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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월 30일 연중 제4주일 (해외 원조 주일)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마태오 5,1-12)
“Blessed are the poor in spirit,
for theirs is the kingdom of heaven.
말씀의 초대
스바니야 예언자는 하느님과 맺은 계약을 저버리고 사회적 불의와 부도덕을 일삼는 이스라엘을 질타하지만, 겸손되이 가난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하느님께서 그들 가운데 계심을 알린다(제1독서). 하느님께서는 세상의 어리석은 것, 약하고 비천한 것을 선택하셔서 세상의 강하고 지혜롭다는 사람들을 부끄럽게 만드신다. 우리가 어떤 처지에 있든지 오로지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의 일을 해야 한다(제2독서).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은 ‘영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말한다. 세상 것에 얽매이지 않고, 오로지 하느님께 마음을 두고 사는 겸손한 사람을 가리킨다. 참행복을 누리려면 갖추어야 할 첫 번째 마음 자세이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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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라고 말한 사람은 공산주의 창시자 칼 마르크스입니다. 종교에 대한 이런 오해는, 종교가 죽음 후에나 누리는 천당이라는 환상 속의 행복을 설정해 놓고, 사람들을 달래고 마취시켜서 착취 계급에 순종하도록 한다는 잘못된 생각에서 옵니다.
그러나 산상 설교의 참행복은 오히려 현실의 역동성을 드러내는 것이지, 미래에 주어질 이런 몽환적 행복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가난하고 슬프게 살면 나중에 하늘 나라에서 행복해진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현실에서 가난한 마음, 빈 마음이 되었을 때 누리는 하늘 나라의 기쁨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삶의 슬픔의 밑바닥에서 들리는 ‘하느님의 위로’가 있고, 우리의 온유함 안에, 의로움과 자비로움, 깨끗한 마음 안에 그리고 평화를 일구어 가는 우리의 삶 안에, 이미 세상이 말하는 행복과 다른, ‘참행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현실 속에서 이런 참된 행복을 맛보고 살지 못한다면, 죽음 이후의 하느님 나라에서 주어질 기쁨은, 내가 누릴 수 없는 ‘낯선 기쁨’이 될 것입니다. 세상에 살면서 한 번도 하느님 나라를 맛보지 못한다면, 미구에 주어질 하느님 나라도 결코 ‘나의 나라’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세상에 살면서 적어도 단 한 가지라도 참행복을 맛보고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말씀하신 여덟 가지 행복 가운데 우리 자신은 어떤 행복을 맛보며 살고 있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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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참행복에 대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참행복이 어떻게 가난에 있는 것인지요? 어찌하여 슬픔에 있고 박해 속에 있는 것인지요? 알아듣기 힘든 말씀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생각합니다. 그런데도 성경은 계속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는지요?
새벽을 열며
-조명연신부-
요사이 이상하게 생각될 만큼 저녁에 모임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 모임이 그냥 단순한 모임이면 괜찮겠지만, 식사도 하고 술도 한 두 잔 하는 모임이라 늘 부담감이 있었지요. 왜냐하면 이렇게 늦게까지 술과 음식을 먹다보니, 허리 사이즈가 늘어나면서 체중도 많이 불게 되거든요. 따라서 이제는 이러한 저녁 모임을 좀 자제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어제 저녁, 모임이 오랜만에 없었습니다. 저는 책도 보고 글도 좀 쓰면서 나름대로 시간을 활용하려고 애썼지요. 그런데 갑자기 시장기를 느끼게 됩니다. 시계를 보니, 평소 술자리를 갖는 시간이었어요. 꾹 참았지요. 조금만 참으면 괜찮을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저의 소망일뿐이었습니다. 시장기는 계속해서 저를 괴롭혔고, 무엇인가를 이 시간에 먹느니 그냥 자는 것이 나을 것 같아서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이제 또 하나의 문제가 생겼습니다. 평소에는 머리만 대면 잠이 왔는데, 배가 고파서 그럴까요? 잠이 좀처럼 오지 않습니다. 자고 싶은데 잠이 오지 않는다는 것, 정말로 괴롭더군요. 간신히 잠이 들었고, 새벽에 다시 일어났습니다. 어젯밤에 느꼈던 시장기는 완전히 사라졌고 기분도 상쾌했습니다.
행복은 어디에 있을까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처럼 보이는 부와 명예에? 아닙니다. 부와 명예에 있을 수도 있지만, 꼭 여기에만 있다고도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제발 나에게는 다가오지 않았으면 하는 고통과 근심과 시련에는 행복이 없을까요? 그것도 아닙니다. 고통과 근심과 시련에는 행복이 없을 것 같지만, 여기에도 행복은 있습니다. 이러한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배가 좌초되어 단 한 사람이 살아남았습니다. 그는 파도에 밀려 사람이 살지 않는 섬에 도착했지요. 그는 하느님께 열심히 기도하고, 날마다 바다를 바라보며 지나가는 배가 없는지 살폈지요. 그러나 도움을 받을 만한 것이 없자, 그는 그곳에 임시도 작은 오두막을 짓고는 좌초된 배에 남아 있는 물건들을 오두막에 옮겨 놓았습니다.
어느 날, 그는 먹을 것을 찾으러 섬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먹을 것을 구한 뒤, 오두막으로 돌아와 보니 불이 난 것이 아니겠어요. 너무나 큰 불이라 도저히 자신의 힘으로는 끌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절망감에 어쩔 줄 몰라 했습니다. 오두막은 금세 재가 되었고, 그는 당장 그 날 밤에 잘 곳도 없었지요. 그런데 잠시 뒤, 배 한 척이 섬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는 깜짝 놀라며 배에 다가가 선장에게 자신이 섬에 있는 것을 어떻게 알고 찾으러 왔느냐고 기뻐하며 물었습니다. 이에 선장은 이렇게 답했지요.
“당신 낸 연기를 보고 찾아왔지요.”
불행이라고 느끼는 순간 역시도 행복이 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에서 말한 행복의 조건이 가난한 사람, 슬퍼하는 사람,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박해를 받는 사람 등등 오히려 인간적으로 불행해 보이는 사람들이 행복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아닐까요? 왜냐하면 이러한 사람들이 작은 것에도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여지가 많기 때문이지요.
행복하고자 하는 것은 모든 이의 소원입니다. 그런데 이 소원은 이미 이루어졌습니다. 단지 너무 큰 것만을 바라는 우리의 욕심이 그 행복을 보지 못하게 할 뿐입니다.
나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훌륭한 표양
-정인준 신부-
2005년 12월, 소록도의 마가렛 수녀님과 마리안나 수녀님이 40여 년의 생활을 접고 한 통의 편지만 남긴 채 고국 오스트리아로 떠났습니다. “이 편지를 쓰는
것은 저에게 아주 어려운 일입니다. 한편은 사랑의 편지이지만 한편은
헤어지는 섭섭함이 있습니다. 우리가 떠나는 것에 대해 설명을 충분히 한다고 해도 헤어지는 아픔은 그대로 남아 있을 겁니다. 각 사람에게 직접 찾아뵙고
인사를 드려야 되겠지만 이 편지로 대신합니다”라고 시작하는 편지를 읽었을 때 두 수녀님들의 아름다운 삶을 보는 듯했습니다. 마가렛 수녀님은 1959년
12월에, 마리안나 수녀님은 1962년 2월에 한국에 오셔서 가난하고 소외된
나병환자들의 벗으로 봉사하며 살다가 노년의 삶이 병자들과 주민들에게
짐이 될까 남모르게 떠나셨던 것입니다. 문득 요한 금구 성인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훌륭한 설교는 감동을 주지만 훌륭한 표양은 사람의 삶을
변화시킨다.” 오늘 주님의 말씀은 여러 가지로 나누어볼 수 있겠지만
요약하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박해를 받던 예언자들을 본받으라는 분부와 함께 마음이 가난하고, 슬퍼할 줄 알고, 온유하며, 의롭고 자비로우면서
끝까지 박해를 감수하며 의로움을 지키는 사람이 되라고 당부하시는 것입니다. 가난하게 살다가 훌쩍 떠난 두 분의 수녀님을 생각하며 사제서품 때
상본에 새겼던 오늘 말씀을 다시 가슴에 새겨봅니다.
가난한 이웃 위해 무엇을 했는가
-배광하 신부-
가난한 사람들
우리는 늘 하느님 나라로의 최종 목표를 두고 지상 여정의 삶을 순례하는 순례자로 살아야 합니다. 그 순례의 첫 번째 삶의 지표를 오늘 예수님께서는 장엄히 선포하십니다. 이름하여 ‘산상설교’ 혹은 ‘진복팔단’이라 불리는 가르침입니다. 가르침의 첫 말씀은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3) 입니다.
그런데 루카 복음에서는 ‘마음’이 빠져있고 그냥 ‘가난한 사람(루카 6, 20)’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때문에 가난은 물질적 가난과 정신적 가난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계명을 충실히 지켰던 부자 젊은이에게 재물을 다 팔아 가난한 이에게 나누어 주고 당신을 따라야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나 재산이 많았던 젊은이는 차마 그렇게 할 수 없었기에 슬퍼하며 예수님을 떠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다른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마태 19, 24).
세상 재물의 집착과 유혹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데 얼마나 많은 걸림돌이 되는지를 단적으로 가르치신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 안에 구원에 이르는 재미있는 가르침이 있습니다. 낙타가 바늘구멍을 빠져나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우선 ①낙타를 죽입니다. ②죽은 낙타를 불로 화장 시킵니다. ③화장 시키고 남은 낙타의 뼈를 밀가루처럼 곱게 빻습니다. ④곱게 빻은 뼈 가루를 작은 깔대기를 통해 바늘구멍 속으로 조금씩 통과 시킵니다.
우스갯소리처럼 들릴지 모르나 가르침이 있는 이야기입니다. 구원에 이르기 위하여는 우선 먼저 나를 불태워야 합니다. 내게 있는 세상 것들을 죽여야 가능합니다. 그리고 잘게 부서져야 합니다. 세상 재물과 욕심으로 비대해진 몸으로는 결코 구원에 이르는 작은 문을 통과할 수 없습니다. 물질적이든 정신적이든 최대한 작아지고 가난이라는 동반자와 함께 들어갈 수 있는 곳이 하느님 나라인 것입니다.
박해받는 사람들
프랑스인들에게 가장 존경을 받았던 세계적인 휴머니스트, 박애주의자이셨던 ‘아베 피에르(1912~2007)’ 신부님은 예수님의 진복팔단의 말씀을 묵상하시면서 첫째 말씀과 마지막 여덟째 말씀에 특히 주목하십니다. 그러면서 신부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그것은 프란치스코 성인처럼 자신이 가진 모든 재산을 나누어 준다는 의미가 아니다. 내가 국가 원수이건, 회사의 우두머리이건, 교사이건 매일 저녁 ‘나의 능력과 특권과 재능과 학식을 가지고 약자들과 가난한 이들을 위해 무엇을 했는가?’라고 묻는 자가 마음이 가난한 자인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으로서 십자가의 어리석음, 계산적이지 않은 손해 보는 삶을 살고, 그리스도인의 정직을 살려면 반드시 박해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세상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예수님께서는 가르치십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하였다는 것을 알아라. 너희가 세상에 속한다면 세상은 너희를 자기 사람으로 사랑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다”(요한 15, 18~19).
예수님 말씀처럼 가난한 마음으로 살려면 세상은 늘 우리를 괴롭힙니다. 때문에 예수님의 여덟 가지 행복선언 중 첫 번째와 마지막 선언에 대한 보상이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 3; 10) 라고 되어있는 것입니다. 아베 피에르 신부님은 마지막 행복선언에 대하여도 이렇게 말합니다.
“마지막 행복은 반드시 순교자로 죽어야 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세 사람이 있는데 그들 중 가장 힘센 자가 가장 힘없는 자를 착취하려 할 때, 나머지 한 사람이 ‘네가 나를 죽이지 않고서는 이 힘없는 자를 아프게 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하는 날, 하늘나라는 이미 이 땅에 와 있는 것이다.”
이 같은 용기 역시 세상 것을 추구하지 않고 살았던 진정한 마음의 가난이 있어야 가능한 것입니다. 나의 겸손과 가난과 어리석음으로 고통의 이 세상이 그래도 살만한 가치가 있음을 보여 주는 것, 예수님의 기쁨이 존재함을 삶으로 보여주는 이가 참된 행복을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교황 ‘베네딕토 16세’께서 추기경 시절에 이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교의 기본 요소는 기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절망의 배후에 생길 수 있는 값싼 즐거움 따위의 기쁨이 아닙니다. 그것은 고통스러운 삶과 함께 하며 이러한 삶조차도 살만한 것으로 만들어 주는 그런 기쁨입니다.”
참된 행복
-허영엽 신부-
시각 장애인 학교의 선생님 한 분을 잘 알고 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시각 장애인이신 그 선생님은 보이지 않는 슬픔보다 가까운 가족의 몰이해가 자신을 더 슬프게 한다고 합니다. 방 안에서는 활동이 전혀 어렵지 않은데, 수십 년을 같이 살아온 어머니조차도 이 사실을 잘 모르시는 것 같아 속상할 때가 많다고 합니다. 물건이라도 혼자 옮기려 하면 “얘야, 그건 네가 못한다. 하지 말라니까, 웬 고집이 그렇게 세냐?” 하면서 핀잔을 주신답니다. 가장 가까운 어머니에게서도 이해받지 못하는 현실이 그분을 가장 힘들고 어렵게 만든다고 합니다.
그래도 속을 터놓고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은 역시 장애인 친구라고 합니다. 친구랑 밤늦도록 전화로 서로의 처지를 하소연하는 것이 유일한 기쁨이라고 합니다. 그 선생님은 아무리 서운하고 억울한 일을 당해도 사람을 미워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고 합니다. 왜냐고 물었더니 그분은 쓸쓸하게 웃으며 말했습니다. “이 다음에 죽으면 이 세상을 떠나 하늘나라에 가고 싶어요. 그래서 하늘나라에서는 정상의 눈으로 태어나 아름다운 것을 보고 싶어요. 만약에 지은 죄가 많아 하늘나라에 가지 못하면 내 인생이 너무 억울하잖아요.”'
‘행복’이란 단어는 늘 우리를 설레게 합니다. 모든 인간은 행복을 원하지만 정작 어떤 것이 진정한 행복인지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잠시 행복하다고 느꼈다가도 이내 사라져 버리는 것을 체험합니다. 오늘 예수께서는 참된 행복을 가르쳐 주십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마태 5,3).”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란 어떤 사람일까요? 그 어느 것에도 희망을 둘 수 없고 오로지 하느님께만 희망을 둘 수밖에 없는 마음이 가난한 마음이 아닐까요? 이렇게도 안 되고 저렇게 애를 써도 안 되는 그런 자포자기의 마음 말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쩔 수 없이 하느님께 어린이처럼 매달리게 됩니다.
세상에서는 많은 것을 가지고 누려야 행복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것은 우리에게 진정한 행복을 줄 수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변하고 바람처럼 속절없이 지나가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사람, 실패하고 패배를 맛본 사람이 오히려 인생에서 자신의 한계를 알고 겸손해집니다. 그리고 지금 내가 가진 소중한 것을 보는 눈을 갖게 됩니다. 어쩌면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 가르치신 참된 행복은 인간편에서 찾고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행복입니다.
역설적으로, 우리는 버림으로써 오히려 많은 것을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참된 행복은 진정으로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의 것입니다. 헬렌 켈러 여사의 말처럼 “지금 내가 보고 있어도 보지 못하는 것처럼, 지금 내가 듣고 있어도 듣지 못하는 것처럼” 산다면 우리의 삶은 더 행복하고 여유롭지 않을까요?
행복의 사람
-고준석 신부-
우리 인생의 목표는 무엇인가? 바로 행복일 것이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든 믿지 않는 사람이든 한결같이 자신이 행복하기를 바라고 행복을 좇아서 살아간다. 어느 누구도 자신이 불행해지기를 바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자신이 행복하게 된다면 무엇이든지 할 것이다.
사회적으로 인간의 행복에로의 욕망을 채워 주는 것은 참으로 다양하다. 물질적 재산 혹은 육체적 쾌락, 또는 권력, 명예, 화려한 직업 등… 우리 각자는 이러한 것을 얻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자녀들 교육도 남부럽지 않게 시키고 내 집을 장만하고 거기에 짭짤한 수입으로 화려한 가구와 골동품도 골고루 들여놓으며 고급 승용차를 타고 편안하게 사는 꿈을 꾼다. 사실 우리 사회에서는 이러한 것들이 있어야 존경받고 어깨를 피며 살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것들이 모두 채워졌다고 해서 우리가 과연 행복할까라는 것은 의문이다.
우리 인간이 본질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행복이라면, 과연 진정한 행복이란 무엇일까? 또한 행복에 이르는 조건은 무엇일까? 과연 물질적이고 현세적인 가난함에도 연연해하지 않고 행복을 추구할 수 있을까? 이 점에 대해서 오늘 성경 말씀은 참된 행복이 무엇인지 말하고 있다.
제1독서에서 스바니야 예언자는 행복의 조건을 겸손하고 가난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주님을 찾아라, 그분의 법규를 실천하는 이 땅의 모든 겸손한 이들아! 의로움을 찾아라. 겸손을 찾아라”(스바 2,3). 세상 부귀영화에 집착하지 않고 하느님의 법을 우선적으로 선택하는 가난한 삶, 그리고 하느님 앞에 겸손한 생활자세가 바로 행복에 이르는 길임을 말한다.
제2독서(1코린 1,26-31)는 하느님의 부르심, 성소의 소중함을 일깨우면서 우리 가운데 그 어떤 세속적인 기준도 결코 하느님 보시기에 자랑거리가 될 수 없음을 강조한다. 하느님의 선택 기준은 보잘것없고 멸시받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어느 누구도 하느님 앞에 자신을 내세울 자격이 없다고 말한다. 겸손이야말로 하느님의 축복을 받고 행복에 이르는 또다른 조건임을 말한다.
오늘 복음(마태 5,1-12遁)에서 예수님께서는 진정 행복한 사람이 누구인지 구체적인 예를 들어가며 말씀하신다. 복음은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로 시작함으로써 영적인 가난을 강조한다. 다시 말해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은 재물이 아니라 가난한 정신을 갖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지적인 능력, 사고, 계획, 우리의 성성(聖性)까지도 포함하여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그 모든 것에 집착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마음으로 가난한 사람이란 소유에 집착하지 않고 모든 것을 하느님께 의탁하는 사람이다.
결국 오늘 성경 말씀 모두는 진정한 행복이란 철저히 하느님께 기초한 겸손한 믿음에서 출발한다고 말한다. 행복을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다. 어떤 처지에서든 감사하며 자신의 능력, 재물에 집착하지 않고 자신이 가진 모든 것들을 자신의 영광이 아닌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할 때 우리는 진정한 행복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듯이 진정 행복한 사람은 자신이 가진 바에 집착하지 않고 항상 하느님의 뜻을 따르며, 항상 감사하는 겸손한 믿음을 지닌 사람일 것이다.
하느님을 아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이기양 신부-
간혹 "저 집은 잘 사는 집이에요"라는 말을 듣는 경우가 있습니다. 여기서 '잘 산다'는 뜻은 부자라는 의미가 강하게 내포되어 있지요. 그런데 이 말은 부자만 되면 잘 살고 행복해진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말인 것 같습니다. 경제적으로 부자가 된다고 자동으로 행복해지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대다수 국민들이 부러워하고 꿈꾸는 인기 연예인이나 수백만 달러의 연봉을 받는 운동선수, 큰 권력에 오른 정치인들 역시 인기나 돈, 권력 그 자체가 행복을 만들어 주지는 않는다는 것을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것을 모두 가진 것 같은 이들이 알코올 중독이나 마약 중독에 빠져 스캔들을 일으키고 불행하게 일생을 마감하는 경우를 자주 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많이 가지고, 남들보다 높은 자리에 오르거나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하고 살면 행복할 것이라는 잘못된 편견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우리에게 오늘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참된 행복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시는데 쉽게 이해가 되지를 않습니다. 어떻게 슬퍼하는 사람이 행복하고, 모욕받고 박해받는 사람이 행복할까요? 우리는 인생을 호의호식하며 살고 싶고, 남들에게 칭찬 받으며 살고 싶은데 정반대의 말씀을 하고 계시니 어찌 살아야 할지 난감해집니다. 그렇다고 예수님께서 무소유의 삶이 행복하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소유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행복하다는 말씀이지요. 가진 것이 많아 그것만을 의지하고 산다면 그는 불행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 (루카 12,16-21)에서 재산만을 의지하고 끝없는 욕심을 부리며 사는 삶이 얼마나 불행한 삶인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느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산다면 가진 것이 적어도 하느님 때문에 어려운 처지에 빠져도 행복한 삶이라는 강조의 말씀이 오늘 복음 말씀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은 배우는 사람이고,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감사하며 사는 사람이다"(탈무드)는 말처럼 우리가 행복하지 못한 이유는 감사하는 삶을 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행복은 무엇을 소유했느냐, 어떤 위치에 있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내 것을 얼마나 나누며, 얼마나 감사하고 사느냐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감사의 삶을 통해 행복해지지 못하는 이유는 이기적인 욕심과 타인과의 상대적인 비교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어느 날 영국의 콩글톤 경은 부엌에서 일하는 하녀들의 말을 우연히 듣게 되었습니다.
"오! 나에게 5파운드만 있다면 정말 행복할 텐데…."
무심히 지나치다 들은 말이지만 그는 하녀의 말이 계속 귓가에 맴돌았습니다. 그는 정말 행복해 지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부엌으로 찾아가 그녀가 정말 행복해지기를 바란다고 말한 뒤, 5파운드를 건네주었습니다. 하녀는 감격하여 그의 친절에 감사를 드렸습니다. 콩글톤 경은 부엌을 나와 작은 돈으로도 한 사람을 행복하게 한 자신의 선행을 기뻐하며 문 밖에 서 있었습니다. 그 때 안에서 하녀의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난 참 바보야. 왜 10파운드라고 말하지 못했을까?"
영화 '아마데우스'를 보면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와 안토니오 살리에리가 등장합니다. 살리에리는 당대 최고의 음악가로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었지만 모차르트가 등장하면서 열등의식으로 불행의 늪으로 빠져듭니다. 그를 화나게 만드는 것은 자신이 밤잠을 설쳐가며 온 힘을 기울여 만든 작품은 아무도 기억해 주지 못하지만 놀 것 다 놀고 취미삼아 작곡한 모차르트의 곡은 불후의 명작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를 더욱 비참하게 만드는 것은 모차르트의 천재성을 꿰뚫어 보는 안목을 가진 자신이었습니다. 그는 절규합니다. "왜 저에게는 천재를 알아 볼 수 있는 능력만 주시고, 모차르트와 같이 천재적인 작곡 능력은 주시지 않았습니까?" 결국 비교의식과 열등감이 그의 인생을 파멸로 치닫게 합니다.
불행은 어느 날 하늘에서 날벼락 떨어지듯이 닥쳐오는 것이 아니라 지나친 욕심과 비교가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나의 삶을 이기적 욕심이 지배하는 대로 맡기고 산다면 결코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하느님을 내 삶의 중심에 모시고 그 말씀을 실천하며 살 때만이 부족하고 불편해도 행복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어떤 소유나 위치를 통해서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은 채워지지 않는 갈증만 느낄 뿐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대로 주님만이 나의 행복임을 깨닫는 한 주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가난, 왜 복인가
-강길웅 신부-
복이란 무엇입니까. 전직 두 대통령(전두환, 노태우)의 부정 축 재와 구속 사건을 보면서 부귀와 권세, 그리고 세상의 영화라는 것 이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 국민 모두에게 깨우침을 주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이 말하는 그 복이라는 것이 세월만 지나면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 모릅니다.
성서가 말하는 복이란, 가난한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나 가난 그 자체는 분명히 악입니다. 그리고 그 가난을 하느님이 원하시지도 않 습니다. 그래도 성서는 그들이야말로 바로 하늘(마태6,19∼21참조) 이요, 또한 그리스도 자신(마태25,31∼46참조)임을 천명합니다. 왜 냐하면 그들이야말로 하느님을 차지하는 가난한 마음의 소유자이기 때문입니다.
가진 것이 많으면 기댈 것이 많고 가진 힘이 커도 붙잡을 것이 많게 됩니다. 많이 배운 사람은 또 많이 배운 대로 자기 지혜에 의 지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있는 자들과 높은 자들, 그리고 지식이 많 은 자들은 붙잡고 기댈 수 있는 세속 사정 때문에 하느님이 잘 안 보입니다. 잘 안 보이니까 매달리지도 않고 찾지도 않으며 붙잡지도 않습니다. 거기서 불행이 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여덟 가지 행복에 대한 말씀을 하셨 는데 이 여덟 가지의 행복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바로 가난한 사람이 라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슬퍼하는 사람, 박해받는 사람 등 그들 모두는 그 자체로 가난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헬라어에 '가난'이라는 말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Penes' (페네스)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노동을 해야 먹을 수 있는 가난을 말합니다. 그러나 극빈자는 아니며 그날 벌어 그날 먹는 자들을 말 합니다. 그러니까 끼니 걱정은 없습니다.
다음에는 'Ptochos'(프토코스)가 있는데, 이것은 절대적인 극빈 을 말합니다. 사흘에 한 끼 먹기도 어려운 자들입니다. 거지 라자로 (루가16,19∼31참조)처럼 누가 돌봐 줄 이도 없고 그렇다고 제 손 으로 벌어 먹지도 못하는 극심한 가난을 말합니다. 이런 가난이 바 로 프토코스인데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가난은 바로 이 프토코스를 말합니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은 참으로 가난했습니다. 오랫동안 외세의 침 략과 억압 속에서 착취를 당했으며 마땅하게 일할 자리도 없었고 또 일을 해도 가난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삶에 대해 희망이 없었습니 다. 있다면, 오로지 하느님의 손길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가 난하게 되었을 때 하느님을 진실로 순수하게 찾았습니다.
오늘 1독서에서 스바니아는, 하느님은 진정 가난한 자들의 편에 서 계신다는 것과 그리고 그들 가난한 자들을 돌보아 주시리라는 위 로의 말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사실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은 늘 가 난한 자들이었으며 그들이야말로 하느님 백성의 맥을 잇는 주체들이 었습니다.
어찌보면 부귀와 영화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때 당시에는 멋 지게 보이고 훌륭하게 보이지만 그러나 시간만 지나면 허무한 것이 됩니다. 그래서 참된 행복은 세상을 믿지 않고 자기 자신이 교만하 지 않으며 하느님 앞에 겸허한 마음을 갖는 것이 됩니다. 많은 사람 들 중에는 실패한 뒤에야 비로소 세상을 깨닫는 자들이 있습니다. 마음이 가난해졌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오늘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가난의 참된 의미는 마음으로 가난한 사람, 그래서 자신의 무력함을 알고 전적으로 하느님께 매달 리고 의지할 수 있는 가난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런 자가 바로 행복 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형제가 과음을 자주 하다가 위장을 버리게 되었습니다. 술 때문에 그 좋은 건강 다 버리고 이제는 소화가 잘 되지 않아서 조금 만 지나쳐도 탈이 나고 고생을 합니다. 이 사람이 식사전의 기도를 할 때 보면 그렇게 경건하고 진지할 수가 없습니다. 마치 그것이 마 지막 식사인 듯이 감사한 마음으로 먹고 있으며 밥풀 하나라도 아주 소峠構?씹어서 삼키고 있습니다.
좀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이 사람은 자기 잘못으로 건강을 잃어 불행하게 되었지만 자신의 건강,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 오로지 하느님께 매달릴 수 있기 때문에 오히려 그는 참 행복을 찾은 것이 됩니다. 그러나 이미 건강하면서도 건강을 하느님께 기도하고 감사 드릴 줄 안다면 그는 더 행복한 사람입니다.
교회는 물질적인 가난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의 이상적인 삶의 형태도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지향하고 원하는 것은 어떤 처지에서든지 가난한 마음, 마음을 비우는 겸손한 자세로 하느님 앞에 나서는 것입니다. 즉 어떤 경우에도 하느님만을 붙잡고 매달릴 수 있는 믿음을 가집시다. 이것이 참된 행복의 길입니다.
은은한 행복
-김태균 신부-
언젠가 자매님들한테 언제 가장 기쁘고 행복했었냐고 물어보았다. 갑작스런 질문에 당황하면서도 한 자매님이 조용히 “애 날 때요!” 그러셨다. 그래서 다른 자매님들한테도 “동감하시나요?”하고 여쭙자 모두들 웃으면서 그렇다고 하셨다.
이번엔 형제님들한테 “형제님들은 언제가 가장 기쁘고 행복했습니까?”하고 물어보았더니 물음이 끝나자마자 “장가 갈 때요!”하고 어느 형제님이 소리치셨다. 모두들 한바탕 웃고 난 후 다시 물어보았다. “그럼 지금도 자식들 덕분에 행복하시나요?”
“아따, 신부님은 장가 안가 애들 없응께 그 속 모르신다요. 때론 자식이 아니라 왠수일 때도 있어라!” “그럼 결혼생활은 어떠세요? 아직도 좋으세요?” 그러자 형제님들은 대부분 웃으면서 “그저 그러지요” 하며 대충 얼버무리는데 한 자매님이 “에이 신부님. 뭐가 좋다요. 그냥 헐수 없이 의무로 살제.” 허걱!!!
세상에서 행복한 삶의 조건을 무엇으로 많은 사람들이 돈과 사회적 지위를 든다. 돈이 많아야 근심걱정 없어 행복하고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있어야 무시당하지 않고 당당하게 살수 있다고 생각해서 일게다. 하기사 돈만이 주는 행복을 누리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세상, 이웃 형제의 눈에 피눈물을 흘리게 하는 세상, 유전무죄(有錢無罪) 무전유죄(無錢有罪)인 세상인데. 과연 그런 행복은 영원할까?
다시 신자들한테 세례성사 받을 때 기분이 어땠냐고 물어보니 솔직히 좋은지 어쩐지 몰랐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게 행복하시요?” 하고 물으니 “그래도 지금이 행복하지요.” 웃으며 대답한다. 왜일까?
주님을 몰랐었다면 인생의 부조리와 삶의 무게에 짓눌려 신음하고 고통스러워하며 지냈을 것을, 주님을 알고 그분이 짊어지신 십자가를 느끼고 나니 더 이상 고통스럽지만은 않다. 그분을 몰랐다면 괴로움과 고통에 짓눌려 어쩌면 포기하고 지낼 인생이었을 것을, 그분 안에서는 왠지 모르게 자신감이 솟아남을 느끼게 된다. 세상에서 겪는 고통도 십자가 안에서 이겨낼 수 있기에 조용히 눈을 감고 그분과 함께 걸어온 지난 날 들과 현재의 내 삶을 되돌아보니 어느 순간 내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드리운다. 은은한 행복이 내 삶을 감싸고 있음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세상에서 얻는 행복은 처음엔 강렬하고 자극적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퇴색해 버리는 반면, 그분 안에서 느끼는 삶의 행복은 처음엔 아무런 느낌도 없고 밋밋했지만 시간의 흐름과 함께 은은하게 밀려들어 온다.
행복한 삶의 비결
-양승국 신부-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고 평화로운 얼굴이 어디 있나 한번 찾아봤습니다. 어머니 품에 포근히 안겨 곤히 잠들어 있는 갓난아기 얼굴, 그보다 더 행복한 얼굴은 없었습니다. 이 세상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행복함과 평화로움이 아기 얼굴에 묻어 있었습니다.
반대로 이 세상에서 가장 불안하고 초조해 보이는 얼굴을 찾아보았습니다. 세상 전체가 자신의 장난감인양 쥐락펴락 거드름을 피우는 몇몇 야심 많은 정치인들 표정에서는 행복함이나 편안함보다는 극도의 불안과 초조, 두려움의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오늘 복음이 제시하는 가난함ㆍ소박함ㆍ온유함ㆍ수용성ㆍ작음…. 이런 단어들은 이 시대에 다들 꺼려하고 의도적으로 외면한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러나 이런 단어들은 그리스도교 신앙생활에서, 특별히 그리스도교 수행생활에서 아주 긍정적 색조로 바뀝니다.
돌아보니 수도원 입회 초기만 해도 제 각오는 대단했습니다. '궂은 일은 내가 먼저'라는 구호 아래 '시켜만 주면 뭐든 다 한다'는 굳은 각오로 따지지 않고, 불평불만하지 않고, 그 어떤 일이든 고분고분 다 했습니다. 가장 밑바닥에서 생각하고 위만 쳐다보며 모두를 우러러보며 살다 보니 마음이 그리도 편했습니다. 내 견해를 고집하지 않고 상대방 의견에 따르다 보니 다툼도, 의견 차이도, 스트레스도 전혀 없었습니다. 그야말로 행복한 나날 완벽한 평화의 날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첫서원을 하고, 종신서원을 하고, 서품을 받고, 책임자가 되는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초심은 슬슬 빛을 잃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제 마음에는 '이제 내가 뭔가 좀 해봐야겠다. 이제야말로 내 포부를 마음껏 한번 펼쳐볼 때다'는 생각이 슬슬 자리잡기 시작했습니다. 그 날로 마음의 평화라든지, 행복한 생활은 끝이었습니다. 그렇게 마음먹은 그 순간부터 날이면 날마다 이리저리 부딪치는 상처투성이 생활이 시작됐습니다. 내 계획과 내 주장만을 내세우다 보니 사사건건 이웃들과 충돌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충돌로 입은 상처가 아물기 전에 또 다른 상처가 생기고, 상처 부위는 곪아터지고 그야말로 고통의 세월이 시작된 것입니다.
돌아보니 그 모든 괴로움은 결국 '내가 무엇인가 한번 해보겠다' '내가 주인공이다'고 마음먹는 그 순간부터 비롯됐다는 것을 지금에야 어렴풋이 알게 됐습니다. 마음에 '내'가 가득 참으로 인해 가난함, 소박함, 온유함, 작음 같은 단어들과는 거리가 먼 생활이 시작된 것입니다.
가난한 마음, 작은 마음을 지닌다는 것. 어렵지만 행복한 삶의 지름길임을 언제나 체험하며 삽니다. 아쉽지만 내 의견을 접고 이웃 뜻에 따른다는 것, 서운하지만 내 의지를 접고 공동체 결정에 순응한다는 것, 정말 괴롭지만 내 계획을 포기하고 하느님 뜻을 추구한다는 것, 그것이 행복의 보증수표이자 평화로운 수행생활의 본질임을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또한 수도자로서 가장 행복할 때는 내 뜻대로 뭔가 해보겠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자비의 품에 온전히 안기는 때라는 것을 요즘에야 깨닫습니다. 내 의지를 과감히 접고, 바보처럼 이웃 품에 안길 때 상상할 수 없는 천상 평화와 내면에서부터 진정한 행복이 어느새 소리 없이 제 곁으로 다가왔습니다. 하느님 손 안에 노는 것, 그분 품에 안기는 것, 그분 선택에 따르는 것, 그것이 때로 서운하고 아쉽지만 어쩔 수 없는 우리 신앙인들 본 모습인 것입니다.
그리스도교 진리는 언제나 역설적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겪는 고통, 그 안에는 묘하게도 행복의 씨앗이 싹트고 있습니다. 아직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역경은 우리를 향한 극진한 하느님 사랑의 표시입니다. 이 역설의 진리를 깨치는 순간 우리는 더욱 우리 자신에 대해서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이 진리를 깨닫는 순간이야말로 우리 신앙이 한 단계 더 도약하는 은총의 순간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안에 굳건히 자리하실 때, 그분께서 우리 중심에 살아계실 때, 우리는 그 어떤 세찬 역풍 앞에서도 보란 듯이 행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 내면 깊숙이 그리스도 그분께서 형성돼 있다면 세상 그 어떤 풍랑 앞에서도 내적 평화를 유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을 믿는 이유가 행복하기 위해서라면...
-정호 신부-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왜 믿느냐고 물어보면 그 사연이 사람마다 다르게 나옵니다. 하느님을 믿게 된 사정도 사람마다 다르고 하느님을 믿는 이??다 다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것은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은 모두 행복하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마음의 평안을 얻는다든지 집안에 나쁜 일이 없었으면 한다든지 자신이 하는 일이 모두 행복하기를 원하는 등 거의 모든 사람들이 행복을 얻으려 하느님을 믿는다고 말합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가 그렇게 원하는 행복의 길에 대한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은 그 내용이 ‘... 한 사람은 행복하다’로 끝나기 때문에 행복선언, 산 위에서 가르치셨다고 해서 산상설교라고 불립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따라 나선 수많은 사람들을 산 아래에 두시고 높은 곳에 올라서 이런 사람들은 행복하다고 말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행복한 사람일까요? 모두 한 번 알아봅시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 슬퍼하는 사람, 온유한 사람,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자비를 베푸는 사람, 마음이 깨끗한 사람,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 나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으며 터무니없는 말로 갖은 비난을 다 받게 되는 사람입니다.
이 모든 것은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옳다고 말하는 일들입니다. 그러나 반면 이렇게 사는 사람들은 세상에 사람들이 비웃는 바보 같은 삶을 사는 사람들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사는 사람들을 답답하다, 융통성이 없다, 그저 착하다는 말로 비웃고 이용당하기도 합니다. 그야말로 골치아프게 세상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다양한 사람들이 모두 행복하다 말씀하시면서 그 각각의 사람이 누릴 복을 말씀해주십니다. 그 복은 모두 하느님께서 그 사람들에게 내려 주시는 엄청난 은총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그 사람에게 하느님이 주실 복들 때문에 행복하다는 말씀으로만 알아들으면 이 모든 것은 우리의 생각처럼 그 자체로는 고통스럽고 힘겨운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오로지 그 자체로 행복을 느끼는 길이며, 예수님이 말씀하신 후에 돌아오는 하느님의 선물은 그것이 하느님 나라에서 어떤 가치를 가지는지를 설명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왜 그런지 생각해 봅시다. 물론 우선 우리가 이렇게 산다고 가정하고 생각해봐야 할 것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답니다. 마음이 가난하다는 말은 어떤 의미로 생각하든 욕심이 없다는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세상 어떤 것도 자신을 위한 것으로 생각지 않고 사는 사람들, 그래서 있는 것 모두가 그저 좋게 보이고 가진 것조차 모두에게 필요한 만큼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마음이 가난한 사람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런 사람이라면 어떨까요? 예수님은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무것도 가지려 들지 않는 사람, 그들이 온통 하느님의 것인 그 나라에서 욕심없이 살 수 있기에 하느님은 오히려 그 좋은 나라를 그 사람들에게 주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슬퍼하는 사람은 행복하답니다. 세상의 일에 진심으로 가슴아파 할 수 있는 사람, 그들의 눈물은 가슴 아프지만 그렇게 울어주는 이들이 있다는 것이 사람들에게 가장 큰 위로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어야 우리는 우리의 아픔이 혼자 감당하는 엄청난 고통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슬퍼하는 사람도 그 슬픔 안에 들어 있는 세상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조차 그들을 위해 진심으로 아파하시고 함께 눈물 흘리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행복하답니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 서로가 가진 것을 더 가지기 위해 다툼을 벌입니다. 그것이 물질에서 나온 것이든 정신에서 나온 것이든 말입니다. 그런 다툼이 있는 곳에 참고 기다릴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 그래서 세상을 다툼으로 대하지 않고 이해하고 기다려줌으로써 세상을 사는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그에게는 미워하는 사람도 없고, 남에게 미움을 사지도 않기에 그가 사는, 그리고 그를 아는 이들은 모두 그에게서 쉬게 됩니다. 그러니 그가 있는 땅이 곧 그로 인해 사랑을 얻게 됩니다. 하느님은 그런 그에게 결국 땅을 맡길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그리고 그 일로 인해 박해를 받는 사람은 행복하답니다. 옳은 일은 다수결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모두가 불의할 때도 옳은 일을 하는 사람은 많은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거나 홀로 외로워질 수 있지만 그 자신이 모든 이를 위해 사는 사람이기에 그는 홀로가 아니라 모든 이들을 진심으로 위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자신의 삶에 행복함을 느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은 만족할 것이라고 그들 자신들의 생활을 인정해주십니다. 그 삶이 바로 하늘나라의 삶입니다. 그래서 그들 역시 하늘나라의 주인이 됩니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행복하답니다. 자비는 사랑하는 마음과 슬퍼하는 마음입니다. 사람들을 사랑하고 그들의 아픔을 함께 느끼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닮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바로 그런 그 사람들의 마음을 하느님께서 헤아리고 함께 해 주실 것이라고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행복하답니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죄를 피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세상 어디에 서도 부끄러움이 없기에 그들은 세상에서 가장 순수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은 하느님 앞에서 조차 부끄럽지 않을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그들이 하느님을 뵙게 될 것이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행복하답니다. 평화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이루시려 하신 당신이 즐겨하시던 인사말씀입니다. 모든 이가 서로를 사랑하는 삶을 살며 그 사랑을 주신 하느님을 모든 것을 다해 사는 세상이 바로 예수님이 만드시려 하신, 하느님이 창조하신 세상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처럼 하느님의 아들이 될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이 모든 것을 사는 사람들, 곧 예수님이 세상을 사신 방식대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의 모습은 이기적인 사람들의 눈에 가시처럼 미운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은 이유도 없는 미움을 받고 박해를 당하고, 갖은 비난을 받게 되지만 사실 그 사람은 스스로 늘 행복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은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어떤 것도 힘겹지도 어렵지도 않습니다. 그 사랑이 모든 것을 견딜 힘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생활은 그 자체로도 충분히 기쁘고 즐거운 일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이들에게 하늘에 큰 상이 마련되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그들이 걱정하지 않아도 그렇게 살 수 있는 생활이 그래서 더 이상 어떤 고난과 시련 없이 사랑하며 살 수 있는 곳이 곳 하늘나라이기 때문입니다.
행복선언, 이 선언은 그렇게 사는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진리입니다. 아니 그렇게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진리입니다. 그리고 이 행복이 후에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런 생활 속에 깃들여 있음을 실천하는 사람만이 알 수 있습니다.
사랑해보셨습니까? 그럼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믿는 이유가 행복을 위해서라면 그분을 믿는다고 말만 하지 마시고 바로 움직이십시오. 바로 이렇게 말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는 것입니다. 복음에 그렇게 분명 적혀 있으니 그 길을 따라삽시다. 그럼 우리가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이 곧 삶에 그 길이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을 섬기다 죽는 이들 행복하다
-허성 신부-
구원의 약속 실현
여덟 가지 행복론은 마태오 복음 5, 1~12에 나오는 예수님의 공생활을 시작하는 설교의 첫 부분이며, 그리스도 신자들의 행복에 대한 강령이다. 루가의 기록에서 그 행복론은 그와는 대조적인 불행과 함께 제시되어 있으며, 어떤 생활 형태들의 뛰어난 가치들을 찬양하고 있다(루가 6, 20~26). 그러나 덕행이나 생활 형태들을 찬양하는데 있어서 이 두가지 설명은 어느 쪽도 삭감될 수 없다. 그것은 상호 보완적이며, 예수께서 전해 주신 의미를 살림으로써만 그 행복론에 진리가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구약의 약속을 장엄하게 실현하시기 위하여 하느님께로부터 오신 분이시다. 하늘 나라는 이미 지상에 도래했으며,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궁핍과 비탄을 제거하시고, 인간에게 자비와 생명을 주신다. 어떤 행복론이 미래를 위하여 전해졌다면, 그 첫째(『복되다 가난한 이들』)는 다른 행복들을 포함하면서, 지금부터 실현되어가야 할 것이다. 그뿐 아니라, 이 행복론은 하느님께서 예수님 안에서 말씀하신 응답이기도 하다. 구약성서가 행복을 하느님 자신과 동일시하게 된 것과는 달리, 예수님은 그분 안에 하늘 나라가 현존하고 있으므로 그 분 자신이 행복에 대한 인간의 열망을 충족시켜 주시는 분으로 나타나신다.
행복의 중심인 그리스도
더 나아가서 그분은 스스로 이 행복을 사심으로써, 그리고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자』(마태 11, 29)가 되심으로써 그 행복을 구현하셨다. 기타의 복음적인 행복들도 역시 예수님이 행복의 중심이라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마리아는 믿었기 때문에(루가 1, 45) 구세주를 낳을 수 있었고, 『행복한 사람』(루가 1, 48: 11, 27)이라고 불리었으며, 하느님의 말씀을 들음으로써(루가 11, 28), 보지 않고 믿는(요한 20, 29) 모든 이들에게 행복을 알려 준다. 바리사이파 사람들(마태 11, 21)은 화를 입을 것이다!
봉사. 헌신하는 자의 행복
그러나 성부께서 예수님 안에서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을 계시하신 시몬(마태 16, 17)은 복되다. 예수님을 본 눈은 복되며(마태 13, 16), 특히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면서 충실하게 깨어 있고(마태 24, 46), 서로 봉사하는 데에 헌신한(요한 13, 17) 제자들은 행복하다. 구약성서는 부유와 성공과 지상적인 가치에, 가난과 실패 속에서 바라보는 정의의 가치를 연결시키려고 조심스럽게 애쓰고 있다.
굶주리고 박해받는 자
그러나 예수께서는 행복에 대한 지상적인 표현의 모호함을 거부하신다. 이제부터는 이 세상에서 행복한 자란 부유한 자, 포식하는 자, 아첨을 받는 자들이 아니라, 굶주린 자, 우는 자, 가난한 자, 박해를 당하는 자이다(1베드 3, 14; 4, 14). 이와 같은 가치의 전도는 모든 가치 자체인 예수님에 의해서 가능하였던 것이다. 두가지 중요한 행복이 다른 모든 행복을 포함한다. 하나는 가난으로서, 거기에는 정의, 겸손, 온유, 자비, 평화를 구하는 마음 등이 따른다. 또 하나는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 때문에 당하는 박해이다.
신앙 증거위해 목숨 바쳐
그러나 이러한 가치들도 모든 가치에 의미를 부여하시는 예수님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리스도를 자기 신앙의 중심으로 놓은 자만이 묵시록에 나오는 행복론을 들을 수 있다. 묵시록의 말을 듣고 이를 잘 지키는 사람(묵시 1, 3; 22, 7) 깨어 경계하고 있는 사람(묵시 16, 15)은 복되다. 그들은 부활에 참여하기 위하여(묵시 20, 6),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묵시 19, 9)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앙의 증거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자는 생명을 잃지 않을 것이다. 『주님을 섬기다가 죽는 사람들은 행복하다!』(묵시 14, 13).
참된 행복
-조욱현 신부-
오늘 전례의 중심 주제는 산상수훈에 관한 이야기이며, 그 중에서도 "마음이 가 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3)이다 1-2 독서가 함께 이 행복에 대해 강조하고 있다. 복음은 진정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의 것임을 알아야 한다.
제1독서: 스바 2,3. 3,12-13: 가난한 사람만을 네 안에 남기리라
1독서는 `야훼께서 오실 날` 있을 대소동에 관한 것을 전하고 있다(1,14-18). 그 날 야훼께서는 야훼를 믿었던 비천하고 가난한 사람들만이 화를 면하고 모두가 화를 입게 될 것이라고 한다. 이 가난한 사람들이 바로 야훼께서 다시 `양육하실` 새 백성의 `씨`가 될 것이다. "너희는 야훼를 찾아라"(2,3)는 말은 회개의 권고이다. 진정한 회개만이 야훼의 날에 화를 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야훼께서는 `거만을 떨며` `흥청거리는` 자들을 정의로 다스리시고, 그분은 오로지 가난하고 순박한 정신으로 그분께 나오는 모든 이에게 마지막 날에 은혜를 베풀어주실 것이다.
1독서에서는 가난의 의미가 단순한 사회학적 의미에서 `영적` 차원의 의미로 나타나고 있다. 여기서 가난이라는 것은 모든 것을 다 바쳐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그분의 `판단`에 신뢰심을 갖고 자신을 내맡기는 하느님 안에서의 완전한 `자기포기`를 말한다. 이러한 가난은 회피해야할 저주스러운 것이 아니라, 도달해야 할 높은 `목표`이다. 바로 이 `가난`이라는 것은 항상 `정의` 즉 하느님의 뜻을 실행할 의무와 결합되어야 한다. 이렇게 겸손하고 가난한 사람은 `살아남게 되고`,`야훼의 이름만 믿을 것이고`(3,12) 또한 불의한 짓을 범하지 않고 `거짓과 사기`를 입밖에 내지 않을 것이다(3,13). 여기서 `가난하다`는 `개념과 겸손하다`는 개념은 일치한다. 이 개념을 통해 예언자들은 메시아를 예고한다(즈가 9,9 참조).
복음: 마태 5,1-12: 산상 수훈
오늘 복음의 산상수훈은 이미 그리스도께서 완전하고도 극적인 삶으로 사신 것들이다. 산상수훈 하나 하나를 그분의 삶을 통해 입증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이 산상수훈은 모든 윤리규범을 초월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인간의 정상적 지혜가 부서지고 만다. 그 지혜는 하느님 앞에서 `어리석은 것`,즉 `우리 자신이 회개할 때`만이 회복될 수 있는 것이다. 오늘 이 산상수훈의 메시지는 `회개`에 대한 권고(마태 4,17 참조)를 받아들였거나 받아들일 마음의 자세를 갖춘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예수께서는 산에 올라가셔서(1절), 산 위에서 법을 가르치는 `새` 모세처럼 군중들을 가르치신다. 예수님의 이 가르침은 바위에가 아니라, `인간의 마음`(1고린 3,3 참조)에 새겨진 그리스도인의 새 `법`으로 인간의 마음을 변화시켜 새롭게 하는 것이다. 이 산상수훈은 가난하기 때문에 행복하다는 것이 아니다. 마음으로 가난해지려고 노력하기 때문에 행복한 것이고, 박해를 받기 때문에 행복하다는 것이 아니라, 옳은 일을 위해 박해를 받기 때문에 행복한 것이다(10절). 이 모든 것은 우리 모두가 `회개하여` 이루어야 할 최상의 목표라고 하겠다.
이러한 관점에서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3절). `예루살렘 성서`는 이 구절을 `가난한 정신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행복하다.‘로 훌륭히 번역하고 있다. 이렇게 마태오 복음은 제1독서의 `가난`의 영적인 차원에로 우리를 초대하고 있다. `가난`의 `이라는 것은 비록 우연히 소유하였을지라도 재물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은 재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가난한 정신`을 갖는다는 것은 우리의 지적인 능력, 사고, 계획, 우리의 성성까지도 포함하여 우리가 선익을 위해 소유할 수 있는 그 모든 것 때문에 자기 자신에게조차 집착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마음으로 가난한 사람`은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고 하느님께 의탁함으로써 그분을 통해 자신을 무한히 부요하게 하고, 또 그분이 베풀어주시는 모든 선물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사람이다. 우리가 물질적으로 가난하건 부요하건 상관없이 다른 모든 행복을 함축적으로 내포하고 있는 첫 번째 행복의 정신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살고있는가 하는 것은 집착으로부터 내가 얼마나 해방되어 있느냐, 그리고 그럼으로써 하느님을 통해 부요해지고 그분께 받은 선물을 나눌 수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근본적인 `회개`가 있어야 한다. "회개가 있는 곳에서는 현세생활의 물질적 선에 대한 가치관이 근본적으로 달라진다. 이러한 변화가 그리스도교 사상의 특성이다"(1978. 1. 11. 수요담화문)라고 바오로 6세 교황은 말씀하셨다.
-서공석 신부-
오늘 복음은 마태오복음서가 전하는 행복선언입니다. 루가복음서에도 같은 행복선언이 있습니다. 루가복음서의 것은 짧고 간결하지만, 오늘 우리가 들은 마태오복음서의 것은 길고 더 발전되어 있습니다. 마태오복음서 공동체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행복선언을 사람들이 이해하기 쉽게 풀어서 더 길게 만들어 기록하였습니다. 성서학자들은 루가복음서의 것이 행복선언의 원형이라고 말합니다. 마태오복음서는 행복한 사람들을 여덟 가지로 나누어서 말하는 반면 루가복음서는 세 부류의 사람들을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가난한 사람, 지금 굶주리는 사람 그리고 지금 우는 사람입니다.
행복선언은 하나의 예언이고 축복입니다. 하느님이 함께 계시기에 가난해도, 지금 굶주려도, 또 지금 울어도 행복하다는 예언적 선언입니다. 예언은 닥쳐올 미래의 일을 미리 알려 주는 것이 아닙니다. 성서가 예언자라고 말할 때는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의식하면서 현실에 대해 말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예언자는 강자나 권력을 가진 자의 마음에 들기 위해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눈치를 봐가며 그들이 기뻐할 일을 말하고, 그들의 마음에 들어, 그들로부터 혜택을 받아 누리려 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예언자는 자기 자신의 안일과 부귀영화를 위해 하느님의 일을 왜곡하거나 현실에 영합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예언자는 오히려 강자의 횡포를 고발하고 약자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말합니다. 권력을 가진 자의 오만과 독선을 지적하고 비난합니다. 그들에게 하느님의 자비를 실천하라고 촉구하는 사람이 예언자입니다. 예언자는 자기 말이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때 그 피해를 감수합니다. 예수님도 유대교 기득권자들의 말과 다른 말을 하다가 그 대가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초기 교회는 예수님의 입을 빌려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습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기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합니다”(마르 8,34). 예수님은 예언자적 삶을 살다가 그 대가로 십자가를 지셨고 제자들도 같은 자세로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인류역사의 통념(通念)을 따라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신앙인은 예수님이 보여 주신 가치관을 따라 살기 위해 그 통념을 수정합니다. “가난한 사람이 행복하다”는 오늘의 선언은 많이 가진 자가 행복하다는 인류역사의 통념을 깨는 말씀입니다. 재물이 우리 삶의 보람일 수 없다는 말입니다. “지금 굶주리는 사람이 행복하다”는 말씀은 먹는 일에만 매달려 살 수 없는 인생이라는 말입니다. 비록 현재 굶주려도 보람 있는 삶이 있다는 말입니다. “지금 우는 사람이 행복하다”는 말씀은 기쁘고 즐거운 것만 쫓아다니면서 살 수 없는 인생이라는 말입니다. 어떤 저자의 말입니다. “기쁨과 즐거움은 타버린 재만 남기지만 우리가 겪는 비극과 함께 하는 아픔은 우리 삶의 진실을 보게 한다.” 자기가 겪는 고통을 감수할 뿐 아니라, 이웃의 고통에도 참여하면서, 더불어 살아야 하는 인생의 진실을 보고 성숙한 인간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느님의 시선에서 우리의 삶을 봅니다. 예수님은 재물의 유무, 배부름과 배고픔, 기쁨과 아픔을 넘어서 하느님과 함께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유대교는 재물을 가진 자, 배부른 자, 웃는 자가 하느님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이고 가난한 이, 굶주리는 이, 우는 이는 하느님으로부터 벌 받았다고 가르쳤습니다.
행복선언은 예수님이 하시는 축복의 말씀이며 또한 예수님의 삶을 요약하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은 가난한 이, 지금 굶주리는 이, 지금 우는 이도 축복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통념에서는 하나같이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그들을 축복하지 않으셨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도 그들을 외면합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이들입니다. 오늘 복음의 선언은 하느님은 그들과도 함께 계신다는 선언입니다. 사람은 그들을 외면하고 버려도 하느님은 그들을 버리지 않으신다는 선언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즐겨 부르셨고, 우리에게도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부모는 자녀가 가난하다고 버리지 않습니다. 굶는다고, 고통을 당한다고 외면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은 우리가 어떤 처지에 있든 하느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기억하게 합니다.
부요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이 있다는 사실은 하느님이 원하셔서 된 일이 아닙니다. 인간이 만드는 빈부의 격차입니다. 19세기 유럽의 산업혁명 당시 산업만 발달하면 하느님도 해결하지 못한 기근을 퇴치할 수 있다고 사람들은 호언장담하였습니다. 그러나 오늘 산업이 고도로 발달되어, 온 세상이 오염되고 기상마저 이변을 일으키지만, 빈부격차는 사라지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더 심화되었습니다. 한 편에서는 영양의 과다섭취로 병들어가지만, 다른 한 편에서는 굶주려 죽어가고 있습니다. 인간이 하는 일입니다. 인간이 모색하는 발전은 인간에게 피해를 줍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어떤 사람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은 불행한 사람들을 축복하고 불쌍히 여기신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오늘의 복음 말씀을 듣고 가난과 굶주림의 영적 의미, 슬픔과 아픔의 영적 의미에 대한 이론을 애써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하느님이 그런 사람들을 왜 축복하시는지 설명하려고 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의 통념 안으로 하느님을 끌어들이지 말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지름길을 가르쳐 주는 말씀이 아닙니다. 단순한 선언이고 축복의 말씀입니다. 하느님이 그들을 축복하시기에,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도 그들을 축복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가난한 이, 굶주리는 이, 우는 이에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축복이 무엇인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 이들에게 축복이 되는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도움이 그들을 위한 근본적 해결책이 되지 않아도,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자기를 중심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기의 이해타산을 앞세우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는 가난도 있고, 굶주림도 있고, 슬픔과 아픔도 있습니다. 우리의 통념은 그것을 자업자득의 결과라고 말하며 외면합니다. 그러나 오늘 행복선언을 들은 사람의 눈에는 우리의 축복을 기다리는 일들입니다.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믿는 우리라면, 그분의 축복을 그들에게 실천합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자기 자신을 위해 하느님의 축복을 빌지 않고 하느님의 축복을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그 축복을 실천합니다.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강지숙-
몇 년 전 대학원 후배가 외국으로 유학을 떠나게 되어 함께 공부하던 동기 예닐곱 명이 송별회를 해준 적이 있었습니다. 한 친구가 참행복 선언 문구가 적힌 고운 엽서를 가져와 서로에게 어울리는 것을 뽑아 기념으로 나눠 가졌는데, 그때 제 몫으로는 ‘온유한 사람’이 돌아왔습니다. 다들 저에게 잘 어울리는 문구라며 부러워했지만, 내심 머릿속으로는 삐딱한 생각을 했습니다. ‘남들 보기에도 내가 결단력 없고 우유부단하며 자기 표현을 잘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보이나 보지?’라고요. 그땐 자신의 변신을 꾀하는 데 몰두해 있던 터라 소심하고 내성적인 성격을 바꿔 보려고 무진 애를 쓰던 시절이었습니다. 예수님이 행복한 사람으로 꼽은 여덟 부류의 무리 가운데 어느 하나 제가 변신하고 싶은 모습은 없었습니다. 전혀 다른 부류의 사람들이 행복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를테면
‘행복하여라, 능력 있는 사람들!
하는 일마다 척척 이루어져 만인의 부러움을 살 것이다.
행복하여라, 씩씩하고 당당한 사람들!
남들 눈치 보는 일 없이 자존심 상하지 않고 살 것이다.
행복하여라, 결단력 있는 사람들!
만사가 그의 뜻대로 될 것이다.
행복하여라, 먹고살 걱정 없는 사람들!
굳이 아등바등 경쟁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행복하여라, 시간이 많은 사람들!
놀고 싶을 때 놀고 쉬고 싶을 때 쉴 수 있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건강한 사람들!
나처럼 위장병·목 디스크·알레르기로 고생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행복하여라….
행복하여라….’
행복해지고 싶고 그 행복을 위해 가지고 싶고 되고 싶은 게 많았으나 의외로 여덟 가지를 채우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나름대로 고심했건만 이건 행복 선언이 아니라, 피해의식과 콤플렉스로 똘똘 뭉친 불행 선언에 가깝습니다. 이렇게만 되면 행복할 줄 알았는데 막상 글로 적어놓고 보니 주변 의식하지 않고 혼자서만 잘살아 보겠다는 심보일 뿐 오히려 행복과는 거리가 멉니다. 만인의 부러움을 사면 뭐하나, 만사가 내 맘대로 되는 게 가능하기나 할까, 먹고살 만하다고 걱정이 없을까, 시간이 너무 남아돌아도 지루하겠지, 늘 건강하다면 건강이 소중한 줄이나 알까 등등, 뭔가 채워지지 않는 허전함이 남습니다. 분명 지금 여기서 내가 원한 것임에도 불평과 한탄·텅 빈 느낌은 여전합니다. 그렇다면 참행복이 무엇인지 자못 궁금해집니다.
이미 시편에서도 여러 차례 행복을 노래하였습니다. “행복하여라! 악인들의 뜻에 따라 걷지 않고 죄인들의 길에 들지 않으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되새기는 사람”(시편 1,1-2), “행복하여라, 죄를 용서받고 잘못이 덮여진 이! 행복하여라, 주님께서 허물을 헤아리지 않으시고 그 얼에 거짓이 없는 사람!”(32,12), “행복하여라, 가련한 이를 돌보아 주는 이! 불행의 날에 주님께서 그를 구하시리라”(41,2), “행복합니다, 당신께서 뽑아 가까이 오도록 하신 이! 그는 당신의 뜰 안에 머물리이다”(65,5ㄱ), “행복합니다, 당신의 집에 사는 이들! 그들은 늘 당신을 찬양하리니”(84,5), “행복하여라, 공정을 지키는 이들 언제나 정의를 실천하는 이들!”(106,3), “행복하여라, 주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계명들로 큰 즐거움을 삼는 이! 그의 후손은 땅에서 융성하고 올곧은 이들의 세대는 복을 받으리라”(112,1-2), “행복하여라, 주님을 경외하는 이 모두 그분의 길을 걸은 이 모두! 네 손으로 벌어들인 것을 네가 먹으리니 너는 행복하여라, 너는 복이 있어라”(128,1-2). 성공이나 육신의 안위를 행복으로 추구하던 불평 선언과는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예수님도 긴 설교(57장)를 시작하시면서 ‘행복하여라… 행복하여라…’를 외치십니다. 시편과 양식은 닮았으나 그 내용은 전혀 예상 밖입니다. 비상하시다는 예수님 소문을 듣고 벌 떼처럼 몰려든 군중에게 그들이 그토록 염원하는 僊뮌?내리시는데, 정작 여덟 가지 행복(八福)은 알아듣기도 어렵고 과연 가능하기나 할지도 의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은 그들이 직면한 현실 곧, ‘가난·슬픔·박해’ 등이 앞으로 그들이 누리게 될 하느님 나라를 보장하는 지름길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들이 버거워하며 짊어지고 살아온 위태위태한 삶의 방식이 바로 행복이었고 하느님 나라에 쌓는 덕행이라고 말입니다. 세상의 가치를 뒤집는 하느님 나라의 가치는 우리의 고달픈 현실에 그 씨앗이 있었습니다. 그분을 따르는 이들에게 주어질 기쁜 소식은 바로, 비록 지금은 그들이 예수님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으며 사람들로부터 거짓된 사악한 말을 듣지만(11절) 하늘에서 그들에게 돌아갈 상은 크다는 약속입니다(12ㄴ절). 하느님은 복의 원천이십니다.
원고지 십여 장 채우는 것도 힘에 겨워 주말마다 백지와의 전쟁을 치르는 제 처지로서는, 여전히 ‘능력 있는 사람’, ‘시간 많아 여유 있는 사람’이 행복해 보입니다. 그러나 글쓰기 재주를 타고나지 않은 이상 그 능력이 하루아침에 생겨나는 것도 아닐 터, ‘이렇게 말씀을 곱씹고 맛들이며 기도하다 보면 나에게도 성령의 영감이 찾아와 주시겠지, 그러다가 차차 시간도 단축되어 여유 있게 깊은 묵상 글을 나눌 수 있게 되겠지, 가끔 누군가는 허술한 내 나눔을 통해 마음이 열리겠지.’ 하며, 까마득히 멀리만 있어 보이는 행복을 지금 이 자리로 끌어당겨 봅니다. 불만스런 현실이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임을 새삼 깨달으며 이렇게 믿고 싶습니다. 우리는 가난하니까, 지금 슬프니까, 의로움을 갈망하니까, 능력이 없으니까, 하느님의 보상은 우리 모두에게 공평하게 나눠질 것이라고요.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12ㄱㄴ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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