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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한강중학교 재학 시절에 복싱에 입문했으며, 3학년 때 전국학생신인선수권대회에 처음 출전했다.[1]1982년 프로에 데뷔해, 1984년 동양 타이틀을 따고, 이듬해 조이 올리보를 판정승으로 누르고 WBA 챔피언이 되었다. [1]1991년이오카 히로키에게 패하여 타이틀을 빼앗겼으나, 이듬해 1992년에 다시 챔피언 자리에 올랐다. 이어 같은 해 은퇴하였고 이후에는 예식장, 설렁탕집, 오리고기집 등을 경영하였으며[1]사업으로 생긴 수입으로 복싱계를 지원하고 있다. 복싱 선수 시절인 1988년 3억8000만원의 대전료를 받고 국내 프로복서 중 최고의 소득을 올렸다.[2]
당시 연 2억 원 이상의 소득이 있었던 유명우 였지만 그는 늘 대중교통을 이용했고 부친이 정년 퇴직을 한 후에야 자가용을 구입했다. 세계챔피언이 된 유명우는 성실함과 철저한 자기관리를 바탕으로 무려 17차 방어전까지 치렀다. 그러나 91년 첫 해외 원정 방어전이었던 일본(18차)에서 이오카 히로키에게 석연찮은 판정으로 타이틀을 빼앗겼다. 현역때 ‘무패 상태에서 명예롭게 은퇴하겠다’던 유명우의 꿈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3]
이후 유 대표는 17번의 방어전을 치르는 약 6년간 정상의 자리를 굳게 지켰다. 유 대표가 세운 '17차 방어'는 이 체급 최다이자 한국 프로복싱 사상 최다다. 한국 복싱에서 다시 나오기 어려울 것으로 보이는 '프로 36연승'의 기록도 세웠다.
첫댓글 비슷한 시대였던 장정구보다 훨씬 좋아하던 선수였습니다. 저 특유의 쏟아붓는 펀치는 정말 멋졌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