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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최일환 목사(장안중앙교회)설교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최일환목사
심방을 통해 주시는 복
눅19:1~10
2014년 2월 2일 장안중앙교회 주일 낮예배 최일환 목사 설교
1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 지나가시더라
2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3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4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5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쳐다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6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7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이르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9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10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설교:
몇 년 전 어느 목회자 세미나에 참석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어느 강사님이 자기 교회는 ‘심방을 안 하는 교회’라고 자랑하셨습니다. 현대 사회는 “심방이 필요 없는 시대”라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그분 주장은 첫째는 현대인의 개인 프라이버시를 존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현대사회는 가정이 다양한 형태라는 것이죠. 그런 개인 사생활을 들어내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가정주부들도 직장생활을 하기에 민폐를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교회는 일 년 내내 심방을 안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교회는 부흥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 목사님의 주장에 “참 좋겠다”고 하며 그냥 씁쓸히 웃으면서 지났습니다. 분명한 것은 심방이 없는 목회를 하는 그런 교회는 건강한 교회라고 할 수는 없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한 15년 전에 우리 교회 어느 성도 가정에 제가 심방을 갔습니다. 그런데 예배(禮拜)상에 헌금봉투가 있었습니다. 당연히 ‘심방감사헌금’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 봉투를 자세히 보니 겉에 “심방감사헌금”이 아닌 “신방감사헌금”이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이 “잘못 알고 있구나” 해서 제가 ‘신방’을 ‘심방’으로 슬쩍 고쳐서 교회 헌금에 올렸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그분이 편찮으셔서 그 가정에 심방 갈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도 또 ‘신방’감사헌금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없을 때 조용히 가르쳐 드렸습니다. “신방(神訪)이 아니고 심방(尋訪)입니다.”
그랬더니 자기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자기는 목사님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주러 오시니 하나님이 방문하는 것 같은 마음으로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방(神訪)’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그 말을 듣고 한동안 할 말을 잃고 멍하게 생각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 심방(尋訪)이 뭡니까? 주님의 종이 성도의 가정을 찾아가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바르게 인도하고 축복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월이 변하여 다들 바쁘게 사는 세상이 되다보니 ‘심방’을 귀찮고 번거로운 것으로 여기는 분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그러나 그래도 ‘심방’이 없다면 그 성도는 온전한 신앙생활하기가 어렵습니다. 목회자와 교제도 없고 성도와의 교제도 이루어지기 어려우니 신앙생활이 온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교회를 세우신 목적 중에 하나는 교제입니다. 그러나 교제가 단절되면 자기를 들어내질 않게 됩니다. 결국 어려운 문제가 생겼을 때 혼자서 해결할 방법을 모르게 됩니다. 그래서 혼자 전전긍긍하다가 잘못된 선택을 하게 되고 넘어지고 쓰러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삭개오(Zacchaeus)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삭개오’라는 이름의 뜻은 ‘순결하다’ ‘의롭다’ 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의 부모는 그가 순결하고 의롭게 살라고 그렇게 이름을 지어 주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는 세리였습니다. 세무 공무원이었습니다. 당시는 로마가 이스라엘을 식민통치하던 시대이기에 세무 공무원은 로마의 앞잡이, 매국노라고 욕을 먹던 시대였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 사람들은 세리는 사람 취급을 하지 않았고 짐승취급하며 악독한 죄인으로 취급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과 식탁을 같이 하거나 그들 집에 들어가는 것은 죄를 짓는 것이고 그런 사람들은 왕따를 당하는 시대였습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은 달랐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그들도 사람으로 대해주셨습니다. 그들도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람으로 대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 중에 마태는 세리였는데 그가 마태복음을 기록하는 제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도 사람을 대할 때 그의 직업이나 출신, 또는 외모나 학력으로 차별하고 평가하는 것은 무서운 죄인 것을 깨닫기를 축원합니다.
우리 주님은 그런 세리나 창녀나 고아를 만나면 그 집에 심방을 갔습니다. 그리고는 그들 가정에서 복음을 전하고 그들을 구원하시는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저는 오늘 이 말씀을 갖고 심방을 통해 주시는 복에 대해 생각하며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1. 누가 심방을 받을 수 있는가요?
주님은 삭개오 집에 들어가셨습니다. 삭개오는 우리 창조주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심방을 받은 것입니다. 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요?
당대에 유대인들 중에 예수님의 심방을 받은 사람은 많지 않았을 것입니다.
심지어 제자들 중에도 예수님의 심방을 받지 못한 제자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죄인 취급당하는 세리, 사람들에게 왕따 당하는 사람이 예수님의 심방을 받은 것입니다.
삭개오는 어떻게 예수님의 심방을 받았을까요?
1) 예수님에 대해 관심이 많았던 사람입니다.
그는 교통의 도시인 여리고 시의 세리장, 즉 세무서 서장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그 도시를 거쳐 가는 사람들의 입에서 들리는 ‘예수’라는 분에 소문과 소식을 많이 듣고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라는 분이 병자를 고쳤데.” “말도 말아 그분이 문등병자도 고쳤데, 어디 그뿐인가? 앉은뱅이도 고치고 중풍병자도 고치셨단다.” 심지어는 “떡5개와 물고기 2마리로 5천명을 먹였다”는 소식도 들렸습니다. 그러니 그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또 들리는 다른 소식은 그분의 제자 12명중 ‘마태’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는 세리 출신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세리인 삭개오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세상에 어떤 분이기에 죄인 취급당하는 세리를 제자로 삼는가?”
그러니 예수님에 대한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만나보고 싶었습니다. 관심이 생기니 한번 보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심방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모함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싶은 강렬한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기회가 찾아오는 것입니다. 오려면 오고 말려면 말고 ……. 이래서는 은혜도 없고 하나님의 종이 와 봐도 별것을 누리지 못했을 것입니다.
2) 결단과 열정이 있던 사람입니다.
예수님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던 어느 날 소식이 들려옵니다.
‘나사렛 출신 예수’라는 분이 여리고를 통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그는 즉시 일손을 놓고 길가로 나왔습니다. 그런데 길거리에는 사람들이 워낙 많았습니다. 그러니 키가 작은 삭개오는 예수님의 얼굴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환경이 예수님을 만나보고 싶은 강한 열망을 꺾을 수 없었습니다.
그에게는 예수님을 만나고 싶은 강한 열망이 있었기에 쉽게 포기하고 돌아설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지나갈 것으로 예상되는 길을 앞서 가서 돌 무화과 나무위로 올라갔습니다. 그렇게 만들었던 것은 그의 결단과 열망 때문이라 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도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을 온전히 만나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사모함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을 만나고 싶은 강한 열망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주님을 만나고 그래야만 우리 인생의 복된 사건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3) 어려운 환경을 극복해야 합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나려 할 때 몇 가지 어려운 환경이 있었습니다.
세리라는 직업적인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는 여리고의 세리장이었습니다. 그러니 그런 고위직에 사람이 당대 유대인들이 인정해 주지 않는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이 어려운 환경이었습니다.
그런데다가 그는 부자였습니다. 그 부는 어떻게 만들었을까요?
열심히 일해서 벌었을 수도 있겠으나 사람들은 세리로서 세금포탈과 착취로 벌었다고 오해받을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나 같은 세리를 어떻게 대해 줄까 하는 걱정이 있었습니다.
그런데다 그는 키가 작았습니다. 키가 큰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지만 키 작은 사람은 키 이야기를 하면 열받는답니다. 제가 아는 분은 아마도 1미터 50정도 되는 것 같은데 별명이 ‘짜리몽땅’이었답니다. 그래서 상당히 힘들답니다.
그러니 삭개오도 키도 작은데 몰려나온 사람들이 너무도 많기 때문에 주님을 만나기가 더욱 어려웠습니다. 그러니 니고데모처럼 밤에 몰래 찾아와도 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런 환경을 극복할 만한 그 무엇인가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뭘까요? 그것은 소문을 통해 들었던 복음이고 그 복음을 통한 믿음인 것입니다. 그래서 가슴 깊은 곳에서 그분을 만나면 내 인생이 변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어찌 알 수 있냐고요?
오늘 그는 주님을 자기 집으로 모시고는 예수님을 “주여” 라고 부릅니다.
아무나 그렇게 부르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가롯유다도 ‘랍비’라고 하던지 ‘선생님’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삭개오는 그는 ‘주님’이라 부릅니다. 그러니 그는 자기가 갖고 있는 장애물을 뛰어 넘었던 것입니다.
8절을 보세요.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그는 자기의 죄를 회개합니다. 자기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겠다고 합니다. 그러고 누구 것을 속여 빼앗은 것이 있다면 4배를 갚겠다고 약속합니다. 이것은 대단한 결단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렇게 예수님이 삭개오 집에 찾아오는 것이 심방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어떻게 심방하셨나요?
2. 주님의 심방자세는 어떠했나요?
주님은 오늘 본문 10절에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오늘 본문에 가장 중요한 핵심 요절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10절을 다 같이 보세요.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심방은 그저 친교나 하려고 가는 것이 아닙니다. 할 일이 없어서 심방하는 것도 아닙니다.
심방의 목적은 주님을 올바로 만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복을 그 가정과 사업장에 누리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이 자기 사명을 바르게 깨닫고 살도록 길을 제시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아멘?
이런 심방을 하신 주님의 자세를 살펴보세요. 아주 중요한 것이 몇 가지를 살펴 볼 수 있습니다.
1) 죄인에게 친히 찾아와 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여리고로 들어가 지나가셨습니다. 그런데 그냥 거쳐야 하는 길이기에 들어간 것이 아닙니다. 죄 가운데 있는 삭개오를 만나려는 목적을 갖고 간 것입니다. 그래서 잃어버린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려 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심방은 하나님이 직접 찾아 와주시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지나가는 길에 들리는 것 같이 보이나 그것은 우리 시각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택한 백성을 구원하려고 목적을 갖고 찾아오신 것입니다. 아멘?
그러기에 여러분도 하나님의 종이 여러분 가정과 사업장을 심방하려 할 때 주님이 직접 찾아와 주시는 것으로 믿고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2) 내 이름을 알고 불러 주십니다.
삭개오는 이 사건 이전에 예수님을 만난 경험이 없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나무 위를 올라가 내려다보는 삭개오를 향해 주님은 그 나무 아래서 그의 이름을 불러 줍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제가 그 장면을 상상하면 삭개오는 그 나무에서 떨어질 뻔 했을지도 모릅니다. 왜냐면 주님이 자기 이름을 부르는 순간에 기절할 뻔 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처음만나는 분이 어떻게 내 이름을 아는 것일까? 기절초풍할 일이지요.
저는 목사로서 나이가 들면서 점점 건망증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성도들 이름을 종종 잊어버립니다. 그래서 새벽에 성도들 위해 기도하다가 이름이 생각나지 않아 기도가 막히면 핸드폰에 전화번호부를 뒤적여서 찾아 낼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은 여러분의 이름을 다 아시는 분이십니다. 믿습니까?
여러분 주변 사람은 몰라주어도 우리 주님은 우리 이름을 알아주십니다. 그러니 주님이 기억하고 계시는 그 이름을 부끄러워하지 마시기를 축원합니다. 개명도 함부로 하지 마시길 축원합니다.
3) 삭개오 집에 들어오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이름만 불러 준 것이 아닙니다. 한 술 더 떠서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십니다. 그러니 어찌 놀라지 않았겠습니까? 당대에 유대인이 세리 집에 들어간다는 것은 상상이 안 되는 일입니다.
그래서 7절에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이르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했던 것입니다.
당시 사람들의 시각으로는 아주 파격적인 행동을 하신 것입니다.
그래도 삭개오는 좋았습니다. 그래서 6절에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했습니다.
한마디로 신나서 죽을 지경이었을 것입니다. 이럴 때 표현을 뭐라 할까요? 아마도 그는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인도하면서 어린 아이처럼 팔딱 팔딱 뛸 정도로 좋아 했을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주님이 여러분의 집에 들어오신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기적입니다. 하나님이 세워주신 목사가 찾아가지만 주님의 종이고 사자입니다. 그러니 그것은 곧 주님이 찾아 가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회자의 심방은 하나님이 내 생활 속에 들어오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성경 곳곳에서 사람의 모습으로 인간의 삶속에 찾아 오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천사모습으로 찾아왔습니다. 그는 문 앞에 앉아 있다가 하나님과 천사일행의 심방을 받습니다. 그는 그들이 누군지도 모르고 그들을 지극 정성으로 접대합니다. 그 결과가 아들을 얻겠다는 약속을 받게 됩니다.
그뿐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도 이 심방을 잘 받아 살아난 사람입니다. 그리고 야곱에게도 얍복 강변에서 찾아왔습니다. 이사야 선지자에게도 찾아왔고 신약시대에 감옥에 있던 베드로에게도 찾아왔습니다. 뿐만 아니라 풍랑 당한 바울에게도 찾아와 위로하셨습니다.
꿈속에서도, 환상 속에서도, 그리고 천사 모양으로도 찾아 오셨습니다.
그러니 심방을 부담스럽거나 귀찮은 것으로 여기지 마시길 축원합니다.
그것은 일생에 가장 큰 복이고 기회인 것입니다. 그러니 삭개오처럼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반겨주어야 할 것입니다.
4) 자발적으로 회개토록 인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삭개오 집에 들어가셔서 부흥회를 하신 것도 아닙니다. 오랜 시간 설교를 하신 것 같지도 않습니다.
그저 그 집에 들어가 교제하며 식사를 대접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삭개오가 스스로 자원하여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겠다고 선언합니다. 그리고 남의 것을 속여 빼앗은 것을 4배나 갚겠다고 약속합니다. 여러분 오늘날 부자는 얼마나 가져야 부자라 할까요? 한 50억은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대단한 결단입니다. 그리고 남의 것을 속여 빼앗았으면 4배를 갚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회개가 강압적이 아닙니다. 자발적인 회개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그 이유는 주님을 온전히 만남으로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은혜를 받으면, 그래서 주님과 온전한 교제가 이루어지면, 회개는 자발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두움은 빛이 임하면 자동적으로 사라지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3. 심방 받은 결과는 무엇인가요?
예수님의 삭개오 심방은 구원을 얻고 복을 부어 주신 것입니다.
심방의 가장 큰 열매는 택함 받은 백성이 구원을 확신하게 되고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바른 삶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심방의 복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삭개오 입장에서는 이런 선언보다 더 큰 복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늘 사람들에게 욕을 먹고 살던 사람입니다. 부자기에 돈은 넉넉했으나 돈으로 해결되지 않는 것이 많았음을 알았을 것입니다. 돈으로 해결되지 않는 그것, 그것이 뭘까요?
그것은 사람대우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사람들이 대우해 주고 인격적인 교제를 해주는 그것이 더 좋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찾아오시더니 그 놀라운 복이 그 집에 선포되는 것입니다.
9절을 보세요.
9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할렐루야!
이것이 심방의 결과입니다. 하나님의 잃은 양들이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신분을 회복하고 구원받은 백성으로서 바르게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가슴 깊은 곳에 있던 상처가 치유되고 그를 괴롭혔던 죄에 대한 무거운 부담을 다 벗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부러울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는 자기를 찾아와 주신 주님에 은혜를 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주님이 원하는 잃은 양을 찾는 사역에 동참했을 것 같습니다.
돈을 벌고 부자로 사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었던 그에게 인생에 대한 가치관이 바뀐 것입니다. 그의 변화된 가치관, 그리고 그 믿음이 그를 새롭게 했을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심방은 어떻습니까? 저는 이번 주 성도가 경영하는 사업장을 심방하려 합니다. 제 혼자 일방적으로 심방하지 않고 원하는 사업장에 찾아갈 합니다.
오늘날 많은 가정이 심방을 부담스러워 합니다. 사람들이 바빠졌습니다. 그러다 보니 심방을 받기가 어려워진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도 주께서 감동을 주셔서 심방을 하려 할 때 받으시는 여러분 되길 축원합니다.
솔직히 안 왔으면 하는 분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니 그런 가정에 억지로 가서 드리는 예배가 은혜가 되겠습니까? 그러나 이제 오늘 말씀 속에서 우리는 자세를 바꾸어야 합니다.
심방과 예배를 주님을 맞이하듯이 기쁨으로 맞이하면 주님은 그 심방을 통해 여러분 개인과 가정 그리고 직장에 놀라운 복을 베풀어 주실 줄 믿으시기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http://cafe.daum.net/ilhwanserm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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