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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의 고정과념을 깬 색채의 마술사
色다른 꿈을 꾸다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
“내가 파란색을 택한다고 해서
원래는 하늘을
그리고 있는 것은 아니다”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1869~1954년)
“초록색을 칠한다고 해서
그것이 풍를 의미하지 않는다”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1869~1954년)
"단순한 형태와 세 가지 색만으로도
가장 조화로운 장식 그림을 그릴 수 있다."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 1869-1954)
"나는 균형이 잡힌 그림을 그리고 싶다.
사람들이 불안하거나 혼란스러워하지 않고,
휴식을 제공할 수 있는 그림을..."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 1869-1954)
"미술은 육체적인 피곤으로부터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좋은 안락의자 같아야 한다.”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 1869-1954)
“꽃을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겐 항상 꽃이 있다.”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 1869-1954)
“창의적인 사람들은 호기심이 많고,
융통성이 있으며,
엄청난 모험심을 갖고 독립적이며 놀기를 좋아한다.”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 1869-1954)
“일이 만 사를 치료한다.”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 1869-1954)
“자연을 노예처럼 모방하는 건 무의미하다.
자연을 해석하고 그림의 아이디어에 종속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마티스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 한 말
<색다른 꿈을 꾸다, 앙리 마티스>
✺ KBS1 <예썰의 전당>[37회] 색다른 꿈을 꾸다,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 다시보기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1869~1954년) : 본명은 앙리 에밀 브누아 마티스(Henri Emile Benoit Matisse). 프랑스의 화가로 회화, 조각, 판화, 종이 오리기를 포함한 그래픽아트, 건축설계, 스테인드글라스 등 다양한 분야에서 명성을 떨쳤다. 스무 살 무렵인 1889~1890년에 처음으로 회화에 흥미를 가진 후 1895년에야 에콜 드 보자르에 입학했다. 야수주의의 창시자로 강렬한 색채와 형태의 작품을 선보여 ‘색채의 마술사’로 불린다. 프랑스 니스에 마티스미술관이 있다.
✵ <예썰의 전당> 서른일곱 번째 이야기는 ‘색채의 마술사’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 1869-1954). 20세기 현대미술의 거장이자 ‘야수파*1’의 창시자, 마티스. 그의 그림엔 자유롭고 파격적인 색채가 넘실댄다. 평생토록 새로운 시도를 거듭하며 색채 예술을 펼쳐낸 마티스. 그가 색을 통해 전하고 싶었던 가치는 무엇이었을까.
*1 야수파(Fauvism, 野獸派): 감정의 폭발을 표현하기 위해 화려한 원색들을 도발적이고도 직접적인 수법으로 구사했으며, 야수파 작품에는 회화의 주제에 대한 강렬한 표현적 감응이 담겨 있다. 주도적 화가는 앙리 마티스였다.
“색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표현하는 것이다”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
“하루의 힘든 일을
마치고 돌아와
푹신한 안락의자에
앉는 듯한 그림을 그리고 싶다”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
● 음악에도 영향을 미친다.
원시주의(primitivism) : 원시적인 생명력을 동경하며 격렬한 리듬이 주를 이루는 야성적인 분위기의 음악
* 스트라빈스키Igor Stravinsky의 봄의 제전The Rite of Spring중 젊은이의 춤
○ 이고르 스트라빈스키(Igor Stravinsky, 1882-1971) 러시아 출신 미국 작곡가의 발레음악
‘봄의 제전’Le sacre du printemps (1947년 개정판)
1부 대지의 찬양Part 1: L’adoration de la terre (Die Anbetung der Erde)
1.서곡Introduction (Einführung)
2.봄의 싹틈과 젊은 남녀의 춤Les augures pintaniers (Die Vorboten des Frühlings)
3.유괴의 유희Jeu du rapt (Entführungsspiel)
4.봄의 론도Rondes printanières (Frühlingserwachen)
5.적대하는 도시의 유희Jeux des cités rivales (Spiele rivalisiereder Stämme)
6.현인의 행렬Cortège du sage (Prozession des Weisen)
7.대지의 키스Embrasse de la terre (Kuss der Erde)
8.대지의 춤Danse de la terre (Tanz der Erde)
2부 희생 제물Part 2: Le sacrifice (Das Opfer)
1.서곡Introduction (Einführung)
2.젊은 처녀들의 신비로운 모임Cercles mystérieux des adolscentes (Mystischer Reigen der jungen Mädchen)
3.선택된 처녀의 찬미Glorification de l’élue (Verherrlichung der Auserwählten)
4.조상의 초혼Evocation des Ancêtres (Anrufung der Ahnen)
5.조상의 의식Action Rituelle des Ancêtres (Rituelle Handlung der Ahnen)
6.신성한 춤Danse sacrale (Opfertanz)
✵ 예썰 하나, 마티스가 그린 아내의 초상화에 아내도 미술계도 당혹했다? 마티스의 대표작 <모자를 쓴 여인>. 아내를 주인공으로 그린 이 작품엔 숨겨진 이야기가 있다는데. 바로 마티스와 아내 아멜리의 불화다. 완성된 초상화를 본 아멜리는 불같이 화를 내며 일주일 동안 마티스와 말도 섞지 않았다고. <모자를 쓴 여인>은 당시 미술계에도 큰 충격을 줬다. 전시회 측은 마티스에게 출품을 만류하기까지 했으며, 미술 평론가는 이 그림에 대해 이런 평을 남겼다. “여태 내가 본 그림 중 가장 형편없는 물감 얼룩이다!” 마티스의 <모자를 쓴 여인>이 이토록 파란을 일으켰던 이유는 무엇일까?
앙리 마티스, ‘모자를 쓴 여인(Woman with the Hat)’, 1905년,
캔버스에 유채, 80.65 x 59.69cm,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
작품의 모델은 마티스의 아내. 아멜리는 이 작품을 보고 불같이 화를 냈다고 한다. 한껏 꾸민 화사한 얼굴은 온데간데없고 푸른색 계열로 거칠게 그려졌기 때문. 부자연스러운 색상과 거친 붓질, 마치 완성 단계가 아닌 것 같은 이 작품은 예술계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평론가 레오 스타인(Leo Stein) “지금껏 내가 본 그림 중에 가장 형편없는 물감 얼룩이다”라고 혹평 하였다. 하지만 이 작품이 당시 파리 미술계를 장악했던 수집가 거투르드 스타인의 눈에 들면서 마티스는 일약 스타로 떠오르게 된다.
앙리 마티스, ‘마담 마티스(녹색선)’, 1905년, 캔버스애 유채, 259.7×390.1cm, 덴마크 코펜하겐 국립미술관앙리 마티즈, '루마니아 풍의 블라우스를 입은 여인(La Blouse roumaine)',
1940년, 캔버스에 유채, 92cm x 73cm, 조르주 퐁피두센터.
마티스는 여인의 초상화를 여러 점 남겼고 인물을 그릴 때는 사실적으로 묘사하기보다는 색채 표현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 작품 속 여인의 흰색 블라우스 위에 그려진 무늬는 아라베스크 문양을 연상시키는데, 젊은 시절 그는 북아프리카 지역을 여행하면서 아라베스크 문양의 옷감과 카펫에서 큰 영감을 받았다.
파블로 피카소, '페르낭드 올리비에' 초상화, 1906년 - 1905년
'열린 살롱 도톤' 전시회에 앙리 마티즈의 그림을 보고 자극 받아 출품하지 않은 작품
“진정한 화가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느끼는 대로 그린다”
-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 사실적인 묘사보다 감정의 표현을 중시한 후기 인상파
“내가 그림을 그리는 까닭은
감정을 묘사하기 위해서다
감정이 없는 화가는
그림을 그리지 말아야 한다”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
그는 “아멜리, 당신을 너무나 사랑하지만 나는 언제나 당신보다는 그림 그리는 것을 더 사랑할 거야”라고 선전포고를 했다. 아멜리는 마치 헌신할 대상을 찾고 있었던 사람마냥 기꺼이 그의 조건을 받아들였다. 그녀는 결혼 후 마티스가 작업에만 몰두할 수 있도록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었다. 1899년에 첫째 아들 장을 낳았고 바로 다음 해에 둘째 아들 피에르를 낳았는데 아이들이 걷기 시작하자 화실을 어지럽히지 못하도록 친정으로 보내버릴 정도였다. 그 시절 아멜리가 캔버스를 준비하느라 집안일을 미처 챙기지 못할 때는 어린 마르게리트가 일을 대신하기도 했다.
아멜리와 딸 마르게리트의 헌신 속에서 마티스는 자기만의 화풍을 만들어내기 위해 집중했다. 색채 사용에서 새로운 종류의 시도를 하던 그는 1905년 아멜리를 모델로 한 〈모자를 쓴 여인〉을 그렸고 당시 파리 미술계를 장악했던 수집가 거투르드 스타인의 눈에 들면서 일약 스타로 떠오르게 된다. 라이벌이었던 피카소가 이 일로 마티스에게 주체하지 못할 만큼 강한 질투를 느낄 정도였다.
앙리 마티스, ‘아네모네 꽃과 자줏빛 드레스 여인’, 1937년, 캔버스에 유화, 55.2×46cm, 필라델피아 미술관 소장.
마티스는 프랑스 북부의 작은 시골마을 보잉에서 잡화점과 종묘공급사업을 하는 부부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몽상가적 기질이 다분했던 그는 부모님의 뜻에 따라 파리에서 법률 교육을 받은 후 법원 관리로 취직했지만 금방 싫증을 느끼게 된다. 따분함을 참을 수 없었던 그는 사무실 창가에서 콩알 총으로 지나가는 행인을 맞히는 장난을 일삼을 정도로 짓궂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마티스는 맹장염에 걸려 병원에 입원하게 됐고 옆 침상의 환자가 유화(油畫)로 풍경화를 베껴 그리는 것을 보게 됐다. 호기심이 발동한 그는 어머니에게 그림 도구를 사다 달라고 졸랐고 그렇게 처음으로 석판화 한 점을 모사한 그는 대단한 성취감에 사로잡혔다. 훗날 그는 “물감 통을 손에 든 그 순간, 나는 그것이 내 길이라는 것을 알았다”고 회고했다. 그는 미술 공부를 하겠다며 아버지와 한바탕 크게 싸운 후 1891년 가을 파리에 도착했다.
파리의 유명 미술학교 에콜 데 보자르에 두 번이나 낙방한 끝에 겨우 턱걸이로 입학한 그는 미술적 기교를 빠르게 습득해나갔다. 그 무렵 카미유 조블로라는 여자 친구가 생겼고 1894년에는 딸 마르게리트가 태어났다. 하지만 그의 고질병인 지루함을 못 참는 성격이 또 발목을 잡게 된다. 다른 화가들처럼 자연을 똑같이 그리는 사실적인 화법이 쓸모가 없다고 생각한 그는 학교를 그만두고 대담한 색채와 강렬한 선, 현대적인 주제로 실험을 하기 시작했다.
확실한 것을 그만두려 하는 그에게 불안감을 느낀 카미유는 1897년 매정하게 그의 곁을 떠나버린다. 그러고 바로 그해 10월 고향을 방문하는 길에 마티스는 생기 넘치고 매력적인 아멜리 파레르를 만나게 된다. 마티스는 곧 사랑에 빠졌지만 예술가의 삶은 늘 대가를 요구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앙리 마티스, ‘저녁 식탁(The Dinner Table)’, 1897년, 캔버스애 유채물감, 100×131cm.
✵ 예썰 둘, 때론 강렬하게! 때론 조화롭게! 마티스가 색으로 전한 위로와 평온 마티스에게 있어 색은 자신의 내면을 가장 솔직하고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수단이었다. 그는 색을 통해 자신의 감정을 거침없이 담아내는가 하면, 색이 지닌 심리적 효과를 활용해보는 이로 하여금 위안과 평온을 느끼게 한다. 마티스는 구매자에게 위로를 전하기 위해 푸른색 그림을 다시 칠해 <붉은색의 조화>로 재탄생시켰다. 또한 기쁨만이 가득한 낙원을 조화로운 색채로 그린 <생의 기쁨>은 평화로운 감상을 전한다. 그러나 때는 1차 세계대전의 전운이 감돌던 시기. 마티스의 그림은 이러한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기도 했다는데. 예썰 박사들은 이에 관해 어떤 논박을 펼쳤을까.
앙리 마티스, ‘디저트: 붉은 색의 조화(The Dessert: Harmony in Red)’,
1908년, 캔버스애 유채물감, 181×200cm, 에르미타슈 미술관. - 위의 그림과 색의 반전
앙리 마티즈, ‘붉은색 실내(Grand intérieur rouge)’, 1948년, 조르주 퐁피두센터.
앙리 마티스, ‘붉은 화실(The Red Studio)’, 1911년, 캔버스에 유채, 181x219cm, MoMA 뉴욕.
앙리 마티즈, ‘열린창(Open Window)’, 1905, 콜리우르, 55.3×46cm.
“내 그림들이
봄날의 즐거움을
담았으면 한다.
내가 얼마나
노력했는지는
아무도 모르게”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
앙리 마티스, ‘삶의 기쁨(Joy of Life)’, 1906년, 캔버스애 유채, 175×241cm, 필라델피아 반즈 재단 미술관.
마티스는 이 작품을 그리면서 “내가 꿈꾸는 미술이란 정신 노동자들이 아무런 걱정, 근심 없이 편안하게 머리를 누일 수 있는 안락의자 같은 것”이라고 했다. 폭발적인 색채와 거친 붓놀림으로 포악한 짐승에 비유돼 야수파라는 명칭을 얻었지만 이 작품은 그의 붓이 한결 부드러워진 후 탄생했다. 1920년경 미국인 컬렉터 앨버트 반즈가 구입한 이래 반즈 재단이 소장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닥쳤을 때 마티스 역시 파시즘의 악랄함을 목격했다. 피카소는 “회화란 집을 장식하기 위해 그리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적에 대한 공격과 방어의 수단”이라고 급진적으로 나섰고 그를 비롯해 몇몇 화가들이 전쟁에 대한 분노를 묘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마티스는 계속해서 장식적인 작품들을 그렸다. 다른 화가들은 마티스가 비겁하게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고 비난했지만 마티스는 꿋꿋하게 “예술은 사람들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내가 꿈꾸는 것은 순수와 고요로 가득한 균형의 예술이다. 내 그림이 훌륭한 안락의자와 같은 편안함을 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마티스는 말년으로 갈수록 유산으로 남길 만한 기념비적인 작품을 만들고 싶어 했다. 그는 자신에게 박물관이나 공공기관 같은 의미 있는 건축물 디자인 요청이 들어오지 않는 것에 상심했다. 그래서 자신을 간호했던 소녀가 수녀가 되어 찾아왔을 때, 로사리오 성당 디자인을 도와달라는 부탁을 하자 그는 기쁜 마음으로 작업에 뛰어들었다. 그는 유리창을 직접 디자인한 스테인드글라스로 가득 채워 보석빛의 일광이 실내에 흘러들도록 만들었다.
마티스는 한겨울 오전 11시에 가장 아름다운 빛의 향연을 볼 수 있다고 알려주었다. 그는 이 성당 작품이 자신의 일생의 역작(力作)이었다고 스스로 평가했다. 마티스가 무신론자(無神論者)였다는 것을 잘 알고 있던 피카소는 “마티스, 차라리 사창가(私娼街)를 장식할 그림을 그리지 그래?”라고 비아냥 섞인 농담을 건넸다. 그는 “누가 부탁을 해야 말이지”라고 넉살 좋게 받아쳤다. 마티스의 말은 어쩌면 진심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자신의 작품이 어디에 있든 많은 사람이 볼 수만 있다면, 작품에서 위안을 받을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했을 테니까.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 1869~1954), ‘춤(The Dance)’,
1909년, 260x391cm,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슈 미술관.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 1869~1954), ‘춤(Dance II)’,
1910년, 260x391cm,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슈 미술관
“세 가지 색만으로도
조화로운 그림을 그릴 수 있다”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
러시아의 상인이자 남작이었던 세르게 슈츄킨의 주문으로 그린 작품. 선과 색채, 형태를 혁명적으로 적용한 이 그림은 20세기 회화의 중요한 운동인 표현주의와 추상주의의 토대가 되었다. 이 작품을 그리면서 마티스는 “세 가지 색이면 충분하다. 하늘을 칠할 파란색, 인물을 칠할 붉은색, 그리고 동산을 칠할 초록색이면 충분하다. 사상과 섬세한 감수성을 단순화시킴으로 우리는 고요를 추구할 수 있다. 내가 추구하는 유일한 이상은 ‘조화’다”라고 말했다.
마티스는 “창조란 곧 용기다”라는 신념으로 남들이 뭐라 하든 자신이 그리고 싶은 것을 자신이 표현하고 싶은 방식으로 그려나갔다. 그의 작품 〈춤〉 속의 대상들도 주변의 환경 따위는 개의치 않고 자신들의 동작에 몰입하고 있다. 딴딴해진 배와 불거진 근육의 나체들은 역동적인 흐름 속에서도 각자의 개성이 살아 움직인다.
그 뒤 마티스는 언젠가 해변에서 보았던 춤추는 카탈로니아인 어부들에 관한 기억을 더듬어 작품 〈춤〉을 그렸다. 밝은 하늘을 배경으로 나체의 다섯 사람이 손에 손을 잡고 춤을 추는 이 그림은 또다시 야만적이라고 폄하를 받게 되는데, 비평가 카미유 모클레르는 “페인트 통이 대중의 얼굴에 내동댕이쳐졌다”며 격하게 비난했다. 물론 지금은 그의 대표작 중 하나로 극도의 단순함 속에서 원시적인 에너지가 꿈틀대는 작품이라고 칭송을 받고 있지만 말이다.
앙리 마티스, ‘음악(Music)', 1910년, 캔버스에 유채, 260×389cm,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헤리티지 미술관
앙리 마티스, ‘음악(Music)’, 1939년, 캔버스에 유채, 115.2x115.2cm, 뉴욕 올브라이트녹스 미술관.
앙리 마티스, ‘호사, 평온, 쾌락’, 1905년, 캔버스애 유채, 98×118cm, 파리 퐁피두센터 국립현대미술관.
앙리 마티스, '푸른 누드(Nu Bleu)', 1907년
앙리 마티즈, '목련꽃을 든 오달리스크(Odalisque with Magnolias)', 1923년.
앙리 마티즈, ‘오달리스크(Odalisque)’, 1920-21년, 74x61cm, 암스테르담 시립미술관.
앙리 마티즈, ‘(붉은 색 조화의 오달리스크, Odalisque, Harmony in Red)’,
1926-27년, 55x38cm,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
앙리 마티즈, ‘검은색 안락의자에 앉은 오달리스크(Odalisque in Black Armchair, Odalisque au fauteuil noir),
1942년, 유화, 46x38cm, Private_Collection.
앙리 마티즈, '탬버린을 든 오달리스크(Odalisque with Tambourine or Harmony in Blue)',
1926년, 65x92cm, 파사데나 노튼 사이먼 미술관./
앙리 마티즈, '앉아있는 오달리스크(Seated Odalisque)', 1926년, 60x73cm,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 '루마니아 풍의 블라우스를 입은 여인(La Blouse Roumaine)',
1940년, 캔버스에 유채, 92×73cm, 파리 퐁피두 센터 국립근대미술관
오달리스크는 이슬람 궁전의 하렘에서 일을 하는 시종 여자노예를 일컫는 말이다. 오다가다 술탄이나 하렘의 주인에게 눈이 띄면 첩 Cocubine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실 오달리스크에게 성적인 의미는 달리 없었던 것 같다. 하지만, 낭마주의시대와 신고전주의 시대의 몇몇 유명한 화가들이 오달리스크를 오리엔탈리즘과 관련된 섹시 아이콘으로 만들어 놓았다.
앙리 마티스, ‘장식적 무늬가 있는 인물화(Decorative Figure on an Ornamental Background)’, 1925-1926년.
✵ 예썰 셋, 병상에서도 꺾이지 않은 예술혼. 붓 대신 ‘이것’을 들다! 일흔이 넘은 나이, 마티스는 여러 번의 수술로 건강이 악화된 상태였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 또한 마티스의 창작욕을 꺼뜨리진 못했다. 기존의 방식으로 작업을 이어나가기 쉽지 않자, 마티스는 색다른 창작 방식을 찾아 나갔다. 병상에서 긴 막대에 붓을 달아 그림을 그리기도 했고, 붓과 물감이 아닌 새로운 방법을 실험하기도 했다. 마티스가 붓 대신 든 ‘이것’은 무엇일까?
앙리 마티스, ‘왕의 슬픔(La tristesse du roi)’, 1952년, 캔버스애 유채, 292x386cm, 조르주 퐁피두센터 소장.
앙리 마티스, 한 다발(La gerbe), 1953년.
앙리 마티스, '구성', 1951년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1869~1954년), ‘푸른 누드 II(Blue Nude II)’, 1952년
앙리 마티스, ‘푸른 누드(Blue Nude)’, 1952년, 색종이에 가슈, 116.2×88.9cm, 프랑스 니스 마티스 미술관.
아멜리와의 갈등으로 잠시 떨어졌던 마티스와 리디아는 이혼 후 자연스럽게 재회했다. 리디아의 살뜰한 보살핌으로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해가던 마티스는 십이지장암과 폐색전증으로 몸져눕게 된다. 주변 사람들은 모두 그가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의사에게 조금이라도 더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했고 1941년에는 위험한 수술까지 감행했다. 수술 후 다행히 몸은 회복했지만 의사는 그에게 더 이상 폐에 해가 되는 유화를 그리지 말라고 경고했다. 그 역시도 더 이상 이젤 앞에 서서 붓을 잡는 것은 무리였다.
리디아, 그녀는 어쩌면 예술의 신(神)이 그에게 보내준 수호천사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녀가 있었기에 마티스는 자신의 바람대로 사람들에게 안락함을 선사하는 예술품들을 창조해낼 수 있었다. ‘분노에 찬 야수’로 시작된 그의 예술 여정은 이렇게 ‘행복한 신사’로 끝이 났다.
야수파(Fauvism)의 대표 화가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는 십이지장암으로 수술을 받은 후 죽을 때까지 침대와 휠체어 신세를 지게 된다. 그는 이젤 앞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고통스러워 다시는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되었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마티스는 좌절하지 않고 그의 유명한 컷아웃 기법(종이 오리기)으로 작업하기 시작했다.그는 종이에 과슈를 바르고 색종이를 잘라 붙이는 행위가 마치 조각의 과정과 흡사하다고 여겼고 “가위는 연필보다 더 감각적이다”라는 말을 했다.
컷아웃 기법은 앙리 마티스의 색과 형, 색채와 드로잉 사이의 영원한 갈등에 대한 해결책이었다. 그가 자신의 다른 작품들보다 컷아웃을 통해 ‘훨씬 더 높은 완성도’를 성취할 수 있었다고 하니 이 종이 오리기를 얼마나 좋아했는지 알 수 있다.
마티스는 지중해의 기후와 풍광 그리고 그 바다가 연출하는 빛과 색깔을 너무나 사랑했다. 그는 어디에서 작품 활동을 하거나 어떤 곳을 여행할 때도 오직 지중해를 향한 사랑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끊임없이 니스를 중심으로 하는 지중해로 돌아오곤 했다. 지중해는 마티스에게 일종의 종교와도 같았다.
마티스의 평생은 그가 사랑하는 깊이와 한계를 알 수 없고 우주를 통 큰 하나의 유기체로 만드는 바다, 영원한 생명력의 원천 지중해의 아름다움과 지중해가 그에게 함축하는 의미를 형상화하려는 여정이라 할 수 있다.
그가 세상을 하직하기 2년 전 지중해의 아름다운 푸르름을 닮은 ‘푸른 누드’ 연작이 완성되었다. 작품 속의 인체 형상은 극도로 단순해지고, 채색도 오로지 파란색으로 제한되어 간결미를 높였다. 캔버스를 가득 채운 인물은 약간 고개를 숙이며 한 손은 머리 뒤로 넘기고 다른 손은 늘어뜨려 꼬아서 앉은 다리의 발목을 잡고 있다. 푸른 몸의 인물은 굉장히 단순해 보이지만 관절 사이 가위로 잘린 공간으로 인해 운동감이 부여되었다. 그래서 푸른 뭉텅이처럼 보였던 인물이 가위질 된 공간을 따라 움직이는 것 같다.
마티스는 진짜처럼 보이는 그림에는 흥미가 없었다. 눈으로만 보는 그림이 아니라 풍부한 색을 통해 마음으로 보는 그림이 되길 바랐다.
마티스는 삶의 의미를 찾고 평생 행복감과 기쁨을 추구해갔다. 자아와 세상의 조화 속에서 즐거움으로 충만한 그림을 제작하였던 작가로 말년으로 갈수록 좋지 못한 건강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보는 시각은 변함없이 충만 된 행복과 기쁨으로 낙관적이었던 최고의 멋진 작가였다.
앙리 마티즈, '이카루스(Icare: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다이달로스와 미노스의 여종 나우크라테의 아들)',
1946년, 콜라주, 43.4×34.1cm, 파리 조르주 퐁피두 센터.
마티스의 종이 오리기 작품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이카루스(Icare)〉이다. 태양에 너무 가깝게 다가간 바람에 날개를 고정해 붙인 밀랍이 녹아 추락한 그리스 신화(神話) 속 소년, 이카루스. 마티스의 작품 속에서 이카루스는 추락하는 공포에 사로잡혔다기보다는 마치 기쁨의 춤을 추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어떤 이들은 이 작품이 프랑스 레지스탕스 전사(戰士)들을 상징한다며, 당시 프랑스를 점령 중이던 나치에 대한 마티스의 은근한 비판이라고 해석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들의 해석일 뿐이다.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 ‘폴리네시아 바다, 1946년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 ‘폴리네시아 하늘’, 1946년
이 단순한 형태를 만들기 위해서 300마리가 넘는 새를 키우며 관찰했다고 하니, 위대함이란 저절로 붙여지는 이름이 아닌 것은 불변의 진리입니다.
앙리 마티스, ‘피아노 레슨(Piano Lesson)’, 1916년, 캔버스에 오일, 245×2127cm.
계속되는 작업과 긴장감은 결국 마티스의 심장을 쇠약하게 만들었다. 그는 1954년 11월 3일 85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죽기 전날, 그는 리디아를 앉혀놓고 병상에서 마지막 초상화를 스케치했다. 스물두 살에 그의 집에 들어온 리디아도 어느덧 40대의 중년이 되어 있었다.
마티스가 사망하자 아멜리가 그의 유산(遺産)을 처리하기 위해 도착했고 그녀는 즉시 리디아를 내쫓았다. 하지만 미완의 상태로 남아 있는 수많은 작품을 정리하기 위해서는 리디아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충실한 리디아는 마티스를 위해 다시 그 집으로 돌아가 일을 마무리했다. 마티스는 자신에게 젊음을 바친 그녀를 위해 많은 작품을 선물로 주었고 리디아는 작품을 파는 대신 자신의 고국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주미술관에 기증했다.
마티스는 평생 온몸이 아팠고 단 하루도 편히 잠들지 못하는 극심한 불면증에 시달렸다. 그 속에서 그는 강한 정신력으로 고행 중인 성직자처럼 날마다 빠지지 않고 일기 또는 편지를 썼다. 그는 “내가 이렇게 간절하고 절실하게 그림 그렸다는 걸 아무도 몰랐으면 좋겠다”고 일기에 적었다.
“내 그림들이
봄날의 즐거움을
담았으면 한다.
내가 얼마나
노력했는지는
아무도 모르게”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
“나는 규칙과 규범을 신경 쓰지 않고
내 색깔을 노래하는 것만 생각했다”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
“내가 파란색을 택한다고 해서
원래는 하늘을
그리고 있는 것은 아니다”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1869~1954년)
“초록색을 칠한다고 해서
그것이 풍경를 의미하지 않는다”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1869~1954년)
색의 고정과념을 깬 색채의 마술사
色다른 꿈을 꾸다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 '앵무새와 인어(The Parakeet and the Mermaid)',
1952년, 종이에 구이슈, 컷 아웃과 종이에 풀칠, 캔버스에 고정, 337×768.5cm, 아스테르담 시립박물관
참고문헌 및 자료출처: KBS1 <예썰의 전당>, [37회] 색다른 꿈을 꾸다, 앙리 마티스(2023년 01월 29일 22:30 방송)/ 월간조선TV NewsRoom Exclusive 2023년 01월 MAGAZINE(추명희 작가)/ Daum·Naver 지식백과/ 이영일 ∙ 고앵자, 채널A 정책사회부 스마트리포터 yil2078@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