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여성수필의 정체성 연구
여성의식의 특성
여성의 숙명성(2)
권대근
문학박사,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모든 일이 그렇듯이 생명의 움직임에도 자아의 활동에도 자유의지를 구사함에도 긍정적 방향과 부정적 방향의 두 가지를 생각할 수 있다. 아침 햇볕과 같은 밝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은 희망의 방향이요, 긍정적인 방향이다. 저물어 가는 해를 바라보고 어둠을 미리 걱정하는 것은 실망에 찬 부정적인 방향이다. 인생에 있어 자신과 희망을 잃어버리는 것처럼 무서운 것은 없다. 인생을 부정적인 방향으로 생각하고 자신을 잃어버린다면 삶에 대한 의욕을 잃어버리고 앞으로 전진할 기력마저 빠지고 만다. 이것은 바로 자아를 버리는 일이고 인생 전체를 포기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여성수필가 정명숙은 여성이라는 위치를 남성 아래에 둠으로써, 생활의 갈등을 치유하고 있다.
결혼이란 일남일녀가 상호간에 평생토록 독점할 것을 목적, 내용으로 하여 체결하는 계약 행위다. 그 기간 중에 어느 한쪽이 이를 위배하면 그는 법률적으로 위약자요, 도의적으로는 배신자다. 따라서 그 계약은 무효가 되고 배상의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러나 이것으로 종말이라면 너무나 허무하지 않는가. 맹랑하고 안타깝지 않는가.
일이 벌어졌을 때 거기까지 이르지 않게 하는 역할이 부도이다라고 나는 생각한다. 부도는 곧 마멸도를 낮추는 윤활유요, 찰과음의 귀 따가운 금속성을 없애는 데 꼭 필요한 완화제가 된다는 말이다. 여권이 많이 신장되고 주부의 위치가 많이 향상된 것도 아니다. 능청스러운 엄살로 아내 앞에 머리를 못 드는 체하는 남편도 더러는 있다. 그렇다고 일대일, 남과 여가 동등하다고 착각하는 이가 있다면 그것은 한계요, 속단이다.(굵게 강조 : 인용자)
- 정명숙 「부도와 부도」 중에서 -
인간은 누구나 사고하는 존재다. 사색할 수 있다는 것은 수필을 쓸 수 있는 좋은 조건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색은 곧 창작의 요건이기 때문이다. 바람이 스치면 물결이 일렁이듯 인간도 어떤 사물과 접할 때, 물결이 일 듯 감정이 인다. 여기에 자기를 묻는다는 것, 어떤 사물에 취하는 것, 그것이 바로 수필적 자아다. 작가 정명숙은 노상 생각한다. ‘남자 치고 플레이보이 아닌 사람이 없고 플레이보이도 못되는 남성을 어떻게 남편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하는 점을 생각한다는 점이다. 그러면서 영어 사전에 나타난 플레이보이란 뜻이 ’명랑한 사나이, 인기 있는 사람‘으로 나와 있다는 데 자위한다. 남편을 플레이보이라 부르는 친구들의 말에 아무렇지도 않다는 게 작가의 이야기다. 분별력이 생겨서라고 하지만, ’20년 전에 이런 말을 들었더라면 아마 깜짝 놀랐을 것이다‘라는 문장으로 보아 남성 중심 사회의 부권을 어느 정도 인정해 주겠다는 이해가 깔려 있다.
여성 수필가들이 용서와 이해를 통해 일상의 행복에 젖어 들고 있는 것은 무료한 일상을 지나가는 시간의 관성이 아니라 창조의 존재로 끌어올리기 위한 의지의 확산으로 보여지기 때문에, 현실에 안주하길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런 삶의 태도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할 것이다. 인생의 깊이를 가진 사람들이 자신의 생에 대한 지혜를 통해 위기의 삶을 창조적으로 전환해야겠다고 피력하는 것이라든지 또는 튼튼한 삶을 더 튼튼히 다지겠다고 노력하는 모습은 페미니즘 관점을 벗어나서 생각하면 너무나도 아름다운 인간화의 길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인형의 집」의 로라는 아내이고 어머니이기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 자유롭게 살기를 원하며 애원하는 남편과 아이들을 뿌리치고 집과 가정을 뛰쳐나옴으로써 여성의 해방과 인권을 찾으려 했고,「보봐리 부인」의 에마 부인은 남성과 동등히 자유를 구가함으로써 여권의 신장을 꾀하려 했다. 앞서 고찰한 ‘여권 수호성’에서 보았듯이 오늘날 우리의 여권 운동가들도 남편의 수하와 가정의 속박에서 벗어나 동등한 위치나 그 이상의 자리에 서서 여성의 권익을 찾으려는 경향을 보였다.
그러나 보수성의 그늘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한 한국 수필계는 여권 확보와 여권 신장을 위해 부모나 남편을 자기 수하에 넣고 자기 주권을 마음대로 행사하려는 사람보다 전통적 주부의 자리로 돌아가 ‘현모양처’가 되겠다는 작가들이 더 많다. 여성수필가 오승희는 ‘이름 없는 여인이 되어’란 작품에서 생활인으로서 사색과 관조를 통해 행복을 느끼는 소박한 여인의 모습이 잘 드러내고 있다. 그는 이 글을 통해 여성의 운명적 현실을 체념적으로 수용한다. '머리엔 희끗희끗 백발을 이고 노안엔 굵은 주름살이 살아온 역사를 대변해 주고 있다. 희미한 시력 속에 선명히 돋보이는 것은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어 온 해로의 참뜻은 아닐까. 황혼의 저녁 노을을 바라보듯이 조금은 처연한 심회로 서로의 마음을 애무하며 흘러가는 물처럼 유장하고, 담담한 부부애의 실상을 보게 되리라. 참으로 멀고도 험한 길을 쓰러지지 않고 용케도 참고 견디어 왔다는 만족감에 스스로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백년 해로의 맹세가 헛되지 않음에 감사드릴테지'란 ‘부부애’의 한 구절은 객관화된 자기 표백이다. 이렇듯 넘어 온 부부고개의 마음샘에 고인 감사와 충족의 마음은 자아 관조를 통한 사색의 결과로써 여인의 운명을 수용하는 입장에 선 여인의 자세다. ‘이름 없는 여인이 되어’는 이런 운명관이 더 여실히 나타나 있다.
출세간의 길이란 이 세상에서 벗어나는 길이다. 그러나 세상을 벗어나는 길은 세상과 인연을 끊고 산중에 숨어 살아야만 얻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 같이 세상을 살아가는 속에 있는 길이다. 마음을 맑고 고요하게 가지면 세상에 살아도 세상을 벗어날 수 있다고 채근담은 일러주고 있다. 산중에 있어도 그 마음에 탐욕이 가득하면 번뇌에 고통을 받는 시정과 다를 바 없고, 그 마음에 물욕이 없으면 아무리 시정에 살아도 산중 선경에 있는 것과 다름이 없다고 하지 않았던가.
생각이 여기에 미치면 도연명이 이르던 무릉도원을 찾아 비밀스런 내 마음의 여로를 펼친다. 이름 없는 여인이 되어 어느 산촌 마을을 향하여 걸음을 재촉하는 것이다. 그러면 동구 밖 오리 길에 늘어선 미루나무의 행렬이 나를 손짓해 부른다. 이 미루나무의 행렬은 내 유년시절의 그리움과 꿈을 간직한 요람이기도 하다. 이 길에 들어서면 헛된 욕심도 허영도 모두 잊고, 천진무구한 동심으로 돌아가게 된다. 포근한 엄마 품을 찾아드는 아기처럼 기대감에 부풀어 마음이 둥둥 떠간다. 간간이 불어오는 바람에 반짝이는 나뭇잎의 흔들림은 대자연의 오묘한 법칙을 다시 한번 되새겨 보게 한다.
오리 길을 걸어 사립문 앞에 서면 초가지붕 위에 하얗게 핀 박꽃이 수줍은 여인의 자태로 나를 맞아준다. 들장미로 울타리를 엮은 앞마당엔 오이랑 호박넝쿨이 담장으로 기어오르고, 삽살개는 컹컹 주인을 반긴다. 뒤란엔 한가로이 모이를 쪼는 닭들과 함께 이름 모를 풀벌레들이 목청을 돋구어 한낮의 무료함을 달래고 있다. (굵게 강조 : 인용자)
- 오승희, 「이름 없는 여인이 되어」 중에서 -
‘이름 없는 여인이 되어’는 가족과 함께 도회를 벗어나 차를 타고 가면서, 왜 사느냐는 근본적은 물음을 던지면서 '마음을 맑고 고요하게 가지면 세상을 살아도 세상을 벗어 날 수 있다.'는 채근담의 구절을 음미하며 산촌 마을로 들어가 자연이 베푸는 정경 속에 사랑하는 사람과 도란도란 밤을 밝혀가는 여인의 운명적 현실의 수용 과정을 잘 그리고 있는 작품이다. '언젠가 한 번은 떠나갈 유한한 생명인데 숨 막히는 생활의 전쟁터에서 벗어나 자연에 묻혀 인간 본래의 모습으로 살아가리라'는 성찰의 결의는 '문명의 공해 속에 살망정 마음만은 한가한 전원의 오두막에 누여 두고 싶다.'는 표현에서 구도자적인 모습을 보인다. '몇 천 년을 살 것처럼 아등바등 해 봐야 인간의 삶은 불 반짝이는 일 순간이거니, 슬프고 슬픈 존재인 것을'하고 노래한 노천명의 시에 나오는 한 구절을 읊으며 이름 없는 여인이 되어 여왕보다 더욱 행복한 삶을 가족과의 일상사에서 찾고 있는 평범한 여인의 깨달음이 숙명적 여성성을 부각시킨다.
굵게 강조한 부분에서 볼 수 있는 물욕과 탐욕에의 경계는 경제권을 포기하는 것이다. 여성주의적 시각에서 여성이 주체적인 위치에 서려면 경제적 능력은 필수적이다. 여성수필가의 이런 자연 친화적, 현실 순응주의는 여성성의 강조다. 이 글은 자기 삶의 중간 결산적인 성격으로 쓰여진 글이다. 이 글에서 읽히는 것은 행 . 불행의 객관적 인식이다. 우선 그는 사람의 행복을 집착하지 않는 삶에의 다짐에서 찾는다. 이 같은 다짐은 한 마디로 살아보지 않고는 요량할 수 없는 자기 견실성의 확인인 것이다. 산다는 것은 어느 의미에서는 자신에의 집착을 엮어가는 일이다. 원근과 대소를 재면서 자신과 관련을 현재화시킬 때 집착에 이를 것은 뻔한 이치다. 인간의 일상적 삶은 여기에 그 거점을 정하고 방향을 터잡아가는 하나의 흐름이다. 이 작품에서 읽히는 또 하나는 자신의 존재적 인식을 교정하는 활달함이다. 인간이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음은 무아와 달관을 전제로 한 안심입명을 의미한다. 작가는 행과 불행은 물론, 생과 사의 갈림길, 인연의 호와 악 등까지 부분이건 전체이건 집착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이 같은 인식에 이른 것은 제목에서 보여주듯 이름 없는 여인이 되겠다는 특유의 조심스러움에 귀착된다고 하겠다.
이 작품의 결미 부분의 '동구 밖까지 마중 나온 다정한 내 가족과 함께 산 속 오두막집에 닿으면 나는 이름 없는 여인이 되어 여왕보다 더욱 행복한 삶을 누리게 된다'는 말은 전통적 가족 관계 속에서 보면 여성으로서 가장 의미 있는 내용이다. 왜냐하면 현재의 삶에 만족하며 산다는 일은 그 무엇에 견줄 수 없는 아름다운 일이기 때문이다. 여성의 일상적 행복추구는 유한적 존재로서의 체념일 수 있고 일상의 모든 것에서 탐욕을 제거한 홀가분한 자기 노출의 모습일 수도 있다. 그는 애써 아픔을 표현하고 그 안에서 조작된 슬픔에 괴로워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모습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정한 내 가족과 함께 자신의 삶이 만족스럽게 전개되고 그만한 부피와 무게의 의미와 가치를 가질 수 있기를 기대하는 것은 작가로서의 건강한 모습을 그대로 드러낸 것으로 볼 수 있다. 인용 예문 안의 ‘순진무구한 동심’에 빠지거나 그가 ‘대자연의 오묘한 범칙’을 되새겨 보는 것은 여성으로서 어쩔 수 없는 운명을 순응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왜냐하면 자연의 법칙은 생물학적인 결정론적 입장으로서 남녀의 각자 정해진 성역할을 규정하는 말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