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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net L. Abu-Lughod
트루아는 로마 시대의 요새가 있던 곳으로서 이미 5세기에 정기시를 개최했던 증거가 있으며, 더 이른 시기에도 그런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롬바르디아 족이 6세기에 이탈리아 반도를 차지했을 때 일부 주민들은 북동 해안 석호 앞바다로 대피하여 베네치아 시를 건설했다.
(트루아는) 8세기에 카롤루스가 재통합을 시도하면서 트루아와 프로뱅은 행정 중심지로 선택되었다.
9세기 말에 북서 유럽에서는 초기 봉건제라고 할 만한 방위체제가 확립되었는데, 그것은 로마적, 게르만적 선례들을 융합시킨 것이었다. 한 세기 후에는 특히 프랑스와 저지대 지역에서 봉건제라고 불리는 사회형태가 실질적으로 재도화되었다. 페리 앤더슨은 그 시기를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특히 프랑스의 농촌에서는 지방 영주들이 새로운 이민족의 공격을 막아 내고 국지적인 권력을 수호하기 위해서 황제의 승인 없이 사적인 성과 요새들을 건설하느라고 동분서주했다. 성들이 건축된 새로운 경관은 농촌의 주민들에게 보호처이자 동시에 감옥을 의미했다. 농민층은 카롤루스의 통치 말기 이래로 이미 종속이 심화되고 있었는데, 결국에는 일반적인 농노의 지위로 추락했다.....봉건제는 다음 2세기 동안에 [북서] 유럽 전역에서 서서히 뿌리를 내렸다.
봉건제는 해안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에 견고한 기반을 구축했다. 소규모 교역 중심지들이 주군의 성곽 주변이나 수도원의 보호구역 내에서 성장하거나 부활했다. 이곳에서는 지방 영주들이게 상업상의 봉사를 하는 답례로 그로부터 특별한 시혜와 보호를 받았던 상인들에 의해서 상품들이 교환될 수 있었다. 이러한 정주지 가운데 특히 중요 육로나 해로가 교차되는 곳에 위치한 몇몇 지점은 결국 정기시의 장소로서 혹은 내륙부까지 도달하던 "국제무역"에 소규모 상품을 공급하는 교환 장소로서 기능했다.
(10세기에) 트루아와 프로뱅의 경우에는 교환보다는 직물 생산의 중심지로서 더 큰 역할을 했다.
11세기에도 북서 유럽은 여전히 자급자족적인 봉건 영지들로 분열되어 있었으나
1223년에 티보 4세는 프로뱅 시민의 요처에 의해서 백작에 속한 사람(즉 그의 보호 아래에 있는 농노)이나 도시의 주민(자유로운 시민) 외에는 프로뱅에 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직물을 새산하는 것을 금지한다고 포고했다.(Chapin)
티보 4세는 1230년 트루아에 특허장을 수여한 이후에도 계속해서 제분소와 도시의 다른 경제적 사업들에 대한 독점권을 장악하고 있었고, 도시 내에 많은 재산도 소유했다(Gies & Gies) 도시민을 농노의 지위로부터 "해방한다"는 1242년의 그 유명한 특허장은 악명 높은 타이유 세(인두세, 원래 프랑스에서 영주들이 자의적으로 거두었던 부당 징세였으나 차츰 고정된 액수로 매년 징수되었으며, 중세 말부터는 국왕이 평민들에게 부과하는 직접세가 되었다/역주) 대신 개인의 재산과 토지에 대해서 그에 못지않게 부담스러운 세금을 부과했다. 1242년의 두 번째 특허장에 따르면 트루아는 12명으로 구성된 시참사회에 의해서 통치되어야 한다고 명문화되어 있었지만, 실제로는 1317년까지 이 참사회가 구실을 했다는 어떤 증거도 발견되지 않았다(Boutiot). 1270년 까지도 티보 5세는 자신을 여전히 상파뉴와 브리의 "국왕"으로 언급했고, 필시 그 도시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가장 너다한 수익을 내던 두 가지 활동인 직물 상인과 은행가의 역할을 잘 구별되지 않았다. "통상적으로 두 역할은 단일한 사업가에 의해서 결합되었다"(Gies & Gies). 그 반면에, 상인-은행가와 노동자 사이의 격차는 점점 커졌다. 원래 거의 대부분의 숙련공은 동시에 상인으로서 활동하였으나, 13세기에 이와 같은 체제가 근본적인 변화를 겪었다.
트루아 상인들은 금전을....... 무엇보다 양모에 투자했으며.......[그러나 한 상인은 싼값에 대량으로 구입했고] 그 후에 다시 그것을 직공에게 공급하여 자신이 명시한 특정 종류의 직물을 만들게 했다. 그는 이론적으로 원모를 개별 직공들에게 판매했고 완성된 모직물을 되샀다. 하지만 그는 항상 동일한 직공으로부터 구입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한 명의 모직물 상인이 도시에 산재해 있던 공장을 가동시키고 있던 셈이었다(Gies & Gies)
이처럼 노동자들은 프롤레타리아화되어가고 있었다.
1285년 일단 이(상파뉴) 영토들이 프랑스 국왕의 관할하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 그전까지의 독점적인 지위를 어느 정도 상실하는 것은 불가피 했다. 병합으로 인해서 정기시 도시들은 그 특별한 지위를 잃어버렸고, 많은 정기시 활동이 다른 곳들로 이전되었다. 결국 이탈리아와 플랑드르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 리옹이 자연스러운 회합 지점으로 자리를 잡았다. 상파뉴 정기시을 쇠퇴하도록 만든 또 하나의 요인은 플랑드르와의 정치적 분쟁에 있었다. 플랑드르 상인들은 그 분쟁 기간 동안에 실제로 정기시에 참여하는 것이 봉쇄되었다. 최종적인 요인은 이탈리아 상인들이 프랑스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플랑드르 지역에 이를 수 있도록 한 대서양 항로의 발견에 있었다.
트루아의 경우에는 다소 차이를 보였는데, 비록 직물업이 경제에서 주요한 역할을 했지만, 이 도시는 공업보다는 상업과 금융상의 기능으로 더 알려져 있었다. 게다가 이 도시는 백작의 행정 중심지 역할을 했기 때문에, 봉건 영즈, 산업가, 금융가 사이에 경계가 그다지 분명하지 않았다. 중세 유럽 도시를 "자치적인" 것으로 묘사하려는 많은 노력이 있기는 하지만, 13세기의 도시는 지방적인 봉건제와 깊이 얽혀 있었음이 강조되어야만 한다(Evergates)
(13세기)유럽에서는 은이 대단한 가치를 가지고 있었고 중동에서는 금이 사용된 반면에, 중국 에서는 동화銅貨가 정화(正貨, 본위화폐)로 선호되었다.
1293년 제노바의 해양 교역은 같은 해 프랑스 왕국의 전체 세입보다 3배나 많았다.(Lopez)
13세기 이전에 중동과 인도뿐만 아니라 유럽에서도 국제적인 상거래에서 선호되었던 정화는 금화였으며, 이는 최초로 비잔티움에서, 그리고 뒤이어 이집트에서 주조되었다. 몇몇 이탈리아 도시들(피렌체와 제노바)이 자체의 금화들을 주조한 것은 13세기 중엽 이후에 이르러서였다. 그나마도 이것들은 이미 유통되고 있던 중동의 금화들을 대체하기보다는 보충하기 위한 것이었다.
카이로의 번영이 절정에 이르렀던 시기는 1320년대였다
유럽에서는 이전에 주변부에 속했던 잉글랜드가 흑사병 이후에 "사망률"이 대륙보다 낮았다는 점 때문에 좀더 중심적인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그와 반대로 이탈리아 반도는 중동과의 교역과 왕래가 빈번했기 때문에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다. 이탈리아는 르네상스 시기에 힘을 회복하여 여러 도시들이 16세기 초까지 번성했고 생동감이 넘쳤으며 그 후로도 계속해서 지중해 교역을 주도했지만, 동지중해가 더 이상 동방에 이르는 유일한 톨로로 기능하지 못하게 된 요인까지 겹쳐, 지중해는 주요한 항로로서의 역할을 계속 담당할 수 없었다. 흥미롭게도 13세기 말에 북대서양 교역을 개척한 것은 이탈리아 도시 국가들의 갤리 선이었다.
1143년 코란이 마침내 서양어로 번역.
[서양 철학에서의 변화는] 대부분 12세기 4분의 3분기에 톨레도에서 일하고 있던 소수의 헌신적인 번역자들의 노력의 결과였다. 그들은 알-킨디. 알-파라비, 아비첸나 등 위대한 이슬람 철학자들의 저작들을 서양에 소개했다. 그리고 그들로 인해서 서양은 최초로 그리스의 철학적, 과학적 사상 전통을 상당한 정도까지 이어받는 것이 가능해졌다....그 업적들 가운데에서 많은 부분은 12세기 말에 이르러 라틴 어로 접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저작들의 사상과 용어가 라틴 신학에서 인정을 받았던 것은 비로소 1230년경 이후였다....앞선 세대의 신학자들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이름과 나란히 아비첸나의 이름이 인용된 것을 보았다면 경악했을 것이다. 그러나 놀라울 만큼 빠른 속도로 그와 같은 일이 벌어졌으며..(Southern)
북동부 프랑스에서느네 개의 도시로 이루어진 상파뉴 정기시가 주역이었는데, 트루아와 프로벵은 교역과 생산의 중심지였고, 바르-쉬르-오브와 라니는 그보다 소규모로 시장 중심지였다. 플랑드르 직물 생산 지역에서는 브뤼즈가 가장 중요한 상업과 재정의 중심지였고, 헨트가 주요 공업도시였다.
이탈리아 인들의 등장으로 정기시가 성립했으며, 1350년에 그들이 더 이상 나타나지 않게 된 것은 정기시가 쇠퇴했다는 신호였다.
13세기 후반에 이르기까지 베네치아와 제노바 상인들은 자기들의 화폐를 주조하지 않고 콘스탄티노플과 이집트의 금화를 사용했다.
12세기 후반에 이탈리아의 대상들은 무리를 지어 상파뉴 6개 정기시 각각을 향해서 여행했다.
악명높은 롬바르디아 인들처럼 일부 환전과 금전대부를 전문적으로 취급한 자들도 나타났지만,
13세기 중엽까지 상파뉴 정기시는 유럽의 교역에서 가장 중요한 집산 지였다.
정기시의 쇠퇴... 요인들 가운데에는... 이탈리아 상인들로 하여금 직접적인 여행을 중단하고, 고향에 머물면서 서신 왕래, 현지 "대리인", 지급어음을 통해서 사업을 수행하도록 했던, 상거래 방식읩 변화를 들수 있다.
이미 1262년에 바폼에서 국경 관세징수과에 의해서 냉대를 받았던 플랑드르 상이들은 일시적으로 정기시를 집단 거부한 일이 있었다(Bourquelot).앙리3세의 사망(1274)으로 백작령의 통치는 섭정(아르투아의 블랑쉬)의 손에 놓였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만의 고유한 관심사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로 인해 프랑스 국왕과 동맹을 맺었는데-그녀의 두 번째 남편이었던 랭커스터 공작을 통해서 잉글랜드 왕가와 동맹관계에 들아갔던 점은 말할 것도 없고-, 그 동맹자의 이해관계는 사실 상파뉴와 브리의 이해관계와 정면으로 대립했다.(Chapin).뒤이어 전개된 프랑스 국왕과 플랑드르 사이의 전재은 정상적인 상거래의 수해에 심각한 위협을 초래했다.그러나 중대한 전환점은 상파뉴와 브리의 백작령이 결국 프랑스 국왕에게 합병되었던 1285년이었다. 왕위 계승자 필리프는 1274년 나바르 왕국을 그의 '보호' 아래 두었고, 미성년이었던 앙리 3세의 딸 잔을 대신하여 상파뉴와 브리의 백작령을 차지했다. 1284년 결국 그녀는(블랑쉬)는 필리프와 결혼했고, 1년에 필리프가 프랑스의 국왕이 되자 샹파뉴 독립의 마지막 자취는 영구히 사라졌다(Boutiot) 플랑드르 상인들이 정기시에 도착하기까지 겪는 어려움은 더욱 가중되었다. 그들은 1302년부터 1304년까지 빈번한 공격에 시달렸으며, 1315년에는 아예 출입이 금지되었다.(Bautier). 그 후에 다시 출입이 허용되기는 했지만, 그들은 점진적으로 증가하던 수입세를 지불해야만 했다.(Bourqu
elot). 이는 국왕에게 좀더 수지맞는 해결책이었다. 게다가 일단 왕실이 상파뉴와 브리를 흡수한 후에는 프랑스 정부가 이탈리아 상인들이 정기시에 접근하는 것은 제안했다. 이것이 이탈리아 상인들에게 브뤼주로 가는 새로운 길을 개척하려는 동기를 강화했던 것으로 보인다.
비록 1297년까지 브뤼주와의 정기적인 해상 연결이 이루어지지는 못했으나(Braudel), 이미 1277년에 이탈이아 상인들은 신항로 개척에 성공한 상태였다(Braudel). 이 일이 가능했던 것은 제노바가 좀더 크고, 좀더 항해에 적합한 선박을 건조한 덕분이었다.(Byrne) (중략) 베네치아 인들은 알프스를 넘어 독일에 이르는 더 나은 육로를 개발했는데, 이것이 프랑스의 중요성을 감소시키는 데에 기여했다(Braudel)
[정기시 쇠퇴의] 결정적 요인이... 생산 중심지에 가까운 플랑드르에 이탈리아 인드이 정착했기 때문" 인 것으로
트루아는 교역 중심지로서의 기능을 상실했으나, 또다른 도시화의 기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비록 규모는 작지만 14세기 후반까지 상업적, 공업적 기능을 계속 유지했다. 프로뱅 역시 도시를 지탱할 다른 수단을 가지고 있어서 사라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샤팽이 근의 저서에서 샹파뉴 정기시의 도시들에 대해서 상세히 지적했듯이, "정기시의 장소가 필연적으로 도시로 성장하지는 않았다"(Chapin). 이 주장은 바르-쉬르-오브와 라니의 경우 일단 정기시가 사라지자, 그대로 쇠퇴한 것에 의해서 충분히 입증되었다.
브뤼즈의 경우 성공은 자연적인 재해가 이 도시를 압도하기 전까지-침적토가 이 도시의 바다로의 접근을 차단하여 문자 그대로 역류에 좌초된 채로 남겨지기 전까지-단지 짧은 기간 동안에 불과했지만 말이다.
(투루아의) 시민들(부르주아)은 면제 또는 구매를 통해서 영주의 인두세(타이유 세)로부터 자유롭게 되었고, 백자의 허가없이 그 지역 밖에 있는 자신과 유사한 자유민과 혼인할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들은 계속해서 과세 대상이었으며, 여전히 많은 주요 기능들을 독점하고 있는 백작에게 특별세와 인허가료를 지불해야만 했다. 지주 귀족은 정기시로부터 수입을 거두어들였고 부동산 투자와 귀족적이지 않은 일에 깊이 관여했다.
플랑드르의 저지대 지역(오늘날의 벨기에 서부)에는 바이킹의 침입이 마침내 누그러진 후, 그전에 해안 지역을 떠나갔던 인구가 다시 찾아들었고, 상인들에게 다시 좀더 안전한 육상과 해상의 노선이 가능해지면서도시 발전의 융성기가 도래했다.
주변 지역에서 소박하게 시작된 공업화가 확대되면서 도시화의 진전을 선도했고, 이것이 직접적으로 도시의 상업적 기능의 성장을 이끌었다.
13세기 플랑드르의 두 주요 도시는 이 과정에 대한 아주 좋은 사례를 제공한다. 둘 가운데 큰 도시는 헨트(Ghent. 프랑스 어로 강(Gand])로 파리와 더불어 북유럽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도시 중 하나였다. 비록 헨트가 곡물을 다른 선박으로 옮겨 싣고 정기시를 개최하는 역할도 했으나, 이 도시의 경제는 처음부터 품질이 좋은 직물의 생산에 기반했다. 그로 인해서 헨트의 발전은 직물의 수요 증대와 밀접하게 연관되었고, 그 생산이 절정에 달했던 13세기와 14세기 초에는 도시 노동인구의 3분의 1에서 2분의 1까지 이 분야에 고용되어 있었다.
제2의 도시는 브뤼즈였는데, 이 도시는 헨트보다 규모(주민 4만 명)는 작았지만 점차 국제간 상업과 금융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맡았다.
13세기 후반에 브뤼주에 직항로를 개발하자, 브뤼주에서는 점차로 상어과 금융의 기능이 도시 발전의 추진력이 될 정도로 확대되어갔다. 하지만 그 번창하던 항구들이 침적토에 의해서 가로막히게 됨으로써 그 기능들도 쇠퇴하게 되었고, 결국 무대는 안트베르펜(플랑드르 어로 아트베르펜[Antwerpen]. 프랑스 어로 앙베르[Anvers], 영어로는 애트워프[Antwerp])으로 이전되었다.
13세기에 일면, 이프로 그리고 아마도 헨트에서도, (무력해진 귀족들과 부유한 상인/생산업자들의 연합으로 구성되었던) "상픙계급"은 도시의 교외 지역에 살고 있던 프롤레타리아트화한 직물 노동자들을 "말썽을 일으킨다"는 명목으로 의도적으로 "성벽 바깥 지역으로 추방했다."
벨기에의 정기시는 금융거래의 중심지였다. 플랑드르의 시장은 의무적으로 문서를 통해서 중요한 상거래를 수행하도록 했다. 이와 같은 소위 정기시 어음은 상거래 관행에서 최초의 이탈리아화 물결과 그에 뒤이은 환어음들이 융성한 결과로서 14세기에[서야] 쇠퇴했다. (van Houtte)
플랑드르의 상인/생산업자들이 12세기 초에 상파뉴 정기시를 방문하기 시작했다. 같은 세기 중엽에 이프르나 헨트보다는 아라스나 두에 출신의 상인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지만, 플랑드르의 다수의 직물 생산 도시 출신의 상인들이 트루아와 프로뱅에 "상관들"을 설치하기 시작했다.
상파뉴와 브리 백작령을 병합한 프랑스의 국왕과 플랑드르 백작 사이의 갈등으로 인해서 13세기 말에는 상파뉴 정기시에서 이탈리아 인들에게 플랑드르 직물을 판매하는 것이 방해를 받았다. 이는 이탈리아 상인들에게 브뤼주까지 직항로를 연장할 동기를 강하게 부여했는데, 그들은 최신 발명품인 대형 갤리 선을 통해서 직항로를 우행할 수 있었다.
1280년에 사실상 플랑드르의 모든 직물업 도시들(헨트와 브뤼주를 포함하여)에서 노동자들은 열악한 노동조건에 항의하기 위해서 거리로 뛰쳐나갔다.
양모가 점점 더 많이 원산지(잉글랜드-옮긴이)에서 사용됨으로써 수출에 돌릴수 있는 물량은 그만큼 줄어들었다.
1277년 제노바 인들은 최초로 새로운 대형 갤리 선을 타고 지브롤터해협을 통과하여 포르투갈과 프랑스 해안을 따라 올라가 북해까지 항해를 완수했고, 브뤼주와는 짧은 운하로, 헨트와는 좀더 긴 운학로 연결되어 있던 담에 정박했다.
이탈리아 인들은 브뤼주의 경제적인 역할을 수출입과 생산으로부터 진정한 집산지-즉 상품뿐만 아니라 화폐까지 담당하는-로 실질적으로 변모시켰다. 그로 인해서 브뤼주는 직물업이 쇠퇴한 후에도 유럽의 금융거래소로서 존속했다.
13세기말...유대인, 그리고 후에 롬바르디아 인과 카오르 인은 본질적으로 전당업자로서 귀족들과 부르주아를 상대로 극도로 높은 이율(연리 30-40포센트)로 돈을 빌려주었다.
플랑드르의 직물업이 쇠퇴하기 시작하자, 이탈리아 인들은 그들의 자본을 다른 좀더 유리한 투자처로 이동시켰다. 그리고 슬루이스의 수로 침적토화로 인해서 항구 이용이 불편해지면서, 이탈리아 인들은 행서지-따라서 대리인의 사무소도-를 동쪽의 안트베르페으로 옮겼다. 이곳은 흘수가 깊은 배에 적합한 항구였으며, 더불어 당시 프랑스가 아니라 독일을 관통해서 뻗어 있던 대륙 교역로의 획득에도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였다(Brulez and Craeybeckx)
1316-1317년의 기근
1348-1349년의 전염병에서 다른 장소들, 특히 이탈리아의 항구들은 플랑드르보다 훨씬 더 큰 규모의 희생을 겪었지만 다시 부흥했으며, 국제적인 교역에서 수세기 동안 활발한 역할을 좀더 계속했다.
이탈리아 회사에 의해서 축적된 금융자본은 예약 구매라는 형태로 지방의 산업에 대출되었다. 그러나 직물업이 어려움을 겪기 시작하자, 그 자본은 쉽게 다른 곳으로 빠져나갔다. 브뤼주의 상인들은 "수동적인" 대리인이 되었으므로, 점점 자발적인 결정을 내리고 결과를 통제했던 이탈리아 "다국적 회사들"을 제어하는 데에 성공하지 못했다.
제노바가 최종적으로 굴복했던 14세기 말까지
(제노바는)061년에는 샤르데냐와 코르시카의 이슬람에 대항하여 워정을 떠났고
1087년에 이도시(마흐디야:파티마 왕조의 구舊수도)를 단기간 점령했고, 공납을 강요했으며, ㄱ와 더불어 이슬람 통치자로부터 최초로-최후가 아니라-교역상의 특권, 즉 관세 면제를 얻어냈다.
11세기 말에 지노바 인은 사실상 동로마 제국(비잔티움 제국)으로부터 독립을 획득했고
(베네치아는)1080년에 드디어 아드리아해 아래쪽을 통제하던 노르만 왕국의 봉쇄를 뚫고 지나가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베네치아는 비잔치움 제국의 함대를 구조함으로써 중요한 해로를 확보한는 것을 거들었다. 그에 대한 보상으로 1082년 비잔치움 제국의 황제 알렉시우스 1세로부터 제국 전역, 그리고 트깋 기독교 세계 가운데 가장 크고 가장 번영한 도시이자 중앙 아시아로 통하는 관문이었던 가장 중요한 도시 콘스탄티노플에서 말 그대로 완전한 교역 특권과 관세 면제를 보증하는 특별한 증서(금인칙서(를 수여받았다(Lane)
1187년에 살라딘은 십자군을 물리쳤으며, 이슬람 교드들은 티베리아스(이스라엘 북부 도시/역주), 야파, 아스칼론, 가자 그리고 최종적으로 예루살렘을 재정복했다.
라틴 인(즉 이탈리아 인)의 무차별적인 대량학살이 발생했던 1182년에 분노가 폭발
13세기는 문화, 정치, 산업(특히 조선업과 수송 분야), 상거래에서 베네치아의 전성기였다. 그러나 제노바도 그에 못지않았았으며, 제노바가 패권을 쥐고 있던 북아프리카와 북서 유럽 지역-이 지역에서는 뤼벡보다 상파뉴에서 교역이 훨씬 더 활발했다-에서는 여전히 그에게 위협이 될 만한 경쟁자가 없었다.... 제노바는 13세기가 끝날 무렵에 서쪽으로 이동하여 대서양과 브뤼주로 진출함으로써 그 지배력을 더욱 공고히 했다.
제노바와 베니치아는 모두 사회간접자본에 대한 투자와 공해상이나 본토의 방어를 위해서 과세 대신에 "공채"제도를 활용했다. 심지어 1200년 이전에도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은 공채제도를 발전시켰고, 그 제도에 의해서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코뮌에게 돈을 빌려주었다.
13세기 동안에 베네치아와 피렌체에서는 강제적인 공채제도가 유행했는데,
13세기가 도래하지 이전에 베네치아에서는 콤멘다(commenda) 또는 콜레간차(colleganza)라고 불리던 하나의 변형이 발전해왔다.
1380년에 베네치아의 키오지아 섬에 최후의 일격을 가할 준비를 하던 제노바 인들이 결정적으로 패배함으로써 끝이 났다. 토리노 강화조약(1381)은 지중해 그리고 특히 오리에트 교역에 대한 베네치아의 독 점적 지배라는 유산을 남겼다.
이집트에서는 맘루크 술탄이 10년간의 공위 기간(1250-1260)을 거친 후
아프리카를 돌아 인도 제국에 도달하려는 제노바 최초의 진정한 시도가 1291년에 있었다는 사실은 상당한 의미가 있었다(비발디 형제의 선박이 일주에 성공했더라면, 제노바 인들은 두 세기 후 포르투갈인들이 성취하게 된 세계체제에서의 역할을 담당했을지도 모른다). 제노바가 북해 연안의 국가들, 즉 잉글랜드 및 플랑드르와 상업적인 해상 연결망을 확립했던 것 또한 13세기였다. 그 당시까지 이슬람 교도들이 지브롤터 해협의 통행을 얼마간 통제했을지라도, 제한된 수의 제노바 선박은 언제나 그곳을 통과했다. 그러다가 1293년에 카스티야-제노바 연합 함대에 의해서 이슬람 해군이 결정적으로 패배하자, 브뤼주와의 직접적인 교역은 정기적인 형태로 자리잡을 수 있었다.
베네치아가 다시 확장공사하기 시작한것은 1473년이었다.
제노바가 다시 확장공사하기 시작한것은 1461년이었다.
(제노바의)해군이 베네치아에게 결정적으로 패배한 사건-최초로 1378년과 1384년 사이에
이 도시들의 최초의 반응은 이런 더 작아진 시장에서 더 커다란 몫을 확보하기 위해서 서로 경쟁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제노바와 베네치아 사이의 사투가 확대되었고, 그와 더불어 "보호세"라고 불리는 비용도 증가했다(McNeill). 선박의 수용량 가운데 점점 더 많은 부분을 무기와 병사들에게 할해해야만 했고, 이는 수송비를 상승시켰다. 마찬가지로 선박과 화물은 파괴와 포획의 위험이 더욱 높아져갔으며, 이 또한 상품을 항구에서 찾는 최종적인 비용을 부풀렸다. 베네치아가 지중해 노선에 대한 실질적인 독저을 확립하고 나서야 비로소 교역이 더 안전해졌다.
동쪽으로 가는 중앙 노선이 쇠퇴함으로써 페르시아 만과 홍해 두 노선 사이의 오래된 경쟁에 파가름이 났다. 홍해가 그 후 수세기 동안 지배적인 위치에 서게 된 것이다.
바이바르스는 시리아를 재정복하기 위해서 사실 금장칸국의 제3대 칸이자 이슬람으로 개종한 최초의 몽골 군주였던 베르케와 동맹을 맺었다.
이집트를 다스린 노예 엘리트에게 지속적으로 새로운 병사들을 보급했던 것은 이탈리아 해상 국가들이었다. 봉건적 지위도 정치적 지위도 상속될 수 없고 계속 새로 재창조해야 했던 이 독특한 제도에, 이탈리아 인들은 그 체제의 강력함을 유지하는 데에 절대로 필요했던 인력을 공급했던 것이다. 그것의 대가가 바로 이집트에서 계속 교역을 할 수 있는 권리였다. 공교롭게도 이탈리아의 교역 국가들은 그들과 동방 사이의 직접적인 접촉을 봉쇄했고 운송되는 화물에서 매우 높은 비용을 거두었던 바로 그 국가(이집트)를 워조했던 것이다.
제노바 상인이 육로로 키아이에 갔다는 증거는 1344년이 마지막이었고,
맥닐(McNeill)은 흑사병이 몽골리아까지 직접 전파된 것이 아니라, 중국 내지에서 1331년에 시작했으며 거기서부터 육로로 그리고 나서 바다로 퍼져났다고 생각한다.
플랑드르의 직물 공업이 1320년대 말이면 고전하고 있었고, 이탈리아의 금융업계에서 경제의 수축(큰 파산 사건들을 포함하여)이 1330년대 말과 1340년대 초에 이미 시작되었다... 몽골 제국 내의 유럽 상인들과 선교사들에 대한 부분에서도 그들에 대한 언급이 1330년대 말이면 줄어들기 시작하고, 14세기 중엽에는 거의 없었졋다는 것을 지적한 바 있다.
일칸국이 1295년 이슬람으로 개종하자,..."이교들들"과의 교역을 금하는 교황의 명령하에 놓이게 되었다....많은 유럽 상인들은 좀더 북쪽(소아르메니아:아나톨리아 남단의 킬리키아/역주)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이로써 북방의 육상로가 좀더 매력을 가지게 되었다.
(13세기 말기) 이탈리아 인들은 이집트에서 향신료 교역을 독점했던 강력한 카리미 이슬람 상인들과 거래를 하는 수 밖에는 아무런 대안이 없었다.
(바그다드는)13세기 후반에 훌라구가 이라크를 정복하면서 완전히 쇠퇴했다. 몽골 인들은 경제에 큰 타격을 주었을 뿐 아니라,경쟁 도시 타비르지에 자신들의 수도를 세워 유럽 교역업자들을 바그다드와 그것의 출구인 바스라로 가지 않고 몽골의 페르시아 만의 출구 호르무주로 모여들게 만들었다.
몽골 인들의 정복 이후 50년 동안 시리아와 이집트를 상대로 하는 바그다드의 정규적인 교역이 두절되었고, 그것은 14세기 초에 가서야 제개되었다고 한다. 더욱더 심각한 것은 인도와의 교역이 교란되었다는 점이었다(Ashtor)
라시드 웃딘(Ashtor에서 재인용)은 이라크 토지의 10분의 1만이 경작되고 있었다고 불평했고, 바이스먼은 그 지방의 세수입이 1258년에서 1335년 사이 90퍼센트가 감소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물자 부족 때문에 항상 인플레이션이 일어났고 화폐의 평가절하가 발생했다. 부의 감소와 착취적인 세금징수 체제라는 악조건이 겹쳐, 남아 있던 소수의 주민에게 더욱 무거운 세금이 부과되었다.
5-6세기 사산 왕조 권력의 전성기에 존재했던 동방과의 모든 교역은 페르시아 인들에 의해서 지배되었고 "그들의" 만을 통과했다. 항해가 더 어려웠던 홍해를 통한 활동은 로마 세력의 축소와 함께 쇠퇴했다(Toussaint). 그러나 이것은 이슬람 패권의 초기에 달라졌다.
이슬람이 양쪽 방향으로 진출하는 전원지였던 아라비아 반도는 서쪽으로는 홍해, 그리고 동쪽으로는 페르시아 만과 접해 있다. 제국의 중심이 아라비아 반도에 머무르는 한 두 개의 수로는 동등하게 기능했다.
홍해가 주류의 보조적인 지류가 되어감에 따라서 페르시아 만에 교역료가 점점 더 집중되었다.
그들(페르시아인)의 선박에 대한 기록은 중국 문서에서 일찍이 671년부터 등장하여, 717, 720, 727, 748년에 다시 나오는데, 페르시아 인들이 인도인과 말레이시아 인들과 함께 광저우에 있는 선박들의 주인으로 파악되었다(Hourani)
페르시아 만의 쇠퇴와 함게 이집트는 인도와 중국으로 가는 해상로에 대한 사실상의 배타적인 통제권을 얻었고, 이러한 독점은 북방의 육로가 14세기 후반에 붕괴되면서 확립되었다.
맘루크의 독특한 군사적 봉건체제는 토착적인 시리아나 이집트의 이슬람 교도들로부터 충원이 불가능했다. 오직 비이슬람 교도, 특히 유일신교가 아닌 다신교도만이 군대와 행정을 위해서 노예화 될 수 있었다. 일단 이슬람의 개종하고 그의 주인에 대한 봉사에 의해서 지위가 올라가면 맘루크(노예를 의미함/역주)는 해방될 수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토착 문민과는 거리를 유지해야 했다. 맘루크와 체르케스 여인의 후손은 맘루크 군에 입대할 수 있었으나(특히 그들이 재위중인 술탄의 자식들인 경우), 맘루크 아버지와 토착 여인 사이에서 태어난 아울라드 알-나스(awlad al-nas, 직역하면 사람들의 자식들)는 비록 실제 상황은 다양했던 것으로 보여도 워칙적으로 맘루크 통치 엘리트에서 배제되었다.(Haarmon). 이 "특이한" 체제는 노예 무역을 이집트의 통치자들에게 전략적 중요성의 차원에까지 올려놓았고 제노바와의 이상한 공생관계를 만들었다.
13세기 초 아유비드 술탄국은 메소포타미아와 소아시아를 지나는 전통적인 노선을 통해서 제공되는 "중앙 아시아와 코카서스에서 꾸준히 흘러들어오는 노예들"로 새로운 군단을 만들었다(Ehrenkreutz)
맘루크들은 일칸국의 봉쇄를 우회할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제노바가 결국 그 길을 제공했는데, 베네치아가 주도한 콘스탄티노플으 라틴 제국의 붕괴에 의해서 제노바가 콘스탄티노플과 흑해 지역을 잇는 교역권을 회복한 1261년 이후의 일이었다.(Ehrenkreutz). 일단 주도권을 쥔 제노바는 훌라구의 적이었던 베르케 치아의 금장칸국의 도움으로 크리미아(노예의 공급원)로부터 보스포러스와 지중해를 거쳐 이집트로 이어지는 래상 노선의 연결을 확립했다. 이 노선에서 운반된 제일 중요한 "상품"은 남자 노예들이었다.
제노바는 매우 기꺼이 이 교역에 협조했다. 왜냐하면 "노예를 이집트에 운반하는 것은...레반트에서 유럽 인들의 상업적 패권을 [증진시키기] 위해서...유럽 상인들이 쓸 수 있는 결정적인 지렛대였다.,,,제노바는...맘루크 군대에 체르케스 노예를 제공하는 가장 중요한 공급자가 되었다"(Ehrenkreutz). 그들의 협상력이 약해진 것은 14세기에 들어서면서였고, 그것은 그들이 농제할 수 없었던 정치적 변화에 기인했다.
페르시아에서 몽골 정권이 급속히 쇠퇴하자...메소포타미아와 시리아 사이에 전통적인 육로 대상 행렬이 재개됨으로써 국지적인 중동 상인들에 의해서 이익이 큰 노예 무역이 부활되었다(Ehrenkreutz).
그리하여 13세기 말이 되면, 제노바 인들은 더 이상 맘루크 인들에게 필요불가결한 존재가 아니었다. 베네치아 인들은 맘루크 이들에게 노예를 제공할 수 없었고...남방의 해상 노선에 명운을 걸어왔으므로 동방의 향신료와 비단, 그리고 이집트-시리아의 면과 마직물에 대한 유럽 인들의 수요를 미끼로 사용할 수 있었다. 베네치아 인들은 파티마 왕조와 아유비드 왕조 시대에 이집트 시장을 다른 이탈리아 교역도시들(제노바, 피사, 아말피)과 공유했는데, 맘루크 시대에는 점점 더 입지를 강화하여 점차로 동방교역에서 경쟁자들을 제거해나갔다. 이집트가 외국 상인들과의 관계를 규제하는 데에 더욱 저극적이었던 맘루크의 직접 지배하에 들어갔을때, 베네치아 인들은 국가의 통제에 의해서 가능하게 된 특혜 기회를 재빠르게 이용했다.
13-14세기에는 베네치앙 인과 맘루크 국가가 모두 교역상의 독점을 확립하려고 노력했다. 이러한 독점들은 양자에게 모두 중요한 결과를 가져왔다. 베네치아 인들은 경쟁자인 이탈리아 도시들의 상인들을 배제하거나 적어도 열드한 지위에 둘 수 있었다. 맘루크 이집트에서 국가는 외국인들과의 교역을 규제했고, 궁극적으로는 특별히 이윤이 많이 남는 상품들의 시장을 독점함으로써 자유로이 사업하는 카리미(도매) 상인들을 복속시킬수 있었다.
베네치아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인구 감소가 있었지만 회복한 반면,제노바는 인명 피해가 적었음에도 불구하고 회복하지 못했다.
1346년에 베네치아는 알렉산드리아까지 정기적인 갤리 선을 운행하고 있었고(Ashtor)
사산 왕조 페르시아 인들은 이슬람이 들어오기 이전부터 "은행", "수표" 그리고 환어음을 사요하고 있었다.(Toussaint). 콤멘다 계약은 이슬람 이전으로 거슬러올라가지는 않는다고 해도 분명히 이 시기에는 이미 대상 교역의 전통적 관행이었다(Lopez).
우도비치(Udovitch)는 비록 동업제도는 바빌로니아 시대부터 나타났지만 콤멘다는 "아랍ㅂ 인들이 독창적으로 만든 것"이라고 했다. 동업제도와 콤멘다 합의는 모두 8-9세기에 주로 이라크에서 나오는 문건들에서 환저히 체계화되어 있었는데(Udovitch), 이들은 모두 중세 이슬람 세계에서 통상적으로 이용되고 있었다.
설탕 농사는 이집트와 시리아 전체에서 이루어졌지만, 상이집트가 그 지역 내에서 제인 가는 생산지였다(Ashtor)
13-14세기에는 이집트의 설탕 생산 기술이앞선 것으로 간주되었던 데 반해, 국가의 독점과 서투른 경영은 결국 기술적 발전을 가로막았다. 15세기가 되면 유럽의 설탕 정제 기술은 개선되고 있었음에 비해, "이집트와 시리아의 설탕 산업은 옛날의 방식-소의 힘이나 물레방아를 이용하는-을고수하고 있었다(As
htor). 쇠퇴는 이미 14세기 초에 시작되었던 것 같다. 마크리지는 그시기에 푸스타트의 설탕 공장들의 폐허를 기록했는데(Ashtor), 이는 15세기 초 맘루크 왕국의 경제위기가 시작되기 이전의 일이었다.
14세기 후반에 이집트와 레반트 모두의 직물업은 큰 변화를 겪은 것 같다. 이집트에서는 유럽의 상품에 의해서 경쟁이 심화된 결고로 생산 자체로 줄어들었고, 시리아에서는 면화 수확물이 원료 상태로 이탈리아(주로 베네치아) 상인들에 의해서 구매되었다.
맘루크 국가의 원료들-특히 아마, 면화, 사탕수수 줄기-은 더 이상 국내 소비 혹은 수출을 위해서 모두 마직물과 면직물과 사탕으로 가공된 것이 아니라, 유럽의 공장에서 처리되기 위해서 이탈리아 상인들이 점점 더 많은 양을 구매했다.
맘루크 국가는 (1382년 바흐리 맘루크를 대체한) 체르케스 혹은 부르지 맘루크 시대에 억압의 정도가 한층 더 강화되었다. 이 늦은 시기에 지배 엘리트는 이집트와 시리아 농촌의 잉여 착취 비율을 높였고, 작물을 낮은 가격에 팔았으며 국가 독점 품목을 높은 가격에서 사도록 강제하고 있었음이 분명하가. 더욱이 경제적 불안의 다른 조짐들도 있었다. 당시 머물러 있던 상인들로부터 강제로 대출금 짜내기, 정부에 의한 주기적인 환율 낮추기, 화폐의 금속 함량 낮추기, 그리고 전반적인 생산성의 하락이 그런 조짐들이었다.
이러한 경제적 쇠퇴의 징후들을 한꺼번에 촉발시킨 공통의 원인을 1347-1350년의 흑사병에서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포르투갈 인들이 16세기 초에 생명 유지 장치를 떼어 내자 맘루크 산업이 얼마나 빨리 붕괴했는가 하는 점이다. 1506년에는 카이로 시장을 거쳐서 오는 향신료가 없어졌다. 10년 내에 맘루크는 오스만투르크 인들에게 패했고
돌스(Dols)는 이 전염병으로 카이로에서만 약 20만 명이 죽었다고 했다. 흑사병이 돌기 직전의 이 도시의 전체 인구에 대한 나의 추산은 약 50만 정도였는데(Abu-Lughod), 이것은 몇 년 사이에 카이로 인구의 약 40퍼센트가 소멸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계산은 이집트와 시리아의 전체 인구 가운데 3분의 1에서 3분의 2 사이가 이 전염병으로 죽었다는 마크리지의 견해와 모순되지 않는다.
전염병이 시작되기 직전인 1345년에 카이로에는 아마도 이집트 전체 인구약 800만명의 6퍼센트 정도가 있었을 것이다. 3분의 1이 감소했다는 것은 이 나라의 인구를 약 500만 정도로 만들었고, 비록 처음만큼 대단한 위력을 떨치지는 않았지만, 그 후 50년간 간헐적으로 흑사병이 재발하면서 인구는 점차로 더욱 감소했다. 오스만 치아의 여러 세기 동안 인구가 더욱 감소했음이 인정되고 있다. 나폴레옹이 1798년 이집트를 침략했을 때 프랑스 인들이 추산한 이집트 인구는 겨우 300만 명에 불과했다. 이러한 인구 감소는 무엇을 의미한가?
유럽에서 흑사병은 인구분포의 대대적인 변동을 가져왔는데, 농민과 농도들은 자신들의 땅을 떠나게 되었고, 도시민들은 거주 지역의 최악의 상황을 피해서 탈출하게 되었다. 이집트에서 주민은 이동할 자유가 적었다. 사막에 의해서 제한되고, 맘루크 아미르의 봉토의 일부로 땅에 결박 되어 있었다. "농노들"은 도망칠 만한 숲이 없었고, 도시민들은 개간하고 경작할 만한 비어 있는 땅이 없었다. 따라서 흑사병이 이후 유럽에서 경험 되었던 의외의 긍정적인 결과들은 이집트에서는 그에 결줄 만큼 나타나지 않았다.
픅사병 이후 이집트의 경제적 기반은 원거리 교역에 더욱더 의존적이 되었다. 유럽이 14세기 후반의 불황에서 회복하자 유럽의 동방 상품에 대한 수요는 급격히 증가했다. 유럽은 그 상품들을 공급받기 위해서 이집트와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만 했다. 이집트는 그 상품들을 공급하기 위해서 이제 맞미가 남은 힘을 다해서 극동과 연결하는 독점적인 통로를 지켜야만 했다.
십자군 원정의 시작 당시부터 유럽 인들은 홍해에 도달하려고 노력했으며, 이집트 인들은 매번 그들을 막아내는 데에 성공했다.
아덴을 통과해서 인도로 가는 길은 페르시아 만에서 나가는 길보다 훨씬 더 항해하기 어려웠다. 육지가 보이지 않는 외해를 건너가려면 몬순 바람을 잘 이용해야 했고, 조심스러운 항해 기술이 필요했다.
"1502년 다 가마의 두 번째 원정 이후, 포르투갈 인들은 이슬람의 해운에 대해서 홍해를 봉쇄하겠다는 중요한 정책을 결정했다"(Serjeant). 그후 곧 포르투갈 인들은 페르시아 만의 항구들을 공격했다. 구자라트의 무슬림 술탄, 예멘의 통치자, 캘리컷의 힌두 지배자들은 모두 맘루크에게 포르투갈에 대항해서 그들을 지켜달라고 호소했으나, 이미 이집트 선단은 아라비아 해에서 호되게 패배한 뒤였다. 이 행동으로 인해서 이집트가 애오라지 의존해왔던 인도 교역이 중단되면서 이집트의 경제는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1516년 오스만 투르크의 이집트 정복은 이집트의 패배를 완결지었다.
인도양은 1월에는 북동에서 남서쪽으로 바람이 분다.반면 7월에는 남서에서 북동쪽으로 분다.
아라비아 해안(예멘, 지다)으로부터의 출발 시점을 논하면서, 인도의 말라바르(인도 남단의 서쪽부분)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그 여해이 3월 말 혹은 4월 초까지 시작되어야 하며, 어떤 경우에도 5월 초가 넘으면 안 된다고 했다(만약 목적지가 그냥 구자라트까지라면 출발 시한을 조금 늧출 수 있고, 목적지가 단지 호르무즈나 페르시아 만이라면 한 달 정도 는출 수 있다).(Tibbetts)
인도에서 아라비아 바도로 돌아오는 항해는 한겨울의 일정 기간을 제외한 늦은 가을과 이른 봄 사이에 이루어져야 했다. 이븐 마지드는 구자라트에서 10월 18일부터 항해할 수 있지만 돌아오는 항해는 ㅏㄴ일 말라바르(인도 남단의 서쪽부분)에서 출발한다면 약간 미루어져야 한다고 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때도 계속되고 있을 비가 화물을 적시게 된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 2월 10일 이후에는 여행을 피해야 하며, 비록 느리기는 하지만, 구자라틍까지 해안선을 따라가는 것은 가능하다고 한다. 그러나 이븐 마지드는 다음과 같은 불길한 말을 적어놓았다.(Tibbetts).
인도를 100일째 되는 날(3월 2일)에 떠나느 사람은 건전한 사람이고, 110일째(3월 12일)떠나는 사람도 무사할 것이다. 그러나 120일째 되는 날(3월 22일) 떠나는 사람은 가능성의 한계를 너무 늘려잡은 것이며, 130째(4월 1/2일)에 떠나는 사람은 경험이 없고 무식하여 도박하는 셈이다.
이븐 마지드의 설명 가운데 두 번째 부분은 벵골 만(즉, 인도와 말라카 해협 사이의 두 번째 혹은 중앙 순회로)에서의 여행에 대한 것이다. 그에 의하면 1월에만 인도 아대륙의 끝을 돌아가기에 적절한 날씨이다. 그러나 일단 동남 해안에 도달하면 벵골 만을 건너 말라카 해협까지 항해 가능한 기간(2월 20일에서 4월 말일까지)이 있다. 그러나 한 행해철 아에 왕복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인도에서 동으로 말라카 해협 지역에 가는 배들은 말라카 해협에서 인도로 향하는 배들과 거의 같은 시기에 혹은 그보다 약간 늦게 도착하는데, 그것은 그 해협에서의 정박이 1년씩이나 걸릴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사)로마 제국의 "붕괴"는 아랍 상인들에게 심각한 영향을 미쳐 5-6세기에 그들의 교역은 급격히 쇠퇴했다(Spencer). 남아비비아는 일종의 경제 침체기에 돌입했으며,
스펜서(Spencer)는 타이의 빌헬름 G.졸하임 2세(Wilhelm G. Solheim 2 )의 고고학 발굴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 발굴은 "동남 아시아 인들이 아시아 최초로 석기를 갈아서 다드었고, 벼를 재배했고, 도자기를 만들었고, 청동을 주조한 사람들"이었음을 시사했다. 물론 1960년대의 발굴 성과는 극적인 것이었다. 졸하임은 타이에서 기우너전 1만 년까지 거슬러올라가는 식물 재배의 증거를 찾았으며 탄소 연대 측정에 따르면 기워전 3500년경으로 추정되는 쌀의 흔적도 찾아냈다. 이것은 인도나 중국에서 증명된 쌀의 존재보다 1000년을 앞서는 것이다. 졸하임에 의하면 타이의 야금술은 기워전 4000년경에 시작되었으며, 품질 좋은 청동은 인도에서 발겨된 것보다 500년 앞섰고 중국보다는 1000년 앞선 기원전 제3천년기에 생산되었다. 또한 장거리 항해를 위한 현외부재(안정성을 위해서 배 옆 양쪽에 멀리 붙인 물에 뜨는 재료/역주)가 기워전 4000년경에 고안되었으며, 이것은 대규모로 인구를 바다를 통해서 내보냈을 것같다. "기원전 제3천년기 동안 일련의 이주가 있었는데, 선박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인도네시아와 필리핀의 섬들로 갔고, 서쪽으로도 항해하여 약 2000년 전에는 마다가스카르 섬(아프리카 대륙의 동부해안의 옆에 있는 아주 큰 섬)에도 도달했다"(Spencer)
졸하임이 제안했듯이 동남 아시아의 항해가들이 인도양과 남중국해에서 기원전 제1천년기에 항해와 교역에 종사했다면, 기존의 통념과는 정반대로 인도와 중국의 문명들이 이러한 문명의 담지자들에 의해서 크게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Spencer)
리처드(Richards)는 권력의 분산과, 그에 따른 빈곤화 때문에 "8세기에서 12세기까지의 북인도는 그 이전 시대와 동일한 정도로 귀금속을 끌어드리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이는 아마도 9세기와 10세기에 바그다드가 인도와 중국으로부터 사치품만을 수입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11-12세기에는 수요가 다양화 되었고 바그다드와 카이로 상인들이 다량의 후추와 기타 향신료 및 직물을 사서 그중 일부는 유럽으로 가져갔다(Richards).
"새로 널리 유통되는 통화들, 새로운 국가 조세 구조, 증가하는 인구와 시장들은 모두 귀금속 유입을 더욱 촉진했다....13-15세기 중세 세계경제의 관계들 속에서 새로워진 인도의 역할 때문에 이도에의 귀금속 유입이 증가했다"(Richards).
그러나 동시에 그 반대의 힘도 작용했다. 13세기 중반까지 몽골의 페르시아와 이라크 정복이 종전에 구자라트의 항구를 지나던 교역의 일부를 다른 방향으로 비껴가게 했는데, 그로 인해서 지중해 교통의 일부가 홍해와 퀼론이나 이후에 캘리컷 같은 남쪽의 (말리바르) 항 구들로 옮겨갔다.
그러나 구자라트가 델리의 이슬람 술탄 국가에 흡수되어 델리 엘리트의 과시적인 소비에 의해서 요구되는 사치품들의 주요 수입처가 됨으로써 구자라트는 다시 활기를 되찾았다(Chaudhuri). 외국 상인들의 교역을 주도했다. 14세기 초, 이븐 바투타(Husain)는 구자라트의 주요 항구인 캄베이를 "집들과 모스트들의 예술적 건축에 관한 한 가장 아름다운 도시 중의 하나"라고 했다. 이런 건물들은 "대다수가 외국 상인들인 주민들"에 의해서 건설되었다.
페르시아 만의 호르무즈가 1507년 포르투갈에 의해서 점령되었을 때, "정복자들은 [인도] 술탈 국가의 국가력을 약화 시키기 위해서 구자라트에 대한 말 수출을 중단시켰다."(Gopal). 왜냐하면 말들은 중세의 전쟁에서 "탱크"였기 때문이다. 맘루크 이집트와 구자라트 사이의 긴밀한 유대관계는 1509년 포르투갈 인들이 마지막으로 디우에서 패배시킨 선단이 그들의 연합 선단이었다는 점에 의해서도 재확인 된다.
비록 좀더 나중에 출현했다고는 해도 말라바르 연안의 상인들은 구자라트 상인들만큼 부우하고 강력하고 명민했던 ("낮선") 사람들이었다. 적어도 9세기부터 남쪽 끝의 퀼론은 아랍 배들의 중요한 기항지였고, 송나라가 해상 진출을 중시하던 기간에는 중국 정크 선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13세기 중엽에 두드러지게 된 약간 북쪽에 위치한 경쟁 도시 캘리컷에 가려서 왜소해졌다고 할지라도, 이븐 바투타가 근방에서 난파했던 1330년대에는 여전히 기능하고 있었다.
캘리컷도 13세기 중엽 아시아 교역의 거대한 변동에 의해서 부상했다. 이시기 이전에는 페르시아 만의 항구들이 아라비아 해 교역에서 주도권을 유지했다. 선박들은 대개 붓소라(바스라/역주)와 호르무즈에서 퀼론과 콜롬보로 항해졌다. 퀼론은...중국에서 오는 많은 정크 선들의 중심지가 되었다. 중국의 정크 선들과 아라비아의 다우 선들이 남중국과 페르시아 해안 사이를 고집스럽게 왕복함에 따라서 해상교역의 장거리 동맥들이 아시아 대륙 전체에 뻗어나갔다. 이런 구조는 서쪽 끝에서 압바스 칼리프 왕조의 붕괴로 끝이 났다. 1258년 2월 바그다드는 몽골 인들에 의해서 함락되었고...이 정치적 붕괴는 상업적 쇠퇴를 초래했다. 페르시아 만 지역은 아라비아 해 교역에서의 중요한 역할을 상실했다. 원기왕성한 맘루크 술탄들의 이집트기 주도권을 잡았고, 카이로의 카리미 상인이라고 아려진 아랍상인들은 복구된 아덴에서 새로 건설된 캘리컷으로 항해하기 시작했다...말라바르에서는 교역에서 전환이 발생하기 전에 심각한 정치적 변동이 있었다. 이 연안은...분열되었으며 활력이 넘치는 젊은 가족이 아주 작은 영토를 소유하게 되었다....(Das Gupta)
홍해와 말라카 해협 사이를 운항하는 배들은 간혹 스리랑카(실론, 아랍지리학자들은 사란딥이라 불렀음)에 정박했지만, 대부분은 구자라트 인과 유대 인 상인들이 번영하는 교역에 함께 참여하고 있던 캘리컷의 상업복합기지에 정박했다
캘리컷의 번영은 퀼론의 쇠퇴를 의미했으며 남중국에서 온 경쟁자들에 대한 카이로 상이들의 승리를 의미했다. 아랍 인들은 캘리컷을 자신들의 그거지로 삼았고, 사무드리의 영토 팽창을 도왔으며, 자신들의 상업적 야심에 대한 그의 지지를 이끌어냈다. 중국인들은 아라비아 해에서 그들이 오랫동안 확립했던 교역이 아랍-인도의 결합에 직면해서 쇠퇴하는 것을 바라보았다. "15세기에 중국의 몇몇 정크 선은 여전히 이도에 왔지만 대부분은 말라카에서 멈췄다. 인도인들이 소유한 선박들은 말라카와 이도 해안 사이의 부분을 담당했다. 아랍 인 소유의 선박들은 아라비아 해를 지배했다...비록 아랍 다우 선들은 여전히 아덴에서 말라카까지 가기도 했지만, [그와 함께] 아시아 교역의 원거리 네트워크는 이용되지 않았다." [W. H. Moreland. Das Gupta에 의해서 재인용]
송대 말기와 원대에는 중국인들이 외국 선박에게 더 많은 항구를 열었을 뿐 아니라 중국의 정크 선들도 아랍 선박들을 만나기 위해서 인도의 항구에 적극적으로 진출했다.
인도양에서 중국의 철수는 1430년대 중반에 영구적이며 극적으로 완료되었다. 전체 영역 가운데 가장 잘 조직되고 무장된 해군이 사라짐으로써 생긴 이러한 "힘의 공백"으로 인해서 포르투갈의 침입자들에게 방해되는 것이 라고는 (비록 구자라트 인 동맹도 있었지만) 소규모의 맘루크 선단만이 남아 있었다.
그들(포르투갈인)은 욱상에서 기본적으로 자신들에게 상품들을 시장가격보다 싸게 살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는 일련의 조약들을 강요했으며, 바다에서는 아시아 선박드이 포르투갈 인들의 "허가"를 받도록 강요하는 통행체제를 폭력으로 관철했다. 따라서 포르투갈 인들은 군사력을 통해서 인도양 전체 교역항들을 급진적으로 재편했다. 비록 점진적이고 불완전하였을지라도, 이 재편은 궁극적으로 캘리컷의 기반을 잠식했다.
비록 캘리컷의 이슬람(아랍과 인도)상인 귀족들은 16세기에 여전히 번영했지만(Das Gupta), 캘리컷은쇠퇴하고 있었다. 포르투갈 인들이 자신들이 배타적으로 통제하고 있던 코친과 고아 항구로 대부분의 교역을 끌어들이자, 인도의 나머지 항구들은 포루투갈의 묵인에 좌우되는 부차적 지위로 떨어지고 말았다.
12세기에 서쪽 지역으로부터 많은 이슬람 상인들(그들 중 다수는 인도인들이었다)이 그들의 역할을 빼앗아감으로써(Stein)타밀 인들은 이미 도보적 지위를 잃고 있었다. 흥미롭게도 "향신료 [그리고] 인도 및 중동의 비단과 면이 전보다 더 대량으로 중국의 항구에 들어가게 된 것은 이 시기였다"(Richards)
라마스와미(Ramaswamy)는 (인도) 남방에서 빗질하는 활이 6세기에 이미 사용되었고, 상당히 옛날부터 쓰인 것으로 보이지만 수직 직기는 12세기부터 사용되었다고 설명했다.(Ramaswamy). 11세기부터는 재커드나 무늬 직기가 사용되었다는 증거가 있으며(Ramaswamy), 23세기부터는 블럭 인쇄 기법이 이용되었다...실 잣는 물레는 14세기에야 투르쿠로부터 도입되었으므로(Ramaswamy),13세기 남인도 여성인 여전히 방추를 쓰고 있었다.
13세기는 서유럽과 마찬가지로 남인도에서도 상당한 정도의 도시화가 이루어진 시기였다. 스타인(ste
in)에 의하면 "타밀 인들의...기원후 몇 세기 동안의ㅏ 고전시대 이래로...13세기 이후만큼 도시 지역들이 중요성을 가진 적이 없었다."
그러나 도시의 팽창은 서해안으로부터 오는 이슬람 상인들의 손으로 넘어가고 있던 원거리 교역보다는 국가 내의 권력집중에 더 관련이 있었다. 중앙의 통제를 공고히 하기 위해서 사용되었던 수단 중의 하나는 힌두 사워들이었고, 그 대부분은 13세기에 건립되었다(Stein)
코로만델(인도 남단의 동쪽부분)과 동남 아시아 사이의 교역은 점점 더 구자라트와 마라바르의 아랍 인 과 토착이이 모두 포함된 이슬람 상인들에게 넘어갔다. 이처럼 서부 해안의 교역업자들이 전통적으로 어느 정도 독립적이었던 벵골 만의 순회로로 "과도하게 확장한 것"은 그 영역의 잠재적 공백의 증가에 기여했을 것인데, 그 공백은 명나라의 철수에 의해서 고통스럽게 명백해진다.
이는 13세기 말과 14세기 초에 서부에서 (이슬람화된 구자라트 사람들을 포함해서) 이슬람 상인들이 해운업의 지배권을 말라카 해협에 이르기까지 팽창시켰고, 동쪽에서는 중국인들이 그들의 교역로를 이도에까지 뻗어옴으로써
월터스(Wolters)는『말레이시아 연대기(Malay Annals)』의 서두를 차지하는 긴 연보가 말라카 창시자(1398년경)와 팔렘방 왕가-타밀인도와 사일랜드라 자바의 왕가뿐만 아니라-를 연결시켜주는 정교한 시도이고, 스리비자야의 진정한 계승자로서 말라카를 합법화시키는 노력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여전히 중국인들 사이에도 호의적으로 수용된다. 말라카는 중국으로 진입하려는 모든 교역국으로부터 온 상인들이 마주치지만 단지 선택된 소수만이 그곳을 통과할 수 있는 새로운 "통로"가 되기를 갈망했다.
말라카의 창시자는 이슬람으로 개종한 이후에 이스칸다르 샤(알렉산드로스 대왕)를 자칭했으며, 이전에 다른 중개항들에 체제했던 해외의 상인들을 끌어들이는 데에 성공했다. 그가 마련해놓은 우리한 교역 조건, 낮은 관세, 치안 상태가 좋은 수로는 도저히 뿌리칠 수 없는 것들이었다. 특히 그의 개종은 그전까지 수마트라의 북동 연안이나 말레이 연안의 북쪽 케다-칼라에 선호하던 기항지들을 가지고 있던 이슬람 상인들을 유인했다.
그는 말라카를 제일가는 중심 시장으로 확립하는 데에는 뚜렷한 성과를 거두었지만, 중국과의 조공교역을 독점하는 데에는 그만큼 성공하지 못했다.
그(마스우디)는 9세기 말 광저우에서의 분쟁들 그리고 이어서 아랍 상인들이 항구로부터 추방된 이후, 높다란 성벽과 많은 정원을 가지고 있는 인상적인 칼라 시가 이슬람과 중국의 선박들이 만나는 중간 지점으로서 더욱 중요성을 가지게 되었다고 지적했다(특히 Shboul ; Di Meglio) 부주르그(Buzurg)의『인도의 경이로움』도 탈라 시, 그리고 이 도시가 아랍인과 상거래한 것을 언급하고 있으며, 12세기 알-이드리시의 지리지는 "간접적인" 것임이 틀림없지만, 칼라가 실론이나 니코바르 제도로부터 도달한 아랍 선박의 최종 종착지였음을 확인시켜준다.,(Ahmad)
14세기 말까지 명나라 해군은 약 3500척의 외양(外洋) 항행선이 있었는데, 그중에는 400척의 무장 곡물 수송선과 1700척 이상의 군함이 포함되었다(Lo)
이른 시기부터 가장 중요했던 품목은 중국이 시장을 독점하고 있던 생사(生絲)였다. 비단은 심지어 쇠퇴기에도 계속적으로 중동과 유럽의 고급품 시장에 공급되었지만, 중국의 독점은 이미 6세기에 붕괴되었다. 이 시기에 시리아인들은 누에고치를 중국으로부터 밀수하여 나름의 간소한 방식으로 생산하기 시작했다.
인구와 권력이 남동부 연안에 집중되었기 때문에 선박이 주요 운송 수단이 되었으며,
그렇다면 왜 중국의 자기에 대한 수요가 그렇게 많았던가? 그에 대한 대답은 수요의 문제가 아니라, 아마도 밸러스트(배에 실은 짐이 적을 때 배의 안정을 위해서 바닥에 싣는 모래나 자갈/역주)와 관계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중국의 수입품은 비교적 부피가 큰 특산품이었지만, 수출품은 고가의 부피가 작은 상품이었다. 선박들은 도자기류와 같은 밸러스트 없이는 중국으로부터 돌아갈 수 없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특히 Chaudhuri를 참조하라). 시대와 지역에 걸쳐 존재했던 "수출입 균형"은 실제로 중국 역대 왕조의 도자기가 전지구상에 분포된것에서 추적할 수 있다.
지폐는 11세기 말 북중국에서 채택되었으며, 금과 남송의 영토에서는 12세기에 일상적으로 사용되었는데, 그때까지도 여전히 경화(동화銅貨가 공존했다.
1280년에는 교역에서 지폐만이 수용되었다. 제조업에 사용하는 경우에국한하여 "어음들은 금과 은으로 바꿀 수 있었다." 따라서 귀금속은 유통될 수 없었다.(Yang)
1340년대에 외국인들은 상거래에서 금과 은을 사용할 수 없었고, 단지 "술탄의 인장이 찍혀 있는 손바닥만한 크기의 종잇조각들만을 사용했다....만일 누군가가 무언가를 사기 위해서 은 한 디르함(dirham)이나 한 데나르(dinar)를 가지고 시장에 간다면, 아무도 그것을 받지 않을 것이다"라고 기술했다.(Ibn Ba
ttuta).
15세기 중엽 명나라는 중대한 경제위기에 직면했다(Lo). 세입은 줄어들었으며, 통화는 불안정했다. 강력한 선단을 유지할 자금이 없었다. 해적(주로 일본인)은 중국 선박들을 불안하게 만들었으며, 조공 교역은 점점 소수의 국가들만이 참여하면서 위축되었다. 뤄롱방은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Lo).
해군력 쇠퇴의 징후들은 명백했다. 대외 정책과 전략적 전망에서 공세로 부터 수세로, 전진으로부터 후퇴로 바뀌었다..명대 초기의 팽창적 성격은 "보물선단"의 항해와 안남에서의 의기양양했던 군사행동에서 현저하게 드러났다....하지만 그 후로 전략적 정책이 변경되었다.푸젠의 전진기지는 철수했고(1436-49년)...심가문(沈家門) 기지는 1452년에 철수했다....더 이상 해상순찰을 수행하지 않던 군함들은 방치된 상태로 쇠락하던 항구들에 정박되어 있었다.
15세기 후반에 명나라 해군이 보유하고 있던 선박들 가운데 절반 이상이 해체되었으며, 새로운 선박들은 건조되지 않았다.(Lo)
해상 수송이라는 절대적으로 중요한 분야에서 16세기에는 아무런 주목할 만한 진전도 없었다....16세기에는 사회적인 발명의 영역, 즉 생산의 조지화, 자본투자, 화폐수단 및 신용수단 등에서도 별다른 도약이 없었다.
14세기 중엽에 발생했던 가장 중요한 체제상의 변화들 가운데 하나는 세계의 많은 부분에서 동시에 그리고 상호의존적으로 발생했던 인구의 두드러진 감소였다. 이는 선페스트와 다른 전염병이 유행하여 이 체제의 많은 부분을 황폐화시켰던 결과였다. 이구 감소에 대한 반응이 지역마다 달랐을지라도(어떤 지역에서는 회복이 빨랐고, 다른 지역에서는 지체되었고나, 아예 회복이 되지 않았다), 두 가지 결과는 꽤 보편적이었다. 그중 하나는 농업 생산의 비중이 다시 높아진 것이었는데, 수십 년전보다도 인구가 줄어든 상황에서 농업 인구가 차지하는 비중은 더욱 증가했으며, 다른 하나는 도시화의 진행 속도가 둔화된 점이었다. 두 가지 모두 세계체제의 참여자들이 더 이상 13세기의 특징이었던 잉여를 산출할 수없게 되었음을 보여주는 징후들이었다. 그로 인해서 일시적이기는 해도 교역, 특히 원거리 교역에서 전반적인 규모와 가치가 감소했다.
체제상의 변화의 두번째 요소는 지정학적인 것이었다. 13세기 동안에 상인과 그들의 상품들이 순환하던 지정학적인 환경은 점점 마찰이 사라지고 지속성을 띠게 되었다.
콘드라티에프(kondratieff)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