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벌: 남궁부
완성: 한지훈
교무님
예도편 다 읽어 오셨어요?
재미없으셨죠?
읽으시고 감상이나 의문이나 있으면 같이 하는 시간 갖겠습니다.
정인
저는 예도편을 17장을 보다가 제 친구가 생각이 났는데.. 좋지 못한 말을 전하는 것에 대해서 경계를 하는 그런 말씀 같은데, 제친구가 직장상사 때문에 힘들어서 직장상사 뒷담화를 저한테 하는데 제가 입장이 난처하더라고요. 맞장구쳐야하는지...
그래서 저는 친구가 저와 대화를 하며 풀기를 바라는 마음이기는 한데
어떻게 대처를 해야 할지 궁금합니다.
교무님
다른 분들 어떻게 하시겠어요? 공감을 해주겠어요?
영지
라는게 있다고 했습니다.
아까 종법사님께서도 영주에 대해 설명하시며 천지영기 아심정 말씀하셨죠.
다른 사람의 과실을 그 사람을 안보일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계문에는 하지 말라고 하죠.
보통 직장인들은 자기 상사나 동료나 부하 등등 을 ‘안주빨’ 로 삼아서 뒷담화를 하며 풀죠.
보통 범부들은 지적당하면 그 지적한 상대에게 반사하기 바쁘죠. 너는 잘났냐, 등등 같은 마음으로요.
직장에서 중간에 나온 사람들은 보통 또 회사를 욕하거나 직장상사를 욕하면서 나와요.
그런 사람도 점점 시간이 흐르면 객관화 되어요.
아침마당에 보면 부부간에 서로 문제라고 욕을 하는 경우가 있죠. 한쪽은 다른 쪽을 문제라고 하고 다른 쪽은 반대쪽을 문제라고 하고요. 근데 제 3자가 보면 둘 다 문제죠.
원인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상사의 욕이라든지 그런 거 하게 되면 영지가 다 알아요. 다 기운이 통해요.
반대로 좋은 뜻으로 기도를 하면 그게 또 기운이 통해요.
남을 험담하고 하는 것도 기도예요, 나쁜 기도.
그런 나쁜 기도는 나에게도 악연이 되고 피해가 되요. 그것을 모르고 그저 풀고 싶은 마음으로 업을 지으면 안돼요.
하지만 친구가 그렇게 힘든 점을 토로하면 그 친구 얼굴에 대고 ‘업이 쌓인다 ’ 라고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못하죠. 하지만 간접적인 방법으로 법문을 권해준다든지 하는 방법으로 하는 건 어떨까요. 같이 욕하고 그러면 악연을 짓는 것이에요.
반대의 원리도 통해요. a라는 사람을 사귀고 싶으면 b에게 a의 좋은 점을 말하는 것이죠.
가장 기쁜 것이 제 3자를 통해 자신의 칭찬을 듣는 것이고 가장 싫은 것이 제 3자를 통해 자기 욕을 듣는 것이죠.
여러분 진리전에 보이지 않는 좋은 기도를 하면 자기에게 좋은 영향이 오고 보이지 않는 곳에 업을 지으면 자기에게 피해를 받습니다.
내가 마음에 여유가 있고 힘이 있으면 상대가 나를 욕해도 자기가 이해를 할 수 있죠. 자기가 척박한 상황일 때는 그것이 용납이 안 되죠.
또한 그러한 안좋은 인연이 될 것은 오히려 가까운 곳에서 발생할 수 있어요. 가족 친한 친구 등.. 그래서 대종사님이
여리박빙
이라고 하셨죠. 살얼음 걷듯이 하여라. 그리고 ‘경외심’을 가져라 라고 하셨죠. 즉 함부로 대하고 할 때 문제가 생기죠.
더 들어가면 내가 나에게 함부로 할 때예요. 내가 나를 사랑할 때 다른 사람이 나를 사랑하고 내가 나를 함부로 할 때 남이 나를 함부로 하는 것이에요.
사람은 그 자체가 사랑이에요
그 존재자체가 사랑인 것이에요.
자원봉사한 사람도 아마 봉사하면서 기쁠 것이에요.
그것은 자기의 참 나를 사용했기 때문일 것이에요.
자기의 참나가 될 때 인간은 행복한 것이에요.
아까 종법사님께서 ‘정’과 ‘덕’을 얘기하셨죠.
‘정’은 바를 정.
즉 취사를 바르게 하라는 것이에요. 그러면 그것이 덕이 된다는 것이에요.
결과가 덕이라는 것이죠. 일을 바르게 하고 원칙을 지켜나가고 하면 그것이 덕이라는 것이죠.
자기가 어리고 경험이 없고 부족해서 상사의 지적을 당하면 그것을 제 3자에게 욕할 것이 아니라 자기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개선하려 노력해야죠. 그렇지 않으면 다른 회사를 가서도 또 적응 못해요. 외부경계를 바꾸려하지 말고 내 마음을 바꾸려 하세요.
좋게 보려면 좋게 보이고 안 좋게 보려면 안 좋게 보이는 것이 진리에요.
다른 사람의 과실을 말하는 것이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만, 죄업 중에 3 가지 죄업이 있어요.
신. 구 . 의
업을 몸으로 짓든가 입으로 짓든가 생각으로 지어요.
그중에 제일 잘못한지 모르면서도 업이 큰 게 ‘구’이에요. 입.
정치인들이 모두가 대선을 꿈꾸지만 ‘입’ 때문에 실수하죠.
사람에게 기쁨과 슬픔이 ‘소리’에서 생겨나죠. 그래서 음악이 있죠.
그래서 비수가 되는 말이 큰 업이 되는 것이에요.
여러분들이 어떠한 현상을 볼 때, 그 이유가 있을 수 있으니 같이 욕하거나 하지 말고 하시면 안돼요. 자기가 욕심에 가릴수록 안 좋은 소리를 많이 할 수 있어요. 예도편이 그런 것이에요. 말 한마디도 조심히 하고. 공경을 담아라, 이런 내용이에요.
명운
19장에 사람이 처세할 때 3가지가 있다고 하는데, 그 3가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궁금합니다.
교무님
위, 아래, 옆을 말합니다.
‘위’ 는 승상, 아래는 접하, 옆 은 교제입니다.
핵심은 위, 아래, 옆이 나눔은 있지만, 그 근본 되는 체는 평등이라는 것이에요.
즉 없는 가운데 있는 것이에요.
유교를 잘못 해석하는 것이, 근본인 평등을 알지 못하는 것이죠. 즉 남녀 간의 분별이 근본적으로 없는데, 나누기만을 하는 것은 참된 유교가 아니죠.
사람마다 윗사람에게 잘하는 사람 동료에게 잘하는 사람, 아랫사람에게 잘하는 사람이 있어요. 여러분, ‘도’에 맞게 행하셔야 합니다.
함부로 사람을 ‘이용’ 하면 안 됩니다. 대가를 확실하게 지불해야합니다. 사소하게라도 남의 집 놀러갈 때 빈손으로 가면 안 됩니다.
차별이 없는 가운데 차별이 있는 것이 진리죠.
대종사님이 어린 아이들과 사탕을 준다는 약속을 했는데 잊어버렸어요. 그래서 뒤늦게 생각나서 아이들에게 찾아가 사탕을 줬어요. 즉 처처불상 하신 것이죠.
윗사람보다 뒤에서 걷거나 하는 것도 다 예법인 것이에요.
평등이 다가 아니고 구별이 다가 아니에요 적절히 맞춰 나가는 것이에요. 그것이 원불교의 교법과 맞습니다.
대 = 평등
소 = 구별 차별
유무 = 변화
인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