小敵困之剝 不利有攸往 힘이 약한 적은 더욱 곤궁하게 하라. 주역의 박괘에 군자가 일을 계속하는 것은 이롭지 않다고 했다.
여기서 박剝이란 산을 뜻하는 간艮이 땅을 뜻하는 곤坤괘의 위에 올라선 괘로, 평지에 산이 홀로 있으니 가파르고, 산 아래 평지가 있으니 위태로운, 따라서 상태를 관망하며 기회를 기다리는 괘라 할 수 있다. 하긴 막막한 평원에 산 하나 덩그라니 있으면 외롭고 쓸쓸하고, 또 산에서나 평지에서나 피곤하고 번거로운 법이다. 산이란 군자요, 평지란 세상이니, 세상이 군자를 끌어내리려 방해하므로 군자가 뜻을 이루기는 어렵고 덕을 쌓으며 때를 기다려야 유리하다는 것이다.
관문착적關門捉敵이란 말 그대로 문을 닫고 도적을 잡는 계책이다. 간단히 방안에 쥐라도 한 마리 들어왔을 때를 떠올려 보면 된다. 쥐를 쫓으려면야 문을 열어두어야겠지만 쥐를 잡자면 일단 문부터 닫아야 한다. 물론 도망간다고 문제야 없겠지만 그렇게 되면 언제 또 돌아와 방안을 돌아다닐 지 모른다. 잡으려면 확실하게 문을 잠그고서. 그게 관문착적이다.
관문착적의 가장 훌륭한 예로 꼽을 수 있는 것이 우리집 쭈꾸미 포획작전이었다. 쭈꾸미 녀석은 원래 전에 살던 집 근처를 떠돌던 길고양이였는데, 아마 당시 4개월쯤 되었던가 그랬을 것이다. 무슨 인연인지 매일같이 창틀에 앉아 방안을 쳐다보기에 밥을 몇 번 주고 하다가 정이 들면서 - 밥 준다고 쥐를 한 마리 잡아다 창틀에 선물이라고 놓아두고 가더라. - 겨울이 오기 전에 어디 좋은 주인이라도 찾아줄까 생각하게 되었었다. 그런데,
아다시피 이놈의 고양이라는 놈들이 좀 날쌘가? 집안으로 들이려 해도 이놈들이 보통 잘 도망다니는 게 아니다. 그렇다고 놀라 도망가서 안 돌아오면 모를까 매번 돌아와 창틀에 앉아 밥 달라고 빤히 쳐다보고... 그래서 이 녀석을 잡자고 계획을 세웠다. 먼저 창틀에 앉았을 때 문을 열고 쭈꾸미 녀석으로 하여금 창틀 안쪽으로 들어와 밥을 먹게 한 것이다. 그리고 나는 살짝 반대편으로 돌아가 창문을 닫고...
그 다음이야 뭐 예상한 대로다. 방문을 닫고 창문을 닫은 다음 쭈꾸미 녀석을 그냥 쫓아다녔다. 어차피 놓쳐봐야 방안이고, 어디 가 봐야 방안이니 여유를 가지고 녀석이 갈만한 곳을 하나하나 차단한 끝에, 궁지에 몰린 녀석을 한 손에 잡을 수 있었다. 애초에 계획한 분양은 끝내 데려가겠다는 사람이 나오지 않아 실패했지만, 결국 그로 인해 쭈꾸미 녀석도 우리 집에 함께 살게 되었다. 지금은 어디 가라고 해도 안 간다며 앙탈할 정도로 집에 익숙해 있다.
나야 고양이 잡는 데 썼지만 예로부터 성을 공략할 때 가장 많이 쓴 전략도 바로 이 관문착적이었다. 성문을 막고 더 이상의 어떠한 인력이나 물자도 오가지 못하도록 함으로써 천천히 말려죽이는... 아직 공성병기가 제대로 위력을 발휘하기 전에는 더욱 성을 포위하고 말려죽이는 전략이 유효하게 쓰였었다. 남한산성도 그렇게 백성들 힘들다며 산 아래 물자를 모아두었다가 물자가 모자라 끝내 항복하고 말았었고, 울산성에서도 조명연합군에의해 포위된 가토 기요마사가 굶어죽을 뻔한 적도 있었다.
아마 공성전에서 관문착적의 계략을 가장 잘 쓴 것이 토요토미 히데요시일 텐데, 그의 전술은 그야말로 군자의 전술에 가까웠다. 돗토리성을 공략할 때는 일부러 먼저 비싼 값에 돗토리성의 식량을 사들여 비축미를 줄이고, 성 아래 마을들을 약탈함으로써 피난민으로 하여금 돗토리성으로 들어가도록 만듦으로써, 부족한 물자에 더 많은 인구가 성 안에 밀집하도록 하여 스스로 도저히 견디지 못하고 항복하도록 만들었었다. 다카마쓰 성에서도 우키다군과 3만의 병력으로 먼저 제방을 무너뜨리고 성을 물에 잠기게 한 뒤 포위를 유지함으로써 스스로 다카마쓰의 성주가 스스로 할복을 조건으로 성문을 열도록 만들었었고. 아마 가장 절정에 이른 것이 오다와라 성 공략일 것이다. 난공불락의 오다와라 성조차 직접 공략하기보다는 아예 전국의 다이묘들로 하여금 병력을 이끌고 오도록 해서 20만의 대군으로 성을 포위하고서는 놀면서 항복만을 기다렸으니.
물론 이러한 포위를 통한 고사전술은 어디까지나 더 이상 다른 곳을 신경쓸 필요가 없을 때나 하는 것이다. 오초칠국의 난 당시 오왕 유비가 그랬던 것이나, 안록산과 사사명의 난에서 수양성에서 그랬던 것처럼 쓸데없이 엄한 성 하나 떨구느라 시간을 다 보내다가는 오히려 다른 곳에서 일어난 적에 의해 역으로 포위되거나 주도권을 잃고 몰리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영원한 고전 삼국지에서도 관문착적은 멋지게 쓰이고 있었는데, 일단 그 하나가 조조와 유비의 연합군에 의한 하비공략이었다. 여포라 하면 누구나 두려워하는 당대 최고의 명장이었고, 하비와 소패의 서주에 웅거하고 있던 그의 세력은 원소, 원술, 조조와 더불어 천하의 패권을 다투고 있던 터였다. 그러나 아마 여포가 마음먹고 군사를 일으켜 일전을 겨루었다면 싸움의 향배가 어떻게 되었을지 알 수 없지만, 여포를 탐탁치 않게 여기던 진규와 진등 부자의 꼬임에 넘어가면서 오히려 하비에서 농성하는 패착을 두게 된다. 나중에서야 원술과 연합하려 하지만 그조차도 조조와 유비군에 의해 차단당하고, 나중에는 수공을 가하여 하비성 전체가 물에 잠겨 버리고... 결국 여포는 제대로 싸움 한 번 해 보지 못하고 부하인 위속과 송헌에게 사로잡혀 죽임을 당하고 만다. 하긴 이 경우는 진규와 진등에 의한 혼수모어의 계책이라 해야 하려나?
읍참마속의 유래가 되는 제갈량의 1차 북벌 당시의 기산 싸움도 그런 관문착적의 예다. 기산은 한중에서 장안으로 진출하려 하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전략적인 요충이었는데 - 그래서 제갈량은 6차례의 북벌에서 한 번을 제외하고는 모두 이 기산에서부터 북벌을 시작하고 있었다. - 제갈량의 계략에 의해 좌천되었던 사마의가 복권되어 기산으로 오려 한다는 것을 듣고는 마속과 왕평에게 기산의 수비를 맡기고 있었다. 원래는 마속이 아닌 다른 장수에게 맡기려 했는데, 마속이 적극적으로 나서는 바람에 유비가 중히 쓰지 말라 유언한 것을 잊고는 그를 대장으로 삼고 경험많은 왕평을 부장으로 삼아 기산을 지키게 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때 제갈량이 마속으로 하여금 기산을 지키도록 하면서 내린 명령은 산 아래 진을 치고 사마의의 군을 맞서 상대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마속 역시 마량의 동생으로 주위에서 평판이 자자한 재사이다 보니 흔히 어설프게 아는 인간들이 항상 하는 실수를 저지르고 만다. 기산이 산이고 아래로 길이 나 있다는 것을 알고는 산 위에 진을 쳐서 위에서 아래로 공격하겠노라 결심한 것이다. 왕평은 당연히 반대했지만 주장은 어디까지나 마속이라 왕평은 일부의 병력만으로 평지에 진을 치고 제갈량에게 포진을 적어 보내 명령을 청하도록 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산 위에 진을 친 마속은 마속의 포진을 보고 코웃음을 한 번 쳐 준 사마의에 의해 포위되고 말았고, 마침내는 마실 물조차 없이 고립된 끝에 무모한 공격에 나서다 철저히 와해되고 왕평의 도움을 얻어 겨우 목숨만 건져 도망치고 말았다. 제갈량의 촉군으로서는 한중으로부터의 보급로 및 퇴로를 잃은 상황이었으니 사마의가 의도한 대로 제갈량은 초반의 선전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병력을 되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제갈량이 마속을 죽이면서 눈물을 흘린 것은 마속이 친구인 마량의 동생이어서가 아니라 유비가 그를 중히 쓰지 말라 유언한 것을 어긴 어리석음을 한탄하면서였지만 말이다.
지금의 에스파니아 지방을 지배하던 카르타고의 군벌 한니발이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 반도로 진격했을 때 로마는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보였다. 처음 한니발의 군대가 알프스를 넘어 나타났을 때야 여유였겠지만, 연달아 여러 동맹도시들이 항복하고, 또 여러 도시들이 한니발에 동조하여 로마에 반기를 들면서, 더구나 칸네에서의 결정적인 패배로 말미암아 로마의 멸망은 시간문제로만 여겨졌었다. 사실 이때 한니발이 바로 로마로 진격했으면 어땠을까 싶기는 한데, 한니발 역시 로마를 멸망시키자면 먼저 그들에 협력하는 동맹도시들부터 떼어내야 한다는 판단 아래 로마 주위로만 돌고 있었다.
그것은 기회였다. 아무리 칸네에서 4만이 넘는 병력을 잃고, 여러 동맹시들이 떨어져 나가고는 있었지만, 로마는 여전히 로마였고, 로마의 시민과 로마의 강력하고 효율적인 군대는 여전히 건재해 있었다. 한니발의 의도와는 달리 실제 로마로부터 이탈한 동맹시는 그리 많지 않아 전략적으로 한니발의 카르타고군에 비해 한참 유리했다. 다만 초반의 실패를 극복할 시간만 있다면, 그리고 한니발이 더 강해지지 않도록 적절히 제어할 수만 있다면...
한니발의 약점도 바로 그것이었다. 알프스를 넘어 온 것은 좋은데, 알프스란 군을 이끌고 넘을 수는 있어도 안정적인 보급을 하기엔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다. 그렇다고 현지에서 보급문제를 해결하기에는 로마를 중심으로 한 동맹이 여전히 굳건했고. 바다 건너 카르타고로부터 지원을 얻기에도 당시 제해권은 로마에 있었다. 에스파니아에 남아 있던 동생 하스드르발이 구원군을 이끌고 도와주려 이탈리아 반도에 도착했다가는 오히려 로마군에 포착되어 섬멸되고 있었고.
한 마디로 철저히 고립된 상태에서 불리한 적지에서 나중에는 버티는 것만이 고작인 상태가 되어 버린 것이었다. 아마 굳이 카르타고를 공격해서 한니발로 하여금 카르타고를 구원하러 돌아가도록 하지 않았어도 한니발은 결국 그렇게 말라죽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미 거기에서 한니발의 로마원정은 실패로 결정나고 말았던 것이다. 같은 관문착적이었는데, 결국 더 세력이 컸던 로마가 설치한 덫이 한니발의 그것보다 더 크고 강력했달까?
태평양전쟁 당시에도 당시 맥아더 원수는 니미츠 제독의 해군과의 협력 아래 징검다리 작전이라고 불리우는 일련의 상륙작전을 통해 효과적으로 태평양상의 섬들을 일본군으로부터 탈환하고 있었다. 징검다리 작전이란 달리 메뚜기 뛰기라고도 불리는데, 한 마디로 태평양상에 여러 섬이 있으면 그 섬 가운데 몇 개의 섬을 건너뛰어 상륙작전을 펼침으로써 상륙하여 확보한 선에 활주로를 건설하고 공군의 지원 아래 나머지 섬으로 하여금 자연스레 말라죽게 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일본군 역시 보급을 유지하기 위해 일본 육군 스스로 보급용 잠수함을 개발하고, 전투함인 구축함이 물자수송에 동원되는 등 필사적인 노력일 기울였지만, 일단 제해권과 제공권이 미국의 손에 넘어간 뒤라 더 이상 도리가 없었다. 결국 일본군의 수중에 떨어졌던 태평양의 여러 섬들은 맥아더와 니미츠 육군과 해군의 두 지휘관의 탁월한 지휘 아래 차례차례 미국에 의해 회복되었다.
역시 2차세계대전 당시 동부전선에서 소련군은 스탈린그라드를 공격하고 있던 독일군을 양쪽 날개가 되어 있던 루마니아군과의 연결점을 끊고 돌파하여 포위하고 있었는데, 이후 독일 제 6군은 소련군의 포위 안에 갇힌 채 그대로 말라죽고 말았다. 싸우다 죽은 사람보다 오히려 굶어죽거나 추워서 얼어죽은 사람이 더 많다 할 정도로 철저히 말려 나중에는 제대로 저항조차 못하고 항복하고 말았었다. 그 전에는 독일군이 낫질작전으로 아르덴느 숲을 돌파하여 뮤즈강을 도하, 영불연합군의 후방을 크게 종단하여 포위망을 만들고 있었으니, 결국 이로 인해 영불연합군은 대부분의 장비를 파기한 채 덩케르크로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레닌그라드에서도 그랬지만 어설픈 포위로 인해 주지 않다도 되었을 기회를 다시 한 번 주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디엔비엔푸는 사실 월맹군이 문을 닫았다기보다는 프랑스군이 함정 안으로 기어들어갔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적지인 북베트남의 디엔비엔푸에 강력한 거점을 만들고 그를 중심으로 월맹군을 제압해 나가겠다는 프랑스군의 구상은, 그러나 이미 2차세계대전 당시 스탈린그라드와 쾨니히스베르크를 통해 얼마나 무모한 생각인가 하는 것이 분명히 드러나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멍청한 판단들이 항상 그러하듯 프랑스의 지휘관들은 자신들의 탁월한 전략에 스스로 감탄하고 있었고, 프랑스의 정예 외인부대를 투입하여 막대한 물자와 노력, 시간을 들여 디엔비엔푸 요새의 강화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리고 결국 디엔비엔푸의 프랑스군은 외인부대의 명성에 걸맞는 뛰어난 활약에도 불구하고 철저하게 고립된 채, 보급을 위한 수송기가 박격포탄에 노출되는 상황에마저 놓여가며 역시 철저히 말라죽고 말았었다.
사실 객관적으로 도저히 전력에서 상대가 되지 않는 월맹군이고 프랑스이었었다. 그러나이미 프랑스군은 포위되어 있었고, 보급과 지원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제아무리 외인부대라도 - 2차세계대전을 거치며 많은 실전경험을 거친 베태랑들이 포진된 군대라도 버텨낼 재간이 없는 것이었다. 결국 디엔비엔푸는 역사상 프랑스가 저지른 수많은 삽질 가운데 수위를 다투는 치욕으로 마감되고 말았으니, 프랑스는 이 전투를 끝으로 사실상 베트남에서 손을 떼고 말았다.
말하자면 관문착적이란 쥐잡기라 할 수 있다. 방안에 쥐가 들어오면 어떻게 하는가? 무섭다며 그냥 놓아주는 사람도 있겠지만, 잡고자 한다면 먼저 문부터 잠그는 것이다. 문을 잠그고, 숨을 곳을 막고, 그리고 나서 차근차근 몰아가면 큰 수고 없이도 쥐를 잡을 수 있다. 만일 문이 열려 있다면 일단 쥐 잡는 건 포기해야 한다.
덫이란 들어가기는 쉬워도 나가기는 어려운 것, 이미 덫으로 들어가 있다면 설사 그것이 덫이 아니더라도 덫으로 만들 수 있어야 한다. 30년 전쟁 당시 작센을 끌어들임으로써 승승장구하느 스웨덴군의 후방을 차단했던 것이나, 아프리카로 진격해 들어간 나폴레옹을 지중해를 차단하여 가두었던 영국군처럼.
원래 군자라 하는 것은 자기 손을 더럽히지 않기에 군자다. 좋은 것은 자기가 다 하고, 나쁜 것은 주위로 돌리고, 자기는 편하게 앉아 입이나 놀리면서 상대로 하여금은 부지런히 뛰어나니게 하니 군자다. 군자의 상징은 그래서 뒷짐에 팔자걸음인 것이다. 관문착적은 바로 그런 군자의 계략이다. 편하게, 편하기 위해서, 상대를 함정에 빠뜨리는. 함정에 빠진 상대가 좌충우돌 발버둥치는 사이 흐뭇한 미소를 머금고 마는. 군자인 것이다. 병법삼심육계의 22번째 계략이다.
小敵困之剝 不利有攸往 힘이 약한 적은 더욱 곤궁하게 하라. 주역의 박괘에 군자가 일을 계속하는 것은 이롭지 않다고 했다.
여기서 박剝이란 산을 뜻하는 간艮이 땅을 뜻하는 곤坤괘의 위에 올라선 괘로, 평지에 산이 홀로 있으니 가파르고, 산 아래 평지가 있으니 위태로운, 따라서 상태를 관망하며 기회를 기다리는 괘라 할 수 있다. 하긴 막막한 평원에 산 하나 덩그라니 있으면 외롭고 쓸쓸하고, 또 산에서나 평지에서나 피곤하고 번거로운 법이다. 산이란 군자요, 평지란 세상이니, 세상이 군자를 끌어내리려 방해하므로 군자가 뜻을 이루기는 어렵고 덕을 쌓으며 때를 기다려야 유리하다는 것이다.
관문착적關門捉敵이란 말 그대로 문을 닫고 도적을 잡는 계책이다. 간단히 방안에 쥐라도 한 마리 들어왔을 때를 떠올려 보면 된다. 쥐를 쫓으려면야 문을 열어두어야겠지만 쥐를 잡자면 일단 문부터 닫아야 한다. 물론 도망간다고 문제야 없겠지만 그렇게 되면 언제 또 돌아와 방안을 돌아다닐 지 모른다. 잡으려면 확실하게 문을 잠그고서. 그게 관문착적이다.
관문착적의 가장 훌륭한 예로 꼽을 수 있는 것이 우리집 쭈꾸미 포획작전이었다. 쭈꾸미 녀석은 원래 전에 살던 집 근처를 떠돌던 길고양이였는데, 아마 당시 4개월쯤 되었던가 그랬을 것이다. 무슨 인연인지 매일같이 창틀에 앉아 방안을 쳐다보기에 밥을 몇 번 주고 하다가 정이 들면서 - 밥 준다고 쥐를 한 마리 잡아다 창틀에 선물이라고 놓아두고 가더라. - 겨울이 오기 전에 어디 좋은 주인이라도 찾아줄까 생각하게 되었었다. 그런데,
아다시피 이놈의 고양이라는 놈들이 좀 날쌘가? 집안으로 들이려 해도 이놈들이 보통 잘 도망다니는 게 아니다. 그렇다고 놀라 도망가서 안 돌아오면 모를까 매번 돌아와 창틀에 앉아 밥 달라고 빤히 쳐다보고... 그래서 이 녀석을 잡자고 계획을 세웠다. 먼저 창틀에 앉았을 때 문을 열고 쭈꾸미 녀석으로 하여금 창틀 안쪽으로 들어와 밥을 먹게 한 것이다. 그리고 나는 살짝 반대편으로 돌아가 창문을 닫고...
그 다음이야 뭐 예상한 대로다. 방문을 닫고 창문을 닫은 다음 쭈꾸미 녀석을 그냥 쫓아다녔다. 어차피 놓쳐봐야 방안이고, 어디 가 봐야 방안이니 여유를 가지고 녀석이 갈만한 곳을 하나하나 차단한 끝에, 궁지에 몰린 녀석을 한 손에 잡을 수 있었다. 애초에 계획한 분양은 끝내 데려가겠다는 사람이 나오지 않아 실패했지만, 결국 그로 인해 쭈꾸미 녀석도 우리 집에 함께 살게 되었다. 지금은 어디 가라고 해도 안 간다며 앙탈할 정도로 집에 익숙해 있다.
나야 고양이 잡는 데 썼지만 예로부터 성을 공략할 때 가장 많이 쓴 전략도 바로 이 관문착적이었다. 성문을 막고 더 이상의 어떠한 인력이나 물자도 오가지 못하도록 함으로써 천천히 말려죽이는... 아직 공성병기가 제대로 위력을 발휘하기 전에는 더욱 성을 포위하고 말려죽이는 전략이 유효하게 쓰였었다. 남한산성도 그렇게 백성들 힘들다며 산 아래 물자를 모아두었다가 물자가 모자라 끝내 항복하고 말았었고, 울산성에서도 조명연합군에의해 포위된 가토 기요마사가 굶어죽을 뻔한 적도 있었다.
아마 공성전에서 관문착적의 계략을 가장 잘 쓴 것이 토요토미 히데요시일 텐데, 그의 전술은 그야말로 군자의 전술에 가까웠다. 돗토리성을 공략할 때는 일부러 먼저 비싼 값에 돗토리성의 식량을 사들여 비축미를 줄이고, 성 아래 마을들을 약탈함으로써 피난민으로 하여금 돗토리성으로 들어가도록 만듦으로써, 부족한 물자에 더 많은 인구가 성 안에 밀집하도록 하여 스스로 도저히 견디지 못하고 항복하도록 만들었었다. 다카마쓰 성에서도 우키다군과 3만의 병력으로 먼저 제방을 무너뜨리고 성을 물에 잠기게 한 뒤 포위를 유지함으로써 스스로 다카마쓰의 성주가 스스로 할복을 조건으로 성문을 열도록 만들었었고. 아마 가장 절정에 이른 것이 오다와라 성 공략일 것이다. 난공불락의 오다와라 성조차 직접 공략하기보다는 아예 전국의 다이묘들로 하여금 병력을 이끌고 오도록 해서 20만의 대군으로 성을 포위하고서는 놀면서 항복만을 기다렸으니.
물론 이러한 포위를 통한 고사전술은 어디까지나 더 이상 다른 곳을 신경쓸 필요가 없을 때나 하는 것이다. 오초칠국의 난 당시 오왕 유비가 그랬던 것이나, 안록산과 사사명의 난에서 수양성에서 그랬던 것처럼 쓸데없이 엄한 성 하나 떨구느라 시간을 다 보내다가는 오히려 다른 곳에서 일어난 적에 의해 역으로 포위되거나 주도권을 잃고 몰리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영원한 고전 삼국지에서도 관문착적은 멋지게 쓰이고 있었는데, 일단 그 하나가 조조와 유비의 연합군에 의한 하비공략이었다. 여포라 하면 누구나 두려워하는 당대 최고의 명장이었고, 하비와 소패의 서주에 웅거하고 있던 그의 세력은 원소, 원술, 조조와 더불어 천하의 패권을 다투고 있던 터였다. 그러나 아마 여포가 마음먹고 군사를 일으켜 일전을 겨루었다면 싸움의 향배가 어떻게 되었을지 알 수 없지만, 여포를 탐탁치 않게 여기던 진규와 진등 부자의 꼬임에 넘어가면서 오히려 하비에서 농성하는 패착을 두게 된다. 나중에서야 원술과 연합하려 하지만 그조차도 조조와 유비군에 의해 차단당하고, 나중에는 수공을 가하여 하비성 전체가 물에 잠겨 버리고... 결국 여포는 제대로 싸움 한 번 해 보지 못하고 부하인 위속과 송헌에게 사로잡혀 죽임을 당하고 만다. 하긴 이 경우는 진규와 진등에 의한 혼수모어의 계책이라 해야 하려나?
읍참마속의 유래가 되는 제갈량의 1차 북벌 당시의 기산 싸움도 그런 관문착적의 예다. 기산은 한중에서 장안으로 진출하려 하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전략적인 요충이었는데 - 그래서 제갈량은 6차례의 북벌에서 한 번을 제외하고는 모두 이 기산에서부터 북벌을 시작하고 있었다. - 제갈량의 계략에 의해 좌천되었던 사마의가 복권되어 기산으로 오려 한다는 것을 듣고는 마속과 왕평에게 기산의 수비를 맡기고 있었다. 원래는 마속이 아닌 다른 장수에게 맡기려 했는데, 마속이 적극적으로 나서는 바람에 유비가 중히 쓰지 말라 유언한 것을 잊고는 그를 대장으로 삼고 경험많은 왕평을 부장으로 삼아 기산을 지키게 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때 제갈량이 마속으로 하여금 기산을 지키도록 하면서 내린 명령은 산 아래 진을 치고 사마의의 군을 맞서 상대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마속 역시 마량의 동생으로 주위에서 평판이 자자한 재사이다 보니 흔히 어설프게 아는 인간들이 항상 하는 실수를 저지르고 만다. 기산이 산이고 아래로 길이 나 있다는 것을 알고는 산 위에 진을 쳐서 위에서 아래로 공격하겠노라 결심한 것이다. 왕평은 당연히 반대했지만 주장은 어디까지나 마속이라 왕평은 일부의 병력만으로 평지에 진을 치고 제갈량에게 포진을 적어 보내 명령을 청하도록 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산 위에 진을 친 마속은 마속의 포진을 보고 코웃음을 한 번 쳐 준 사마의에 의해 포위되고 말았고, 마침내는 마실 물조차 없이 고립된 끝에 무모한 공격에 나서다 철저히 와해되고 왕평의 도움을 얻어 겨우 목숨만 건져 도망치고 말았다. 제갈량의 촉군으로서는 한중으로부터의 보급로 및 퇴로를 잃은 상황이었으니 사마의가 의도한 대로 제갈량은 초반의 선전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병력을 되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제갈량이 마속을 죽이면서 눈물을 흘린 것은 마속이 친구인 마량의 동생이어서가 아니라 유비가 그를 중히 쓰지 말라 유언한 것을 어긴 어리석음을 한탄하면서였지만 말이다.
지금의 에스파니아 지방을 지배하던 카르타고의 군벌 한니발이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 반도로 진격했을 때 로마는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보였다. 처음 한니발의 군대가 알프스를 넘어 나타났을 때야 여유였겠지만, 연달아 여러 동맹도시들이 항복하고, 또 여러 도시들이 한니발에 동조하여 로마에 반기를 들면서, 더구나 칸네에서의 결정적인 패배로 말미암아 로마의 멸망은 시간문제로만 여겨졌었다. 사실 이때 한니발이 바로 로마로 진격했으면 어땠을까 싶기는 한데, 한니발 역시 로마를 멸망시키자면 먼저 그들에 협력하는 동맹도시들부터 떼어내야 한다는 판단 아래 로마 주위로만 돌고 있었다.
그것은 기회였다. 아무리 칸네에서 4만이 넘는 병력을 잃고, 여러 동맹시들이 떨어져 나가고는 있었지만, 로마는 여전히 로마였고, 로마의 시민과 로마의 강력하고 효율적인 군대는 여전히 건재해 있었다. 한니발의 의도와는 달리 실제 로마로부터 이탈한 동맹시는 그리 많지 않아 전략적으로 한니발의 카르타고군에 비해 한참 유리했다. 다만 초반의 실패를 극복할 시간만 있다면, 그리고 한니발이 더 강해지지 않도록 적절히 제어할 수만 있다면...
한니발의 약점도 바로 그것이었다. 알프스를 넘어 온 것은 좋은데, 알프스란 군을 이끌고 넘을 수는 있어도 안정적인 보급을 하기엔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다. 그렇다고 현지에서 보급문제를 해결하기에는 로마를 중심으로 한 동맹이 여전히 굳건했고. 바다 건너 카르타고로부터 지원을 얻기에도 당시 제해권은 로마에 있었다. 에스파니아에 남아 있던 동생 하스드르발이 구원군을 이끌고 도와주려 이탈리아 반도에 도착했다가는 오히려 로마군에 포착되어 섬멸되고 있었고.
한 마디로 철저히 고립된 상태에서 불리한 적지에서 나중에는 버티는 것만이 고작인 상태가 되어 버린 것이었다. 아마 굳이 카르타고를 공격해서 한니발로 하여금 카르타고를 구원하러 돌아가도록 하지 않았어도 한니발은 결국 그렇게 말라죽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미 거기에서 한니발의 로마원정은 실패로 결정나고 말았던 것이다. 같은 관문착적이었는데, 결국 더 세력이 컸던 로마가 설치한 덫이 한니발의 그것보다 더 크고 강력했달까?
태평양전쟁 당시에도 당시 맥아더 원수는 니미츠 제독의 해군과의 협력 아래 징검다리 작전이라고 불리우는 일련의 상륙작전을 통해 효과적으로 태평양상의 섬들을 일본군으로부터 탈환하고 있었다. 징검다리 작전이란 달리 메뚜기 뛰기라고도 불리는데, 한 마디로 태평양상에 여러 섬이 있으면 그 섬 가운데 몇 개의 섬을 건너뛰어 상륙작전을 펼침으로써 상륙하여 확보한 선에 활주로를 건설하고 공군의 지원 아래 나머지 섬으로 하여금 자연스레 말라죽게 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일본군 역시 보급을 유지하기 위해 일본 육군 스스로 보급용 잠수함을 개발하고, 전투함인 구축함이 물자수송에 동원되는 등 필사적인 노력일 기울였지만, 일단 제해권과 제공권이 미국의 손에 넘어간 뒤라 더 이상 도리가 없었다. 결국 일본군의 수중에 떨어졌던 태평양의 여러 섬들은 맥아더와 니미츠 육군과 해군의 두 지휘관의 탁월한 지휘 아래 차례차례 미국에 의해 회복되었다.
역시 2차세계대전 당시 동부전선에서 소련군은 스탈린그라드를 공격하고 있던 독일군을 양쪽 날개가 되어 있던 루마니아군과의 연결점을 끊고 돌파하여 포위하고 있었는데, 이후 독일 제 6군은 소련군의 포위 안에 갇힌 채 그대로 말라죽고 말았다. 싸우다 죽은 사람보다 오히려 굶어죽거나 추워서 얼어죽은 사람이 더 많다 할 정도로 철저히 말려 나중에는 제대로 저항조차 못하고 항복하고 말았었다. 그 전에는 독일군이 낫질작전으로 아르덴느 숲을 돌파하여 뮤즈강을 도하, 영불연합군의 후방을 크게 종단하여 포위망을 만들고 있었으니, 결국 이로 인해 영불연합군은 대부분의 장비를 파기한 채 덩케르크로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레닌그라드에서도 그랬지만 어설픈 포위로 인해 주지 않다도 되었을 기회를 다시 한 번 주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디엔비엔푸는 사실 월맹군이 문을 닫았다기보다는 프랑스군이 함정 안으로 기어들어갔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적지인 북베트남의 디엔비엔푸에 강력한 거점을 만들고 그를 중심으로 월맹군을 제압해 나가겠다는 프랑스군의 구상은, 그러나 이미 2차세계대전 당시 스탈린그라드와 쾨니히스베르크를 통해 얼마나 무모한 생각인가 하는 것이 분명히 드러나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멍청한 판단들이 항상 그러하듯 프랑스의 지휘관들은 자신들의 탁월한 전략에 스스로 감탄하고 있었고, 프랑스의 정예 외인부대를 투입하여 막대한 물자와 노력, 시간을 들여 디엔비엔푸 요새의 강화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리고 결국 디엔비엔푸의 프랑스군은 외인부대의 명성에 걸맞는 뛰어난 활약에도 불구하고 철저하게 고립된 채, 보급을 위한 수송기가 박격포탄에 노출되는 상황에마저 놓여가며 역시 철저히 말라죽고 말았었다.
사실 객관적으로 도저히 전력에서 상대가 되지 않는 월맹군이고 프랑스이었었다. 그러나이미 프랑스군은 포위되어 있었고, 보급과 지원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제아무리 외인부대라도 - 2차세계대전을 거치며 많은 실전경험을 거친 베태랑들이 포진된 군대라도 버텨낼 재간이 없는 것이었다. 결국 디엔비엔푸는 역사상 프랑스가 저지른 수많은 삽질 가운데 수위를 다투는 치욕으로 마감되고 말았으니, 프랑스는 이 전투를 끝으로 사실상 베트남에서 손을 떼고 말았다.
말하자면 관문착적이란 쥐잡기라 할 수 있다. 방안에 쥐가 들어오면 어떻게 하는가? 무섭다며 그냥 놓아주는 사람도 있겠지만, 잡고자 한다면 먼저 문부터 잠그는 것이다. 문을 잠그고, 숨을 곳을 막고, 그리고 나서 차근차근 몰아가면 큰 수고 없이도 쥐를 잡을 수 있다. 만일 문이 열려 있다면 일단 쥐 잡는 건 포기해야 한다.
덫이란 들어가기는 쉬워도 나가기는 어려운 것, 이미 덫으로 들어가 있다면 설사 그것이 덫이 아니더라도 덫으로 만들 수 있어야 한다. 30년 전쟁 당시 작센을 끌어들임으로써 승승장구하느 스웨덴군의 후방을 차단했던 것이나, 아프리카로 진격해 들어간 나폴레옹을 지중해를 차단하여 가두었던 영국군처럼.
원래 군자라 하는 것은 자기 손을 더럽히지 않기에 군자다. 좋은 것은 자기가 다 하고, 나쁜 것은 주위로 돌리고, 자기는 편하게 앉아 입이나 놀리면서 상대로 하여금은 부지런히 뛰어나니게 하니 군자다. 군자의 상징은 그래서 뒷짐에 팔자걸음인 것이다. 관문착적은 바로 그런 군자의 계략이다. 편하게, 편하기 위해서, 상대를 함정에 빠뜨리는. 함정에 빠진 상대가 좌충우돌 발버둥치는 사이 흐뭇한 미소를 머금고 마는. 군자인 것이다. 병법삼심육계의 22번째 계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