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8 주일설교
본문: 히 3:1-11
제목: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1.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히3:1)
그리스도인은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이다.
하늘의 부르심이요, 거룩한 형제들이다.
사람의 부르심이 아니요, 인간적인 형제들이 아니다.
사람의 뜻으로나 혈통으로나 육정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나야 한다.
택하시고 부르셔서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받은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다.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다.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는 역사가 있어야 한다.
성경 전체가 진리로 믿어지는 영적인 역사가 있어야 한다.
성령이 거룩하게 하고 씻으면, 죄를 회개하고 코페르니쿠스적인 회심이 따른다.
이제까지 붙들고 살았던 옛 사람의 사고방식과 가치관에 변화가 와야 한다.
이렇게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은 한 형제이다
그리스도가 머리이신 몸의 각 지체를 이루는 형제들이다.
한 교회, 한 공동체의 일원이며, 서로를 사랑하는 형제이고 자매이다.
이러한 성경의 말씀들을 보면서도 아무런 감동도, 의심도, 들지 않는다면,
그러고도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그것은 교리쟁이들이 5백년 동안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교리에 미혹되었기 때문이다.
초대교회와 발도인들은 그렇게 쉽게 공동체의 일원으로 형제자매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쥐나 개나 교회 좀 다니면 세례 주고, 구원의 확신 주고,
같은 교회 교인이면서도 형제란 의식도 자매란 의식도 전혀 없는 것이 오늘의 교회 모습이다.
다 어거스틴과 루터와 칼빈의 교리조문에, 개혁논리에 편리하게 물들었고 안심하고 있는 것이다.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았는가? 거룩한 형제들인가?
진리와 믿음은 다수결이 아니고 소수결이다. 성경의 진리에 맞는가가 기준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시다.
사도와 대제사장은 죽어야 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영원한 사도요 대제사장이시다.
사도는 ‘보내심을 받은 자’의 뜻이다. 대제사장은 믿는 백성의 편에서 하나님께 중보하는 자이다.
사도는 원래 예수님의 12제자를 일컬었지만, 바울이 포함되었고, 맛디아가 포함 되었다.
사도는 주님이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는 자인데,
주님이 사도이신 것은 바로 믿음의 도리를 가르치기 위해 하나님이 직접 보내셨음을 의미한다.
주님은 지기 몸을 드려 한번의 제사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신 대제사장이시다.
믿는 도리의 사도요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해야 한다.
초대교회와 발도인들은 항상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실제 삶으로 살았다.
사람은 깊이 생각한 것을 행동에 옮기고 추구하고 몸과 마음을 바친다.
깊이 생각하는 대상은 궁극적 관심이라 할 수 있고, 항상 추구하고 최종적인 관심사다.
궁극적 관심이 신이라고 한 폴 틸리히의 말은 틀리기도 하고 맞기도 하다.
사람의 궁극적 관심이 그 사람의 신인 것은 맞고,
성경의 하나님을 존재가 아니라 깊이라고 한 것은 전혀 틀렸다.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는 사람은 마음과 뜻과 목숨을 다해 그분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을 지키는 사람이고 그와 같이 내 이웃도 내 자신같이 사랑하는 사람이다.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인 두 계명은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큰 계명이다.
마음과 뜻과 목숨을 다해 다른 것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과는 상관 없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은 악세사리처럼 걸치고만 다니는 것이고,
필요할 때만 하나님을 찾아 아편 주사 한 대 맞고 위로 받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며 궁극적 관심으로 사랑하며 실천한 초대교회와 발도인교회는
그 삶의 모습과 향기에 끌려 사람들이 모여 들었고, 적어도 3년간의 가르침과 변화를 보고서야,
세례를 주고 성찬에 참여케 하고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였다.
2.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굳게 잡으라’(히3:6)
모세는 하나님의 온 집에서 종으로 신실하였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을 맡은 아들로서 그와 같이 하셨다.
그래서 우리가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굳게 잡고 있으면 우리는 그의 집이라고 하신다.
우리의 소망은 하나님의 집에서 아들로서 영원한 복락과 영원한 영광을 누리는 것이다.
이 땅에서 누리는 복락과 영광은 썩어질 것들이고 쉬 없어질 것들이다.
하나님이신 그분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를 속량하시고
성령으로 거룩하게 하신 다음 그 영원한 소망에 이르는 모든 과정을 직접 인도하신다.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홍해의 기적으로 광야로 인도하셨지만
그들은 광야에서 시험하던 날에 거역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증험하고
사십년 동안 하나님의 행사를 보아야만 했다.
성경에 그 출애굽 과정이 얼마나 자세하게 기록되었는가?
그 광야에서의 믿음과 연단을 통해 가나안에 이르는 것인데,
그들은 결코 애굽과 옛 사람을 버리지 못하였다.
광야의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룬다.
이를 알고 믿는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며 고난 중에도 즐거워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할 것이다.
고난의 인내 가운데 연단이 이루어지고, 그 인내는 효모가 발효하듯이 발효하여,
그 매력과 향기에 이끌리어 사람들이 모이며, 교회를 이루고, 공동체를 이루었다.
고난이 인내로, 그 인내가 연단으로 발효하여, 초대교회와 발도인교회는 성장하였고,
13세기에는 폭발적 성장을 이루었고, 그것은 14세기 15세기의 르네상스를 이루게 하였다.
16세기 종교개혁과 5백년에 이르는 개신교 역사는 그와는 영 줄기도 뿌리도 전혀 다른 것이었다.
나도 발도인 역사와 초대교회 역사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대로 속아 목회 26년을 고스란히 바쳤다.
발도인 역사를 쓴 권현익의 책을 보면서도 눈물과 가슴의 통증 없이는 읽지 못하였지만,
최근엔 알랜 크라이더의 초대교회 역사, ‘초기 교회와 인내의 발효’를 읽으면서도,
가슴 절절이 아프고 스며드는 감동과 회한을 어쩌지 못하였다. 입원하면서도 들고 갔다.
오늘날 교회가 얼마나 양의 옷을 입고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들인가를 깨닫게 되었고,
율법조문 교리조문 철학조문으로 영혼들을 오히려 죽이고, 외식하게만 만들고,
‘그 나라의 본 자손들’을 만들어서, 결국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하는지를 비로소 깨달으며, 가슴이 아프기만 했다.
교회를 ‘장사하는 집’, ‘강도의 소굴’로 만들고 있는 것은
유대교회 뿐만이 아니고, 로마교회와 뜩 같이, 개혁교회도 현대교회도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이
너무도 명확하게 보이는 것이다. 초대교회와 발도인교회의 실상과 대비되면서 말이다.
권선교사 책은 발도인 역사만 꼭 보시고, 루터와 칼빈의 교리로 귀속하는 것은 버리시기 바란다.
크라이더의 책은 초대교회 역사를 꼭 보시고, 발도인 역사로 연결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저와 같이 안타까워 하시기 바란다.
3.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히3:8)
“그러므로 내가 이 세대에게 노하여 이르기를 그들이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 내 길을 알지 못하는도다 하였고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그들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셨느니라”(히3:10-11)
이 말씀이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해당되었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사실은 오늘 우리 교회들이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을 알아 차려야만 한다.
광야에서 시험과 고난을 조금만 주면 하나님을 원망하고 걱정하고 뒤돌아서는
오늘날 우리 교회와 교인들에게 하시는 말씀인 것이다.
그리하여, 광야의 고난 없이, 인내 없이, 연단 없이, 믿기만 하면 축복한다고 읊어대는
형통신학 믿음신학 4차원의 영성에 끌리어, 대형교회를 이루게 하고, 안심하고 있다.
그러한 것들이 바로 미혹의 영이고, 다른 교훈, 다른 복음인 것을 알아야만 한다.
그의 음성을 듣고도, 말씀을 통해서든, 설교를 통해서든, 마음에서든,
거역하며 마음을 완고하게 하시지 않는가요?
내 마음대로 상대방이, 환경이, 안 된다고, 원망하고, 불평하고, 눈물짜지는 않는가요?
그러면 그것은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 내 길, 곧 하나님의 길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는 한, 하나님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그들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신다.
내 안식이 뭔가요? 천국의 안식이지요, 이 땅에서도 천국을 누리지 못하는 것이지요.
고난을 인내할 때 연단이 이루어지면서 내 옛 사람, 애굽이, 떠나가면서 변화가 이루어지고,
그 인내의 발효가 열매를 맺으며, 내 사는 삶의 모습과 행태가 눈에 띄게 달라지며,
그 매력과 향기를 본 이웃들이 부러워하고 닮고 싶어 모인 것이 교회인 것을 깨닫자.
전도 전도 그만 노래하고, 자기도 못 살면서 사람 끌어다가 배나 지옥 자식이나 만들고,
자기도 천국 못 들어가면서 남도 못들어가게 문을 막아서고 있는 망나니 짓을 그만 하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일만 스승들, 복음으로 생명을 낳는 아버지 스승과는 천양지차인
그들에게 그만 속자. 미혹의 영들에게 그만 속자.
진정으로 온 마음을 다해 뜻을 다해 목숨을 다해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하자.
다른 것에 깊이 쏟았던 생각들을 정리하고 버리자.
참된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굳게 잡고 흔들리지 말자.
우리에게 주신 성경도 사명도 소망의 확신과 자랑으로 끝까지 굳게 잡자.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자.
우리의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을 것이다.
어떤 고난 환경에도 처할 줄 알며 자족하기를 배우자.
궁핍에도 풍부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고난의 과정을 통해 배우자.
그리하면 주의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날이 찾아올 것이다.
그의 음성을 듣고도 마음을 이제 더 이상 완고하게 하지 말자.
주의 길을 알지 못하고 자기 길만을 고집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자.
하나님 이기는 장사 없고, 고난의 인내 없이, 연단 없이, 이루어지는 소망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