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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믿나이다] (51) 한 분이시고 전능하신 창조주 하느님
한 분이신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어떤 분이신가
“한 분이신 하느님을 저는 믿나이다. 전능하신 아버지, 하늘과 땅과 유형무형한 만물의 창조주를 믿나이다.”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은 ‘한 분이신 하느님’께 대한 신앙 고백으로 시작합니다. 그리스도교는 ‘하느님은 한 분이심’을 믿습니다. 좀더 구체적이고 교리적으로 표현하면 “그리스도교는 하느님께서 본성과 실체와 본질에서 오직 한 분이시다”라고 신앙으로 고백합니다.
어떻게 하느님이 한 분이심을 알 수 있느냐고요? 하느님께서 직접 당신이 선택한 사람들을 통해, 아울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당신이 유일하신 분이심을 확실하게 알려주셨기 때문이죠. 하느님께서는 “나는 있는 나다” 곧 “야훼”라는 형언할 수 없는 거룩한 이름을 모세를 통해 우리에게 알려주심으로써 당신이 누구이시며 어떤 이름으로 당신을 흠숭해야 할지 계시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이 이름으로 당신만이 영원히 있는 분으로 모든 것의 시작이시며 마지막이심을 알려주십니다.
그래서 구약 성경은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신명 6,4-5)고 일깨워줍니다.
그리스도교, 유다교, 이슬람교 등 야훼 하느님을 믿는 종교들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릅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고백하는 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먼저 하느님께서는 세상의 창조주로서 만물의 근원이시며 초월적인 권위를 지니셨기 때문에 ‘아버지’라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자애와 진실이 충만한 분’(탈출 34,6)으로 당신의 모든 자녀를 자비와 사랑으로 보살피시기에 ‘아버지’라 부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그리스도 곧 구세주이시며 아버지 하느님과 한 하느님이시다고 믿는 그리스도교는 유일하게 하느님을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라고 고백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전혀 새로운 의미에서 하느님을 ‘아버지’로 계시하셨다. 하느님께서는 창조주로서 아버지이실 뿐 아니라 당신 외아들과의 관계에서도 영원히 아버지이시다. 그리고 그 아들은 오직 당신 아버지와 맺은 관계에서만 영원히 아들이시다.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마태 11,27)”(「가톨릭교회 교리서」 240)
그리스도교는 하느님께서 ‘전능하신 분’이심을 믿습니다. ‘전능하심’은 하느님의 속성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온 세상을 창조하셨고, 모든 것을 다스리시며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전능을 ‘무한한 사랑’을 통해 드러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전능하신 아버지시다. 그분의 부성애와 전능은 서로를 밝혀준다. 과연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주시고, 우리를 당신 자녀로 삼아 주심으로써(나는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나에게 아들딸이 되리라 - 2코린 6,18), 그리고 무한한 자비를 통하여 아버지로서 전능을 보여 주신다. 당신 자비로 죄인들을 자유로이 용서하심으로써 그 권능의 극치를 드러내신다.”(「가톨릭교회 교리서」 270)
하느님의 전능은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과 수난, 부활과 영광을 통해 신비가 아닌 ‘하느님께서는 불가능한 것이 없다’는 명료함으로 드러납니다. 그래서 교회는 반문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전능하다는 것을 믿지 않고서, 어떻게 성부께서 우리를 창조하시고, 성자께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성령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신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겠는가?”라고.(「가톨릭교회 교리서」 278)
그리스도교는 아버지 하느님이 ‘창조주’이심을 믿습니다. 성경은 “한 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창세 1,1)는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이는 ‘구원의 역사’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장엄한 선포입니다. 하느님께서 유형무형한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것은 인간과 우주의 모든 것이 하느님께 기원한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그리고 인간과 모든 만물의 존재 목적이 하느님께 있음을 드러냅니다. 그래서 교회는 “세상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동시에 우리의 행복을 돌보시기 위해 창조되었다”고 고백합니다.(제2차 바티칸 공의회 선교 교령 「만민에게」 2 참조)
“당신의 선하심으로 그리고 전능하신 능력으로, 유일하신 참하느님께서는 당신의 행복을 더하기 위해서도 아니고, 당신의 완전을 획득하기 위해서도 아니라, 당신의 창조물들에 부여하신 선을 통하여 당신의 완전함을 드러내시기 위하여, 가장 자유로운 계획 안에서, 모든 것을 한 번에, 한처음에, 유형무형의 피조물 하나하나를 무에서 창조하셨다.”(제1차 바티칸 공의회 교의 헌장 「하느님의 아드님」 1장)
교회는 창조의 업적을 아버지 하느님께 돌리기는 하지만, 성부·성자·성령의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창조의 유일하고 분리될 수 없는 근원이시라고 신앙으로 고백합니다. “구약 성경 안에 암시되고 새로운 계약 안에 계시된, 성부의 창조 활동과 분리될 수 없는, 성자와 성령의 창조 활동은 교회의 신앙 규범으로 분명하게 확언된다. ‘하느님께서는 오직 한 분뿐이시다. (⋯) 그분은 아버지이시고, 그분은 하느님이시며, 그분은 창조주이시고, 그분은 주인이시며, 그분은 만드는 분이시다. 그분은 당신 자신, 곧 당신의 말씀과 당신의 지혜를 통하여, 당신의 두 손이신 성자와 성령을 통하여 만물을 창조하셨다. 창조는 거룩하신 삼위일체의 공동 업적이다.’”(「가톨릭교회 교리서」 292)
[세계 가난한 이의 날 특집] 레오 14세 교황이 말하는 '가난' - 첫 권고 「내가 너를 사랑하였다(Dilexi Te)」 중심으로
가난한 이웃 돌보는 일은 '교회 사명의 불타는 심장'
가톨릭교회는 연중 제33주일을 ‘세계 가난한 이의 날’로 지낸다. 이날 교회는 가난한 이들에게 우선적 관심을 기울여야 할 의무를 되새기고, 예수님이 가난한 이들에게 보여 준 자비와 연민을 본받고자 노력한다. 레오 14세 교황이 즉위 후 발표한 첫 권고 「내가 너를 사랑하였다(Dilexi Te)」는 불평등과 가난한 이들의 고통에 대한 무관심을 비판하고,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을 다시금 강조한다. 교황 권고가 전하는 가난의 개념, 가난한 이들을 위해 교회가 해야 할 역할을 알아본다.
빈곤의 다양한 형태
교황은 「내가 너를 사랑하였다(Dilexi Te)」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가난한 이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했고, 교회는 가난한 이들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 이 권고의 전체 주제는 ‘가난한 이들에 대한 사랑(love for the poor)’이라고 표현될 수 있으며, 교황은 가난한 이들을 돕는 일이 곧 가톨릭교회의 ‘나침반(Compass)’이라는 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참되고 가난한 메시아(The True Poor Messiah)’이신 예수님이 목수의 아들로서 구유에서 태어나 가난한 이들, 버림받은 이들, 병자들에게 가까이 계셨다고 소개하는 교황은 이처럼 예수님 삶의 모든 측면에 가난이 스며들어 있음을 전한다. 한다. 이어 “예수님은 우리가 가난한 이들에게 사랑을 베풀지 않으면서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가르치셨다”면서 “가난한 이들과 동반하는 일은 언제나 교회의 중심 활동이었다”고 강조한다.
물질적 가난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무수한 사람들이 굶어 죽거나 인간답지 못한 조건에서 겨우 생존하는 현실을 무관심하게 바라보는 문화에 맞설 것을 요청하면서도 ‘새로운 형태의 가난(New Forms of Poverty)’에도 깊은 우려를 드러내고 있다. 기본적인 생계 수단이 없는 사람들의 빈곤 외에도 사회적으로 소외되고 자신의 존엄성과 능력에 대해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이들의 빈곤, 도덕적·정신적 빈곤, 문화적 빈곤, 개인적 또는 사회적 허약함이나 취약한 상태에 있는 이들의 빈곤, 권리와 공간, 자유가 없는 다양한 이들의 빈곤도 존재한다고 지적한다.
이와 더불어 부를 증대시키면서도 공정성을 높이지 않는 경제 법칙에 의해 보다 ‘더 미묘하고 위험한(More Subtle and Dangerous)’ 새로운 형태의 빈곤이 나타나고 있는 현실도 경고하고 있다. 그럼에도 새로운 형태의 빈곤을 근절하기 위한 노력은 부족하다고 지적하며, “그리스도인들이 가난한 이들을 잊는다면 ‘교회 삶의 커다란 흐름(The Great Current of the Church's life)’에서 벗어나게 된다”고 우려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해 존재하는 교회
교황은 또한 가난한 이들을 돌봐야 하는 의무를 ‘교회 사명의 불타는 심장(The Burning Heart of the Church’s Mission)’이라고 강조한다. 뿐만 아니라 “가난한 이웃에 대한 사랑이야말로 우리가 하느님을 진실되게 사랑한다는 가시적인 증거”라며 그리스도인들의 책임을 상기시킨다.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는 복음 선포는 신뢰할 수 없는 것”이라고도 경고하고 있다.
아울러 신자들이 가난한 이들을 돕는 ‘자선(Almsgiving)’에 대해 언급하며, “자선만으로 세계의 빈곤 문제가 해결될 수는 없겠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최소한 무엇인가는 하는 편이 언제나 낫다”는 표현으로 자선 활동을 포기하지 않을 것을 청했다.
자선을 실천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우리가 생각에만 머물러 있는 것을 피하게 해 주고, 더 어려운 형편에 있는 이들과의 접촉, 만남, 공감의 순간을 마련해 주기 때문에 자선은 우리의 굳어진 마음을 부드럽게 만든다”고 설명했다. 더불어 가난한 이들과 함께 살아가기를 선택한 이들에게 존경을 표하면서 “이런 삶의 선택은 복음적 삶의 가장 높은 형태 중 하나”라고 평가했다.
교황은 또한 복음 선포를 사회적 참여로부터 분리하고, 이 문제를 정부에 위임하려는 교회 내 경향을 비판하고 있다. ‘보이지 않는 시장(Invisible Market)’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는 자유경제 논리를 경계하면서 “모든 인간의 존엄성은 내일이 아니라 오늘 존중받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연장선상에서 다수의 가난한 이가 개인의 능력이 부족해 가난하다고 보는 왜곡된 관점을 지적한 뒤 “신자 중에도 가난한 이들에게 시간을 낭비하기보다는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이들을 돌보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고 비판했다. 이어 “가난한 이들을 소홀히 하는 어떤 교회 공동체도 붕괴 위험에 처하며, 비생산적인 회의와 공허한 말로 위장된 ‘영적 세속화(Spiritual Worldliness)’에 빠져 표류하기 쉽다”고 경고했다.
교황은 권고에서 “불의한 사회 구조를 변화시키자”고 요구하면서 “기회가 더 적게 주어진 이들이라고 해서 인간으로서의 가치가 더 낮은가? 그들은 그저 생존에만 만족해야 하는가?”라고 묻는다. 이 물음에 어떻게 대답하는지에 따라 “우리가 도덕적, 영적 존엄을 되찾든지 아니면 ‘오물통(Cesspool)’에 빠지든지 결정될 것”이라고도 했다.
그러면서 “신자들은 비록 어리석거나 순진하게 보일지라도 각기 다른 방식으로 자기 목소리를 냄으로써 구조적 병폐를 지적하고 비판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구체적으로 “사회적 약자들에게 교육받을 기회를 부여하는 것은 시혜가 아니라 의무이며, 고용 분야에서 열악한 처지에 있는 이들이 좋은 일자리를 찾도록 돕는 일은 사회적 약자를 돕는 가장 중요한 길”이라고 밝혔다. 이와 더불어 환경과 도시화 문제에도 관심을 기울이며 “가난한 이들이 살고 있거나 시간을 보내는 장소, 주택, 동네, 도시의 질을 개선해야 한다”고 요청했다.
예수님 시대로부터 오늘날까지 교회 역사를 다시 읽자고 권유한 교황은 초기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나눔 정신을 ‘본받아야 할 모범(an Example to Imitate)’이라 부각시킨 뒤, 보잘것없는 이들을 섬기고, 돌보고, 해방하고, 교육하고, 동행해 온 2000년 교회 역사를 되돌아보고 있다.
레오 13세 교황이 천명한 사회교리, 제2차 바티칸공의회 문헌, 아파레시다 문헌 등을 언급한 교황은 ”가난한 이들과 연대하는 일은 늘 교회 활동의 중심에 자리해 있었다“고 전했다.
교황은 권고의 결론을 통해, 고통받고 곤궁한 이들의 얼굴 안에서 그리스도를 인식함으로써 생겨 나는 빛과 생명에 참여하자고 신자들을 초대하고, 가난한 이들은 사회학적 범주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살(Flesh of Christ)’이라고 강조했다.
성모 마리아에 공동구속자 호칭 사용 부적절
교황청 신앙교리부 공지 ‘충실한 백성의 어머니’ 발표
교황청 신앙교리부는 4일 발표한 공지 ‘충실한 백성의 어머니(Mater Populi Fidelis)’를 통해 성모 마리아를 ‘공동구속자(Co-redemptrix)’로 보는 해석을 공식적으로 부인하며, 예수 그리스도만이 구원의 유일한 주체임을 재확인했다.
신앙교리부 장관 빅토르 마누엘 페르난데스 추기경이 로마 예수회 본부에서 발표한 공지는 발표에 앞서 10월 7일 레오 14세 교황의 승인을 받았다.
공동구속자라는 칭호는 10세기경부터 일부 신학자와 신자들 사이에서 나타났지만 공식적인 교의로 선포된 적은 없었다. 이번 공지는 그리스도의 유일한 구속자 역할을 훼손할 수 있다는 신학적 우려를 공식적인 교도권의 판단으로 명확히 한 것이다. 오랫동안 논란의 여지가 있던 용어에 대해 교회의 공식적인 입장을 확정지었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구원의 유일한 주체는 그리스도”
신앙교리부는 “공동구속자라는 칭호는 구원의 유일한 주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배타적 역할을 흐리게 만들 위험이 있다”고 밝혔다.
또 “마리아는 먼저 구원받은 존재로서 자신이 받은 은총의 중재자가 될 수 없다”고 지적하며, “‘공동 중재자(Co-mediatrix)’라는 표현은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한 중재자적 지위를 의심케 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만 상징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페르난데스 추기경은 “모든 것은 그리스도로부터 비롯되며 에페소서와 콜로새서가 말하듯, 마리아 또한 그분을 통해 모든 것을 받았다”며 “공동구속자라는 말은 이러한 근원을 가리게 된다”는 베네딕토 16세 교황의 발언을 인용했다.
“공동구속자 교의 선포, 신학적으로 성숙하지 않아”
신앙교리부는 “지난 30여 년 동안 일부 주교와 신학자들이 공동구속자와 공동 중재자의 교의 선포를 요청해 왔으나, 해당 용어의 신학적 성숙이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특히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과거 일곱 차례 이상 공동구속자라는 표현을 사용했지만, 당시 신앙교리성(현 신앙교리부) 장관이던 요제프 라칭거 추기경(베네딕토 16세 교황)과 협의 후 공식 선언을 보류했다고 밝혔다.
라칭거 추기경은 생전 “이 칭호들의 의미는 아직 명확하지 않으며, 신학적으로 미성숙한 상태”라고 언급한 바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도 2021년 일반알현에서 “예수님은 마리아를 인류에게 어머니로 맡기셨지, 여신이나 공동구속자로 맡기신 것이 아니다”라며, “사랑의 표현으로 마리아를 공동구속자라 부르기도 하지만, 때로는 사랑이 과장으로 흐르기도 한다”고 말했다.
“마리아의 역할은 협력과 전구 안에서 이해해야”
공지는 “공동구속자라는 칭호는 오히려 그리스도의 구원 사명을 흐리게 하고 신앙 진리의 조화를 깨뜨릴 수 있다”며, “올바른 의미로 해석하기 위해 계속 설명이 필요한 표현이라면, 그것은 신자들의 신앙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결론지었다.
또 “공동 중재자라는 표현은 협력이나 전구(Intercession)의 의미로는 사용할 수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한 중재자적 역할을 모호하게 해서는 안 된다”고 덧붙였다.
공지문은 “그리스도께서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유일한 중재자이지만, 그분과의 친교 안에서 신자들도 서로를 위해 하느님의 도우심에 협력할 수 있다”며 “그 의미에서 마리아의 협력은 다른 어떤 피조물보다도 탁월하고 독보적”이라고 강조했다.
“마리아, 주님의 자비 드러내는 모성의 표징”
교회는 천상에 있는 성인들이 지상 신자들을 위해 전구할 수 있다고 믿으며, 그리스도와 함께 영화롭게 된 이들 가운데 “가장 으뜸은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라고 고백한다.
신앙교리부는 “마리아는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이루시는 구원 사업에 독특하게 협력했다”며 “그 전구로 인해 마리아는 주님의 자비를 드러내는 모성적 표징이 된다”고 밝혔다.
<공동구속자는>
‘공동구속자'라고 번역되기도 하는 라틴 말 ‘Co-redemptrix’는 결코 마리아를 예수 그리스도와 구원에 있어서 동렬에 놓는 것이 아니다.
마리아께서 인류 구원에 있어 그리스도께 협력한 사실을 ‘교회 헌장’이 잘 표현하고 있다.
“영원으로부터 하느님 말씀의 강생과 함께 천주의 성모로 예정되셨던 복되신 동정녀께서는 하느님 섭리의 계획에 따라 이 세상에서 하느님이신 구세주의 거룩하신 어머니이시고 그 누구보다 각별히 헌신적인 동반자이셨으며, 또 주님의 겸손한 종이셨다. 그리스도를 잉태하시고 낳으시고 기르시고 성전에서 하느님 아버지께 봉헌하시고 십자가에서 운명하시는 당신 아드님과 함께 수난하시고, 순종과 믿음과 바람과 불타는 사랑으로 영혼들의 초자연적 생명을 회복시키고자 온전히 독특한 방법으로 구세주의 활동에 협력하셨다.”(61항)
무엇보다 그분의 모성은 주님 탄생의 예고에 대한 믿음의 동의에서부터 영원한 완성에 이르기까지 지속되며, 하늘에 올림을 받으신 지금도 그 구원의 임무를 그치지 않고 계속하시어 당신의 전구로 우리에게 영원한 구원의 은혜를 얻어 주신다.
“그 때문에 복되신 동정녀께서는 교회 안에서 변호자, 원조자, 협조자, 중개자라는 칭호로 불리신다,”(62항)
여기서 ‘공동구속자’라는 표현은 인류 구원의 협조자라는 표현을 잘못 번역하거나 강조한 것에 불과하다.
- 주교회의 신앙교리위원회 「올바른 성모 신심」 제2장 성모 마리아에 관한 교의 7번 각주 中
[매주 읽는 단편 교리] 세상을 떠난 이를 위한 위령 기도
11월 위령성월에는 많은 교우가 세상을 떠난 이들을 위해 위령 기도를 바치곤 합니다. 흔히 ‘연도’(煉禱)라고 부르는데, 이 기도는 연옥 영혼을 위한 기도라는 뜻의 연옥도문(煉獄禱文)의 줄임말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초기부터 세상을 떠난 이의 장례를 치르면서 그 영혼을 위해 기도하였습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344/354?~407년)는 위령 미사와 위령 기도 그리고 죽은 이를 위한 자선 행위가 하느님의 자비를 얻는 방법으로 사도 시대부터 내려오는 전통이라고 가르쳤습니다. 1274년에 열린 제2차 리옹 공의회는 위령 기도의 유익함을 공식적으로 선언하였습니다(DH 856).
성경에서 죽은 이를 위해 기도한 내용은 2마카 12,39~45에 나옵니다. 유다의 독립 항쟁을 이끈 마카베오가 전쟁 중 목숨을 잃은 전사자들의 장례를 치르는데, 이때 그들의 옷에서 얌니아 우상의 패가 발견된 것입니다. 이에 마카베오는 그들의 죽음이 우상숭배의 대가라고 여기고, 모금하여 그들의 영혼을 위한 속죄 제물을 바치도록 합니다. 곧 죽은 이들이 죄를 용서받고 하느님 안에서 부활하기를 청하는 위령 기도를 바친 것입니다. 또한 사도 바오로는 자신의 협력자였던 오네시포로스를 두고 “그날에 주님께서 허락하시어 그가 주님에게서 자비를 얻기 바랍니다.”(2티모 1,18)라고 말하면서 죽음 이후의 그를 위해 기도하겠다는 뜻을 표현하였습니다.
한국 천주교 신자들이 종종 바치는 연도는 장례 예식에서 사용되는 기도와 우리 민족 고유의 가락이 만나 토착화된 기도입니다. 외국에서도 세상을 떠난 이들을 위해 기도하지만(묵주기도, 성무일도), 우리의 연도와 같은 기도는 없습니다. 이 기도의 시작은 한국 천주교의 옛 기도서 「천주성교공과」의 초기 형태가 완성된 1838년경으로 봅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목판본(1864년) 「천주성교공과」 4권 뒷부분에는 “련옥도문”이 나옵니다. 한편, 1865년 발행된 「천주성교예규」 1ㆍ2권 목판본에는 장례 예식과 기도문이 이전 것보다 더 확장되어 나옵니다. 이 책은 2003년 「상장예식」이 개정되어 나오기 전까지 천주교 상장례의 기도서와 예식서 역할을 하였습니다. 연도의 노랫가락은 상여꾼들이 불렀던 만가(輓歌)나 양반들이 글 읽던 소리에서 유래한다고 추정됩니다.
2003년에 개정된 위령 기도는 크게 일곱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① 시작 기도와 말씀 봉독, ② 죄의 용서와 자비를 구하는 시편 62장, 129장, 50장, ③ 성인 호칭 기도, ④ 세상을 떠난 이를 위한 기도, ⑤ 찬미와 간구 기도, ⑥ 주님의 기도, ⑦ 마침 기도입니다. 시작 부분에 ‘말씀 봉독’이 추가된 이유는 초기 그리스도교가 간직하던 파스카의 기쁨과 희망 대신 중세의 연옥관이 더 많이 반영되었던 이전 연도의 부족함을 보완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번 11월 한 달간 세상을 떠난 영혼을 위하여 우리 한국 천주교회의 고유하고 아름다운 기도인 연도를 자주 바쳐보면 어떨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