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 프로필 이미지
젊은공인중개사의모임
카페 가입하기
 
 
 
 
 
 

카페 통계

 
방문
20240717
22
20240718
219
20240719
34
20240720
31
20240721
38
가입
20240717
0
20240718
1
20240719
0
20240720
0
20240721
0
게시글
20240717
0
20240718
0
20240719
0
20240720
1
20240721
0
댓글
20240717
0
20240718
0
20240719
0
20240720
0
20240721
0
 
카페 게시글
좋은 글 스크랩 제18계 금적금왕
잠실/맥(조문희) 추천 0 조회 37 15.03.01 11:1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병법삼십육계] 18계 금적금왕(擒賊擒王)... 

 

 

+崔基堅 奪基魁 以解基體 龍戰于也 基道窮也

적의 견고함을 꺾어 벌리고 적의 우두머리를 빼앗아 그들의 몸체를 흩어 놓아라. 용이 들판에서 싸우는 것은 그것들이 갈 수 있는 길이 곤궁하기 때문이다.

 

출전은 두보의 <출색시>

 

挽弓當挽强 활을 당기려면 당연히 강하게 당겨야 하고,

用箭當用長 화살을 쓰려면 당연히 긴 것을 사용해야 한다.

射人先射馬 사람을 쏘아 맞추려면 말부터 맞추어야 하고

擒賊先擒王 도적을 사로잡고자 한다면 그 우두머리를 사로잡아야 할 것이다.

 

라고 하는 데서 유래했다.

 

당나라 현종 때 이민족 출신의 절도사인 안록산과 사사명은 조정에 반기를 들고 군사를 일으켰다. 이름하여 안사의 난이다. 이때 안록산의 아들인 안경서가 그 부장인 윤자기에게 병사 10만을 주어 저양을 공격하도록 했었는데, 마침 저양을 지키고 있었던 것은 장순이라는 장수였다.

 

워낙 초기 승승장구하던 반란군이라 장순은 그 기세가 사뭇 거센 것을 보고 맞서 싸우기보다는 성을 굳건히 지키면서 때를 노리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윤자기의 대군이 공격해 오자 스무 차례에 걸친 공격을 모두 격퇴함으로써 윤자기의 군으로 하여금 지쳐 물러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었다.

 

마침내 윤자기가 군사를 물려 휴식을 취하자 장순은 북을 치고 징을 치며 마치 공격이 있을 것처럼 소란을 피워 윤자기 군을 긴장토록 만들었다. 한 번, 두 번, 여러 번 그것이 계속되자 그렇지 않아도 낮의 전투로 지쳐 있던 윤자기군은 더욱 지치게 되었고 나중에는 아예 반응조차 없이 그대로 주저앉아 버리고 말았다. 장순이 노리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장순은 명령을 내려 성을 나서 군사를 몰아 공격에 들어갔다. 지쳐 있던 윤자기군은 미처 제대로 대응을 못하고 있었는데, 그 틈을 타 수천의 적을 섬멸한 장순은 대장인 윤자기를 잡을 것을 명령했다.

 

그러나 당시 장순의 휘하에는 윤자기의 얼굴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더구나 혼전중이라 누가 윤자기인지 알아보기도 힘들었다. 윤자기를 잡아야 하는데 윤자기가 정작 누구인지 알 도리가 없는 것이었다. 장순은 꾀를 냈다. 볏짚으로 화살을 대신하여 쏘도록 한 것이다. 마치 화살이 다 떨어진 것처럼.

 

아니나 다를까 날아오는 화살이 화살이 아닌 볏짚이라는 것을 깨닫자 반란군의 병사들은 앞다투어 윤자기에게 달려가 보고했다. 이런 중요한 정보는 보고하는 것만으로도 공이 되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윤자기의 모습과 위치가 밝혀지자 장순은 신궁으로 이름 높던 남제운이라는 장수에게 윤자기를 쏘도록 명령했다. 그리고 그 명성에 걸맞게 윤자기는 한쪽 눈에 화살을 맞고 눈을 감싸쥔 채 도망치고 말았다.

 

대장이 도망치고 나니 싸움은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대장인 윤자기가 도망치고, 그것을 본 다른 장수며 병사들이 도망치고, 대오를 잃고 어지러이 도망치는 반란군의 뒤를 쫓아 장순은 그들을 크게 섬멸했다. 대장인 윤자기를 잡음으로써 10만의 대군은 한 순간에 쫓아버린 것이었다.

 

 

금적금왕(擒賊擒王)의 가장 대표적인 예로 병자호란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삼전도에서 인조가 삼궤구고로써 항복의 예를 취할 당시에도 조선에는 아직 여력이 남아 있었다. 함경도 기병은 아직 싸움에 참가하지도 않고 있었고, 남도의 병력 역시 제대로 동원되고 있지 않았다. 청이 밀고 내려 온 평안도 방면에서도 격파당한 병력 만큼이나 성에 고립되어 움직이지 못하는 병력이 적잖이 남아 있었다. 버티자고 한다면 임진왜란에서처럼 청의 배후를 끊고 유격전과 지구전을 펼치며 얼마든지 버틸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할아버지인 선조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했던 인조는 도망치는 것도 제대로 하지 못했고, 오로지 조선의 왕 하나 잡자고 빠르게 남하한 청군에 의해 남한산성에서 포착되어 고립되고 말았다. 그리고 외부의 지원 하나 없이 겨우 버티다 항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왕인 인조가 항복하자 남아 있던 병력이나 전력은 그대로 왕인 인조와 함께 항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점에서 재빨리 도망쳐서 일본군에 사로잡혀 항복하는 것만은 피했던 선조야 말로 구국의 영웅이라 할 만 하다.

 

 

백제의 성왕은 개로왕이 전사하고 한성을 고구려에 함락당한 이래 쇠퇴를 거듭하던 백제를 부흥시킨 걸출한 왕이었다. 그는 신라의 진흥왕과 동맹을 맺고 함께 고구려를 물리쳐 고구려에게 빼앗긴 한강유역을 되찾고자 부단히 노력을 했었는데, 그러나 결국 진흥왕의 배신으로 신라 좋은 일만 시켜주고 말았다. 비로소 신라가 한강유역을 차지하게 됨으로써 이제껏 변방에 머물러 있던 신라가 비상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으니 말이다.

 

결국 성왕은 신라의 배신에 대한 분노를 참지 못하고 신라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태자인 여창으로 하여금 신라를 공격하여 구타모라에 성을 쌓도록 했는데, 그것을 지원하러 가는 도중 관산성에서 신라군의 매복에 걸려 사로잡혀 목을 베이고 만다. 어이없게도 제대로 싸움도 해 보기 전에 한 나라의 왕이 적에게 잡혀 죽은 것이다.

 

왕이 죽자 백제는 급속히 내분에 휩싸이게 된다. 그렇지 않아도 귀족의 세력이 강하던 백제였다. 개로왕이 장수왕에게 잡혀 죽고 더욱 귀족의 세력이 강해져 있던 백제였다. 그런데 다시 왕이 귀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전쟁에 나섰다 목숨을 잃었다. 동서고금에 정적의 실수는 가장 훌륭한 정치적인 자산인 법이다. 성왕의 뒤를 이은 위덕왕을 - 그렇지 않아도 왕이 전장에서 죽어 혼란스럽고 약해져 있던 왕권을 귀족들은 기회다 싶어 공격하기 시작했고, 결국 무왕이 나타나 그것을 수습하기까지 백제는 긴 혼란에 빠져든다. 왕 하나 죽은 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버린 것이다.

 

 

고구려가 멸망했을 때도 아직 고구려에는 많은 성과 병사들이 남아 있었다. 당시 나당연합군에 의해 점령되거나 항복한 성들은 대개 요동과 대동강 이남의 성들이었고, 그 동쪽, 만주와 한반도 동북부의 성들은 여전히 나당연합군의 손에서 자유로운 채였다. 심지어 평양성을 함락하고 고구려를 완전히 멸망시킨 뒤로도 당나라 군대는 이쪽 성들에 대한 군사행동을 더 이상 연장하지 못했을 정도였다. 대조영이 발해를 건국한 것도 바로 이곳의 성들의 지지를 얻어서였었고.

 

그러나 아무리 성이 남아 있고 나당연합군에 항복하지 않고 자주성을 유지하고 있었어도 일단 왕인 보장왕이 사로잡히고 수도인 평양성이 함락당한 이상에는 국가로서의 체계를 갖추기란 어려운 것이다. 누구 하나 왕이 되고자 해도 다들 고만고만한 수준이고, 오히려 누군가 왕이 되려 한다면 그것이 내분의 원인이 되기 쉬웠다. 더구나 그 세력은 전성기의 고구려에 크게 미치지 못하니, 강성한 당과 신라에 맞서 고구려를 계승할 것을 주장하기도 버거운 상황인 것이다.

 

 

북송은 흔히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그 인구와 군사력에서 결코 약한 나라가 아니었다. 여러가지 난맥상이 겹치면서 주위에 동네북으로 전락하기는 했지만 싸우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싸울 수 있었고, 금의 침략에 대해서도 그것을 최소한 저지할 군사적 역량은 되었다. 그만한 군사가 있고 그만한 기술이 있고 그만한 전술이 있었다. 악비와 한세충과 같은 명장들은 그러한 역량을 제대로 활용할 수 있었던 이들이었다.

 

그러나 금군에 의해 두 번이나 개봉을 포위당하고, 그로써 휘종과 흠종 두 황제가 금에 의해 포로로 잡혀가자 북송의 통치체제는 급속히 붕괴되게 된다. 하긴 황제가 사로잡혀 그 자리가 비어 있으니 그 자리부터 채워 넣어야 할 것이고, 그렇게 급히 채워 넣은 황제라는 것이 제대로 권위를 갖추기도 힘들었다. 고위직에 있던 인사들마저 모조리 포로로 잡혀갔으니 국가체제를 정비하려 해도 한참은 혼란에 빠져 있을 수밖에 없었고.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그래서 마침내는 임안마저 금군에 함락당하고, 그럼에도 그에 아무런 대처를 못하고, 결국 진회같은 이가 정권을 잡으면서 악비가 그에 의해 죽을 수밖에 없었다.

 

하긴 휘종이 하는 것으로 보아서는 그들이 금에 사로잡히지 않았다 하더라도 뭔가 더 나은 결과가 나왔을 것이라 기대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휘종이 금군을 피해 남하할 수 있었고, 그래서 휘종 자신이 임안에 남송의 정권을 수립할 수 있었다면 아마 역사는 조금은 달라질 수 있었을 것이다. 수뇌부가 남아 있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은 큰 차이가 있으니.

 

 

1560, 즉 에이로쿠 3년 오와리의 오다가는 긴장에 휩싸이게 된다. 쓰루가의 이마가와가 죠라쿠를 명분으로 2 5천의 병력으로 오와리를 공격해 왔기 때문이었다. 당시 오다가가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최대가 3천 명, 10 1에 가까운 비율이니 어떻게 보아도 승산은 없었다. 그러나 앉아서 멸망할 수는 없기에 오다 노부나가는 그 진격로상에 여러 성을 쌓고 농성토록 한다. 그리고 때를 기다린다. - 혹은 뭘 어찌 할 바를 모르고 허둥거린다.

 

그러다가 마침내 5 19일 오다 노부나가는 기요스를 나와 출격하게 된다. 이때 그를 따르던 것이 고작 200, 이때는 이미 마루미와 와시즈의 두 성채가 함락된 다음이었다. 탄게로 들어간 노부나가가 병력을 결집하는 사이 나카지마에서 삿사와 센슈 두 장수가 적과 싸우다 죽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연이은 패전, 그러나 노부나가는 도리어 나카지마로 군을 이끌고 진출할 것을 명령한다. 지형상의 불리함에도 불구하고 무모하게 나카지마로 진출한 노부나가는 오케하자마에 적이 주둔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는 그에 공격을 가할 것을 명령한다. 이때 노부나가의 병력은 2천 정도였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당시 오케하자마에는 이마가와의 전위부대가 자리하고 있었다. 전위부대 뒤에는 이미가와의 본대가 있었다. 다만 오다 노부나가는 그것을 몰랐고, 단지 그동안의 전투에 지친 이마가와의 부대가 그곳에 주둔하고 있다고만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마침 불어온 폭풍우로 이마가와군 역시 오다군의 위치를 놓치고 있었기에 서로가 서로를 모르는 가운데 오다군의 공격으로 기습은 성공할 수 있었다. 여러 우연이 겹친 정면공격에 의한 기습이었다.

 

전위부대에서 시작된 혼란은 본대에까지 파급되기 시작했고 이마가와 요시모토는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퇴각할 것을 결심한다. 그리고 그때 오다 노부나가도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그곳에 있음을 보고받는다. 오다 노부나가는 병력을 그리로 집중시키기 시작한다. 대장인 이마가와 요시모토만 잡으면 싸움은 끝나게 되는 것이니. 결국 300명의 하타모토들의 호위를 받으며 퇴각하던 이마가와 요시모토는 오다 노부나가에 의해 죽임을 달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대격변의 시작이었다.

 

일단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죽으면서 다케다와 호조의 쓰루가에 대한 야심이 더욱 노골화되자 이마가와는 더 이상 서쪽으로 진격할 힘을 잃게 된다. 마쓰다이라 모토야스 - 도쿠가와 이에야스 - 는 이때 이마가와의 진중에서 빠져나와 미카와의 본거지로 돌아오게 되고, 미카와에서 오다 노부나가와 동맹을 맺게 된다. 오다 노부나가는 더 이상 이마가와를 신경쓰지 않아도 되게 되면서 미노 공략에 더욱 전념할 수 있게 되었고. 장차 전국의 혼란을 정리할 오다 노부나가의 행보는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안데스 고원을 중심으로 수백 년을 이어 오던 잉카제국의 멸망은 너무나도 허망한 것이었다. 고작 수백의 에스파냐군에 의해 황제 아타우알파가 사로잡힘으로써 한 순간에 그 역사에 종지부를 찍어야 했으니. 아무리 원시적인 무기로 무장하고 있고, 그 기술수준이나 군사력이 에스파냐군에 미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어차피 당시의 머스켓이라는 것은 수십 배의 적을 물리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 그러나 황제가 사로잡힘으로써 잉카는 그 저항의 구심점을 잃게 되었고, 결국 잉카제국은 해체되고 그 영토와 백성들은 에스파냐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되었다.

 

 

고래로 성공한 반란은 항상 권력의 주변에서 일어났다. 멀리에서 일어난 반란 치고 성공한 예는 극히 드물다. 권력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일어난 반란이 항상 성공하고, 권력에서 멀수록 항상 실패한다. 조선에서 성공한 반정과 실패한 반란의 예를 보면 더 확실하다. 한 차례의 정난과 두 차례의 반정과, 그러나 홍경래의 난이나 동학농민혁명이나 이징옥의 난은 모두 진압되었다. 너무 멀리에 있었기에 조선의 역량이 제대로 발휘될 여지를 주었기 때문이었다.

 

뱀을 잡을 때는 머리를 눌러 잡는다. 어차피 뱀의 독니는 머리에 있으니 아무리 꼬리가 날뛰어봐야 머리를 잡고 있는 이상에는 아무런 위협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람을 죽일 때도 머리를 자르고 나면 제아무리 대단한 사람이라도 한 순간에 무력해지게 된다. 머리가 뛰어나면 손발이 편하고, 머리가 나쁘면 손발이 바쁘고, 작지만 가장 큰 것이 그래서 머리다.

 

금적금왕이라는 것은 뱀을 잡을 때 머리를 잡는 것을 말한다. 사람을 죽일 때 단번에 목을 쳐서 무력화시키는 것을 말한다. 한 무리를 이끄는 것은 그 머리다. 왕이거나 추장이거나 혹은 대장이거나, 그들에 의해 명령이 내려지고, 그들에 의해 질서가 이루어지고, 그들에 의해 나아가고 물러섬이 이루어진다. 비록 한 순간 우세를 차지할 수는 있어도 머리가 남아 있는 동안에는 다시 무리를 정비하여 조직적인 방어에 나설 수도 있고 그러다 보면 역습의 기회도 노릴 수 있다. 무엇보다 상대가 나보다 강하다면 머리가 남아 있는 동안에는 이길 도리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싸움을 잘하는 자는 그 머리부터 치는 것을 최우선 전략으로 삼았다. 고대에는 왕이 곧 국가이기에 왕을 잡고자 그리로 힘을 집중시켰고, 근대에 이르러서는 그 유기적인 시스템을 마비시키기 위해 그 중심에 있는 정부 - 수도를 노렸다. 야전에서 지휘관은 병사들을 지휘통제하는 사람이다. 그로부터 전술이 나오고 그 전술에 의해 전투가 행해진다. 따라서 지휘부를 괴멸시키면 병사들은 통제를 잃고 흩어지게 된다. 그래서 또 머리를 노렸다.

 

임진왜란에서도 그래서 일본군은 오로지 한양의 왕을 사로잡는 것을 목표로 삼았었다. 한국전쟁 당시에도 북한공산군은 서울을 함락시키고 정부를 전복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물론 그러한 의도는 선조와 이승만이 재빨리 서울을 빠져나감으로써 오히려 전략적인 혼란에 빠지는 원인이 되었다. 적이 왕을 잡으려 하니 왕이 스스로 도망침으로써 그 의도를 좌절시키고 나아가 반격의 빌미를 만든 결과라 할까? 그래서 금적금왕에 대한 최선의 대응은 마지막 삼십육계의 주위상이다. 잡으려 하면 도망치고 도망쳐서 다시 기회를 만들라.

 

 

물론 머리를 잡는 방법이 싸우는 것만 있는 것은 아니다. 백제만 하더라도 멸망할 당시 백제의 상층부에는 임자라는 신라에 포섭된 고위간첩이 있었다. 그에 의해 백제의 고급정보는 신라에 빼돌려질 수 있었고, 백제의 내정과 재정은 극도로 혼란스럽고 궁핍해질 수밖에 없었다. 나당연합군이 쳐들어 왔을 때도 백제가 빠르고 유기적인 대응을 하지 못한 것도 결국 그로 인해 머리가 마비되어 버린 때문이었다. 비유하자면 머리에 벌레를 심어 그것으로 상대를 죽이는 계책인 것이다.

 

 

구일본제국이 조선을 멸망시킬 때에도 그들이 가장 먼저 한 것은 조선의 지배층을 포섭하는 것이었다. 조선의 지식인들로 하여금 일본에 유학토록 하고, 유학하는 도중 일본의 제국주의적인 가치관에 물들도록 하고, 다시 조선의 관료들에게는 적당한 선물과 예우로써 그들이 자신들의 편을 들도록 회유하였다. 그럼으로써 일본은 굳이 전쟁을 하지 않고서도 조선의 조정을 지배 아래 두게 되었으니, 정작 조선을 멸망시킨 것은 일본의 군사력이 아닌 이들 일본에 회유된 조선인들이었다.

 

식민지 조선에서도 구일본제국의 조선총독부는 조선의 지배층인 양반과 지주들에 대한 예우를 오히려 조선시대보다 더 강화했다. 전호제 아래에서 지주의 권리는 강화되고, 양반에 대해서도 그 권리를 상당부분 인정함으로써 정작 식민지지배에 대항해야 할 지배계급을 자신들에게로 끌어들이고 그들의 영향이 미치는 민중에 대해서까지 보다 안정적인 지배를 꾀했었다. 머리를 먼저 잡아버리고 나니 몸통과 꼬리마저 그렇게 일본제국에 끌려가게 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머리를 잡는 방법은 다양하다. 때려잡아도 되고, 유혹해 끌어와도 되고, 술에 취하도록 만들어 그 판단을 잃도록 해도 되고, 중요한 것은 상대가 제대로 판단하고 대응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상대가 제대로 판단하고 대응하지 못하도록 함으로써 보다 쉽게 이쪽의 의지와 의도를 상대에 강요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결국 싸우고 겨룬다고 하는 것은 상대에게 나의 의지와 의도를 강요하고자 하는 것이니. 병법삼십육계의 열여덟번째 금적금왕이다.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