는 아이에게 젖을 준다는 뜻으로, 무엇이든 청하고 요구해야 얻을 수 있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저 간절함이나 절박함이 없이 무감각하고 안일하게, 생각 없이 살아가는 때가 있습니다. 영성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을 찾는 절박함, 신앙의 도전들이 주는 거룩한 긴장감, 영적 민감성 없이 그저 현상을 좇아 하루를 사는 때가 많습니다.
오늘 복음은 그런 우리에게 강한 자극을 줍니다. 구약의 율법에 따르면 재판관은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변호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시대에 많은 재판관들은 뇌물이나 권력을 이용하지 않는 한 억울한 이들의 사정에는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억울함을 푸는데 도움을 줄만한 사람도 없었고, 뇌물을 쓸 돈도 힘도 없는 한 과부가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18,2), ‘불의한’(18,6) 재판관에게 올바른 판결을 해달라고 조릅니다.
불의한 재판관은 한동안 청을 들어주려고 하지 않다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끝까지 괴롭히리라 생각하여 들어주기로 마음을 고쳐먹습니다(18,5). 불의한 재판관도 그러하다면, 하물며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야 제자들과 하느님을 성실하게 섬기는 사람들이 밤낮으로 부르짖을 때 지체 없이 그 청을 틀림없이 들어주실 것입니다(18,7-8).
예수님의 제자들은 사람의 아들이 오실 마지막 순간까지 그분의 뜻을 실행해야 하기에 온갖 시련을 겪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존재를 부인하고 복음 가치를 상대화하며, 돈의 힘을 우상화하는 이 시대에 신앙을 지켜나가는 것 자체가 엄청난 시련과 고통을 불러옵니다. 시련 중에 주님께 희망을 두며 “낙심하지 말고”(18,1) 청한 것을 받을 때까지 그치지 않고 항상 기도함으로써 십자가를 질 수 있고 주님 안에서 참 기쁨을 맛볼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고통과 불의 앞에서 세상과 타협하거나 신앙인으로서의 결단을 회피해버리기도 합니다. 또한 자신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거나 기도의 응답이 없을 때 쉽게 포기하고 낙심하며 세상적인 해결책에 의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떤 어려움과 고통 중에도 자비로우신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하면서 신앙인답게 늘 참을성을 갖고 끝까지 기도하고 “들어 주신다”는 믿음을 지녀야 합니다. 기도는 사랑과 믿음 안에서의 견딤과 기다림’입니다.
고통과 시련이 크면 클수록 하느님의 생명과 사랑을 받아들이는 기도의 호흡 안에서 ‘끝까지’ 청을 드려야 합니다. 기도는 끈기 있는 ‘사랑의 기다림’이며,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마태 10,22)이기 때문입니다. 보잘것없는 ‘과부’와 같은 존재인 우리도 한없는 자비를 지니신 하느님을 믿고 참을성 있게 끝까지 기도해야겠습니다.
결국 고통과 시련 중에 하느님 앞에서 지닐 두 가지 태도는 확고한 믿음과 사랑의 인내입니다. 견디며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참 사랑입니다. 오늘도 주님께 희망을 두고 우리 가운데 사랑과 정의의 꽃이 피는 그날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기도하며, 일상의 고통과 시련을 사랑으로 견뎌내는 복된 견딤의 날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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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13. 연중 제32주간 토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는 기도할 때, 절대로 낙심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지난 세월 뒤돌아보니 별거 없음에도 불구하고 여기저기서 많이들 불러주셔서 강의를 참 많이 다녔습니다. 자꾸 밖으로 다니다 보니 자연스레 공동체 생활에 소홀하게 되고, 어느 순간 강의가 너무 부담스럽게 느껴지더군요. 할 수 없이 일정 기간동안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정중히 거절한 시기가 있었습니다.
대체로 “아 그렇군요. 그럼 다음에 꼭 부탁드립니다!” 라고 하시며 이해를 해주셨는데, 한 수녀님께서는 정말이지 집요하셨습니다. 전화를 열 번도 더 하셨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찾아오기까지 하셨습니다. 그 집요함에 혀를 내둘렀습니다. 속으로 웃으면서 수녀님의 이미지가 복음서에 등장하는 끈질긴 과부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불의하고 매정한 재판관과 끈질긴 과부가 한 판 붙었습니다. 재판관과 과부 둘 다 고집이 하늘을 찔렀습니다. 그런데 과부가 더 집요하고 고집스러웠습니다. 결국 과부가 판정승을 거두었습니다. 승리의 비결은 끈질김이었습니다. 결국 과부의 끈질긴 기도가 재판관의 불의와 사악함을 자비로 바꾸어놓았습니다.
사실 과부는 재판을 유리하게 이끌고 가기 위해 뇌물을 제공할 처지가 못 되었습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몇 번을 거절당한다 할지 라고, 가고 또 가고, 청하고 또 청하고,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것뿐이었습니다. 마치 투견장에 들어간 큰 불독 한 마리처럼 말입니다.
그녀의 집요한 압박에 재판관은 점점 그녀 존재 자체가 귀찮아지게 되었습니다. 틈만 나면 찾아와서 징징거리며 졸라대니, 스트레스가 점점 치솟았습니다. 과부가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파악한 재판관은 마침내 두손 두발 다 들고 만 것입니다.
과부의 끈질김 앞에 불의한 재판관도 두 손 두 팔 다 들고 도움을 주었듯이, 하느님께서도 우리가 끈질기게 간청할 때 절대로 나 몰라라 하지 않으신다고 가르칩니다. 때로 우리를 좀 기다리게 하실지언정, 때로 우리의 조바심을 유발시키실지언정, 절대로 우리의 청을 거부하지 않으심을 믿어야겠습니다. 청하는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도우심에 대해 손톱만큼의 의심도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기도할 때, 절대로 낙심하지 말아야겠습니다. 부서진 마음과 꺾인 영을 안고 밤낮으로 청하고 또 청해야겠습니다. 그러나 끈질기게 기도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던져야 할 질문이 한 가지 있습니다. 과연 무엇을 끈질기게 청하고 물고 늘어질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의 간절한 기도 지향들을 읽어보며, 어이없을 때가 있습니다. 이런 기도 지향을 보시고 하느님께서 어떻게 생각하실까? 걱정될 때도 많습니다. 우리의 기도 역시 좀 더 큰 기도, 더 하느님 뜻에 맞갖은 기도, 더 영적인 기도로 성장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이 땅 위에 이루어지기를 청하는 기도, 내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구하는 기도, 아버지의 나라가 우리 가운데 빨리 임하시기를 간구하는 기도, 고통과 십자가, 실패와 상처 속에서도 낙담하지 않고 희망하기를 바라는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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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13. 연중 제32주간 토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끊임없이 기도하는 것이 믿음은 맞지만, 무엇을 위해서가 더 중요하다.
오늘 복음은 종말에 관한 이야기에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어제 복음은 마지막 때가 노아의 홍수 때나 소돔 땅이 멸망하는 것과 같을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오늘 복음은 마지막이 오는 이유는 세상에서 ‘믿음’이 사라져 마치 ‘시체’가 되어버린 곳에 ‘독수리’가 날아드는 꼴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믿음이 사라지면 시체가 되고 그러면 독수리가 모이듯 마지막 때가 올 것입니다.
믿음이 사라지면 종말이 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믿음’이 무엇일까요?
오늘 복음은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라고 하십니다.
낙심하지 않고 끊임없이 기도하면 믿음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에 모든 종교가 낙심하지 않고 끊임없이 기도함을 가르칩니다.
어쩌면 우리보다 더 열렬히 기도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러면 그 모든 기도가 다 믿음일까요? 아닙니다.
오늘 과부가 기도하는 이유는 이것입니다.
“저와 저의 적대자 사이에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십시오.”
여기에서 ‘올바른 판결을 내리다’로 번역한 ‘에크디케오’의 뜻은 ‘변호하다’, ‘보복하다’, ‘벌하다’, ‘복수하다’란 뜻입니다.
같은 단어가 로마서 12,19절에도 나오는데 여기서는 “복수하다”로 해석했습니다.
‘에크디케오’는 정의를 실현한다는 의미인데, 적대자에게 정의를 실현하는 일은 분명 ‘복수’입니다.
믿음이란 우리 적대자에게 복수를 실현하여 나의 권리를 되찾아달라고 멈추지 않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복수하게 해 달라고 그토록 끊임없이 청해야 하는 대상인 ‘적’은 무엇일까요?
내가 노아의 방주에 들어가지 못하게 막고, 혹은 롯의 아내처럼 세상에 집착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루카 복음은 특별히 ‘교만과 돈’이 이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말씀이 바로 다른 사람보다 정의롭다고 여겨 타인을 깔보는 바리사이의 기도가 나옵니다.
기도하는데 자기 자신을 들어 높이기 위해 하는 것입니다.
그다음에는 돈이 많아서 예수님을 따를 수 없는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는 우리가 전통적으로 적, 혹은 원수라 여기는 ‘삼구’(三仇)를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삼구에게 벌을 내려 그것들로부터 자유롭게 해 달라고 청하는 기도는 믿음이 있는 기도입니다.
그러나 삼구를 모르고 하는 기도는 다른 종교에서 하는 기도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런 면에서 사탄은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교리서에서 삼구 교리가 사라지게 했기 때문입니다.
영화 ‘엑스마키나’(2015)는 천재 과학자 네이든이 자신의 회사 직원 칼렙을 자기 연구실에 불러
자신이 만든 A.I. 로봇 에이바를 실험하게 하는 내용입니다.
네이든은 칼렙이 애정에 목마르다는 것을 알고 일부러 인공지능 로봇 에이바가 그를 유혹해 탈출을 시도하게 만듭니다.
칼렙은 그것도 모르고 정말 인공지능 로봇의 유혹에 말려듭니다.
어쩌면 자신이 만든 로봇에게 인간인 칼렙이 이용당하여 인간인 자신보다 예쁜 로봇을 더 믿고 더 애정을 두는 것을 보며 즐겼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일부러 그 로봇에게 유혹당하게 만들고 인간보다 그것을 더 믿게 만든 것입니다.
이 얼마나 위대한 발명입니까?
그러나 칼렙은 네이든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천재였습니다.
이미 로봇에게 유혹을 당해 자신을 배신할 것을 안 네이든은 실험을 마치고 칼렙을 돌려보내려 합니다.
하지만 에이바가 문을 열고 나옵니다.
이미 칼렙이 문이 열리도록 프로그램해 놓은 것입니다.
결국, 간단한 실험으로 시작되었던 이것이 자신이 만든 로봇에게 자신이 칼에 찔려 죽음을 맞게 되는 결말에 이릅니다.
물론 그 로봇은 자신을 도와준 칼렙도 가둬놓고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나버립니다.
칼렙이 진짜 누가 적인지 모르게 에이바에게 유혹을 당하도록 실험을 했던 네이든의 운명은 결국 죽음이었습니다.
적이 누구인지 모호하게 만드는 실험은 결국 자신을 죽이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어쩌면 교회도 지금 이런 실험을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예비자 교리를 몇 달 동안 받아도 내가 누구와 싸우고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지 알려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기도를 하다 보면 그 지향이 오히려 싸워야 하는 욕구를 강화하는 것들이 됩니다.
세속적인 종교인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교회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요?
어쩌면 네이든처럼 위험한 실험을 하는 것이 아닐까요?
영화 ‘오블리비언’에서 주인공은 외계인이 자신을 만들고 자신들을 위해 일하도록 한 것을 잊고 오히려 자기 동족인 인간을 학살하는 일을 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누구와 싸워야 하는지 모를 때 기도를 열심히 해도 롯의 아내처럼 소금기둥이 되어버릴 것입니다.
우리가 이 삼구 교리에 무관심해진 것은 근래의 일입니다.
로마 교리서를 바탕으로 만든 기존 교리서 ‘천주교 요리문답’에서는 이 교리가 명확히 존재했습니다.
“179문: 영혼의 세 가지 원수는 무엇이뇨? 답: 영혼의 세 가지 원수는 마귀, 세속, 육신 삼구(三仇)니라.”
“230문: 굳셈(견진)의 효험은 무엇이뇨? 답: 굳셈의 효험은 우리의 신력(神力)을 더해 삼구를 용맹이 대적(對敵)하고 치명(致命)까지라도 하게 함이니라.”
견진은 성령을 청하는 성사이고 기도의 목적과도 같습니다.
성령을 얻고 성령으로 삼구와 대적하기 위해 기도해야 한다는 교리가 명확했던 것입니다.
또 김대건 신부님도 신자들에게 한 마디막 편지에서 이것을 당부하셨습니다.
“마음으로 사랑해서 잊지 못할 신자 여러분, 여러분은 이런 어려운 시절을 만나 부디 마음을 허실(虛失)하게 먹지 말고, 밤낮으로 주님의 도우심(主佑)을 빌어, 마귀와 세속과 육신의 세 원수(三仇)를 대적하십시오.
박해를 참아 받으며, 주님의 영광을 위하고, 여러분의 영혼을 위한 큰일(靈魂大事)을 경영하십시오.”
아빌라의 데레사도 같은 말을 합니다.
“이런 악마들이 우리를 계속 겁에 질리게 만드는 것은, 우리가 ‘명예와 재산과 쾌락’(마귀-세속-육신)과 같은 다른 애착을 둠으로써 자신을 겁에 질리게 만드는 탓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혐오해야 할 것들을 사랑하고 갈망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적이 되고 마니까요. …”(「자서전」, 제25장, 21항 ).
돈에 대한 욕심, 육체의 즐거움, 그리고 교만한 마음은 우리가 혐오하고 싸워야 할 적입니다.
그것과 싸우기 위해 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이것을 모를 때 우리 신앙은 아무 것도 아니게 됩니다.
바티칸에서 나온 『가톨릭교회교리서』도 명확히는 아니지만, 세 원수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시초부터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맡기신 세상에 대한 ‘다스림’은 무엇보다도 먼저 자기 다스림으로 실현되었다.
관능적 쾌락, 세상 재물에 대한 탐욕, 반이성적 자기주장 등 이 세 가지의 욕망에서 자유로웠기 때문에,
인간은 흠 없고 질서 잡힌 존재였다.”(「가톨릭교회교리서」, 377항)
믿음은 끊임없이 기도하는 것입니다.
또 그 믿음이 그리스도교의 믿음이 되려면 그 기도의 지향이 삼구를 없애는 것이어야 합니다.
기도가 세 원수로부터 자유롭게 하게 해 달라는 기도가 아니면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것들을 청하는 기도가 되어 세속적인 종교가 되어버릴 수 있습니다.
교회가 네이든이 칼렙과 에이바에게 당한 것처럼 당하지 않으려면 자아와 삼구의 존재를 명확히 알려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교회가 교리서에서 삼구를 빼면 벌어질 일은 정말 기도하는 사람은 많아도 믿음이 없는 세상이 되게 할 수 있습니다.
사탄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서는 안 됩니다. 현재 우리 교회도 위험한 실험을 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사랑을 통해 주님께서 계시되시듯, 삼구를 통해 사탄이 풀려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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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13. 연중 제32주간 토요일. 이승화 시몬 신부님.
하느님께서는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부르짖으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
예수님과 함께 걸어가는 시간은
우리의 믿음을 다지는 시간입니다.
우리 안에 믿음이 굳건해질수록
종말의 때를 향한 희망 역시 커지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과 자비이시니
언제든 우리가 당신 품으로 돌아오면 받아주실 것이라는 희망.
바로 이 희망을 간직하기에
오늘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나에게 주어진 이 시간에 감사할 수 있고
나에게 주어진 선물에 보답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하지만 인간의 나약함은 유혹이 됩니다.
우리의 기도가 의미 없어 보이고
우리의 사랑이 허무하게 보이며
우리의 믿음이 부정되는 허탈함으로 찾아옵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게 되는 유혹
그런 유혹에 누구나 아차 하는 순간 빠지게 됩니다.
그런 우리에게 주님은 희망을 다시 일깨워줍니다.
"하느님께서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을 두고 미적거리시겠느냐?"
희망을 포기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희망을 간직하고 있는 만큼
하느님께 부르짖을 수 있고 그분의 손길을 기다릴 수 있습니다.
또 희망에 걸맞은 사람이 되도록 스스로를 다져갈 수 있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희망의 말씀은
쉽게 흔들리는 우리의 연약함을 붙잡아주고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신다는 주님의 말씀을 다시 간직하게 만들어 줍니다.
그렇기에 함께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희망을 놓치지 않을 수 있기를
하느님께 대한 희망을 통해 오늘 기쁨을 살아갈 수 있길
그리하여 주님 안에서 흔들리지 않는
그런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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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13. 연중 제32주간 토요일. 김 로마노 형제님.
연중 제32주간 토요일 제1독서 (지혜18,14-16 ;19,6-7)
"당신의 전능한 말씀이 하늘의 왕좌에서 사나운 전사처럼 멸망의 한가운데로 뛰어내렸습니다. (지혜18,15) ~~
당신의 명령에 따라 온 피조물의 본성이 저마다 새롭게 형성되어, 당신의 자녀들이 해를 입지 않고 보호를 받았던 것입니다." (지혜19,6)
지혜서의 제3부인 지혜서 10-19장은 이스라엘 초기 역사에서의 지혜의 역할을 다룬다.
지혜서 10장 1-21절에서 아담으로부터 모세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의 초기 역사에서 지혜가 한 역할을 추적하는 것은 지혜서 6-9장에서 지혜를 묘사한 부분을 마치고, 이 책의 나머지 부분에서 이집트 탈출 때 있었던 사건들에 초점을 맞추는 전이의 기회를 제공한다.
가장 기본이 되는 주제는 하느님 백성의 초기 역사에서도 지혜가 활동하였고, 하느님께서 역사의 흐름을 이끌어 가신 수단이 바로 지혜였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 구절들에서 구체적인 이름을 대지 않으면서 성서에 나오는 여러 사람의 영웅들(과 몇몇 악인들)을 지적한다.
이 수사학적 기교는 그들의 정체를 식별해 낼 수 있고 적극적으로 참여하라는 것을 전제한다.
지혜서 11장 1-14절의 첫 번째 대조를 시작으로 이집트 탈출과 연관된 일곱 가지 대조가 시작된다.
일곱 가지 대조를 모두 뒷받침하는 기본 원칙은 지혜서 11장 5절에서 처음 밝혀진다.
그 원칙은 "그들의 원수들에게는 징벌의 도구가 되었던 바로 그것이 곤경에 빠진 그들에게는 득이 되었다." 는 것이다.
첫 번째 대조가 끝나면서 신학적 성찰(지혜11,15-12,27)과 우상 숭배에 관한 기록(지혜13-15장)으로 대조가 중단된다.
그리고는 지혜서 11장 1-14절에서 시작된 일련의 대조로 돌아가서, 두 번째 대조(지혜16,1-4)는 하느님께서 이집트인들과 이스라엘인들을 대하신 상이한 방식을 다룬다.
세 번째 대조(지혜16,5-14)는 메뚜기(탈출10,1-20참조)와 등에(탈출8,20-32) 재앙에서 이집트인들에게 있었던 일을 광야에서 구리뱀 이야기로 이스라엘에게 일어난 일과 비교한다(민수21,5-9참조).
네 번째 대조(지혜16,15-29)는 하늘에서 이집트인들에게 내려온 것(우박과 번개)과 이스라엘인들에게 내려온 것(만나)를 다룬다.
다섯 번재 대조(지혜17,1-18,4)는 이집트 땅을 덮친 암흑과 이스라엘이 이집트 탈출 때 체험한 빛을 다룬다.
여섯 번째 대조(지혜18,5-25)는 이집트인들과 이스라엘인들의 죽음을 다룬다.
일곱 번째 대조(지혜19,1-22)는 홍해 바다에서 있었던 사건들을 해석한다(탈출14장참조).
오늘 독서 말씀은 지혜서 18장 14-16절과 19장 6-9절로서 여섯 번째와 일곱 번째 대조에 속하는 말씀이다.
하느님과 하느님의 백성의 적들을 파멸시킨 대행자는 "당신의 전능한 말씀"이었다(지혜18,15).
그 말씀은 역사 안에서 활동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인 지혜, 고대 근동 문학과 히브리 성서에서 친숙한 모습인 전사이신 하느님, 그리고 "땅 위에 서서 하늘까지 닿는"(지혜18,16) 거대한 천사가 합쳐진 것이다.
하느님과 이스라엘에게 잘못이 없다는 것과 이집트인들이 재앙을 겪게 된 것은 바로 자신들의 잘못 때문이라는 사실이 줄곧 제시된다.
그래서 이집트인들은 이스라엘인들의 아기들을 죽였고(지혜18,5), 요술에 마음을 빼앗겼으며(지혜18,13), "무서운 꿈"으로 미리 알려 주었고(지혜18,17), 자기들이 그토록 고통을 받는 이유를 알았다(지혜18,19).
어린이들과 물이 이스라엘에게는 구원이었으나 이집트에게는 파괴였다.
한편 일곱 번째 대조(지혜19,1-22)에 나오는 홍해 사건에서 하느님의 뜻하신 목적은 "당신의 백성은 경이로운 여행길을 체험하는 동안 저들(이집트인들)은 이상한 죽음을 맞게 하려는 것"(지혜19,5)이었다.
지혜서 19장 1-4절에서 지혜서의 저자는 하느님께서 미리 알고 계셨다는 사실과 도망가는 이스라엘인들을 뒤쫓아가기로 결정하였기 때문에 이집트인들에게 잘못이 있다는 사실을 균형있게 점검한다.
이집트인들이 이스라엘인들을 뒤쫓아 간 것은 "저들의 고통에 아직 남아 있는 징벌을 마저 채우게"(지혜19,4) 하려는 것이었다.
지혜서 19장 6-12절에서 저자는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헤매는 것을 놀랍게도 긍정적으로 묘사한다(민수11장 참조).
이스라엘의 길을 평탄하게 하기 위하여 하느님께서는 창조의 다양한 요소들을사용하시어 사람들이 "온 피조물의 본성이 저마다 새롭게 형성되어" (지혜19,6)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기뻐하며 자기들을 구원해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였고,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동물, 물고기 그리고 메추라기를 양식으로 주셨지만, 이집트인들은 모기와 개구리들로 징벌하셨음을 상기하였다.
그리고 지혜서 19장 13-17절에서 지혜서의 저자는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이집트인들을 징벌하시는 하느님의 정의를 주장한다(지혜19,13).
[연중 제32주간 토요일]
그리스도교는 찾아오신 하느님을 만나는 것이다.
(루카18,1-8)
1 예수님께서는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는 뜻으로 제자들에게 비유를 말씀하셨다. 2 “어떤 고을에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한 재판관이 있었다. 3 또 그 고을에는 과부가 한 사람 있었는데 그는 줄곧 그 재판관에게 *가서, ‘저와 저의 적대자 사이에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십시오.’ 하고 졸랐다. 4 재판관은 한동안 들어주려고 하지 않다가 마침내 속으로 말하였다. ‘나는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만, 5 저 과부가 나를 이토록 귀찮게 하니 그에게는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어야겠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끝까지 찾아와서 나를 괴롭힐 것이다.’” 6 주님께서 다시 이르셨다. “이 불의한 재판관이 하는 말을 *새겨들어라.
= 불의한 재판관의 말을 새겨보자.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그 불의한 자 이기에 오랫동안 찾아가서 호소하는 그 과부의 청을 들어주지 않고 미적 거렸던 것이다.
그 불의한 재판관이 자신을 귀찬게 하는 것이 싫어서 그 자신을 위한 판결이 올바른 것일까? 아니다 그가 올바른 판결을 해 주겠다고 한 것은 하느님의 듯을 무시한 자신의 생각, 자신을 위한 올바른 판결, 즉 불의한 판결을 내려준 것이다. (오늘 복음을 하느님의 지혜, 뜻이 아닌 사람의 지혜로 읽었다면 불의한 재판관의 판결이라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그 자신의 생각을 다른 이에게 말한다면 불의한 깨달음, 판결을 주는 것이다.)
7그러나, 하느님께서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지 않으신 채, 그들을 두고 미적거리시겠느냐? 8ㄱ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
= 올바름을 주시기 위해 찾아오신 그 하느님께서 왜 미적 거리시겠는가? 그 하느님의 뜻을 받는 것, 올바른 판결이다. 즉, 하느님의 말씀을 하느님의 지혜로 생각, 뜻으로 읽고 깨달아 믿으면, 올바른 판결을 지체 없이 받는 것이다.
(루가4,21) 2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 그러나 내 뜻, 사람의 뜻을 위한 말씀으로 들으면 지체 없이 내려주시는 올바른 판결(깨달음)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요한16,23-24) 23 그날에는 너희가 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을 것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이름(뜻)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24 지금까지 너희는 내 이름(뜻)으로 아무것도 청하지 않았다.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
= 말씀은 전능 하시다. 없음에서 만물을 창조하셨고 또 그 만물을 지금도 말씀으로 지탱하고 계신다.(히브1,3) 그러면 그리스도인이 받아야 할 와와 적대자와의 올바른 판결은 무엇인가? 한 분, 중재자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서 받는 적대자와 나의 화해, 화합이다. 그래야 나와 너, 함께 하느님께 갈 수 있다. 그것이 아버지의 뜻이다.
(에페2,14-18) 14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몸(대속)으로 유다인과 이민족을 하나로 만드시고 이 둘을 가르는 장벽인 적개심을 허무셨습니다. 15 또 그 모든 계명과 조문과 함께 율법을 폐지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여 당신 안에서 두 인간을 하나의 새 인간으로 창조하시어 평화를 이룩하시고, 16 십자가를 통하여 양쪽을 한 몸 안에서 하느님과 화해시키시어, 그 적개심을 당신 안에서 없애셨습니다. 17 이렇게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오시어, 멀리 있던 여러분에게도 평화를 선포하시고 가까이 있던 이들에게도 평화를 선포하셨습니다. 18 그래서 그분을 통하여 우리 양쪽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나와 너, 우리의 구원의 진리로 믿어 받는 올바른 판결이다.
8ㄴ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생각, 뜻을 믿어, 구원의 믿음과 상관없는 곧 하느님의 뜻과 상관없는 신앙을 살아가고 있다는 말씀이다. 만은 사람들이 가는 길이 올바르다 생각하고 안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넓은 길은 그리스도 신앙의 길이 아니라는 것이다.
(마태7,13-14) 13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길도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자들이 많다. 14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얼마나 좁고 또 그 길은 얼마나 비좁은지,그리로 찾아드는 이들이 적다.”
= 오늘 과부가 하느님의 뜻이 아닌 사람의 뜻으로 불의한 재판관을 찾아갔던 것이다. 우리를 찾아오신 보이지 않는 그 하느님을 믿을 수가 없어, 보이는 사람을 찾아가 스스로 의존하려 했던 큰 잘못인 것이다.
전능하신 분, 그 하느님을 믿지 못한, 그래서 우리의 남편이라 하신(예레31,32) 그 하느님을 잃어버린 과부인 것이고, 하느님의 뜻을 적대(敵對)한 자신이 하느님의 적대자 였던 것이다.
그 적대자 과부가 세상을, 사람을 더 의존하는 우리라는 말씀이다. 그래서 오늘 ‘기도하라’ 당부하시는 것이다. 아버지의 뜻을 올바로 깨달으라고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하라 하십니다. 그러면, 지체 없이 적대자인 나를 용서하는 그 올바른 판결, 깨달음을 내려 주신다는 구원의 약속을 주시는 것이다.
(로마5,10) 10 우리가 하느님의 원수였을 때에 그분 아드님의 죽음으로 그분과 화해하게 되었다면, 화해가 이루어진 지금 그 아드님의 생명으로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은 더욱 분명합니다.
*천주의 성령님, 우리와 적대자 모두를 의탁합니다. 이끌어 주소서 ~아멘!!!
연중 제32주간 토요일 복음 (루카18,1-8)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8)
여기서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는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를 가리킨다.
그런데 바로 그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는 말은 무슨 뜻인가?
여기서 '믿음'은 지속적으로 항구하게 하느님께 간구하는 실천적인 믿음을 말한다.
앞의 불의한 재판관 비유에 등장하는 과부에게서 나타났던 것처럼, 이러한 곤경에 처할지라도 낙심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간구하는 믿음을 말한다.
그리고 '찾아볼 수 있겠느냐'에 해당하는 '아라 휴레세이'(ara heuresei; will he find)에서, '아라'(ara)는 부정적 대답이 기대되는 추론적 질문을 의미하고, '휴레세이'(heuresei)의 원형 '휴리스코'(heurisko)의 본래 뜻은 '만나다', '마주치다', '우연히 발견하다'이다.
따라서 '아라 휴레세이'(ara heuresei)에는 세상에서 밤낮으로 부르짖는 믿음을 발견할 수 없다는 부정적인 뜻이 들어있다.
사람의 아들이 다시 올 때에 사람들의 마음은 완고하고 사악해져서, 하느님께서 당신이 간택한 백성들의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너무나 분명한 사실조차도 거부하며, 그들의 마음에 의로움보다는 악(惡)이 가득차서 간구조차 하지 않을 것이 예언되고 있는 것이다.
하느님의 응답이 있을 때까지 하느님의 신실한 약속과 말씀을 의지하면서 믿음을 수호하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겠느냐고 반문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은, 루카 복음 17장에 나오는 노아와 롯의 시대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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