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장군의 시조(時調)에 대한 박정희 대통령의 화답(和答)
우리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 한시(漢詩)로 알고 있는
한산섬 달밝은밤에 수루에 홀로앉아
큰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하던 차에
어디서 일성호가(一聲胡茄)는 남의 애를 끊나니
초등학교시절부터 잘 아는 이글은 시(詩)가 아니고 시조(時調)다.
위의 시조(時調)의 배경이 한산도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충무공이 임진왜란 때
전라좌도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가 되어 한산도에서 수군의 진을 치고 있을 때
착잡한 심회와 충정을 노래한 것으로 보인다.
시조(時調)는 한국 고유의 정형시(定型詩)로 중국에는 없다.
중국은 한시(漢詩)가 정형시(定型詩)다
한국 시조(時調)는 고려 초기부터 불려 왔다고 하는데 “시조(時調)”라는 명칭의
정확한 유래는 모른다.
한국의 3대 시조집(時調集)이라고 하면
청구영언(靑丘永言) 해동가요(海東歌謠) 가곡원류(歌曲源流)를 일컫는다.
필자도 시조(時調) 근원(根源)에 대하여는 잘 모르며 다음기회에 자료를 정리할 생각이다.
위의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한산섬 닮밝은밤에~~~”의 시조(時調)는
이 시조(時調)를 첫번째 한역(漢譯)은 조선조 후기의 실학자 이긍익(李肯翊)이다.
두 번째 한역(漢譯)은 중국 북경대학 위욱승(韋旭昇)교수다.
세 번째 한역(漢譯)도 역시 중국 장련괴(張蓮瓌)교수라고 한다.
충무공전서(忠武公全書) 에는 “한산도야가(閑山島夜歌)”라 하여
한산섬 달밝은밤에~~~가 한역(漢譯)되어 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한산도야가(閑山島夜歌)에 대하여
박정희 대통령은 화답(和答) 시조(時調)를 썼다.
화답(和答)
한산섬 수루(戍樓)에 올라
우리 님 얼마나 애 타신고
그 충성 그 마음 받아
겨레 사랑 나라 살림
맹세코 통일과 번영
이루고야 말리라
박정희
위 박정희 대통령의 충무공의 “한산도야가(閑山島夜歌)”에 대한 화답(和答)의 시조는
충무공의 충성과 마음을 이어 받아 통일과 번영을 이루겠다는 결의를 다지고 있다.
박정희 대통령의 조국 근대화 정신이 여기에서 비롯됐음을 짐작하게 한다.
박정희 대통령은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3년간 교사로 재직했다.
박정희(朴正熙)는 교사시절 풍금 연주와 노래를 잘했다고 전한다.
1972년 “새마을 노래”를 작사·작곡 했다.
가사는 노산 이은상(李殷相)이 감수했다고 한다.
위의 시조(時調)는 제6대 대통령이던 1970년에 쓴 것이라고 전한다.
박정희 대통령은 충무공의 유적지 정화와 현창(顯彰)에 노력했다.
1966년 충남 아산 현충사의 성역화 사업을 추진했다.
1968년에는 서울 광화문에 국내 최대 규모의 충무공 동상을 세웠다.
한산도 제승당, 여수 진남관 등 충무공 유적 정화 사업을 진행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시조(時調)를 한 수를 더 읽는다.
남들은 무심할 제
님은 나라 걱정했고
남들은 못 미친 생각
님은 능히 생각했오
거북선 만드신 뜻을
이어받드옵니다
박정희
한나라의 대통령이라면 박정희 대통령 포부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을까 !
농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