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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과 율례
21: 1-7
1. 네가 백성 앞에 세울 율례는 이러하니라
2. 네가 히브리 종을 사면 그가 육년 동안 섬길 것이요 제 칠년에는 값 없이 나가 자유할 것이며
3. 그가 단신으로 왔으면 단신으로 나갈 것이요 장가 들었으면 그 아내도 그와 함께 나가려니와
4. 상전이 그에게 아내를 줌으로 그 아내가 자녀간 낳았으면 그 아내와 그 자식들은 상전에게 속할 것이요 그는 단신으로 나갈 것이로되
5. 종이 진정으로 말하기를 내가 상전과 내 처자를 사랑하니 나가서 자유하지 않겠노라 하면
6. 상전이 그를 데리고 재판장에게로 갈 것이요 또 그를 문이나 문설주 앞으로 데리고 가서 그것에다가 송곳으로 그 귀를 뚫을 것이라 그가 영영히 그 상전을 섬기리라
7. 사람이 그 딸을 여종으로 팔았으면 그는 남종 같이 나오지 못할찌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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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진국가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법을 준수하는 정신입니다. 법을 잘 지키고 존중하는 나라를 선진국이라 하고 법 질서가 엉망인 나라를 후진국 이라 합니다. 현대 문명의 원산지인 서구 문명은 성경의 법이 기초가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민주사회의 법의 토대를 이루고 있는 것도 율법입니다. 그래서 결국 알고보면 율법은 인류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율법을 선하고 거룩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사람이 이법을 깨뜨린 것이 문제이지 율법 자체는 선하고 거룩한 것 입니다. 그런데 출애굽기에 보면 율법을 십계명과 율례로 나누고 있습니다. 십계명은 하나님께서 직접 주신 열 개의 말씀을 말하는 것이고, 율례는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말씀하신 모든 계명을 말하는 것 입니다. 성경을 보실까요?
출 24:3 “모세가 와서 여호와의 모든 말씀과 그 모든 율례를 백성에게 고하매 그들이 한소리로 응답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명하신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1. 십계명과 율례는 차이가 있습니다.
1) 십계명과 율례의 차이는 헌법과 시행 규칙(by-law)의 차이와 같습니다.
헌장이 있고 그 헌장을 시행하는 일종의 시행규칙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성서학자
들은 보통 세 가지로 율법을 구분합니다.
2) 율법은 도덕법과 의식법과 시민법으로 구분 됩니다.
Moral law / Ceremonial law / Civic law 여기서 의식법이란 종교의식을 어떻게 거행 할 것인가에 대한 자세한 규정들입니다. 일종의 제사법 같은 것 입니다.
시민법이란 사회생활을 어떻게 할 것 인가? …출20장 안에는 십계명과 의식법이 나와 있고 21-23장에는 시민법이 나와 있습니다. 오늘은 시민법의 내용을 객관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2. 시민법은 민사법과 같습니다.
여기에는 부분적으로 형법의 내용도 담고 있습니다.
1) 사회정의 실현을 위한 시민법은 노예의 인권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1-11)
시민법의 목적 가운데 하나가 사회 정의를 실현하고 건강한 사회를 만드는 것 입니다. 특별히 제일 먼저 다루고 있는 것이 노예법입니다. 지금부터 3,500년전 고대 사회에서는 노예 제도가 일반화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에는 부족국가 끼리 전쟁 하다가 지면 전쟁 포로로 끌려갔는데 전쟁 포로는 대부분 노예처럼 살게 되는 것 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 당시의 사고 방식과 사회적인 수준에서 볼 때는 아주 파격적인 선언을 하신 것입니다.
노예도 하나님 앞에서 똑 같은 사람으로 취급해야 한다는 것 입니다. 다시 말하면 노예의 인권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노예를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노예 인권이라는 것이 어디있습니까? 좀 더 구체적으로 볼까요?
(1) 노예는 영구적으로 삼을 수 없고 기간을 6년으로 제한 하셨습니다.
출 21:2 “네가 히브리 종을 사면 그가 육 년 동안 섬길 것이요 제 칠 년에는 값없이 나가 자유할 것이며”
다시 말하면 히브리 종은 시한부 노예라는 것 입니다. 특별히 히브리 종들은 전쟁 포로가 아니라 빚 때문에 팔리는 경우입니다. 그리고 노예 기간도 6년으로 제한 하셨습니다. 얼마나 많은 빚을 졌든지 간에 7년 되는 해에는 모든 빚에서 풀려나 자유인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무슨 뜻일가요?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해 관계의 원리 보다 은혜의 원리가 우선 되게 하신 것 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서는 영구적인 노예가 없었다는 것은 노예라 할지라도 그것은 일시적인 징계였기 때문 입니다. 그러므로 믿는 성도들이 받는 시험과 고통은 일시적인 연단과 징계이지 영원한 형벌은 아니라는 것 입니다. 믿는 성도들이 노예적인 삶의 징계를 받는 것은 결국 우리들의 죄성 때문 입니다.그러나 하나님의 사랑 받은 백성들은 일시적인 징계는 받지만 영구적으로 불행하게 될 수는 없는 것 입니다. 회개하면 다시 자유를 회복 하게 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자녀로 살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믿습니까? 그런데 히브리인 중에도 영구적인 노예가 있습니다. 이 노예는 어떤 노예일까요?
(2) 영구적인 노예의 경우는 스스로 노예가 된 사랑의 노예입니다.
출 21:5 “종이 진정으로 말하기를 내가 상전과 내 처자를 사랑하니 나가서 자유하지 않겠노라하면 6 상전이 그를 데리고 재판장에게로 갈 것이요 …..그가 영영히 그 상전을 섬기리라”
히브리 노예는 모두 시한부 노예이므로 때가 되면 해방 될 수 있었습니다. 혼자 종이 되었으면 혼자 나가고, 결혼해서 종이 되었으면 부부가 함께 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혼자 들어 왔는데 주인이 사랑해서 노예를 결혼시켜 아내를 주어 자식을 낳은 경우입니다. 그 때 부인과 자식은 주인에게 속하였기 때문에 나가려면 혼자 나가야 합니다. 그러나 그럴 때 가족에 대한 사랑 때문에 함께 살기를 원 할 때 그는 스스로 영구적인 노예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영구적인 노예는 빚 때문이 아니라 사랑 때문에 자발적인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출 21:5 “종이 진정으로 말하기를 내가 상전과 내 처자를 사랑하니 나가서 자유하지 않겠노라 하면 6 상전이 그를 데리고 재판장에게로 갈 것이요 또 그를 문이나 문설주 앞으로 데리고 가서 그것에다가 송곳으로 그 귀를 뚫을 것이라 그가 영영히 그 상전을 섬기리라“
사랑의 흔적을 가지고 스스로 노예가 되는 모습 속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생각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오셨습니까?
(3) 예수 그리스도는 스스로 종이 되셨습니다.
우리들도 사랑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종이 되신 것은 신비에 속하는 것 입니다. 그리스도는 노예가 되실 이유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는 분이셨습니다. 그 분은 하나님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신 분 이셨습니다.
그러나 그 분은 종의 모습으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당신에게 연합 시키려고 송곳 보다 더 날카로운 십자가에 찔리셔서 고통을 받으시고 상처를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그 분은 우리를 위하여 죽음을 이기고 부활 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거룩한 상흔 (傷痕) 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것이 증거이고 약속 입니다. 그래서 그 분을 믿는 자에게 자유와 해방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갈5:1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이제 죄에서 자유을 얻었으니 다시는 죄의 종이 되지 말라는 것 입니다. 그런데도 같은 성경에서 다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갈 5: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사랑으로 종 노릇 하라는 말씀입니다. 다시 종이 되라는 것 입니다. 그러나 이 종은 스스로 된 종이고, 사랑이 동기가 되어서 종이 된 것을 말 합니다.
어떤 면에서 진짜 자유는 예수님처럼 스스로 종이 된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예수님을 닮아 스스로 종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선교사로 일생을 바친 분들을 생각해 보세요. 그들은 스스로 종이 된 사람들 입니다.
어제 할리팍스에서 6.25 참전 용사들과 한국에서 순교하신 맥킨지를 비롯한 카나다 선교사님들을 위한 추모 공원을 만드는데 교회적으로 참여해 달라는 편지를 받았습니다.
여러분 19세기 말 이후에 우리나라가 캄캄했을 적에 조선에 찾아와 복음을 전하다가 피와 땀을 흐리셨던 카나다 선교사가 180 명이 넘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20대 30대의 젊은이들 이었습니다. 또 한국 전쟁 당시 아직 한국과 카나다가 수교도 이루어 지지 않은 상태였지만 카나다는 27,000명의 군인들을 파병해 주었고 그들은 고귀한 피를 흘리면서 우리 민족을 공산군의 침략으로부터 지켜 주었습니다. 군인들이야 국가적인 소명을 받고 왔다고 하지만 그것도 기독교 정신이 있었기에 자유를 위해서 그런 결단을 내린 것입니다.
그 중에 우리 한국 역사에 기록되어 있고 교회사에 빛나는 한 젊은이가 있습니다. 잘 아시는 노바스코샤 출시인 맥킨지 선교사입니다. (William J. Mckengie)
요삼일육 선교회에서 발표한 선교 칼럼에 나오는 멕켄지에 대한 글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한국인을 진정으로 친구같이 사랑했던 메킨지 선교사에 대한 글입니다.
한국 개화기에 ‘사랑의 원자탄’을 터뜨린 한 분이 있었습니다. 바로 캐나다 선교사 맥켄지(W. J. Mackenzie)입니다. 1893년, 맥켄지는 황해도 솔내에서 조선인처럼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어렵게 사는 조선 친구들을 두고 혼자 호강할 수 없다고 해서 화려한 집을 포기하고 오두막집에서 살았고, 좋은 서양 음식도 포기하고 조선 음식을 먹으며 살았습니다.
우정이 무엇입니까?
나의 감정과 필요에는 둔감하고 타인의 감정과 필요에는 예민한 것! 그것이 바로 우정입니다.
한번은 서울에 살던 언더우드의 부인인 릴리아스 홀톤(L. Horton) 여사가 성탄절에 빵, 케이크, 과일 캔, 차, 우유, 설탕 등을 맥켄지에게 보냈습니다. 그러나 맥켄지는 그 음식을 한번 입에 대면 다시는 조선 밥을 먹지 못할 것으로 생각하고 자기는 하나도 취하지 않고 다 동네 사람들에게 나눠줬습니다. 그러면서 정작 본인은 영양 부족에 시달리며 점차 허약해져 갔습니다.
우정이 무엇입니까?
무수한 잎새 속에는 실체가 없고 몇 개의 열매 속에 실체가 담긴 것!
그것이 바로 우정입니다.
조선 겨레와 함께 가난에 시달리며 사랑을 실천하는 서양인의 우정으로 동네 사람들에게는 더 이상의 설교가 필요 없었습니다. 맥켄지의 인정이 넘치는 삶과 비쩍 마른 그의 얼굴에 나타난 따뜻한 미소가 수많은 사람들에게 기쁨과 희망을 준 진짜 설교였습니다.
우정이 무엇입니까?
인정이 많은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으로서 인정이 많기에 인정이 없는 사람보다 훨씬 자유롭지 못한 것! 그것이 바로 우정입니다.
1895년은 동학군이 “조선은 조선인이!”라는 구호로 큰 힘을 발휘하던 해였습니다. 어느 날, 동학군이 맥켄지가 사는 마을을 공격할 것이라는 소문이 들렸습니다. 그러자 맥켄지는 자신의 총을 꺼내 부숴 버렸습니다. 그 얘기를 듣고 동학군은 만일 그가 그런 마음으로 살고 있다면 그를 공격하는 것은 무익하고 나쁜 일이다고 판단한 후 퇴각했습니다.
우정이 무엇입니까?
약한 사람은 믿음으로 강하게 만들고 강한 사람은 사랑으로 약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바로 우정입니다.
우정이 선율처럼 흐르는 삶을 살던 맥켄지는 1895년 여름, 열병으로 정신이상 증세를 보이며 사랑했던 친구의 나라 조선 땅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사람들은“왜 힘든 조선 땅에 일부러 와서 고생만 하다 죽느냐?”고 묻겠지만 그는 이렇게 대답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나는 조선을 정말 사랑했습니다.”
우정이 무엇입니까?
다른 모든 사람들이 힘들다고 떠나갈 때에 사랑을 가지고 찾아오는 것! 그것이 바로 우정입니다.
맥켄지는 죽었지만 그의 아름다운 삶은 한국인의 마음에 영원히 이채로운 꽃처럼 기억될 것입니다.
우정이 무엇입니까?
고통과 실천과 희생의 터전 위에 만개하는 꽃의 아름다움! 그것이 바로 우정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스스로 사랑의 종이 되어 조선 땅에 들어와 복음을 전하고 조선 옷을 입고, 조선 음식을 먹으며 조선 사람처럼 사는 복음적인 삶을 살던 맥킨지는 34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독신 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약혼녀가 있었고 그 약혼녀는 맥켄지의 뒤를 이어 친구들과 함께 다시 조선 땅으로 들어와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들은 스스로 사랑의 종으로 살았던 분 들입니다.
영적으로 성숙하면 자기 맘대로 살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이 원하는 것을 하다가 죽습니다. 주님도 베드로의 죽음에 대해서 이렇게 예언 하십니다.
요21: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사랑은 스스로 자유를 반납하는 것 입니다. 그것이 어머니이십니다. 어머니들은 자녀들을 위하여 스스로 자유를 반납하십니다.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4) 여자 노예는 더욱 더 세심하게 다루셨습니다 (7-11)
하나님은 언제나 약한 자들을 깊이 배려 하십니다. 여자들, 과부, 어린이, 병자, 장애인들의 친구가 되십니다. 특별히 여자 노예들은 악한 주인들에게 악용 당 할수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보호해 주시기 위해 법을 정해 주셨습니다. 특별히 처녀로 노예가 되었을 때 여자이기 때문에 당하는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성적인 문제가 가장 큰 문제였습니다.
그 당시 종은 주인이 성을 요구 했을 때에는 거부할 권리가 없었습니다. 아브라함도 하갈을 취한 적이 있고, 야곱도 라헬과 레아의 여종들을 통해서 자녀들을 낳았습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심각한 인권 침해지만 그 당시는 일반화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자 종들을 7년 후에 그냥 내보내면 거지나 창녀로 전락할 가능성이 많았기에 이럴 때 그 여종은 그 집에서 딸이나 며느리의 수준에서 대우를 받게 하셨습니다.
21:7 “사람이 그 딸을 여종으로 팔았으면 그는 남종같이 나오지 못할지며 8 만일 상전이 그를 기뻐 아니하여 상관치 아니하면 그를 속신케 할 것이나 그 여자를 속임이 되었으니 타국인에게 팔지 못할 것이요 9 만일 그를 자기 아들에게 주기로 하였으면 그를 딸같이 대접할 것이요 10 만일 상전이 달리 장가들지라도 그의 의복과 음식과 동침하는 것은 끊지 못할 것이요 11 이 세 가지를 시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속전을 내지 않고 거저 나가게 할 것이니라”
어쨌든 여자 문제는 좀 복잡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영구적인 노예가 될 수 없다고 선포하신 것 입니다. 고통은 잠간이고 사랑과 자유는 영원 한 것입니다.
시30:4 “주의 성도들아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 거룩한 이름에 감사할지어다 5 그 노염은 잠깐이요 그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지라도 아침에는 기쁨
이 오리로다“
노예문제 다음에 오늘 본문은 폭력과 살인의 문제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요즘처럼 폭력과 살인이 난무 하는 시대에 성경이 하시는 말씀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2) 폭력 방지를 위한 상해법은 생명경외의 사상이 법의 기초입니다. (12-32)
(1) 하나님께서는 생명을 귀하게 보시며 인간의 신체도 손상하지 못하게 하십니다
요즘 많이 듣는 현대인의 사상 가운데 인간을 아름답게 보는 사상을 휴매니즘이라고 부릅니다.
이렇게 휴매니즘을 강조하는 휴매니스트들은 종교가 너무 제도화 되어서 인간의 자유를 제한하고, 인간성을 짓밟고 있기 때문에 인간을 이런 종교의 속박에서 해방시키자는 계기에서 시작 된 것 입니다. 그러나 휴매니즘은 문자 그대로 인본주의입니다. 인간의 입장에서 인간을 아름답다고 하지만 그것은 인간을 너무 낙관적으로 보는 견해입니다. 인간이 인간을 속이고 인간이 인간을 때리고 인간이 인간을 죽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을 너무 믿었던 공산주의는 인간 때문에 망한 것 입니다. 그러나 성경도 인간의 아름다움을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인간의 생명의 아름다움을 말 합니다.
그래서 인간의 생명은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 이외에는 그 누구도 생명을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심지어 자기 자신도 자신의 생명을 해칠 수 없습니다. 뿐만아니라 이 계명은 남녀 노예들과 심지어 태아에게까지 적용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낙태도 무서운 폭력이고 살인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신체까지도 손상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짐승이 인간의 몸을 상하게 하면 그 짐승을 죽이게 하였습니다. 생명이 귀하다는 것은 단 한번 살 수있는 가장 귀한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 입니다. 그래서 창세기에서 노아의 언약에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창 9:6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
출 21:12 “사람을 쳐죽인 자는 반드시 죽일 것이나.....”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재이기 대문에 아무리 못된 인간이라도 그가 진정으로 죄를 깨닫고 회개하고 내면 생활이 회복 되기만 하면 그 생명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많이 불려지는 찬송가는 405장 일 것 입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이 시를 쓴 사람은 저 유명한 존 뉴우톤 입니다. 그러나 r가 회개 하기 전에는 정말로 잔인하고 추악하고 저질 스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노예를 잡아다가 팔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흑인 노예들을 강간하기도 한 잔인 무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영혼이 거듭난 후 그는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을 주께로 인도하는 아름다운 하나님의 사람이 된 것 입니다.
생명은 아름다운 것 입니다.
(2) 고의(故意)가 아닌 과실(過失)로 죽였을 때는 도피성으로 피하게 하셨습니다.
이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자비를 다시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의 죽음에 대해서 책임지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경우에도 사람의 죽음은 우연히 죽는 경우가 없다는 것 입니다. 그것이 과실 상해죄이든 과실 치사죄이든 거기에도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가 있다는 것 입니다. 그 외에도..
(3) 부모를 치는자, 부모를 저주하는자,유괴행위,낙태를 심각하게 다루셨습니다.
출 21:15 “자기 아비나 어미를 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출 21:16 ”사람을 후린 자가 그 사람을 팔았든지 자기 수하에 두었든지 그를 반드시 죽일지니라”출 21:17 “그 아비나 어미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
부모 공경이 인간의 계명 가운데 최고의 계명이기 때문 입니다.생존해 계시는 부모님을 욕하고 저주하는 것은 스스로 생명을 끊는 행위와 같은 것 입니다. 노인들에게 빨리 돌아가셨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것도 큰 죄입니다. 물론 부모가 정말 잘못된 경우도 잇습니다. 그러나 그럴때도 부모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저주하는 것은 용서 받기 힘든 큰 죄를 짓는 것이란 말 입니다.
후린자라는 말은 납치하는 것 인데 이것은 납치나 유괴행위를 말 하는 것 입니다. 그래서 인신 매매가 생기고 노예 매매가 생겼습니다. 현대판 인신 매매도 무서울 정도로 심각 합니다. 마피아들이 이런 일을 지금도 엄청나게 자행하고 있습니다. 어린이 유괴 사건도 심각 합니다. 실종된 사람들도 많습니다. 어린이를 잃어 버리면 잠도 못 자고 밥도 못 먹고 언제 돌아 올지 모르니까 이사도 못 갑니다...
근래의 우리 역사 가운데도 수치스런 일이지만 일본 제국 주의의 비인간적인 만행으로 하여 영문도 모르고 납치되여간 한국인 강제징용자수는 778만 4,839명으로 기록되어 있고 10대의 소녀들과 처녀들, 유부녀들을 비롯하여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간 조선인 여성수는 20만 명이나 됩니다.
미국 국무부의 '2002년 인신매매 보고서'에 따르면 2001년 89개 나라에서 사기, 강압,납치 등에 의해 인신매매된 사람은 70만-400만 명으로 추정되며, 미국에서만도 5만 명에 이른다는 보고입니다.
영국 사회학자인 케빈 베일스가 2002년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미국에 10만에서 15만 명의 노예가 있을 뿐만 아니라 세계 도처에 수천 만 명이 노예 상태로 목숨을 이어가고 있다고 했습니다. 노예의 수가 많은 나라는 인도입니다.
1800만~2200만, 파키스탄 250만~350만, 브라질 30만~50만, 중국 25만~50만, 네팔과 모리타니 각각 25만~30만 명이고 그 외에도 아이티, 미얀마, 타이, 아프가니스탄, 나이지리아 등 후진국은 물론이고 이탈리아, 캐나다, 프랑스와 같은 선진국에도 수만 명의 노예가 존재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인신 매매자는 옛날에는 모두 죽였습니다. 그들은 긍휼의 대상이 될수 없는 존재들이었습니다. 성경도 그 시대의 상황을 인정하면서 노예를 주인의 재산이라고 표현 합니다. 그러나 노예의 생명 만큼은 주인이라도 맘 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태아도 인격적으로 다루십니다.
그러므로 낙태나 이혼의 동기에서 유산 하는 것이나 요즘 초음파 감별을 해서 딸이면 유산시키는 것도 모두 살인죄라고 말씀하시는 것 입니다.
이런 죄들에 대한 재판의 기준은 언제나 공정하게 하라는 것 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재판관을 세우시고 국가라는 기관에게 권력의 칼을 주신 것 입니다.
개인이 마피아를 다룰 수 없고, 납치범이나 갱단을 처단 할 수가 없습니다. 개인의 힘은 너무 제한 되어 있기 때문 입니다. 그런데 이런 범죄의 경우도 주님은그 동기를 살피십니다.
(4) 상해나 살인죄에 있어서 하나님이 심각하게 다루시는 것은 고의성의 문제입니다.
고의로 사람을 죽인 경우는 직접 살인이건 간접 살인이건 절대로 용서와 긍휼이 적용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언제나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명을 너무도 소중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공의 때문 입니다. 그러나 소의 경우라도 고의성이 없이 사람을 박았다면 소는 죽음을 면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지금 심각하게 다루고 계시는 것은 바로 고의성입니다. 그리고 특이한 것은 자기 자신은 전혀 그럴 의도가 없었지만 평소에 충분한 주의를 하지 않아서 사람을 죽게 한 일이나 다치게 한 일이 일어났으면 그 사람이 책임을 지게 되어 있습니다. 에를 들어 평소에 들이 박기를 잘하는 소를 주인이 방치하거나 게을러서 주의 하지 않았을 경우 일어난 사고는 주인이 책임지게 되어 있습니다.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만물의 관리자로서의 사람에게 부여된 책임과 의무를 중요하게 다루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5) 하나님의 재판의 기준은 복수를 허용하는 보복 조항이 없습니다.
우리들이 오해 하는 구절 가운데 하나는 바로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갚아주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보복을 허용한 조항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보복하시는 무정 하신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재판장의 판결을 좇으라는 것은 재판장도 아무렇게나 판결 할 수 없다는 것 입니다. 공정해야 한다는 것 입니다. 눈을 다쳤다고 눈도 다치게 하고 다리도 쁘러 뜨리는 그런 과오를 범하지 않도록 가해자도 보호해 주시는 것 입니다. 보복과 복수는 허용되지 않습니다.
3) 기독교의 사유재산법은 공산주의와 달리 자발적 나눔을 강조합니다(33-36)
공산주의는 이상은 좋지만 하나님도 없고 사랑도 없고 자발적인 동기보다 국가의 권력에 의해서 강제적으로 하는 제도입니다. 그래서 망 할 수 밖에 없는 것 입니다. 눈가림만 하고 시간만 때우면 된다고 생각 하는 것 입니다.
4) 건강한 사회는 성도덕이 깨끗하며 약자가 보호 받는 사회입니다(22:16-31)
약 1:27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
5) 사회정의의 생명은 재판의 공평함에 있습니다 (23:1-9)
6) 하나님의 자비와 축복의 원칙 가운데 하나는 안식법입니다.(23:10-13)
7) 절기법은 우리사회를 축제의 전통이 이어지는 밝은 사회가 되게 합니다(14)
3. 계명의 특징은 관계의 축복을 말 하는 것 입니다.
모든 인간의 문제는 관계의 문제 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와 하나님은 어떤 관계입니까? 십계명은 관계를 다루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영적인 관계, 부모와의 관계, 이성관계, 인격적 관계, 사회적 관계입니다. 그러니까 십계명도 십자가와 마찬가지로 수직과 수평의 균형 잡힌 관계를 이루게 하는 것 입니다.
1) 하나님은 계명을 통해서 천대까지 축복하시기 원하십니다.
우리는 십계명이나 율법이라는 말을 들으면 축복보다는 형벌을 먼저 연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법을 깨트린 인간의 타락성 때문 입니다. 그러나 본래 율법의 의도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에 근거한 하나님의 축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언제나 죄를 압도하는 것이 성경의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십계명은 구원 받은 개인과 언약 공동체를 위해서 주신 하나님의 법입니다. 순종 하여 지킬 때 복이 임하는 것 입니다. 그래서…
2) 구속과 은혜의 체험이 있을 때 사랑과 감사의 동기에서 순종 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순종은 사랑과 신뢰와 감사의 동기 부여가 있어야 가능 한 것 입니다.
아직 이 구원의 은혜를 받지 못한 분들은 복음을 들으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아야 합니다. ‘
사랑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야 순종 할 수 있습니다.
롬 13:8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9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10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율법이 깨지면 불법이 됩니다. 그리고 불법이 성행하면 사랑이 식어 집니다. 그래서 율법을 더욱 더 못 지키는 것 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 만이 하나님의 법을 지킬 수가 있기 때문 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은 사랑의 계명이기 때문에 무거운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면 쉬운 것 입니다. 그러므로 율법 자체보다도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를 다시 새롭게 인식하고 십자가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다시 묵상해 보십시오. 사랑이 생기면 쉬운 것 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소원은 할 수 있으면 다 들어 줄수 있습니다. 사랑하면 야곱처럼 7년도 수일 같이 여기며 참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할 수 없는 일이 있는데 그것은 죄짓는 일 입니다. 사랑은 불의를 행치 않는 것이기 때문 입니다. 죄짓는 것은 정욕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인 것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