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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게시판 기타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역사와 역사학에 대한 썰
Black Douglas 추천 1 조회 673 18.06.13 01:07 댓글 74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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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8.06.13 07:30

    @선비욜롱 랑케의 실증주의 사관이란 역사가의 의무는 과거의 사실을 단순 기술하여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라는 역사철학이고 이는 가치판단을 배제한다는 점에서 위에서 제시된 역사학이란 도덕판단을 배제하고 과거의 사건의 메커니즘을 분석하여 이해하는 것이라는 관점과 동일선상에 있습니다.
    바로 이런 관점이 카가 비판한 것입니다.

  • 18.06.13 07:31

    @선비욜롱 역사학에서 '최대한' 주관을 제거할 수 있고 또 제거해야 한다는 말은 애초에 탐구의 시작부터 의미있는 역사적 사실이란 것 자체가 역사가의 주관에 따라 결정된다는 사실을 고려해볼 때 의심스럽습니다. 예를 들어 역사가의 관점에 따라 어떤 역사가에게는 루비콘 강을 건너는 카이사르가 어떤 정치적 상황에 처해 있었는지는 중요하지만, 카이사르가 신고 있던 신발이 어떤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당대 로마 수공업의 중요성을 보여주려 하는(즉 그런 가치판단을 내린) 역사가라면 신발을 중요시 여길 수 있을 것입니다.

  • 18.06.13 07:42

    @선비욜롱 왜곡되지 않은 사료를 (사료 자체가 가치판단을 하는 인간이 기록한 것이라는 점에 유의하면서) 올바른 논리로 해석하여 합리적인 결론을 내는 것은 당연히 모든 역사가가 추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어떤 사료를 선택할 것인지, 그 사료에서 무엇을 읽어내 해석할 것인지, 어떤 결론을 내릴 것인지 모두 현대를 사는 역사가의 가치판단이 들어갈 수 밖에 없으며, 역사학에서 추방해야 할 것은 가치판단이 아니라 비논리성이라는 것입니다.

  • 작성자 18.06.13 09:51

    @Grundrisse 애초에 지금 제가 글에서 주장한 이야기는 주관의 배제가 아닙니다. 재판이라는 옹호와 단죄의 판단이 대한 배제일 뿐입니다. 또한 지속적으로 오류를 내시는건, 제가 말하고자 한 점은 사료를 판단하고 나아가서 그것을 무엇으로 볼지에 대한 주관을 배제함을 논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1과 2의 차이를 논하는 것과 1의 선악을 논하는 것에 대한 주관을 달리 보고 있는데 여기서 필자의 주장은 이 선악, 즉 단죄 옹호, 찬양 비난에 대한 배제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 작성자 18.06.13 10:01

    @Black Douglas 또한 e.h.카의 논지는 객관적인 사실만을 추구하는 것에 대한 비판입니다. 이는 랑케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랑케의 후계자들 중에서 소위 '실증학'을 주장하는 이들을 향한 것이고요. 랑케를 중요시 하는 이유는, 그가 주관적이고 색채 넘치는 이야기를 했음에도 모든 사학자들이 따르는 규범인, 역사학에 대한 탈도덕화인 것입니다. 이후 등장한 문화사나 신문화사에서도 그것이 어떻게 복합적으로 발생한건지, 윙크라는 것을 해도 그것이 윙크라고 약속하고 하는건지 어떤 느낌으로 서로가 무엇을 전달하려는건지에 집중되지, 그래서 그 윙크는 죄악이었던가 를 다루지 않습니다. 물론 사학자들이 이 죄악이 대한 부분을 생각하지 않을 수는

  • 작성자 18.06.13 10:05

    @Black Douglas 없습니다만, 이는 생각함이고 생각함과 학문의 거리는 좀 이질적입니다. 생각함은 대집합이고 학문은 그것에서 학문이 추구하는 목적을 학문화 시킨 소집합 입니다. 즉, 역사학을 하는 목적:'그것에 대한 이해'를 위한 주관과 사고방식을 배제함이 아닌, 이를 넘어선 타 사고 방식을 배제함이란 것이죠.

    이해함의 역사는 그저 그것이 발생했다로 이해하는 것이 끝이 아닙니다. 이해함에는 수많은 주관과 판단이 들어가고, 이 주관 속에서도 학자들 간의 거를 주관이나 지향할 주관들이 나뉘지만, 어째건 '사학'이란 것을 부정하진 않습니다. 하지만 재판은 사학이 아님을 주장하고 그것을 최대한 실현하려고 하는 것이 현대 사학계의 흐름입니다

  • 18.06.13 14:00

    @Black Douglas 당연히 역사가는 역사에서 초월한 어떤 절대적 기준(이를테면 선악)을 세워 역사적 사건을 규정짓는 재판관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역사적 사건을 평가하지 않고 그 메커니즘에 대한 이해만을 추구하는 것이 역사학의 영역이고 그 이상은 법이나 윤리의 영역이라고 하신 것에 대해 말하자면 실제 역사가들은(역사가도 인간이기에) 그렇게 행동하지도, 또한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바람직하지도 않습니다.
    역사학이란 인간 사회를 이해하고 더 낫게 만들기 위한 사회과학의 일부고, 다른 사회과학과 구별되는 역사학만의 특별한 점은 과거의 인간 사회를 고찰해 현대의 인간 사회에 대한 이해를 신장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는 점입니다

  • 18.06.13 14:17

    @Black Douglas 역사학은 자연과학과 달리 인간 사회를 대상으로 하는 과학이며, 단순히 '그것에 대한 이해', 즉 사실관계와 인과관계를 명확히 설명하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어떤 것을 중요하다고 생각해 선택해 설명하는지에서부터 역사가의 가치판단이 개입됩니다.
    모든 역사 서술은 의식적이든 아니든 역사적 사건이 '옳은지 그른지', '진보적인지 퇴보적인지', '선한지 악한지'등등에 대한 비교를 포함하고 있으며, 당연히 이 기준은 역사가 자신이 역사와 사회의 산물이기에 절대적인 기준이 아니라 현 사회의 산물입니다.

  • 18.06.13 14:19

    @Black Douglas 스스로 의식하든 그렇지 않든 '이해함' 자체에 역사가의 가치판단과 비교, 즉 '재판'이 전제되어 있으며, '재판'이 없는 역사학이란 단순한 연표에 한없이 가깝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 작성자 18.06.13 14:23

    @Grundrisse 연표에 가까워짐이 아닙니다. 매커니즘의 이해는 그저 이해가 아니라, '왜' 그것이 그랬는지가 중요한거고, 이걸 이해하면서 어떤 상황 맥락에서 그것이 어떻게 발생하고 작용하여 효과를 내는지 이해하는건데, 이것은 곧 사람을 때리는 것이 나쁘다고 말함이 아니라 사람을 때리는 상황이 어떻게 발생하는지를 보는 겁니다.

    또한 역사가들이 무엇이 중요하다고 본다고 해서, 이것이 좋고 나쁘다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이부분에서 이걸 강조해서 보는거랑 이거에 대한 선악 구분을 하는건 다른 맥락입니다.

    역사학은 사고방식의 일부분일 뿐입니다. 역사에서 재판하지말자는 말이 안 되는 것이 역사를 통한 사고는 자유롭고 무한한 것이기

  • 작성자 18.06.13 14:26

    @Black Douglas 때문이지만, 역사학의 목적은 그게 아닌, 이해함으로써 왜 그게 일어났는지, 쉽게 생각하면 이게 왜 사람을 때리도록 작동한 원인을 파악하는거고, 이 과정은 매우 어렵고 주관적이라 이 자체만으로도 학문으로 분류되고 분류한 것입니다.

    또한 위에서 계속, 그리고 본문에서도 밝히듯이, 가치판단과 주관의 배제가 아닌, 재판하고 옹호와 단죄의 배제일 뿐입니다. 역사학에서 그것을 이해한 뒤에 옳고 그름을 따지지는 않습니다. 인간이 그것을 행하는 것은 사고방식의 전체적인 맥락이고, 그것에서 이해함을 때어낸 것이 역사학이라고 봅니다. 이후 그것이 선한지 악한지 혹은 무엇인지는 그걸 전달 받은 이들의 몫이고요.

  • 작성자 18.06.13 14:30

    @Black Douglas 또한 역사를 평가함으로써 교훈을 얻는 역사서술은 전근대의 역사서술의 목적이었습니다. 그리로 그걸 타파하자고 주장한 것이 랑케였고, e.h.카는 이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 객관적임에 대한 의문이었을 뿐입니다. 랑케가 주장한 것에서 파생된 실증주의에 대한 비판이었지만, 그것이 랑케가 주장한 근대사학의 토대를 완전히 깔아뭉갠 것이 아니고요. 아까도 말한 문화사적 접근이나 신문화사적 접근에서도 이러한 복합적인 이해를 더 강조한 것이 강합니다. 하지만 결국 이는 재판하므로써 얻는 교훈이 아닌 이해함으로써 얻는 의미를 어디에 중점으로 둘지에 대한 논의와 비판입니다.

  • 18.06.13 14:35

    @Black Douglas 예를 들어 사람을 때리는 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때리는 것이 왜 일어나는지를 밝히는 것이 역사학이라고 하셨지만, 사람을 때리는 일을 연구하는 것, 즉 사회과학은 행성의 궤도를 연구하는 것, 즉 자연과학과는 다릅니다. 애초에 사람을 때리는 것이 나쁘거나 (혹은, 좋다는!) 가치판단이 없다면 그런 연구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가치판단은 '재판'과 동의어이고요.
    물론 절대적인 선악의 기준으로 역사적 사건을 재단할 수는 없습니다. 예를 들어 고대 그리스의 노예제도를 단순히 현대인의 기준으로 악하다고 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겠지요. 이런 의미에서라면 '재판'은 당연히 배제되어야 합니다.

  • 18.06.13 14:44

    @Black Douglas 하지만 고대 지중해 세계의 노예제도가 변화하고 소멸한 양상과 그 밑바탕이 되는 사회적 조건들을 서술한다면, 이것은 노예제도가 시작되는 시대, 융성한 시대, 소멸해가는 시대, 소멸한 후의 시대 등을 (어떤 절대적인 기준이 아니라) 서로간의 연관성을 바탕으로 비교한다는 것이고, 역사가의 가치판단을 포함할 수 밖에 없습니다.

  • 18.06.13 14:50

    @Black Douglas 역사에서의 해석은 언제나 가치판단과 밀접하게 연관되며, 인과관계는 해석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마이네케-1920년대의 마이네케인 그 위대한 마이네케-의 말을 빌리자면, ‘역사에서의 인과관계에 대한 연구는 가치와의 연관 없이는 불가능하며… 인과관계의 연구의 이면에는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항상 가치의 추구가 놓여 있다.’

    역사는 전통의 계승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전통은 과거의 관습과 교훈을 미래로 전달하는 것을 의미한다. (…) 역사가는 ‘왜?’라는 질문에 더하여 ‘어디로?’라는 질문도 제기한다.

  • 18.06.13 14:50

    @Black Douglas '단순한' 인과관계의 연구의 뒤에는 항상 역사가의 가치가 놓여 있으며, 역사가는 왜?라는 질문 뿐만 아니라 어디로?라는 질문 또한 제시한다는 <역사란 무엇인가>의 이 두 구절이 도움이 될까 합니다.

  • 18.06.13 21:42

    왜 그 것을 주관과 객관이라고 표현하죠? 주관 혹은 객관이라고 말하는 태도 자체에는 아我라는 요소가 아주 깊게 개입된 것입니다. 주관이라는 것은 아가 판단한다는 것이고, 객관이라는 것은 아의 안티테제인 타의 관점으로 본다는 것이지만 그 타에 아를 대입하는 것조차 결국 아로 수렴하는 것입니다.

    왜 그런 근본적인 문제에 봉착했을 때에 결국 아와 타의 설정수준에 따라서 그 것은 투쟁으로 그려질 수도 있고, 그 것은 혹은 타협이 될 수 있지만 끝내는 아의 팔레트에 또한 아인 행위자가 붓을 들고, 타의 관점이건 아의 관점의 무언가이건 그리는 것에 불과하군요.

  • 18.06.13 21:45

    참 뻔한 것입니다. 겨우 신채호의 아와 타의 수준의 것을 전혀 못 벗어난 주제에 겨우 그 것을 결론이라고 끄적인단 말입니까? 그 것은 당신의 독창적인 생각이 아닙니다. 그 것은 주입된 것이고 유도된 것으로 보이며, 그 것을 자기 자신의 입에서 나온 되새김질이라고 해서는 오리지널리티가 있다고 말하는 수준은 이 시대의 시대정신으로 보건데 너무 한심합니다.


    물론 저 자신도 오리지날리티가 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또 다른 성현의 관점은 가지고 올 수 있죠. 불교적 관점에 따르면 그 것은 단지 바뀌는 게임의 속성으로써 연기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연기 또한 결국 아의 욕망에 따라서 그려지군요.

  • 18.06.13 21:48

    게임의 속성은 항상 변하지만 그에 응하는 본성은 케바케라고 어떤 자아들은 여기겠지만 실상 A~Z까지의 프레임을 못 벗어난 법입니다. 그 것을 당신의 케릭터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 것은 극심하게 비판될 수도 있고, 또한 동료를 얻거나 조화를 이룰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왜 당신은 자기 자신을 드러내지 않죠. 아의 색은 빼놓고 그저 연기만 말하고 있습니다. 정작 조화는 연기와 아의 조합에서 나오는 것으로 어떤 게임에서 개돌을 할 것인가 스나를 할 것인가는 각각의 심상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심상이 더럽다면 우리는 격렬하게 거부할 수도 있고, 혹은 반대가 될 수가 있죠.

  • 18.06.13 21:51

    그런데, 꼰대들은 그저 법칙만 내세우고, 그들 자신들로부터 초래되는 비판이나 비난은 거절하려 합니다. 동양사회에서 그들은 마치 색이 없는 종자들처럼 말하려 하지만 그게 없을 리는 없죠.
    그러한 플롯을 당신은 답습하고 있으며, 여전히 너는 무엇을 말할 것인지 그 하나를 제시 못한채 그저 일반론이라는 연기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회색분자가 되는 과정조차 이 나라의 게임의 법칙이었다고 본다면 왜 그 것은 타에게 의미가 될 수 없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참 의미없는 한 네티즌의 넋두리보다 못한 것을 지금 이 곳의 타인들은 보고 있단 말입니다.

    적어도 그 넋두리에는 자기 자신이 어떤 존재인 것인가가 들어가 있군요.

  • 18.06.13 21:52

    우리가 관심있는 것은 인이지 법이 아니란 말입니다. 남녀관계의 연애의 법칙 100만가지 그 것보다 하나의 관심을 가질 진짜 사람에 대한 사랑이 필요했단 말입니다.

  • 18.06.23 18:58

    이런거 보면서 느끼는건데. 역사를 배워서 가장 좋은 점은 역사를 주제로 한 영화, 게임 드라마를 더 재미있게 즐길 수 있다는 점. 사학 공부했다고 꼭 더 지혜롭고 똑똑해지지는 않더라.

  • 18.08.18 15:13

    역사학에 대한 논의를 할 때면 언제나 두 가지 큰 흐름이 있지 싶군요. "주관"인지 "객관"인지, 혹은 "사실"인지 아니면 "창작"인지. 사학과 다니는 사람으로서 느끼는 바로는, 오늘날의 사학 연구는 자연과학에 비교하자면 이론 물리학과 지질학·생물학의 중간 어디쯤에 위치한 느낌이라는 것입니다. 과학적 방법론이 "사회학"과 "인문학"으로 퍼져나가 "사회과학"과 "인문과학"이 되어가는 모습을 아주 잘 보여주는 학문이라고 보네요.

  • 18.08.18 15:14

    아마 마르크 블로크나 존 개디스였던 것 같은데, 사학적 연구에서 도출하고자 하는 바는 역사적 사실(진실)이고, 그것은 다양한 원인이 어떠한 인과관계로서 결과와 엮여 있는지를 가지고서 탐구하는데, 그러한 것들은 결국 사실에서 출발하지요. 우리가 알아내지 못한 만큼, 흔히 "주관"이라고 부르는 다양한 견해의 스펙트럼이 존재하지만, 그 스펙트럼 자체는 사실에 의하여 폭에 제한을 받게 됩니다. 우리는 지금 어느 것이 매실이고 어느 것이 살구인지 구분하기 힘들어 하지만, 전혀 못할 일은 아닌 셈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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