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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유에 누인 아기 예수(눅 2:1-7)
메리 크리스마스! 성탄절을 맞아 성도 여러분들의 가정과 하시는 일위에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충만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눅 2:12,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라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고 합니다. 구유에 뉘어있는 아기예수가 인류를 구원하러 오신 메시야의 표적이었습니다. 성탄절을 맞이하여 그 표적의 의미를 깊이 새기며 거기 담겨 있는 뜻을 깨닫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세상이 바쁘고 분주하고 죄악이 관영하여서 각기 자기 욕망을 채우기에 바빠서 성탄절인데도 주인공 예수님은 없습니다. 그저 연말이라고 재미있고 즐겁게 노래부르고 취하고 노는 날이 되어 버렸습니다. 성탄절의 주인공은 예수님입니다. 성탄절에는 오직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 경배하고 그분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기념해야 합니다.
예수님없는 성탄절은 진정한 의미에서 성탄절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지금으로부터 2천년 전 이스라엘의 베들레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부하는 이스라엘백성들은 오랫동안 메시야 오시기를 기다려 왔으나, 정작 그가 오셨을 때는 메시야를 찾아가 경배한 사람들은 몇 사람외에 아무도 없었습니다.
저 동방에서 온 박사들과 베들레헴 성밖에서 밤새도록 양을 지키던 목동들이 전부였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아들이 이땅에 오실 때 가난하고 초라한 모습으로 베들레헴의 어느 마굿간에서 태어나신 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커다란 도전을 주는 표적입니다. 그 예수님이 태어나셔서 어디에 누우셨다고 했습니까? 양과 소가 살고 있는 마굿간의 말구유입니다. 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마굿간 말구유에 누이셨습니까?
구유라는 것은 우리 말로 하면 짐승 밥그릇입니다. 왕궁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사실 하나님이 오시기에는 왕궁도 초라합니다. 아무리 좋은 호텔도 하나님을 모시기에는 부족합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은 가장 낮고 비천한 마굿간 말구유에 탄생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주시는 표적입니다. 이 표적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1.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왕궁 높은 곳에 탄생하셔서 화려한 침대에 누워계셨다면 양치는 목동과 같은 천민이 어떻게 만날 수 있었겠습니까? 동방에서 온 이방인들이 어떻게 주님을 만나 뵙고 황금과 유향과 몰약의 예물을 드릴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자기 영광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오시되, 죄많은 사람이나, 가난한 사람이나, 무식한 사람이나, 누구든지 가까이 나아와 구원받을 수 있도록 하시고자 말구유에 탄생하셨습니다.
기독교는 귀족의 종교가 아닙니다. 가난한 자, 천한 자, 죄 많은 자의 종교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마 9:13)하셨습니다. 또 말씀하시기를 (눅4:18-19)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하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26 이하의 말씀에 (고전 1:26-29)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하셨습니다.
그 증거로 세계사에 가장 위대한 정치인인 링컨의 학력이 초등학교 졸업입니다. 발명왕으로 불리우는 에디슨의 학력은 초등학교 3개월 중퇴입니다. 기독교역사상 가장 위대한 부흥사로 알려진 무디의 학력이 초등학교 졸업입니다. 이처럼 주님은 약한 자, 무능한 자를 부르셔서 강한 자와 능한 자의 능력을 뛰어넘게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이 오신 곳은 말구유입니다. 말구유는 더러운 냄새가 나는 곳입니다. 그런데 그곳에 오신 것은 바로 우리의 냄새나는 죄악을 제거하고 향기로운 냄새를 풍기려고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또 말구유는 짐승들이 사는 곳입니다. 오늘 우리 세계를 보면 짐승같은 존재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인간이기를 포기한 사람들입니다.
어떤 사람들입니까? 이웃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욕심에 사로잡혀 사는 사람 짐승입니다. 자기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범죄하는 사람, 짐승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이 떠난 사람이 짐승입니다. 육체에 사로잡혀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인간이 이처럼 짐승으로 전락하고 더러워지고 멸망을 향해 달려가는 것을 보시고 인간을 구원하려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짐승은 영혼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자기가 전부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오늘 우리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에게서 그리스도를 빼버리면 인밖에 남지않습니다. 인은 사람 인자입니다. 사람은 죄인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영이 떠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없으면 생명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번 성탄절에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바로 나의 구주요 나의 하나님이심을 고백하고 믿음으로 내 중심에 영접하셔서 진정으로 나의 성탄절이 되어지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겸손의 본을 보이시기 위함입니다.
더 이상 낮아질 곳이 없는 곳, 말구유에 주님께서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막10:45) 말씀하시기를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늘나라의 원리를 삶을 통해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섬김을 받는 나라가 아니라 도리어 섬기는 나라입니다. 섬김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세상나라는 섬김을 받음으로 성공했다고 하고 행복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거꾸로입니다. 섬김이 예수님의 정신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섬김의 모습을 태어날 때부터 주기까지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깨닫지 못합니다. 십자가를 지시러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는데 제자들은 서로 시기하고 다툽니다. 예수님이 왕이 되시면 내가 바로 오른편이라고 서로 다투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특단의 교훈을 주십니다. 그것은 어린아이 하나를 가운데 세워놓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 18:1-4)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예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예수님은 아주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나님 나라는 이처럼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자가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성탄을 통해서 낮아지심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물은 언제나 낮은 곳을 향해 흘러갑니다. 그리고 그 낮은 곳에 쌓이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은 물과 같아서 언제나 낮은 곳에 머물게 됩니다.
은혜도 마찬가지입니다. 낮은 곳에 임하는 것입니다. 구유도 낮은 곳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저 높은 곳, 세상의 부귀영광, 성공만 바라보지 말고 겸손하게 아래를 내려다보고 더 낮아지고 더 낮아지는 성도들이 되실 때 거기에 주님이 계시고 거기에 하나님의 은혜로 가득 채워 주실 줄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베들레헴에는 로마제국의 콘스탄틴 대제 때 마리아를 기념하여 말구유 자리에 세운 기념 예배당이 있습니다. 지금도 성지를 순례하는 사람들은 그 예배당을 방문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기념 예배당은 꽤 큰데 출입구는 하나뿐입니다. 그것도 아주 좁고 낮아서 허리를 굽히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 출입문을 가리켜 겸손의 문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만나려는 사람은 겸손해야 한다는 교훈을 하기 위한 것입니다.
더 낮아져야 합니다. 더 깨어져야 합니다. 여전히 자기가 너무 강합니다. 자기 생각, 자기 주장을 앞세웁니다. 마치 광야에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하나님의 은혜 속에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보지 못합니다. 자기가 전부였습니다. 그러면 결과는 무엇입니까? 자기가 살아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거절하고 자기 주장을 앞세웁니다. 그러니까 내 뜻대로 안될 때는 원망과 불평이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 결과는 60만 장정이 출애굽해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광야에서 죽음을 맞이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더 겸손해져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려면 겸손이 전부입니다. 겸손하지 않으면 결코 순종할 수 없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마 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겸손이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겸손함이란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품성을 말합니다. 이 때문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와 겸손을 배워야 합니다. ‘내 지혜, 내 뜻, 내 고집, 내 능력대로 삽니다’라는 자세를 버리고 ‘하나님, 저는 살든지 죽든지, 흥하든지 망하든지지 하나님 뜻대로 삽니다. 오직 하나님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하며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겸손하지 못하면 예수님을 결코 따라갈 수 없습니다.
겸손하지 못하면 결코 하나님의 뜻을 순종할 수 없습니다. 한 경건한 수도사가 영안이 열려 천국 보좌 가운데 빛난 좌석이 비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세상에 어떤 사람이 저 보좌를 차지할까 생각하고 있는데 천사가 대답하기를 천사가 타락하여 마귀가 되어 쫓겨나서 그 자리가 비어 있는데 하나님께서 겸손한 프랜시스에게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너무나 놀라워서 프랜시스를 시험하려고 하였습니다. 하루는 선생과 같이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당신은 스스로 어떤 사람으로 생각합니까?" , "나는 세상 사람 중에 제일 악한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선생님의 말이 진실하지 못합니다. 세상에 악한 사람들이 많은데 어찌 그런 자와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세상에 악한사람이 적지 않지만 내가 받은 은혜를 저들이 받았다면 나보다 만 배나 주를 사랑하고 봉사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내 어찌 그들에게 비교할 수 있습니까? 이 말을 들은 제자는 프랜시스의 겸손에 감탄하였습니다.
사도바울은 예수님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빌2:6-8)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이시지만 자기를 비우고,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며 배우는 제자들입니다.
3. 주님이 생명의 떡이심을 알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이 태어난 베들레헴의 뜻은 떡집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떡으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종교개혁자 말틴 루터는 하나님의 말씀을 "구유속에 있는 그리스도"라고 표현하였습니다. 구유는 천하고 더러운 짐승의 밥통입니다. 평범하고 구질구질하고 허물많은 우리의 생활속에서 그리스도의 표적을 보여주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동시에 구유에는 더러운 지푸라기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푸라기만 보면 안됩니다.
지푸라기 위에 뉘어 있는 아기 예수를 보아야 합니다. 아기 예수가 생명의 떡으로 이땅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벳세다들녁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요6:3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하셨으며
(요 6:53-54)"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5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먹고 마신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먹고 마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으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있으면 생명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없으면 생명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우리는 먹어야 합니다. 우리는 성찬식을 통해 그 의미를 되새기고 기념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있는 곳에 영원한 생명의 보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의 인치심이 있습니다. 험한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하나님의 보호와 축복하심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4:4)에서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하셨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려면 떡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떡으로만 살아갈 수 없습니다.
육신은 떡을 먹어야 살지만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우리의 영이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해야 합니다. (마6:31-33)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하셨습니다.
인간의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통해야 진정한 만족과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구하고 죄를 범함으로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육신이 되어 보이는 물질을 통해 만족을 얻으려고 애를 씁니다. 물질이 있으면 진정으로 만족할 것처럼 믿고 물질을 따라갑니다. 그러나 여러분, 물질을 따라가면 죄를 범하게 되어 있습니다. 죄를 지으면 사망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물질을 우상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이렇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딤전 6:9-10)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10]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고 하셨습니다.
어쩌면 인간의 모든 죄는 바로 돈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그러므로 돈은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지배의 대상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물질을 잘 다스리고 잘 쓸 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숙한 성도는 내게 주신 물질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힘껏 쓰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예수님은 생명의 떡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육신의 떡만이 아니라 영혼의 떡인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바른 믿음을 가질 수 있고 건강한 영혼을 지킬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말씀을 하늘양식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하늘양식을 날마다 먹어야 올바른 신앙을 지킬 수 있다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먹으면 하루가 건강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되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여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생명의 떡을 먹으십시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내 생각과 내 영혼과 내 인격속에 가득 채울 때 진정으로 말씀충만 성령충만한 성도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말씀이 없으면 자기 생각이 자기를 지배합니다. 말씀이 없으면 세상 생각이 나의 생각속에 충만합니다. 결코 거룩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번 성탄을 지나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내 생명의 떡이요, 내 영혼의 양식임을 믿고 그 말씀을 먹음으로 말씀충만한 성도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아기 예수로 구유에 탄생하셨습니다. 구유는 더럽고 냄새나는 곳이지만 그곳만이 비어 있었습니다. 또 그곳에 오신 것은 바로 가난하고 소외되고 겸손한 사람만이 예수님을 맞이할 수 있다는 분명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세상은 늘 저 높은 곳만을 바라보라고 말합니다. 성공하고 잘 살고 똑똑하고 부족함이 없는 왕궁같은 곳을 꿈꾸고 있습니다. 물론 그런 것은 아니다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정말 우리가 저 낮고 천한 구유에 오신 메시야를 나의 하나님 나의 주로 영접했다면 오늘 성탄절에 다시한번 그분이 오심을 깊이 생각하고 그분을 진정으로 찾아가서 그분을 경배하고 그분이 오늘에 내 속에 맞이하는 진정한 성탄절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