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 곡선을 만들고 인간은 직선을 만들었다는 말이 있다. 신이라고 하니 무슨 종교적 의미냐고 반문할 지 모르지만 그런 의도가 전혀 없다. 인간보다 훨씬 객관적이고 보는 눈이 광범위할 것 같은 존재를 그냥 신이라고 표현한 것뿐이다. 자연이라고 말해도 다를 바가 없다. 그렇다면 곡선에는 어떤 의미가 포함되어 있을까.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라고 보면 될 듯하다. 자연현상에서 비가 오면 물이 흐른다.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흘러가는 것이 바로 물이다. 물은 견고한 것을 피해 상대적으로 약한 부분을 지나 흐른다.바위를 피하고 나무를 돌아서 아래로 아래로 향한다. 그런 물줄기가 개천을 이루고 큰 강으로 만나 결국 바다로 들어가는 것이 자연의 흐름이다. 그 물의 흐름을 높은 곳에서 바라보며 유연한 곡선을 그리는 것을 볼 수 있다. 곡선의 대표적인 예가 바로 물 흘러가는 모습이다. 물이 흘러 가는 것을 통해 만들어진 한자가 바로 법이다. 법 (法)은 물 수(水)변에 갈 거(去)이다. 현대인이 종교처럼 받드는 바로 그 법도 물이 흘러가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때 곡선이 상징하는 의미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예전의 길도 대부분 곡선으로 만들어졌다. 길을 가다가 큰 산을 만나면 돌아가고 큰 나무도 피해가고 큰 바위로 비켜서 길이 난다. 자연스럽게 길도 물길과 마찬가지로 곡선으로 형성될 수밖에 없다. 그래야 정상이었다. 자연의 이치대로 살아가려고 했던 것이 예전 인간들이 가진 대부분의 사고방식이었다. 신이 곡선을 만들었다고 하니 그 흉내를 내기 위해 곡선화한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지혜를 통해 곡선화가 가장 이상적인 길이라는 것을 파악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 곡선이 이제 사라지고 없다. 물길도 직선으로 만들고 차길도 직선으로 만든다. 물론 곡선보다 직선의 거리가 짧기는 하다. 곡선으로 된 길을 한시간에 간다면 직선으로 길을 내면 훨씬 단축될 것이다. 가다가 산을 만나면 터널을 내면 되고 큰 나무도 굴삭기로 밀어버리면 되었다. 큰 바위는 다이나마이트 한방이면 만사 오케이였다. 인간들은 환호성을 질렀다.산업혁명이니 과학혁명이니 하는 희대의 영웅들이 등장하면서 지구는 직선화되고 말았다. 어느 나라가 직선화를 빨리 이루느냐에 따라 선진국 타이틀 획득여부가 결정되게 됐다. 각국들은 경쟁적으로 직선화 정책에 몰두하고 눈에 불을 켜고 모든 것을 직선화했다.
직선화는 일상생활에도 그대로 적용됐다. 짧고 가까운 것을 선호하다보니 말도 짧아지고 문장도 짧아지고 글도 짧아졌다. 축임말이 성황을 누리는 세상이 됐다. 어느나라 할 것 없는 현상이다. 글도 긴 문장을 읽지도 않고 제목만 보고 치워버린다. 한줄짜리 문장이 주를 이룬다. 유튜브도 한시간 짜리에서 십분 짜리로 이제는 5분 완성판으로 줄어든다. 단어도 줄어들고 직선화한다. 은유적 표현은 거추장스럽고 피곤하다. 좋아하면 좋아하는 것이지 이래서 저래서 이런 표현 저런 표현으로 돌려 말하는 것에 진력이 난다. 긴 시간 설명은 의미도 없다. 그냥 참지를 못한다. 길에서 조금 막혀도 안절부절이다. 하늘을 그냥 날아서 다니고 싶다. 말도 그냥 입에서 나오는 대로 뱉어내면 된다. 마치 언어에도 터널을 뚫운 듯이 말이다. 해괴망측한 축약어들이 판을 친다. 그런 축약어들이 하나둘씩 표준어화되고 있다. 축약어 해설 앱을 설치해야 대화가 통할 정도가 됐다.
직선화는 과학세계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과학의 직선화가 만들어낸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 바로 컴퓨터이고 그 총아가 로봇이다. 그 로봇이 이제 챗###라는 프로그램까지 만들어낸다. 로봇이 알아서 글도 써주고 작품도 만들고 그림도 훌륭히 그려낸다. 얼마전 챗@@@이 만든 논문이 모 대학에서 제출된 논문가운데 가장 훌륭한 글로 선정됐다고 한다. 인간이 할 일이 갈수록 없어진다는 말이다. 인간이 만들어낸 바로 그 직선화때문에 인간은 할 일을 잃는다. 물론 로봇이 대신해주니 편하기도 하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로봇이 모든 것을 다해주니 인간은 생각할 의지도 힘도 갈수록 상실하게 될 것이다. 아이는 뭐하러 낳을 것이며 힘들여 공부는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긴 더 많은 돈을 벌어야 더 비싸고 더 유능한 로봇을 얻을테니 아웅다웅 경쟁은 해야겠지만 말이다.
인간이 직선화로 모든 것을 이루는 듯 했지만 인간의 마음은 결코 그렇지 못한 상황이다. 세상 물질들을 직선화할 수 있었겠지만 인간이 살아가는 인생은 결코 직선화가 될 수가 없을 것이다. 로봇들의 삶이 아니고서는 말이다. 로봇이 인간이 하는 것은 다 해낼 수 있겠지만 인생사까지 로봇이 만들거나 책임져줄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인생은 결코 직선이 아니다. 그런데 인간은 인생까지도 직선화가 되길 바란다. 그래서 직선화로 인해 인간사가 꼬이기 시작한 것이다. 인생은 결코 직선화될 수가 없다. 곡선에 곡선을 더한 그야말로 미로같은 길이 바로 인생 아니겠는가. 인간의 내면세계가 어떻게 직선처럼 이뤄질 수 있겠는가.
인간의 직선화의 총아인 로봇시대에 과연 인간들은 어떤 삶을 살게 될 것인가. 최근 급속도로 발전하는 로봇의 성능앞에 인간들은 탄성과 환호성을 지르지만 과연 그런 반응을 보여야 할 상황인지 모르겠다. 로봇이 단순한 인간의 보조체가 아닌 그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로봇의 등장도 멀지 않을 것 같은 생각이다. 수십년전 쳇봇이 등장할 것을 예상한 이는 많지 않았다. 겨우 집안 청소 그리고 식당에서 음식 나르는 정도일 것이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리고 미래에는 그 로봇이 인간을 대체하고 오히려 인간들을 통제할 것이라는 예상도 이제 무리없는 생각이라는 판단이다. 더욱 빠르게 더욱 짧게 더욱 가볍게만 외치던 인간들의 최후가 어떻게 될 것인가가 두렵기도 하고 흥미롭기도 하다. 하지만 긍정적인 결과보다는 부정적인 결과가 더 많을 것이라는 암울한 예상도 등장하고 있다. 산업혁명으로 인한 기계화로 일자리를 잃은 공장직원들이 공장 장비를 파괴하는 러다이트운동 다시말해 기계 파괴운동이 다시 일어나지 말라는 법이 없다. 인간의 욕망이 만들어낸 아이러니한 장면이 우리앞에 벌어질 가능성이 더욱 높아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극단의 직선화가 결국에는 곡선화로 돌아가는 장면을 우리가 생전에 보게 될 가능성이 갈수록 상승한다는 것이다.
2023년 1월 31일 화야산방에서 정찬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