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6:1-15절까지는 유월절 무렵에 예수님께서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시고 12 광주리에 차고 남았더라는 이적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6:14절을 보면 사람들이 예수가 표적을 행하는 것을 보고 말하기를 이 사람이 진짜로 이 세상에 오기로 한 선지자라고 판단했습니다. 이 말은 신명기 18:15절에 근거한 것로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모세와 같은 선지자를 약속했습니다. 그래서 신약시대의 유대 종말론에 의하면 메시아가 모세와 같은 선지자로서 모세가 행한 출애굽의 구원을 되풀이할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종말의 구원을 제2의 출애굽으로 보았습니다. 민족의 해방, 즉 모든 이방인을 굴복시키고 이스라엘의 주권을 되찾을 뿐 아니라 이스라엘을 풍성한 자유와 풍요로움을 가져다주는 제2의 출애굽을 이룰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종말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 메시아는 모세가 행하였던 모든 이적을 되풀이 할 것으로 보았습니다. 더더구나 예수님이 오병이어 사건을 언제 행하셨습니까? 유월절에 했습니다. 유월절은 출애굽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이날에 예수가 오천 명 군중을 먹이니까 더더욱 그런 생각을 할 만했습니다. 25절을 보면 예수님과 제자들이 바다 건너편으로 가서 보이지 않자, 급구 예수님을 찾아와 다시 붙잡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에게 “랍비여 언제 여기 오셨나이까?”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26절~27절에 무엇이라고 대답합니까? 즉, “내가 아멘 아멘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라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자니라”라고 대답합니다.
예수님은 무리의 요구를 아셨습니다. 그들의 목마름과 갈급함을 아셨습니다. 그들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경험한 후 또 단순히 떡을 먹고 싶어서 주님을 찾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삼아서 그들이 기대했던 정치적 독립을 이루어 내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문맥 속에서 그것을 썩을 양식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질문하게 됩니다. 왜 예수님은 이스라엘 자기 국가의 정치적인 독립을 염원하는 것을 “썩을 양식”이라고 표현하였을까요? 예수님은 그 일이 악한 일이기 때문에 혹은 가치가 없는 일이기 때문에 “썩을 양식”이라고 표현한 것은 아닙니다.
떡은 무엇입니까? 떡의 기능은 무엇입니까? 생명입니다. 떡은 살기 위한 것입니다. 떡의 상징성은 생명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떡을 먹이게 했다는 사건은 예수가 생명을 가져다주시는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그것이 육신적인 충분한 양식을 가져다주는, 제2의 출애굽을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풍요로움을 가져다주는 그런 구원자가 아니라 그보다 더 훨씬 깊고 근본적인 구원자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27절에서 대조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썩을 떡입니다. 이것은 썩어져 가는 생명만 가져다줄 수 있는 떡입니다. 다른 하나는 영생하도록 있는 떡입니다. 영생하도록 있는 떡은 영원히 존재하는 영원히 거하는 떡인데, 그 떡은 영생을 가져다주는 떡입니다.
예수님을 쫓아온 무리가 추구하는 것은 썩을 떡입니다. 왜 만나가 썩어져 가는 떡입니까? 만나를 먹은 사람은 다 죽었고, 만나는 하루 지나면 더 썩어 갑니다. 영원히 남는 떡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주는 것은 영생하도록 있는 떡입니다. 51절을 보면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오늘 물질주의가 팽배한 세상에서 많은 사람은 예수님에게 자꾸 떡을 가져다주고 왕이 되어 달라고 요구합니다. 예수님 보고 제2의 출애굽을 하는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되라고 요구합니다. 우리의 왕이 되어서 우리의 육체적인 목마름과 배고픔 그리고 억눌림으로부터 해방의 풍요로움을 가져다 달라고 요구합니다.
영원히 남는 떡은 무엇입니까? 35절을 보면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영원히 남는 떡입니다.
누가 하늘로부터 내려온 떡입니까? 51절을 보면 예수님이 하늘로부터 내려온 산 떡입니다. 50절을 보면 누구든지 그로부터 이 떡을 먹는 자는 죽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삽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살과 피를 날마다 먹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살은 참된 양식이요 예수님의 피는 참된 음료입니다. 예수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자는 예수님 안에 거하고, 우리도 예수님 안에 거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예수님과의 연합, 친밀한 교제를 통하여 영생함을 누리는 줄 믿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영생”은 예수님과의 만남, 풍성한 교제를 의미합니다. “영생을 추구한 삶”은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추구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우리가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라고 할 때,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성도들이 직장에서 일하는 것은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는 것이고, 목사가 사역하는 것은 영원한 양식을 위해서 일하는 것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도리어 성도들이 직장에서 가정에서 일하는 것도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 때문에 사람들을 섬기는 제자의 모습에서 살아간다면 영원한 양식을 위한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무엇을 하느냐가 아닙니다. 내가 무엇을 위해서 혹은 무엇 때문에 그 일을 하느냐에 따라 썩을 양식이 될 수도 있고 영원한 양식이 될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