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추기경 정진석] (28) 해결의 단초
교구의 혼란은 잦아들고… 새로운 길을 찾아서
‘조용히 바뀐 서울대교구장, 5분간에 이취임’
윤공희 주교의 서울대교구장 취임식 다음 날인 1967년 3월 28일, 한 일간지가 윤 주교 취임식을 다룬 기사 제목이다.
“25년간 파란 속에 교구장 직을 지켜온 노기남(바오로) 대주교가 27일 돌연 사임하고 후임에 수원교구장으로 있던 42세의 윤공희(빅토리노) 주교가 서울 교구장 서리로 앉았다. 윤 주교는 이날 자신의 임명 사실을 발표한 지 한 시간 만인 오후 6시 5분 명동주교좌성당에서 교구 평의회 신부(8명 중 1명 불참)들만 참석한 가운데 간단한 취임식을 했다. 교회법의 규정에 따라 임명장을 낭독함으로써 5분 만에 끝난 임명식을 다른 신부들은 아무도 몰랐다. 마침 6시 미사에 참례하려고 모였던 교우들은 귓속말을 주고받으며 멍하니 제단만 바라보았다.”
서울대교구장 이취임이 얼마나 급하게 진행됐는지를 보여 주는 대목이다. 서울대교구장 서리에 임명된 윤공희 주교에 대해 자세한 이력과 함께 “‘평신도의 사도직 참여에 노력한다’고 젊은 주교다운 소신을 밝혔다”고 소개했다. 서울대교구장직에서 물러난 노기남 대주교의 근황에 관해서도 같은 지면에 소개했다.
교구 재정 문제는 아직도
서울대교구장 서리를 맡은 윤공희 주교는 당장 서울과 수원교구를 동시에 돌봐야 하는 상황이었다. 한 주를 나눠 며칠은 서울에서, 그리고 나머지 날은 수원에서 지내기로 했다. 당시 서울대교구의 재정 문제는 아직 정리되지 않은 상태였다. 빚쟁이들은 여전히 교구청에 들이닥쳐 시위하고 있었다.
“신부님! 이리 좀 와 보셔요.”
하루는 윤공희 주교의 숙소를 비롯해 교구 주교관 숙소를 맡은 수녀가 정진석 신부를 급하게 찾았다.
“무슨 일인데요, 수녀님?”
“윤 주교님께서 많이 피곤하신 모양이에요. 지난번에도 그러시더니 이번에도 베갯잇에 코피를 쏟으셨네요.”
차분한 성격의 윤공희 주교는 외적으로는 표현을 잘 하지 않았지만 스트레스가 많아 몸도 마음도 무척 힘들 것이라고 정진석 신부는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수원교구 일도 만만찮은데 서울은 더 복잡하고 해결이 힘든 상황이었다. 서울대교구에 와보니 큰 교구에서 정진석 신부 혼자 덤벼드는 빚쟁이들을 상대하는 형국이어서 더욱더 힘드셨을 것이다.
이대로 있을 수만은 없었다. 정진석 신부는 고민 끝에 윤공희 주교를 만나 말씀을 드렸다.
“주교님! 제가 재정 문제 해결을 혼자서 담당하기 어렵습니다. 누구에게 좀 부탁할까 하는데, 허락해주십시오.”
“그래, 정 신부가 그렇게 해봐.”
- 1968년 여름 메리놀외방선교회 신부, 학생들과 함께한 정진석 신부(맨 왼쪽).
김영일 신부에게 도움 청해
정진석 신부는 금호동성당에 있던 김영일 신부가 떠올랐다. 고 김영식 신부가 생전 부천의 성모자애병원을 수도원에 인수인계할 때 김영일 신부가 병원 직원들의 근로 승계 문제와 재정 문제 해결에 능력을 발휘하는 것을 이미 봐온 터였다.
정진석 신부가 전화를 걸자 김영일 신부가 당장 달려왔다. 이미 교구의 어려움을 들어 알고 있었다. 한걸음에 찾아온 김 신부에게 정진석 신부는 주님께 매달리는 심정으로 하소연했다.
“김 신부, 나 혼자 있어 죽겠다. 나 좀 살려 주라. 빚쟁이 담당 좀 해줘. 여기에 교구장님 하고 나밖에 없다.”
그 길로 김영일 신부는 교구로 왔다. 그리고 교구의 재정 문제 해결에 앞장섰다. 우선 그는 빚쟁이들을 모두 한 방에 모이게 했다.
“빨리 내 돈 내놔!”
“XXX, 내 돈 어떻게 할 거야?”
빚쟁이들은 여전히 앞뒤 가리지 않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욕설과 협박을 일삼았다. 그러나 김 신부는 눈 하나 깜짝 않고 나지막이 말을 이어갔다. 방이 떠나가게 소리치던 이들이 김 신부의 말을 들으려고 조용해졌다. 김영일 신부는 천천히 입을 뗐다.
“교구에서 확실하게 돈을 빌렸다는 증거가 있는 돈은 모두 갚아주겠습니다. 교구도 돈을 마련할 시간이 있어야 갚아 주지 당장 어떻게 하겠습니까. 돈을 마련하겠습니다. 분명히 교구가 빚진 돈에 대해서는 모두 갚겠습니다.”
돈을 갚겠다고 하니 빚쟁이들도 더는 뭐라 하지 않고 조용해졌다. 이전에 재정을 담당했던 신부들은 돈의 출처를 꼼꼼히 확인했다. 출처가 불분명한 돈에 대해 “이 돈을 우리가 언제 어떻게 빌렸느냐”고 캐물어도 빚쟁이들은 대답은커녕 빨리 돈을 갚으라고 아우성이었다. 교구 재정을 책임진 담당 신부들로서는 확인되지 않은 채권에 대해 무작정 갚겠다고 단언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하지만 김 신부는 두말하지 않고 이를 갚겠다고 약속했다.
꼬인 것들이 풀리기 시작
그다음부터 정진석 신부는 빚쟁이들에게 멱살을 잡히지 않게 됐다. 남들이 보기엔 어떨지 몰라도 약 한 달 동안 교구청은 그야말로 생지옥이었다. 당시 세간에서는 “이제 천주교 서울대교구는 망했다”는 말이 돌고 있을 정도였다. 김영일 신부는 차분히 교구 재정 상황을 파악했고, 시간이 조금 지나긴 했지만 빌린 돈을 모두 상환했다.
윤공희 주교는 정진석 신부의 그간 고생을 잘 알았기에 그해 11월 정 신부를 인사 발령해 소신학교 부교장을 맡겼다. 동시에 윤 주교는 정진석 신부를 불러 로마 유학을 권고했다. 정 신부는 권고에 따라 로마에 유학 신청서를 보내고 신학교에 있으면서 로마 유학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다음 해인 1968년 5월 서울대교구장의 정식 인사가 있었다. 마산교구장 김수환 주교가 서울대교구장 대주교로 임명돼 서울로 오게 됐다. 정진석 신부는 주교회의에 오가며 김 대주교를 만나 잘 알고 있던 터였다. 서울대교구에 도착한 김 대주교는 정진석 신부를 불러 교구청 업무를 제안했다.
“내가 낯선 서울대교구에 처음으로 왔으니 나와 함께 있지 않겠나?”
공부하고 실력을 쌓을 시간이 필요했기에
정진석 신부는 조심스럽게 전했다.
“대주교님, 제가 노 대주교님과 윤 주교님을 연이어 모셨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조금 힘든 시간을 지냈습니다. 사정은 다 아실 것입니다. 대주교님을 도와드릴 신부님들은 찾으면 있습니다. 저도 제 시간을 갖고 공부를 더 해서 실력을 쌓아 돌아오면 대주교님을 더욱 잘 도울 수 있고, 교회를 위해 일을 더 잘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말을 이어갔다.
“그러나 전 대주교님께 순명하겠습니다. 어떤 결정을 내리셔도 따르겠습니다.”
정진석 신부의 말에 김수환 대주교는 한참을 생각에 빠졌다. 한참 뜸을 들이던 김 대주교가 천천히 입을 떼었다.
“그래, 그럼 로마에 가서 공부해. 그리고 돌아와서 나를 도와주게나.”
정진석 신부는 그렇게 로마로 가게 됐다.
[추기경 정진석] (29) 새로운 세계
병인박해 순교자 24위 시복식, 그 감격의 현장에 함께
- 1968년경 로마 우르바노대학에서 성베드로 대성전을 배경으로 한국 신부들과 함께한 정진석 신부(왼쪽에서 두 번째).
로마!
정진석 신부는 드디어 로마로 유학을 떠났다. 정 신부의 로마행에는 작은 행운도 따랐다. 때마침 로마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한국 교회 역사상 43년 만의 시복식인 병인박해 순교자 24위 시복식이 거행될 예정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한국 교회는 전세기를 빌려 역사적인 시복식에 참석할 예정이었다. 정진석 신부는 이 비행기로 함께 가기로 했다. 혼자서 여러 번 갈아타는 비행편에 비하면 시간도 절반밖에 걸리지 않았다. 또 그 긴 여행을 같은 동포 신자들과 같이 가게 되었으니 다행이었다.
정진석 신부의 입학이 결정된 학교는 로마의 교황청립 우르바노대학교였다. 우르바노대학은 교황청 인류복음화성 소속 신학교로 선교 지역에서 온 신학생, 신부들을 주축으로 지역 교회에서 헌신할 사목자를 양성하는 데 교육의 중심을 둔 역사 깊은 신학교였다. 세계 곳곳의 선교지에서 학생들이 오기에 나라와 인종이 매우 다양했다. 아프리카만 해도 수십 개나 되는 나라에서 학생들이 왔다. 피부색이 다르고 언어가 다른 외국의 신자들이 함께 모여 기도를 바치거나 미사를 하면 묘한 감동이 밀려왔다. 모두가 하나의 언어(라틴어)로 기도와 노래를 하는 것은 보편 교회에 대한 연대를 생각하게 했다. 문화와 언어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한 분이신 하느님을 찬미한다는 것 자체가 정진석 신부에게는 공감과 유대의 큰 체험이었다.
공의회가 가져온 변화
당시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끝나고 유럽을 포함한 전 세계 가톨릭 교회에 많은 변화의 물결이 밀려오고 있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세계 교회에 미친 가장 큰 영향은 무엇보다 ‘평신도의 교회 참여’였다. 공의회는 평신도를 “각기 받은 은혜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나누어주시는 은혜의 분량대로 교회의 사명을 완수하는 도구요 증인”(「교회헌장」 33항)으로 인정하여 세속의 복음화와 성화를 위한 고유의 사도직 임무를 수행할 것을 권고했다.
또 하나의 큰 흐름은 전례의 토착화였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 전례에서도 혁신을 일으켰다. 미사를 모국어로 집전토록 하고, 성경과 교회법전 등의 자국어 번역을 장려했다. 그리고 성당 제단 벽면에 붙어 있던 제대가 사제와 신자들 가운데로 옮겨졌다. 제단과 신자석을 가로막던 난간도 사라졌다. 그뿐만 아니라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 일치 운동과 비그리스도교 문화 혹은 타 종교와의 관계 개선을 권장해 각 지역 교회들이 이를 위해 노력하도록 했다. 이 모든 것은 공의회가 변화시킨 교회의 새로운 모습이었다. 나라마다 차이는 있었지만 한국도 큰 변화가 시작되고 있던 터였다. 정진석 신부는 그 변화의 흐름 한가운데 있었다.
- 1968년 10월 6일 바티칸 성베드로 광장에서 한국 순례단과 함께한 정진석 신부.
베드로 대성전에서의 시복식
1968년 10월 6일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열린 시복식은 한국 교회 역사상 두 번째 시복식이었다. 1차 시복식은 1925년 7월 5일 거행됐다. 당시 시복식에는 서울대목구장 뮈텔 주교와 대구대목구장 드망즈 주교 두 분이 참석했다. 조선의 두 주교는 수행원도 없이 부산에서 출발해 고베, 상해, 홍콩, 싱가포르, 사이공, 수에즈 등을 거쳐 마르세유에 닿는 여정으로 로마에 당도했다. 당시 「경향잡지」 편집을 맡고 있던 한기근 신부는 조선인이 한 명이라도 있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어렵게 여비를 마련해 5월 11일 로마를 향해 떠났다. 그리고 7월 1일에는 뉴욕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 중이던 장면ㆍ장발 형제가 로마에 당도했다. 이로써 1925년 첫 시복식에는 단 3명의 한국인이 참석했다.
1968년 10월 6일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열린 두 번째 시복식에는 많은 신자가 참석했다. 한국에서 민간인 단체로서는 처음으로 비행기를 전세 냈다. 두 번째 시복식에는 20시간의 긴 비행을 마치고 도착한 한국인 순례단 136명, 서독에 파견된 간호사 65명, 그리고 유럽에 사는 유학생 등이 참석했다.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거행된 시복 미사는 그야말로 감동의 연속이었다. 미사의 여러 부분에 한국어가 사용됐다. 당시 서울대교구장 김수환 대주교(1969년 추기경 서임)가 교황을 대리해 미사 주례를 맡았다. 김수환 대주교가 입장하자 ‘칙서’가 낭독됐다. 라틴어 원문 낭독에 이어 이인하 대전교구 부주교가 한국어로 낭독했다. 김수환 대주교의 선창으로 ‘떼 데움(Te Deum)’이 시작될 때 성당 전면에 걸려 있는 복자들의 초상화 가림막이 걷혔다. 이어 대미사가 봉헌됐다. 미사 마지막에는 교황청 성가대가 이문근 신부가 작곡하고 최민순 신부가 작사한 ‘장하다 복자여~’로 시작하는 ‘복자 찬가’를 합창했다. 웅장한 한국어 성가가 성 베드로 대성전 가득 울리자 이내 성당은 울음바다가 됐다. 이날 오후 성체강복에서 교황 바오로 6세는 이날 시복된 새 복자들에게 경배한 후, 한국의 24위 순교자들을 현대 사회가 필요로 하는 ‘신앙의 귀감’이라고 극찬하며 한국이 지리적으로는 멀리 떨어져 있으나 정신적으로는 가장 가까운 이웃이라고 전했다. 한국에서 온 신자들은 교황의 말씀에 큰 감동을 받았다.
다음날 한국 신자들은 김수환ㆍ노기남ㆍ장병화 주교와 함께 교황을 특별 알현했다. 그때만 해도 한국 신자들이 바티칸을 순례하는 것도 어려웠고, 교황 알현은 더더욱 어려웠다. 교황은 거듭 한국 교회에 특별한 애정을 표하며 성작을 선물했다. 한국 교회와 순교자의 후손, 신자들의 선물에도 일일이 감사를 표했다. 시복식은 당시 교회뿐 아니라 국내 일반 매체에서도 호응이 높았다. 이후 교회에서는 엄청난 순교자 현양 운동이 일어났고 이는 시성식을 앞당기는 결과를 가져왔다.
유학생 정진석 신부
정진석 신부는 시복식 당일 성 베드로 대성전 옥상에 올라가 시복식을 생중계하는 데 참여했다. 정 신부의 로마 생활은 한국 신앙 선조들의 시복식으로 시작한 셈이었다. 시복식 사흘 뒤인 9일 우르바노대학에 입학했고, 수업은 15일 뒤에 시작됐다. 그러다 보니 눈코 뜰 새 없이 학기에 들어갔다.
강의는 라틴어로 진행돼 강의를 듣는 데 별 무리가 없었다. 3년간 라틴어 교사로 지낸 것이 큰 도움이 됐다. 유학생활에서 어려운 것으로 식사와 언어를 꼽을 수 있는데, 다행히 이탈리아 음식이 입맛에도 잘 맞았다. 언어도 말하고 듣고 쓰는 데 문제가 없으니 정 신부의 유학 생활은 크게 어렵지 않았다. 게다가 오랜만에 책을 보고 강의를 들으니 공부도 재미있었다.
공부하다 지칠 때면 학교 옥상에 올라갔다. 우르바노대학에서는 성 베드로 대성전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정 신부는 성 베드로 대성전을 바라보며 지난 시복식의 감동을 떠올리곤 했다. 그리고 한국 교회를 향한 주님 은혜에 감사함을 느끼며 마음을 다잡았다. 가끔 주말이 되면 로마에 있는 후배 신학생들과 함께 장을 보고 한국 음식을 해먹으며 향수를 달래기도 했다. 그 어느 때보다 즐겁고 감사하게, 쉼 없이 열심히 공부한 덕에 1년 반 만에 교회법 석사 학위를 받을 수 있었다.
[추기경 정진석] (30) 순명
부족함 많지만 하느님 뜻 따라… 39세 젊은 주교 탄생
- 1970년 9월 16일 바티칸에서 바오로 6세 교황을 알현하는 정진석 주교.
197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 신부들 사이에 ‘달러(dollar) 미사’라고 부르는 미사가 있었다. 당시 미국 가톨릭 교회는 가난한 한국 사제들을 위해 미사 예물을 보내 줬다. 한국 사제들은 이 예물로 미사를 봉헌하면서 미사 예물이 미국에서 왔다고 ‘달러(dollar) 미사’라고 불렀다. 당시만 해도 한국 사제들은 미국 교회로부터 미사 예물을 비롯해 많은 도움을 받으며 살았다. 어떤 신부는 미국의 본당을 순회하며 강론을 통해 한국 교회 사정을 알리고, 성당 건축 헌금 등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한국 교회 초창기에 외국 선교사의 도움이 항상 함께했지만, 근ㆍ현대에 들어서도 지원을 받지 않을 수 없었던 데는 6ㆍ25 전쟁의 영향이 컸다. 1953년 휴전으로 남북한 교회의 분단은 기정사실로 굳어졌다. 휴전으로 사회가 점차 안정되자 남한 교회는 파괴된 교회를 복구하고 선교 활동을 재개해 나갔다. 전쟁으로 발생한 인적 손실은 외국 선교사와 수도회의 지원으로 보완해 갔다. 외국 교회의 인적ㆍ물적 지원은 교회가 입은 손실을 복구하는 데에 크게 이바지했다. 특히 미국 가톨릭구제회(NCWC)와 독일의 미제레올, 그리고 오스트리아 부인회 등에서 한국 교회 재건을 위해 큰 도움을 줬다.
1950년대 한국 교회 발전에 외국 수도회는 많은 기여를 했다. 1958년에 설정된 청주교구는 미국 메리놀외방선교회 선교사들이 운영해 나갔다. 극심한 전란의 피해를 본 덕원의 성 베네딕도회는 1952년 경상북도 왜관에 재정착했으며,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도 새로운 발전의 기틀을 다지고 있었다. 예수회는 1960년 서울에 서강대학교를 개교했다. 그 밖의 몇몇 남자 수도회들이 새롭게 창설되거나 한국에 진출했다. 이 시기에 여자 수도회도 괄목할 만한 발전을 한다.
정진석 신부는 1970년 방학이 되자 미국으로 향했다. 다른 신부들처럼 미국 교회를 방문해 미사 예물을 모금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뜻밖의 소식을 접했다. 교황대사관으로부터 주교에 임명한다는 소식을 받은 것이다. 급작스런 부름에 정진석 신부는 한동안 정신이 없었다.
“주교로서 부족함이 많은데, 내가 자격이 있을까?”
하지만 이내 교회의 부르심에 순명했다. 자신의 삶은 이미 6ㆍ25 전쟁 때 덤으로 얻은 삶이었기에 ‘주님 뜻대로 하시라’고 여겼다. 1970년 6월 25일 청주교구 제2대 교구장으로 임명 발표가 났다. 20년 전 같은 날 전장의 한복판에서 북한군 전차를 마주했던 것을 생각하니 참으로 묘한 인생이었다.
청주교구 지역에 천주교가 전래된 것은 1801년 신유박해 이전이었다. 대부분의 신앙인이 박해를 피해 숨어서 신앙을 지켜오다 1882년 이후 선교의 자유가 어느 정도 허용되자 곧 여러 곳에 공소가 생겨났다. 서울교구 관할이었던 충청북도 지역의 전교 사업은 1953년 9월 초 미국 메리놀외방선교회에 전격적으로 위임됐다. 마산 포로수용소에서 군종 신부로 근무하던 파디 야고보 신부가 감목으로 임명됐다.
1958년 6월 23일 청주대목구로 독립하면서 파디 야고보 신부가 7월 4일 교황청으로부터 초대 대목구장에 임명됐다. 그 해 9월 16일 미국에서 주교 성성식을 가진 파디 주교의 초대 청주교구장 착좌식이 11월 26일 거행됐다. 청주는 사면이 모두 육지라는 지역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청주교구 교세는 당시 본당 15개, 신자 1만 8600명, 주교 1명과 메리놀회 신부 29명이었다. 한국인 사제는 없었다.
파디 주교는 재임 11년 동안 미국 메리놀회로부터 물심양면 지원을 받아 전교 사업과 한국인 사제 양성에 박차를 가했다. 그러다 1969년 6월 28일 파디 주교가 교구장직을 사임했다. 약 1년 뒤 1970년 6월 25일 정진석 신부가 교구장 주교로 임명됨으로써 청주교구도 드디어 한국인 주교가 다스리는 자치 교구가 됐다.
- 2년여 유학 생활 끝에 석사 학위 논문을 제출한 정진석 신부는 얼마 안 돼 청주교구장에 임명됐다. 사진은 1970년 9월 26일 청주교구 신자들이 유학생활을 마치고 입국하는 새 교구장을 맞기 위해 현수막을 들고 김포공항으로 마중 나온 모습.
정진석 주교는 외국 생활을 정리하고 1970년 9월 26일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1968년 한국을 떠난 것이 바로 엊그제 같은데 바람처럼 시간이 지나갔다. 눈을 감고 지난 시간을 생각했다. 이제 다시 한국 땅을 밟게 되면 새로운 삶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김포공항에 도착한다는 기내 방송이 나오고 서서히 비행기가 하강하면서 김포공항이 보이기 시작하자 가슴이 막 뛰기 시작했다.
‘아! 우리나라 대한민국, 어머니의 나라.’
아무리 못살고 힘들어도 고향이 최고라는 말이 외국에서 유학 생활을 하면서 더욱 절실하게 느껴졌다. 이제 다시 고향에 돌아왔다. 비행기에서 내리자 청주교구에서 현수막을 든 신자들이 입국장까지 마중을 나왔다.
“정진석 주교님! 환영합니다!”
낯익은 한국어와 환영 인파를 만나니 비로소 실감이 났다.
“아… 우리나라에 왔구나.”
정진석 주교는 주교 서품식을 청주에서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청주교구 초대 교구장이자 정 주교의 전임이었던 파디 주교는 주교 서품식을 미국의 자신이 자라났던 본당에서 했기 때문에 청주교구민들은 주교 서품식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한국인 교구장이 어떻게 주교품을 받고 착좌하는지를 청주 신자들에게 보여 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물론 정진석 주교도 첫 영성체부터 사제 서품까지 추억이 어린 명동대성당이나 로마에서 주교품을 받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 청주교구 주교가 되니 이곳에서 죽어야겠다는 각오가 생겼다.
당시 청주교구의 메리놀회 신부들은 모두 정진석 주교의 선배들이었다. 교구의 한국인 신부는 6명뿐이었는데, 그나마도 수품 연차가 3년도 안 된 이들이었다. 당시 교회 일부에서는 청주교구는 당연히 메리놀 회원이 교구장이 돼야 한다는 주장도 많았다. 그런 상황에서 한국인 정진석 주교가, 더구나 39세의 젊은 주교가 임명됐다는 것은 앞으로의 미래가 결코 쉽지 않겠다는 것을 짐작하게 하는 사건이었다. 지금이야 많이 달라졌지만 당시만 해도 ‘한국 사람이 어떻게 서양에서 온 신부들을 지휘하느냐’ 하는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시대였다. 정진석 주교는 모든 것이 생소하고 두려울 수밖에 없었지만 늘 그러했듯이 하느님께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