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인기가 있고, 한번 봐 볼만한 드라마 "무인시대"의 줄거리를 요약하였으니 시간이 없으신 분은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제목 : Re 줄거리
태조 왕건의 공신들은 거의 대부분 군인, 무신이다. 왕건 또한 무반출신이었으므로 왕건이 즉위하던 고려초의 정권은 군사정권이다.
난세엔 문신보단 무신이 우대받는건 당연하다.
본시 대부분의 태조의 공신들은 신분이 미천한 출신이었다.
(예외도 있다. 박술희 같은 경우는 명문가문의 후예로
말단병사부터 시작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1.2등공신이 된 무신들은 스스로 가병을 키우고 토지를 소유하는등
스스로 권력화하였다. 이들은 점점 새로운 명문가문이 되어 귀족층이 되었다.
이들의 자제들이 대를 이어 조정에 출사함으로써 이들은 더이상
무반의 가문이 아닌 문반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또한 제국의 기틀이 잡힌 광종의 집권기에 더욱더 문신에 의한
정권장악이 노골화된다. 광종은 무신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아버지인 왕건이 비록 그들의 힘에 의해 통일을 할수있었지만 그들이 쓸모없어진 지금의 그들은
두통거리였다. 강력한 황권강화를 추진하던 광종에겐 힘을 믿고 거들먹거리는
말안듣는 무반은 눈에 가시였다. 광종은 과거제를 실시하여 점점 조정을 새로운 인물. 문신들로 채우게 되자 더이상 무신이 설 자리가 없었다.
이후 무신들의 힘은 점점 없어지게 되었고. 명분 무반의 가문은 문신집단에 합류하게 되어 고려초의 공신들의 후예는 대부분 문신의 가문이 된다.
한예가 훗날 외적과의 전쟁에 공을 크게 세운 강감찬, 윤관장군도
태조의 공신의 후예이다. 강감찬은 강공진장군의 후예이며. 윤관장군은 윤신달 장군의 후예이다. 이들 장군(강감찬,윤관)도 실상은 무신이 아니라 문신이다.
무신은 3품이상 진급할수가 없었다. 즉 군의 최고 수뇌부는 문신이 맡았던 것이다.
이런 구조속에 명분후예들은 점점 무반과는 거리를 두게 된다.
당시에는 대를 이어 조정에 출사하는 제도(음서)가 있었는데 문신은
대부분 명분가의 후예들이었다.
반면 무신들은 출신이 다양했다. 명문후예만이 문신이 될수 있었던 바에
무신은 등용의 문이 넓었다. 외적과의 전쟁을 통해 능력만 있다면 누구나 무반에 오를수 있었다. 이런 출신상의 차이때문에 더욱더 무신에 대한 차별이 심해진다. 명문후예인 문신들의 눈에 보면 천민출신인 무반이 아주 가짠게 보였을것이다. 이는 바로 다가올 백년간의 무신정권의 원인을 제공한것이다.
무신정변의 지도자격인 정중부는 1106년(예종2)에 황해도 해주에서 천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기골이 장대하고 무예가 뛰어났다. 이어 서울인 개경으로 올라온 정중부는 인종 때 황제를 호위하는 직책을 맡았다.
인종의 신임을 받아 가까이에서 황제를 호위하던 정중부는 나이 어린 내시 김돈중(김부식의 아들)에게 촛불로 수염이 태워지는 등의 모욕을 받았다. 이에 화가 난 정중부는 김돈중을 때려눕혀 김부식의 분노를 샀으나, 황제의 만류로 화를 면했다. 그러나 이 사건을 계기로 무신과 문신간의 대립이 크게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인종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된 의종은 나라일은 돌보지 않고 문신들과 어울려 노는 데만 정신이 팔려 있었다.
그러다 보니 나라일은 몇몇 문신들에 의해 좌우되었다. 황제가 베푼 잔치의 호위를 맡은 무신들은 걸핏하면 문신들에게 모욕을 당했고, 끼니마저 떼우지 못할 때가 많았다. 이에 무신들은 더욱 불만을 품게 되었다
이중 하급장교인 이고, 이의방등은 쿠테타를 모의하게 된다. 이들의 직책은 산원이라는 종8품의 하급장교로써 요즘계급으로 따지면 중대장격인 대위쯤의 벼슬에 있었다.
젊은 이들은 문신의 횡포에 분개하고 세상을 뒤집어 엎으려는 야망이 있었다.
이고, 이의방은 조원정.이영진.석린등 천민출신 하급장교들을 포섭하여 하급군인들을 선동하게 하였고
우선 청주에 주둔중인 명망높은 장군 우학유를 찾아가 군대를 일으킬것을 권유했다.
그러나 우학유의 아버지 우방재가 말하길
"우리들 무관이 문관에게 억울함을 당한지 오래다. 어찌 분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문관을 없애는 것은 썩은 나무를 꺾는 것과 같이 쉬우나 만약 문관이 해를 보면 화가 곧 우리들에게 미칠 것이니 너는 삼가라." 이말을 듣고 완곡히 이의방의 청을 거절하였다
이에 1170년 4월에 화평제에서 정중부를 찾아가 쿠테타의 지도자로 추대하고 세상을 뒤엎을려는 뜻을 내비쳤다.
당시 정중부는 응양군 상장군이란 종3품의 벼슬로써 지금으로 따지면 육군 참모총장격이었다. 그러나 나름대로 특권을 누리던 그로썬 급격한 사회변동을 원하지 않았다. 정중부는 이고. 이의방의 울분을 이해한다고 하면서도 아직 쿠테타를 일으키기엔 시기상조라 하여 이들을 만류했다.
이고.이의방이 정중부를 포섭할려는 이유는 단순히 정중부가 군의 참모총장이라는 이유뿐이 아니었다.
정중부는 무인의 전형적인 인물로 전장병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고 있었다. 정중부는 용모부터가 무인다웠는데 키가 7척이었고 이마가 넓었으며 수염은 마치 관우를 연상시키듯 긴수염을 자랑했다. 또한 눈이 호랑이 눈과 같이 각져서 무인들조차도 정중부의 눈과 마주치지 못할정도였다.
정중부의 소심함에 크게 실망한 이고.이의방은 숙소로 돌아가 자체적인 계획을 세웠다.
1170년 8월 30일에 의종이 보현원이란 절에서 문신들을 위한 연회를 베풀기위해 행차하던중 오문에 이르렀다. 오문에서 잠시 쉬어가기로 한 의종은 문신들과 더불어 술잔을 기울였다. 술이 한참 들어가자 의종이 말하길
"장하도다. 이곳이여, 가히 병법을 연습할 만한 곳이로다."라 하고, 무신에게 명하여 오병수박희를 하게 하였다.
힘깨나 쓰는 군졸이 앞을 다퉈 겨루니 그것이 볼만했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이는 이의민과 두경승이었다.
이의민은 혼자서 거뜬히 서넛의 군졸을 내동댕이 쳤으며 두경승 또한
당할자가 없었다.
이어코 결승까지 올라온 이는 의종이 눈여겨 본 이의민과 수박의 대가 두경승이었다.이의민과 두경승이 노려보며 이의민이 먼저 기를 제압하려 정자의 기둥을 주먹으로 큰소리를 내며 치니 써까래가 움직이며 정자가 요동쳤다.이게 질세라 두경승 또한 주먹으로 정자의 벽을 치니 벽에 주먹이 파묻혔다.
이때 대장군 이소응이 의종을 호위하고 있었는데 젊은 문신 한뢰라는 자가 말하길 대장군 이소응과 이의민을 한판 붙여보는게 어떻느냐고 간청하자 황제는 웃으며 이를 허락했다. 이소응은 환갑이 넘은 노장군으로써 장병들의 존경을 받고 있었다. 결국 웃낀 (현제로 따지면 별4개짜리 장군과 이등병과 쌈붙이는격) 한판승부가 벌어지게 되었는데 근력이 딸린 이소응이 패하자 문신들은 크게 박장대소하며 비웃었다.
취한 한뢰가 (한뢰는 명문세가의 아들로써 20대 초반의 새파란 문신) 이소응에게 다가가 갑자기 뺨을 때리며 '네이놈 일개 병졸한테도 쓰러지는 네까짓게 무슨 대장군이란 말이냐. 녹을 축내는 좀도둑이구나"하며 놀려댔다. 이에 황제와 문신들이 박장대소하며 "저 이소응의 꼴을 봐라. 태평성대가 계속되니 무신놈들은 놀고먹어 비계살만 껴서 힘을 못 쓰는구나."
놀려댔다. 황제까지 이소응을 비웃자 한뢰는 이소응을 망신주기 위해 단아래로 밀쳐버렸다. 이어 문신 임종식과 이복기도 덩달아 손뼉을 치며 "이놈 그러고도 네가 대장군이란 말이냐?" 손가락질을 했다
이를 본 정중부는 달려가 한뇌의 멱살을 잡고 한 대 갈겼다.
"네 이놈 이소응 장군은 아무리 무관이지만 3품 대장 아닌가. 너 따위 6품 짜리 젊은 놈이 손찌검을 하다니"
정중부의 태도는 당당했다. 한뢰는 아무리 젊지만 문신이므로 정중부를 당할 수가 없었다. 이어 무신 이고는 칼을 뽑는 시늉을 하며 한뢰를 죽여 버리라는 신호를 보냈다. 사태가 심상치 않자, 한뢰는 황제에게로 달려가서 살려 달라고 애원하는 눈짓을 하였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황제는 정중부를 타으르며
"장군, 왜 이러시오? 오늘은 무신들이 흥겹게 놀도록 하기 위해 마련된 잔칫날이니 문신을 내버려두시오."
황제의 명에 의해 일단 험악한 분위기는 가라앉았다. 이고는 은밀히 정중부에게 다가가 아예 이 자리에서 거사하여 문신들을 죽이자고 하였으나 정중부는 아직 때가 되지 않았으니 참으라는 눈짓을 하였다.
분위기가 이상하자 황제는
"자, 잘놀았으니 이제는 보현원으로 가자." 하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문신들과 콧노래를 부르며 걸어나갔다.
이고,이의방은 정중부를 찾아가 거사를 종용했다.
이고가 말하기 "저녁 때 보현원에서 거사하여 문신 놈들을 모조리 없앱시다!"
이의방은 "그럽시다! 우리 편과 문신들을 구별하기 위해 모두 두건을 벗도록 합시다. 두건을 쓴 놈은 모조리 없앱시다."
이에 정중부는 이를 허락했다. 이에 이의방은 휘하장수 고득의에게 명하여 순검군을 이끄는 조원정.이영진.석린등에게 연락을 취하여 저녁무렵까지 보현원에 당도토록 하였다
보현원은 거리가 상당히 멀어서, 이고와 이의방이 도착했을 때는 날이 이미 어두워 있었다. 이고와 이의방은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황제와 문신들이 원문 안으로 들어서 다시 밖으로 나오자 우선 임종식, 이복기 등을 손으로 때려 죽였다. 이 틈에 약삭빠른 한뢰는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서, 어느 틈엔가 황제의 처소로 뛰어들어가 의종에게 살려달라고 애원하였다. 황제는 한뢰를 침대밑에다 숨겼다
밖에서는 문신들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가장 많이 살상을 한자는 바로 천하장사 이의민이었다. 이의민은 쌍도끼를 휘드르며 닥치는대로 승선, 내시, 어사잡단, 합문지후, 사천감, 태자령 등 상시를 비롯하여 황제를 따르던 자들이 모조리 죽였다. 황제를 모시고 다니던 문신들이 거의 다 죽어서, 보현원은 시체 더미와 피로 얼룩졌다. 의종은 환관 왕광취를 불러 즉시 살상 행위를 중지하라고 명령했으나, 황명 따위가 통할 리 없었다. 이고가 황제의 침실로 들어서며 말했다.
"폐하 아직도 숨어 있는 자가 있습니다. 어서 내놓으시오!"
이 말에 황제도 가슴이 뜨끔하였다.
"짐의 방에는 숨은 자가 없소."
"바로 용상 밑에 있소이다!"
의종이 주저하자 이고가 달려들어 용상 밑에 숨어 있는 한뢰를 끌어냈다. 한뢰는 황제의 옷자락을 붙잡고 살려 달라고 애걸했다.
"에이, 더러운 놈!"
이고가 한뢰를 발로 걷어찼다. 한뢰는 여지없이 문 밖으로 나가떨어졌다, 순간 이고가 칼을 뽑아들어 한뢰의 목을 쳤다. 황제는 벌벌 떨며 사방을 둘러보았다. 주위에는 무신들만이 있을 뿐, 목숨을 걸고 황제를 호위하는 자는 하나도 없었다. 황제는 무신들이 자기를 해칠까 봐, 가지고 있던 검을 풀어 그들에게 상으로 내렸다. 평소에 무신을 괄시하던 문신들은 거의 다 죽었으나, 오직 김돈중 한 사람만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미리 음모를 알아차리고 도중에서 일부러 말에서 떨어져 다친 시늉을 하다가 달아나 버린것이다. 정중부가 말했다.
즉시 김돈중을 잡아오라!"
정중부의 휘하장수 습련이 말하길
"김돈중은 이미 낌새를 알아채고 도망쳤습니다."
이의방이 말하길
"그렇다면 일이 잘못 되기 쉽소, 김돈중이 만일 궁성으로 들어가 태자를 옹립하고 우리를 역적으로 몰면 큰일이오. 김돈중을 찾아 없애 버려야 하오."
정중부는 이의방에게 급히 성안으로 들어가서 김돈중을 잡아오라고 하였다. 그러나 김돈중은 집에 없었다.
"우리가 먼저 궁중으로 쳐들어갑시다!"
이고, 이의방, 이소응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궁궐을 습격하여 보이는 문신,환관 50여명의 문신들을 모두 죽이고, 다시 태자궁으로 달려가 태자궁을 지키던 태자문학 문신 김거실을 죽였다.
김돈중은 감악산에 숨어 들었는데 하인의 밀고로 사로잡혀 참수당했다
한편 정중부는 황제을 모시고 궁궐로 들어와서 무신들을 모두 한 계급씩 승진시켰다. 또한 주역인 이고와 이의방을 중랑장으로 승격시켰다. 다음날 이고,채원등이 황제마저 죽여버리자고 간청했으나 정중부와 앙숙은 이를 만류하였다
그날밤 황제가 신세를 한탄하며 홀로 시름에 잠겨있었다.
곁에 있던 환관 왕광취가 이를 분하게 여겨 말하길
"소신이 반역도당들을 모조리 주살하겠나이다"
의종이 이를 허락하고 혈서를 써 왕광취에게 내리니, 왕광취는 20여명의
환관,내시를 선동해 이고,이의방을 주살하려 하였다.
그러나 환관 한숙이 변심하여 이를 이의방에게 고변하자 성이난 이의방은 왕광취의 목을 베어 버렸다.
황제의 변심에 위기감을 느낀 정중부,이고,이의방등은 황제를 찾아갔다
황제는 수문전에서 태연히 술을 마시고 악기를 연주하고 있었다
정중부가 말하길
"폐하는 이미 덕을 잃어 간신이 나라를 망쳤으니 이미 하늘이 폐하를 버린것이옵니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덕이 있는자에게 제위를 양보하심이
타당한줄 아뢰오리다"
라고 말하니 의종이 말하길
"짐의 목숨은 그대들 손에 달렸소이다 경의 뜻대로 하오"
하니 바로 의종을 폐위한 다음 황제의 동생인 익양공 왕호(명종)를 새황제로 내세운 뒤, 의종과 태자는 각각 거제도와 진도로 유배를 보냈다.
이고는 다시 문신을 모조리 죽이자고 정중부에게 간청했으나 정중부는 이를 만류했다
정중부는 스스로 참지정사가 되고 벽상공신에 올랐으며 이어 중서시랑평장사, 문하평장사, 서북면판사, 행영병마 겸 중군병마판사 등의 벼슬에 오르게 된다.
또한 쿠테타의 실질적인 주역인 이고. 이의방은 종8품에서 4등급을 초고속 승진하여 정4품 장군의 직위에 올랐다가 얼마 안있어 명종을 옹립한공으로 대장군으로 승격하였다. 또한 이고는 위위경에 이의방은 전중감에 임명되어 한손에 조정을 장악하게 되었다. 또한 정중부와 더불어 벽상공신이 되어 그야말로 위세가 하늘을 찌를듯 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야망은 여기에 멈추지 않았다.
특히 이고의 야망이 컸었는데 이고는 스스로 황제가 되려했다.
이고는 법운사, 개국사 승려들과 결탁하고 전국각지의 깡패들을 끌어모아 세를 이루고 거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고는 수하장수인 김대용과 승려 수혜와 현소를 불러
"여보게들, 저번 거사는 전부 우리가 한일인데 공도 없는 자들이 공신입네하며 위세를 떨고 있다. 그들을 싸그리 없앤 다음 내가 고려를 멸하고 새로히 제위에 오른다면 자네들은 이나라의 재상이 될것이다
먼저 할일은 이의방을 없애는 것이다 늙은 정중부야 천천히 처리해도 늦지않다"
교위 김대용이 말하길
"장군께서 마음만 결정하시면 무슨 일이든지 성공할 수가 있습니다."
이들은 쿠테타가 일어난진 몇달후 태자의 관례일을 거사날로 잡았다
이고는 관례식에서 선화사로서 행사를 주관했는데 무장하지 않은 이의방이 이행사에 참여할때 도부수를 두어 이의방을 처단할려고 한것이다
그러나, 이고의 심복인 김대용의 아들이 김대용과 은밀히 애기하길
"아버님 이고는 잔악한 자이옵니다 그자가 황제에 오른다면 훗날 우리 가문도 무사치는 못할것입니다"이에 김대용은 근심하여 친구인 내시장군 채원을 찾아가 이를 의논하였다
이말을 들은 채원은 곧바로 이의방에게 달려가서 귀띔해 주었다. 명종 원년, 여정궁에서 관례식이 벌어지던날 이고의 심복 부하들이 속속 궁 안으로 숨어들었다. 이고는 칼을 차고 거사를 행할려고 궁에 들어가다 이의방과 마주쳤다
"아니 장군 어이 행사에 참여치 않으시고 여기 계시오"
"네이놈 어찌 궁에 칼을 품고 들어오느냐? 내가 역심을 품은 것이렸다?"
거사가 탄로난걸 눈치챈 이고는 칼을 빼어들고 이의방에게 달려들었다
"네이놈 어찌하여 나를 모함하느냐? 내가 날 죽일려고 하는 모양이로구나! 그러나 네 뜻대로는 되지 않을 것이다"
이고의 무예는 출중해 이의방이 상대가 될수 없었다
그러다 갑자기 이의민이 쌍도끼를 휘두르며 나타났다
"네이놈 이고야 어찌하여 옛날의 동지들을 죽이려 하느냐? 네가 죽고 싶어 환장한 모양이로구나?"
천하의 이고라 하여도 이의민을 당할순 없었다
몇합겨루다 이고의 머리는 이의민이 휘두른 도끼에 의해 목과 몸이 분리되었다
이의방은 군을 이끌고 이고의 잔당등을 모조리 살육하였다
이때 이고의 처자와 모도 잡혀 죽었으나 그의 부만이 살아남았다. 이유인 즉 이고의 아버지는 이고가 쿠테타를 일으키자 이고와 의를 끊고 따로 살았기 떄문이다.
실권을 차지한 이의방은 권모술수에 뛰어난 모사꾼 군바리였다. 이때 정중부는 두문불출하며 정세를 관망하고 있었다. 이의방은 정중부를 회유.포섭하기 위해 술을 들고 정중부를 찾아가 담판을 맺고 부자관계를 맺었다. 또한 정중부의 권한을 대폭 늘려주고 문신들만 취임할수 있던 지방관에 무인을 임명하기로 법도 바꿔버렸다.
또한 중방을 두어 고위직 군장성들을 포섭하여 세력을 넓혀갔다.
동계에서 휘하군사 3만의 군사를 일으켜 장순석,유인준을 남로병마사로, 배윤재를 서해도병마사로 삼았으며, 이때 동북면지병마사 한언국도 가담하였다. 우선 장순석을 시켜 일천여 군사를 이끌고 거제도로 유배된 의종을 뱃길로 경주로 모시게 하였다. 그러나 장군 이의민, 박존위에게 모두 패하였다.
특히 이의민에 대해서 좀더 자세히 알아보면
이의민은 경주가 본관으로써 부는 소금장수였고 모는 절의 종이었다. 즉 천민출신으로 고향 경주에서 두형과 함께 깡패짓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었다. 하루는 시비끝에 관료 한명을 맨주먹으로 때려죽였는데 죄로 관에 끌려가 갖은 고문을 당했다. 이의민의 형들은 고문에 그만 죽었으나 이의민은 고문에 끄덕없고 기가 전혀 죽지않자 그를 유심히 살피던 안찰사 김자양에게 발탁되어 죄를 사하고 경군(말단 병사)에 편입되었다.
수박(태권도의 시초)을 매우잘하여 전군 무술대회에서 당당히 1등을 차지하자 의종의 총애를 받아 호위무사격인 별장(소령쯤)이 되었다.
고려사에 기록되길 "이의민이 맨주먹으로 큰집의 기둥을 치니 써까래가 움직였다"라고 나온다.
이를 보아 이의민의 괴력은 여포를 능가하는 수준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정중부의 무신쿠테타가 성공하여 무신들의 지위가 올라갈때 덩달아 중랑장(지금의 대령쯤)이 되고 곧이어 장군에까지 승진하게 된다.
성격이 포악하고 무대포격인 이의민을 무신정권자들은(이의방) 행동대장으로 쓰기엔 적격으로 보았을것이다.
이의방은 이의민을 경주로 보내 의종을 처리하라고 시켰다.
경주에는 장순석이 천여명의 군사를 이끌고 의종을 모시고 있었다
장순석은 근방 호족들을 불러모아 역신들을 멸하고 의종을 복위시키는 것이야말로 하늘의 뜻이라고 설파했다.
그러나 경주호족들의 생각은 달랐다.
특히 그들은 경주출신인 이의민에게 호감을 지니고 있었다
이때 이의민은 박존위와 더불어 오천여 군사를 이끌고 경주로 내려오고 있었다. 호족들은 미리 이의민을 찾아갔다.
호족들이 말하길
"장군께서 경주 출신으로 나라에 공을 세우고 출세한 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소문에 의하면, 장군께서는 이번에 경주로 내려오신 것은 경주를 휩쓸기 위함이라 하니 그건 안 될 말씀입니다. 전황제가 비록 경주에 있다고 하지만, 그것은 김보당의 부하인 장순식,윤인준이 한 짓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이의민이 말하길
"나도 잘 알고 있소. 도대체 그들의 세력은 어떠하오?" 하고 묻자
답하길
"천 여명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나마 모두 오합지졸이니 염려할 것 없습니다."
"잘 알았소. 내가 아무리 지난 날에 부랑자로 행세했지만, 지금은 다르오. 고향 사람들을 괴롭힐 생각은 조금도 없으니, 내 일에나 협조해 주시오."
이의민이 장순석과 싸우게 되었다. 천여명의 군사로 오천여 군사를 당하기는 처음부터 어려웠다. 호족들이 원군으로 오줄알았던 장순석은 낙담해
경주로 후퇴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미 경주의 모든성은 호족들이 문을 굳게 닫아 장순석을 맞이 하고 있었다.
"이보시오들! 어찌 이러는 것이오! 저 역도들이 여기 까지 몰려들고 있소이다. 어서 문을 여시오"
"이봐라 너의 군은 반란군이다. 어찌하여 너희일에 우리를 끼어들여 경주사람을 모조리 죽이려고 하는 것이냐? 우리는 애초부터 너희를 곱게 보지 않니하였다. 썩 물러나거라"
낙담한 장순석은 하늘을 한탄하며 자결했다.
경주에 무혈입성한 이의민은 우선 황제를 찾아갔다.
곤원사 연못뜰에서 장순석의 승전보를 기다리며 술잔을 기울리며 서글픈 마음을 연못을 보며 풀고 있었는데 찾아본것은 아차같은 이의민이었다.
이의민은 웃는 낯으로 의종을 알현하고 의종은 벌벌 떨었다.
"폐하 그동안 신수가 어떻셨나이까?"
"이보게 의민 옛정을 보아 짐을 살려주게"
"우선 제가 따르는 술한잔 드시지요"
이의민이 딸아주는 술잔을 든 의종은 문득 주위를 보니 정자 주위에
호수가 잔잔히 흐르는 것을 보았다.
가슴이 덜컥 내려 앉으며
"임천의 환이라"
여기서 잠시 임천의 환이란
임천의 환 ->물을 보면 화를 당한다
무신정권이 들어서기 얼마전 의종은 금나라 사신을 맞았다.
금나라 사신은 사람의 운명을 매우 잘 알아 맞춘다는 소문이 자자한 인물이었다. 의종은 궁금한 나머지 금나라 사신에게 자신의 운수를 맞춰 달라고 하였다. 금나라 사신은 한참을 생각하다가 말하길
"폐하의 수명은 길고 길어서, 만조 백관이 모두 죽은 뒤에야 '임천의 환'이 있을 듯하옵니다" 이말에 의종은 오래산다는 말로 해석해 매우 기뻐했다.
그러나 이때는 이미 의종을 따르는 만조백관 문신들은 모조리 죽은 다음이었으므로 금나라 사신이 예언한 임천의 환의 때가 온것이었다.
술잔을 떨어뜨린 의종은 벌벌떨며 이의민에게 매달렸다.
"이보게 의민 짐을 살려주게"
"폐하 이젠 편히 쉬실 때가 되었나이다."
실실 웃으며 이의민은 의종을 한손으로 들어올려 의종의 면상에 일격을
가했다.
고려사에 기록되길
"경주에서 이의민은 의종 임금을 찾아내어 곤원사(坤元寺) 북쪽 연못가로 끌고 가서 짐짓 술을 올리고는 느닷없이 달려들어 수박희로써 의종을 후려쳤다. 의종 임금은 그만 등뼈가 꺽여 목숨이 끊어 졌다. 이의민의 손가락이 한번 움직일 때마다 임금은 소리를 질러댔고 기어히 크게 한벗 웃더니 절명하였다" 이의민이 황제를 시해한 당시의 일을 적은 것인데, 이의민의 수박위력이 얼마나 대단했는가를 짐작케 한다.
의종은 의식을 잃고 기절하였다.기절한 것인지 벌써 죽은것인지 잘은 모르겠지만 이의민은 커다란 가마솥을 준비하여 의종을 가마솥에 넣고 호수에 처넣었다.
이로써 임천의 환은 현실이 되어 버린 것이었던 것있었다.
의종은 결국 익사인지. 주먹에 맞아 죽었는지 미스터리를 남기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자신을 총애한 황제를 쳐죽인 이의민. 정말 대단한 넘이 아닐수 없다.
의종을 죽인 공으로 이의민은 대장군에 올랐으며 곧이어 터질 조위총의 난때 공을 또 세워 상장군에 오르게 된다.
일단 김보당의 의종복위운동은 실패로 돌아가 이의방의 토벌군에 의해
안동도호부(현제의 평안도 의주)에서 김보당은 결국 사로잡혀 혁명군법정에 오르게 된다. 동조자를 묻는 재판관의 말에 고려의 모든 문신이 동조했다라고 발설하자 이를 계기로 모든 문신을 죽이는 법안이 통과되어 쿠테타당시 살아남은 문신들의 씨는 완죤히 마르게 된다.
그러나 낭장 김부가 건의하길
"문신들을 아무리 죽여도 김보당의 잔당을 뿌리뽑을 수 없으니 문신들과 무신들의 자제를 결혼시켜 후환이 없도록 하는게 어떻겠소이까?"라고 건의하자 정중부가 실천하게 함으로써 살육의 화를 그나마 그치게 하였다
한편 이의방에 대항하려는 저항이 계속되었으니
이고의 잔당 귀법사의 승려 선유승록 언선이 이끄는 승려 수백명이 개경 북쪽성문을 쳐들어 오자 이의방이 직접 일천여 군사를 이끌고 이들을 물리쳤고, 얼마 안있어 중광사,홍호사,귀법사,홍화사 등 여러 절의 중 2천여 명이 성의 동문에 집결하므로 문을 닫아버리니, 성 밖의 민가를 불태워서 숭인문을 연소시키고 들어와 이의방의 형제를 죽이고자 하였다. 이의방이 이것을 알고 사병 오천을 이끌고 중을 모조리 도륙했다. 이어 군사를 시켜서 성문을 나누어 지키게 하여 중의 출입을 금지하고, 군사을 보내어 중광사,홍호사,귀법사,용흥사,묘지사,복흥사등의 절을 파괴하니, 형 이준의가 말리었다. 이의방이 성내어 말히기를, "만약 형님의 말을 좇는다면 일은 이루지 못할 것이오."하고, 드디어 그 절을 불태우고 재물과 보물을 빼앗아 가지고 돌아가니, 중의 무리들이 중도에 기다리고 있다가 마주 쳐서 도로 빼앗아 갔으며, 군사들이 매우 많이 죽었다.
이의방의 공포정치가 자행되자 고위직 무신들도 서서히 이의방에게 불만을 품기 시작했다. 특히 이의방이 태자비를 쫒아내고 자기딸을 태자비로 않히자 곳곳에서 불만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고려건국이후로 최초로 태자비가 축출되는 일이 벌어졌기 때문에
이의방은 황제로부터도 고위무신들에게도 신망을 잃게 된것이다.
그러나 누구도 앞에 나와 의의를 다는 이는 없었다.
정중부도 그저 묵묵히 지켜볼 따름이었다. 그러나 정중부의 아들 정균은
야심이 많은 자였다. 이의방이 태자비축출사건을 벌이자 정균은 마음을 굳히게 된다. 즉 이의방을 처단할 명분을 찾은 것이다.
정균은 서서히 때를 기다리며 세를 키우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 무신정권에 반발은 계속되어 명종4년에 병부상서 겸 서경유수 조위총은 서경(평양)에서 1174년 9월 역신 정중부,이의방의 타도를 명분으로 군사를 일으키고 동계(함경도)와 북계(평안도)의 여러 성에 격문을 보내 "개경의 중방이 북쪽을 토멸하려고 발병하였으니 병마를 규합하여 모두 서경으로 모이라"고 선동하였다. 이에 연주성을 제외한 절령 이북의 40여 성이 모두 서경에 호응하여 중앙정부에 반기를 들었다.
북계의 10만 군대와 동계의 3만 군대를 합쳐 13만의 대군이었다.
고려조정에서는 평장사 윤인첨에게 3군 10만을 주어 서경을 토멸토록 하였으나 정부군은 절령에서 대패하고, 서경군은 개경에 육박하였다.
이에 이의방은 스스로 10만의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서경군을 격파하고 대동강에 이르러 서경의 성 밖에서 진을 쳤으나, 추위에 견디지 못하고 철수하였다.
그 해 11월 윤인첨, 두경승 등은 재차 황명을 받아 20여만의 대군을 이끌고 우회하여 연주의 여러 진을 차례로 평정하고 다음해 6월에 이르러 서경을 포위, 고립시켜 지구전을 폈다.
외부 세력과의 연락이 두절된 조위총은 금나라에 절령 이북 40여 성을 바친다는 조건으로 구원병을 청하였으나, 금나라에서는 이를 듣지 않았다.
이로부터 거의 1년 동안 공방전을 벌이다가 1176년 6월에 이르러서야 정부군의 총공격으로 서경은 함락되고 조위총은 사로잡혀 목베임으로써 만 22개월을 끌던 조위총의 병란은 평정되었다
그러나 조위총의 토벌작전중에 사고가 터졌으니 바로 이의방의 처단이었다. 명종 4년, 조위총의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윤인첨이 개성 서교에서 군대를 사열하고 있었다. 반란군 진압을 위한 군대이므로, 여기에는 의용군이 되어 나가는 승병도 많았다. 또한, 이의방도 군대 책임자로서 선의문 밖까지 나와서 사열 겸 진용을 구경하였다. 정균은 이때가 이의방을 없앨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정균은 승병장 종참과 함께 역시 군대를 사열하면서, "내가 기회를 만들 테니, 이의방을 죽이시오."
하고 귀뜸했다.
이의방이 여러 군대를 사열하고 승병으로 이루어진 군대를 사열할 차례가 되었다. 승병부대장인 종참이 그 안내를 맡았다.
정균과 종참은 이의방의 뒤를 따라다니다가 그에게 말했다.
"상장군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무슨 일인데 그러시오?"
이의방이 뒤를 돌아봤다. 뒤를 돌아본 이의방의 눈에 종참의 칼이 눈에 들어왔다. 급하게 몸을 피했으나 몸에 칼을 맞았다. 수하장수 고득의가 칼을 뽑아들며 종참을 베었다. 그러나 정균과 승병들이 떼거리로 달려들어 고득의를 베었다. 고득의가 몸으로 승병들의 칼을 맞는사이 이의방은 급히 몸을 빼 도망치려 했으나 고득의의 희생도 소용없게 이의방은 승병들의 창을 온몸에 맞고 고슴도치가 되어 죽었다.
정균은 곧바로 군을 이끌고 황도로 들어와 이의방의 형인 이준의와 이의방의 수하인 장군 이원응,오중정,조원정,석린등 그의 일당등을 모조리 죽였다. 이때 이의민의 동생인 이인은 간신히 몸을 피해 화를 면했다.
이인은 곧바로 고향인 전주로 내려가 숨어 지냈다. 당시 이의민의 가문은 전주에서 이름난 호족이었다. 먼훗날 이인의 후손이 바로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다.
한편, 정균은 황제에게 달려가 "역적 이의방의 딸을 태자비로 둘 수 없사옵니다!" 태자는 눈물을 머금은 채 할 수 없이 이의방의 딸인 태자비를 내보냈다. 이의방이 죽고 난 뒤이므로, 태자비를 옹호해 줄 세력도 없었다. 태자비는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기며,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고는 한 많은 궁궐을 떠나고 말았다. 그 뒤, 태자비는 어느 한가한 절간에서 외롭게 살았다. 태자가 황제(강종)에 오른뒤에도 때때로 찾아와 그녀를 돌보아 주었다고 전해지는것으로 보아 태자와 그녀와의 애정은 남달랐던것으로 보여진다. 강종이 60세에 황제에 오르자 이의방의 딸을 사평황후로 높이고 궁중으로 들이려 하였으나 최충헌의 심한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사평황후는 슬하에 딸 수녕공주를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정적을 모조리 제거하고 지방의 난을 모조리 평정한 정중부는 자연스레 실질적인 최고 권력자로 떠올랐다. 스스로 관료들의 최고위직인 문하시중(종1품)에 올랐다.
정중부는 이미 나이가 70이 넘었으나 욕심은 끝이 없었다. 황제만이 지닐수있는 의종의 별장하나를 차지했고 자신의 고향 해주의 세력을 키우기 위해 인근의 군현을 모조리 해주로 편입시켰다. 또한 수많은 농장을 지녀 막강한 부를 누렸으며 절을 전국 각지에 지어 자신의 만수무강을 빌게했다. 당시에도 나이 칠십이면 관직에서 퇴역해야하는 치사제가 있었으나 이를 무시하고 계속 관직에 머물렀다.
이런 정중부주위로 온갖 간신배들이 몰렸들었다. 송유인이란 자는 정중부의 환심을 사기위해 조강지처를 버리고 정중부의 딸을 새아내로 맞기도 했다. 본시 송유인의 조강지처는 송나라 거상 서덕언의 딸로 의종말기에 대장군까지 올랐으나 본시 간사한자로 문관들과 빈번히 교제하자 무신들의 미움을 받았으나 정중부가 정권을 잡자 아내를 섬으로 내쫒아 버리고 180%태도를 바꾸어 정중부에게 빌붙어 온갖 아부를 하며 정중부의 딸을 아내로 맞은 것이다. 송유인이 형부상서가 되어 인사권을 장악하고 제맘대로 일을 처리하자 황제를 위시한 모든 문신이 그를 미워했다. 또한 문신의 거두인 추밀원사 문극겸과 추밀원부사 한문준을 탄핵하여 쫒아내자
문신들의 원수가 되었다.
정균의 횡포도 만만치 않았는데 황제의 비서실장격인 승선직에 오른 정균은 황제의 입과 귀를 막고 온갖 부정부패를 저질렀다.
특히 정균은 타고난 색마였는데, 상서 김이영의 딸이 장안의 미녀라고 소문이 자자하자 그녀를 한번보고 반해 바로 조강지처를 내치고 김이영을 위협해 김이영의 딸을 처로 맞았다. 또한 태후의 별궁안에 큰집을 지어 거처하면서 매일밤 궁녀들을 침실로 끌어들였다. 간이 커진 정균은 공주에까지 눈을 돌리게 되었다. 은밀히 황제를 협박해 공주를 내어 달라고 하였다. 고려의 전통은 공주를 다른 사람에게 출가시키지 않고, 오직 황손에게만 출가를 시켰는데 정균은 이것을 무시하고 황제에게 공주를 달라고 협박하니 황제는 줄수도 업고, 아니줄수도 없는 난처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황제는 눈물로 애원하며 그것만은 해줄수 없다고 말하였다. 대신 궁녀들은 마음대로 가지고 놀도록 허락을 하였다.
이런 횡포가 계속되자 반감세력이 급속히 늘어갔다. 또한 정변에 참여했던 하급군인들도 서서히 등을 돌리고 있었다. 새로운 세상이 오리라 기대했던 군졸들에게 돌아온건 절망 뿐이었다. 일부 간신배들만 연줄을 타고 출세할 뿐이었다. 백성도 대상만 바뀌었을 뿐 수탈에 시달리기는 매한가지였다.
결국 공주의 명학소에서 망이,망소이의 봉기가 일어났다. 정중부 일가의 독재가 원인이라는 게 여론이었다.
망이,망소이는 공주명학소의 천민으로 명종 6년(1176) 1월 생활에 굶주린 무리를 모아 자칭 산행병마사라 하고 본읍인 공주를 공격, 함락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사신을 보내어 회유해 보았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3000명의 군사를 대장군 정황재와 장군 장박인 등에게 인솔케 하여 이를 토벌토록 하였다. 그리나 토벌에 실패하자 회유책을 써 명학소를 충순현으로 승격시키고 현령과 현위를 파견하는 등 달랬지만 이에 응하지 않고 예산을 공략하고 감무를 죽였다. 이에 정부는 정세유·이부 등으로 토벌하게 하자 명종 7년(1177) 1월 망이·망소이는 갑자기 항복하였다. 정부에서는 농민의 항쟁이 두려워 이들을 처형하지 않고 곡식을 주어 고향으로 보냈으나, 망이 등은 2월에 정부의 처사에 불만을 품고 다시 난을 일으켰다. 이들은 서산의 가야사를 공략하고 3월에 직산의 홍경원을 불태워 승려 10여 명을 죽였으며 아산까지 점령하고 청주를 공격했다. 이들은 청주목의 치소를 제외한 관할구역 내의 모든 군현을 점령하였다. 이에 정부에서는 충순현을 강등하여 명학소로 하고 난민을 총공격하였다. 난민들은 식량과 병기가 부족하였고 또한 농번기가 되어 도망가는 농민의 수가 증가함에 따라 기세가 꺾여 망이·망소이가 정세유에게 붙잡힘으로써 7월에 난이 끝났다.
망이,망소이의 난이 일어나자 경대승등이 주축이 된 젊은 군인들은 개경 시내 각지에 대자보를 붙였다. "시중 정중부와 그 아들 승선 정균, 그리고 사위인 송유인이 권력을 농단하면서 방자하게 횡포한 짓을 하고 있다. 남적(망이,망소이)의 근원도 여기에 있다. 지금 만약 군사를 동원해 적을 토벌하려면 반드시 먼저 이들을 제거해야 할 것이다"
정균은 이 소식을 듣고 분노에 가득 찼지만 섣불리 나설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사직하고 두문불출에 들어갔다.
철옹성같았던 1기 무신정권 정중부 정권도 26세의 청년장군 경대승에 의해 막을 내리게 된다
청년장군 경대승은 본이 청주이고 청주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경진은 무신으로 무신의 난때 적극적으로 가담하지는 않았으나 고위직 무신이란 이유로 출세를 거듭했다. 조위총의 난이 발생하자 윤임첨의 우군 병마사로 출전하여 공을 크게 세워 지문하성사(종2품)가 되었다가 계속 승진해 중서시랑 평장사까지 지냈다.
경진 역시 정중부정권시절 다른 무신처럼 부정한짓을 많이 했다.
지위를 이용해 남의 재산을 빼앗아 물의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반면 아들 경대승은 의협심이 남달랐다.
어린나이인 15세에 음보로 군에 투신해 교위(초급장교)가 되었다.
17세의 나이에 무신정변이 일어났다. 그의 부가 무신정권의 핵심인물이었으므로 17세의 나이에 초고속 승진하여 장군직에 오를수 있었다.
경대승은 집안의 후광에 힘입어 장군에까지 오를 수 있었지만 고속 승진은 본인의 성격과 관계가 깊다. 경대승은 아버지와 달리 청렴결백했다. 아버지가 빼앗았던 토지를 돌려주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무신들의 전횡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의협심이 남달라 무인들의 불법적인 행동에 곧잘 분개했다. 그는 아버지 경진이 죽자 강탈했던 토지를 원주인에게 돌려주었으며 노비들을 모두 풀어주고 모든 재산을 정리하여 군부에 바쳤다.
그러한 일을 계기로 조정에서 청렴결백한 그의 이름이 크게 떨치게 되었고 말딴 병사에 이르끼까지 존경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그러나 이번일을 계기로 경대승을 좋지 않게 바라보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정균이었다.
정균이 말하길 "경진의 아들 경대승이란 어린놈이 사사건건 불만이 많다지? 이놈을 가만히 두어선 곤란하겠어" 이렇게 결심하였다.
이러던 찰라 경대승은 1178년(명종8년) 고향인 청주의 사심관을 역임하고 있었다. 본시 지방관은 문신들이 대대로 취임했으나 이의방이 법제를 바꾸어 버려 무신들도 지방관을 할수 있는 시기였다.
1178년에 서울에 올라와 있던 청주인들과 청주 본토 사람들 간에 벌어진 싸움을 원만히 해결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청주의 사심관이던 그는 관직에서 파면됐다. 실상은 평상시 무신들의 횡포에 대놓고 반발하는 모습을 보인 그의 태도에 정균등이 나서 괘씸죄로 파면시킨 것이었던 것이었다.
이일을 계기로 경대승은 정균에게 불만을 가지게 된다. 또한 당시는 정균과 송유인의 횡포가 극에 달하던 시기여서 많은 젊은 무신들이 불만을 품게 된것이다.
조용히 때를 기다리던 그에게 기회가 찾아들었다. 정균이 공주에게 장가들려 하자 황제는 이를 매우 꺼렸다. 누군가 이들 세력을 꺾어주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또한 정중부의 사위 송유인이 문극겸과 한문준을 탄핵해 내쫒자 문신들은 물론이고 무신들까지 반발하였다.
때가 이르렀다고 느낀 경대승은 명종9년(1179년) 행동을 개시한다.
26세의 경대승은 관직에서 파직되자 전국을 유랑하며 30여명의 장사패를 끌어 모았다. 이들 모두 일당백의 용사들로 죽기로 경대승을 보필하기로 맹세하였다.
어느날 허승이 길을 가다 문뜩 한무리의 장사들이 자신을 에워싸는 것을 느꼈다. 허승은 견룡군(경호부대) 대장으로 힘이 천하장사라 정균이 총애하여 그에게 경호를 맡기고 있었다.
"허허~ 웬놈들이냐? 감히 내가 누군질 알고 이러는 게냐?"
"허승장군이 아니시옵니까? 잠시 저희와 같이 가주셔야 겠습니다. 장군을 뵙고자 하는 분이 계십니다"
"이놈들 바라! 감히 누굴보고 가라마라 한단 말이냐? 죽고싶은게냐?"
이렇게 해서 허승과 장사패들이 한판 크게 붙게 되었는데, 싸움이 만만치 않았다.
"허 요놈들 대단하구나 힘깨나 쓰는 자들이야! 하지만 사람을 잘못보았다. 에잇!"
허승이 힘을 쓰자 장사패들이 하나둘 나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장사패들이 허승에게 쩔쩔매자 이를 지켜보던 경대승이 크게 웃으며 나타났다.
"으하하! 역시 견룡군 대장답소이다. 허명이 아니었소이다. 대단하오!"
상대가 만만치 않음을 느끼 허승이 답했다.
"보아하니 그대가 이들의 우두머리인 모양인데 대체 누구길래 나를 오라가라하는 것이오?"
"사내끼리 무슨 할말이 있겠소이까! 평소 그대의 힘이 천하제일이라는 말을 듣고 한번 겨루어 보고자 함이오"하며 겨루기를 청하였다.
이리하여 허승과 경대승이 맞짱을 떴는데 용호쌍박 오랫동안 승부가 나지않았다.
허승이 말하길 "내가 태어나서 수많은 싸움을 해보았지만 그대같은 이는 처음이오. 그대의 존함을 알려주시오"
"소생은 경대승이라 하오! 본시 무인으로 군부에서 일을 잠시 맡은 적이 있소이다"
허승은 놀라며"아니 경이 바로 경대승장군이란 말이오? 그대의 위명은 익히 들어 알고 있소이다. 고려천지 무인치고 그대의 존명을 모르는 이가 있겠소이까? 반갑소이다. 반가워"
곧바로 의기투합한 그들은 술자리를 같이하며 의형제를 맺었다.
술이 거나하게 들어가자 경대승이 내심을 털어놓았다.
"이보시오! 허형, 형님은 지금의 시국을 어떻게 생각하시오?"
"어떻게 생각하냐니? 아우님 무엇을 말하는 겐가?"
"지금 조정엔 간신들이 득실거리고 폐하는 유약하여 노심초사 근심하지 않는 날이 없다 하오이다. 또한 정균이란 자는 감히 궁에 기거하면서 밤마다 음탕한짓을 하면서 심지어는 공주마마까지 욕을 보이게 하고 있소이다. 어찌 지금 조정이 제대로 된 조정이겠소이까?"
"낸들 어쩌겠나! 지금은 정씨부자의 세상일세. 그런말은 함부로 하지말게나 누구들으이!"
경대승이 크게 웃으며 말하길
"사나이 태어나서 못할말이 뭐가 있겠소이까? 나 경대승 세상에 두려운게 하나도 없는 사람이오"
"이보시오 허형,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소이다. 내가 보다 못해 흉적들을 쓸어버리려 하오. 허형이 조금만 협조해 준다면 일이 성사되거나 진배없소이다. 나를 도와주시오."하며 무릎을 꿇었다.
허승은 잠시 생각하다 혼쾌히 이를 수락했다.
거사는 9월16일 장경회가 열리는 날 벌이기로 했다.
그날은 궁에서 불경을 꺼내 읽고 다시 장경각에 보관하는 날이다. 온종일 행사를 치르고 난 뒤엔 으레 뒷풀이가 따랐다. 피로와 술이 겹치면 잠이 깊이 들게 마련이다. 정균도 뒷풀이를 하고 거나하게 술잔을 기울이며 궁에서 궁녀와 요상한 짓거리를 하고 있었다. 경비를 맡았던 군사들도 이날만큼은 허승이 내온 술을 먹고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밤이 깊어지자 경대승은 결사대원 30명을 이끌고 승려로 위장해 화의문 밖에 숨어들었다.
허승은 모두 잠이 든 틈을 타서 정균의 처소에 갔다.
"나으리! 나으리! 소인 허승이옵니다. 지금 역적들이 난을 일으켰습니다. 어서 일어나시지요."
궁녀와 요상한짓을 벌이던 정균은 "이게 무슨말이냐? 난이라니?"
허둥지둥 옷을 차려입은 정균이 문을 열자 갑자기 허승이 말하길
"이 역적놈아! 이칼을 받아라!"하면 단칼에 정균을 베었다.
정균의 목을 베자 허승은 정균의 목을 들고 휘파람으로 밖에 있는 경대승에게 신호를 보냈다.
허승의 신호가 오자 경대승은 30여명의 결사대원들과 함께 황궁담을 넘어
들어가 숙직 대장 이경백, 지유 문공려를 죽였다. 그제야 군사들이 잠에서 깨어나 경대승의 결사대와 싸움을 벌였으나, 경대승의 결사대원들은 천하에 당할자가 없는 일당백의 용사들이었다. 황궁에서 정중부일당을 도륙한후 경대승은 황제의 침전으로 향했다.
갑자기 벌어진 일이라 명종은 벌벌 떨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침전 밖에서 경대승이 부복하며 말하길
"신등이 사직을 보존하기 위해 정균을 죽였으니, 곧 역적의 무리를 모조리 처단하겠습니다. 폐하께서는 영을 내려 주시옵소소."
정균을 죽였다는 말을 들은 황제는 경대승에게 친히불러 술을 내리며 위로했다. 경대승은 즉시 황명을 받아 2천여의 금군을 이끌고 가서 정중부의 사위인 송유인을 죽이고, 정중부를 찾았다. 정중부는 난을 알아차리고
황도를 빠져나가려 하였다. 정중부가 성을 빠져나갈때 하급군졸들이 그를 알아보고
"저자가 역적 정중부다. 저자는 무인이면서도 옜날 문신들이 했던 것처럼 우리와 같은 말단 군졸들을 못살게 굴었다. 저자를 죽여라"
이에 정중부는 집단 린치를 당하고 74세에 숨을 거두고 말았던 것이었던 것이었다.
다음날, 경대승은 정중부,송유인,정균 등의 머리를 거리에 매달고 역적을 죽였다고 천하에 공표하였다. 황제는 매우 흡족해 하여 경대승을 불러 칭찬을 하길
"경이 아니면 누가 사직을 구하겠소? 승선 정균을 죽였으니, 그대에게 승선의 직책을 하사하겠노라."
"신은 일자 무식이옵니다. 학문을 못하는 소신이 어찌 폐하를 보필하는 승선의 직책을 맡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마땅한 사람을 경이 천거하시오. 이부시랑 오광척은 어떻소?"
"오광척은 비록 학문이 있다하나, 승선이 될 자격이 없습니다."
황제는 아무 말없이 경대승을 바라보았다. 경대승이 처소로 돌아오자 무신 손석이 찾아와 말하길 "오광척이란 간신이 황제에게 승선 자리를 달라고 애원했다는 것이다"이에 격분한 경대승은 오광척을 불려들여 참수해버렸다. 본시 정중부정권시 손석의 아버지가 오광척에 의해 탄핵받아 파직되자 원한을 품고 경대승에게 밀고하여 오광척을 제거한것이었다
경대승은 또한 이기회에 정중부의 무리들을 싹쓸이 해야겠다는 생각에 정중부 가신 5인방인 김광영,석화,습련,송득수,기세정등을 모조리 조정에 불러들여 죽였다. 이처럼 경대승이 기분 내키는 대로 무신들을 죽이자 고위 무신들의 불평은 대단했다.
"정중부장군은 큰 뜻을 위하여 문신을 누르고 무신들의 울분을 풀어 주었음으로 그 공은 마땅히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경대승이 하루 아침에 장군을 죽였으니 누가 이 원한을 풀어 줄 것인가?"
하며 호시탐탐 경대승을 제거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기운을 눈치챈 경대승은 내심 불안했다.
"비록 내가 역적을 멸하고 정권을 차지하였으나 도처에 정중부일당들이 자리잡고 있다. 이들을 모조리 도륙하자니 그들의 세가 만만치 않다. 이들이 연합하여 나를 공격한다면 어찌 당하겠는가!"
하여 측근들을 불러모았다.
측근들은 경대승 경호부대를 창설하자고 제안했다. 경대승은 30명의 장사패들을 전국각지로 보내어 천하에 힘깨나 쓰고 의협심이 남다른 이들을 찾아오게 하였다. 전국각지에서 수천명의 장정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었다.
경대승의 집에서 이들중 가려뽑은 일천여명의 장정을 모아놓고 일장연설을 하였다.
"너희들은 들으라! 본시 나는 무를 사랑하고 의를 숭상하여 천하의 역적들을 단칼에 쓸어 버렸다. 그러나 도처에 아직도 역적의 무리들의 발호가 끊이지 않으니 천하의 장사들이 어찌 이를 두고 볼수 있으랴! 하여
오늘 천하에 사내다운 사내는 모두 모아 의형제를 맺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어 때어난 날은 달라도 죽는날을 같게 해달라고 빌미 어떠하냐?" 하자
일천여 장사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면 환호했다.
이로써 경대승 경호부대가 창설되었는데 이름은 도방이라 하였다. 도방은 정부에 소속된 군인들이 아니라 순수한 경죽모(경대승과 죽기를 같이하는 모임)회원들이 주축이된 사병집단이었다. 이들의 힘은 막강하여 감히 누가 건드는 자가 없었다. 이들의 무소불위는 대단하였는데 관리의 집을 영장없이 쳐들어가 쑥대밭으로 만들고 출동한 관군을 욕보이며 조롱했다. 어쩌다 술집같은데서 싸움이 벌어져 도방소속 장사패가 관에 하옥되면 무리를 이루어 관아를 찾아가 소란을 피우며 동료를 꺼내기도 하였다.
이들중 100여명의 최정예 도방소속 장사들은 경대승의 숙소인 도방에서 침식을 같이했다. 도방은 말 그대로 여러 개의 방을 터서 하나의 큰 방으로 만든 것이다. 모든 행동과 죽음을 같이하기로 맹세한 동지들만이 도방에 들어올수 있었다. 그러한 의미로 긴 베개와 큰 이불 을 만들어 같이 썼다. 경대승 자신도 때때로 결사대원들과 숙식을 같이 했다. 그들은 경대승 경호에 만전을 기했다.
그러나 고인물은 썩기 마련인법, 무를 사랑하고 의를 숭상한다는 도방의 이념은 점차로 퇴색되고 무소불위의 권력기관이 되어 횡포가 자자해졌다.
도방은 정부기관이 아닌데도 사정기관처럼 부정부패를 일소한다는 차원에서 다치는 대로 관리를 납치해다가 족치고 죽이기를 밥먹듯이 하였다.
한편 허승은 쿠테타가 성공하자 장군으로 승격하였다. 또한 요직인 태자부의 지유를 맡았다. 그의 수하 김광립은 어건룡의 행수가 되었다.
그들은 요직에 있게 되자 기고만장해졌다.
또한 은밀히 고위무신들과 접촉하며 세를 규합하고 있었다.
도방에서 이러한 낌새를 눈치챈것 얼마 안가서였다. 경대승이 생각하길
"허승 이놈이 날로 방자해지는 구나! 게다가 정중부의 잔당등과 은밀히 접촉하고 있다지! 이는 용서치 못할자로다"
하여 허승에 연락하여 술자리를 같이 하자고 꾀였다.
허승은 찜찜했으나 김광립을 비롯한 호위무사들을 대동하고 도방에 들어섰다. 도방에 인적이 드물었다. 인적이 없는걸 보고 안심함 허승은 당당하게 도방에 들어섰다. 정자에서 경대승과 허승은 술자리를 같이 하였다.
"이보게 아우님 오랜만일세! 내가 맡은 직책이 직책인지라 요사이 좀 바빴네 그려!"
"바쁘시겠지! 역적의 무리들과 몰려다니느라 얼마나 고생이 심하였소? 허형"
눈치를 챈 허승이 벌떡 일어서며 칼을 뽑아들었다.
경대승이 말하길 "네이놈 허승아! 어찌하여 조그마한 공이 있어 분에 넘치는 포상을 받았으면 그만이지,어찌 자중하지 않고 방자하게 역적도당들과 내통하여 나를 죽이려 하느냐? 오늘이 바로 내놈이 죽을날이렸다!"
허승과 김광립이 칼을 빼어들었으나 갑자기 도부수들이 구름떼처럼 몰려들어 정자를 호위했다. 본시 인기척을 숨기고 도방 정자주위에 숨어있다 경대승의 신호로 나타난 것이다.
일이 심상치 않음을 느낀 허승은 칼을 버리고
"아우님 살려주시게! 나는 역적들과 내통한 일이 없네! 어찌하여 무고하게 나를 죽이려 하는가? 옛정을 보아 나를 살려주게"하며 빌었다.
그러나 냉정한 경대승이 들어줄리 만무했다. 그길로 허승과 김광립은 그날을 제삿날로 삼게 되었다.
경대승의 세력이 너무 커지자 황제는 또다시 불안해졌다. 언제 저자가 나를 죽일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휩싸였다.
황제는 겉으로 경대승을 위하는 척했지만, 속으로는 멀리했다.
이러한 분위기를 눈치챈 경대승도 역시 불안감에 쌓이게 되었다.
황제마저 자기에게서 등을 돌렸으니 언제 신료들이 변심하여 자기에게 칼을 들이댈지 모르는 일이었다.
청년장군 경대승도 매일매일 불안한 날을 보내다. 30세가 되던해 경대승은 우연히 병을 얻었다. 천하를 호령하던 청년 무사였으나, 병 앞에는 약하디 약했다. 경대승의 몸은 병명을 모른채 자꾸만 몸이 야위어 갔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1178년 7월 어느 날, 경대승은 꿈을 꾸었다.
"이놈 일어나거라!" 눈을 뜬 경대승의 눈앞에 7척장신의 정중부가 호랑이눈을 뜨고 칼을 빼어들며 서있는게 아닌가?
"네이놈 정중부야 네놈은 죽어서도 나를 괴롭히는게냐? 어서 썩 물렀거라" "나는 본시 간신들의 횡포를 참지못해 거병하여 무신들의 원한을 갚아주었는데 어찌하여 무신인 너는 나를 죽였느냐? 그러고도 네가 살아남길 바라였더냐?"하며 큰칼로 경대승을 내려치는 것이었다.
소스라치게 놀라며 경대승은 눈을 떴다. 온몸에 식은땀이 흘렀고, 몸에는 심한 열이 났다. 그 이후로 경대승은 자리에 누웠다.
몇일후 도방소속 장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쓸쓸히 30세의 젊은 생을 마감했다.
경대승은 고려사에서 기록되어지길 충신열전에 기록되어있다.
거의 모든 무신시대 100년동안 집권했던 무신들이 반역자로 몰렸으나
오직 경대승만이 충신으로 분류돼 추앙을 받았다.
조선건국할시의 이성계가 꿈을 꾸었는데 꿈에 큰 칼을 품은 경대승이 나타나
"나의 자손 시중 경복흥은 청덕이 있으나 너무 늙었고, 장군 최영은 직명이 있으나 너무 고지식하나, 반면 그대는 문무겸전하고 덕망이 있는 왕재(王材)로서 백성이 따르는 바이므로 이 금척을 주는 것이니 상서로운 명을 받아 제위에 오르라"하는 것이었다.
훗날 조선을 건국한후 이성계가 말하길 "경대승장군의 자손에게는 천만 세까지도 천역을 맡기지 말라"고 하여 경씨 가문은 부역이나 군역이 면제되었다.
경대승이 죽고 나자 지휘자를 잃은 도방은 갈팡질팡했다. 신료들이 황제를 부추겨 영을 내려 도방을 해산케 하였다. 도방이 해산할 때 도방소속 장사패들이 도방에서 쌓아놓은 재물들을 서로 약탈해 가니라 내분지란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조정에서는 이틈을 보아 관군을 내려 이들을 모조리 잡아들여 죄과를 논해 100여명의 핵심 인물들은 참형에 처했으며 나머지 장사패들은 모조리 잡아 섬에다 유배를 보냄으로써 5년간의 짧은 경대승 천하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정중부와 경대승은 다같이 무인이었지만 서로 생각이 달랐다. 정중부는 무신정변에 동의했으나 새로운 세상을 열어볼 뜻이 별로 없었다.
이미 고위직에 올랐을 뿐 아니라 나이도 많이 먹어서다.
경대승은 달랐다. 정변이 일어났으나 달라진 건 없고 오히려 더 어지럽고 지저분 한 세상이 됐다.
젊은 혈기에 불탔던 그는 정중부 일당을 제거하고 달라진 세상을 만들려 애썼다. 하지만 실패했다. 너무 젊었고 지지기반도 넓지 않았다.
목적만큼 수단과 방법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대목이다.
여하튼 경대승이 죽어 공백이 된 틈새를 노려 황권을 회복하려 하였다.
그러나 군소 무신들의 힘이 만만치 않아 이가 쉽지 않았다.
이에 명종은 경주로 숨어들어간 이의민을 불러들여 이들을 제어코자 하였으니 여우굴에 호랑이를 청한격이었던 것이었다.
한편 경대승이 병사하자 물만난 고기가 있었으니 바로 희대의 주인공 이의민이다.
이의민의 연표를 대략 읇어보면
경주 천민출신으로 경주에서 깡패짓을 하다가 죄를 짓고 고문을 받다,이자양에게 천거되어 서울(개경)로 올라와 경군의 말단 병사에 편입되었다가 무예가 출중하여 의종의 눈에 띄어 대정에서 별장이 되었다가 보현원의 학살에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했다는 이유로 중랑장이 되어 곧이어 장군으로 벼락출세를 하였다. 무신정권의 행동대장으로 행동하며 김보당의 난 땐 경주로 오천여 군사를 이끌고 내려가 의종을 직접 시해한 공으로 대장군에 올랐으며, 조위총이 난을 일으키자 출전하여 연전연승하여 상장군까지 오르게 되었다. 그러던 사이 경대승이 무리를 이끌고 정중부일당을 살해하자 이의민은 내심 젊고 과격한 경대승이 무서웠다.
경대승 또한 정중부휘하의 고위직 장성들에게 좋지않는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특히 전황제를 시해한 이의민은 대놓고 가만두지 않겠다고 벼르고 있었다. 이때 조정 신료 대부분은 과격한 경대승보단 자신들의 지위를 보장해주는 허승을 더 따르고 있었다. 이런 이유로 경대승이 허승을 제거한후, 소문을 내길 "허승이 발병하여 경대승을 살해했다"헛소문을 내었다. 신료들의 움직임을 파악하여 죽일자와 살릴자를 가르기 위함이었다.
경대승이 허승에게 죽었다는 말을 들은 이의민은 뛸듯이 기뻐하며
"내가 한주먹으로 경대승을 쳐 죽이려 기회를 보고 있었는데, 허승이 선수를 쳤구나! 안타깝도다 안타까워!"하며 공공연히 큰소리를 쳤다.
옆에서 책사 두두을이 말하길
"장군! 경대승은 허승 따위에게 죽을 위인이 아니옵니다. 장군께서 공공연히 그렇게 경대승을 놀렸으니 그가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이옵니다"
돌연 놀라며 이의민이 말하길
"그럼 이일을 어찌하면 좋겠는가?"
"지금은 목숨을 부지하는것이 급선무올시다. 어짜피 경대승정권은 그리 오래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선 황도를 빠져나가 경주로 가 훗날을 도모하는것이 옳습니다"
"경주로? 그래 경주는 나의 고향이다. 거기 호족들도 예전에 내가 인심을 써 은혜를 베풀어준자들이지. 그래 이런 허수아비 상장군 따위는 버리고 경주로 가자!"
이리하여 이의민은 가족들과 측근 몇을 데리고 야밤에 황도를 벗어나 부리나케 도주해 경주로 숨어 들었던 것이다.
이의민이 달아났다는 소식을 들은 경대승은 곧바로 추격병을 보냈으나, 조정일이 시급해 더이상은 쫒지 않았다.
시간은 흘러 4-5년간의 경대승 천하가 한낫 병마에 의해 막을 내리고 말았다.
경대승이 갑자스레 병사하자 정권의 공백기가 시작되었다.
그틈을 노려 실권이 전혀 없던 황제는 내심 이 기회에 황권을 확립하려 하였고, 경대승 아래에서 숨죽이고 살던 고위무신들은 옛날의 영광을 재현코자 서로 세다툼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확실한 힘은 없어 정권의 정면에는 나올수 없었다. 이미 힘이 있는 자들은 이의방,정중부,경대승 시절을 거치면서 대부분 도륙된 상태였기 때문에 조정은 그야말로 고만고만한 무신들과 힘없는 황제만이 있을 뿐이었다.
황제가 측근인 최여해,최우청,민영모를 불러 들여 말하길
"짐의 곁에는 짐을 보필해줄 자가 아무도 없구나! 역신들은 다 죽고 지금 조정엔 힘없이 늙은 무신들만 있으니 어찌 그들에게 조정대사를 맡길수 있으랴! 통탄토다. 짐의 곁에 누가 있으랴!"
황제의 측근인 문신 최여해가 말하길
"폐하! 삼가 아뢰옵니다. 역신들이 모조리 죽었다고는 하나 아직도 역도의 무리들이 사방에 있사옵니다. 만약 그들에게 큰힘을 보이지 않는다면 그들은 폐하를 깔보고 업수히 여겨 언제 다시 사악한 마음을 품을지 모를 일이옵니다"
"그렇다면 큰일이 아닌가? 짐의 곁엔 그들을 막아줄 인재가 없어! 아무도 없단 말이야!"
측근인 무신 최우청이 말하길 "폐하! 오로지 한위인만이 폐하를 지켜드릴수 있나이다"
"오! 그게 누구인가? 짐을 지켜줄수 있는 자가 정녕 있단 말인가? 그게 누구요?"
"바로 전에 상장군을 지냈던 이의민이 적임자라 사료되옵나이다"
"이의민? 그자는 파락호가 아니오? 나의 형님인 의종폐하도 그자의 손에 의해 돌아가셨소이다. 그런자를 짐의 곁에 두라니 대간은 제정신이오?"
최우청이 재차 말하길
"이의민이 비록 지난날 금수와 같은 짓을 하였으나 본시 일자무식하여, 다른이가 시키는데로 하였을 뿐이옵니다. 그자를 조정에 불러 잘 타일러 여러 악독한 무리들이 감히 세를 못피도록 한다면 그보다 더 좋은일은 없을거로 사료되나이다"
"그래! 이의민은 정말 일자무식이지. 잘만 설득하면 사냥개로 쓰기엔 그만한 인재도 없을터, 허나 그자는 너무 잔악해, 형님께서도 그의 손에 비명에 가지 않았나 말이야!"
최우청은 다시 말하였다.
"소신에게 맡겨주시옵소서. 본시 소신은 문신 출신이오나 폐하의 잠저시절 잠시 인연으로 무신들의 난때 화를 면하고 각종 공을 세워 오늘날에 이르렀나이다. 어찌 죽음으로 폐하를 보필하지 않겠나이까? 소신은 견마지로로 폐하를 모실것이옵니다. 이의민은 저와는 잘아는 사이입니다.
조위총의 난때 소신은 그자와 더불어 전장을 누볐사옵니다. 저의 말이라면 이의방도 폐하의 충용스런 신하가 될수 있을것이옵니다! 폐하"
"대간의 말씀이 그러시다면 그렇게 합시다. 마땅히 인재도 없으니 그리하도록 하오"
이리하여 경주로 칙사를 보내 이의민을 불러들였다.
경주에서 놀고먹던 이의민에게 낭보가 들려왔다.
바로 경대승이 죽은 것이다. 덩실덩실 춤을 추며 이의민은 기뻐했다.
"올커니! 경대승이 죽었구나! 어린놈이 그만 죽었어! 하하! 이제 세상은 내것이다! 얼쑤!"
이러는 사이 칙사가 영을 받잡고 이의민 앞에 섰다.
"짐은 특별히 영을 내려 사직했던 전 상장군 이의민에게 다시금 기회를 주고자 하노라. 그대는 영을 받는 즉시 상경해 짐을 보필하라"
"폐하! 황공하나이다. 소신 견마지로로 크신 은혜에 보답하겠나이다"
울면서 이의민은 읇조렸다.
이리하여 이의민이 상경하자 평소 이의민의 괴력을 아는 자들은 벌벌떨었다.
신료1 "그 괴물이 온다지? 어허 성상께서는 어찌하여 그런 파락호를 불러들이신단 말인가? 큰일이로세"
신료2 "그러게 말이오. 그자가 누구요! 사람 죽이기를 밥먹듯이 하는 아차아니요! 보통일이 아니오!"
손석원 왈"그렇게 생각할일도 아니지오! 경대승이 지난날 공신들을 모조리 잡아 죽이고 그사이 우리 무신들은 다시 옛날처럼 홀대를 받았소이다. 이의민이 비록 잔악하다 하나 무신에게만은 그리 각박하지는 않소이다 그려!"
김연존 왈 "지켜봐야 알겠지요. 하여튼 지금 시국으로써는 그만한 적임자가 없소이다. 군소 신료들이 서로 다투고 서로 세를 과시하고 있으니 말이오. 하루도 조정이 조용할날이 없소이다 그려"
여하튼 황도로 입성한 이의민은 맨먼저 친구 대장군 두경승을 찾아갔다.
두경승은 본시 인품이 운후하고 인자한데다 무예까지 출중하여 그야말로 무신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고 있었다. 본시 청렴결백하여 경대승이 무신들을 잡아 죽일때 화를 면할수 있었다.
본시 이의민과는 초급장교시절부터 서로의 무예에 감복해 의기투합하여 의형제를 맺고 있었다.
그러다가 이의민이 의종을 시해하자 분개하여 의절하고 지냈다.
"이보게! 경승이 오랫만일세! 그동안 별일 없었는가?"
"이장군이 웬일이시오? 어찌하여 바쁘신분이 일개 미천한 이 두경승을 다 찾아주시오!"
쌀쌀한 두경승의 말에 이의민이 눈물을 흘리며
"이보게 경승이 자네와 난 한날 한시에 죽기로 맹세한 형제일쎄. 그동안 잠시 소원하였으나 어찌 이리 야박하게 구시는가?"
"그걸 몰라서 그러는 것이더냐? 어찌하여 계림에서 주인에게 칼을 들이대는 천하의 역적질을 하였더냐?"
"어쩔수가 없었네! 자네도 알지 않은가? 우리가 무슨 힘이 있었나? 그저 위에서 시키면 시키는데로 할수밖에 없는게 우리같은 무신들이 하는일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이제는 시대가 바뀌었네. 이제는 우리 세상이야. 난 진심으로 폐하를 모실작정일세. 더불어 우리의 입신양명을 꾀한다면 더욱더 좋은일이 아니겠는가? 지금은 사람이 많이 부족하네. 자네가 옛정을 보아 나를 도와준다면 세상에 못할일이 없지 않겠는가?"
이렇듯 이의민의 말에 두경승도 넘어가고 지난날의 일은 모두 잊고 새로운 세상을 열기로 다시금 결의 형제를 맺었다.
이의민은 곧 황궁에 들어가 황제앞에 부복하여 영을 받았다
"지난 수년동안 역적들이 발호해 조정이 시끄럽고 백성 또한 싸움에 휘들려 많은 이가 살상당하였다. 짐은 고심한 끝에 전에 역적들을 피해 잠시 낙향했던 많은 인재들을 다시금 불러 모아 조정을 평안케 하고자 한다.
이에 전날에 상장군을 지냈던 이의민을 불러오게 하였다. 이의민에게 공부상서직을 임명하니 경은 필사의 노력으로 짐을 보필하여 조정과 백성을 평안케 하라"
"존명! 목숨으로 보은하겠나이다" 눈물을 흘리며 이의민은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1184년 이의민이 공부상서로 조정일에 관여하게 되어 사실상 황제의 영을 대신하게 되자 그에게 전국각지에서 구름같이 인재가 모여들었다.
책사 두두을은 이의민을 막후에서 조정하여 조정을 점차 이의민의 사람들로 채워나갔다. 무식하기만 한줄 알았던 이의민이 선정을 베풀자, 그에게 반감을 품었던 여러 신료들도 그에게 마음을 열게 된것이다.
특히 천한출생들이 많았던 고위무신들은 같은 처지였던 이의민이 실세가 되자 이의민에게 호감을 갖기 시작했다.
6년후 1190년 이의민은 조정을 평안케 하였다는 공으로 중서문하 평장사(종2품)으로 승격되었고 1년후인 1191년엔 병부판사직을 맡아 병권을 손에 잡았으며 1194년엔 공이 크다하여 공신에 책봉되고 시중이 되었다.
그가 정권을 잡자 그는 파격적인 인사를 단행했다. 특히 내관의 무관겸직을 허용하자 하급 무신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즉 같은 천한 출신인 이의민은 하급군바리의 인심을 대폭적으로 얻은 것이다.
또한 이의민 자신은 자신의 호칭을 신도재상(新道宰相)으로 부르게 했다. 오늘날로 따지면 "신바람,새바람 지도자"쯤 되는 바람을 일으키고 있었다.
당시에 조정을 이끌던 무신들은 이의민,두경승,손석원,김연존등 4인방이었는데 특히 손석원과 김연존은 사사껀껀 대립했다.
둘은 만나기만 하면 싸웠는데 걸핏하면 채통도 관계없이 힘싸움을 하여
많은 문신들의 비웃음을 받기도 하였다.
하여튼 10여년의 이의민 정권하에 두루 나라가 평안하고 고위직 신료부터 하위직 병졸까지 인심을 폭넓게 얻고 있었기 때문에 누가 보아도 이의민정권은 철옹성처럼 보였다.
그러나 역사의 수레바퀴처럼 이들에게 반감을 가진 세력이 있었으니 바로 고급 군바리 명문자제의 후예들이었다.
그중 상장군 최원호의 아들인 최충헌이 있었는데 최충헌은 음보로 등용되어(고급관료의 아들로써 빽으로 조정에 출사하는제도) 도필리라는 문신의 관직에 있었으나 이를 수치로 여겨 실력으로 자신의 실력을 발휘코자 무반의 길을 택했다. 그러나 명분세가의 자식으로써 무반의 길을 걷게된 그의 출세는 매우 더뎠다. 그의 상급자들은 모조리 천한신분의 무반들이었으므로 명문세가의 최충헌을 좋게 볼리가 만무했다. 그들에게서 소외된 최충헌의 불만은 날로 커져갔다.
그러던중 기회가 왔으니, 명종 4년에 장군 기탁성이 조위총의 난을 평정하려 출정하면서 최충헌이 용감하다는 소문을 듣고 별초도령(영관급)으로 선발 임용하고 그 공로로 누차 승진되어 섭장군(장군의 반열)이 되었다. 장군에 오르게 되자 드디어 힘을 가지게 된것이다. 당시 고려의 군편제를 살펴보면 장군직엔 상장군.대장군.장군순이었는데 일단 장군이 되면 1령의 군사를 지휘했는데 1령의 군사는 최소 일천명으로 독자적으로 병력을 운용할수 있었다.
한편 조정을 자기세력으로 메꾼 이의민의 야망은 점차로 커지게 되었다.
어느날 이의민이 꿈을 꿨는데 꿈속에 자기 아들 이지순의 양쪽 겨드랑이에서 일곱 빛깔 무지개가 올라오며 날개를 돋쳐서 하늘로 올라가는 꿈이었다. 급히 두두을을 불러 해몽을 부탁했다.
"장군! 이꿈은 보통 꿈이 아니옵니다."
"아니 그게 무슨말인가? 상세히좀 말씀 좀 해보시게!"
"용이 되어 하늘로 승천했다는 것은 바로 제위에 오르실 꿈이옵니다"
놀라며 "아니 그럼 내아들 지순이 황제가 될 꿈이란 말인가?"
"그렇사옵니다! 지금 세간엔 참위설이 돌고 있는데 이는 바로 장군을 두고 하는 말인듯 합니다"
"그 참위설이라는게 대체 무엇인가?" 되묻자
두두을이 말하길 "참위설이란 바로 용의 자손이 12대에 이르면 황제가 된다는 것으로 十八字위왕설을 뜻하는 것이옵니다. 즉 十八字성을 가진 자가 새로운 주인이 된다는 것이옵니다. 즉 李씨가 왕씨를 누르고 새로운 황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장군께서도 십팔자의 성을 가지시고 또한 장군께서는 지모와 용맹이 천하에 따를자가 없사옵니다. 덕이 천하에 넘치고 우러러 보지 않는 자가 없으니 참위설은 바로 장군을 지칭하는 것이옵니다" 아첨을 떠는 두두을의 말을 들은 이의민은 기분이 매우 좋아졌다
참고로 참위설이 고려시대에 유행했었는데 훗날의 눈의로 보면 틀린말은 아니었다. 결국 이성계(이성계는 전주인인 이의방의 동생의 먼후손)가 고려를 무너트리고 조선을 건국했으니 말이다.
이자겸.이의민이 이 참위설을 신봉했다고 하나 이의민은 조작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일자무식인 이의민이 참위설을 신봉했다는것은 최충헌이 정권을 찬탈하기 위한 명분으로 훗날 조작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설이다.
후략하고 이의민은 자기가 황제에 오르다고 하자 마치 하늘로 승천하는 착각에 빠졌다.
"그렇지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겠는가? 천하에 나를 따를자가 없고 백성들도 새로운 세상을 원하니 나라고 뜻을 이루지 못할 까닦이 없지 않은가? 또 고려는 이미 국세가 기울었다. 나는 신라인의 후예로써 고려를 뒤집어 엎고 신라를 다시 세운다면 신라인들이 나를 따르지 않겠는가?"하는 망상에 빠졌다.
두두을은 계속 이의민을 부추겼다. 이에 이의민은 경주에 사람을 보내 그곳의 민심을 살피는 한편 경주의 호족을 포섭하고 비밀리에 물자를 대어 군사력을 키우게 하였다.
다시 최충헌으로 돌아가자.
본래 최충헌이 거사를 일으킨 발단은 비둘기였다. 이의민에겐 3명의 아들(이지순,이지영,이지광)이 있었는데 하나같이 포악하고 안하무인격이었다. 그중 이지영과 이지광은 세간에서는 쌍칼형제라고 불렀다. 이들의 취미가 있었으니 바로 고관대작의 자택을 방문하여 위협하여 재물을 약탈하고 여자를 강탈하는 것이었다. 하루는 이지영이 최충헌의 동생인 동부 녹사벼슬에 있던 최충수의 집을 방문했다. 최충수은 겉으로 성심성의껏 이지영을 위해 잔치를 베푸었다. 잔치가 절정에 이르자 이지영은 취하여 집안을 둘러보다 새장에 비둘기 한마리가 있는것을 보았다.
이 비둘기는 최충수가 매우 아끼는 새로써 직접 먹이를 주며 지극정성으로 키운새였다. 눈치를 보아하니 최충수가 비둘기를 매우 아끼는 것을 안 이지영은 다짜고짜 비둘기를 가지고 가려하자 최충수가 금은 보화는 줄수있어도 비둘기는 줄수없다고 애원하자 대노하여 유명한 쌍칼을 빼들고 최충수를 위협했다.
"네놈이 살기가 싫은가 보구나? 어찌 이 비둘기 한마리에 목숨을 걸려 하는냐? 여봐라 애들아 이자를 꽁꽁묶어라 내 이자를 끌고가 물고를 내리라"
이지영의 영에 휘하장사패들이 최충수를 붙잡고 끈으로 묶으려 하였다.
이때 최충수가 크게 소리치며
"장군, 세상에 이런 일이 어디에 있습니까? 장군이 나를 직접 묶는다면 모르지만, 나도 벼슬에 있는 몸인데 하인을 시켜서 묶다니요?"
이지영은 잠시 생각하더니,
"네 용기가 대단하다. 풀어 주마." 하고는 장사패들에게 명하여 풀어주었다.
의기양양해진 이지영이 돌아가자 최충수는 화를 참지 못하고 장군벼슬에 있는 형을 찾아갔다. 자초지종을 들은 최충헌은 화가 머리끝까지 뻗쳤다. 가뜩이나 명문세가의 후예인데(최충헌의 부는 군바리 최고벼슬인 상장군까지 지냄) 천한 출신인 이의민이 정권을 휘두르는것을 못맞땅하게 여기던중 그의 아들들까지 날뛰니 화가 머리끝까지 나버렸다.
"이의민 4부자는 실로 국적이니 반드시 죽이고 말리라!
그길로 최충헌은 생질 박진재와 친척 노석숭을 찾아가 이를 의논했다.
또한 이의민 정권에 소외되어 있던 명문세가의 후예들을 찾아가 이들의 의중을 떠보며 은밀히 세를 모아 나갔다.
한편 이의민의 영을 받아 두두을은 은밀히 경주로 향해 경주 호족의 대표격인 김사미와 효심을 만났다.
"인근의 호족 김사미라 하외다, 이쪽은 효심입니다. 헌데 책사께서 어인일로 저희들을 부르셨는지요?"
"아니 별일 아니오! 시중께서 항상 말씀하시기를 고향을 잊으면 안된다 하시며 고향사람들을 항상 생각하고 계시기에 이참에 경주의 사정이나 알아볼까 해소 내려왔소이다."
"허허 그러십니까? 장군께서 저희 경주사람들을 그토록 생각해 주신다니 이러한 영광이 없소이다 그려 허허"
"이곳 경주는 언제와도 참으로 좋소이다. 이곳은 바로 천년 신라의 황도가 아니었소이까? 그 옛날 백제 견훤왕이 황도를 짖밝아 지금은 초라한 궁터만 남았으니 이 어찌 통탄할일이 아니겠소이까?"
"맞습니다. 이곳은 분명 천년 신라의 도읍지였지요. 허나 모두 지나간 일이올시다. 지금은 잊혀져가는 변방의 지방에 불과합지요. 또한 고려가 개국했다고는 하나 우리 신라사람들은 도무지 관직에 나갈수조차 없소이다. 수많은 신라의 인재들이 지방 촌구석에서 술로써 세월을 보내니 이 어찌 분통하지 않을수 있겠소이까?"
두두을이 목소리를 낮으며 은밀히 말했다.
"그래서 내가 온것이오. 사실 이 조정은 저번 전황제 때 경주가 한때 역모에 가담하였다는것을 잊지 않고 있소이다. 틈만나면 경주를 침략해 쑥대밭으로 만들어야 한다고들 주장하고 있소이다. 이러한 일때문에 이의민 장군께서 은밀히 나를 보낸것이올시다."
"정녕 그런일이 있사옵니까? 이런!이런! 우리 신라사람들의 씨를 말리려고 하는 짓거리가 아니오리까?"
두두을이 재차 말하길 "이대로 당하면은 안될것이오. 이에 장군께선 조정의 간악한 무리를 싹 쓸어버리고 옛 신라의 영광을 재현하려고 하시오. 그대들이 조금만 도와준다면 장군께서 제위에 오르는 일도 불가능하지만은 않소이다. 장군께서 옜신라를 다시 세운다면 다시 이곳 경주는 만년 도읍지가 되어 영원히 번영을 누릴것이오. 뿐만 아니라 그대들도 모두 재상이 되어 자손만대 부귀를 함께 할것이오."
"오오~ 정말이오이까? 장군께서 거병하신다면야 우리들이 앞장서야지요. 암!"
두두을이 말하길 "그래 두분께서 모을수 있는 군사는 어느 정도나 되오?"
"인근 호족들을 포섭해 사병을 전부동원하면 일만은 족히 되옵니다."
"경주에 주둔하는 관군은 얼마나 되오?" "관군이라고 해봤자 일천정도에 불과합니다. 또한 대부분이 우리의 영을 받고 있으므로 관은 염두에 두지 않아도 좋습니다. 또한 신라를 재현한다는데 어찌 신라 장졸들이 가만히 있겠소이까? 방을 붙여 징병을 한다면 족히 오육만은 될것이옵니다"
"음 좋소이다. 필요한 물자는 이의민 장군께서 모두 대주실 것이오. 그대들은 속히 일을 도모토록 하오"
이리하여 이의민의 지원을 받은 김사미와 효심일당이 명종23년 경주인근 운문산에서 신라부흥을 명분으로 거병하여 관을 습격하고 인근 주현을 점령하여 세를 불리니 그 군세가 날로 커져서 5만에 이르는 대군이었다.
이는 이의민이 지시한바로 이들의 군대와 연합하여 동시에 개경에서 난을 일으켜 고려를 무너트리려는 속셈이었다.
명종은 크게 놀라 대장군 전존걸. 노식등을 토벌군으로 보냈다. 이때 이의민의 아들 이지순도 군을 이끌고 동행했는데
이의민의 비밀영을 받은 이지순은 비밀리에 반란군과 내통해 토벌군의 작전을 미리 알려주었다.
토벌군의 작전을 모두 간파한 반란군은 싸우는 족족 토벌군을 격파하니 토벌군은 패전하여 후퇴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한편 사령관 전존걸은 이지순이 반란군과 내통한다는것을 알아챘으나
이의민이 두려워 자결하고 만다.
날로 반란군의 세가 커지고 신라부흥에 동조하는 경상도인이 늘어나자 조정은 다시금 대군을 일으켜 남로착정병마사 최인과 도지병마사 고용지를 보내어 토벌케하였다.
그러나 최인은 이미 이의민에게 포섭된 사람으로써 짐짓 싸움을 하지 않고 정세만 살펴보고 있으니 조정에서는 다시 영을 내려 최인을 파직했다.
이에 고용지는 대군을 이끌고 재차 남하하여 반란군과 대치하였다.
고용지는 병법에 능해 반란군을 살펴보니 지휘계통이 일사분란하지 못하고 대부분 급조된 오합지졸들이라 헛점이 많았다.
이에 경주인근에서 반란군을 포위섬멸하여 효심을 비롯한 7000여명의 반란군을 참수했다. 수천명의 전사자가 나자 반란군은 지리멸멸해 도주자가 속출하여 군세가 눈에 띄게 줄어 도저히 감당치 못하자 김사미는 이의민을 믿고 관군에 항복하였다.
고용지가 김사미를 심문하니
"이 초적놈아 신라는 이미 망한지 수백년이 되었는데 어찌하여 난을 일으켰던 것이냐?
"이보시오 장군. 그리 머라 마시오. 우리들 뒤엔 이의민 장군이 계시오. 그분께서 영을 내려 우리는 따른것 뿐이오. 아니 그러하오 이지순장군"
"머라? 이런놈을 보았나? 감히 이의민 장군을 모함하다니?"
동행했던 이지순이 말하길 "이런 역적놈을 보았나? 그 더러운 입으로 감히 아버님을 모함하다니! 장군 이자를 당장 효수하여 쓸데없는 오해의 소지를 제거함이 마땅하외다"
이미 고용지도 이의민편에 있던 장수라 급히 영을 내려 김사미를 효수하였다. 이로써 김사미,효심의 난은 평정되었다.
그러나 현장에 있던 장교중 하나가 최충헌을 찾아가 이러한 사실을 고변하였다. 최충헌은 호시탐탐 이의민을 제거할 구실을 찾고 잇었는데 절호의 기회를 맞은 것이다. 비밀리에 명종을 알현한 최충헌은 이러한 사실을 보고했고, 명종은 크게 놀라 최충헌에게 이의민을 제거하라는 영이 담긴 문서를 내리게 된다. 명분을 갖게된 최충헌은 명문세가의 자제들을 포섭하는등 기회를 노리고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기회는 쉽지않았다. 이의민은 조심성이 의외로 많아서 주위에 항상 대병을 이끌고 다녀 때가 제대로 오지 않았다. 그러던중 이의민이 사냥을 하러 미타산에 들어갔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미타산은 산이 험준하여 대군을 이끌고 들어갈수가 없었다. 때가 왔다고 느낀 최충헌은 최충수. 박진재. 노석숭등을 이끌고 정예 사병 수십을 이끌고 이의민이 기거하는 산장에 쳐들어 갔다.
마침, 이의민이 밖으로 나와서 말을 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순간 최충수가 앞으로 나아가 비수를 던졌으나 빗나갔다. 이의민을 호위하는 무사들이 칼을 빼어들자 일대 난투가 벌어졌다. 그러나 최충헌쪽의 무사들이 훨씬 수가 많아 점차로 이의민의 무사들이 하나둘씩 쓰러져 결국은 이의민만이 남게 되었다.
"네이놈 네놈은 섭장군 최씨놈이 아니냐? 내 너를 소홀히 대접하지 않았거늘 감히 나를 죽이려 들어? 그러고도 내가 살기를 바라느냐?"
이의민이 쌍도끼를 휘두르며 저항하자 최충헌의 무사들이 속수무책으로 쓸어졌다.
"저 괴물은 도저히 정상적으로는 잡을수 없겠다. 이봐라 그물을 준비해라" 이에 최충수가 그물을 던지자 이의민은 그물에 걸려 허우적대고 있었다. 이때를 노려 주위의 무사들이 달려들어 이의민을 포박하고 몸을 꽁꽁묶었다.
최충헌이 말하길 "네이놈 역적놈아! 천한 네놈을 성상께서 어여삐 여겨 온갖 부귀영화를 주었음에도 모잘라 도당을 만들어 난을 획책하고 감히 폐하를 시해하려해? 다행이 지엄하신 폐하께서 너의 간악한 뜻을 헤아려 나에게 영을 내려 오늘 우리가 거사한 것이다. 역적질을 하고도 네놈이 살아남길 바란 것이더냐? 천한것의 족속들은 다 그러하던 것이냐 에잇 천한것 퉤에" 하며 이의민의 목을 쳤으니 희대의 주인공 이의민의 제삿날이 바로 그날이었다.
최충헌은 노석숭에게 시켜 이의민의 목을 칼끝에 메달고 개경저잣거리를 달리며 "역적 이의민을 참수하였다"라며 소리를 치게 하였다.
사람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어 이를 구경했다.
최충헌은 곧바로 황도로 돌아가 감행령의 장군 백존유을 찾아갔다.
"장군! 이의민이 역적질을 하여 폐하께서 영을 내려 오늘 이의민을 효수하였소. 허나 황도 도처에 역도들의 무리들이 상존하니 장군께서는 폐하의 심정을 헤아려 군을 내어 주시오"하며 황제의 영이 써있는 문서를 내놓았다. 내키진 않았지만 백존유는 황제의 영이라 하니 군을 안내어 줄수 없었다.
급히 군사를 보내 보제사에 행차하였던 황제에게 이러한 사실을 보고하였고 이천의 군사를 최충헌에게 내주었다.
이천의 군사를 이끌고 보제사에서 환궁하던 황제를 알현한 최충헌은
"역적 이의민은 일찍이 전황제를 해친 대역의 죄를 지고 있으며, 백성들을 포악하게 해치고 감히 제위를 노리고 있었나이다. 그러므로 저희들은 이미 오랫동안 그를 증오하여 왔으며 지금 나라를 위해서 처치했는데 비밀이 누설될까 두려워 선참후계하니 백 번 죽을 죄를 졌습니다. 허나 아직 역도의 무리가 도처에 있으니 이들을 마저 벌하게 하여 주시오소서"
하이 명종은 이를 허라하였다.
곧바로 이지순,이지광을 비롯한 이의민의 구족을 잡아들여 모조리 참수하여 저잣거리에 매달았다.
이지영은 소식을 듣고 애첩 자운선과 더불어 급히 몸을 피해 황도를 빠져나갔으나 최충헌의 영을 받은 한유에게 쫒기다 황해도 해주에서 사로잡혀
참수당했다. 자운선도 같이 참수당할뻔 하였으나
최충헌이 오래전부터 자운선을 흠모하였으므로 친히 찾아가 자운선을 위로하고 자기집으로 데려가 첩으로 삼았다. 그러나 자운선을 얼마뒤 이지영을 못잊고 신세를 한탄하며 자결하고 만다.
한편 최충헌은 이어 대장군 이경유,최문청등과 함께 잔당의 소탕을 청하고 드디어 그들과 함께 시가로 나와서 자리잡고 초모하였더니 장사들이 이에 호응하여 나섰다. 이렇게 되니 각 위의 장졸들도 모두 모여 들어서 무릎을 꿇고 명령을 들었으며 감히 쳐다보지도 못했다. 그제는 성문을 닫고 각처에서 이의민의 일당을 수색해서 전부 체포했다.
최충헌과 최충수는 최문청,이경유와 함께 인은관에 회합하여 일을 모의하고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평장사 권절평,손석,상장군 길인등이 거병을 획책하고 있다고 고발하였으며 또 이경유도 딴 꿈을 꾸고 있다고 밀고하니 최충헌은 곧 권절평의 아들 장군 권준과 손석의 아들 장군 손홍윤을 불러 와서 술을 마시며 평소와 다름없이 담소하다가 갑자기 좌우 장수들에게 눈짓하여 몸을 꺾어 죽이고 또 그 자리에서 이경유를 목 베어 죽였으며 최문청은 늙고 또 정직한 사람이라 하여 죽이지 않고 돌려 보냈다.
그리고 나서 최충헌 등이 시가의 군막에 앉아서 장졸을 각처로 파견하여 권절평,손석,장군 권윤,유삼상,어사중승 최혁윤등을 체포해다가 죽였다.
그때 상장군 길인은 수창궁에서 사변을 듣고 장군 유광,박공습등과 함께 무기 창고의 병장기를 무단 출고해서 금군,환관,노비등 약 1천여 명에 나누어 주면서 말하기를 "지금 최충헌이 반란을 일으키고 무고한 사람들을 많이 죽이고 있으니 앞으로 화가 너희들에게 미칠 것이다. 각자는 힘을 다하여 큰 공을 세우라"라고 하고 궁문을 나서서 모래재를 넘어 시가로 향하였다. 그런데 최충헌 등은 군사를 내어 맞받아 싸웠는데 최충헌은 결사대 10여 명을 선발해서 선봉대로 삼아서 칼을 휘두르며 고함을 지르면서 적진을 돌파하고 나아가게 하였더니 길인의 무리들은 바라보고 산산이 흩어졌으며 길인,유광,박공습은 말을 달려 수창궁으로 들어가서 궁문을 닫고 항거하여 지켰으므로 최충헌 등이 군대를 인솔하고 포위하였다. 그리고 백존유가 화공을 하려고 하였으므로 길인이 겁이 나서 담을 넘어 도망갔다. 황제가 궁문을 열고 최충헌과 최충수를 부르게 하였으나 최충헌은 길인이 궁 내에 있는 줄만 의심하고 낭장 최윤광을 시켜 궁에 들어가서 황제에게
"이의민이 잔당들이 내전에 숨어 들었으니 청컨대 궁중에 들어가서 수색 체포하도록 하여 주십시옵소서"
황제가 이를 허락함으로써 최충헌은 군사를 이끌고 황궁에 침입하여 닥치는대로 살상하니 송장이 도처에 흩어져 있었다.
이에 유광과 박공습은 자살했으며 황제의 좌우 시신들은 모두 다 흩어져 달아나고 황후와 태자와 몇몇 궁희만 황제곁에서 벌벌떨고 있었다.
상장군 길인은 패하자 개경 북산으로 가서 머리를 깎고 승려로 위장해있다가 신세를 한탄하여 절벽에서 뛰어내려 자결하였다.
최충헌은 또 상장군 주광미, 대장군 김유신, 권연등을 죽였다.
어느날 승려한명이 찾아와 말하길
"길인이 왕륜사 승도들을 인솔하고 거사하려 하니 이를 방비함이 옳을줄 아뢰오" 하자 최충헌이 대노하여 가두어 두었던 길인일파 이인성등 36명을 죽이고 사람을 왕륜사로 보내 정찰케 하였더니 그때 중들이 모두 불당에서 식사하는 중인데 잠잠하여 아무런 다른 것이 없었다.
그래서 최충헌은 그것이 허위 고발임을 깨닫고 고발자 승려를 잡아죽이고자 하였으나 그 승려는 이미 도망간 후였다. 아무래도 왕륜사에서 쫒겨난 땡중이 아니었을까?
하여튼 문적의 처 최씨는 쌓인 송장 가운데서 남편의 시체를 찾아 가지고 이고 가니 보는 사람들이 눈물을 흘렸으며
최충헌이 이를 듣고"열녀로다"라고 말하고 장례를 차려 주게 하였다.
최충헌은 또 판위위사 최광원, 소경 권신, 장군 권식, 두응룡, 낭장 최비를 남녘 변방으로 귀양 보냈다.
또한 당대의 명장 두경승을 모함해 그를 섬으로 유배보냈다.
두경승은 분을 참지 못하고 유배지에서 피를 토하며 죽었다.
또한 이의민을 통해 천민을 위한 세상을 꿈꾸던 연담등 당대의 고승 열명도 같이 참수당했다.
여하튼 정권을 잡은 최충헌는 바로 폐정을 개혁하기 위해 황제에게 봉사십조(일명 개혁10개항)를 올린다.
또한 벼슬은 좌승선을 거쳐 지어사대사가 되었으며, 이듬해 충성좌리공신의 호를 받게 된다
이로써 수많은 정적을 모조리 죽이고 정권을 찾이한 최충헌에 의해 60년 최씨 정권은 시작되었다.
여하튼 정권을 잡은 최충헌는 바로 폐정을 개혁하기 위해 황제에게 봉사십조(일명 개혁10개항)를 올린다.
표문내용
"살피건대 적신 이의민은 성질이 맹수처럼 잔인하며 위에 대하여는 만모(慢侮)하며 아래에 대하여는 능포(陵暴)하였습니다. 그리고 제위까지 손을 대고자 음모하게 되어 화가 불꽃처럼 치열해지고 백성은 살길이 아득하였습니다. 이때 우리는 폐하의 성위(聲威)를 빌어 단번에 적신을 남김 없이 멸망시켰으니 바라건대 폐하는 낡은 것을 버리고 새 것을 위하여 노력하면서 모든 일에서 태조의 정대한 전법을 준수하여 중흥의 길을 밝게 개척하십시오. 여기에 삼가 10가지 사항을 조목별로 기술하여 폐하에게 올립니다.
옛날에 태조께서 삼한을 통일하시여 송악군에 수도를 정하고 명당자리를 선택하여 궁궐을 지어 자손 임금들을 위하여 영원히 안주할 곳으로 정하였으며 근년에 궁실이 화재를 당하였으나 또 옛 모양대로 신축하였습니다. 그런데 그처럼 웅장하고 화려한 궁전을 두고 구기의 설을 믿고 오랫동안 거처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도리어 음양에 배치되지 않는다는 것을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 원컨대 폐하는 길일을 택하여 들어가서 천명을 길이 받으십시오.
우리 고려의 관제는 녹수와 대비하면 차이가 있습니다. 양부를 비롯하여 각 부서에 잉여 인원을 두어서 국고의 녹이 부족한 것이며 그 폐단이 막심하니 원컨대 폐하는 옛 제도에 의준해서 감원하고 적절히 조절하여 관원을 두십시오.
선황제의 제도에 의하면 토지는 공전을 제외하고 신민에게 차등 있게 분여하였는데 벼슬자리에 있는 자들이 탐오하여 공전과 사전을 빼앗아 겸병하여서 한 집이 가진 기름진 옥토가 몇 고을에 걸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는 나라의 세 수입이 저하되고 군사들이 결핍을 겪게 하였으니 원컨대 폐하께서는 해당 기관에 명령하여 공문서를 검증하고 강탈당한 것은 전부 공사의 본 주인들에게 돌려 주도록 하십시오.
조와 부는 모두 백성에게서 나옵니다. 그러므로 백성이 빈궁하면 어디에서 충족하게 얻어 내겠습니까? 그런데 혹은 관리들이 불량하여 오직 사리만을 추구하면서 걸핏하면 민간을 침해하며 또 세도대가의 종들이 경쟁적으로 백성들에게서 전조를 강제 징수하고 있으니 백성들이 모두 근심과 고통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폐하는 선량하고 유능한 인사를 선택하여 지방 관직에 임용함으로써 세도 대가들이 백성의 살림을 파산시키지 못하게 하십시오.
국가가 양계에 도총사를, 5도에 안찰사를 파견한 것은 오로지 관리의 간악한 행위를 억제하고 민폐를 방지해 주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각 도의 안찰사들이 응당 안찰할 일을 안찰하지 않고 그저 백성들에게서 가렴주구해서 황궁에 공진한다는 명목으로 역으로 이용해서 운반해다가 사적 소비에 충당하는 일이 간혹 있으니 바라건대 폐하는 각도 안찰사들의 공진을 금지하고 전적으로 검열을 그 직분으로 삼게 하십시오.
지금 산중에 있을 중 1∼2명이 항상 황궁을 돌아다니며 침실까지 드나들고 있습니다. 폐하는 불교를 혹신하고 이런 것을 관대히 용인하고 있으나 그 승려들은 폐하의 총행을 방패로 삼고 자주 간청함으로써 성덕을 더럽히고 있으며 폐하는 내신들을 시켜 절간 일을 걸머지고 백성에게 알곡을 대여하여 그 이식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 폐단이 적지 않으니 바라건대 폐하는 땡땡이 중들을 물리쳐서 궁중에 그 발자취가 없게 하며 곡식으로 장리 놓지 못하게 하십시오.
근래 듣건대 지방 관리들 중 탐욕자가 많아서 도무지 염치란 찾아 볼 수 없는데 각 도의 안찰사들이 이를 방임하여 두고 있으니 설사 어질고 청백한 자가 있어도 알려지지 않으므로 악행은 조장되며 청백은 무익한 것으로 되어 징계도 권장도 없습니다. 바라건대 폐하는 양계도통과 5도 안찰사들에게 명령하여 관리들이 유능한가 못한가를 살피게 하여 자세히 장계하게 한 후 유능한 자는 탁발 등용하고 그렇지 못한 자는 징계하십시오.
지금 조정의 신하들이 절약하는 검박한 기풍이 전혀 없으며 집이나 꾸리고 옷맵시나 보고 완상품을 갖추고 진귀한 보물로 몸 장식을 하여 그것을 자랑하고 있으니 이렇게 풍속이 퇴패해서는 멀지 않아서 좋은 풍속이란 찾아 볼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바라건대 폐하는 백관들에게 훈시를 내려 사치를 금하고 검소를 숭상하게 하십시오.
옛날 조종 성대에서는 반드시 산천의 순역을 고려하여 사찰을 창건함으로써 그 지세에 순응시켜 안치시켰는데 후대의 장수나 재상들과 무례한 승려들이 산천의 길흉을 고려치 않고 소위 원당이라는 절을 세워서 지맥을 손상하여 재변이 자주 발생하고 있으니 바라건대 폐하는 음양관을 시켜 검토하여 유익한 것 이외는 모두 남김 없이 철거시킴으로써 뒷사람들에게 뚜렷한 본을 보여 주십시오.
성(省)과 대(臺)의 신하들은 간언이 직분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성상께서 잘못이 있으면 과감하게 간언해야 하며 비록 참혹한 악형을 당하는 일이 있어도 달갑게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모두 다 그저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행동하여 융화 결탁할 생각들만 하고 있으니 바라건대 폐하는 적합한 인재를 선택하고 그런 후에는 조정에서 직언케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끝까지 쟁론케 하십시요"
동시에 최충헌은 내시 호부시랑 이상곽, 군기소감 이분, 지후 원춘등 50명은 세력을 등지고 모매하게 올라온 자이며 내시주로 될 수 없다고 인정하고 황제에게 상소문을 올려 파면시켰으며 또 황자로서 승소군이 된 왕홍기, 왕홍추, 왕홍규, 왕홍균, 왕홍각, 왕홍이등이 내전에 있으면서 정치에 간섭한다 하여 상소문을 올려 본사로 돌려 보냈고 또 황제가 폐행하는 중 운미, 존도가 왕궁에 출입하고 조정 관원들이 많이 그에 아부하였으므로 동시에 내쫓았다.
또한 벼슬은 좌승선을 거쳐 지어사대사가 되었으며, 이듬해 충성좌리공신의 호를 받게 된다.
명종은 속으로는 최충헌이 싫었으나 겉으로는 그를 우대했다
조서를 내려 이르기를
"좌승선 최충헌과 대장군 최충수는 악인을 미워하기를 원수 같이 여겨 손수 이의민을 죽여 종묘와 사직을 편안케 했으니 최충헌에게는 충성좌리공신 칭호를 주고 그의 부친 최원호에게는 봉의찬덕공신 칭호와 수태위문하시랑 벼슬을 추증하며 모두 벽상에 그 화상을 그려 두라" 하여 벽상공신을 삼았다.
그러나 아직도 최충헌을 달갑지 않게 여기는 이가 많았으니 대표적인 인물이 두경승이었다. 두경승은 최충헌이 명종을 핍박하자 이를 크게 반발하여 최충헌을 제거하려 하였다. 흥왕사 불상 완공식날 최충헌이 명종과 함께 참여키로 되었는데 그날 흥왕사 승려 요일과 함께 거사를 벌이려 하였으나 밀고자가 최충헌에게 무기명 투서를 보냄으로서 일이 틀어지고 말았다.
이일을 계기로 최충헌과 최충수는 명종을 폐하고 신황제를 옹립할려는 마음을 굳히게 된다. 그러나 최충수는 황족 왕진을 내심 마음에 두고 있었으며, 최충헌은 평랑공 왕민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
최충수 曰
"지금의 황상은 28년간 제위에 있었다. 황제는 늙고 또 일에 권태증이 생겼으며 게다가 소군(小君)들이 항시 성상 곁에서 슬그머니 권세를 잡고 국정을 어지럽게 하고 있다. 성상이 또한 여러 소인(小人)들을 총애하여 금과 비단 등속을 많이 주었으므로 국고가 비었다. 이렇게 하고는 백성과 신하들의 임금이 될 수 없다. 또 태자 왕숙은 여러 궁비들을 사랑하여 9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각 소군(小君)들에게 한 사람씩 의탁하여 머리를 깎아서 제자로 삼고 있으며 태자는 성질이 암둔하고도 유약해서 태자 자격이 없다. 그런데 사공(司空) 왕진은 경서와 사기에 통달했으며 위인이 총명하고 도량이 있으니 임금으로 삼는다면 나라가 중흥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사실인즉 왕진의 여종을 최충수가 사랑하고 있었으므로 그를 황제로 세우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최충헌은 曰
"평량공(平凉公) 왕민은 지금 성상의 동복 동생인데 지략이 넓고 도량이 커서 제왕(帝王)다운 인재이며 그의 아들 왕연은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니 태자로 삼을 만하다"라 하였다.
이로써 두형제의 뜻이 다르자 박진재가 나서서 曰
"왕진과 왕민은 모두다 황제가 될 만하다. 그러나 금나라에서는 왕진이 누구인 줄 모르므로 만약 왕진을 황상으로 내세우면 금나라에서는 반드시 제위를 찬탈했다고 인정할 터이니 왕민을 세워서 의종(毅宗)의 전례에 따라 동생이란 이유로 보고하여 후환이 없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라고 하여 의논이 결정되었다.
한편 걸림돌이 될 잔당등을 처리하기 위해
최충헌, 최충수는 박진재, 노석숭 및 그의 족인 김약진등과 함께 군사를 저잣거리에 집결시켜 중군(中軍)을 삼고 6위의 군사를 전후 좌우 4군(軍)으로 나누어 동서남북 거리에 주둔시키고 장졸을 파견하니 모두 성 문을 닫은 후 두경승을 호출하여 자연도로, 또 추밀원 부사 유득의, 장군 고안우, 대장군 백부공, 친종 장군 주원적, 장군 석성주, 시랑 이상돈, 낭중 송위, 염극권, 어사 신광한 등 12명과 대선사 연담 등 10여 명의 중들을 영남으로 귀양 보냈으며 홍기 등 소군(小君) 10여 명을 섬으로 정배 보냈다.
이로서 걸림돌을 제거하자 최충헌은 명종이 봉사십조를 충실히 이행하지 않고 국고를 낭비한다는 명분하에 폐하고 창락궁에 유폐시킨후 태자 왕도를 강화도로 유배보내고 평량공 왕민(신종)을 신황제로 옹립하고 정국공신 삼한대광대중대부 상장군주국이 되어 강력한 최씨 군사정권을 확립시킨다.
한편 최충수는 이의민을 제거한 공으로 수충찬화공신에 오른다. 실질적으로 이의민의 거사에 참여한 사람들은 대부분 최충수의 사람들이었다.
형과 함께 명종을 몰아내고 신종을 옹립한 공으로 수성제란공신 삼한정광중대부 응양군상장군 위위경도성지사 주국에 임명된다.
최충수는 성격이 급하여 형 최충헌이 신료들을 자극하지 않고 조심스럽게 정권을 잡아가는데 불만을 품게 된다.
한큐에 정적이 될만한 자들을 제거하고 정권의 핵심에 있고자 하였다. 이에 최충수는 태자비를 폐하고 자신을 딸을 태자비로 들이게 하는 공작을 폄으로써
최충헌과 충돌하게 된다. 최충수의 과격한 행동에 분개한 최충헌이 최충수를 나무라자 최충수는 화가 매우 났다.
이에 박진재. 노석숭을 불러 술자리에서 불만을 토로하면서 실질적으로 자신의 힘으로 정권을 잡았는데 생색은 형이 다낸다면서 마구 화를 냈다.
술자리가 파한후 박진재.노석숭이 모여 생각하길 최충수는 과격하여 그와 같이 행동하단 언제 파멸할지 모른다고 생각하고 최충헌에게 고하여 최충수를 제거하기로 마음 먹는다.
박진재. 노석숭이 최충헌을 찾아가 최충수가 군을 이을켜 난을 일으키려 한다고 고하자 최충헌은 처음에는 믿지 못하다가 세작을 풀어보니
과연 최충수의 세력들이 속속 모여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에 최충헌은 선수를 치기로 하고 수천의 사병을 동원하여 최충수의 집을 포위했다.
이런 소식을 급히 들은 최충수는 급하게 피신하여 흥국사에 가신들과 사병 수천을 끌어모았다. 일전이 벌어지고 최충수의 군이 패하자 최충수는 일기단신으로
탈출하여 임진강을 거너 남쪽에서 다시 거병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뒤쫒아온 추격병에 파평현 금강사에서 잡혀 참수당했다.
최충수를 제거한 최충헌은 일인 독제체제를 강화하였다. 그러나 반감을 가진 세력도 만만치 않았으니 저항이 끊이지 않았다.
최충수를 제거한 그해에 상장군 길인이 반란을 도모햇으면 1년후인 1198년엔 최충헌의 노비인 만적이 난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만적은 최충헌의 집안 노비로써 미조이,연복,성복,소삼,효삼등의 노예와 함께 개경 뒷산에 가서 나무를 하다가, 모인 노비들을 모아놓고 난을 일으킬 의논을 하였다.
그는 "정중부의 난 이래 나라의 고관대작은 노예계급에서도 많이 나왔다. 왕후장상이 어찌 원래부터 씨가 있겠는가, 때가 오면 누구든지 다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들은 주인의 매질 밑에서 근골의 고통만을 당할 수는 없다. 최충헌을 비롯하여 각기 자기 상전을 죽이고 노예의 문적을 불질러, 우리 나라로 하여금 노예가 없는 곳으로 만들면
우리도 공경대부 같은 높은 벼슬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는 뜻의 선동연설을 하였다. 그 자리에 모였던 노예들은 만적의 연설에 찬성하여 다음과 같은 계획을 세웠다
즉, 황지 수천 장을 정(丁)자 모양으로 오려 표지를 만들어 붙이고, 날짜를 정하여 흥국사 뜰에 모여, 관노들의 호응을 받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관노들은 조정의 청사 내에서 권신들을 죽이고, 사노들은 개경 성내에서 먼저 최충헌등의 자기 상전을 죽인 후, 노비문적을 불태워버리고 자기네들이 집권하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약속한 날짜에 모인 노예는 몇백명에 불과하였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날짜를 다시 정하고 이번에는 보제사에 모이기로 약속하였다.
그러나 율학박사 한충유의 사노중에 순정이란 자가 있었는데 순정은 차마 인정많은 한충유를 죽일수 없어 계획을 상전에게 밀고하여 거사 전에 발각되었다.
이리하여 만적을 비롯한 수백 명의 노예들이 체포되어 모두 강물에 던져져 죽음을 당하였다. 한편, 반란 음모를 밀고한 순정은 은 80냥을 상금으로 받고 양민으로 되었으며,
한충유도 합문지후라는 높은 관작을 받았다
1199년엔 최충헌은 병부상서이부지사가 되어 군사권과 인사권을 통채로 지니게 되어 명실상부한 일인자가 되었다. 이해엔 김준거등이 난을 일으켰는데 이를 평정하였다.
1202년엔 삼중대광 수대위상주국에 임명되었다. 최고의 자리에 오르자 최충헌은 암살의 두려움을 느껴 예전 경대승이 그러했던 것처럼 도방을 세워 호위무사들을 양성한다.
그해에 경주에서 별초군이 반란을 일으키는 일이 발생한다. 이에 최충헌은 스스로 추밀원사, 이병부상서, 어사대부라는 3개의 벼슬을 스스로 제수하고 직접 참전하여 이를 토벌한다.
1204년엔 말을 잘 안듣는 신종을 폐하고 태자(희종)를 옹립하여 벽상삼한삼중대광 개부의동삼사수태사 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 상장군상주국 병부어대판사 태자태사에 올랐다.
희종은 최충헌이 두려워 그를 특별한 예로 대우하여 은문상국이라 높히 불렀다. 또한 편복에 일산을 받고 궁궐에 출입하였는데, 시종하는 문객이 3000여 명이나 되었다
1207년엔 최충수를 제거한 공으로 대장군이 된 박진재 또한 세력이 커지고 자기를 찾아오는 인재들이 넘쳐나자 스스로 최충헌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으려고 모의하다 선수를 친 최충헌에 의해
사로잡혀 고문으로 각극이 끊기고 백령도로 귀양갔다가 고문의 후유증으로 곧 병사하였다.
1209년엔 학자 이규보를 발탁하여 무신정권으로 피폐해진 문운을 재흥시키려고 힘썼는데, 청교역의 관리들의 최충헌부자 살해 미수사건이 생기자 영은관에 교정도감을 설치하여
실질적인 무인정권의 중앙기관으로서 국정 전반을 감독케 했다.
1211년엔 희종이 대장군 우승경과 내시 왕준명(이당시 내시는 조선시대와 같은 환관내시가 아니라 왕의 비서격인 관료였다)을 불러들인 자리에서 최충헌의 횡포에 눈물을 흘리자
격분한 우승경과 왕준명을 최충헌을 제거하기로 맹세한다. 황제의 명을 내려 급히 최충헌을 불러들이게 했다. 궁궐 깊숙히 최충헌이 들어오자 우승경과 왕준명이 결사대를 이끌고 최충헌을 포위했다.
그러나 최충헌의 호위무사들은 도방의 인사들로 일당천의 용사들이었다. 목숨을 걸고 최충헌을 탈출시키고 호위무사들은 모두 죽는다. 격분한 최충헌은 우승경과 왕준명을 참수하고
희종까지도 폐위하고 한남공 왕정(강종)을 즉위시켰다.
강종은 명종의 맏아들로써 태자로 책봉되었으나 1197년 최충헌에게 쫒기여 강화도로 유배되었었다.
1210년에 유배지에서 풀려나 수사공 상주국 한남공에 책봉되었다가 1211년1월 황위에 올랐다. 이때 그의 나이 60이었다.
황제에 등극했으나 실권은 전혀 없었다. 명을 내려 최충헌이 머물던 흥녕부를 진강부로 고치고 최충헌에게 문경무위향리조안공신의 칭호를 주었으며, 국사전반에 관한 모든 업무를 최충헌이
별감으로 있던 교정도감에 일임하였다.
1213년엔 강종이 죽자 맏아들은 태자 왕진(고종)을 즉위시켰다.
1217년엔 흥왕사의 승려들이 최충헌이 흥왕사를 방문했을때를 기회로 암살할려고 하였으나 최충헌의 호위부대에 전멸하여 승려전원이 참수당했다.
이를 계기로 최충헌은 독재정치를 더욱더 강화했다. 정사를 궁궐에서 보는것이 아니라 자기 집에 가신들을 두어 모든 정사를 돌봤다.
또한 자신을 따르는 무리는 성의를 다해 돌바주었으나 의심이 가는 세력은 철저히 괴멸시켰다.
이과정에서 수많은 금은보화를 축재하고 수많은 사람을 죽여 민심을 잃었으나 하극상이 만연하던 사회기강을 엄격히 바로 잡았으며 나름대로 선정을 베풀었다.
또한 문인들을 대거 등용시켜 쇠퇴했던 문을 부흥시킨 업적도 있다.
최충헌의 정권이 탄탄대로에 이르자 감히 대놓고 반발하는 세력은 눈에 띄게 사라졌다.
최충헌은 나름대로 황제를 깍득히 모셔 역신을 참한다는 반란의 명분이 없었으며 공직사회의 부패도 어느정도는 사라져서 나름대로 살만한 세상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노인우같은 충신은 최충헌을 두려워하지 않고 바른말을 곧장 하곤했다.
노인우는 최충헌의 인척으로써 최충헌의 후광으로 조정에 출사했으나 최충헌의 독단에 불만을 품었다.
하루는 노인우가 거짓으로 술에 취한체하여 최충헌에게 쓰디쓴 말을 마구 쏟아냈다.
최충헌은 대노하여 그를 한직인 인주수(지방현감정도)로 보내버렸다.
세월이 흘러 노인우가 임기를 마치고 개경에 돌아왔다.
죽을날이 가까이온 최충헌은 과거의 잘못을 보상하고자 황제에게 간하길
"소신이 불가피하게 그동안 많은 부를 축적했나이다. 이제 지난날의 잘못을 바로잡고자 소신이 기거할 세채의 집을 제외한 모든 재산을 나라에 바쳐 백성을 위하는 일에 쓰고자 하나이다."
라고 말하자 노인우가 앞에 나와 말하길 "가당치 않나이다. 경의 주위엔 손벌리는 가신들이 많은데 많은 재물을 국가에 바치고 나서 손실된 재물을 메꾸기 위해 백성을 다시금 괴롭힐 작정이십니까?
그재물은 경의 여생을 위해 쓰시길 바라나이다"하고 가시어린 마을 내밷었다. 최충헌은 심히 부끄러워 고개를 들지못했다.
하여튼 탄탄한 기반을 쌓은 최충헌도 늙어 1219년에 자연사하였다.
최충헌은 죽었지만 최충헌이 남겨놓은 군사정권의 기반은 탄탄했다. 최충헌의 아들 최우는 추밀원부사로 있었는데 실질적인 1인자였다.
최우는 아버지 최충헌이 잘못했던 많은 것들을 개혁하여 먼가 자기는 다르다는것을 대내적으로 천명했다.
우선 그는 최충헌이 축재한 수많은 재물을 국고에 바쳤다. 또한 부당하게 빼앗은 노비와 땅을 원주인에게 돌려주었으며 고향에 은거했던 수많은 선비들을
다시 조정에 불러들였으며 아버지 최충헌에게 아부를 떨던 간신배들을 모조리 퇴출시켰다. 이과정에서 동생은 최향이 강력하게 반발했다.
최우는 과감히 최향을 유배보내 버리는 결단을 내렸다.
1222년엔 참지정사, 이병부상서, 판어사대사가 되어 명실공히 집정자로서의 위치를 굳혔다. 또한 국외적으로는 자주 금품을 요구하는 몽골 사신을 냉대하고, 북방의 여러 성과 개경의 황라성을 수축, 몽골의 침입에 대처했다.
1225년엔 자택에 정방을 설치하여 인사권을 장악했고, 1227년엔 서방을 설치하여 문객 중 유명한 선비들을 포섭했으며, 도방등을 확장하여 사병을 대폭 증강했다.
1228년엔 오대진국공신이 되었고, 1229년엔 격구장을 만들어 격구를 장려하였다.
또한 북방의 몽골 대군이 침공하리라는 소식에 강화천도를 단행하여 성을 쌓아 대비했으며, 그 공으로 1234년 진양후에 책봉되었다.
1243년엔 국자감을 수축하고, 쌀 300곡을 양현고에 시납, 장학에 힘쓰는 한편, 사비를 털어 대장경판 재조를 완성케 했다.
나름대로 공평무사한 정치를 하던 최우도 늙으막엔 공포정치를 하여 백성들의 원성을 샀다.
늙은 최우도 후사를 생각하게 되었다. 최우는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최항이었다. 최항은 본시 최우가 기생을 취하여 낳은 자식이었다. 최항은 출신이 미천하였으므로 좌절하여 머리를 깍고 중이 되어 쌍봉사에 들어갔다.
그러던중 최우가 후사를 생각하면서 죽기 1년전 1248년에 최항을 환속시켜 후계자 수업을 쌓게 했다.
최항에게 유명한 선비인 임익, 권위등을 스승으로 삼아 후계자 수업을 시켰다.
공직에 나가 좌우위상호군, 호부상서를 거쳐 추밀원지주사 때 아버지 최우로부터 500명의 가병을 물려받기도 했다.
최항은 스스로 인재를 끌어모아 최양백.이공주.김준.유경.유천우 같은 가신들을 거느렸다.
그러나 아버지 최우에게도 고민이 있었으니 대대로 명분세가의 적통자인 최우의 입장에서 보면 최항은 출신이 탐탁치 않았던 것이었다.
내심 사위인 김약선과 최항을 저울질하기 시작한 것이다. 김약선은 최우의 사위로써 집안이 빵빵한 명문세가의 후손이었다.
김약선은 황제로부터 신임도 두터웠고 또한 김약선의 딸이 원종의 비가 됨으로써 탄탄한 정권을 잡을수있는 기반도 충분했다.
이런 아버지의 내심을 눈치챈 최항은 매형 김약선이 눈에 가시갔았으나 어찌할수가 없었다.
그러나 김약선이 스스로 무덤을 파는 일이 발생했으니 이넘은 색을 밝히는 색마였던 것이었다.
이넘이 감히 장인인 최우의 집안에 있던 노비중 아리따운 아가씨들을 망월루 모란방에 모아놓고 음란한 짓을 벌리다
그만 조강지처인 최우의 딸에게 현장에서 딱걸린 것이었다. 최우의 딸은 바로 최우를 찾아가 울고불고 생난리를 피자
화가난 최우는 그때 놀아난 아가씨들은 모조리 유배보내버리고 김약선에게 외출금지령을 내렸다.
그러나 일은 거잡을수 없이 번져 집안에만 있던 김약선에게 최우의 딸도 그만 힘좋은 마당쇠와 정을 통하다 현장에서
딱걸려버렸으니 이를 어찌하랴. 최우의 딸내미는 겁이나 바로 최우를 찾아가 온갖 거짓말을 늘어놓으며 김약선을 원망하자
화가 머리끝까지난 최우의 명에 의해 김약선은 그만 이승을 하직하게 된 것이었다. 훗날 최우의 딸이 거짓으로 일을 꾸민것이 밝혀져 신원이 회복되었으나 이미 지나간 배였다.
얼렁뚱땅 정적이 사라져 버리자 최항은 그야말로 탄탄대로 눈부신 앞길이 보장되었다.
1249년 최우가 죽자 최항은 은청광록대부,추밀원부사,이병부상서,어사대부,태자빈객이 되어 동,서북면 병마사를 겸하는 교정별감이 되었다.
바야흐로 군권과 정권을 한손아귀에 잡은 셈이었다. 그러나 최항은 자신이 적통태생이 아닌 천한 출생임을 콤플렉스로 느끼고 있었다.
할아버지 최충헌과 아버지 최우을 따르던 무리들은 모두 명분세가의 적통후손들이었던 것이다. 이들에게 심한 콤플렉스를 느껴오던 최항은 의심병이 심했다.
그래서 눈에 조금만 거슬리는 행동을 하는 귀족들은 자주 죽이곤 했다.
특히 1250년에 전추밀원부사 주숙을 의심하여 죽였다. 이일을 계기로 최씨정권에 동조하던 많은 귀족들이 하나둘씩 최씨정권에서 떨어져 나가는 계기가 되었다.
1251년엔 최우의 정실부인. 즉 계모 대씨(大氏)를 독살했다. 아무래도 어렸을때 계모에게 구박을 많이 받고 자란 모양이다. 또한 계모와 가깝게 지내던 명문세가의 대표적인 집안인
추밀원지사 민희와 추밀원부사 김경손을 모함하여 유배보내고 유배지로 가는 도중에 죽였다. 이어 좌승선 최환, 장군 김안, 지유 정홍유등을 유배시키고, 참지정사 정안을 죽였다.
집권초기엔 자신의 부족함을 메꾸기 위해 선정을 베풀려 노력했다. 각 지방의 세금을 면제하고 부정부패의 근원지인 교정도감의 관리들을 적발하여 퇴출시켰으며, 안찰사에게 그 임무를 맡기는등
인심을 얻으려고 힘썼다. 그러나 점점 교만해져 결국 아버지가 그러했던 것처럼 사치와 향락에 젖어들었다.
국외적으로는 아버지의 정책을 이어받아 몽골과는 화친하지 않았다.
그러나 권불 십년이라고 했던가 출생상의 한계로 인하여 의심병이 많았던 소심함이 그를 일찍 죽게 만들었으니 집권한지 9년만인 1257년 병사하고 만다.
최항이 뒤를 이어 아들 최의가 정권을 잡게 된다. 아버지 최항과 뒤를 별탈없이 물려받은 최의는 아버지의 사람들을 극진히 모셧다.
그중 최양백이 유난히 최의의 신임이 두터웠는데 이를 지켜보던 김준은 불만이 있었다.
그러던중 김준이 최의에게 천거했던 송길유란 작자가 지방민을 혹사한 죄로 안찰사의 탄핵을 받게 되자 송길유를 변호할려다가 최의에게 미움을 받게 되는 일이 터졌다.
위기를 느낀 김준이 김충.유경.박희실.이연소.박송비.임연을 모아놓고 선수를 치기로 작전모의를 한다음
휘하의 신의군과 삼별초 및 도방을 동원하여 최의의 집을 급습하여 최의를 참수하고 최양백을 제거한다.
이사건이 무오정변으로써 최씨 4대 62년간의 독재정권을 종식시킨 난이다.
김준은 최씨자택에 있던 정방을 궁궐로 옮겨 설치하면서 역신 최의를 제거하고 대내적으로 왕정을 복구한다고 선포하였다.
그렇지만 실상은 김준이 정권을 잡은 새로운 군사정권인 셈이었다. 그러나 이전처럼 강력한 힘을 발휘하진 못하고 점차로 군사정권의 힘은 약해져만 갔던 것이었다.
김준은 본시 최충헌의 노비출신인 김윤성의 아들이다. 김윤성이 최충헌의 신임을 얻어 출세를 하자 최씨 집안에 충성을 다했으며 최우의 배려로 최항을 측근에서 보필하는 가신이 된다.
최항이 정권을 잡자 장군의 반열인 별장에 임명되었으며 동생이 바로 김충인데 김충도 덩달아 대정(중령쯤)에 임명되었다가 최의를 살해하고 정권을 잡은 것이다.
최씨집안의 가신들이 주인을 배반하고 정권을 잡자 정부는 이른바 집단지도체제가 되었다. 특히 김준과 더불어 유경의 힘이 막강해졌는데 김준가 김충형제는 유경의 힘을 두려워 한나머지
황제에게 참소하여 유경을 처단하였으며 유경을 따르던 많은 장군들을 숙청했다.
정권을 한손에 움켜준 김준은 온갖 권세를 누리며 잘먹고 잘살았다.
대외적으로는 그는 최씨집안의 전통을 받아들여 몽골과는 강경책으로 맞섰다. 그러나 그당시 몽골는 세계 최강으로써 점차적으로 세를 넓혀가고 있던 중이었다.
몽골에서 사신을 보내 김준의 3부자가 몽골로 와서 황제를 알현하라라는 말을 하자 대노하여 사신을 죽이게 된다.
이를 계기로 원종과 마찰을 빚게 된다. 원종은 강대국인 몽골을 자극할 생각이 없었다. 원종은 김준의 과격한 행동을 나무랐고
원종에게 꾸짐람을 들은 김준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원종을 폐하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동생 김충이 찾아와 김준을 만류했다.
그러나 이소식은 원종의 뒤에 까지 들어가 불안에 떨기 시작했다. 이를 보던 환관 김자후가 말하길 "소신이 폐하의 근심을 해결해 드리겟나이다."하였다.
(다시 말하지만 이당시의 환관 내시는 조선시대의 머없는 내시들이 아니라 왕의 비서직을 수행하던 관료였다.현제로 따지면 대통령 특별 보자관쯤)
김자후는 곧 환관 최은, 김경을 찾아가 뜻을 모은다. 최은, 김경은 평소 친분이 있던 임연을 찾아가 도움을 청한다. 임연이 쾌히 승락하고 일단의 날랜 군사를 주어 거사를 도모케 한다.
이사실을 들은 원종은 크게 기뻐하여 김자후와 계획을 도모하고 곧 김준과 김충을 궁궐에 들게한다. 김준과 김충이 궐에 들어왔을때 갑자기 김자후가 군사를 이끌고 나타나
김준과 김총의 목을 베어버린다. 호랑이 없는 굴엔 여우가 왕이라고 다시 정권을 잡은 자는 중도노선 군사정권을 표방하던 임연이었다.
임연은 김준을 처단하자 바로 야심을 들어내 최은.김경은을 처단하고 군사력을 바탕으로 정권을 잡은 것이었다. 이어 원종을 폐하고 안경공 왕창을 보위에 세운다.
또한 교정별감이 되어 정치.군사권을 한손에 움켜쥐게 되어 군사정권은 쭈욱 계속 되어진다.
그러나 원종의 측근이 몽골에 건너가 호소하자 몽골에서는 사신을 보내 원종을 복위시키지 않으면 군사적 위협을 가하겠다고 위협한다.
이에 놀란 임연은 원종을 다시 복위시켰다. 그러나 사태는 여기서 해결되지 않고 몽골은 재차 사신을 보내 임연이 직접 몽고로 와서 해명하라고 요구한다.
이에 임연은 단호히 거절하고 다시 몽골에 대한 강경책을 취하고 원종을 폐위할것을 도모한다. 이를 눈치챈 원종은 야반도주하여 몽골로 투항한다.
몽골에 간 원종은 몽골 칸과 대작하여 몽골의 군사를 이끌고 고려침공을 개시한다.
이에 임연은 삼별초와 더불어 지방으로 흩어지며 항전의지를 천명한다.
개경에 환궁한 원종은 삼별초의 해체를 선언하며 장군 김지저를 강화도에 파송하여 이를 통고하는 동시에 삼별초의 명부를 압수하였다.
삼별초는 그 명단이 몽골군에게 넘겨져 자신들을 공격할 것으로 판단하여 반란을 일으켰다.임연은 이미 병사하였고 삼별초의 실질적인 지휘관은 배중손이었는데
배중손은 몽골에 투항한 원종을 인정치 않고 승화후 왕온을 황제로 추대하고 강화도에 정권을 수립한다.
그러나 탈출자가 속출하자 배중손은 1000여천의 배에 수만의 병력을 이끌고 전라도 진도로 들어가 대몽항쟁의 근원지로 삼았다.
남해 일대의 제해권을 장악한 삼별초는 한때 거제,탐라등의 30여 도서를 지배하여 하나의 해상왕국을 이루었다.
그러나 김방경등이 거느린 고려의 관군과 몽골군으로 형성된 연합군에 의해 그 세력이 많이 꺾였다.
이렇게 되자 김통정은 삼별초의 잔여세력을 이끌고 탐라, 즉 지금의 제주도에 들어가 대몽항전을 계속하였다.
이에 고려 조정에서는 여러 가지로 회유책을 썼으나 삼별초가 끝까지 이에 불응하므로,
1273년 고려,몽골 연합군에 의한 탐라 공격으로 삼별초는 패망하였다.
이에 따라 무신정권도 종지부를 완전히 찍게 되었다.