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0년대🌺 |
✿1882년 한국 독일 수호통상조약 체결
조독수호통상조약
쇄국정책으로 일관해온 조선 정부가 1880년대에 들어와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선두로 서양국가들과 맺은 조약들의 하나이다. 이 조약은 조선정부와 독일정부가 처한 특수한 사정으로 두 차례에 걸쳐 수정, 조인되는 번복을 겪었다. 1882년에 「조미조약」 · 「조영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자 북경주재 독일공사 브란트(Brandt, M. von)의 노력으로 1882년 6월 30일에 인천에서 「조독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었다.
조선 측은 조영하(趙寧夏), 독일 측은 브란트가 서명한 전14조의 이 조약은 대체로 「조영조약」과 비슷한 내용이었다. 그러나 영국과 독일 정부는 문구의 애매성과 관세율을 구실로 비준을 거부하다가 재조약을 교섭해 왔다. 일본 요코하마(橫濱) 주재 총영사 차페(Zappe, E.)가 1883년 10월 27일에 서울에 와서 새 조약안을 제출하였다.
조선 정부는 독판교섭통상사무 민영목(閔泳穆)을 전권대신으로 임명해 협상하게 하였다. 이리하여 처음으로 중국의 알선을 배제하고 직접 협상에 임해 그해 11월 26일에 조인되었다. 같은 날 「조영조약」도 체결되었다. | |
🌱1900년대🌱 | |
🌳05년 아인슈타인, 특수상대성원리 완성
1905년 6월 30일 스위스 베른에서 약관 26세의 특허국 심사관이었던 알버트 아인슈타인이 물리학 분야에서 20세기 최대의 업적으로 된 논문을 완성했다. 이른바 ‘특수상대성이론’에 관한 논문이었다.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취업을 할 수 없었던 아인슈타인은 친구의 소개로 특허청에서 근무하면서 연이어 논문을 발표했다. | |
🌳10년 통감부, 경찰관서 관제 공포 : 헌병 경찰제 실시. 🌳23년 동아일보사, 최초의 여성 공개 스포츠인 제1회 여자정구대회 개최 🌳28년 구월산의 단군 사당이 강제 철거됨. 🌳34년 학생계몽대원 2400명의 동원식개최.-동아일보 🌳39년 평양 청암리에서 고구려 절터 발굴 | |
🌳48년 트랜지스터 개발 발표
트랜지스터 개발의 주역인 존 바딘(왼쪽), 윌리엄 쇼클리(가운데), 월터 브래튼(오른쪽)
1948년 6월 30일, 20세기 기술혁명의 단초가 된 트랜지스터가 세상에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 윌리엄 쇼클리(William Bradford Shockley Jr., 1910. 2. 13. – 1989. 8. 12.), 존 바딘(John Bardeen, 1908~1991), 월터 브래튼(Walter Houser Brattain, 1902~1987) 등 3명의 연구원이 6개월 전에 이미 개발을 끝냈지만 특허획득을 위해 함구해오던 미국 벨 연구소가 이날 그 실체를 공개한 것이다. | |
🌳49년 주한미군 철수 완료 🌳50년 트루먼 미대통령, 맥아더 원수에게 지상군의 한국 출동 등 지시 | |
🌳51년 리지웨이 중장, 원산만 덴마크 병원선 함상 에서의 휴전회담 제의 공산측, 회담장소로 개성을 제의 1951년 6월 30일, 리지웨이, 원산만 덴마크 함상에서의 휴전회담 제의 1년 이상 계속되어 오던 한국전쟁이 1951년 6월 27일 마리크 주 유엔 소련대사의 정전회담 제의로 휴정협상에 대한 논의가 공식화됐다. 한국전에 참전한 16개국도 소련의 제의에 동의하자 이틀 뒤인 6월 29일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맥아더의 후임인 리지웨이(Matthew Bunker Ridgway, 1895년 3월 3일 ~ 1993년 7월 26일) 유엔군사령관에게 휴전교섭을 지시했다. 다음날인 30일 리지웨이는 공산군측에 원산 앞바다의 덴마크 군함에서 휴전협상을 시작하자고 제의하자 북한의 김일성과 중국의용군사령관 팽덕회는 7월 1일 회담장소를 개성으로 하자고 수정 제의했다. 이에 따라 휴전예비회담이 7월 8일, 본 회담이 7월 10일부터 개성에서 개최됐다. 회담장소는 약 3개월 뒤인 10월 7일 안전상의 이유로 판문점으로 변경됐다.
1951년 7월 10일, 휴전회담을 위해 개성으로 출발하기 전 헬리콥터 앞에서 기념 촬영을 한 유엔 측 대표들, 왼쪽부터 버크 제독, 크레이지 공군 소장, 백선엽 소장, 조이 수석대표(해군 중장)와 대표들을 전송하기 위해 나온 유엔군 사령관 리지웨이 대장, 호디스 육군 소장.
1953년 7월 27일까지 판문점에서 2년 2개월 동안 북한을 대변했던 사람들이다. 왼쪽부터 중국 대표인 세팡(解方) 소장, 덩화(鄧華) 상장, 가운데가 북한대표인 남일 대장, 오른쪽이 이상조 소장, 그 오른쪽은 장평산 대좌. 남일장군(가운데)은 70년대 초반 김정일 권력세습을 반대하다 숙청돼 사망했고, 이상조 소장(남일장군 바로 우측)은 1956년 소련대사로 부임후 사실상 망명했다. 제일우측의 장평산 1958년 구테타음모를 뒤집어 쓰고 김일성에 의해 사형당했다.
1951년 7월 10일 지프에 백기를 달고 회담장에 들어서는 유엔군 측 대표단. 백기를 다는 것이 합의사항이었지만 공산군 측의 유엔군 측을 항복사절로 선전했다.
휴전회담 첫 날의 모습. | |
🌳52년 민주자결단, 국회의사당 포위하고 80여 의원 연금 🌳61년 주한UN군 사령관에 멜로이 대장 취임 🌳61년 조진만, 제3대 대법원장에 취임 🌳61년 정부, 아시아생산성 기구에 가입 🌳71년 유엔방송국(VUNC) 21년만에 폐쇄 🌳72년 경주에서 국내 최초 신라석탑 양식의 마애 3층 석탑 발견 🌳75년 국방부, 전투예비군부대 창설 🌳78년 현대아파트 특혜분양-고위인사 적발. 7월14일 259명에 대한 수사전모 발표, 공직자 26명 파면ㆍ해직 🌳78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설립, 초대원장에 이선근 🌳78년 경북경주 황룡사터에서 국보급 유물 250여점 발굴 | |
🌳80년 한강 성산대교(길이 1410m, 한강12번째 다리) 준공·개통
성산대교 전경.
한강의 12번째 다리인 성산대교가 1980년 6월 30일 준공, 개통됐다. 마포구 망원동과 강건너 영등포구 양평동을 잇는 이 다리는 길이 1410m, 폭 21.6m의 6차선으로 양쪽에 보도(2.7m씩)를 갖추었다. 다리의 색깔은 안쪽은 회색, 바깥쪽은 주황색이다.
서울시가 1977년 4월에 착공, 2백57억9천만원을 들여 3년3개월 만에 완공한 이 다리는 1979년 개통한 성수대교에 이어 두 번째로 철재트러스 공법을 연결, 조립한 것이어서 교각사이가 120m씩으로 다른 한강다리보다 2배나 길다. 때문에 다리모습이 날렵해 보이는데다 교각과 교각사이에 반달형 아치를 세워 곡선미가 가미되어 있다.
이 다리의 개통으로 중앙청∼사직터널∼금화터널∼연세대앞∼사천고가교∼성산대교∼경인고속도로 입구를 잇는 11.7km의 성산대로건설이 마무리됐다. 다리 양쪽입구에는 각각 입체교차로가 설치돼 차량이 각방향으로 논스톱으로 달리게 돼 있어, 김포공항을 오가는 차량들의 경우 시내중심까지의 주행시간이 종전40분대에서 20분대로 절반이나 단축됐다. | |
🌳82년 결핵 예방접종 주사를 맞은 서울 경희 국교생 50명 결핵에 감염 🌳83년 여천 LPG기지 준공(저장용량 15만2000t으로 단일 기지로는 세계 최대규모) | |
🌳83년 이산 가족 찾기' 생방송- 6, 25 전쟁 33주년 기념으로 KBS가 11월 4일까지 136일 동안
1983년 6월 30일... KBS `이산가족찾기` 생방송 시작
그해 여름 전국을 울음바다로 만들었던 KBS의 `특별생방송-이산가족을 찾습니다`가 1983년 6월 30일부터 방송이 시작돼 장장 138일 동안이나 이어졌다.
KBS 특별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의 생방송 장면.
뒤쪽으로 이 프로의 진행자 김동건 아나운서가 보인다. 처음 방송할 때 만해도 90분 길이 단발성 특집이었다. 이산가족 150명을 초청한 방청석에 1000명이 넘게 몰려왔다. 방송도중 방송사 업무가 마비될 정도로 전화가 쏟아졌다.
진행을 맡은 유철종 이미연씨는 이날 새벽 3시까지 연장방송을 해야 했다. 방송은 연장에 연장을 거듭 결국 138일간 계속됐다. 진행자로 김동건 신은경 황인용 강부자씨 등이 합세했고 잠도 잊은 채 마이크를 잡았다.
방송과는 별도로 여의도 KBS 본관 벽과 그 앞 광장에는 이산가족을 애타게 찾는 이들이 붙인 벽보가 어지러이 등장했다. 한국전쟁후 생사를 모른채 33년을 애태우던 남북이산가족들의 가슴에 불을 지핀 방송이벤트였다.
방송중 10만명이 넘는 이산가족이 참여해 애탄 절규를 했고 1만189가족이 상봉의 기쁨을 맛보았다. 독일의 공영 ZDF를 비롯, 일본 NHK, 미국 CBS 등 해외 미디어 취재도 뜨거웠다. | |
🌳84년 일본 정부, 한.일간 말썽을 빚은 중고교 역사 교과서의 8개항목을 추가로 시정했다고 한국 정부에 통보 🌳84년 여의도 만남의 광장 문닫아-1년만에, 1만719명 이산가족 상봉 🌳85년 경기도 가평군 청평호에서 정원초과 유람선 침몰. 9명 익사 🌳86년 경찰, 자민투와 민민투 주동자 이종주 (서울대) 군 등 6명 검거, 39명 긴급수배 🌳87년 국어연구소, 한글맞춤법 및 표준어규정 개정안 확정 🌳88년 민청련회장 김근태씨 등 시국사범 구속자 46명 가석방 🌳88년 이라크 기 , 대림이 건설중인 이란의 캉간 가스 정유소 폭격. 한국인 근로자 13명 사망, 45명 중경상 🌳88년 광주사태 사상자 추가신고 마감, 사망 10명 등 202명 추가신고 🌳89년 북한 중앙방송, 전대협대표 임수경이 세계청년 학생축전에 참가하기 위해 평양에 도착했다고 보도 | |
🌳89년 전대협 대표 임수경 방북
북한은 1989년 7월 1일로 예정된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을 개최하면서 조선학생위원회 명의로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이하 '전대협')에 초청장을 보냈다. 이 초청장은 조선학생위원회에서 조선(북한)적십자사로 그리고 다시 대한적십자사와 통일원(현 통일부)를 거쳐 전대협의 경로로 전달되고 전대협은 축전 참가를 준비한다.
당시 공산권과의 대대적인 교류와 조건 없는 남북대화를 주장한 노태우 대통령의 7.7 선언(1988)으로 남북대화의 분위기는 고조되었다. 더구나 한정적이지만 민주화의 성공과 맞물린 자유로운 분위기와 여소야대 상황에서 정부도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고 나섰기 때문에 이런 것도 가능했다. 그러나 문익환 목사의 밀입북 사건이 벌어지면서 삽시간에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문익환 목사가 몰래 입북해서 김일성과 포옹까지 하는 상황에서 공안정국이 조성되었고, 1989년 6월 6일에는 문교부 장관이 전대협의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 참가를 불허한다.
문익환 목사와 김일성
그러나 전대협은 밀입북 하기를 결정한다. 임수경은 일본-서독-동독을 통한 우회로를 선택했다. 6월 21일 임수경은 도쿄로 출발해 일본에서 7일간 머무른 뒤, 서베를린으로 갔다. 이후 동베를린을 거쳐 모스크바로 간 다음에 평양으로 출발, 9일 만인 6월 30일 오후 1시 30분에 평양에 도착했다. 당시에 남한 인사의 방문으로 즐거워하던 북한 입장에서도 임수경의 방북은 굉장히 신선하면서도 충격이었다.
나이 지긋한 남자가 아니라 평범한 여대성의 모습에 관심이 집중된다. 살벌한 사회통제가 당연시 되는 이북에서 임수경이 나타나면 동원하지도 않은 지역 주민들까지 자발적으로 몰려들면서 인근 공장이 모조리 마비되는 상황이었다고 한다.
북한은 임수경을 선전의 도구로 활용하려고 하였지만 임수경은 북한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임수경의 돌출행동은 곳곳에서 튀어나왔다. 처음에 와서 한 말이 "저는 북한 체제에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북한이 좋아서 온 게 아닙니다." 였고 사람들만 모이면 원고 없이 즉석 연설을 하는 등 통제가 되지 않았다.
거기다 북한에서는 가보급인 김정일 하사품을 그냥 두고 나오고, 북한의 기술력을 보여주기 위해서 자신만만하게 준비한 선전용 컴퓨터를 보고는 "어, 우리 집에 있는 거랑 똑같은 거네?”라는 표현으로 당시 북한의 자존심에 사정없이 상처를 주었다. 북의 학생들이 선물해준 스카프도 버리고, 집단체조 관람 중에 퇴장하고, 김일성 생가인 만경대 방문도 '다른 행사도 있는데 거긴 왜 가요?'라고 그다지 내켜 하지 않는 뜻을 보인걸 북측 실무자들이 울며불며 사정해서 겨우겨우 방문했다고 한다.
임수경이 가는 곳마다 북한 사람들이 몰려와서 보려고 난리치고 환호하고, 기자들이 플래쉬를 터뜨리고 질문공세를 퍼부었다. 종종 노래해보라고 기자들이 요구하기도 해서 <우리의 소원은 통일>과 <전대협진군가> 같은걸 불렀다고 한다.
임수경은 북한의 청년들과 통일 문제를 협의하였다. 이를 지지하고 임수경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천주교 정의 구현 사제단은 문규현 신부를 북한에 파견하였다. 45일간의 방북을 마친 임수경은 8월 15일 문규현 신부와 함께 판문점을 통해서 귀환한다. 이것도 처음에는 안 된다고 했는데 단식투쟁을 해서 허락을 받았다고 한다. 귀환 이후에는 안기부로 가서 조사를 받은 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5년 형을 선고 받고 3년 5개월간 복역 후 1992년 12월 24일 가석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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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년 국회, 남북국회회담 준비접촉 무기연기 결정 🌳89년 대검, 평양축전에 대표를 파견하고 북한의 대남 적화통일노선에 적극 동조해온 전대협을 이적단체 규정 🌳89년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이 8년만에 원상 회복돼 개원 🌳90년 정부, 박승서 대한변협회장 등 5명의 북한주민 접촉신청을 각각 승인 🌳90년 미국 의회 86∼89년사이 북한이 세계7위의 무기수출국으로 나타났다고 보고서에서 밝혀 🌳90년 정재은양 유괴살해-가짜대학생 홍순영 검거 🌳90년 서울형사지법은 전 감사원 감사관 이문옥 피고인이 낸 보석신청을 받아들여 석방. 🌳90년 전대협 송갑석 의장(24)은 임수경양 방북 1주년을 맞아 林양의 즉각 석방을 주장. 🌳92년 경부고속전철 기공식이 노대통령 참석 충남 아산군 배방면 장재리 천안역 건설현장에서 열리다. 🌳92년 한라산 국립공원 사무소, 구두 슬리퍼를 신은 등산객에 대한 7월1일 부터 한라산 등산을 불허하기로. 🌳93년 김영삼 대통령, 무토가분 일본 외무장관 접견 🌳93년 1990년 부동산투기 억제위해 50대 계열 기업군의 비업무용부동산을 매각토록한'5·8조치' 종료 🌳93년 묘지면적을 3평이내로 제한하고 묘지시한을 60년으로 정하기로. 🌳93년 일본 문부성, 94년부터 日교과서에 정신대 동원, 이용했다는 사실을 기술할 것이라고 발표. 🌳94년 농촌진흥청 농약연구소의 최용철 박사팀, 저독성 생물농약인 `AC-1'을 세계 최초로 분리 발표 🌳96년 정순영(37.미용사), 박철(15), 박영미(19) 일가족 귀순 | |
🌳96년 작곡가 박시춘씨 별세
`신라의 달밤`의 작곡가 박시춘씨(83)가 숙환으로 1996년 6월 30일 별세했다.
박씨는 1926년 밀양보전을 졸업하고 1931년 `OK레코드`에 전속돼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 모두 2천여곡의 작품을 작곡했다. | |
🌳97년 김영삼- 미국간 3자 준 고위급회담 개막 (뉴욕) 🌳97년 탈북자 4명, 유엔 고등난민 판무관실 도움으로 서울 도착 🌳98년 판문점「자유의 집」준공 | |
🌳99년 화성에 있는 "씨랜드" 청소년 연수원에서 불이나 23명 목숨 잃음
1999년 6월 30일...씨랜드수련원 화재 참사
1999년 6월 30일 경기도 화성군 씨랜드 청소년수련원 3층 컨테이너 숙소에서 화재가 발생, 서울 문정동 소망유치원생 18명과 부천 이월드외국어학원 유치원생1명 등 어린이 19명과 마도초등학교 김영재 교사 등 어른 4명이 숨졌다.
불은 어린이들이 자고 있던 수련원 3층 301호실에서 시작돼 유독가스를 내뿜으며 순식간에3층 건물 전체로 옮겨 붙었다. 불이 처음 난301호에 있던 소망 유치원생 18명은 문을 열지 못해 모두 사망했다.
불이 난 뒤 화재신고가 늦게 이루어진 데다 소방서가 현장에서 70km나 떨어져 있어 소방차 출동마저 늦어 인명피해가 크게 늘었다. 검찰은 씨랜드 화재 원인에 대해 301호실에 놓인 모기향불이 주변의 옷과 종이 등 가연성 물질에 접촉하면서 발화된 것으로 최종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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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 |
✿2009년 6월 30일..조선왕릉,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
화성시 안녕동의 정조와 효의왕후 김씨를 모신 건릉
조선왕릉이 2009년 6월 30일 스페인 세비야에서 열린 제33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유네스코 세계유산(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조선왕릉 전체 42기 가운데 북한에 위치한 2기를 제외한 40기가 등재되었다.
조선 왕릉은 조선시대 27명의 왕과 왕비 및 사후 추존(追尊)된 왕과 왕비의 무덤을 망라한 것으로, 한 왕조의 무덤이 이렇게 온전하게 보존된 사례는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힘들다. 조선왕릉은 당시 조선왕조의 세계관·종교관·자연관을 바탕으로 타 유교문화권 왕릉과 다른 독특한 형태를 띠고 있으며, 5백년이상 지속된 조선왕조를 대표하는 건축양식이다. 또한, 매년 200만명의 시민이 찾고, 기일에 맞춰 왕릉제례가 이뤄지는 등 살아있는 역사라는 점에서 가치가 크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