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처럼의 일년 산행 후기
“함께 가는 길, 그것이 목표입니다.”
세상에서 나를 아는 사람은 드물다. 물론 명함으로 아는 사람이야 왜 없겠냐마는 내 속을 아는 사람이 그리 흔치 않다는 것이다. 학교를 4년이나 같이 다녔어도 나 자신을 드러내지는 못했던 것 같다. 아니 드러내기를 꺼려하면서 이리저리 도망 다녔던 기억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늘 외로운 사람이었고, 또 그 외로움을 즐기는 듯 했다. 지금도 크게 다를 바가 없는 것 같다. 나는 이 카페가 만들어졌어도 한 번도 내 글을 올려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언젠가 정혁현 목사가 나를 약 올려서 안 쓰고는 못 배기게 해서 할 수 없이 나의 배꼽 이야기를 쓰긴 썼다만 한순간에 공중분해 되어 ‘역시 나는 안돼...’를 읊조리고 말았다. 그리고 다시 반 년 이상이 지났구나. 이제 그 빚을 조금이나마 갚을 요량으로 일 년 산행 개근자로서 산행 후기를 작성해 본다.
작년 4월 1일. 어릴 때 소풍 갈 때의 그 설레임으로 집을 나섰다. 다른 점은 조금 뻔뻔스러워졌다는 점이다. 아무 것도 준비하지 않았다. 밥도 물도... 필요하면 산 밑에서 살 요량으로 그냥 운동화신고 조금 가벼운 복장으로 나섰다. 내심 비도 올 것이고 보나마나 그 유명한 3부 능선을 넘지 못하리라...고 생각했다. (흥겸이랑 산행을 했던 사람들의 공통된 증언에 의하면 한번도 3부 능선을 넘어보지 못하고 파전에 동동주로 끝을 봤다고 한다.) 불량한 복장은 수많은 산행 인파 속에서 단연 돋보이는 패션이자 자못 예의에 어긋나는 듯이 보였다. 이윽고 헉헉 대며 올라가는 길에서 깨달았다. 앞에 가는 저 김종우는 대장이랍시고 끝까지 우리를 계획했던 대로 끌고 갈 작정이며 조금도 흔들리지 않을 것임을 알아차렸다. 내가 원래 한 눈치 하지 않는가. 또 다른 복장불량 태도불량 파바로티를 꼬셔야 했다. 그리고 자유인 이성호도...힘들어보이던 수선화 여사도... 비 온다고 하는 명분도 있겠다, 잘 하면 중도에 내려가 동동주에 파전으로 차가워진 몸과 마음을 덥힐 수 있다고 확신했다. 아뿔사... 하지만 꿈쩍 않는 산행대장의 눈빛이 녹녹치 않고, 이미 훨씬 앞질러가는 소위 ‘진정한 산악인’ 박문수가 내 의견에 콧방귀도 낄 것 같지 않았다. 할 수 없다. 파바로티는 굴렀다고 했나? 나는 기었다. 벅벅... 복장 불량의 대가이다. 그리고 그동안 건강관리 잘 못해서 무릎 관절이 아픈 것을 어디에 하소연 할 수도 없었다. 결국 예정했던 그 길 다 가지 못하고 약간 잘라 내려가 마신 처음처럼이 이처럼 달콤할 수가... 뇌 세척을 했나? 조금 전까지 힘들었고 원망스러웠던 마음이 훌러덩 추억으로 바뀌려고 한다. 처음 같이 갔던 친구들이여, 그 때 힘들었지만 얼마나 진한 우정을 나누었는가? 역시 첫 산행의 대미를 장식한 것은 장효수 목사였다. 미리 음식점에 닭도리탕(맞나?) 예약해 놓은 것이나, 산에서 찍은 사진 속으로 슬쩍 끼어들은 것이나... 함께 가고픈 마음과 남을 배려하는 마음, 의리, 진하게 느낄 수 있었다. 지금도 이역만리 미국에서 얼마나 서울의 봄을 그리워할꼬나...
이런 식으로 가다간 일 년 산행기가 소설이 될 판이라 사계절 요약 판으로 갈 수밖에 없다.
봄철 산행은 아쉽지만 4월 한번으로 마치고 곧바로 유월로 가게 됬구나. 금년에는 진달래 철쭉 흐드러지게 핀 어느 능선에서 사진 한 번 멋지게 박자 친구들아.
여름철, 나는 아직 회개하지 않았다. 회개 할 마음이 없었다. 아직도 운동화에 면 티셔츠이다. 생각해 보면 나는 나에게 별로 투자해 본 적이 없었다. 2남 3녀 중 막내로 자란 어릴 때 한 번도 나는 내 것을 가져보지 못했다. 다 물려받은 것이다. 그러고 보니 제비꽃? 뭐라 하는 친구는 속옷도 누나 것을 입었다고 하는 얼토당토 않은 소리를 하는 것 같다. 나는 그 정도는 아니었으나 아무튼 초딩 때 교실 뒤 칠판에 한 번도 그림을 붙여 본 적이 없다. 크레파스 색깔이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 고등학교 때도 겨우 교복에 교련복 체육복이 전부였다. 대학교 때에도 옷을 사서 입어 본 기억이 별로 없다. 지금도 마누라가 사주지 않으면 내가 먼저 뭘 사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걸 알았는지... ‘특수 평신도’ 박문수(내가 알기로는 여러 천주교회에서 그가 나타나는 것을 기피한다는 정보가 있다.)가 나한테 등산 티셔츠를 선물하지 않는가... 아... 감격. 그러나 그 옷이 의미하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 때 이후로 하나 둘씩 사 입고, 신는 바람에 이제는 절대 꿀리지 않는 복장으로 산행에 나선다는 사실. 그리고 한 번도 산행 모임에 빠지질 않게 되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 덕분에 내가 타인들을 산행으로 인도하는 전도자가 되었다는 사실.(아직 전도에 성공해 본 적은 없으나 그래도 가을철에 대학교회 청년들 데리고 간 적이 있다.)
북한산 어느 봉우리에서 저 북쪽으로 바라다보는 경치는 참으로 장대했다. 첩첩이 끝없이 펼쳐지는 능선 능선들... 김신조가 어떻게 청와대 코앞에까지 달려 왔는지를 실감하는 듯 했다. 파도가 밀려오듯이 산이 밀려오는 듯 했다. 사람들이 이래서 북한산을 찾는구나...
나는 북한산 자락에서 자랐다. 정릉에서 무려 30년을 그 곳에서 살았다. 그래서 북한산쯤이야 뒷산으로 취급하는 오만함 또는 무지 또는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말없이 우뚝 선 산 앞에서 나는 진심으로 부끄러움을 알게 되었다. 우물 안 개구리였던 것을 반성하는 한 편 어머니에 대한 새삼스런 존경심 때문이었다.
북한산 청수장 계곡은 어머니의 인생과 한과 눈물이 흘러내리는 곳이다. 지금도 그 계곡을 생각만 해도 가슴이 아린다. 이름도 청수계곡. 투명하고 차가운 그 계곡 옥수는 우리 어머니의 한이 섞인 눈물이었던 것이다. 나에게는... 지금도 그렇다.
초등학교 처음 들어갔을 때 나는 아버지가 없다는 사실을 객관적으로 깨달았다. 그 동안 아버지의 얼굴을 본 적도 없기 때문에 아예 존재 자체를 모르고 살았던 까닭이었던 것 같다. 아버지는 내가 간난 아기 때 다른 곳으로 갔다. 때문에 어머니는 30대 중반 때부터 5남매의 생존과 장래를 책임 질 수밖에 없었다. 청수장으로 달려가 행상을 한 것이다. 지금도 아련히 기억나는 장면은 돗자리에 간식들, 술, 음료수 등등을 놓고 나무 그늘에 앉아 손님을 기다리는 모습이다. 어린 나는 가끔 그곳에 갔다. 버스로 네 정거장 쯤 가는 길을 나는 맨발로 걸었다. 그 땐 정릉 길이 처음 포장된 길이었는데, 이런 신작로에서는 맨발로 다녀야 한다는 공감대가 우리 또래 아이들 사이에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엄마한테 과자 얻어먹는 것이 얼마나 꿀맛이었는지... 나는 그게 좋았는데 철딱서니 없는 나를 보며 엄마의 마음은 얼마나 슬펐을까... 하지만 가끔은 엄청난 일을 겪기도 했다. 노점 단속이다. 구청 직원들 경찰들이 몽땅 쓸어가기도 하고 어머니는 구류를 사시기도 했다.
이런 사정들을 알고부터 일찍부터 나는 돈을 달라고 손을 내밀 수가 없었다. 학교에서 대충 매로 해결하기도 했는데 결국에는 중학교 때 등록금 못 내서 복도에 벌서는 것을 본 영어 선생은 나를 불량학생을 찍어놓고 껀 수 잡혔을 때 정말 모질게 때렸다. 따귀를 40분간 맞았으니까... 그래서 내가 영어를 못하게 됬나??? 나는 이를 악 물었었고 아무에게도 그것을 말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가 없었다.
산행대장님~ 내가 왜 정릉계곡을 부르짖는지 이제 이해가 되실까요?
어쩌다 보니 배꼽이야기가 자연스레 튀어나와 또 길어졌구나.
가을이 무르익었을 때가 아마도 내가 결심을 했던 때였던 것 같다. 이제 나한테 산행은 운명이라고... 아니 이제 산에 언제가나... 하면서 기다리는 입장이 되었다. 바위 길을 다니는 릿지도 조금씩 자신 있게 할 수 있었다. 착착 달라붙는 신발 덕도 컸지만 다리에 근육이 생겼는지 무릎 관절이 덜 아픈 까닭도 있다. 처음 봄에는 계단 내려 갈 때마다 공포에 떨어야 했던 것에 비하면 정말 기적의 치유 은사이다. 글루코사민이 집에 한통 고스란히 있는데 먹어야 할 필요를 느끼지 않게 된 것이다.
낙엽 질 무렵 우리는 처음 4월에 갔던 길을 갔다. 족두리봉-향로봉-비봉... 하지만 우회했던 길이 아니라 이젠 정면 승부. 너무 위험한 길은 우회했고 향로봉과 비봉은 넘었다. 지금도 기억한다. 달달달 떨면서 숨가쁘게 정상으로 올라갔던 길을... 그 때 사진들을 참고하시라... ‘나 떨고 있니?’ 그 길을 지난 토요일 3월 산행에 거의 비슷하게 넘었다. 멤버가 줄어든 형편에 실망하던 산행대장은 1주년을 기념 삼아 쫑 내자고 엄포다. 올라가기 전부터 이미 우리는 한 통(병이 아니라...)을 비웠다. 어느새 나는 ‘아니다!’라고 말하는 입장이 되었다. 그래도 비봉은 넘어야지... 크~~ “나 변화되었어요!” 어느 간증에서나 들을 법한 이야기가 나한테서 나오다니... 친구들이여 기억하시라. 기적의 치유 은사 축복을....
겨울철 산행은 내가 산에 맛을 쬐끔 들이면서 다녔던 것 같다. 강화도 마니산, 석모도의 혜명산, 고대산, 관악산... 그 때마다 맛이 달랐고 또 재미도 달랐다. 느끼는 점도 많았고 변함없이 배울 것이 많았다. 하지만 나는 확신한다. 산은 정복할 수도 없고, 정복해서도 안 되는 것임을.. 그리고 우리 함께 가는 길 그 자체가 목표인 것임을... 산행을 통해 무엇을 이루려고 해서도 안 된다는 것임을... 더불어 살아서 뭐하려고 하느냐를 묻는 어리석음 대신에 더불어 산다는 것 자체가 목표임을 나는 확신하게 되었다. 그리고 산 앞에서 겸손해야 한다는 사실도 이제는 조금씩 깨달아 가는 것 같다.
그동안 산행을 위해 수고한 김종우 가온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언젠가 몰래 나 혼자 산에 간 적이 있다. 하지만 길을 헤매고 엉뚱한 곳으로 내려가게 되면서 누군가의 뒤를 따라가는 것은 정말 쉽고, 앞 서 가는 것의 어려움과 책임이 얼마나 무거운 것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함께 했던 모든 친구들, 이역만리에서 마음으로 참여한 친구들께도 감사를 드린다. 그대들이 없었으면 나는 그대로 나만의 세계 속에 외롭게 갇혀있었을 것이다.
친구들에게 다시 한 번 부탁한다. 산행 일 주년을 맞이하는 4월 산행에는 가능한 모든 친구들이 함께 길을 가게 되기를 바란다.
첫댓글 처음처럼....... 잔잔한 감동이란 말을 이럴 때 써야 한다. 그래 솔직히 나는 처음처럼을 너무 몰랐다. 그 진지함, 저 눈빛이 어글어글한 까닭은 가슴에 어떤 노을을 품고 있기 때문이라고 짐작만 했었다. 역시 그랬었구나. 상처와 컴플랙스를 극복한 자가 가질 수 있는 넉넉한 웃음. 역시 그랬었구나. 상처 많은 자를 껴안을 수 있는 젖은 눈빛......... 궁금하기만 했었다. 비봉 가는 길에 청수장 애기를 했었지. 왜 갑자기 청수장 얘기를 하는지 몰랐었다. 그냥 러브 호텔 이름인 줄 알았다. '청수장'에 어머니의 삶이 녹아 있었구나. 처음처럼....... 이 글 소중히 마음 속에 간직할께. 자랑스러운 친구.
처음처럼, 조용히 찾아와 클릭하는 사람만이 볼 수 있도록 [산행게시판]에 글 올렸을 줄 믿는다. 하지만 이런 조용한 울림은 모두 공유하고 싶구나. 특히 더 많은 사람이 산행에 함께 했으면 하는 마지막 메시자가 있어서, 자유게시판으로 옮겨 놓는다. 나도 이번주 말쯤 후기를 올리련다. 다시 자랑스러운 친구. 나에게 사랑의 빚을 준 친구.....
상처라... 팔 다리에 멍들고 찢기면 상처. 온몸에 큰 중상입거나 암에 걸리면? 그건 상처라 하지 않는다. 뭘까? 운명인가??? 음~~이렇게 톱으로 올려놓으니 쑥스럽구먼. 아무튼 그대 덕분에 무진장 즐거운 산행이었어.
항상 그 웃음이 참 넉넉하지.. 처음처럼! 잘 읽었네. 고맙고. 종우한테도 고맙네
휴~ 그 웃음 땜에 군대 처음 갔을 때 무진장 맞았다. 실실 쪼갠다고...ㅎㅎ 지금 지난 생각하니 또 실실 웃게된다.
아아! 감동이다.. 이런 산행기를 매월 산행후에 올려주었음..한 두 명만 산행을 하더라도 큰 힘이 되었을 걸..하지만 이제라도 행복하다..이젠 다신 산들모 산행을 쫑내겠다는 말..절대로 장난으로라도 하지 않을께..자네의 1년간 개근을 보면서 자네의 산행의 내공이 쌓임을 보면서 참으로 기특하고 감동이고 자랑스럽다네..앞으로도 계속되는 산행으로 우리의 우정을 쭈욱 이어 가세나..정말 고맙네..마음속 저 깊은 곳에서 울컥하는 뭐가 올라옴을 느낀다네..감사..또 감사..
오빠~ 지선이가 그날을 얼마나 기다리는데 쫑을내요...
너무 늦어 미안하이. 가온 아니면 이런 산행 꿈이라도 꾸었을까?
장신부님 만나뵌 지는 꽤 된 것 같은데 속마음을 들여다 보게 된 건 처음인 거 같네요. 글을 참 잘 쓰시는군요. 왜 숨기고 계셨는지... 산이 사람을 부르고 사람이 또 사람을 부르고 그러다 보면 뭔가 각질이 벗어지면서 부드러운 속살이 올라오는 것 같아요. 오히려 상처난 마음에는 당찬 근육이 생기고 말이죠. 산행 1주년 때는 꼭 참석해 보리라고, 이 아줌마 주먹을 꽉 쥐어 봅니다. 산행대장 가온님도 참 대단하십니다. 쉽게 흉내낼 수 없는 능력이죠. ^^
4월 산행에 뵙게 되겠지요? 그 주먹 펴지 마시길...
사진을 통하여 산을 따라다녔기 때문에 마치 내가 그 산들을 다녀온 것 같은 느낌을 항상 가지고 있지. 그런데 오늘 장신부의 글과 마음을 읽으며 내 마음도 따라다닌 것 같은 생각이 드네. 함께 산을 다닐 수 있다는 것도 행복이고 하나님의 은총이야.
장 목사의 그림자 아니 그 안테나가 늘 우리를 따라다니는 것 같애.
허허 그러니까니 신부님을 두려움에서 해방 시킨거이 산신령이셨구만요이. 가온선생이 무당이셨고요..나를 아는 사람이 드믄거야 지당허신 말씀이지요... 처음처럼님은 처음을 아시나요? 달동네에선 흔한 넋두리도 여그선 감동을 주네요. 보통사람덜이 부그럽게 여기는 삶을 사랑하지 못해서 환장허던 사람이 있었지요. 참아름다웠던......
영방 형님! 처음을 어찌 알겠나이까? 바람처럼 왔다가 바람처럼 사라져 가는 것을... 내 십팔번이 '나그네 설음'인 것을 아시나요?
아, 그게 없다. 없는 게 아니라 지금 못찾겠다. 2학년 때인가? 기용이가 다른 친구들하고 구로동에서 붙잡혀갔을 때, 내가 홍일이랑 부리나케 정릉 집을 찾아가 온갖 '불온문서'를 치웠다가 나중에 돌려 줬는데, 그 가운데 하나 노트는 내게 남았었다. 김지하의 담시 등 온갖 메모가 적혀 있는 새총의 흔적... 그거 분명히 우리 집에 있는데, 발견하면 찹쌀떡 장사, 혁명가, 시인, 로맨티스트, 노래꾼 ... 온갖 면모의 장기용의 배꼽이 만천하에 드러나는데... 내 꼭 찾아 공개하리라.ㅎㅎㅎ
그건 배꼽이 아니라 내장이다. 당장 회수해야겠다. 언제가서 압수 수색하나...참 징하다. 언제적인데 그런 걸 아직도 갖고 있단 말인가?
평소 진정한 산악인을 자처하던 나는 산에 가는 것이 두려워지는데, 장 신부는 경지에 이르고 있네. 요즘 산이 부르는데 그 부름을 거역하면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드네. 다시 산위에서 인생을 신앙을 인간을 배워야지.
나는 진정한 산책인. 하늘을 두려워 하듯 산도, 강도 다 두려운 일이라.. 더군다나 인간도, 인생도... 4월엔 어사 출두 할꺼지?
그럼 출두해야지.
호응이 적다고 일갈하는 가온에게 산에서 약속했다. 내가 한번 쓰겠노라고. 하지만 주일, 월,화요일 바쁜 일정 지내고보니 언제 산에 갔나 싶어 할 수없이 뒷산에 올라가 그 날, 그리고 일년을 떠올렸다. 쓰다보니 너무 길어지는 것 같아 지난 겨울 이야기와 이번 산행기가 지나치게 축약된 느낌이라 아쉬움이... 다음에 필이 당기면 올리도록 하겠음.
지난 1년 심산(心山)을 등산했군요 , 산의 산책자 마음의 산악인 , 처음처럼님.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늘 좋은 웃음을 보여주셔서 감사합니다^^
"함께 가자, 우리 이길을" ......말만 마시고 따라오기로 한 것 빠지지 말고 오시길.......굳세어라 ,어떤 길~
그래, 잔잔한 감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