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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마가복음 제17강
섬기러 오셨다
말씀 / 마가복음 10:32-52
요절 / 마가복음 10:4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한자로 사자성어 중에 ‘동상이몽’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같은 침대에 누워있는데 다른 꿈을 꾼다는 의미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과 제자들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을 함께 걷고 있습니다. 하지만 생각하는 방향은 전혀 다릅니다. 겉보기에는 같이 걷고 있지만, 마음속에는 다른 생각이 있으니, 사실은 같이 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33절에 보면, 예수님은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길만 같이 걷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생각도 같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동상이몽인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길을 가르쳐주십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가르쳐 주십니다. 제자들도 그 길을 따라야 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32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요단강 건너편 지역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을 따라 걷고 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당하게 될 일에 대해 말씀해 주십니다. 33,34절 말씀이 바로 그 일입니다.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겠고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나 그는 삼일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 능욕, 침 뱉음, 채찍질, 사형, 이런 끔찍한 일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물론 그로부터 3일 후에 부활하시게 됩니다.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저만치에 예루살렘이 보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예수님은 거기 예루살렘에서 당할 일들이 생생하게 다가왔고, 극한 긴장감이 느껴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보라” 말씀하십니다. 예루살렘에서 당하게 될 일들을 외면하지 말고 주목하라는 말씀입니다. 거기 예루살렘에서 겪게 될 일들을 생생하게 대면하라는 의미입니다. 제자들이 왜 그래야 할까요?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우리가’ 즉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그 일들을 감당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능욕을 당하고 침 뱉음을 받습니다. 예수님이 채찍질 당하고 결국엔 죽게 됩니다. 제자들의 입장에서는 절대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들이고, 상상하기도 싫은 일인데, 예수님은 눈을 부릅뜨고 집중해서 생각하고 들으라는 말씀입니다. 두려워하는 제자들을 달래주면 좋은데, 예수님은 돌직구, 직진, 앞으로 겪게 될 일들을 담담하게 직면하십니다. 그러면서 제자들에게 주목하여 ‘보라’, 앞으로 당할 일들을 생생하게 느껴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꼭 그렇게 겪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35절을 보면, 야고보와 요한, 두 제자가 예수님께 나와 “무엇이든지 우리가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이랬습니다. 마음대로 액수를 쓸 수 있는 ‘백지수표’를 요구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마태복음의 병행 본문에서는 두 제자의 어머니도 예수님께 나아와 청탁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부모의 힘을 빌려 청탁이라도 해서 남보다 먼저 영광과 권세를 쥐고자 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무엇을 내다보고 있습니까? 능욕, 침 뱉음, 채찍질, 죽음을 내다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야고보와 요한, 두 제자는 ‘주의 영광’을 내다보며 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라면 삼일만에 부활할 것을 미리 내다보았을 수도 있겠건만, 그 정도로 안목이 있었던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3번에 걸친 반복적인 고난, 죽음, 부활에 대한 가르침, 생생한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전혀 알아듣지 못하고 엉뚱한 곳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엉뚱한 곳에 눈독 들이고 있습니다. 그래도 예수님은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33)”라고 말씀하십니다. 야고보와 요한에게 있어 “우리”는 피를 나눈 형제 두 사람이겠지만,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우리’는 그들과는 다릅니다. 제자공동체로서의 “우리”는 예수님의 길을 따라 예수님의 능욕, 침 뱉음, 죽임당함, 그리고 부활을 내다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이 일을 내다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두 제자에게 묻습니다.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여기, 예수님이 마시는 잔은 능욕, 침 뱉음, 채찍질입니다. 또 예수님이 받을 세례는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두 제자가 예수님의 이 질문의 의미를 제대로 알았다면 “뭐라고요? 아이고! 저는 어렵습니다. 못합니다” 이렇게 대답했을 터인데, 그들은 자신감 있게 대답합니다. 39절을 보십시오. “할 수 있나이다. We can do it.” 그들은 예수님이 자리만 보장해 주신다면 어떤 고난도 감수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충성된 마음은 진심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어떤 생각으로 대답했든지 간에 그들의 대답을 인정해 주셨습니다. 그들의 대답대로 야고보는 제자 중에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고, 요한은 가장 오랫동안 십자가를 지며 복음 역사를 섬기다, 후에는 밧모섬에 귀양 가서 주님의 고난에 동참했습니다. 예수님은 장차 그들이 주님의 영광을 위해 고난을 받을 것을 아시고 긍정적으로 받아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는 열두 제자 가운데 두 사람, 야고보와 요한이 뭉쳤고, 나머지 열을 밀어내고 있는 형국입니다. 두 제자는 주님의 오른쪽과 왼쪽, 즉 예수님의 영광을 선점하려고 시도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고난, 죽음을 먼저 말하고 있는데 두 제자는 ‘영광’ 타령하며, 영광의 자리를 탐내고 어머니까지 동원해 예수님께 청탁하며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다 할 수 있다고 아부까지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영광의 문제에 대해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40절을 보십시오. “내 좌우편에 낮는 것은 내가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준비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이 말씀은 고난만 생각하고, 영광은 생각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고난받는 것도, 영광을 얻는 것도 둘 다 중요합니다. 하지만 누가 어떤 영광을 받게 될지의 문제는 예수님의 권한 밖입니다. 오직 성부 하나님께서 영광을 주시기 위해 예비해 놓으신 자들에게 주실 것입니다.
야고보와 요한, 두 제자는 예수님에게 영광의 백지수표를 요구했지만, 예수님은 영광의 백지수표를 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너희들이 고난받을 것은 확실하지만, 너희들이 원하는 그런 영광은 내가 보장할 수는 없으니, 그런 건 너무 마음에 두지 말아라” 이런 답변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같은 말씀을 제자들이 제대로 알아들었다면, 다른 열 명의 제자들은 야고보와 요한을 향해 아마도 이런 반응이었을 것입니다. “짜식들! 자기들이 먼저 영광을 선점하려 하더니, 아무것도 못 얻고 오히려 고난을 받게 된 거네? 아이고~ 고소해라!”
그런데 41절을 보십시오. “열 제자가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 대하여 화를 내거늘” 열 제자들은 야고보와 요한, 두 사람이 영광의 백지수표를 보장받은 것으로 여기고 엄청 열 받고, 머리 뚜껑이 확~! 열렸습니다. 도마는 이들이 제정신인지 의심하며 분개했습니다. 나머지도 다들 코를 씩씩 불며 성질이 나 있었습니다. 다들 분개한 것을 볼 때 그들도 똑같이 세상 영광에 대한 욕망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고 있으면서도 그들의 가치관은 여전히 세상적이었습니다.
42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예수님 당시 최고 권력자는 로마 황제였습니다. 그는 지중해 주변의 모든 나라들을 다스렸습니다. 한때 그리스 지역을 주름잡던 아테네를 비롯해 경제력으로 지중해를 제패하던 에베소나 알렉산드리아도 다 로마의 손아귀 아래 들어갔고, 로마 황제가 세금도 거두고, 통치자도 갈아치우며, 마음껏 주물렀습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유대 왕도 로마 황제가 세우고, 심지어 종교 지도자인 대제사장조차도 로마의 영향 아래 선발되었습니다. 로마 황제에게는 못할 일이 없었습니다.
이처럼 안 되는 것을 되게 하는 능력, 안 되는 것이 없는 능력이 이방인들을 통치하는 로마 황제에게 있어 보였습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지만, 로마 황제로서는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어 보였습니다. 그런데 제자들도 이와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무엇이든,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귀신도 쫓아내고, 풍랑도 잠잠하게 하고, 물 위를 걷고, 죽은 자도 살리고, 모든 질병을 마음대로 다스렸으니, 로마 황제도 이길 거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이 로마 황제도 이기고 꺾을 능력과 힘은 당연 충분히 있습니다. 예수님이 못할 것 없으니, 예수님이 왕이 되면 예수님의 좌우 영광의 자리를 탐낼 법도 합니다.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43,44절을 보십시오.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온 세상이 로마 황제의 통치 아래 있습니다. 로마 황제가 말하는 대로 되고, 황제의 생각에 따라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세상입니다. 동일하게 예수님이 이 세상을 힘으로 제패하게 되면, 예수님의 세상이 될 것이고 예수님의 좌우 세상 영광을 제자들이 얻게 될 것입니다. 얼마나 좋아 보입니까?
그러나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예수님의 제자공동체는 세상공동체와는 달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그런다고 제자공동체마저 세상 집권자들처럼 자리를 탐하고 권력욕심을 부리고, 마음대로 좌지우지하고, 대접받기만 원하면, 이 세상은 이기심으로 싸움의 장이 되고 말 것입니다. 교회가 세상과 같이 권력을 최고로, 돈을 최고로 여긴다면 심각한 문제입니다. 주님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라고 분명히 말씀합니다. 우리의 가치관은 어떠합니까? 우리는 세상 속에서 살다 보니, 너무도 쉽게 세상의 가치관이 몸과 정신에 배어 있기 쉽습니다. 교회를 다니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세상의 가치관을 따라 살기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인 우리는 세상과 분명 달라야 합니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예수님을 따르는 자는 로마 황제의 권력과 힘에 현혹되는 자가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에 이끌리어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가치관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과는 달라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로마 황제의 길을 따라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예수님의 길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로마 황제처럼 권력의 최정상에 서서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섬기는 종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떤 삶을 사셨습니까? 45절을 읽겠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여기 ‘인자’는 다니엘서에 언급된 것처럼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영원한 권세를 가지고 영원한 나라를 세우시는 분을 의미합니다. 이 ‘인자’는 메시야로서 구원의 왕이십니다. 이 ‘인자’는 예수님 자신입니다. 그런데 ‘인자’가 이 땅에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이 땅을 구원하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며칠 후면 능욕 받고, 침 뱉음을 당합니다. 채찍질을 당합니다. 그리고 죽습니다. 이사야서에 예언된 ‘고난받는 여호와의 종’에 대한 예언의 말씀을 성취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렇게 고난받고 죽으시는 여호와의 종, 예수님을 통해 영광을 나타내십니다. 부활의 영광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영광입니다. 이로서 인류 구원역사를 이루십니다. 예수님은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자신을 내어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 인간들을 죽기까지 섬기시고 새 생명을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말씀하신 것처럼 섬김받고자 하는 마음을 비우셨습니다. 예수님은 본래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로서 신분으로 볼 때 인생들로부터 마땅히 경배와 섬김을 받기에 합당한 분이십니다. 그러나 섬김받고자 하는 마음을 비우시고 도리어 섬기고자 하셨습니다.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까지 낮아져 모든 것을 희생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섬기는 삶의 최고봉은 죄인들을 살리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섬기되 자기 목숨을 희생하기까지 넘치도록 섬기셨습니다. 이 희생으로 말미암아 죄인인 우리 인간들이 새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예수님은 섬김의 가치가 모든 가치 중에 가장 고귀한 가치임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생명이 살아나는 역사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낮아져 섬기는 누군가의 자기희생이 감춰져 있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제자들이 왼쪽, 오른쪽 영광의 자리를 차지하고자 야심에 찬 것과는 전혀 상반된 것입니다. 제자들의 가치관은 예수님에게 가까이 있다기보다는 세상의 가치관, 로마 황제의 가치관에 더 가까이 서 있는 모습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양화진 선교사 묘역에 가보면, 눈에 띠는 한 처녀 선교사의 비석이 있습니다. Ruby Kendrick 선교사의 비석입니다.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If I had a thousand lives to give, Korea should have them all.” “내게 만약 천 개의 목숨이 있다면 그 모두를 다 조선에게 주리라.” 그녀는 1907년 9월, 25살에 텍사스주 한 청년회의 후원으로 한국 선교사로 왔습니다. 한일합방이 이루어지기 직전이었기 때문에 우리나라는 심히 불안하고 가난했습니다. 그녀는 한국 사람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자신은 한국말을 배우면서 선교활동을 하던 중 한국에 온 지 9개월 만에 맹장염으로 소천하게 됩니다.
그녀가 소천하기 며칠 전, 부모님에게 쓴 편지 내용이 이렇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이곳 조선 땅은 참으로 아름다운 곳입니다. 사람들의 선한 마음과 복음에 대한 열정으로 보아 아마 몇십 년이 지나면 이곳은 예수님의 사랑이 넘치는 곳이 될 것입니다. 저는 복음을 듣기 위해 20Km를 맨발로 걸어오는 어린이들을 볼 때 그들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오히려 위로를 받습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탄압이 점점 심해지고 있습니다. 그저께는 예수님을 영접한 지 일주일도 안 된 서너 명이 순교했고, 토마스 선교사와 제임스 선교사도 순교했습니다. 오늘 밤은 유난히도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부두에서 저를 끝까지 말리셨던 어머니의 얼굴이 자꾸 제 눈앞에 어른거립니다. 아버지, 어머니! 어쩌면 이 편지가 마지막일 수도 있습니다. 제가 오기 전 뒤뜰에 심었던 한 알의 씨앗이 내년이면 피어나서 온 동네가 꽃으로 가득하겠죠? 그리고 또 다른 씨앗들을 만들어 조선 땅에 많은 꽃들 피어나고, 그것들도 여러 나라에서 씨앗이 될 것입니다. 저는 이 땅에 저의 심장을 묻겠습니다. 이것은 제가 조선을 향해 가지는 열정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조선을 향해 가지신 열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머니, 아버지, 사랑합니다.” 이분은 9개월이라는 짧은 기간 선교사로 살다가 소천했지만, 그의 헌신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이분의 헌신에 대한 소식을 듣고, 후에 텍사스 청년회에서 20명의 선교사들이 더 조선으로 달려왔습니다. “켄드릭 선교회”가 조직되어 조선뿐만 아니라, 멕시코, 브라질, 아프리카 등에도 많은 선교사들이 파송되었습니다. 25살 꽃다운 청춘의 한 처녀 선교사가 자신의 목숨을 조선의 백성들을 위해 바쳤습니다. 그 선교사도 아마 자신의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내어주신 예수님께 감동 받고 그런 삶을 살고자 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섬기는 삶을 살다 보면 손해만 보는 것처럼 생각하기 쉽습니다. 로마 황제처럼 살고 싶고, 예수님처럼 죽고 희생하는 삶을 살고 싶진 않습니다. 끝에 서고자 하고 섬기는 종으로 살다가는 내 인생 망할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기까지의 섬김 끝에는 무엇이 있었습니까? 부활의 영광이 있었습니다. 부활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나라의 모든 영광을 다 가지셨습니다. 섬기는 종으로서의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성가 가사에 “당신의 그 섬김이 하늘에서 해같이 빛나리” 했습니다. 우리의 섬김은 장차 하늘에서 해같이 빛나게 될 것입니다. 아니, 이 땅에서도 섬김을 통한 하늘의 기쁨과 은혜와 상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마음과 시간과 물질을 드려 양들을 섬기고, 동역자들을 섬기고, 이웃과 지역사회, 더 나아가 세계선교를 섬길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인지 모릅니다. 우리가 주와 복음 역사를 위해 희생하며 섬기는 것은 결코 손해가 아닙니다. 세상의 가치로는 따질 수 없는 영광스러운 보석과도 같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삶을 배워 섬기는 제자공동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46,47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여리고에 이르렀을 때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소리 질렀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는 길가에 앉아있다가 나사렛 예수란 말을 듣고 이렇게 소리 지른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했지만 그는 더욱 크게 소리 질렀습니다. 예수님께 다만 불쌍히 여겨 달라고 소리쳤습니다. 이는 그의 기도입니다. 그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분명히 알았습니다. 다윗의 자손이란 말은 메시야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로 영접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에게 물으셨습니다. 51절을 보십시오.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이 질문에 그는 “선생님, 보기를 원합니다” 분명하게 대답했습니다. 그는 자기가 진정으로 무엇을 구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이 점에서 앞에 나온 야고보와 요한과는 비교가 됩니다. 야고보와 요한에게도 동일하게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36)라고 물으셨었습니다. 바디매오에게도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51)라고 동일하게 물으십니다. 그러나 야고보와 요한은 자기들이 진정으로 무엇을 구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왼편, 오른편의 영광, 즉 예수님의 왕국 서열 1,2위 자리만을 구한 것입니다. 무엇을 구해야 할지를 안다는 것은 자신의 상황 형편을 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반복해 들었으면서도 메시야가 가야 할 길을 믿지 못하고 깨닫지 못했습니다. 영적인 맹인과도 같습니다. 그러나 맹인 거지 바디매오는 예수님이 바로 성경에 약속된 메시야임을 믿었습니다. ‘바디매오’는 ‘디매오’의 아들이라는 의미입니다. ‘디매오’는 헬라어로 ‘존경, 명예, 영광’ 이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바디매오는 이름만큼이나 진정한 ‘영광’은 로마 황제의 영광이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 주어짐을 알았습니다. 그렇기에 로마 황제에게 불쌍히 여겨달라고 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 불쌍히 여겨달라고 했습니다. 맹인이 눈을 뜨게 하는 것은 성경에 약속된 메시아가 할 일이었습니다. 메시야 예수님을 통해 눈을 뜰 수 있음을 온전히 믿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믿음을 축복해 주셨습니다. 또한 이 본문 말씀은 제자들이 바디매오처럼 영적인 눈을 떠서 예수님이 가신 길을 따라가게 될 것을 소망하게 합니다.
여러분! 때로는 우리에게 있어 로마 황제의 권력이 더 좋아 보일 수 있습니다. 반면, 예수님의 섬김의 삶은 초라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세상 영광을 추구하고 세상의 명예와 부를 따라 살아가기 쉽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어찌해야 합니까? “다윗의 자손 예수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간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의 가치관으로 쩔어 있기 쉬운 우리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영적인 눈을 뜨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 시간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제자의 삶의 본질은 예수님을 배우며 따라가고 닮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이 우리의 모델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섬김과 사랑을 배워야 합니다. 교회는 세상과 달라야 합니다. 우리가 섬기러 오신 예수님의 삶을 배우므로 주님 인도하시는 영광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