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재호의 한국의 불상] <10> 통일신라불상① 신라상감, 군위삼존석굴과 신라의 구법승
“새끼줄 사다리 딛고 석굴수행 정진한 신라구법승”
용문석굴 중 ‘신라상감’ 남아
신라사람이 만든 석굴로 확인
구법승 수행처였으리라 추정
중국 영향 받은 군위삼존석굴
당나라식으로 파서 공간 확보
신라식으로 불보살상 봉안
모전석탑은 중국식 석탑으로
수당시대 전탑 모방했을 것
신라 스님들의 당(唐)나라 유학은 삼국 통일전쟁이 한창이던 7세기 후반에도 계속되었다. 이들은 대부분 당나라 불교계를 주도하던 현장(玄奘, 600~664)스님의 문하에 들어가 공부하고자 하였다. 현장스님은 인도 날란다(Nalanda, 나란타) 사원의 계현(戒賢)스님에게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을 배우고, 석가모니불의 성지(聖地)를 순례하기 위해 627년에 당나라를 출발하여 서역(西域)을 두루 답사하고 645년에 귀국하였다.
그는 당나라 초기 도교(道敎) 우위 정책으로 인해 위축되었던 불교를 태종(太宗, 626~649 재위)의 후원을 받아 중흥하는데 기여하였다. 지엄(智儼, 602~668)스님에게 화엄을 공부하고 돌아온 의상(義湘, 625~702)스님도 원래는 현장스님의 신유식학(新唯識學)을 배울 목적에서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다.
7세기 후반 당나라 하남성 낙양 용문석굴에 조성된 신라상감.
현장스님에 의해 불교의 입지가 다져지고, 655년에 독실한 불교도인 측천무후(則天武后, 624~705)가 고종(高宗, 649~683)의 황후가 되면서 하남성 낙양의 용문(龍門)석굴에서도 석굴 조성이 재개된다. 원래 북위(北魏) 황실이 주도한 용문석굴은 북위가 멸망하면서 동쪽과 서쪽에 동위(東魏)·북제(北齊), 서위(西魏)·북주(北周)로 갈라져 낙양이 전쟁터로 바뀌면서 석굴 조성이 거의 단절되다시피 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당나라의 7세기 전반까지 계속되었다. 7세기 후반, 당나라에 유학했던 신라 구법승(求法僧)들은 장안(長安, 서안)에서 현장스님의 신유식학과 지엄스님의 화엄학(華嚴學)을 공부하였고, 낙양에서 용문석굴 조성을 실견하였다.
실제 하남성 낙양의 용문석굴에서는 신라 승려에 의해 조성된 신라상감(新羅像龕)이 확인된다. 석굴 입구 위쪽에 당나라 해서체(楷書體)로 ‘新羅像龕(신라상감)’이라고 새겨져 있어서 신라사람이 만든 감실(龕室, 작은 석굴)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신라상감에서는 석굴 이름 외에 어떤 기록도, 한 존의 불상도 남아 있지 않아 조성 배경을 구체적으로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용문석굴의 1300여개 석굴 중에서 그 위치가 7세기 후반의 석굴들이 분포하는 곳이라는 점, 한 사람이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수행 공간이라는 점, 벽면에 남아 있는 불상의 흔적이 삼세불(三世佛, 석가정토를 중심으로 동방 약사정토와 서방 아미타정토의 붓다) 도상이라는 점, 석굴 속 벽면 아래쪽에 낮은 단(壇)을 갖추고 있다는 점 등에서 7세기 후반에 신라 구법승이 그의 수행처로 조성했을 가능성이 높다.
신라상감을 조성했던 승려는 7세기 후반에 장기간 당나라에 유학하면서 용문석굴과 인연이 있고, 석굴 조성에도 관심이 있으며, 불사(佛事)를 할 수 있을 만큼 경제적인 여유도 갖춘 승려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나라에 유학한 많은 신라 승려 중에서도 진골 출신의 의상스님은 유학 기간(660~670)이 석굴 조성 시기와 겹치고, 이후 행적에서 불사를 많이 일으켰다는 점에서 가장 가능성이 높은 승려이다.
비록 그가 용문석굴에 방문했다는 기록은 확인되지 않으나 장안 종남산(終南山) 지상사(至相寺)의 지엄스님 문하에서 사형제(師兄弟)로서 같이 공부했던 법장(法藏, 643~712)스님이 용문석굴에 개인적으로 몇 개의 석굴을 조성한 것으로 보아 의상스님도 그를 통해 석굴 조성에 관심을 가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의상스님이 화엄학을 공부한 학승의 성격을 뛰어넘어 불사에도 관심이 많았다는 것은 그가 귀국 후 676년에 영주 부석사(浮石寺)를 창건한 것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또한 흔적만 남아 있는 신라상감 속 벽면의 불상들이 7세기 후반에 유행한 화엄의 횡삼세불(橫三世佛, 공간적 개념의 삼세불로, 서방 아미타불~ 중앙 석가모니불~ 동방 약사불)로 추정되어 당나라에서 화엄을 공부하던 화엄 승려 의상스님과 관련될 가능성을 높여 준다.
통일신라 7세기 후반에 조성된 군위삼존석굴 전경. 높이 4.25m.
한편 당나라에 유학했던 신라 승려가 귀국 후에 조성한 것으로 보이는 군위삼존석굴(軍威三尊石窟, 일명 제2석굴암)이 있다. 석굴은 신라의 왕경 경주로부터 상당히 떨어진 경상북도 군위의 팔공산(八公山) 자락에 위치하고 있다. 거대한 암벽을 파내어 공간을 만들고 굴속 벽면에 불상을 직접 새기던 용문석굴과 달리 따로 만든 불삼존상을 석굴 속에 봉안하였다.
신라에서 갑자기 석굴이 조성된 배경에는 중국 석굴의 영향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중국 석굴과 같이 불상과 보살상을 직접 벽면에 조각하지 않고, 따로 만들어 봉안한 것은 7세기 중엽에 경주 남산 장창곡 출토 석조미륵불삼존상과 남산 배리(선방사) 석조불삼존상에서도 확인되듯이 벽면에 돋을새김(고부조)으로 불상을 새기는 것보다 두리 새김(환조 丸彫) 기법이 신라 장인에게 익숙했기 때문이다. 결국 군위삼존석굴은 당나라식 석굴 속에 신라식 불상을 봉안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불상은 통견 방식으로 법의를 입고 촉지인(觸地印)을 결한 채 방형 대좌 위에서 가부좌하고 있다. 몸에 비해 큰 머리와 다소 경직된 몸을 갖추고 있으며, 법의는 몸의 굴곡을 따라 유기적으로 표현되었는데, 끝자락이 대좌 윗부분까지 덮고 있다.
좌우 협시보살상은 보관에 화불(化佛, 불좌상)과 정병(淨甁)이 새겨져 있어서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임을 알 수 있다. 보살상들은 상체에 비해 하체가 긴 신체 조형, 자연스럽게 비튼 몸, 유려하게 표현된 법의를 갖추고 있으나 정면 위주의 표현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석굴 정벽에 새겨진 불상의 광배와 달리 보살상의 두광은 따로 만든 후 머리 뒷부분에 결합하였다. 불상과 보살상의 조형은 7세기 중엽의 당나라 불상에서도 보이는 특징이다.
불좌상은 협시보살상이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기 때문에 아미타불이다. 그런데 불상이 결한 촉지인은 원래 보드가야(Bodhgaya, 불타가야)의 보리수(菩提樹) 아래에서 마귀를 항복시키고 깨달음을 이룰 때 지신(地神)에게 이를 증명하게 한 석가모니불의 수인이다. 그래서 이 불상이 석가모니불인지 아니면 아미타불인지에 대한 논란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촉지인을 결한 석가모니불로 보면, 통상적으로 아미타불의 협시보살인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왜 석가모니불의 협시가 되었는지를 설명해야 하고, 협시보살을 근거로 아미타불로 보면, 왜 아미타불이 석가모니불의 수인인 촉지인을 결하고 있는지에 대한 해석이 필요하다. 결국 불상은 촉지인을 한 아미타불이거나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협시로 한 석가모니불 중 하나이다.
군위삼존석굴 불삼존상은 통일신라 7세기 후반에 조성됐다. 불상 2.18m, 관음보살상 1.8m, 대세지보살상 1.9m.
그런데 군위삼존석굴이 조성되던 7세기 후반에 당나라에서는 촉지인 아미타불좌상이 다수 조성되었고, 이 중 신라 구법승들이 한 번쯤 들렀을 법한 용문석굴에서는 660년대와 670년대에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7세기 후반 당나라에서 촉지인 아미타불좌상이 조성된 것은 현장 등 구법승들에 의해 7세기 중엽부터 보드가야 마하보리사(摩訶菩提寺, 대각사)의 정각상, 즉 이제 막 깨달은 붓다의 모습(가부좌한 채 항마촉지인을 결함)이 당나라에서 소개되면서 촉지인 불좌상이 조성되고, 그것이 당시 유행하던 아미타정토신앙과 결합하여 아미타불의 수인으로 차용되었기 때문이다.
한편 군위삼존석굴 앞에는 전돌 모양의 납작한 돌을 쌓아 올려 만든 모전석탑(模塼石塔)이 있다. 이 탑은 7세기 후반에 조성된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 석탑과는 전혀 다른 형식으로, 수(隋)나라의 611년에 조성된 산동성 제남시 신통사(神通寺)의 사문탑(四門塔)과 당나라 7세기에 조성된 전탑(하남성 소림사 탑림(塔林)의 전탑 등)과 많이 닮았다. 즉 이 탑은 신라 구법승들이 당나라의 수도 장안과 낙양으로 갈 때 지나가며 목격했던 산동성과 하남성에 산재된 수·당 시대의 전탑을 모방한 중국식 탑이다.
군위삼존석굴과 모전석탑이 중국과 관련된다는 점은 당나라의 영향과 구법승의 역할을 상상하지 않을 수 없다. 비록 석굴이 왕경 경주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만, 수준 높은 안목을 갖춘 구법승에 의해 조성된 대단한 불사라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다. 석굴은 예불 공간이 좁고 팔공산 정상을 향하고 있어서 산, 나무, 석굴 아래 흐르는 냇물을 보면서 승려가 수행하기에 매우 적합한 공간이었다.
그 승려는 당나라에서 봤던 석굴과 같이 석굴 본연의 기능, 즉 어떠한 방해도 받지 않고 수행에만 전념할 수 있는 왕경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이 석굴 조성에 가장 적합한 곳으로 여겼을 것이다. 100여 년 전, 수월암(水月庵, 군위삼존석굴)의 승려가 새끼줄 사다리를 딛고 석굴에 올라가 하루 일 수행만 했다는 인근 남산리(南山里) 사람들의 전언에서도 이곳이 승려의 수행처였음을 알려 준다. 군위삼존석굴을 조성한 구법승은 당나라에서 했던 석굴 속의 수행을 귀국 후에도 지속하기 위해 이 석굴을 조성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군위삼존석굴 앞 모전석탑 역시 통일신라 7세기 후반에 세워졌으며, 높이 약 3.5m이다.
[불교신문3585호/2020년5월27일자]
배재호 용인대학교 문화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