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20일 연중 제15주간 토요일
<예수님께서는 예언을 이루시려고 당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셨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14-21 그때에 14 바리사이들은 나가서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를 하였다. 15 예수님께서는 그 일을 아시고 그곳에서 물러가셨다. 그런데도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랐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모두 고쳐 주시면서도, 16 당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셨다. 17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18 “보아라, 내가 선택한 나의 종, 내가 사랑하는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내가 그에게 내 영을 주리니 그는 민족들에게 올바름을 선포하리라. 19 그는 다투지도 않고 소리치지도 않으리니 거리에서 아무도 그의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20 그는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니 21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
아름다운 공동체
사람들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서 평생을 보냅니다.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는 사람은 참으로 불행합니다. 처음에 복음을 묵상하면서 개인적인 묵상을 카페에 올릴 때 사람들은 아주 간단하게 생각해서 며칠 계속할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내가 좋으니까 이 일을 계속 하는 것처럼 사람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꿈꾸고 그 일에 매달려 사는 것이 아름답다고까지 할 수 있습니다. 나는 나이가 들어가면서 아주 큰 꿈을 야무지게 꾸고 있답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런 꿈을 꾸고 있다가도 나이가 들면 그 꿈을 접을 만한데 나는 나이가 들면서 그 꿈을 점점 더 크게 꾸고 있으니 이상한 일입니다. 오늘은 복음을 묵상하다가 사람들이 실소(失笑)하라고 내가 꿈꾸고 있는 것을 얘기하고 싶습니다.
나는 참으로 복잡하게 세상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많은 일을 하면서도 그 일에 언제나 몰두하고 매달리는 성격입니다. 그래서 꿈을 꾸고 그 꿈에 매달려서 인생을 허비하기도 하였습니다. 50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아주 조용한 산골에 작은 마을을 만드는 것을 꿈꾸고 있습니다. 그 마을은 개인 피정의 마을입니다. 뜻있는 사람들이 성지 주변에 마을을 만드는 것으로 사람들이 기도하고 피정할 수 있는 작은 집을 각자가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간이 될 때는 그곳에 와서 기도하고, 묵상하고, 피정도 하면서 복잡한 속에서 떠나서 영혼과 육신을 맑게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집에 피정을 하지 않을 때는 다른 사람에게 빌려 주기도 하고 공동체가 피정 할 수 있도록 빌려 줄 수 있는 마을을 만드는 것입니다. 은퇴하신 신부님들의 숙소도 있어서 언제나 지도하실 수도 있고, 피정을 인도하시는 신부님이나 수사님들, 평신도들이 오셔서 지도하실 때에는 공동체도 같이 참여할 수 있는 피정의 집을 운영하는 것입니다. 이제 점점 복잡한 세상에서 무언가 몰두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시설이라고 생각되었고, 나도 그런 곳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나이가 들어도 아직도 어린아이처럼 그렇게 야무지게 꿈을 꾸고 있답니다.
그런데 그런 내게 10여 년 전 어떤 사람이 나에게 엄청나게 큰일을 부탁한다는 것입니다. 상상만 해도 가슴 설레는 일을 해달라는 것입니다. 나도 평소에 그 일을 꿈꾸고 살았었기 때문에 아주 귀가 솔깃하였습니다. 약 10만평에 가까운 곳에 무엇을 하면 좋을 것인지 물으면서 나에게 계획을 세울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획의 개요를 설명하였습니다. 그는 그 계획을 아주 좋아하였고, 곧 자금을 모집해서 그 일을 성사시킬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대략 한 달이 다 되도록 소식이 없더니 자금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있다고 뒤로 꽁무니를 빼는 것입니다. 나는 완전히 바보가 된 느낌이었습니다.
도청도설(道聽塗說)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논어의 양화편에 있는 말입니다.
“도청이도설덕지기야” (道聽而塗說德之棄也)
<길에서 듣고 길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덕을 버리는 짓이다.>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또한 천박한 사람은 좋은 말을 들어도 그것을 깊이 자기의 것으로 간직하지 못한다는 데도 비유됩니다.
거리에서 자동차 소리,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가 범벅이 되어 시끄러우면 많은 것을 듣지만 마음에 새기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것과 같습니다. 전혀 가능성이 없는 말을 진실처럼 위장해서 말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내가 세상의 욕심에 눈이 어두워 소인이 된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순자(荀子)도 권학편에서 “소인의 학문은 귀로 들어와 바로 입으로 빠지며, 조금도 마음에 머무르게 하지 않는다. 귀와 입의 차이는 약 4치(4寸: 12cm)밖에 되지 않지만 이 정도의 거리를 지나게 될 뿐인데 어찌 일곱 자(7尺)의 몸을 아름답게 할 것인가? 옛날에는 학문을 하는 사람은 자기를 연마하기 위해서 노력했으나 지금 사람들은 배운 것을 곧 남에게 알려주는데 급급해서 입으로만 떠들어 댈 뿐 자기 것으로 만들어 실행하겠다는 생각이 없다. 군자의 학문은 자기 자신을 아름답게 하는데 반해 소인들의 학문은 인간을 못 쓰게 만들어 버린다.”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대로 진리를 선포하십니다. “그는 다투지도 않고 소리치지도 않으리니, 거리에서 아무도 그의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그는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니,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 주님의 말씀은 거리에서 그냥 소리치는 지나칠 수 있는 말씀이 아니라 우리를 아름답게 만들며, 우리가 좌절하고 실패를 하거나 기가 죽어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때에도 우리를 잘라 버리지 않으시고, 세상을 더럽히는 죄의 그을음을 내 뿜어서 당신이 시커멓게 더럽혀 지셔도 진리도 우리를 아주 귀하게 만들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희망과 꿈을 이루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다만 우리가 올바름으로 승리를 이끌어 낼 때까지 아무 조건 없이 기다려 주시고, 아무 조건 없이 우리를 닦아 주시며 우리를 아름답게 만들어 주신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