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0월 21일 연중 제28주간 토요일
<너희가 해야 할 말을 성령께서 그때에 알려 주실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8-12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8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9 그러나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는 자는,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10 사람의 아들을 거슬러 말하는 자는 모두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자는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11 너희는 회당이나 관청이나 관아에 끌려갈 때, 어떻게 답변할까, 무엇으로 답변할까,
또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12 너희가 해야 할 말을 성령께서 그때에 알려 주실 것이다.”
순교도 하느님의 은총이 아니면 도저히 이룰 수 없는 신비
어느 신부님이 순교자들의 영성과 신심에 대해서 강의하실 때 가슴에 용솟음치는 뜨거운 성령의 역사하심을 체험한 적이 있습니다. 박해 시대에 관장들이 신자들을 잡아다가 매를 때리고, 고문하고, 며칠씩 굶기기도 하고, 자식들을 데리고 와서 자식들로 하여금 주님을 배반토록 회유하였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주님을 배반한 사람들을 앞장세워 그들이 호강하는 것을 야비하게 보여주고, 정신적인 압박을 가한 다음 사형 언도를 내리기 직전에 마지막 기회라고 신자들을 회유합니다. 그 회유 방법은 아주 지능적인 것이었는데 주님의 성화와 묵주, 또는 십자고상을 바닥에 놓고, “네가 이것을 밟거나 넘어가면 집에 보내 줄 것이고, 넘어가지 않거나 돌아가면 그 자리에서 참수하겠다.”하고 칼을 든 망나니를 양 옆에 세워 놓습니다. 그런데 많은 순교자들이 그 성화나 묵주를 넘지 않고 돌아가거나 그 자리에 비켜서서 칼을 맞았다는 것입니다.
강의를 들으면서 나는 얼른 ‘모두 용서하시는 주님이신데 잠시 한 번 넘어간 다음에 집에 가서 주님께 용서를 빌거나 통회하면 될 것을 왜 그렇게 미련하게 칼을 맞아 죽어야 했을까?’ 하고 생각하였는데 바로 신부님께서 그 얘기를 해 주시는 것입니다. 성화나 묵주를 넘어가려고 생각하다가도 바로 그 앞에서 성령께서 “얘야, 돌아가서 칼을 맞아 죽어라 너와 나는 언제나 함께 할 것이다.” 하고 이끌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순교도 하느님의 은총이 아니면 도저히 이룰 수 없는 신비라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성령의 역사하심을 더욱 가슴 깊이 느끼고 체험하게 됩니다. 순교자들은 그렇게 주님을 목숨을 걸고서 증언하였고 주님의 성령께서 역사하심을 생생하게 체험하였기 때문에 소중한 목숨도 초개(草芥)같이 위주치명(爲主致命)할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는 나를 사랑한 사람이며, 나를 안다고 모든 사람에게 말한 사람이고, 내 명을 따라 복음을 세상에 전한 사람입니다.’하고 하늘나라에서 재판정에서 명쾌하게 증언하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을 모독하면 용서받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당신께서 보내시는 성령을 모독하는 것과 당신께 함부로 하는 것을 구별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순교자들이 성화를 넘지 않고 돌아가서 칼을 받은 사람과 성화를 넘어가고 평생을 주님께 대한 후회와 회한으로 살았을 사람의 차이는 엄청나게 크다는 사실을 이제 어렴풋이 느끼고 있습니다. 똑 같지는 않지만 예수님을 배반한 베드로와 유다를 보면서 베드로는 성령을 받아 주님께 용서를 청하고, 희망과 용기를 가지고 으뜸제자가 되고, 교회의 주춧돌이 되었지만, 유다는 실의와 좌절로 목을 매 자살한 것을 보면서 용서받을 기회를 받지 못한다는 것을 겨우 깨달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교리에서 가르치는 향주삼덕(向主三德)은 주님의 예지(叡智)에 대하여 믿음으로 응답하고, 주님의 무한하신 권능(權能)에 대하여 희망으로 응답하고, 주님의 끊임없는 큰 사랑에 대하여 사랑으로 응답하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그 모든 것이 성령이십니다. 우리의 탓으로 성령을 외면하여 믿음이 없는 삶, 희망이 없는 좌절의 삶, 사랑이 없는 이기적이며 척박한 삶이 곧 성령을 모독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이제는 이에 올곧게 응답하는 삶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입니다.
당나라 때의 유명한 시인 맹교(孟郊)의 시 유자음(遊子吟 : 길 떠나는 아들의 노래)이 우리를 세상에 보내시는 주님의 마음을 노래 한 듯하여 주님의 사랑에 보답할 마음을 새겨봅니다.
유자음 (遊子吟) - 맹교 (孟郊)
자애로우신 어머니 실을 드시고 慈母手中線(자모수중선)
길 떠날 아들 몸에 입힐 옷 遊子身上衣(유자신상의)
떠나는 날까지 촘촘히 꿰매심은 臨行密密縫(임행밀밀봉)
내가 늦게 돌아올까 마음 졸이심이라네 意恐遲遲歸(의공지지귀)
오~ 한 치 길이의 풀과 같은 마음으로 難將寸草心(난장촌초심)
온 봄의 햇빛을 어이 갚으리. 報得三春暉(보득삼춘휘)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믿었다.>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입니다. 4,13.16-18
형제 여러분, 13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는 약속은 율법을 통해서가 아니라
믿음으로 얻은 의로움을 통해서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에게 주어졌습니다.
16 그러한 까닭에 약속은 믿음에 따라 이루어지고 은총으로 주어집니다.
이는 약속이 모든 후손에게, 곧 율법에 따라 사는 이들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이 보여 준 믿음에 따라 사는 이들에게도 보장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우리 모두의 조상입니다.
17 그것은 성경에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만들었다.”라고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아브라함은 자기가 믿는 분, 곧 죽은 이들을 다시 살리시고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도록
불러내시는 하느님 앞에서 우리 모두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18 그는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너의 후손들이 저렇게 많아질 것이다.” 하신 말씀에 따라
“많은 민족의 아버지”가 될 것을 믿었습니다.
축일10월 21일 성녀 우르술라 (Ursula)
신분 : 동정 순교자
활동 지역 : 쾰른(Koln)
활동 연도 : +4세기경
같은 이름 : 오르솔라, 우루술라, 우술라
성녀 우르술라는 4세기경 독일 쾰른에서 11,000명의 동정녀들과 함께 순교한 것으로 여겨져 왔다. 이들의 순교에 얽힌 이야기는 중세 때 “황금 전설”(Golden Legend)에 수록되어 있다. 전설에 따르면 성녀 우르술라는 영국에서 그리스도교 신자인 어느 왕의 딸로 태어났다. 성녀 우르술라는 이교도 왕의 아들에게 청혼을 받았으나 결혼보다는 동정녀로 살기를 간절히 원했다. 그래서 어렵게 3년이란 시간을 얻어 귀족 가문의 처녀 10명과 함께 여행길에 나섰고, 그 사이에 비신자인 왕자는 교리 공부를 하고 세례 받을 것을 약속받았다. 성녀 우르술라와 10명의 처녀들은 각각 1,000명의 처녀들을 데리고 11척의 배에 나눠 타고 항해를 떠났다.
3년의 약속한 시간이 되자 약혼자는 성녀 우르술라를 불러들였다. 그런데 강풍이 불어 성녀 우르술라와 그 일행이 탄 배가 영국 해안에서 떠밀려 유럽 대륙의 쾰른까지 떠내려갔다. 쾰른에 도착한 성녀 우르술라와 동료 동정녀들은 육로로 로마(Roma)에 가서 교황의 환영을 받았다. 그리고 일행 중에 세례 받지 않은 모든 동정녀들에게 세례를 주고 다시 쾰른으로 돌아왔다. 성녀 우르술라와 그 일행이 쾰른으로 돌아왔을 때 그 도시는 이미 훈족에게 포위당한 상태였다. 약탈과 살인을 일삼던 포악한 훈족의 족장은 성녀 우르술라의 미모에 반해 청혼했으나 거절당했다. 화가 난 족장은 성녀 우르술라와 그 일행에게 신앙을 포기하도록 강요하며 혹독한 고문을 자행했으나 성녀 우르술라의 지도를 받은 동정녀들은 배교하지 않고 끝까지 신앙을 지키다가 모두 순교했다고 한다.
성녀 우르술라와 11,000명의 동료 순교자들에 관한 이야기는 중세기에 가장 대중적이고 인기 있는 순교 이야기 중 하나였다. 10세기부터 이들 순교 이야기에 11,000명이란 숫자가 명시되기 시작했는데, 사실 11,000이란 숫자는 ‘XIMV’을 후대에 필사자가 잘못 읽은 데서 기인했다고 한다. 본래 이 표기는 ‘11명의 동정 순교자’(11 Martyres Virgines)라는 의미인데, 이를 ‘11,000명의 동정녀’(11 Milla Virgines)라고 해석했기 때문이다. 즉 ‘M’이란 글자를 ‘순교자’가 아닌 ‘천(千)’이란 숫자로 잘못 해석한 것이다.
1535년 브레시아(Brescia)의 성녀 안젤라 메리치(Angela Merici, 1월 27일)는 특별히 소녀들의 교육, 가톨릭 여성 교육에 헌신하는 수도회를 설립하면서 성녀 우르술라의 이름을 따서 ‘우르술라회’로 명명하였다. 이 수도회의 활동과 함께 성녀 우르술라에 관한 이야기도 전 세계로 퍼지게 되었다. 그러나 18세기 중엽 교황 베네딕투스 14세(Benedictus XIV)가 성녀 우르술라 외에 동료 순교자들에 대한 언급을 “로마 순교록”에서 삭제했고, 1969년 로마 전례력 개혁 때는 성녀 우르술라 이름도 빠졌다. 그래서 보편 전례력 안에서 성녀 우르술라의 이름을 찾을 수는 없지만, 여전히 여러 지역 교회에서 성녀 우르술라는 가톨릭 교육(특히 여성 교육), 교육자와 교사들, 학생들, 선종(善終)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성녀 우르술라는 오르솔라(Orsola)로도 불린다.
오늘 축일을 맞은 우르술라 (Ursula) 자매들에게 주님의 축복이 가득하시길 기도합니다.
야고보 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