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섭리로 본 남북통일
제4장 통일의 근본 이론
제6절 위함의 철학과 통일
2. 위하는 법도를 세우신 이유
하나님은 왜 위해서 존재하라는 원칙을 세우지 않을 수 없었느냐? 그 몇 가지 요건을 들어 보겠습니다.
우선 여러분들에게 묻겠는데 만일 여러분들을 위해서 누군가가 진정으로 생명을 다하고 희생을 다하면서 100퍼센트 은사를 베푼 사람이 있다면 여러분의 본심이 그 은사를 같는데 50퍼센트는 주머니에 집어넣고 50퍼센트만 갚고 싶습니까, 아니면 있는대로 다 갚고 싶습니까? 우리의 본심이 어떻게 작용해요? 누구나 더 갚고 싶어 하는 것이 본심입니다.
여기 통역하고 있는 미스터 박에 대해서 내가 만약에 100퍼센트 그런 것을 줬다면, 주는데도 진정 사랑하는 가운데서 준 것을 안다면 이 사람은 100퍼센트 이상을 돌려보낸다는 것입니다.
100퍼센트가 110퍼센트로 돌아오고 그 110퍼센트 돌아온 것은 또 그쪽에서 진정으로 주었기 때문에 120퍼센트를 갚게 되고…. 이렇게 함으로 말미암아 여기에서 영원이라는 개념이 설정된다는 것입니다. 영원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원칙을 세우지 않을 수 없으며 그 뿐만 아니라 여기에서 비로소 발전과 번창이 생기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뭐냐? 여러분의 가정에 있어서도 다섯 식구가 있는데 누군가가 그 다섯 식구를 위해서 살게 되면 나중엔 그 위해서 살았던 사람이 그 가정의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과 같이….
그러한 중심이 결정됨과 동시에 주체와 대상, 중심과 상대관계에 있어서의 자원적(自願的)인 주관권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를 절대 위하는 그 주체 앞에 주관받는 것이 얼마나 행복하다는 것을 오늘날 인간들은 모르고 사는 것입니다.
영계(靈界)에 가게 되면 하나님의 직접주관을 받는 것이 얼마나 큰 영광인지 모릅니다. 이처럼 여기에서 비로소 주종관계(主從關係)가 성립되는 것입니다.
세번째는 무엇이냐? 이상과 사랑은 인간에게 있어서 생명보다 더 귀한 것인데도 불구하고 오늘날 인간들은 이런 것이 자기의 것으로서 자기에게 나타나는 줄 아는 것, 이것이 큰 오해라는 것입니다.
사랑과 이상은 어디에서 오느냐? 대상(對象)에게서 옵니다. 대상에게서 오기 때문에 위하는 법도를 세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혜의 왕 되신 하나님께서는 이런 모든 결과를 아시기 때문에 그런 법도를 세우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이제 여러분들이 아셨으리라 믿습니다. (73-326)
영원이라는 개념, 이것은 자기를 위하는 데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운동하는 것을 보더라도 밀어 주고 끌어 주는 상대적 방향이 크면 클수록 빨리 도는 것입니다. 지혜의 왕 되는 하나님이 위해서 존재하는 법도를 세운 것은 영원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세우셨다는 것을 우리는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영원의 개념이 성립됨과 동시에 이것은 영원히 발전되며 영원히 번창하는 것입니다. 현재의 위치에서 전진하고 발전하는 것입니다. 존재의 위치에서 전진적인 자극을 느낄 수 있는 데서만이 행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요건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위해 존재하라는 원칙을 세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예를 들어 말하면 한 가정에 열 식구가 있다고 합시다. 거기에 제일 어린 꼬마 동생이 그 열 식구 가운데서 누구보다도 그 가정 전체를 위해서 살게 된다면 나이 어린 동생일지라도 부모도 그를 내세우게 되고 형제도 그를 내세우게 됩니다. 날이 가면 갈수록 그 위해 존재하는 동생은 자동적으로 그 집안의 중심존재로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우주를 창조하신 이후 하나님 자신이 위해 존재하기 때문에 위해 존재하는 하나님을 닮은 사람은 아무리 작은 동생일지라도, 아무리 작은 아들일지라도 틀림없이 그 가정에서 중심적인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것을 미처 몰랐습니다.
위해서 사는 거기에서 나 스스로가 후퇴되는 것이 아니라 위하면 위할수록 그 사람은 중심존재로 결정되는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 같이.
하나님이 그러하시기 때문에 그러한 자리에 선 사람은 하나님이 중심존재로 세우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그 자리에서만이 이상적 통일, 완전통일을 성사(成事)시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 가운데 남에게 주관(主管)받는 것은 죽어도 못 하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더욱이 식자층에 있는 고명한 사람들에게서 이런 것을 많이 보게 됩니다.
그러나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이제까지의 인간들이 위해서 존재하는 그 앞에 주관받고 사는 것이 얼마나 행복하다는 사실을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영계(靈界)의 조직을 보면 천지(天地)의 대주재(大主宰) 되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은 우주만유의 존재 가운데 위해 존재하는 중심존재이기 때문에 그분에게 지배받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
천년 만년 지배받더라도 감사할 수 있는 이상적 통일권(理想的統一圈)이 여기에 성립되는 것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은 위해 존재하라는 원칙을 세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사랑은 나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생명보다도 귀한 사랑과 이상을 찾으려면 대상이 없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이걸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이 고귀한 사랑과 이상을 받을 수 있고 그것을 찾을 수 있는 존재가 대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겸손히 그 고귀한 사랑과 이상을 받아들이려니 가장 위하는 자리가 아니고는 안되므로 하나님은 위해 존재하라는 원칙을 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는 이 한 가지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75-3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