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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영배(戒盈杯)와 유자지기(宥坐之器) 이야기
공자가 하루는 춘추시대 제나라 환공의 사당을 찾아간 일이 있었다.
사당 안에는 묘하게 생긴 잔 하나가 있었는데, 똑바로 세워져 있지 않고
옆으로 기울어진 이상한 모양의 잔이었다.
공자가 사당을 지키는 이에게
"이것은 무엇에 쓰는 그릇입니까?"라고 물어보자,
사당 관리인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이 그릇은 속이 비면 기울어지고
알맞게 물이 차면 바로 서고
가득 채우면 엎질러집니다.
항상 곁에 두고 보는 그릇이라 하여
유좌지기(宥坐之器)라고 합니다."
제나라 환공은 젊었을 때 언제나 겸손함을 유지하며, 관중과 같은 우수한 인재를 재상으로
등용해서 훌륭한 정치를 펼쳤다. 덕분에 제나라는 강대한 나라로 성장했으며, 실권을 잃어버린
중국 동주 왕실을 대신해 회맹(춘추 전국시대에 제후들이 거행한 회의)를 거행하게 된다.
그러나 나라가 부강해지고 자신의 지위가 올라가자, 환공은 점점 자만심에 빠졌다.
여러 번에 걸쳐 무리한 전쟁을 일으키다가 국력을 쇠퇴시켰으며, 자신에게 아첨하는 간신들만을
등용하여 나라 사정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이후 자식들 간 후계자 싸움이 벌어져 환공은 밀실에 홀로 감금된 채 쓸쓸한 죽음을 맞이하고 만다.
이를 두고 공자는
"환공 같은 훌륭한 사람도 이렇게 자만과 욕심에 빠져 일을 그르쳤는데, 우리와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느냐"며 탄식하였다.
공자는 제자들에게 "총명하면서도 어리석음을 지키고, 천하에 공을 세우고도 겸양하며
용맹을 떨치고도 검약하며, 부유하면서도 겸손함을 지켜야한다"며 '유좌지기'의 의미를 가르쳤다.
한국에서도 조선시대 후기 실학자이자 과학자인 하백원이 술을 가득 채우면
새어나가는 잔을 만들었다.
이를 계영배(戒盈杯)라고 하는데, '가득참을 경계하는 잔'이란 뜻이다.
술을 부으면 70%까지 채울 때는 술이 그대로 있지만,
그 이상을 넘으면 술이 없어진다.
조선 후기의 거상 임상옥은 이 잔을 늘 곁에 두고 인간의 과욕을 경계한 덕분에
조선시대 역사상 전무후무한 거상으로 거듭났다고 전해진다.
가득 차면 엎질러지는 것은 비단 잔뿐만 아니라 우리의 마음도 마찬가지다.
스스로 절제하지 않으면, 인간의 마음은 오만함과 과욕으로 가득차기 십상이다.
특히나 큰 실패를 맛보지 않고 달콤한 성공의 경험만을 반복적으로 경험한
사람일수록 자신의 마음 그릇이 철철 넘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욕심을 부리다가 큰 화를 당하는 경우가 많다.
욕심과 자만심의 독이 점점 퍼져가고 있는 요즘, 절제와 겸손을 가르치는
유좌지기와 계영배의 교훈을 각자의 마음속에 간직하고 살아가길 권해본다.
임상옥과 계영배의 인연
조선 말엽 정조대왕 때인 을묘년 3월 열이렛날, 평안도 의주 땅에 사는 거상
임상옥(林尙沃)의 저택에서는 고관대작이 모여 성대한 잔치가 벌어지고 있었다.
임상옥의 회갑연이었다.
귀빈들만 해도 평안감사, 병사, 군수들이 초대되었고
서울을 비롯하여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같은 먼 곳으로부터 귀빈들이 모여들었다.
정조 3년(1779) 12월 10일 평안도 의주에서 출생한 임상옥
그는 18세때부터 상업에 나서서 온갖 고생을 거듭한 끝에 국제무역상으로 대성한다.
그가 어느 정도의 거부였는가를 아는데 좋은 자료가 있다.
그의 문집인 가포집에 의하면 그가 38세 되던 해에 백마산성 서쪽 삼봉산 밑에
선영을 옮겨 모시고 그 이듬해에 선영 밑에다 수백간의 집을 짓고 살았는데
의주 부윤 등 일행 7백명이 찾아갔을 때 한꺼번에 음식을 제공했다는 것이다.
관원을 대접하는 주부식이며 그 주부식과 요리를 담을 그릇들이 어마어마함을
족히 알만하지 않은가.
그런 임상옥의 회갑잔치이니 그 호화찬란함이야 말해 무엇하랴.
역시 청나라를 상대로 국제무역을 하던 부친을 일찍 여위고
홀로 남은 어머니에 데한 임상옥의 효성은 지극했다.
임상옥은 그 어머니의 마음을 기쁘게 해 드리려고
어린애 돌 때 입는 색동옷을 입고 복건을 쓰고는 어머니 앞에 잔을 올렸다.
그 옆에는 아리따운 기생들이 헌수하는 노래가 곁들여졌다.
"어머님, 소년 과수의 외로운 몸으로 이 불초 자식을 기르시느라고 애 많이 쓰셨습니다.
모쪼록 여년을 즐겁게 만수무강하십시오."
임상옥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리고 술잔을 받는 자당의 눈에서도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윽고 사랑으로 나간 임상옥은 집사를 불러 한양에서 가져온 물건을 대령하라고 명했다.
곧 집사가 작은 오동나무 상자를 임상옥 앞에 대령했다.
임상옥이 상자에서 꺼낸 것은 아주 작은 술잔이었다.
임상옥은 술잔을 평안감사에게 올렸다.
"명기(名器)라 하여 한양에서 가져온 술잔입니다. 한잔 드시지요!"
기생들의 권주가가 울려나오고 임상옥은 그 술잔에 술을 따랐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평안감사가 놀랍다는 듯이 술잔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보시오. 임곽산 영감. 영감이 따룬 술이 다 없어졌소."
54세 때 곽산현감(郭山縣監)을 역임했고 55세 때에는 구성부사(龜城府使)를
역임했기 때문에 빈객들은 임상옥을 영감이라고 불렀다.
"아니, 술이 다 없어지다니요?"
과연 술잔에는 술이 한 방울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변이었다.
하지만 임상옥은 침착하게 말했다.
"제가 술을 잘못 따른 것 같습니다."
임상옥이 재차 술을 따랐다.
"어허, 술이 또 없어졌구려"
그랬다.
분명히 술잔에 가득 따루었는데 감쪽같이 없어진 것이었다.
그렇게 대여섯 번을 되풀이 했는데 번번이 술을 없어지고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다른 술잔을 내오게 해서 술을 따루니 이번에는 잔에 술이 철철 넘쳤다.
그렇게 해서 이날의 잔치는 무사히 넘겼다.
며칠 후, 임상옥은 문득 생각이 나서 한양에서 가져왔던 그 희안한 술잔을 가져오게
해서 실험을 해 보았다.
물을 한잔 가득 부었다.
역시 물은 한 방울도 남지 않고 사라졌다.
"고 술잔, 못쓰겠다.
무슨 요기가 뻣쳤지 이럴 수가 있나.
이런 것이 집안에 있으면 어떤 괴변이 생길지 모르니 없애버려야 해!"
임상옥은 옆에 있던 목침을 집어 들고는 술잔을 힘껏 내리쳤다.
쨍그렁! 두 조각이 났다.
그런데 깨어진 술잔에 촛불이 어리더니 무슨 글자 같은 것이 보였다.
"계영기원 여이동사(戒盈祈願與爾同死)"
(가득 차게 따라 먹지 말게 하고, 너와 같이 죽기를 원한다)
임상옥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술을 가득 따르지 말라. 그렇다면 내가 잘못 했구나. 조금씩 따라 마실 걸.
이제 잔이 깨어졌으니 방법이 없네.
다음 순간 임상옥은 깨어진 다른 쪽 조각을 집어서 들여다보았다.
다음과 같은 글자가 깨알같이 새겨져 있었다.
― 을묘 4월 8일 분원(汾院) 우명옥(禹明玉). ―
그러고보니 오늘이 바로 4월 8일, 이 잔을 만든 자는 내가 이 술잔을 깨뜨릴 것을
알고 있었어. 희한한 일이었다.
임상옥은 그 이튿날 일찍 하인들과 함께 길을 떠났다.
우명옥이란 사람을 만나면 술잔에 새겨진 글의 내막을 알 수 있을 것같아서였다.
여러 날 만에 임상옥 일행은 광주 분원에 당도했다.
우명옥의 집은 분원 근처 산밑에 있는 다 무너져가는 초가집이었다.
그때 언덕 위에서 나이 70여세 되어 보이는 늙은이가 지팡이를 짚고 마주 내려오며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람인양 반가이 맞았다.
"아유 의주 임곽산 영감께서 오셨습니다그려. 어서 오십시오."
노인의 집으로 간 임상옥은 수인사를 마쳤다.
"나는 보신대로 임상옥이외다마는 영감께서 우선생이시오?"
"아니요. 나는 성이 지가올시다.
명옥이는 내 제자지요.
십여일 전 바로 4월 8일날 저녁 술시쯤 한많은 이 세상을 떠났지요.
그때 명옥이가 유언을 남겼는데 임영감께서 오실 것이라는 것과
초종 범절을 일러 주실 것이라 하여 시체를 감장도 않고
영감 오시기만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임상옥은 지노인의 말을 듣고 즉시 우명옥의 시체를 거두어 후하게 장사를 지낸 뒤
지노인의 집에서 2∼3일 묵으면서 우명옥이 술잔에 얽힌 이야기를 들었다.
"술잔이라면… 아 그거 계영배(戒盈杯)올시다.
하지만 임영감께서 깨버리셨다니 계영배를 다시 볼 수 없는 것이 한이 올시다."
이로부터 지노인은 계영배에 얽힌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우삼돌(禹三乭). 우명옥의 본명이다.
그는 강원도 홍천 산골에서 질그릇을 구워내며 살았다.
어느덧 나이 스물 셋.
하루는 사기로 유명한 분원으로 가서 깨끗한 사기를 만들 생각으로
집을 떠나 광주분원 외장으로 있는 지영감의 제자가 되었다.
그러나 삼돌이는 여러 동료들에게 구박과 학대를 받으면서 새벽부터 밤까지
흙 반죽에 그릇 모형 만드는 일을 열심히 했다.
그러는 사이 기술도 일취 월장하여 보는 사람마다 눈들을 크게 뜨고 혀를 내둘렀다.
이해 봄, 삼돌은 나라에 진상 바칠 반상을 전담해 만들게 되었다.
스승 지외장은 옷 한 벌을 새로 해 입히고 관례를 시키면서 이름으로 명옥(明玉)이라고 고쳐 주었다.
그러나 우명옥에 대한 동료들의 시기 질투는 나날이 거듭되었다.
지성이면 감천, 우명옥이 만든 반상은 임금께서도 칭찬을 아끼지 않아 명옥이에게 특별상금까지 내렸다.
지외장도 기뻐했다.
그러나 겉으로는 명옥의 솜씨를 치하하는 동료들도 뒷전에서는
어떻게 하면 명옥을 몹쓸 놈으로 만드느냐, 궁리에 바빴다.
마침내 동료들의 음모가 무르익었다.
어느날 동료들은 명옥에게 뱃놀이를 가자고 유혹했다.
몇 번 사양 끝에 마지못해 따라나선 명옥은 아름다운 기생들의 수발을 받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한번 맛들인 기생의 풍류.
그로부터 우명옥은 색주가 집에 파묻혀 세월 가는 줄 몰랐다.
날이 갈수록 수중에 있던 돈은 톡톡 털렸고 이제는 술과 계집에게 바칠 돈이 필요하자
상사발 상대접같은 보통 물건을 마구 구워내어 돈을 만들어 색주가에 바쳤다.
더 큰 돈이 필요해진 우명옥은 나쁜 동료들과 함께 전라도 지방으로 행상을 나갔다.
과욕이었다.
태풍을 만나고 해적을 만났다.
구사일생으로 겨우 목숨만은 건졌다.
간신히 분원으로 돌아오니 50호 가량 되던 분원 마을도 폭풍우로 쓸려나가고
폐허가 되어 버렸다.
살아 돌아온 사람들과 함께 마을을 복구하느라고 애를 썼다.
우명옥도 마을 사람과 동료들을 격려하며 마을 재건에 두팔을 걷어부쳤다.
그런데 날이 가면서 우명옥 자신은 산 위로 슬슬 돌아다니거나
나무밑으로 왔다갔다 하며 실성한 사람처럼 굴었다.
스승 지외장은 그런 우명옥을 바라보며 걱정했다.
하루는 밤중에 우물에서 물 푸는 소리가 들려 밖으로 나가보니
우명옥이 벌거벗고 두레박에 물을 길어올려서는 머리끝에서부터 들이붓는 것이었다.
지외장은 기가 막혔다.
정말 우명옥이 실성한 사람처럼 보였다.
그로부터 또 몇 달이 흘렀다.
하루는 우명옥이 또 두레박으로 물을 길어올려 온몸에 퍼부었다.
"천지신명이시여!
이 세상 사람들을 망치는 술을 조금씩만 먹게 하는 술잔을 하나 만들게 해 줍소서.
그러면 이놈은 그 술잔과 같이 목숨을 바치겠소이다.
이놈의 한 가지 소원을 이루게 해 주소서!"
지외장은 비로소 우명옥의 비장한 결심을 목격하고 안심했다.
그런지 얼마 뒤, 우명옥은 지외장 앞에 조그만 술잔 하나를 내밀었다.
"선생님, 그동안 보살펴 주셔서 고맙습니다. 선생님 덕에 이런 술잔 하나를 만들었습니다."
앙증맞은 술잔이었다. 명옥은 그 술잔에 가득 물을 부었다.
"선생님, 물을 가득 부으니 물이 없어졌습니다."
"정말 그렇구나!" 지외장도 놀랐다.
"하지만 술잔에 술을 부었는데 술이 없어지면 어찌 하나?"
"한번 보십시오."
명옥은 술잔에 7,8부쯤 물을 부었다.
"이제는 물이 안없어집니다. 이 술잔을 제가 계영배(戒盈杯)라고 이름을 부쳤습니다."
지외장은 계영배를 만든 우명옥의 재주에 거듭 감탄했다.
그리고 그 계영배는 우명옥의 손에 의해 중앙 높은 신분을 가진 사람에게 진상되었고
그 계영배는 임상옥의 육순잔치 기념품으로 전해졌던 것이다.
"참 아까운 사람을 잃어 버렸소이다.
선생 되시는 지외장의 마음은 다시 말할 것도 없소이다만
계영배의 참뜻을 진즉 알았더라면 내가 계영배를 깨뜨리지 않아도 되었을 것을
우리나라의 명인 한 사람을 내가 죽였소이다.
자, 이것으로 약소하나마 우선생의 대소상이나 섭섭지 않게 지내도록 하시오.
그리고 이 근처의 지내기 어려운 양반들에게 조금 성의를 베풀고 가겠소이다."
당대의 거상 임상옥은 철종 6년(1855) 5월 29일 77세의 고령으로 의주 본제(本第)에서
장서(長逝)하였다.
임상옥의 문집인 가포집에 다음과 같은 만시(輓詩)가 있다.
財上平如水 人中直似衡
"재물에 있어서는 평평하기 물과 같고 사람은 곧기가 저울대와 같도다"
이 이야기는 최인호의 장편소설 '상도'(商道)에도 나온다.
임상옥(林尙沃) : 1779(정조 3)∼1855(철종 6) 조선 말엽 무역상인.
자는 景若. 호는 稼圃, 본관은 전주. 의주 출신.
청나라를 내왕하던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1696년(정조 20)부터 상업에 종사
1810년(순조 10) 이조판서 박종경(朴宗慶)의 정치적 권력을 배경삼아 우리나라 최초로
국경지방에서 향후 5년간 인삼의 무역권을 동료 상인 5명과 함께 독점
홍경래의 난이 일어나자 관군에 협조했다.
1821년 변무사(辨誣使)의 수행원으로 청나라에 갔을 때 북경 상인들의 불매동맹을
교묘한 방법으로 분쇄하고 원가의 수십배로 매각하는 등 막대한 재화를 벌어 치부,
조정에서는 오위장(五衛將)에 임명하고, 완영(完營,全州營內)의 중군(中軍)에 보(補)했으나
사양, 천거(薦擧)를 받고 1832년(순조 32) 곽산군수(郭山郡守)가 되고 1834년 의주(義州)의
수재민을 구제한 공으로 이듬해 구성부사(龜城府使)에 발탁되었으나, 비변사(備邊司)의
논척(論斥)을 받아 사퇴한 후 빈민구제(貧民救濟)와 시주(詩酒)로 여생을 보냈다.
당대의 대부호로 빈민사업에 힘썼으므로 명망이 높아 임곽산(林郭山)이라면 당시
의주뿐 아니라 관서지방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학봉사(鶴峰祠)에 제향. 저서(著書)에 가보집(稼圃集), 적중일기(寂中日記)가 있다.
참고문헌 : 肅宗實錄, 文一平 林尙沃(朝鮮名人傳), 劉敎聖 林尙沃(人物韓國史 Ⅴ),
韓國學大百科事典 第2卷 人物 610∼611쪽, 庾秋崗, 韓國代表野談史話 ⑧,
1973년 12월 10일 재판, 書正出版社 발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